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Dec. 9(금) :
Lucky였다. 기상과 해상에 있어서는! 13:00시 Italy Livorno 도착. 14:20 접안했으나 Schedule이 갈팡질팡이다. Stevedore들이 Strike 때문이다. 아무턴 Mr. Schere 말처럼 늦어도 12일 오후까지는 여길 떠야 한다. 이곳에 Super Cargo의 말처럼 14일까지 있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No.2 C D의 Banana가 Ripen하기 시작한다. 별도리 없지 않은가? 저녁에 Mr. Schere의 초대로 좋은 Restaurant에서 밤참을 즐겼다. 한 항차 자기를 대신해서 수고해주어 고맙다는 의미에서다.
Dec. 11(일) :
그리 멀지 않다는 Pisa에 가다. 유명한 피사의 斜塔을 구경하고 직접 올라가 보기도 했다. 기분이 나쁠만큼 기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뒤에 다시 한층 한층씩을 올렸다고 한다. 감회가 깊다. 계속되는 Strike로 작업을 중지. 14일까지 Waiting하기로 하다.
Dec. 12 :
간밤에 침실에 도둑이 든 모양이다. 바지가 거실에 나와 있고 호주머니의 돈이 몽땅 없어졌다. 분명히 Key도 만진 흔적이 있는데 그 밖의 것은 손도 안 댄체 그대로 있다. 아무래도 외부인의 소행 같기도 하다만 의심스러운 점도 많다. 어제 낮의 여행 때문에 깊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오후의 대아에서 온 Telex는 실망과 분노를 치밀게 한다. Capt. 1/E. OL-1 3명은 한 항차를 더 하랜다. 무슨 놈의 일 처리가 그런가 말이다. 이번 년말과 겨울 방학은 wife와 얘들과 함께 보내며 내 정성껏 보살펴 주고 싶었는데-.
입술이 부릅튼다. 과연 참고 견딜 수 있을까? 실망하는 얘들과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독히도 재수없는 날이다.
Dec. 13(화) :
대아와 집에 전화. 집에는 얘들밖에 없었다. 어쩐지 설렁한 날씨처럼 집안 자체가 추어오는 느낌이다. 아내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미안할 뿐이다. 오후 총원을 집합. 최후의 점검을 마치고 ‘Say good-by’를 하다. 저녁 노랑 영화를 보고 한잔을 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서글프고 추운 Gloomy day였다.
Dec. 14.
오전 안경을 찾다. 비쌌지만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일이었다. 2시경 출항하다.
Dec. 15.
새벽 5시 강풍 속에 입항. 생각보다 좁은 마르세이유항이었다. 옛부터 이름난 항구였기에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교대자가 오고 갈 사람은 가고- 한 동안 분산한 분위기다. 그 경황 가운데도 No.2 C deck에서 Ripen Banana가 문제. 결국 P & I Survyer를 붙였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입술은 부릅터서 당나발이 되어 있어 꼴이 말이 아니다. 시팔놈의 쪽바리 놈들, ‘貧者小人’이 거기에도 적용이 되는군.
Wife의 성의와 얘들의 편지가 코끝을 찡하게 해온다. 왠 놈의 비는 또 그리 퍼붓고 바람마져 불어잿기는가 말이다. 이 판에 -. 병원에 보낸 GS 조 군은 결국 수술을 했다는데 내일 퇴원한댔다.
Dec. 16(금) :
아침부터 심한 비바람 속에서 P & I Surveyer와 Senser 등을 점검하고 필요한 Data를 제공. 결국 본선의 잘못이 없음을 굳히게 했다. 같은 Loading Port에서 싣고 같이 입항한 Salen Charter선은 전체가 Ripen됐다고 야단이다. 역시 Abidjan Banana가 품질이 나쁘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사실임을 또 한 번 증명한 셈이다. 귀국하는 C/E가 끝까지 협조해주었다. 오후 1시 출항. 모두가 서툴음 속에 좁은 항구를 벗어나기에는 긴장된 순간순간들이었다. 교대하고 이제 겨우 하루가 됐으니 그럴 수밖에 -. Super Cargo Mr. H. Shere와는 술 한잔 나누지 못했다. 미안하기도 하다. 외항엔 강한 바람에 황파가 몰아친다. 계속되는 흔들림 속에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특히 3/O가 처음하는 일이란다. 이래저래 報國隊 신세다. 지난 이틀 동안에 다음 항차가 두 번 Fix되었다가 두 번 취소되는 변덕을 겪었다. 어찌되려나? 부풀었던 마음도 뒤죽박죽이 되었고 불야불야 Bond품도, Provision도 재청구 했었다. 有備無患이랬으니 우선은 살고 봐야지. 무슨 죽을 놈의 시련이런가. 출항 후 보내라고 준 전보가 안 된단다. 교대한 통신장이 팟죽같은 땀을 흘리며 5-6시간을 들어앉아 꿍꿍그리며 주물렀던 모양이다. 아이구야 ~. 이게 내 마지막 시련이어야 한다. 더 이상은 없어야 한다. 67.5Kg까지 다시 내려간다. 똥구멍도 따갑다. 그야말로 우거지상이다.
Dec. 17(토) :
어제보다 바람도 바뀌고 해상도 시든다. 아직도 다음 항차는 Unfix 된 체 내일 아침이면 Gibraltal에 닿는다. 그대로 Passing 할 것인지 아니면 Waiting 할 것인지? 혹시 Moroco의 Comanav에서 다시 용선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Cable뿐이다. 겨우 한숨 돌리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Main Eng.을 Stop해야 겠단다. 참 환장할 일이다.
Dec. 18. :
11시경 부득이 Gibraltar East Side에 닻을 내렸다. UNRI의 Order는 없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날씨가 나쁘다는데 건너 뛸 수도 없는 일. Gibraltal Port Control의 허가를 받아서 기다리기로 하다. 저녁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불어재낀 돌풍은 시속 90K't(초속 45m)로 난생 처음 당해 보는 바람이고 기세였다. 과연 이런 바람도 있는가 의심이 간다. 지구 전체를 날려버리는 듯도 하다. 앞을 막아선 지부랄탈 바위가 어쩌면 우리쪽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조차 든다. 다리가 떨리고 진땀이 등과 손바닥에 흥건해진다. 거대한 바위덩이 뒤인지라 파도가 없었기에 천만다행이지 만약 파도까지 밀려왔다면 상상을 불허했을 판이다. 무섭다. 악몽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것도 참으로 이상한 자연현상이다. 새벽 2시부터는 그렇게 강하던 바람이 칼로 벤 듯이 멈춘 바람과 풍향의 전환은 아마도 부근에 저기압 중심이 지나간 듯 싶기도 하다만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인 겨울철의 비와 함께 그 매운 진가를 맛본 셈이다. 갈수록 긴장이 센 바람을 탄 연줄처럼 팽팽해 온다.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 재작년 5월 독일 Hamburg 병원에서 가졌던 그런 느낌이 되살아난다.
Dec. 19 :
UR로부터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Gibraltal에서 대기하란 Order이다. 뭔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오후에 전 선 원을 집합. 일장훈시(?)를 했다. 비록 한 항차를 마치면 교대할 몸이지만 이제 막 교대한 선원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저녁때부터 다시 불기 시작한 또 한 번의 강풍과 억수 같은 폭우는 밤 9시까지 계속한다. 정말 미칠 지경이다. 이러고만 있어서 어떻하란 말인가? 한 항차가 무사히 끝나기는 틀린 것만 같은 느낌이고. 그저 생으로 말라가는 느낌이다.
Dec. 23(금) 1983 ;
잔잔한 바다,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지만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예정없는 선내생활에서 오는 불안, 더구나 Master로서는 더없이 안타까운 시간 시간이다. 내일이 X-mas eve인데-. 만인이 하늘의 축복 속에 즐기고 축하 받는 날인데-. 이게 뭔가? 얘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UR에 문의한 Cable에 대한 회신이 왔다.
역시 Moroco to NWC/UK/SOV. Baltic인데 27일 Casablanca에서 Delivery란다. 묻지 않았드라면 26일까지 그냥 기다릴뻔 했지 않은가. 다소 마음이 놓인다. 허나 아직은 Disport도 미정이다. 그것은 곧 내가 Wife와 얘들을 언제 만날 수 있는냐와 직결된 절박한 문제다. 만약 양하지가 NWC라면 나는 84년 1월 10일경이면 부산에 도착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에 SOV(소련)가 된다면 -. 절망이다. 제발 그것만은 -.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깅을 하다.
Dec. 24. :
새벽 2시 2/O의 깨움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항해 도중 연료가 떨어진 작은 Speed Boat 하나가 표류하다가 본선에 구조를 요청해 왔다. 거기엔 꼬마를 데리고 있는 부자간이 타고 있다. 피로한 기색이 역역하다. 특히 꼬마의 표정이 안쓰럽다. Gibraltal Port Control과 연락, 구조를 요청했으나 경비 때문에 포기. 기상악화의 염려는 있는데 무작정 잡아 둘 수도 없다. 물과 식사, 장갑, 담배 등을 주고 가까운 해안으로 저어 간다고 해서 보냈지만 자꾸만 바람과 조수에 떠밀려 육지와 멀어져만 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겨우 부근을 지나던 작은 어선에 구조되는 것을 봄과 동시에 안도의 숨을 쉬긴 했지만 너무 박절했음에 후회가 따르기도 했다.
COMANAV에 Cable. Loat port가 Casablanca로 Fix 되었음을 확인하다. 저녁에 출항하도록 Schedule를 잡다. R/O가 너무 엉성해서 염려다. 교대하고 간 吳 통신장의 충고가 없었드라면 화를 내도 많이 냈을 것이다. Cable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찌 통신사라고 하겠는가. 3/O도 마찬가지. 완전 초짜다. 그저 괴롭고 지루할 뿐이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도 없는 일. 어쩔 것인가?
Dec. 25. :
06:30시 모로코의 카사불랑카 외항에 닻을 내렸다. 의외로 많은 선박들이 대기중이다. 다행이 오후 5시에 T-6에 접안하자 대강의 일정이 잡힌다. 소비에트 행이 아님을 두 번 세 번 다짐을 했다. 다행이다 무엇보다. 서독의 Bremen 아니면 Franco라고 한다. 그렇다면 1월 초순이면 끝이 난다는 결론이다. 믿어도 될까? 29일이 ETD랬다.
Dec. 26 :
積荷 시작.
Dec. 27 :
아침부터 3/O를 불러 꾸짖다. 뭔가 서로 협조도 안 되고 순서도 없다. 맞은편 부두의 흰 광석가루가 계속 온 항 구를 뒤덮는다. 콧구멍이 찍찍하고 머릿칼이 뻣뻣해진다. 꼼짝 할 수가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왼 배가 흰 먼지 속에 멱을 감는다. 오직 마음이 달리는 곳은 한 곳. 집이 있는 부산뿐이다. 더 이상의 Schedule 변경이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 아무래도 Tomato Cargo의 도착이 지연, 29일 오전까지는 걸리겠다는 Agent의 News다.
Dec. 28. :
양하항이 독일의 Hamburg로 바꾼다. 그거야 OK다. 오히려 잘 됐다. 역시 토마도의 출하가 늦어진다. 잘 되면 오늘 출항이 될 것도 같다만. Hamburg 도착예정이 1월 1일 저녁으로 잡는다. 대아, Anglo OCC에도 Telex했다. 년말 연시에 지장이 없을는지? 시불헐 놈들!
Dec. 29. :
12시 출항. 무엇보다 그 놈의 허연 먼지, 전 항구를 뒤덮던 그 먼지를 벗어날 수 있다는데 속이 시원하고 콧구멍부터가 확 뚫린다. Pilot가 “당신들은 여길 떠서 곧 씻어 내면 그만이지만 우린 계속이러니 죽을 지경이라”고 한 말에 이해와 동정이 간다.
ETA Hamburg는 새해 2일 12:00로 보내다. 매사 잘 될거다. 그토록 기원을 했는데-. Weather Report에 나타난 해상도 더없이 좋다. 공연히 잠을 설칠 것만 같은 밤이다.
Dec. 30(금) 1983 :
내일이면 이 한해 1983년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는다. 아무튼 용케 보냈다. 대아로부터 교대자 보낸단 Cable.도 있었다. 선뜻 믿어지지가 않지만 믿어야지. 2일 도착이고 3일 출항인 모양. 어쩌면 모처럼 엄마 제사에 참석할지도 모르겠군. Biscay Bay 부근에서 겨울철 이렇게 날씨가 좋은 것은 天佑神助가 아닐는지-. 저절로 ‘Thank you’ 소리가 나온다. 돌이켜 보면 24일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 내 인생의 Life Cycle이 이제 다시 상승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인수인계를 위한 서류도 마쳤다. 저녁에 BSN 방에서 독한 Whisky를 몇 잔 마셨다.
84년 1월 5일 M/V Raffia Universal을 마감했다. 3명이 함부르그에서 대한항공편으로 스위스의 츄리히를 경유 귀국 한 것으로 기억된다. 도중 츄리히공항에서 환승하기 위해서 1박. 공항에 언어소통의 문제로 5시간을 나가지도 못하고 기다린다던 한국 어선 선원들의 통역을 현지 여직원의 부탁으로 해결해 주기도 했고, 마땅히 대한항공 직원이 직접 마중을 나와 호텔을 안내해야 함에도 직원은커녕 콧베기도 안 보였고 연락도 안 되었기에 이튿날 엄중히 항의하며 수속비로 낸 $5를 내라고 고함을 친 일도 있었다.
항공기가 사우디를 경유함으로 엄청난 시간이 걸린 것도, 사우디에서 탄, 이고 진 짐 투성이의 근로자들의 모습들도 보았고, 외국어를 못해 굴러 떨어진 과장 자리도 못 받고 귀국하는 게 후회막급하다며, 앞 뒤에 앉은 독일인 기술자와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어찌 그리 영어를 잘 하냐고 묻던 김해 출신의 젊은 트럭 운전자의 기억도 남는다. 귀국 후 아프리카 마푸토에서 맹장염 수술로 겨우 살아난 기관부 최 군이 사는 자기 형 집에 초청, 밥 한 끼를 먹은 기억이 있고, 그가 고맙다고 사 준 술 한 병은 2021년 7월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다.
|
|

첫댓글 참 지랄맞다.
웬만하면 육상근무
해볼마음 다지라고 했건만 그저 역마살이 끼였는지 스스로 주체 못하니 타고난 팔자인지, 스스로 얽어 맨 동아줄 인지
알길이 없네.그래도 무사히 오고갔으니 천지신명이 돌봐 주심이라 여기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