당신이 옳다 _ 정혜신
전문직에 종사하는 40대 미혼 여성 A가 있다. 동갑내기 남자와 긴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했는데 홀로 사는 엄마의 반대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대상 포진까지 생길 정도였다. 남자는 괜찮은 직장과 높은 연봉, 수수한 외모를 가졌다. 누가 봐도 멀쩡한 남자를 반대하는 엄마의 반대 사유는 남자가 전문직이 아니어서다. 나중에 자기 딸에게 얹혀살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읍소도 하고 선물 공세 등으로 설득도 해봤지만 엄마는 완강했다. 결혼을 강행하고 싶지만 그러다 엄마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죄책감을 어쩌느냐며 눈물지었다.
얼핏 그녀는 엄마의 마음을 배려하는 효녀 같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와 엄마 사이의 경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다. 주권을 빼앗기고도 수치심이나 모멸감, 분노 등을 또렷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경계가 무너졌는데 그걸 인식하지 못한 채 불필요한 노력을 하며 진을 빼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최선을 다하는 건 공중에 대고 쏘아대는 총쏘기다. 목표물과 상관없는 사격이니 아무리 많이 쏴도 헛일이다.
그녀는 국경 수비대가 한 명도 없는 나라 같다. 엄마가 경계를 허물고 침략군처럼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의사 결정 영역까지 쳐들어 왔는데 나가라는 말도 못하고 맞서 싸우지도 못한다. 한술 더 떠 침략군은 쳐들어오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느냐며 울고 있는 것이다. 칼로 자기를 찌르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 팔은 얼마나 아프겠냐고 공감(?)하는 격이다.
자신이 찔리고 있다는 지각이 없으니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나중에 여자에게 빌붙어 살 위인’이라는 괜한 모욕감을 안겨준다. 엄마와 자기 사이의 경계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는 무례한 사람이 된 것이다. 자기 경계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 보호도 못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는 상대적인 가해자가 된다.
그녀의 엄마는 딸의 남자친구에 대해 맘에 든다, 안든다는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거기까지가 전부다. 결혼을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는 결정은 엄마의 몫이 아니다. 그럴 권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 결정권을 쥐고 있는 듯 딸이라는 타국의 국경을 허물고 들어와 그 나라의 주권을 침탈한 침략군이 됐다. 그런 상황인데도 침략군 엄마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갑 자신보다 더 갑을 염려해 주는 을이나 병 같다. 경계가 무너진 사람의 안쓰럽고 부적절한 태도다. 백번 양보해도 엄마에 대한 과잉보호다.
딸의 입장에서는 걱정돼서 그렇다고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사람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다. 사람이 개별적이고 독립적 존재라는 말은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관계의 변화에 따라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적응해 가는 존재라는 의미다. 노인이나 어린아이, 성인 누구나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독립적이고 온전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진다. 딸의 남자친구가 맘에 안 들어도 그 남자가 딸의 남편이 되고 자신의 사위가 되면 그 관계에 맞춰 사람의 마음과 판단은 또 달라진다. 달라진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고 적응해서다. 적응은 인간의 본능이다. 끝내 적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불행감은 엄마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런 대화 끝에 그녀는 결혼을 감행했다. 그녀의 엄마는 여전히 사위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건강하게 산다. 사위에 대한 탐탁지 않은 엄마의 감정은 딸이 해결해 줘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은 엄마 자신이 해결해야 할 엄마의 숙제다. 딸의 경계 바깥에서 벌어지는 엄마 영역 안의 엄마 과제다. 엄마가 힘들어하면 경계 바깥에서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딸인 자신의 책임이거나 딸이 제대로 하지 못한 무엇 때문은 아니다. 그런 경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엄마의 몫으로 돌려줘야 엄마의 감정도 딸이 개입할 때보다 더 빠르게 수습된다.
딸이 경계에 대한 인식 없이 계속 개입을 하면 엄마도 자신의 불편하고 싫은 감정이 딸 때문이라고 여기게 된다. 자신의 과제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한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엄마의 과제를 엄마에게 돌려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