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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과정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온 국민이 <국부(國父) 이승만>을 추앙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은 다소 맥이 빠졌으나, 이와 달리 난립한 부통령 후보들의 선거전은 열기를 내뿜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친 이승만’ 점수를 내세우는 이승만 덕 보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위대하신 민족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밀어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아니다, 내가 진짜 이승만 박사의 충성스러운 일꾼이다”
“아니다, 나도 친히 점찍어 주셨다.”
전쟁 중에 휴전협상과 남북통일 등 국가적 과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도 국정공약이나 정책경쟁은 찾아볼 수 없이 이승만 후보의 선택받은 부통령이 누구냐에 집중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 후보는 자유당 내의 원내파와 원외파 간의 파벌싸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나는 어느 누구도 부통령으로 지명한 일이 없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같은 당의 이범석 부통령 후보를 밀어내려고 시도했다.
이는 정부와 자유당 내에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던 이범석 후보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이승만 대통령 후보는 결국 조직이 없으면서도 과거 자신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토대로 무소속 함태영 부통령 후보를 음성적으로 지원해 그를 부통령에 당선시키는 이변(異變)을 연출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건국 때부터 총리와 장관직을 주고받으며 이승만 정부를 이끌어온 <영원한 맞수>로 선거 총사령탑인 장택상 국무총리와 그의 라이벌 이범석 후보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도 작용했다.
당시 장택상 총리는 이범석 후보의 선거운동을 알게 모르게 견제하며 이승만의 숨은 카드인 함태영 후보를 일방적으로 지원한데도 한 몫을 하였다.
실제로 선거가 끝난 후 이범석 후보가 장택상 국무총리에 대해 선거를 방해했다고 고발하는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국가비전과 같은 선거공약은 뒷전
불과 8일 간에 불과했던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각 후보자들이 벌인 선거 방식은 선거벽보나 포스터를 곳곳에 붙이고, 현수막을 내걸며, 거리의 유세차량을 이용한 가두방송을 하고, 길거리에서 지지행진을 하는 정도의 초보적 선거방식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또 이때만 해도 정당정치가 뿌리내리기 이전이어서 대통령 선거 구호나 슬로건도 뚜렷하게 없었으며, 전국적으로는 유일한 미디어로서 라디오방송이 있었으나 선거방송으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당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 대통령은 다른 후보자에 비해 월등히 높은 지명도와 함께 전국 40개 애국단체들로 구성된 <재선(再選)추진위원회>가 주축이 돼 단체별로 지방의 조직체계를 통하고, 또 내무부장관의 지휘아래 지방 행정망과 경찰 조직을 통해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대통령 후보자들이 내세운 공약을 보면 당시 전시(戰時) 상황인 점을 고려할 때 어떻게 전쟁에 임할 것인지, 남북통일의 방안은 무엇인지, 어려운 민생은 어떻게 보듬을 것인지 등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국가비전과 같은 대승적인 선거공약은 눈에 띄질 않았다.
집권여당인 2번 이승만 후보에 도전자 입장인 1번 조봉암 후보는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특권타파와 책임정치 실현을 주장하며 이승만 후보의 재선을 막아야 한다고 호소하였고, 3번 이시영 후보는 법에 의한 정치와 이를 위해 권력을 가진 집단을 배제할 수 있는 내각책임제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지막 4번 신흥우 후보는 공직기강 쇄신과 예산균형 추구를 통해 국정을 쇄신하겠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해 자유당의 2번 이승만 후보는 불출마 성명을 몇 차례 냈으나 무려 350만 명의 국민들로부터 재출마 요청을 받고 이러한 민의를 거역할 수 없어 재출마하게 됐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8일 간의 짧은 선거운동 기간에 오늘날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아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어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밖에 당시에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선거관련 상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범석 후보 낙선 공작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특정 정파의 후보로 나서는 게 아니며 따라서 특정 부통령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사실상 이범석 부통령 후보를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선언 이후 원외자유당은 당내 청년 세력들이 급속도로 연쇄 이탈, 기반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뒤로는 함태영 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공작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택상(張澤相) 국무총리와 김태선(金泰善) 내무부장관, 윤우경 치안국장 등은 7월 28일 시․도 경찰국장 긴급회의를 열고 “이승만 대통령은 함태영을 부통령으로 원한다.”며 모든 경찰력, 행정력을 동원해 당선시킬 것을 하명했다.
그 후 경찰은 이승만과 함태영 후보를 제외하고 이범석을 포함한 다른 후보들의 포스터를 이런 저런 명목으로 떼어냈으며, 공무원들과 선거 참관인들은 유권자들에게 함태영을 뽑도록 압박하고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미리 확인까지 하는 등 갖가지 부정이 벌어졌다.
친여 후보 난립
이승만 대통령이 이범석 후보를 러닝메이트로 거부한 이후, 여권 성향의 다른 부통령 후보들은 각자 자신이 이승만의 러닝메이트 자리를 꿰차기 위해 노력하였다. 부통령 후보자 9명 중 조병옥, 전진한, 정기원 등 3명을 제외한 전원이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3․1 독립운동 당시 막후에서 힘쓰다 검거돼 3년간 복역했으며, 심계원장을 지낸 함태영 무소속 후보를 부통령으로 낙점한 상태였다.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자 ‘원내 자유당 합동파’의 리더였던 이갑성 후보가 원내 기반 및 전국적 정당 조직을 바탕으로 주요 후보로 부상할 수 있다는 관측을 받기도 하였으나, 점차 약세를 드러냈다.
조선민주당의 이윤영 후보 역시 이승만이 그를 선택할지 모른다는 관측 속에 유력 후보군에 들기도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도 얻지 못하고 이북 출신 유권자와 기독교계의 지지 또한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후보는 국민의 절반이 여성인 만큼 그에 가까운 득표를 자신한다고 밝혔으나, 여성계로부터 특별한 호응을 얻어내지 못하고 군소후보로 전락했다.
민주국민당의 상황
출마 전부터 민주국민당의 러브콜을 받았고, 무소속으로 입후보를 선언한 뒤로도 민주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것처럼 보였던 이시영 후보는, 7월 30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민주국민당과 연대해 나온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민주국민당과 연대할 일이 없을 거라고 천명하며 민주국민당 후보설을 부인했다.
민주국민당 소속의 조병옥 부통령 후보가 이시영 절대 지지를 선언한 것과는 다른, 이 같은 이시영의 발언에 민주국민당이 실은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으나, 이시영 후보는 8월 1일 조병옥과 공동 성명을 내고 선거 연대를 발표하였다. 이후 두 후보는 선거 유세를 함께 다니는 등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시영 후보는 조선시대 때 청렴결백한 관직 생활과 이후 독립 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인해 유림 및 보수층․노인층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조병옥 후보는 민주국민당의 사무총장을 맡는 등 탄탄한 당내 기반을 두고 있었고, 당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선전(善戰)이 기대되었다. 실제로 선거 당일까지도 조병옥 후보는 양자 구도 혹은 3자 구도에는 들어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민주국민당은 창당 때부터 특권층, 부자들의 정당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확장성의 한계를 드러냈다.
야권 단일화 논의
무소속 조봉암 후보 자신은 원래 출마할 계획이 없었으며, 야권 후보가 필요하단 생각에 이시영에게 출마를 종용하러 갔었는데 이시영이 거절하며 도리어 자신에게 출마를 권해 나오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런 이시영이 돌연 입후보한 것은 기이한 일이며, 아마 이시영 후보가 얼마 안 가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야권 단일화에 응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시영 후보는 자신이 조봉암에게 예의상 인사치레로 해 준 말이라며 조봉암 후보가 단일화를 성사시키려고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이라며 맹비난해 조봉암 후보와 진실 공방을 벌였다.
조봉암 후보 사상 논쟁
민주국민당 조병옥 후보는 조봉암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고 만약 그의 선전(善戰)이 예상될 경우 이승만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조봉암 후보는 자신에게 제기된 사상 논쟁에 대해 “농림장관, 민의원 부의장, 국회 임시의장을 할 때에는 아무 말도 없다가 대통령을 하려고 하니 공산당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필요하면 아무 말이라도 하는 부패 세력의 상투적 방식”이라며 의혹을 제기한 민주민국당 측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선거 결과
제2대 대통령 선거는 총인구 2천 만 명 가운데 유권자가 820만여 명인데, 그 중에 720만여 명이 투표해 88.1%라는 아주 높은 참여율을 보여주었다
이 선거에서 당초 예상대로 전국적으로 높은 인지도와 함께 관권을 장악한 이승만 후보가 74.62% 득표로 다른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승리하였다.
그는 임시수도인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55.9%, 전라북도 65.9%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70~80%대의 지지를 받아 무난히 재선 대통령의 고지에 오른 후 “나의 일생은 투쟁의 역사며, 진리와 대의가 승리했다”라고 승리의 소감을 밝혔다.
【제2대 대통령선거 투표결과】
득표순위 | 기호 | 성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비고 |
1 | 2 | 이승만 | 자유당 | 5,238,769 | 74.61 | 당선 |
2 | 1 | 조봉암 | 무소속 | 797,504 | 11.35 | |
3 | 3 | 이시영 | 무소속 | 764,715 | 10.89 | |
4 | 4 | 신흥우 | 무소속 | 219,696 | 3.12 | |
총투표인 수 | 7,275,883 | |||||
총선거인 수 | 8,259,428 | |||||
투표율 | 88.1% |
—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키백과 재편집
【제2대 대통령선거 시․도별 투표결과】
구분 | 조봉암 후보 | 이승만 후보 | 이시영 후보 | 신흥우 후보 | 합계 |
서울 | 25,631 | 205,300 | 14,883 | 3,923 | 249,737 |
경기 | 44,967 | 657,174 | 34,704 | 12,891 | 749,736 |
강원 | 10,516 | 366,583 | 13,378 | 6,305 | 396,782 |
충남 | 56,590 | 636,061 | 58,754 | 20,947 | 772,352 |
충북 | 25,875 | 386,665 | 23,006 | 10,409 | 445,955 |
전남 | 99,885 | 823,587 | 165,245 | 30,677 | 1,119,394 |
전북 | 109,490 | 468,220 | 96,271 | 36,221 | 710,202 |
경남 | 288,654 | 693,523 | 211,544 | 58,586 | 1,252,307 |
경북 | 129,791 | 921,988 | 140,271 | 37,100 | 1,229,150 |
제주 | 6,105 | 79,668 | 6,659 | 2,637 | 95,069 |
득표율 | 11.35% | 74.61% | 10.89% | 3.12% | 100.00% |
—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키백과 재편집
한편, 제3대 부통령 선거는 자유당 이범석 후보를 누르고 이승만 후보의 지원을 받은 함태영 무소속 후보가 당선됐다. 개표 초반에는 이범석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양강 구도를 이루며 각축을 벌였으나, 최종 개표 결과 함태영 후보가 승리를 거두었다.
무소속 함태영 후보는 경기도, 강원도, 충북, 전남, 경북, 제주도에서 승리한 반면에 자유당 이범석 후보는 서울을 비롯해 충남, 전북, 경남도에서 지지세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3대 부통령선거 투표결과】
득표순위 | 기호 | 성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비고 |
1 | 2 | 함태영 | 무소속 | 2,943,813 | 41.3 | 당선 |
2 | 9 | 이범석 | 자유당 | 1,815,692 | 25.5 | |
3 | 4 | 조병옥 | 민주국민당 | 575,260 | 8.1 | |
4 | 3 | 이갑성 | 자유당 합동파 | 500,972 | 7.0 | |
5 | 1 | 이윤영 | 조선민주당 | 458,583 | 6.4 | |
6 | 8 | 전진한 |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 302,471 | 4.2 | |
7 | 5 | 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190,211 | 2.7 | |
8 | 6 | 백성욱 | 무소속 | 181,388 | 2.5 | |
9 | 7 | 정기원 | 무소속 | 164,907 | 2.3 | |
총투표인 수 | 7,133,297 | |||||
총선거인 수 | 8,259,428 | |||||
투표율 | 86.4% |
— 자료/위키백과
2.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취임식
1952년 8월 15일(금) 오전 10시, <제2대 이승만 대통령과 제3대 함태영 부통령 취임식>이 <제7회 광복절 기념식>을 겸해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그 당시에는 38선을 축으로 밀고 밀리는 전투가 끊이지 않는 전쟁기간이었다. 아직 서울로 복귀하기 전이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취임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서 취임식을 갖기로 결정했다.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취임식이자 휴전협상이 한창 진행 중에 열리는 취임식이어서,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에서 휴전협상 반대와 국토통일의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자는 의도였다.
취임식이 열리는 8월 15일, 한 여름의 서울 거리는 일찍 밝아왔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일제히 나부끼고, 이날의 국가적 경사를 가까이서 축하하기 위해 아침부터 중앙청 광장과 가까운 세종로 거리로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오전 10시가 가까워오자 기마경찰대를 선두로 이승만 대통령이 육해공 3군 군악대의 주악 속에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중앙청 광장에 마련된 취임식장에 도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식장 안팎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자리하자 오전 10시 정각에 장엄한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국민의례에 이어 제2대 대통령의 취임선서를 위하여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이 국회 개회를 선언하였다. 이때 취임식장 상공에는 6대의 비행기가 ‘축 대통령 취임’의 플래카드를 나부끼며 지상과 호응하여 대통령 취임 축하비행을 하였다.
이때 등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당초 예정에 없던 목사출신 배은희(裵恩希) 의원에게 먼저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배은희 의원의 짧은 기도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맡은 바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하였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취임사를 통해 “통일 없이 공산당과는 한 땅에서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온 국민의 염원인 남북통일의 대업(大業)을 기필코 달성하자.”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 임하고 있는 일선 장병과 참전 연합국에 감사를 전하고, 특히 자유세계의 단결을 강조한 후에, 멀리 일본 도쿄에서 날아 온 UN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대장을 소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소개를 받고 등단한 클라크 총사령관은 축하 인사말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축하하고, “국제연합군은 우방국들과 힘을 합쳐 공산주의자들을 퇴치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번영과 안전을 누리고,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역설해 열띤 박수를 받았다.
이어 한동석(韓東錫) 총무처장이 등단해 대한민국 대통령을 내외에 상징하는, 새로 만든 대통령기(旗)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정(進呈 ; 나아가 드림)한 후 이화여자중학교 합창단의 <대통령 찬가> 합창, 정․부통령과 클라크 장군 부부에게 꽃다발 진정, <광복절 노래> 합창,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택상(張澤相) 국무총리의 선창으로 참석자 모두 ‘대한민국 만세!’, ‘이 대통령 만세!’를 각각 3창한 후 취임식이 모두 끝났다.
한편, 취임식을 마친 후 이승만 대통령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복궁 경회루에서 경축다과회와 세종로에서 국군장병 사열식(査閱式)을 거행하였으며, 이밖에 경축예술제, 재소자 특별가석방, 서울 소재 학생들의 거리행진 등을 통해 대통령 취임을 축하했다.
이번 2대 대통령 취임식부터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가 구성돼 그 일원인 총무처(總務處)가 주관부처로서 취임식을 준비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이날 취임식 사회는 총무처 전례(典禮)과장이 맡았으며, 그 진행 절차는 다음과 같다.
【제2대 대통령 취임 및 제7주년 광복절 기념식 진행 개요】
◇ 일시 : 단기 4285년(서기 1952년) 8월 15일(금요일), 오전 10시
◇ 장소 : 중앙청 광장
◇ 진행 순서
1. 개식 선언
2. 주악(육해공 군악대)
3. 국기에 대한 경례
4. 애국가 봉창
5. 묵념
6. 민의원 의장 개회사
— 배은희 의원(목사) 기도(* 당초 식순에는 없었음)
7. 대통령 취임선서
8. 취임 및 기념사(대통령)
— UN군총사령관 클라크 대장 취임 축하인사(*당초 식순에는 없었음)
9. 대통령기(旗) 진정(進呈)
10. 대통령찬가 합창(이화여중 합창단)
11. 정․부통령 및 클라크 총사령관 부부에게 꽃다발 진정
— 국무위원 일동, 민의원의장, 대법원장, 기타
12. 광복절 노래(이화여중 합창단)
13. 만세삼창(국무총리)
14. 주악(육해공 군악대)
15. 폐식선언
❙제2대 대통령 취임 및 광복절 기념식 세부진행 절차
1. 개식 선언(사회 : 총무처 전례典禮과장)
“지금부터 대통령 취임 및 광복절 기념식을 거행하겠습니다.” |
2. 주악(육해공 군악대)
3. 국기에 대한 경례
4. 애국가 봉창
5. 묵념
6. 개회사 : 신익희(申翼熙) 민의원 의장
“다음은 민의원 의장의 개회사가 있겠습니다.” (사회자) |
— 신익희 민의원 의장, 개의 선언(상오 10시 5분 개의)
<개회사>
“지금부터 헌법 제54조의 규정에 의해서 대통령의 선서를 행하기 위한 국회를 개회합니다. (의사봉 3타) 우리 3천만이 존경하고 신임하는 이승만 박사 …… 이번에 획기적 민선 보통의 선거로 인해서 500여만 표의, 다른 역사에 드물게 보는 전 국민의 신임 투표로써 다시 대통령에 재선되셨습니다. 헌법 규정에 의지해서 취임에 제(際)해서 국회에서 선서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
— 개회사가 끝나자 상공에는 6대의 비행기가 ‘축 대통령 취임’의 프랑카드를 나부끼며 축하비행을 함
7. 대통령 취임선서
“다음은 대통령각하의 선서가 있겠습니다.” (사회자) |
—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기 전에, 배은희 의원을 단상으로 나오게 했다.
“배은희 목사, 잠깐 나와주시면 좋겠어요. 이 얘기는 순서에 없는 것이지만 내가 특별히 요청해서 잠깐 여러분에게 말씀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안 섬기든지 잠깐 기도합시다.” |
<배은희 의원(목사)>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 이날은 저희 민족으로서 광복이 있는 역사적인 날이올시다. 이 나라의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 박사로 하여금 하나님과 주권을 가진 국민 앞에서 뜻을 지을 기념식을 거행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원컨대 이 대통령에게 지혜와 총명을 다 주셔서 민주 우방과 더불어 남북통일의 성업을 하로바삐 완수케 하옵시며, 상하 양원으로 더불어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백년대계를 완수케 해 주시옵기를 바라옵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 배은희(裵恩希, 1888~1966) 의원 : 대구 달성 출신 2대 국회의원, 목사
— 이승만 대통령이 단상 연대 앞에서 <헌법 제54조> 규정에 따라 오른손을 펴서 들고 취임선서를 행함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선서>
“선서, 나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합니다.” |
<신익희 민의원 의장 폐회사>
“지금은 대통령의 선서가 끝이 나서 국회는 이로 산회합니다.” (의사봉 3타) |
<상오 10시13분 산회>
8. 취임 및 기념사
“다음은 취임 및 기념사의 말씀을 대통령 각하께서 하시겠습니다.” |
— 등단 때 일동 박수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 및 광복절 기념사>
“일기가 매우 더워서 여러분을 오래 서 있으라고 할 수가 없어서 순서를 대단히 간략히 하겠습니다. 오늘 취임식에서 내가 다시 지게 되는 책임은 내가 할 수만 있으면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나간 4년 동안에 행한 정부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앞으로 오는 일은 좀 쉬우리라고는 볼 수 없는 터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국민이 이 위험한 때를 당해서 정부 관료나 일반 평민이나 너 나를 물론하고 누구나 각각 나라의 직책과 민족의 사명 외에는 다른 것은 감히 복종할 생각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당한 노력과 고초를 우리들이 피하고 우리 몸의 평안과 마음에 원하는 것을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할 수 있는 대로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할 것입니다. 밖에서는 노력해서 이남 이북의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릴 일을 하든지, 전쟁에 나가서 악독한 원수를 쳐 물리치든지 노력하든지, 정부에서 무슨 직책을 맡아 진행하도록 하든지 각각 실수하거나 실패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다 희생적으로 공헌할 때입니다. 모든 한인(韓人) 남녀는 다 같이 사명을 맡아서 고상(高尙)하고 영웅스러운 공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백만 명의 반수(半數)되는 우리 청년들이 희생적 제단에 저의 생명을 바쳐서 냉정한 담량(膽量)과 백절불굴(百折不屈)하는 결심으로 무도한 공산당의 침략(侵掠)에서 우리를 구해내기 위하여 싸우는 중입니다. 1천만 우리 동포는 가산(家産)을 잃어버리고 도로(道路)에 방황하니 무염지욕(無厭之慾)을 가진 적군들이 우리를 정복(征服)하자는 희망으로 파괴 소탕(破壞掃蕩)한 중에서 살길을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북에 7백만 우리 형제자매들은 적색 학정(赤色虐政) 아래서 피를 흘리고 애통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다 구해내지 않고서는 잠시라도 평안히 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불의(不意)한 전쟁의 참혹한 전재(戰災)로 우리나라는 거의 다 적지(赤地)가 되었으니, 2백만 우리 동포가 잔혹한 사상(死傷)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반도의 한 가족도 비참한 지경(地境)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게 되었으며, 각각 우리의 포악한 원수들의 죄를 징벌하고 우리 파괴된 나라에서 몰아내라는 요청을 하기에 정당한 이유를 안 가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환난(患難)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경력(經歷)으로 배운 것이 있으니 이것은 곧, 동족상애(同族相愛)와 호상원조(互相援助)의 뜻을 깊이 배운 것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가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우리 몸을 둘째로 생각하든지 아주 잊어버린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런 애국심과 통일정신으로 우리나라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모든 파괴 중에서도 전보다 몇 갑절 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충분히 훈련받고 무장한 국방군이 준비되어서 육지와 해면(海面)과 공중에서 모든 방면으로 전투력이 증가되며, 무기(武器) 무장(武裝)이 날로 구비(具備)해지는 것이니 이 용감한 군인들은 모든 연합군의 사랑과 칭찬을 받으며 우리 원수들이 미워하며 두려워하고 우리 민중의 영원한 감격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민국(民國)의 방패가 되어있느니 만치 우리는 어디까지든지 이 사람들의 뒤를 받치도록 맹세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앞으로 당하는 몇 해 동안은 우리의 해결할 문제가 중대하고 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위로되는 것은 이 문제를 우리가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53개 자유국들이 우리 옆에 서서 나가기를 보증한 것입니다. 또 16개국의 군인들이 우리 땅에서 같이 서서 원수들을 쳐 물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반도에서 일어난 어려운 문제는 세계에서 공동의 투쟁과 충돌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려운 문제를 정복(征服)하기에는 우리의 도움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우리 도시와 우리 집에서 싸워나가느니 만치 우리나라를 재건하기에도 다수의 우리의 희생과 우리의 쉬지 않는 노력으로 성취할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방들이 우리를 도와주는 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직책을 더욱 행할수록 우리 친우들이 더욱 감동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들이 더 희생할 것입니다. 이 두 해째의 난리를 겪은 뒤에는 우리의 첫째 직책은 전쟁 전선(戰爭前線)에서 할 일입니다. 우리가 승전해서 원수들을 다 항복 받을 때까지 우리는 쉴 수도 없고 끝도 없는 것입니다.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장군과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장군은 우리에게 선언하기를, “우리 땅에서 토굴을 파고 있는 공산군이 어떠한 강력(强力)으로 우리를 쳐들어오든지 우리는 능히 정복시킬 결심과 능력이 상당(相當)하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 때와 그 후에라도 우리가 행할 보편적 목적은 악독한 원수들이 우리에게 피를 흘리게 한 상처를 합창(合瘡)시키는데 있을 것입니다. 국제연합 제국(諸國)과 우리의 가장 친절한 우방인 북미합중국이 여러 번 선언하기를, 자기들의 목적은 우리와 같다고 한 것이니, 즉 우리 대한(大韓)이 통일 독립 민주국가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통일의 목적을 완수해야 되겠다는 구체적 방책을 확실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얼마쯤은 우리 원수들의 정략(政略)과 계획에 달렸지만 동시에 우리의 마음속에 맺힌 결심과 담량(膽量)과 목적이 얼마나 공고한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단언하는 것은 우리 한국은 분열되거나 얼마쯤 남의 점령을 당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세계도 공산 제국주의(共産帝國主義)를 허락해서 저들의 승리한 것을 길러 주고는 자유세계도 부지(扶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공산 제국주의는 모든 연합국을 대립해서 전 세계의 민족주의를 타도시킬 목적으로 할 것이니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전은 모든 나라들의 승전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세계 모든 자유 국민에게 비극적인 실패일 것입니다. 자유세계의 단결심은 누가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치는 힘이 들수록 모든 반공국(反共國)들의 공동 안전을 위해서 단결심이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 과정은 크렘믈린에 있는 모든 불의(不義)한 사람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 과정을 잘만 배우게 되면 집단 안전(集團安全)의 길이 우리 앞에 널리 열려있어서 모든 자유를 원하는 세계 민족들의 한량(限量)없는 물산(物産)과 번성(繁盛)이 평화의 새 시기를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 국내에서도 모든 내정(內政)과 지방에 관계되는 문제들도 앞으로 몇 해 동안에는 국제상(國際上)에 영향이 없게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살 수 없는 물가 고등(物價高騰)으로 민중의 혈맥을 모두 말려주는 이 문제도 전답(田畓)에서와 공장과 광산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회복되어야만 충분히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도시와 촌락과 우리들 가정과 생산 근원은 우리를 도와서 집단 안전을 위하여 싸우는 나라들이 각각 자기들의 부담으로 도와줄 그 수량을 충분히 내어주기 전에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태평양 전체에 대한 문제와 전 세계에 대한 문제는 지금 한국 내에서 되어가는 문제와 결연(結聯)되고 있으니 이는 처음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담대(膽大)히 일어나서 근대의 제일 악독한 전쟁을 싸워나가며 공산당 제국주의의 오래 내려오는 것을 끝막기로 결심한 까닭입니다. 그 끝을 한국에서 막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나의 개인 메세지로써 우리 국민과 또 친근하고 관후(寬厚)한 우리 연합국에 대해 한마디 하려 합니다. 내 평생은 우리나라의 운명과 같아서 계속적 투쟁과 인내력으로 진행해 온 것인데 어떤 때는 앞에 장해(障害)가 너무도 커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1882년 한미(韓美)조약 이후로 우리가 밖으로는 각국의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추락하여가는 군주 정치의 학정(虐政)을 대항할 적에 희망도 보이지 않은 것을 싸워왔던 것입니다. 지금 와서는 이 싸움 시작하던 사람들이 다 없어지기 전에 민주 정치를 세워 민의에다 굳건한 토대 위에 세워놓고 세계 모든 결심한 친구들이 우리를 호위하고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일본의 무력가(武力家)들이 폭력으로 우리의 독립문을 닫아놓은 뒤에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포기하고 잊어버렸으나 우리 민중은 굴복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 국가의 자유를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리 의병(義兵)들이 싸우며 보호하려고 했고, 1919년에 만세운동으로 우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중국과 만주에서는 우리 국군의 잔병(殘兵)이 1945년까지 싸워오다가 마지막으로는 공화민주국가(共和民主國家)의 결실이 되어 지나간 4년 동안에 처음으로 민국정부(民國政府)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당에게 정치상 굴복을 거부해서 싸운 것입니다. 미국 군정(軍政)시대에 소련과 교섭해서 평화적으로 협상을 열어서 평화적 담판으로 우리나라를 다시 통일시키자는 주의(主義)는 지금에 와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자유국가와 합해서 전쟁으로 결과 내기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도 우리 사람들의 이전에 싸워오던 전쟁과 같이 결국은 승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목적이 우리 이웃의 자유를 없이 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고 보유하자는 것이니만치 우리는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간담(肝膽)에 깊이 갈망(渴望)하며 원하는 바는 내가 60년 동안을 공헌해서 분투노력한 이 나라를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굳건히 안전과 자유와 통일을 민주국가 안에서 성립되는 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이번에 소위 정치상 파동이 일대 위기라고 세계에 전파된 것이 실상은 손 안의 풍파였던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몇몇 외국 친우들과 외국 신문기자들이 나의 정치적 원수들의 말을 듣고 내가 병력을 이용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민주정체(民主政體)를 없이 하련다는 괴상한 언론으로 곧이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평생 역사와 나의 주장하는 목적을 아는 친우들은 이런 낭설(浪說)을 듣고 웃었으며 혹은 분개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동포가 나를 전적(全的)으로 지지한 힘으로 우리가 반대자들과 대립하여 그들을 이기고, 그 결과로 오래 싸워오던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선거권을 국회에 맡겨주지 않고 민중의 직접 투표로 행하게 된 것이므로 우리의 민주정체와 주의(主義)가 절대로 굳건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통일과 우리의 민주정체를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나의 생명과 나의 공헌(貢獻)을 다 하기를 다시 선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전 민족에게 대하여 각 개인에게 일일이 말하노니 이 공동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때까지 각인(各人)의 모든 생각이나 주장을 다 버리고 일심협력하라는 것입니다. 4천여 년의 역사를 계속하며 우리의 신성한 조상들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내려오며 이 금수강산에서 살며 일하다가, 필요한 때에는 다 일어나 싸워서 우리의 거룩한 유업(遺業)을 우리들에게 물려주었고, 또 앞으로 이 신성한 유업을 보유할 책임을 우리의 손에 끼쳐준 것입니다. 우리의 오랜 역사상에 어떤 시대를 물론하고, 오늘 우리가 당한 형편같이 어려운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 난리를 담대히 치르고 직책을 다 힘껏 행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다 합해서 연속 진행할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일하며 같이 희생하며 우리가 같이 싸워서 마침내 승전할 것입니다. 승전이 우리 마음과 우리 간담(肝膽)에 있을 동안에는 우리가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다 지나갔으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오직 승전과 성공일 것입니다. 이것으로 마칩니다. 지금은 순서에는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클라크 장군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
— 취임사가 끝난 후 이승만 대통령께서 클라크 총사령관 소개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유엔군총사령관>의 축사(祝辭)
대통령 각하와 귀빈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대통령 각하와 부인께서 나와 나의 부인을 이 자리에 초청해 주셔서 여러분들의 7회째 맞이하는 광복절 축하식에 참석하는 광영을 주시고, 여러분의 위대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케 한 광영을 주신 데에 대해서 무한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내가 만일 오늘 이 자리에 와서 귀 대한민국을 영도해서 공산주의자에 대항하여 우리와 함께 지금까지 싸우는 데에 크게 공헌하신, 여러분의 위대한 대통령에게 축하를 드리지 않고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나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국군이 싸우는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방문하는 동안에 대한민국 국군이 참모총장 지도하에서 용감히 싸우고 있는 것과, 또한 제8군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의 지도하에서 용감하게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무한히 만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국제연합군은 다른 여러 우방국들이 여기에 와서, 우리와 함께 어깨를 같이 해 가지고 공산 침략자의 퇴치를 위해 함께 싸우는 것을 매우 광영으로 생각합니다. (박수) 우리 국제연합군과 미군은 한국에 와서 싸우는 각국 군대와 같이, 우리 모두가 다 사랑하고 우리가 다 가지기를 원하는 자유민주국가 수호에 대한 여러분의 염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박수) 끝으로, 대통령 각하에게 내 자신이 표할 수 있는 최상의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나는 유엔 각국을 대표하여 대통령의 영도를 절대로 지지해 드림으로써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번영과 안전을 누리고, 그리고 이 땅에 평화가 빨리 오기를 간절히 빌면서 축하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박수) |
<편집자 주> 제2대 국회본회의 제13회(제16차. 1952. 8. 15.) 속기록의 클라크 총사령관의 축하 인사말을 이해하기 쉽게 부분적으로 수정하였음.
9. 대통령기(旗) 진정(進呈)
— 대한민국 대통령을 상징하는 깃발로서 새로 만든 <대통령 기(旗)>를 한동석(韓東錫) 총무처장이 단상으로 나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해 드림
10. <대통령 찬가> 합창
— 이화여중 합창단이 <대통령 찬가>를 합창
대통령 찬가 작사․작곡 미상 1. 그 어느 곳에 슬기었던가 원한의 거슬린 피 뛰어 솟는 곳 온 땅에 믿음이 피어나리고 정의의 불가마 밝게 안기인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각하 2. 그 어느 곳에 약속이던가 온 하늘 사랑이 높이 솟으라 그리움에 물이 여인 내를 쌓고 평화의 너럭바위 굳이 간직한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각하 3. 그 어느 곳에 결의었던가 삼천리 맑은 물결 길이 이끌어 백두의 정수리 높이 보살피는데 행복의 넓은 바다 인자로 그은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각하 |
<편집자 주> 위 가사는 1953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京鄕新聞)에 실린 <대통령 찬가> 가사로서, 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부른 <대통령 찬가>와 같은 가사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음.
11. 정․부통령 및 클라크 사령관 부부에게 꽃다발 진정(進呈)
— 국무위원 일동, 민의원의장, 대법원장, 기타
12. <광복절 노래> 합창
— 이화여중 합창단이 광복절 노래를 합창
13. 만세삼창
— 참석자 모두가 장택상(張澤相) 국무총리의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 ‘이 대통령 만세!’를 각각 삼창함.
14. 주악
15. 폐식선언(사회 : 총무처 전례典禮과장)
“이것으로써 대통령 취임 및 광복절 기념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
<오전 11시> 끝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이모저모
(※이 취임식 이모저모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운영자가 내린 평가입니다)
가. 행정부(총무처)가 취임식 주관
— 초대 대통령 취임식은 행정부가 아직 구성되기 이전이어서 부득이 국회사무처가 주관하였다. 그러나 제2대 대통령 취임식부터는 행정부의 총무처(현 행정안전부)가 주관하기 시작했다.
나. 광복절 기념식과 겸해 거행
— 제2대 대통령 취임식 거행일이 마침 8월 15일이어서 제7주년 광복절 기념식을 겸해 동시에 거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순에 광복절 관련해서는 끝부분에 <광복절 노래>만 있을 뿐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광복절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다.
다. 취임선서 식순
— 제2대 대통령 취임선서는 당시 <헌법 제54조> 규정에 따라 취임선서 앞뒤에 국회의장이 개회사와 폐회사를 한 것이 특징이다.
【대통령취임선서 관련 헌법 규정】[헌법 제2호, 시행 1952. 7. 7.]
제54조 대통령은 취임에 제하여 양원합동회의에서 좌의 선서를 행한다.
「나는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
라. 국민의례 절차 정착
— 취임식 시작 단계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봉창(奉唱)>, <묵념> 순으로 국민의례가 진행돼 어느 정도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국민의례는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행사에 필수 절차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 이례적인 식순 포함
— 일반 식순에 예정이 없었던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 절차가 추가되었다.
행사 진행 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소개로 배은희 의원(목사)의 기도와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유엔군총사령관(일본 도쿄 주재)의 축사(祝辭)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내외에 상징하는 ‘대통령기(旗)’를 새로 만들어 취임식을 주관하는 총무처장이 대통령께 드리는 절차가 식순에 포함되었다.
마. 대통령 행사 복장
— 한복을 입었던 초대 대통령 취임식 때와는 달리 제2대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양복을 입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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