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의 ‘띵곡’(아시는 분은 아시리라, 이 재미있는 표현의 뜻과 유래에 대해. 혹시 모르시면 포털에서 검색해 보시라.)에서는 ‘그냥 내버려 두라’(Let it be)를 ‘지혜의 말씀’이라고 노래한다. 나도 전에 젊었을 때보다도 별로 젊지 않게 된 지금 그 지혜의 말씀에 조금 더 공감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조금 더 애쓴다. 특히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 나를 괴롭히려 할 때 그렇게 한다. 모든 인간관계는 친소(親疏) 관계로 단순화할 수 있다. 친하거나 아니면 친하지 않은 상태이다. 친한 감정이 점점 더 적극적으로 강해지면 좋아하게 되고, 종래에는 사랑하게도 된다. 그리고 한 편이 된다. 친하지 않은 감정이 점점 더 부정적으로 바뀌면 싫어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을 적으로 삼는다. 우리는 가깝거나 먼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편가르기하며 살아간다.
친구 사이든 가족 관계든, 세 사람 이상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면 미묘한 감정적 역학 관계가 작용하기 시작한다. 누가 누구랑 더 친하고 누구는 누구와 더 소원하게 된다. ‘철수’와 ‘영수’ 그리고 ‘민수’가 서로 가까운 사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슨 이유에선가 그 관계의 삼각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철수’와 ‘영수’가 조금이라도 ‘더’ 친하게 되면 ‘민수’는 묘하게 왕따당한 느낌이 들면서, 그에 대응해서 그는 ‘철수’나 ‘영수’와도 친분이 있는 ‘경수’라는 사람과 더 가까워지려고 한다. 그래서 ‘민수-경수’의 관계로 ‘철수-영수’의 관계에 대응하려 한다. 이런 미묘하지만 치사한 감정적 역학 관계는 시어머니-며느리-시누이-시아버지 사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대학교의 학과 교수들 사이의 친소 관계도 치사빤쓰라 할 정도로 유치하기 그지없다. 어떤 때는 친밀하다가 금세 소원해져 적이 되고, 적이다가도 또 상황이나 조건이 바뀌면 다시 가까워져 동지가 된다. 그런 변화의 원인은 이익과 손해 즉 이해이다. 몇몇이 한 편을 구성하여 다른 편 몇몇을 비난하고 공격하다가 어느새 그 구성이 와해되어 새로운 편가르기가 진행되어 새로운 친소관계의 구도가 생겨난다.
나의 경우에 30여 년 전 젊은 시절 미국에서 함께 고생하며 공부했던 옛 친구 세 명이 몇 달 전에 다시 만나서 가까워지나 싶었는데, 묘하게 정서적 틈이 벌어지더니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해졌다. 솔직히 그 원인이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난 30여 년 동안 그중 한 친구와 나는 줄곧 서로 친밀하게 지냈는데, 비교적 최근에 다른 한 옛 친구가 거기에 새로 합류하게 되면서 삼각관계가 되었다. 그러면서 어떤 이유에선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그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해 서먹서먹하게 대하기 시작했고, 그 새로 편입한 친구를 더 가깝게 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성격상 친구 관계에 대체로 수동적인 편이라 지금 생겨난 변화에도 내가 능동적으로 역할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쪽에서의 그런 변화의 원인이 되었을 만한 이런 저런 이유를 찾아보았지만, 시시콜콜 그런 걸 따져봐야 부질없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내 자신이 그러한 감정적 변절의 주체가 된 경우도 있다. 50년 가까이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왔던 한 친구가 지난 해 언젠가부터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그런 변절에 대해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서로 사업상 이해가 얽힌 것도 아니고 일이 년 알아온 사이도 아니며 함께 젊었었고 함께 한 시대를 살아 왔고 함께 늙어오면서 수없이 여러 번 만나서 실없는 말부터 철없는 행동, 그리고 제법 어른스러운 일들을 함께 해온 친구다. 그가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가 싫게 느껴지게 된 걸까? 굳이 이런 저런 원인이나 이유를 찾으려면 찾아낼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 헛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감정적으로 내 마음속에서 먼저 생겨난 감정상의 변화이다. 오랫동안 들어온 그 친구의 말과 긴 세월 보아온 그 친구의 삶의 방식이 그냥 나의 눈과 정서에 거슬리게 된 거다. 긴 세월 동안 나는 나대로 어느 한 방향으로 기울어 굳어졌고 그는 그대로 어떤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져 굳어진 것이다. 그처럼 각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굳어가면서 젊었을 때의 정서적 유연성과 포용력을 잃어가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걸 어떻게든 바로잡아 다시 좋은 관계로 복원해야 하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역시 그냥 내버려 두고 지내기로 했다.
그처럼 치사한 역학관계 구도가 개인 간의 미시적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 그리고 북한과 중국, 러시아 사이의 친소 관계의 역학 작용을 보면 초등학생들 친구 사이의 역학 관계와 별로 다르지 않다. 북한과 러시아가 점점 우호적인 관계가 되면 중국과 한국이 가까워지려는 경향을 보이며, 한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는 한국 정권이 보수인가 진보인가에 따라서 친중 혹은 친미, 반중 혹은 반미로 상당히 출렁거리는 경향이 있었다. 요즘은 친일—반일 대립도 심하다.
특히 미움의 감정은 매우 복잡하고 내밀하여 그 실체를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나 자신과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어떤 사람, 즉 나와 직접 상관이 없는 어떤 사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미워졌다면 그리고 그가 어떤 공적인 인물이라면, 내 마음속에 생긴 그 뜬금없는 증오는 내가 오래전에 오랫동안 겪었던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미움이 내 마음속에 켜켜이 눌려 쌓여 변형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는 나와 매우 가까운 그 어떤 사람—그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는데—에 대한 미움을 마음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너무도 밉지만 미워할 수 없어서 참고 지내거나, 오히려 그를 좋아한다는 자기 착각을 억지로 불러일으키며 살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내 생활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어떤 특정 공인 혹은 정치인이 몹시 싫어졌다면 사실 그 증오의 뿌리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억눌린 미움에서 자라났을 수도 있다. 특히 가족 중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쌓여 오면서, 의지나 행동으로는 그를 사랑하거나 존중해야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의 모든 미움은 뿌리가 있을 것이니 그게 오랫동안 무의식 속에서 억눌려 있던 가장 ‘친밀한 미움’에서 생겨난 건 아닐까. 그리고 어엿한 어른이 되고나서부터는, 아마도 중년을 지나면서부터는, 그 지극히 사적인 미움을 공적인 증오로 변형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사적인 미움이 정의나 대의의 탈을 쓰는 것이다.
나는 나이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면서 인간관계로 인해 나에게 생겨나는 이런저런 문제들, 내 마음속에 나타나는 요상한 미움의 싹들을 키우지 말고 변형시키지도 말고 그냥 내버려 두고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Let it be.
첫댓글 글츄? 근디요. 생각보다 내버려 두기 쉽지 않어유 ㅎ
사교적이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이나 인간 관계의 전략은 똑 같은 것 같네요.
Let it Be
앗 저도 인간관계에 대한 글을 오늘 올렸는데요.
교수님이 쓴 심리학적 측면을 저의 경우에 더 대입을 해보고 싶습니다^^
참, 렛잇비 렛잇비 렛잇비 렛이비~~~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지네여~
사실 미운 놈을 그냥 미운 놈으로만 두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 수 있어요. 왜 미운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 될까요? 그건 그렇고, 최근 제 또래(넓게 보아 호미님도 제 또래로 취급하겠음^^) 집단에서 전 생애동안 친밀했던 친구들이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멀어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어요. 흠.. 새로 나타난 중년기의 발달과업일지도 모르겠군요.
맞아요! 저도 저만의 마인드가 '그냥 내버려두라'입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싫은 것은 싫은 것대로 렛잇비하다보면
물처럼 흘러가서 또 언제 그랬냐는듯 자연스럽게 감정이 바뀌기도 하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