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不尙賢, 使民不爭,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을 씀에 있어서 그) 뛰어남을 (일부러 일삼아) 높이(는 모양과 모습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다투(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하고,
雖用賢者, 而不露其尙賢之跡, 則可使下民, 不起爭名之心. 此, 用人之無爲也.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비록 “뛰어난” 사람을 쓸지라도 그 “뛰어남”을 (일부러 일삼아) “높이는” 모양과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야 하는데, 따라서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다투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 (위에 자리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모양과 모습이다.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얻기 어려운 재화를 (일부러 일삼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이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훔치려는 바를 일삼지 않게 해야 하며,
視難得之貨如糞土, 則可使下民, 不起盜竊之心. 此, 理財之無爲也.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얻기 어려운 재화”를 마치 똥(거름)을 낸 논밭처럼 여겨야 하는데, 따라서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훔치고” 빼앗으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재화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위에 자리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모양과 모습이다.
不見可欲, 使心不亂.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고자 할만한 바를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에게)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그것에 의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
不以可欲之事, 示之於民, 則民心, 自然不亂. 此, 治民之無爲也.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이) “일부러 일삼고자 할만한” 일이 아닌 바, 그것을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따라서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의 마음이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할만한” 일에 의해) “어지러워지지 않게 된다.” 이것이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위에 자리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모양과 모습이다.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上知如字, 下知去聲.
따라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백성의) 마음을 텅 비게 하고,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백성의) 배를 튼튼하게 하며,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한 백성의) 의지를 연하게 하고,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백성의) 뼈를 굳세게 한다. (따라서 성인은 이른바) 늘 그러하게 백성으로 하여금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인은) 이른바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이)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감히 (백성으로 하여금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일, 그것을) 일부러 일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무지無知”의 지知는 평성(平聲; 1성)의 지知이며, “지자知者”의 지知는 거성(去聲; 4성)의 지智이다.
大寧薛氏曰, 恬淡, 無思, 則心虛, 神氣內守, 則服實. 退懦, 無爲, 則志弱, 精力不耗, 則骨强. 夫無知無欲, 人心, 本如是. 故使民, 無知無欲. 只是, 反其本而已. 知者, 好生事, 以擾天下. 民, 旣無知無欲, 則雖有知者, 無事可爲也.
(명明나라 유학자) 설혜(薛蕙, 1489~1541)는 (『노자집해老子集解』에서) 일컬었다. “(그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조용하게 하고, 담박하게 해야 하는데, (따라서 그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일부러 일삼아) 헤아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따라서 (그) 마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太極·性대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텅 비게 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신령스러운 기운(氣; 自然·太極·命)이 (그 몸) 안에서 지켜지게 되고, (따라서 그) 배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性·命대로) 튼튼해지게 된다. (그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물러나게 하고, 부드러워지게 해야 하는데, (따라서 그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따라서 (그) 의지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연해지게 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면밀한 힘(力; 自然·太極·命)이 (그 몸 안에서) 줄어들지 않게 되고, 따라서 (그) 뼈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性·命대로) 굳세지게 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모양과 모습, 사람의 마음이 본래 그것과 같이한다. 따라서 백성으로 하여금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고,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렇게 하는 일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이) 그 본래의 모양과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할 따름이다. (그렇지 않고,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이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생겨나게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천하가 어지러워지게 된다.” (이른바) “백성”은 본래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데”, 따라서 (“성인”은) 비록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이)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이, (“백성”으로 하여금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고,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본래의 모양과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일, 그것을) 일삼게 한다는 것이다. 〔원문原文 말미末尾의 “上知如字, 下知去聲”로 보건대, 서명응은 명나라 유학자 설혜의 『노자집해』를 원저原著로 삼은 듯하다.〕
爲無爲, 則無不治矣.
(요컨대,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에 대한 다스림을) 일삼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하는데, 따라서 (그들을) 다스려내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爲之而無爲, 則無不治. 此, 總結上文.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아래에 자리하는 백성에 대한 “다스림”을 “일삼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하는데”, “따라서 (그들을) 다스려내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이것이 앞 문장에 대한 총결이다.
右第三章.
여기까지가 제3장에 대한 풀이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