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 사건(黃嗣永 帛書 事件)
1801년(순조 1년)에 천주교의 신자인 황사영 알렉시오가 조선에 자신의 신앙인 천주교를 강제하기 위하여,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끌어들여 자신의 조국인 조선을 멸망하게 하려는 역적 행위를 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황사영의 백서 작성
본래 조선에서 기독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개화기가 되기 전까지 기독교는 서학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윤지충 등이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의 신주를 미신이라는 이유로 태워버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의 국왕이었던 정조의 관용에도 천주교도들의 전도 과정에서의 기존 전통에 대한 부정과 파훼 행위는 멈출 줄을 몰랐고 그들은 계속 선을 넘기 시작했다.
물론,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이 남인을 박해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극성 천주교도들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조선과 조선 사회에 관철하고자 하였다.
신유박해로 인하여 조선에서 대규모로 기독교를 탄압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탄압을 피하여 도피를 하던 황사영은 제천(堤川) 배론(排論:舟論)의 산 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겼다.
굴속으로 도피한 황사영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조국인 조선이 멸망하고 자신의 동포들인 조선인들이 유럽인들에게 비참하게 짓밟혀도 상관이 없었는지 외국에게 침략을 해달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황사영은 굴 속에서 자신의 명주천에 외세의 침략을 유도할 1만 3,311자의 글을 완성했다.
이 글을 청나라의 북경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다.
이 글에는 당시 조선의 가톨릭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활동, 주 신부의 자수와 순교 사실, 신유박해와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간단한 전기를 기록했으며 조선 국내의 실정과 포교(침략)의 방안을 제안했다.
백서의 내용과 발각
백서는 앞부분에서 박해의 전말을 알리면서 초토화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전하며 신자 하나하나의 상황을 전함과 동시에 청나라가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해 청나라 황제(가경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했고 더 나아가서는 청나라의 감호(監護)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기를 희망했으며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했는데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0,000 ~ 60,000명을 동원해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협박해 주기를 희망했다.
즉 청나라에 의한 속국화 혹은 서양 군대에 의한 협박을 추진한 셈인데 당연히 이는 반란이다.
세자 책봉이나 후계 과정에서의 갈등으로도 역모가 성립되던 전제군주제인 조선에서 현대적 의미의 외환의 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으니 정말 엄청난 일이다.
이러한 백서를 가지고 청나라로 가려던 황심(토마스)은 검문에서 걸리고 말았고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가경제의 치세였는데 조선과 일본처럼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었다.
백서 자체는 의금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25년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입수해 교황 비오 11세에게 보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후폭풍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다시 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이전까지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은 '문화 충격'+'기득권 지키기'의 성격이었다.
따라서 정순왕후 본인도 피에 굶주린 악녀가 아닌지라 당초 목적인 남인 및 노론 시파만 무력화하고 적당한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지만 이 사건이 터지면서 '천주교=외세를 끌어들이는 반역자들'이란 인식이 박히고 말아 정순왕후가 박해를 끝내고 싶었다고 가정해도 박해를 중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신앙의 자유가 생기기커녕 더욱 거세게 가톨릭을 탄압하게 만들었으며 지방 유생들을 비롯한 지방 유지와 학자들에게도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크게 심어 줬을 뿐이었다.
즉, 기존의 천주교 박해 원인에 '외래 세력에 대한 적개심'까지 합해진 것이다.
조선인을 천시하고 인종차별하기로 악명 높았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조차도 "조선 정부가 엄벌에 처한 걸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연히 대역죄인이 되어 버린 황사영과 황심은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숙부 황석필은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귀양을 갔고 어머니는 관비가 돼 거제도로 갔으며 아들 황경한은 아내 정명련 마리아가 제주도로 귀양올 때 추자도에 두고 떠나면서 노비가 되는 걸 면한 후 오씨 성을 쓰는 가족에게 발견돼 보호를 받으며 자라면서 추자도엔 황사영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오씨 할아버지가 황경한을 발견해 거둬 키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오씨와 황씨는 서로 형제라며 통혼을 안 한다고 한다.
이 백서로 인해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더욱 거세졌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오페르트 도굴사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인해 조선 지배층에겐 내통세력으로 낙인이 찍혀 개항기인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전까지 천주교도들은 외세와 내통하는 세력으로 지목돼 탄압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