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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이완용 (李完用, 1858∼1926)
◦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공로로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 1920년 '한일합방' 공로로 백작
◦ 1921년 후작,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미국통에서 친러파·친일파로
한일'합방'조약 체결 당시의 내각 총리대신으로, 매국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이완용의 생애는, 일단 관계로 나아갔다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통의 외교관리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친러시아파·친일파로 변신해 가는
과정과 친일파로 변신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매국의 원흉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 제국주의의 귀족이 되어 반민족행위를
계속하면서 잔명(殘命)을 보존하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자를 경덕(敬德), 호를 일당(一堂)이라 한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牛峰) 이씨 호석(鎬奭)과 신씨(辛氏)
사이에서 태어나서 열 살 때부터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의 양자가 되었고,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
등을 거쳐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쳐 1887년에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이 되어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해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10월에 귀국하여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거쳐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는데,
미국으로 가려다가 당분간 정세를 관망하는 사이에 아관파천(1986. 2)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불려간 그는 친러파로 변신하여 외부대신
및 농상공부대신 서리가 되었고, 탁지부대신 서리, 학부대신 서리
등을 겸하는 한편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고, 학부대신, 평안남도 관찰사,
중추원 의관, 비서원경, 전라북도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 등의 관직을 거쳤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러일전쟁을 도발한(1904)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조선을 전쟁터로 만드는 한편,
초전에서의 유리한 국면을 배경으로 '화폐정리사업' 등을 감행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초를 닦아 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양아버지(養父)의 초상을 치르고 이 해 9월에 학부대신이
된 이완용은 이 과정을 통해 다시 친일파로 변신해 갔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문제를 두고 열린 어전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는 반대했으나,
이미 일본 쪽에 의해 매수되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농상공부대신권중현 등은
일본 쪽이 제시한 조약안 외에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기를 보증함"이라는 조문 하나를 더 첨가한다는 조건으로 찬성했고,
이에 따라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약을 체결했다(1905. 11. 17).
이완용은 조약 체결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다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으로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2), 또 이토의 요청에 의해
통감부 농사과 촉탁 조중응을 법부대신, 일진회 고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하고, 임선준(任善準)을 내부대신, 이병무(李秉武)를 군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을 학부대신, 고영희(高永喜)를 탁지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바꾸게 되자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한편
이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게 되자 일본은 이토로 하여금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에 동조하여 양위를 건의했다가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으나
계속 강압하여 결국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한편 분노한 군중들이
남대문 밖 약현(藥峴)에 있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1907. 7. 20).
가재와 함께 집이 전소하여 이완용의 가족들은 이토의 보호로 몇 달 동안
왜성구락부에 들어 있다가 저동의 전남영위궁(前南寧尉宮)으로 옮겨 살았다.
이 때 불탄 그의 재산은 약 10만 원 정도였다 한다.
고종을 양위시킨 이토는, 통감이 한국 정부의 시정(施政)을
'지도'하는 권리를 가지며, 법령을 제정하고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을 할 수 있으며,
고급 관리의 임명, 외국인의 고빙(雇聘) 등을 할 수 있게 하는
'정미 7조약' 체결을 요구했고, 이완용은 이에 응하여 조약을 체결했다(1907. 7. 24).
이 조약의 부수문서에 따라 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또한 한국 군대가 해산되었는데, 많은 해산 군인들이 의병전쟁에 가담했다.
이완용은 1909년에 들어서면서 이토의 요구에 따라 새 황제 순종으로
하여금 민정시찰 명목으로 전국을 순회하게 하면서 이에 동행했다.
이 해 10월 안중근의 의거로 이토가 살해되자(10. 26) 내각 령으로
3일간 춤과 노래를 금지시키고 한국 정부 대표로 다롄(大連)까지 가서
조문한 후 장춘단에서 추도회를 열고 일본에서의 장례에 정부 대표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파견하면서 은사금 명목으로 10만 원을 보냈다.
주저함이 없는 친일행위로 국민적 지탄을 받던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 자격으로 서울 종현(鐘峴) 가톨릭 성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가했다가 이재명(李在明)의 의거로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칼로 찔렸으나(1909. 12. 22),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회복되었다(이재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연루자 11명에게는 최고 15년, 최하 5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이완용은 한일'합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이완용은 일본에 유학했던 이인직(李人稙)을
심복 비서로 삼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 綠)와 '합방'문제를 교섭하게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합방'을 앞당기기 위해,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공'과 그로부터 따르게 되는 영화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이 이인직을 고마쓰에게 보내 "현 내각이 와해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라 하고 자기 휘하의
내각이 직접 '합방'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알렸다.
이에 따라 이인직과 고마쓰 사이에 "합방 후에도 한국의 황실에
대해 종전과 같은 세비를 지급하고 일본 황족의 예우를 내리며,
한국 황제의 지위를 일본 황태자의 아래에, 친왕(親王)의 위에 둔다.",
"내각대신은 물론 다른 원로 고관에게도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충분한 공채(公債)를 주고, 합방에 힘쓴 자
및 옛 대관 원로에게는 은금(恩金)에 영작(榮爵)을 더하고,
그 유력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하여 총독부의 정무에 참여하게 한다."
는 내용의 '합방' 기초조건이 합의되었다.
이 모의에 따라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마침 동경에서
일어난 수재(水災)를 위문한다는 핑계로 서울 남산에 있는
통감관저를 방문하여(1910. 8. 16) '합방'조약의 내용을 마무리 지었고,
같은 날 오후 내각회의를 열어 그것을 통과시킨 후 다시
어전회의 절차를 거쳐서(8. 22) 그날로
"한국 황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 양여한다."는 '합방'조약을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이름으로 조인함으로써
그는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매국의 원흉이 되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이보다 앞서 일본은 1910년 6월 하순경에 '일한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황실에 대한 대우, 한국 원로대신에 대한 조처,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법, '병합'의 실행에 필요한 경비문제 등을 의논했고,
그 결과 한국 황제 일가의 1년 세비를 150만 원 지급할 것,
'합방' 공신에게는 응분의 작위를 주고 세습재산으로서 공채를 하사할 것,
'합방' 공신에 대한 수당으로서 현 수상에게는 백작 작위와
15만 원, 일반 대신에게는 자작 작위와 10만 원,
기타는 남작 작위와 5만 원을 줄 것, '합방'의 소요경비로서는
공채 3000만 원을 발행할 것 등이 결정되었었다.
이에 따라 이완용은 '합방'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 은사금,
총리 퇴관금 등과 함께 일본 귀족으로서 백작 작위와 그것에
따르는 응분의 대우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다시 그 부의장이 되었다.
이후 '내선인친목회'를 발기하고 '조선귀족회' 부회장이 되어
일본을 드나들면서 일본 국왕을 만나는 등 친일행위를 계속하였는데,
고종이 죽고 그 장례를 이용하여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에 걸쳐 조선 민족에 대한 이른바 [경고문]을 발표했다.
첫 번째 [경고문]에서 이완용은 "조선독립 선동은 허설(虛說)이요
망동"이라면서, 일제 당국이 이 운동을 '무지몰각한 망동'으로
보고 관대하게 회유하지만, 그래도 자각하지 못하면 필경
강압책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같은 [경고문]이 발표되자 매국노 이완용을 규탄하는 소리가 다시 높아졌고
이에 대해 그는 "천만인 중에 한사람이라도 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경고의 효과가 적지 않은 것"이라 강변했다.
조선총독부가 각 지방에 게시한 [경고문]을 민중들이 모두 찢어버렸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세 번째 [경고문]을 발표했다.
세 번째 [경고문]에서 그는 이렇게 강변했다.
3·1 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서의 민족자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조선과 일본은 고대 이래로 동종동족(同宗同族)
동종동근(同種同根)이어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에 부적당한 것이다,
또한 한일'합방'은 당시의 국내사정이나 국제관계로 보아 역사적
자연의 운명과 세계 대세에 순응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그리고 3·1 운동에 참가하여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조선 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우리의 적이다.
가히 민족반역자로서의 극명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완용은 후작으로 승작했고(1921), 아들 항구(恒九)도
남작을 받았으며 손자 병길(丙吉), 병희(丙喜) 등도 모두 귀족으로서
일본에 유학하는 등 친일파 수괴로서의 갖은 '영화'를 누리는 한편,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일찍이 이재명의 의거에서 목숨을 건진 그는, 만년에
그 집에 함께 기거하던 일족 이영구(李榮九)에 의하여
암살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소문이 있은 지 약 2개월 후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결국 와석종신(臥席終身)할 수 있었다.
그러나 8·15 후 그 후손의 손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져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시대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
후의 민족국가 건설과정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전체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는 정책을 세웠으나 이승만 정권이 실시한
농지개혁과정에서 그것이 실시되지 않음으로써
그 재산은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 참고문헌 ⊙
◦ 이완용, [경고문], {매일신보}, 1919. 4. 8, 5. 30.
◦ 大垣丈夫 編, {朝鮮紳士大同譜}, 1913.
◦ 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 김명수, {일당기사}, 일당기사출판사, 1927.
박제순 (朴齊純, 1858∼1916)
◦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충청감사로 농민군 진압.
◦ 1905년 외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 1910년 '한일합병' 후 자작,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
외교통의 관료로 성장
정4위 종1품 훈1등 자작, 조선총독부 고문, 경학원 대제학.
박제순이 사망했을 당시 공식적으로 지칭되던 직함이었다.
그가 이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905년 이른바
'보호조약'을 체결했던 당사자로 '을사오적'이었던 덕분이었다.
박제순은 경기도 용인 상도촌 출생으로, 기호지방 관료층들의
학문적 배경이 되었던 유신환(兪莘煥)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유신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던 관계로,
같은 동문이었던 김윤식과 세숙세질(世叔世姪)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김윤식과 관계를 맺고 그의 지도 하에
청나라와의 외교상의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는데,
김윤식이 주도하던 통리아문 주사로 시작하여(1883), 주차천진종사관,
청국전권대신(1899), 외부대신(1898, 1901)이 되었다.
그 사이 호조, 예조, 이조, 형조의 참판과 전라도,
충청도의 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던
그의 경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그는 농민전쟁 당시에는 충청감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농민군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새야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박으로 너를 치자"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이 박이 박제순으로, 박제순이 아니었다면 지배층이 화란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농민군 탄압에 박제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을사조약' 체결의 도장을 찍다.
박제순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로는 무엇보다도 을사조약 당시
외부대신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당사자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당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음으로써 이른바 '을사오적'이 되었다.
1905년 10월 일본 정부에서는 한국에 대한 외교권 확립을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이토는 일본 '천황'의 친서를 보이면서 고종을 위협하였다.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전을 위하여 한일 두 나라는
친선과 협조를 강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또한 한국 왕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일본이 침략을 단행하면서 언제나 내걸고 있었던
동양의 평화 유지, 왕실의 존엄 보존이라는 미사여구가 여기서도 등장한 것이었다.
박제순은 처음 고종과 각료들이 회담할 때에는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마찬가지로 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였다.
한규설의 전기 {참정대신 강석 한규설 선생 소전}에 그간의
사정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박제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감, 사무는 위기에 절박했으므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
나는 중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단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의 의지와 기개를 살펴보고
지난 일들을 미루어보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감께서와 외부대신인 이 사람,둘이서라도 고집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토가 제 아무리 버틴들, 효과가 없으면
자연히 되돌아 쫓겨나갈 것이 아닙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외론(外論)이
어떠할지 모를 일입니다…….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조약의 체결에 반대하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한규설은 "다른 대신들이 설혹 다른 의견을 제출한다
해도 주무 대신이 끝까지 버티고 부결하면 무슨
조약이더라도 성립이 될 수 없으니 두 어깨가 무겁겠소"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박제순의 이 비장한 맹세는 지켜지지 않는다.
이들의 결의는 어전회의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이토는 이 어전회의 결과를 번복시키기 위하여 일본군을 동원하여
각료들을 감금하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채, 한 사람씩의 의견을 물었다.
주무 대신이었던 이유로 남보다 먼저 지명된 박제순은
"어제 하야시(林權助) 공사와 회견할 때에 대략 의견을
말한 바와 같이 본 협약안에 대해 단연코 거부하기로 한 것인데,
이를 외교 담판으로 본인에게 타협하라고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라고 소극적으로 답하였다.
그러자 이토는 이를 놓치지 않고
"명령이란 무슨 뜻인가. 폐하의 명령이라면 조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은가"라고 다그쳤다.
박제순이 명령 운운하다가 그만 말꼬리를 잡히고 만 것이다.
그는 한두 마디 변명을 늘어놓다가는 자신의 말을
취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만 침묵하고 말았다.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안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못을 박았다.
박제순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말았다
(한규설의 전기에 의하면 박제순은 "4개조안을 수락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찬성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토가 위협하자 "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소,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였고, 이에 이토는
"외부대신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 찬성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소."라고 하였다).
이 이후의 회의에서는 이완용과 이하영(李夏榮)이 대세를 장악하였다.
이완용은 이때 친일파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그들의 논조는,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할 것이므로 차라리 체면을 살리면서
이를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른바 '외교'문제에만 한정한다는 문장 수정과,
왕실의 안녕과 그 존엄을 유지한다는 문장 첨가만을 요구하였다.
나라를 망하게 하면서도 그들은 왕실 타령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7일에 박제순과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사이에서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의 체결을 주도하였던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과 더불어 박제순은 '을사오적'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는 법부대신 이하영이 맹활약을 하였다.
'을사오적'에 박제순 대신에 이하영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 모두를 포괄하여 '을사 6적'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조약을 체결한 공로로 박제순은 참정대신이 되었다.
1907년 초에 '을사조약'이 고종의 인허를 받지 않았다는
대한매일신보의 보도가 있자, 이 문제를 둘러싸고 친일적인
각료와 '친일'을 경쟁하고 있던 일진회에서 내각사퇴를
촉구한 일이 있었다. 박제순 내각에서 이를 사전에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도 모두 내각에서
내정개혁을 단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고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나인영, 오기호 등에 의해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기도가 있었다.
박제순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참정직을 사직하였다.
이에 이토는 박제순을 격려하면서 유임을 권고하였으나
이와 같은 어려운 시국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토는 이완용 내각을 조직하였고, 박제순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토는 박제순 이외에 을사조약에 협조하였던 이근택, 권중현,
이하영 등을 모두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그 후 박제순은 일진회 출신의 송병준이 실각하자
그 자리를 이어 받아 다시 내부대신이 되었다.
박제순은 또한 통감의 신임이 두터웠던 관계로 이완용이
이재명(李在明)에게 부상을 당하여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내각총리의 임시서리로도 활약하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으로 이어진 친일 가도
한말의 화려한 친일 경력을 밑바탕으로 박제순은
'합방' 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자작 칭호를 받은 데 이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이 되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친일파들이 요구하여 얻어낸
자리에 스스로 들어앉은 것이었다.
그들은 왕실에 대한 예우와 한말 고급관료를 지냈던 사람들에
대한 응분의 대우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의 영달을 유지하였다.
박제순은 1910년 11월에 조선 귀족들의 일본 시찰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시찰들이 실시된 것은 물론
일제 당국자들이 일본 문명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박제순은 일본 '천황의 은덕에 감읍'하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내가 가장 감격한 바는 일본 내지(內地) 도처의 풍광이 아름다운 것이나
문물제도의 찬란함은 고사하고, 위로는 천황폐하로부터
일반 문무백관, 아래로는 서민 제군이 모두
충심으로 신부(新附)한 우리들을 대함에 극히 간독(懇篤)함이라.
이러한 이상에는 금후 일선(日鮮) 양민 간의 친화는
오래 되지 않아서 이룰 것이오, 수년을 지나지 않아 일선이
일단이 될 것은 우리들이 확신하는 바로다.
더하여 성상폐하의 신들에 대한 특별 성의를 말한다면,
돌아오는 길에 우리들이 탄 열차가 카와야먀(岡山)역을 지날 때에
대연습 중에 있는 대본영(大本營)에서 특히 무관을 파송하여
특별히 두터운 칙령을 내려시와 '지금은 동군 퇴각중의 역습전인즉,
일행은 그 뜻으로 차안에서 관전하라' 하옵심에 감읍하였노라.
다만 우리들은 도착한 후 이 같은 예성문무(叡聖文武)하옵신
천황폐하로부터 박애 인자한 내지 동포의 지도에 의하여 장족의
발전을 계(啓)하여 성상의 홍덕(洪德)에 목욕하기를 절망할 뿐…….({매일신보}, 1910. 11. 8)
또한 박제순은 경학원의 대제학으로 있으면서는
총독정치를 선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학원은 외형상 '유림과 석학을 존중하여 미풍을 장려하고,
폐풍을 교정하고 양속을 조장하여 일반 교화의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본래의 목적은 유교의 인의충효사상을 강조하여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특히 '천황'에 순종하는 충량한
신민(臣民)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경학원에서는 여러 강사들의 강연회를 통하여 유교의 경전은 물론,
민풍 개량, 근검저축의 장려 등을 강조하여 결국 총독부의
새로운 정치를 선전하는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문명으로 이끄는 선(善)'이라 선전하였다.
일제는 경학원을 설치·운영하면서 박제순을 그 책임자로 삼았다.
당시 유림들로부터 명망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한말에도
친일적인 공자교회의 회장이었던 자작 이용직(李容稙)을 제치고
'성질이 온건'한 박제순을 택했던 것이다.
이용직은 '합방' 당시 학부대신으로 조약안이 각의에 상정되었을 때,
"이 같은 망국 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22일의 마지막 어전회의에도 불참하였다.
따라서 이런 이용직이 혹여 유생층을 격려하여 소요를
일으킬 줄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로서는 그를
경학원의 대표로 임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제 당국자는 조약 체결 직후 이용직을 만나
"귀하는 학자이므로 마땅히 대제학이 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경학원의 조직을 확장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제사 이외에도 전국의 교화를 도모해야 하므로 행정 사무가 많다"면서,
박제순을 대제학으로 앉히고 이용직에게는
강학(講學)을 전담하는 부제학을 권하였다.
이용직은 이를 "지위의 상하를 떠나 미력이나마
기꺼이 행하겠다."면서 수락하였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일제는 이용직이 처음 이완용의 병합 협의
때에 반대하였던 것은 일시의 계략이거나 말주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小松 綠, {朝鮮倂合之裏面}, 203∼205면)
경학원 대제학이 되었던 박제순은 유교 진흥을 주장하였다.
그는 공자교라는 것은 '임금은 임금의 직을 행하고,
신하는 신하의 직을 행하고, 아비는 아비의 직을 행하고,
아이는 아이의 직을 행하여 만반의 일에 각자 자신의
직을 다하라는 것'이라면서, 본래 유교에서 강조하던 실(實)을 행하지 않고
허식만을 존중하는 말류의 폐단이 나타난 것이 조선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신학문이 전래된 이후 일반청년들이 급속히
노장(老長)을 배척하고 능멸하는 현상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유교를 진흥하고 자신의 직에 만족하고 안분하는 인간,
나이든 사람을 공경하는 인간 등을 중요시하였다.
유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충효를 강조하여
식민지배체제의 유지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 참고문헌 ⊙
◦ 한규설, {참정대신 강석 한규설 선생 소전}.
◦ 小松 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권중현 (權重顯, 1854∼1934)
◦ 1904년 육군부장으로 러일전쟁중인 일본군 위문 공로로
일본의 훈1등 팔괘장 수여 받음
◦ 1905년 농상공부 대신
◦ 1910년 자작, 중추원 고문
개화파 중에서도 일본통
권중현의 초명은 재형(在衡)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충북 영동 출신인데 서자라고 알려져 있다.
일찍부터 일본어를 습득하여 일본 정계의 사정에 정통하였고
이러한 능력이 인정되어 개화파 중에서도 일본통으로서 매우 주목을 받았다.
1883년 부산감리서 서기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888년에는 조정의 명을 받고 일본을 직접 견학,
각종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였으며, 이때부터 일본의
문물제도에 크게 계발된 바 있어 점차로 일본 취미에 '감화'되기 시작하였다.
1891년 인천항 방판통상사무를 지냈고
주일공사로 동경에 재임 중 1892년 6월에는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항해 등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기에는 내무참의 겸 군국기무처 회의원에
임명되었으나 곧 군부협판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개화파 정권에 참여한 인물 중에서도 특히 일본 공사관의
신임이 두터운 이른바 왜당(倭黨)으로 알려져 있었다.
1895년 이후에도 육군참장, 법부협판, 고등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농상공부협판을 하다가 칙명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육군대연습을 참관하였으며,
돌아와서는 고종의 황제 위호 상소자가 되어서
그 공로로 정2품에 올랐다.
대한제국기에도 1898년 의정부 참찬, 찬정을 거쳐 농상공부
대신으로 승진되었고, 1899년에는 법부·농상공부 대신을 겸임하였으며
표훈원이 창설되자 부총재의 직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4년에는 육군부장으로서 당시 러일전쟁중인
일본군의 위문사가 되어 랴오양(遼陽), 뤼순(旅順)을 순방하였다.
그 공로로 일본에서 훈1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을 받고
다시 훈1등팔괘장(勳一等八卦章)을 받았다.
1905년 8월에 군부대신, 이어 9월에 농상공부 대신,
1906년 다시 군부대신을 역임하고 1907년 5월
박제순친일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그도 물러났다.
이처럼 그는 개화파로 입신한 이래 한순간도 벼슬길을 떠나지 않았고
, 뿐만 아니라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유배에
처하거나 망명의 위기에 처한 적이 없는 극히 평탄한 생애를 살았다.
성격이 원만하고 모가 나지 않아 적을 만드는 일이 없어서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러한 일직선상의 안전운행은
시종일관 일본과 연결되어 지낸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옳은 판단일 것이다.
마침내 오적의 '반열'에 오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당시 권중현은 농상공부 대신으로 있었다.
11월 17일 이른 아침 5강(한강, 동작진, 마포, 서강, 양화진) 각처에
주둔해 있던 일본병은 모두 경성에 입성했다.
기병 780명, 포병 4, 5천 명, 보병 2, 3만 명이 사처를 종횡하니
우리나라 인민들은 촌보의 자유도 없었다.
그들은 궁성내외를 겹겹이 둘러싸서 대소 관리도 출입하는 데 전율을 느꼈다.
하오 2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의정부 대신
한규설(韓圭卨),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탁지부 대신
민영기(閔泳綺) 등을 공사관으로 불러 자신들이 제기한
5개조에 조인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규설 등은 모두 불가하다 하고 하야시는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한편으로는 협박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모두 입궐하여 어전회의를 열었으나 역시 결론은 같았다.
이에 하야시는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결코 퇴궐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일본에서 특파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및
그 수행원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와 그 부하 무관들,
다수의 보병, 기병 ,헌병, 순사, 고문관, 보좌원 등이 연달아
질풍같이 입궐하여 각 문을 파수하였다.
수옥헌(漱玉軒)의 고종은 지척에서 겹겹이 포위되었고
총칼로 철통같이 경계하면서 내정부와 궁중을 협박함이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 것을 강요하였다.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李載克)을
불러 황제 알현을 요청하였다.
황제는 이때 인후염을 앓고 있다고 하면서 만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황제가 이미 협의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면서
대신들에게 회의를 재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끝내 회의 속개를 거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은 골방에 가둬놓고
나머지 대신들로만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때 이하영, 민영기는 여전히 '부'(否)를 쓰고 이완용은
"만약 약간 자구를 변개한다면 인준하겠다."고 하였다.
이토가 결연히 붓을 잡고 "그렇다면 마땅히 변개하자"
하고는 내키는 대로 두세 곳을 고쳐 다시 가부를 물었다.
이에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 5인은 일제히 '가'(可)자를 썼다.
마침내 을사오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18일 상오 1시경. 조약이 날인된 후 일본병은 철수하고
이토, 하야시, 하세가와 등도 돌아갔다.
새벽 2시경 한규설은 풀려났고 조금 있다가 각부 대신들도
모두 모여 한바탕 방성통곡을 하였다.
외부대신 박제순도 또한 통곡을 하였다.
조약서에 날인하라고 도장을 내줄 때는 언제고 사후에
대성통곡함은 또 왜인가.
당일 도성내외의 인민들은 조약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개가 분개하여 소의문 밖 이완용의 집을 불태웠고
각부 관리들도 눈물로 탄식하였으며 각 학교 학도들도 모두 등교 거부로 항의를 표했다.
잘 알려진 바이지만 이 조약의 내용은 제1조 '한일 양국은
동아의 대세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맹약하고 이전보다
더욱 친밀할 것', 제2조 '한국의 외교 사무를 확장하기 위해
외교부를 동경에 설치하여 외교사항에 관한 것은 일체 여기서 관할할 것',
제3조 '한국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외교 사무를 감독할 것' 등이었다.
당시 고종과 황실측근들이 끊임없이 국제여론에 호소하면서
외교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유지하려 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일단 한국을 '병합'하기 위해서는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못 박은 조약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권중현은 조선 말기에는 국가개혁을 위해 모인 개화파라고 자부하였고,
대한제국기에는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고종이 황제의 지위에 올라야 한다고 상소한 주창자이면서 이번에는 또 '을사보호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보호조약'이 대한제국의 영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다고 강변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의 평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세에 영합하고 특히나 일본을 따른 일생이었으며 일평생 관직이 몸에서 떠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을사조약'에 '가'(可)를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오적의 '반열'에 오른 이후 그의 앞날이 결코 평탄할 수만은 없었다.
을사오적 암살 미수사건
1907년 3월 5일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 을사오적 암살단은 권중현의 집이 있는 사동(寺洞) 입구에서 그가 문을 나서기를 기다렸다. 이때 이홍래(전직 총순)가 앞장을 섰다. 양복을 차려입은 권중현이 인력거를 타고 나오고 일본 병정 및 순사 6∼7명이 모두 총칼을 들고 그를 둘러싼 채 지나가고 있었다. 이홍래가 용기 있게 앞을 가로막고 권중현의 어깨를 잡고서 "역적은 네 죄를 알렸다"라고 꾸짖으며 협대(夾袋)에 간직한 육혈포를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혈포가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 권중현의 종자들이 일제히 이홍래를 붙잡았다. 이때 또한 의사 강원상(康元相)이 육혈포를 꺼내 권중현을 향해 쏘았으나 권중현이 급히 피하여 길가의 민가로 들어가 문을 닫고 몸을 숨겼다. 강원상이 또 한 발을 쏘았으나 문이 닫혀 있어 맞지 않았다. 이에 병사와 순검들이 호각을 불어 사동 부근을 파수하던 순검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강원상은 몸을 날려 교동 민영휘의 집 뒷간에 숨었으나 그 집 노복들이 알려주어 순검의 추적에 잡히고 말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권중현은 5월 박제순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관직을 물러나, 모든 가족을 이끌고 표연히 추풍령 아래 산간 마을 영동으로 퇴거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이제 일체 정계에 욕심이 없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였으나 곧이어 6월 중추원 고문에 다시 임명되고 칙명으로 일본박람회 시찰을 떠나게 되었다.
6월 19일 민영기, 이지용 등과 함께 일본 도쿄로 가기 위해 부산진에 이르렀을 때 부산 진민(鎭民) 남녀 수백 인이 길을 막고 통곡하였다. "대감들은 전국의 금고권(金庫權)을 일본인에게 양여하고도 부족하여 또 다시 일본인에게 본진(本鎭)의 기지를 팔아먹으니, 이 땅의 사람은 장차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하늘로 올라갑니까, 땅으로 들어갑니까. 대감들이 이미 이 땅에 도착했으니 이 무죄한 백성들은 모두 갱살(坑殺)당하거나 아니면 구제되어 살려지거나 양단 중에 결말이 내려진 후에야 대감들은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윽박지르며 여러 사람의 분노가 조수와 같이 밀어닥쳐 사태는 자못 참혹하였다. 마침 일본 순사와 조선 순검들이 이들을 급히 보호하여 위험에서 면하였다 한다. 이런 위험 속에 일본에 건너간 권중현은 그 해 12월에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고, 1908년에는 다시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1910년 '병합' 때는 58세의 나이로 자작을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내는 등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냈다.
⊙ 참고문헌 ⊙
◦ 鄭喬,{大韓季年史}
◦ 大村友之丞,{朝鮮貴族列傳(1910)}
◦ 細井肇,{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1910)}
이지용 (李址鎔, 1870∼1928)
◦ 1904년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 협정·조인
◦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 1907년 중추원 고문
◦ 1910년 백작
도박으로 소일한 친일 백작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이요 일제의 훈장을 3개나 받았으며 '합병'시 백작을 수여받은 이 지용. 그는 한일'합병' 이후에는 날마다 도박으로 소일하며 날을 보냈다. 고종의 종질이기도 한 이지용이 소유하고 있던 한강변 언덕 위의 우람하게 솟은 양옥집은 도박으로 날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중부 사동(寺洞)의 자택은 완전히 도박장이 되었다. 굳게 닫힌 문 안에는 소위 귀현신사(貴顯紳士) 한 무리가 항상 모여서 무뢰한들처럼 도박에 혈안이 되어 있곤 했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을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 요즈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억대 도박판이 매일 벌어진 셈이다. 나라가 망하여 백성은 굶주리는데 그는 도박귀족으로서 도박판에 엎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귀공자의 청아한 풍모도 없고 위용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풍격도 없었다. 다만 도박배들과 무리지어 무뢰한의 대열에 끼어가고 있는 이지용일 따름이었다. 그가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도박장에서는 믿기 어려웠다.
고종의 종친으로서 입신
이지용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북 완산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은용(垠鎔)이며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즉 사도세자의 5대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의 손자이며 이희하(李熙夏)의 아들인데 완영군 이재긍(李載兢)에게 입양되었으니 고종의 종질이 된다.
1887년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쳤다. 1895년에는 칙명으로 신사 수십 명과 함께 일본을 유람,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189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궁내부 협판이 되고 다시 이듬해 주일전권공사를 거쳐 의정부 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전권공사로 부임하였다.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는 등 결코 깨끗지 못한 인물로 통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최응은 매관매직으로 재물을 모아 9개나 되는 곳간에 온갖 보화를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했는데, 이지용도 그런 집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한편 주일공사를 여러 차례 지낸 덕에 주한일본공사관과 밀통하였고 결국 1만 엔의 로비 자금에 넘어가서 한일의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만다.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본 침략에 문을 열어주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로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일의정서를 협정·조인하였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에게 군사용 부지를 허용하고 일본군 사령관의 서울 주둔을 허락함으로써 조선을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내준 조약으로서, 일본에게는 5월의 '대한시설강령', 8월의 '제1차 한일협약'과 함께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으로 가는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예상외로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자 조선 정계의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간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일본이 러시아의 만주 철병을 요구하며 전쟁을 도발하고 뤼순(旅順)·인천 해전에서 대첩을 거두기 시작하자, 조선 조정도 일본에 대하여 호의를 표명해 오던 박제순, 윤웅렬(尹雄烈), 이도재(李道宰), 권재형(權在衡) 등으로 내각의 주요 인물을 바꾸었다. 이 때 이지용도 외부대신 서리라는 중책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주한일본공사관은 그간 막대한 자금으로 매수해놓은 이지용이 외부대신이 되자 아주 손쉽게 한일의정서를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한일공수동맹'이라 불리는 한일의정서 제4조의 내용을 보자. "대일본제국 정부는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함이 가하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대일본제국은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 또 제5조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 없이 차후 본 협정의 취의를 위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라고 못 박고 있다. 이 조약에 의해 조선은 꼼짝없이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이후 2월 25일경부터 일본 군마와 병사들은 경성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입경한 군대가 줄잡아 5만여 명, 군마가 1만여 필이었는데, 대궐 주변과 각 성문, 창덕궁, 문희묘, 원구단, 저경궁, 광제원, 관리서 등 모두 18개처를 군영으로 삼고, 서문 밖 민가 수백 채를 헐어서 마구간을 만들었다. 또 5강(한강, 동작진, 마포, 서강, 양화진) 연안에 천막을 치고 침처(寢處)를 만들었으니 밥 짓는 연기가 수백 리까지 퍼졌다.
또 3남 각 지방에도 일본군이 속속 도착하여 각처에 전선을 가설하고 병참을 설치했다. 남로(南路)는 동래에서 대구로, 남해에서 남원으로, 군산에서 전주로 향하여 세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또한 서로(西路)는 평양·삼화, 북로(北路)는 원산·성진에서 상호간의 거리를 110리로 하여 점차 랴오둥(遼東)을 향해 나아갔다. 가는 곳마다 민가에 주둔하거나 군수에게 군수품을 청하니 민심이 소요했다. 백성들은 난을 피하여 성이 텅텅 비고 군수는 관직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4월에는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8월에는 2개 사단 가량 되는 조선주차군을 확대·재편함으로써 조선 방위를 담당한다 하였고, 9월에는 육군 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가 '천황' 직속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경성에 부임하였다. 또한 7월에는 군용 전선 및 철도선 보호라는 명목으로 치안유지를 주차군이 담당한다고 조선 정부에 통고하더니, 1905년 1월에는 경성과 그 주변의 치안경찰권을 조선 경찰 대신 일본군이 장악한다는 군령을 발포하였다. 군사방위권, 치안권이 모두 일본 군대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순간들이었다.
일본 공사는 일찍이 이용익(李容翊)이 주도하여 건설하려 했던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 회사에게 양여하도록 조선 조정에 강요하였으니, 이는 하루빨리 경의철도를 건설하여 군수 운반을 민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곳에 멋대로 구역을 점령하고서는 '군용지'라 이름 붙이고 푯말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조선 땅 어디든지 빼앗고자 하는 땅이 있으면 군용지라 하면서 강탈해간 것이었다.
이에 온 국민의 비난은 당연히 의정서 체결의 당사자인 이지용과 그의 참서관 구완희(具完喜)에게 쏟아졌다. 그들을 매국노로 규탄하고 그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일본 순사 10여 명을 항상 이지용에게 붙여서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우리나라에 보내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토를 보낸 데 대한 답사로 우리나라에서도 3월 26일 이지용을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특파하였다. 그런데 이지용은 일본에 가서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는다. 의정서 체결의 공로를 일본이 모르는 체하지 않은 것이리라. 귀국한 뒤에도 그는 법부대신, 규장각 학사, 판돈녕 부사, 교육부 총감 등을 거쳐 1905년 농상공부 대신, 내부대신 등 요직을 역임하고 1905년 11월에는 특명대사로 다시 일본에 가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으니, 이 두번째 훈장은 바로 '을사보호조약'에 도장 찍은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
의정서 체결에 이어 1905년 11월 17일 이지용이 당시 내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에도 '가'(可)를 하고서 돌아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나는 오늘 병자호란시의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大韓季年史}, 171면). 최명길은 병자호란시 주화론자로서 종사를 지키고자 했지만 이지용이 을사조약에 서명하여 지키고자 한 것은 일신의 영달과 재물이 아니었을까. 그 얘기를 듣는 사람마다 침 뱉고 욕하면서 가소롭다 하였음은 물론이고 격앙된 군중은 그의 집을 방화하였다.
그런데도 이지용은 11월 29일 이토의 귀국에 맞추어 열렸던 송별연에 각부 대신과 함께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고종황제에게 말하기를, "이토의 말이 통감이 오는 것은 단지 외교를 감독할 뿐이며 기타 정무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 하고, 만약 여러 사람이 한마음으로 정무를 잘 처리하면 1년이 되지 않아 당연히 국권을 돌려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면서 거짓으로 고종을 안심시켰다. 그런 그가 1906년 10월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에 간 것은 이토가 한국에 더 오래 머물러 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을사조약 당시 내부 참서관으로 있던 조남익이라는 사람은 이지용과 도저히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직에 나가지 않았고 또 교체를 원하면서도 이지용에게 청원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자신의 집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한다.
일본인들과 놀아난 부인 이옥경의 친일 행각
이지용에게는 뛰어난 미모의 아내 이옥경(李玉卿:원성은 홍씨)이 있었다. 그녀는 1906년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일본 공사관원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및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의 처와 궁내대신 민영철(閔泳喆),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재극(李載克), 한성판윤 박의병(朴義秉) 등 상류층 고관들의 부인 다수가 참여한 친일 부인단체로서 이옥경이 부회장을 맡았다. 이옥경은 특히 영리하고 예뻐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하기와라와 정을 통했다가 또 구니와케와 통하고 뒤에는 하세가와와 정을 통하니 하기와라는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옥경이 전송을 나와 입을 맞추자 그녀의 혀끝을 깨물어 상처를 입혔다. 이옥경은 아픈 것을 참고 돌아왔으나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그녀를 조소했다. 또한 그녀가 여러 일본인을 바꿔가며 서로 좋아하고 일본인 또한 그것을 질투하는 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장안에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황현, {매천야록})
그녀는 또 일본어와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며 양장을 하고 이지용과 함께 팔짱을 끼고 돌아다녔다. 또한 인력거를 타면 얼굴을 내놓고 궐련을 피우며 양양하게 돌아다녀서 행인들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이지용이 허랑방탕하다고 누차 고종의 견책을 받았으나, 그녀가 고종의 계비인 엄비(嚴妃)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고종의 뜻을 회복시켜 이지용이 드디어 요직에 등용되었으니, 그녀의 방자한 행동을 이지용은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종척대가가 의(儀)를 좀먹어 먼저 망하니 외국인에 대하여 우리를 예의지국이라 칭하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한다.
한편 미모와 기개가 모두 뛰어나기로 소문난 산홍이라는 진주 기생이 있었는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가서는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산홍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권력과 재물로도 한 미인의 기개를 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또 이지용의 아들 이해충(李海忠)이 일본에 가서 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더니 유학생들이 "우리들이 비록 타국에 있지만 역적의 아들과 함께 배울 수는 없다" 하고 내쫓아 입학을 할 수 없었다. 이지용이 직접 일본에 건너가서 수백 원을 기부하며, 유학생들의 여비를 보조하려 하였지만 유학생들은 "우리들은 비록 역적의 재물을 쓰지 않아도 이제까지 죽지 않았다"라고 준엄히 거부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吳基鎬), 나인영(羅寅永) 등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지용을 죽이러 갔을 때 이지용은 용산 강정에 있었다. 이지용 암살을 맡은 사람이 가서 엿보니 사동(寺洞)에서의 권중현 암살 미수사건이 이미 전화로 보고 되어서 병정 60여 명이 급히 달려와 호위하고 있었으므로 역시 죽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도박에 탕진한 백작 수당 3000원
1907년 봄 대구의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 등이 단연회(斷煙會)를 설치하고 국채보상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국채 총액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인구 2000만이 모두 담배를 끊으면 1인당 1개월에 담뱃값으로 새 화폐 20전씩을 거둘 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석 달 안에 국채 원금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취지였고 전국적으로 큰 호응이 있었다. 고종과 황태자도 이에 호응하여 권련을 멀리하자 각급 학교 생도들과 군인들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우리 주상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이랴" 하고 담배를 끊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이지용을 협박하여 이를 금지시키게 하려 하였으나 이지용은 "우리 국민들이 나를 오적의 괴수로 지목하고 있어 몸 둘 곳이 없소. 다른 일은 금할 수 있으나 오직 이것만은 가히 금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정미조약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부의 이토가 조인할 때도 이지용은 나서기를 사양하며 "우리는 을사조약을 맺은 이래 위로는 황제를 우러러 뵈올 수 없고 아래로는 백성을 대할 수 없어 제대로 허리를 펴서 얼굴을 쳐들 수도 없는 형편인데 오늘에 이르러 또 이 안을 담당하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 하고서 조인에서 빠졌다. 한일의정서 체결, 을사조약 서명 등으로 인하여 역적 괴수로 지목된 후 방화, 암살 위협, 갖은 모욕 등에 겁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친일의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일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7년 5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박람회 시찰을 위해 세 번째 도일하여, 다음해 2월에 대훈(大勳)에 특서되어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연 수당 3000원을 받아 도박에 탕진하다가 1928년 사망했다.
⊙ 참고문헌 ⊙
◦ 黃 玹,{梅泉野錄}.
◦ 尹孝定,{風雲韓末秘史}.
◦ 鄭 喬,{大韓季年史}.
◦ 大村友之丞,{朝鮮貴族列傳}, 1910.
◦ 細井肇,{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 1910.
이근택 (李根澤, 1865∼1919)
◦ 1905년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조인
◦ 1910년 한일'합방' 공로로 훈1등 자작
◦ 191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명성황후의 환심을 사 출세의 길로
이근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조인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의 한 명으로, 친일매국노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근택이 처음부터 친일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종의 측근으로서 근황주의자이며 친 러시아적인 인물로 간주되었었다.
그런 그가 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는 그의 정치적 노정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근택은 문벌 있는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1865년 충청북도 충주의 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가 향리에 있을 때인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난오자, 그는 매일 신선한 생선을 명성황후에게 바쳤다. 이 공으로 명성황후가 환궁한 뒤 1883년에 남행선전관으로 임명되었다. 왕실과의 직접적인 인연으로 출세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는 1884년 무과에 합격한 뒤 1894년까지는 지방관 등을 거치면서 중앙에 진출할 기회를 모색하였다.
1896년 2월 고종이 그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조선은 본격적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뿐만 아니라 환궁을 모의하는 등의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 등 친러파와 친일파의 미묘한 정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이근택은 친위대 제3대대장으로 있었다. 이근택은 이창렬(李彰烈) 등과 함께 국왕의 환궁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1주기를 기하여 고종이 명례궁에 나와서 친히 제사를 지내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의 환궁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는 이용태(李容泰)의 고발로 실패하였고 이근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이근택은 대한제국이 수립되던 1897년에 민영기(閔泳綺)에 의해 석방되어 한성판윤, 경무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이근택이 요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이근택이 일본상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수대(繡帶:허리띠)가 있는 것을 보고, 명성황후의 것이라 판단하여 일본인에게서 6만 냥을 주고 사서 고종에게 헌상하였다.(황현, {매천야록})
이로 말미암아 고종의 총애를 얻게 된 이근택은 대한제국 시기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주로 경무사, 경위원 총관, 헌병사령관, 원수부 검사국장 등 경찰·군사부문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실 중심의 근대화정책이 수행되었는데, 군사·경찰부문에서는 이근택이 책임을 지고, 재정·외교부문에서는 이용익(李容翊)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근택은 이용익 등과 함께 고종의 측근으로서 근황주의적인 인물이었고 대한제국시기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친러파 전력을 씻기 위해 더욱 열성적으로 친일
당시 국내외적인 상황은 조선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우위권 쟁탈전이 계속되는 형국이었는데, 이근택, 이용익 등을 주축으로 한 대한제국 정부는 대외관계에서 친러·반일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고종과 당시의 정부대신들은 1895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배일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러시아의 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친 러시아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이근택과 같이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던 사람은 이용익이었다. 비록 두 사람은 정쟁 관계에 있었지만, 러일 양국 사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해야 하며, 러시아나 미국 등 열국의 보호 하에서의 한국의 독립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친러적인 입장이었던 이근택은 고종에게 일본은 러시아와 개전할 처지도 못되고 설령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러시아의 승리는 필연적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시국이 급박할 경우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청하는 등(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 37권 1책) 일본보다는 러시아세력에 의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근택은 김인수(金仁洙)를 러시아에 파견하여 조선에서 일본의 패퇴는 일전(一戰)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뜻을 전하는가 하면, 차병(借兵)을 요청하는 서한을 러시아 총독 알렉셰이프 대장에게 비밀리에 보내기까지 하였다.
한편 이근택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대신들이 친러적 경향을 띠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일본 측으로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곧 있게 될 러시아와의 전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 친러·반일적인 정부대신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요주의 인물인 이들의 행동을 탐지하는 등, 이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일본은 고종의 측근인 이근택, 이용익 등을 매수하여 자국에 협력하게 하려 들었다.
일본은 그 동안 매수·회유해 온 이지용을 더욱 독려하는 한편, 강력하게 배일적인 입장을 취해오던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였다. 그리고 다소 친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던 이근택을 여러 차례 협박하여 일본에 반대하지 못하게 한 뒤,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에 조인할 것을 강요했다. 이 의정서는 명목상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아 식민지화하는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에 의한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한국민의 배일감정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 같은 정부대신에 대한 회유·납치는 대신들을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근택을 비롯한 이들 정부대신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우세해지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하는 세력들로 변해갔다.
이미 1903년 9월부터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을미사변 때의 망명자에 대한 처분건 등을 내세워 정부대신 이지용, 민영철(閔泳喆), 이근택 등을 매수하는 데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지용은 1만 원에 매수되어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일본공사에게 보고하면서 조약 체결에 열심히 협력하였고, 당시까지 배일적이던 이근택은 일본의 위협을 받게 됨에 따라 생각을 바꾸어 서서히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비록 이근택이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해도 그로서는 완전히 일본과의 관계를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면서도 일본 측으로부터 또한 신용을 잃지 않으려 하였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단지 협박·매수 때문에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정치적 수완이 탁월하였던 이근택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감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이근택이 비록 친러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었을지라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이근택 자신의 출세에 일본세력을 이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근택은 이미 일본에 매수되어 친일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던 이지용이나 민영철 등과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이근택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1904년 8월 22일에 '외국인 고빙(雇聘)조약'을 강요,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단행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05년 11월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위협을 통해 비밀리에 '을사조약'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소위 보호국으로 만들어 식민지화의 옥쇄를 더욱 조이기 시작하였다.
이근택도 일본 측에 매수되어 적극적으로 조약 체결에 협조하였는데, 친러적인 혐의로 일본공사의 눈 밖에 나 있던 터라 오히려 열성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이지용으로 하여금 일본공사관과 계속 연결을 유지하게 한다든가, 자신의 동생 이근상(李根湘)으로 하여금 일본공사관 사람들과 자주 접촉을 하게 하는 등, 친러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는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드디어 친러파라는 혐의를 풀고 을사조약 조인 이전인 9월 군부대신직에 오르게 되면서, 이근택의 친일행위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즉, 그는 30만원이라는 기밀비를 일제로부터 받고 궁중과 부중의 모든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일본에게 제보하는 등의 일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이근택은 을사조약의 조인에 협조한 공으로 조약이 체결된 그 다음해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을 얻고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을사오적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나
이근택의 친일성향에 대해 황현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근택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와는 형제의를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
한 야인의 눈에 비친 이근택의 모습이다. 이렇게 일본이라는 보호막을 두르고 일본에 부화뇌동하였으니,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 그는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기도 한 것이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알게 된 국민들은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는 등 그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를 부르짖고 오적을 규탄하는 유생, 관료들의 상소투쟁이 연이어 일어났다. 또한 오적에 대한 암살기도가 계속 모의되는 등 민중의 적극적인 저항도 일어났다. 이근택은 오적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기산도(奇山度) 같은 애국의사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기산도는 이근택의 집을 출입하던 사관학도였는데, 이근택이 을사조약의 조인에 찬동한 소행에 분노하여 전(前) 경무사 구완희(具完喜), 전 경무관 이세진(李世鎭) 등 수십 명의 자객을 모집하여 이근택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들은 칼을 품고 가서 이근택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기도가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에 의해 계획되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들의 규탄과 울분이 조약을 체결한 매국노를 피습하거나 암살하려는 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근택의 노비도 상전의 친일행위에 분노할 정도였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한 이근택은 가족을 불러놓고 궁중에서 신조약을 조인하던 광경을 설명하였다. 이근택은 자신이 백성을 위하여 조약서에 가(可)함이라고 썼고, 일본의 신임을 얻어 대 훈공을 얻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권세를 더욱더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득의만만하였다. 그러면서도 이근택은 "내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비녀(婢女) 한 명이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칼을 집어 들고 뛰어나왔다. 이근택이 한규설(韓奎卨)의 딸을 며느리를 삼았을 때, 그 며느리가 데리고 온 속칭 교전비(轎前婢)였던 그녀는 "이근택아! 네놈이 대신이 되어 나라가 위태한데도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 내 힘이 약해서 능히 너를 만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고 소리치고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또한 한 취객이 그의 수레를 당기며 흘겨보고 말하기를 "네가 왜놈이라 하는 이근택인가. 오적의 괴수로 그 영화와 부귀가 이에서 그치는가" 하니 이근택이 크게 노하여 그를 결박 지어서 경찰서로 보냈다. 그 취객은 모진 고문으로 기절하였다가 밤이 깊어 깨어나서 말하기를 "네놈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나 또한 명백히 욕질을 하였으니 죽어도 통쾌하다. 저들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자" 하고 드디어 의복을 찢어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이와 같이 이근택은 민중의 분노와 지탄을 받으면서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내각에서는 한 대신에 불과하면서도 궁중에서는 수상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의 오만불손함은 통감의 진의라 하면서 자신을 신임하던 고종을 기만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안하무인격인 이근택의 이러한 태도와 아울러 을사오적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지탄이 더욱더 거세지자, 이근택은 한때 파면되어 관직을 잃기도 했다.
이에 이근택은 이토, 하세가와, 아카시(明石塚) 등을 만나 잃어버린 군부대신직을 되찾고자 운동을 하고 다녔다. 이 당시의 신문에는 이근택의 엽관행각들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전(前) 군부대신 이근택이 이미 체직된 직위를 얻고자 운동한다는데, 송병준에게 소개하여 일본인 하세가와 대장에게 청하려 하였지만 첫 번째는 송병준이 접견하고 두 번째는 거절하여 만나지도 못하였고…….({황성신문}, 1906. 12. 3)
전 군부대신 이근택이 통감관저에 갔다가 접견도 못하였고 하세가와 대장을 방문하였는데 역시 접견 못하였고…….({대한매일신보}, 1907. 10. 8)
중추원 고문 이근택이 통감부 아카시 장관에게 비밀 교섭하여 대신직을 얻기 위해 운동중이고…….({대한매일신보}, 1909. 6. 21)
중추원 고문 이근택이 이토 추밀원장이 도한(渡韓)한 후 대신 한자리라도 얻으려고…….({황성신문}, 1909. 7. 6)
이근택, 이근상은 대신자리라도 얻으려고 한다.({경향신문}, 1910. 3. 25)
이 기사들은 한 출세지향적인 인간이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다시 그 자리에 오르고자 몸부림치는 비열한 모습을 적절히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이러한 그의 친일 행위는 1910년 8월 한일'합방'까지 이어져,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과 미국 공채 5만 원을 받았으며, '병합' 후에는 그 해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종4위 훈1등으로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이근택의 작위는 아들 이창훈(李昌薰)이 습작함으로써 대를 이어 일본의 '충량한 신민'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이근택의 형인 이근호(李根澔), 아우인 이근상 등도 한일'합방'과 동시에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는 당시의 친일행각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일가친척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특기할 만한 일이다.
⊙ 참고문헌 ⊙
◦ {皇城新聞}.
◦ {大韓每日申報}.
◦ 黃 玹, {梅泉野錄}.
◦ 鄭 喬, {大韓季年史}.
◦ 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
첫댓글 황제폐하의 친서로 을사5적을 부관참시하노라
매국노 대장 이완용 무덤을 파헤쳐 그뼈다귀를 믹스기에 갈아
개밥으로 주고 나머지 을사 4적들 무덤을 파헤쳐
뼈다귀를 기시다 일본 총리에게 보내어 일본 박물관에 보관토록하라
일본놈 쪽팔이피를 가진 인간들은 더이상 한국에 묻을수 없다
이완용 생가가 분당 판교인데... 그 부지에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동네 주민들끼리도 쉬쉬 한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