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부터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오랜 기간 외국 생활을 통해 학문과 생계의 전장에서 생존했다. 이제 어떻게 한국에 안착하여 정착할는지는 또 다른 이슈였다. 지금까지는 내가 추구하는 개인적 문제였다면, 이제는 사회 속에서, 학교를 통해 생존해야 한다. 유학과 학문의 세계에서 배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실제로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기나긴 이야기를 짧은 칼럼에 다 쓸 수 없지만 최초로 내 이름으로 쓴 책이 있었다. 바로 <연구주제부터 포맷까지>(신학논문 작성법)이다. 2002년! 20년 전, 최초로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겪은 여러 경험으로 후배들에게 신학 논문을 쓰는 기술을 알려줘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글 쓰는 일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논문 작성, 즉 수백 페이지를 어떻게 글을 쓰는지는 정말 힘든 기술이었다. 미국에서 논문을 쓰는동안 그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도 가르치면서 그 효과를 보게 했다. 이제 그 경험을 바탕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논문이나 글을 쓰는 것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면도 있지만 독자의 생각을 바꾸거나 내 생각이나 주장을 납득시키는데 목적을 둔다. 합리적이다!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 일리 있다! 등등으로 독자가 느끼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글이 아니다. 특히 학문의 글을 학위 논문을 더욱 이런 납득이 없으면 통과받기 어렵다. 물론 언어의 장벽이 높고 높은데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독자나 현재 이 글을 읽는 독자를 설득시키거나 이해시키기 위해선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일관성이다.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일관성 없는 글은 읽는 자가 헷갈린다. 독자의 지적 수준조차 한몫을 차지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느 수준의 독자가 읽느냐는 글을 쓰는 자의 기본자세다. 아무튼, 글은 일관성이 없으면 독자는 금세 싫증을 느낀다. 그렇다고 계속 긴장만 조성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글은 감성적이기에 남아 있지도 않고 설득과는 다른 환경으로 전환한다. 설득을 위해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독자가 글 쓰는 이의 주장이 무엇인지 알게끔 해야 한다. 어떻게 그 맥락을 이끌어 따라오게 할 것인지는 글 쓰는 이의 몫이다. 또 글 쓰는 이 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명확해야 한다. 읽었는데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면 독자를 무시했든지, 독자가 미흡했든지, 글 쓰는 이가 적당하게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글을 쓰지 못하는 자가 독자를 제대로 설득, 납득, 이해하기 어려우면, 강력한 힘을 주기 위해 다른 자, 즉 권위 있는 자의 글을 인용한다. 그 인용이 그 독자에게 익숙하면 글 쓰는 자의 의도를 파악하게 이른다. 그런데 인용이 자칫하면 표절로 흐른다. 자신의 논리와 일관성으로 독자를 납득시키지 못하기에 다른 자의 글을 두서없이 표절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드러난다. 글 쓰는 초보가 한두 번 신기하고 탁월한 글귀를 표현할 수 있다. 짧은 수필이나 댓글을 멋있게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기나긴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인이 일관성 있는 자세가 아니기에 독자는 짜증을 낼 수 있다. 짧은 글로 글 쓰는 자의 실력이나 사상을 파악하기 쉽다. 의도나 목적은 알기 어렵다. 하지만 많은 문장, 많은 문단, 많은 단어, 많은 수식어로 구성된 단행본이나 글은 그렇게 쉽지 않다.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 부분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어렵다. 한 부분을 밝힐 수 있지만 전체를 파악하지 못했을 경우 파편적으로 들을 땐 그럴듯하지만 독자 역시 무엇을 들었는지 알고 있는지 간취하기 어렵다. 긴 인생이나 장거리를 통해 그의 삶이나 건강을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긴 글을 통해서 그 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견인으로 선택의 증거가 드러난다. 견인의 삶은 선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