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은사
2023. 2. 5(주일낮예배) 고린도전서 12:7-12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 이 말은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진 사람이 모인 교회공동체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세워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갈 수 있겠는가? 눈이 많이 온 후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래서 온 도시가 빙판길이 되어 사건과 사고가 계속되던 한 주간이었다. 주일이 되어 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차량사로로 인하여 다치거나 죽는 일이 없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온 성도들과 함께 기도한 후에 예배를 마쳤다 그렇게 예배를 마친 후 3명의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 오늘 설교 너무 은혜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자동차 정비일을 하고 있고, 저 사람은 골절전문병원을 하고 있고, 저 분은 장의업을 하고 있습니다. 요 며칠 저희는 하나님이 큰 축복을 허락하여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감사헌금도 드렸지요. 그런데 오늘 목사님의 기도는 적절한 기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인들의 입장이 다른데, 사고없는 세상을 기도하는 것은 저희들에게는 죽어라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앞으로 적절한 사건과 사고로 인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될 수 있겠는가?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이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은사마저도 자기 자랑과 비교거리로 삼았다. 그러한 고린도교회에 바울은 오늘 본문으로 말한다.
(고전 12:8-11)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의 은사를 각기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은사들을 곰곰이 묵상해 보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나오는 은사인 지혜(소피아)의 말씀과 두 번째 나오는 은사인 지식(그노시스)의 말씀을 보기 바란다. 지혜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에 잘 적용하고 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잘 적응하고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 은사는 지식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지식의 말씀을 받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지식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완전한가?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말씀을 많이 아는 것으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말씀은 아는 것만큼 그대로 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말씀을 은사로 받은 사람은 그 말씀대로 사는 방법을 지혜의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생각에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 중에 어느 은사가 더 커 보이는가? 저도 방언기도를 하지만, 방언으로 기도하면 가슴에 뜨거움이 있고, 열정이 쏟아진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나면 내가 기도를 했구나! 하는 그런 뿌듯함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내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 내용을 알려주는 방언통역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방역통역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방언기도하는 사람이 옆에 없으면 그 은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더 좋고, 덜좋고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연합할 때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여교회는 다름으로 서로 보완하고 연합하고 있는가? 제가 이렇게 설교하면 저는 은사가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는 분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각기 다른 은사를 모두에게 주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하는 은사를 주었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말을 잘 듣는 은사도 주었다. 또 어떤 사람은 청소를 잘 하는 은사를 주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도 주었다. 각기 다른 은사이지만, 모두에게 하나씩 은사는 주신 것이다.
그러면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는가? 이번 주 제가 만난 집사님이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참는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면 콩 한개로 7명이 나뉘어서 먹는다. 그러면서 우애를 다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7명 중에 하나가 밭을 샀다. 그러면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야 하는데, 배가 아픈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것은 이겨낼 수 있어도 시기와 질투는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되어져 가는데,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 시기와 질투가 아닌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 후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고 기록한다. 우리 몸에 있는 손과 발과 귀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다. 우리 몸의 지체는 서로 다름으로 보완하고 연합하여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이 시기하고 질투하면 결단코 온전한 교회로 세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보완하고, 또 연합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곡리 대덕산 기슭의 대덕교회 민형자 사모님이 쓴 포도주와 빨간 사랑이라는 책이 있다. 1989년 목사님과 사모님은 대덕골에 들어가서 때로는 이발사가 되고, 또 때로는 장의사가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교회 성도집 변기를 뚫어 주었더니 교회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성도가 예배 시간에 기술자인 목사님이 자기 집 변기도 뚫어 달라고 해서 전전긍긍하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목사님과 사모님은 10년동안 대덕골에서 목회하던 어느날 사모님이 병원에 갔는데,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때 사모님은 자신이 아픈 것보다 사모가 왜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느냐? 몹쓸 병에 걸렸다 는 말을 들을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는 웃었지만, 가슴 속으로는 고통과 눈물이 절절 흐르고 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한 사모님은 밤에 잠을 자다가 너무아파서 눈을 떴다. 그런데 옆 침대 환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사모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병원에 있는 교회를 찾아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 그때 사모님의 기도제목은 고쳐달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모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모님은 기도하면서 수술을 받고 몇차례 더 항암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였다. 사모님이 퇴원하여 대덕골로 오는 날 온 교인들이 다 몰려왔다. 그 교인들과 반갑게 인사한 사모님은 나물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때부터 교인들은 다 바빠졌다. 교인들은 각기 사모님을 위하여 나물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80살이 넘은 최권사님은 봄나물을 캐어서 한움큼씩 먹기 좋게 손질해서 가져와서 사모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직 일러서 나물이 많이 안 나왔네유. 쬐금밖에 못 뜯었지만 약이려니 생각하구 입맛 읍서두 잡수세유. 사모님이 빨리 나서 돌아왔으니께 다행이지, 이 늙은이들 다 뇌두구서 젊은 사모님이 암이 걸려 입원했다니께 참말이지 이런 속상한 노릇이 어디 있나 싶은게... 그동안 울면서 기도한 거 말루 다 못해유. 사모님이 수술하던 날 즘심 때부터 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마루바닥에 엎드리믄 눈물부터 쏟아지는데, 늙은이들이 하도 울어서 울음받였어유
김춘기 목사님이 섬기는 대덕교회는 좋은 교회인가? 나쁜 교회인가? 시편 133편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시 133:1-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기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하면서 감탄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같고라는 표현으로 구체화하는데, 2절에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다(2절)고 하였다. 여기서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옷깃까지 내림같다는 이 표현은 아론의 임직식 장면이다. 대제사장인 아론은 임직식을 할 때 하얀 속옷에 청색 겉옷을 입고, 그 위에 청색,자색,홍색실로 가늘게 꼰 에봇을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12돌이 있는 흉패를 붙였다. 그리고 겉옷끝에는 수놓은 석류와 금방울이 간격을 맞추어 달렸다. 그런데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 그 기름이 옷을 촉촉이 적시면서 선명한 색깔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낡은 무지의 옷을 입고 있었던 시대에 화려한 옷을 입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대제사장의 임직식을 보면서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움에 반했을 것이다. 형제의 연합함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리고 3절의 헐몬산 이슬이 시온의 들에 내림같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너무 귀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북쪽에 골란고원에 위치한 헐몬산은 우리나라 백두산(2,593M)보다 321M 더 높은 2,914M이다. 이렇게 높은 헐몬산은 거의 만년설로 덮여 있어서 산위의 낮은 기온과 산아래 높은 기운이 마주쳐서 많은 이슬이 맺힌다. 그 이슬이 요단으로 흘러서 이스라엘 백성의 식수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헐몬의 이슬은 생명줄과도 같이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헐몬산의 이슬처럼 아름답고 귀중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여교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내가 누구보다 더 뛰어날 때 귀하고 아름답게 보지 않는다.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은사로 서로 보완하며 연합할 때 아름답게 여기고, 또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 자여교회가 하나님이 그렇게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는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연합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