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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스터디 자료입니다.
4. 이론적 혁신의 요소들: 노동력, 임금, 소외 개념의 발전
요강에서는 수많은 이론적 혁신과 발전(transformation)이 나타난다. 헤겔적 방법을 발전시킨 것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많은 이론적 혁신과 발전이 존재한다. 우선 맑스가 요강에서 최초로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노동’ 개념을 ‘노동력’이나 ‘노동능력’ 개념으로 대체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강3,278)
평균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 결정−노동가치 이론−은 고전적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가장 위대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맑스는 어딘가에서 이러한 가치 개념이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부르주아적 혁명 원리를 그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부르주아적 혁명 원리란, “모든 종류의 노동은 인간 노동 일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경우에 한해서만, 서로 동등하며 등가라는 가치 표현의 비밀은, 인간의 동등성이라는 관념이 대중의 선입관으로 확립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해명될 수 있다”라는 원리를^ 가리킨다(자본론 1권, 60쪽). 그렇지만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노동의 가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들 자신으로서는 결코 환원할 수 없는 문제 조항에 직면하여 불가피하게 자신들의 본질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질문은 그들의 이론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 문제에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이론 그 자체는 단순한 동어반복, 즉 ‘노동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이다’라는 공허한 말이 되고 만다. 고전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곤란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 곤란을 회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해결하기 곤란한 딜레마 속으로 자신을 내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틀 속에서는 두 가지 해답이 가능하다. 먼저 ‘노동가치’는 노동자의 임금에 의해 표현된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노동자에 의해 창출되는 가치가 노동자의 임금보다 높기 때문에 이론의 기초적인 전제가 파괴되는 사태에 직면한다. 이런 대답만이 (산출로서의) 노동가치가 (임금으로서의) 노동가치보다 크다고 말하거나, 그 전제를 파괴하는 노동 이외의 또 다른 가치의 원천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 경로는 ‘토지, 노동, 자본’이 ‘공동적으로’ 묶여 ‘가치’를 창조한다고 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를 ‘생산요소’라는 개념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경로는 가치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포기하는 전적으로 신비적인 길일 뿐이다. 고전 경제학의 틀 속에서 가능한 또 다른 대안은, ‘노동가치’가 노동자의 산출물의 가치, 즉 생산물의 가치에서 표현된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산출물의 가치와 임금의 양 사이에서 발견되는 불일치를 돋보이게 하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가치’를 지불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본가에게 속아서 자기 노동의 가치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강력히 암시한다. 리카도는 이런 대안의 방향에서 연구했던 탓에 급진주의자라고 비난받았지만, 사실 그는 단지 이론 자체의 한계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직접적인 정치적 함의를 논외로 한다면, 이 두 가지 가능한 경로는 모두 서투른 정치경제학으로 귀착되는 딜레마를 되풀이하고 있다. 교환가치의 축적과 성장은 이 틀 속에서는 상대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수중에서)나 절대적으로(전체 사회의 총합)도 설명될 수 없어서, 독단적이고 인위적인 가정을 통해 도입되어야만 한다. 이 때문에 노동가치 이론의 핵심 명제는 대립물들의 직접적 동일성이라는 특성을 지녔던 것이다. 즉, ‘노동가치’는 ‘노동의 가치’와 일치하며, 동시에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전적 정치경제학은 자기 주장의 편의라는 필요에 따라 대립물 규정을 은연중에 이용함으로써, 이 같은 고유의 신비주의를 극복했을 뿐이다. 마침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모든 인간들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혁명적 원칙을 은폐하고, 그 반대되는 원리를 선전하게 되었을 때, 객관적인 의미에서 정치경제학은 가치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를 포기하게 되었다.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기반은 가격을 결정하는 일종의 점성술이 되고 만 것이다.(요강3,278-280)
이러한 이론적 궁지에 관한 맑스의 접근은 그 같은 곤란이 상품 형태에 대한 잘못된 개념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고전적 정치경제학은 본래 상품이란 사물이며, 이런 논법만이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의 자연스런 운명임을 말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고 가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상품들이 본래 사물이라고 단언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 가정은 여러 가지 적용 사례에 유용하지만, 상품인 ‘노동’에 적용될 경우에는 노동자들은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조작되며, 닳아빠지면 내버려지는 대상들이라는 자본주의적 편견만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정치경제학이 그러했듯이, ‘노동’이 사물이라는 관념도 그 사물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어쩔 수 없이 헛소리가 되고 만다. 맑스는 “노동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의 능력으로 존재했다.”(이 책, 1권 329쪽)^고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의 이익을 옹호하는 편에 서 있는가’를 진술할 뿐만 아니라 자본 축적의 신비도 폭로하고 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상품은 생명 있는 대상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 실존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힘이다. 이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노동가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마치 대수(對數)가 무슨 빛깔이냐고 묻는 것처럼 처음부터 잘못 제기된 것으로 등장한다. 노동은 노동자의 활동인 것이다. 노동은 모든 것을 창조하며, 그 자체로는 평가될 수 없다. 따라서 시간만이 유일한 측정수단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상품은 노동할 수 있는 힘이다.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 즉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리이다(이 책, 1권 287-288쪽, 296쪽).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의 판매는 따라서 ‘순전히 경제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동안 자기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채 노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자유롭지 못한 한 인간이 된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것에 대해 이렇게 개념화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는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를 얻게 된다. 맑스의 추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맑스의 사고는 노동가치 이론, 즉 보편적 인간 평등의 원리에 내재한 혁명적 기초를 간직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부르주아 형태의 노동가치 이론에서는 이 원리가 노동자에게 인간 해방의 진정한 반대 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력’ 개념과 더불어 맑스는 고전적 가치론의 내재적인 모순을 해결하고 있다. 그는 고전적 가치론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요소, 즉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 결정을 보존한 가운데 부르주아적 이론이 정면으로 맞닥뜨릴 수 없었던 자본축적 이론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론의 타당한 요소의 혁명적인 요소를 보존하고, 그 속에 포함된 부르주아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맑스는^ 낡은 이론을 그 자체의 대립물로 전환시켰다. 부르주아적 지배의 정당성에 관한 비판적 논의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의 노동에 의해 부유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어째서 이 체제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체제의 전복을 꾀하는 투쟁을 선도하는 공산주의 정당에 관한 이론으로 전환된다.(요강3,280-282)
좀 긴 감이 있지만, 맑스의 팜플렛 「임노동과 자본」(1849)의 재판에 실린 엥겔스의 서문(1891)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노동’에서 ‘노동력’으로의 시각 이동이 지니는 중요성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서문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840년대에 맑스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미처 완결 짓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작업은 50년대 말엽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따라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의 1분책 이전에 나온 맑스의 저술들은 각각의 논점에서 1859년 이후에 씌어진 것들과 차이가 있는데, 이후 저술들의 견지에서 보면 중심을 비껴가고, 심지어는 부정확하다고 여겨지는 표현들과 문장을 통째로 포함하고 있다. … 나는 이 판본을 발행하기 위해 필요한 약간의 수정과 보충에 착수하면서, 맑스의 의도에 따라 행동했음을 확신한다.(요강3,282)
내가 수정한 것들은 모두 한 가지 논점과 관련되어 있다. 원본에 따르면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을 판다. 이번 판본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나에게 설명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 같다. 우선 노동자들에게 설명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 변화가 단순히 인쇄 활자를 뒤섞는 사례가 아니라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논점 중 하나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부르주아들에게 설명해야 하는데, 이것은 −가장 어려운 경제학 분야에서의 진전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못 배운 무식한 노동자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평생토록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례한 ‘교양 있는 양반들’보다 얼마나 뛰어난가를 그들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맑스-엥겔스 전집, 제6권, 593쪽)
그리고 나서 엥겔스는 다섯 쪽에 걸쳐 낡은 노동가치 이론과 맑스의 잉여노동가치 이론 사이의 차이점을 가장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본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임노동과 자본」의 최신 판본은, 엥겔스가 바꾼 부분에 주석을 단 개정된 본문을 수록하고 있다.(요강3,283)
아직 잉여가치 이론이 완성되지 못했던 탓으로 요강 이전에 쓰여진 맑스의 초기 경제학 관련 저술들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의 물질적 조건들과 관련된 문제들을 거론함에 있어서 명확성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두 주요 계급이 처한 상대적 조건들의 간극−상대적 빈곤화−이 첨예화되는 현실은 맑스의 저술에서 시종일관 변함없이 나타나는 주제이다. 초기의 경우 절대적 빈곤화 문제, 또는 고용 노동자들의 임금이 동물의 생존에나 필요한 수준 또는 그 아래로 반드시 떨어지는가의 여부를 논의하는 데서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임노동과 자본」의 원문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본질적으로 명백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후에 출판된 1847년의 수고인 「임금론」에는 그 당시 맑스의 사고가 좀더 자세하게 반영되어 있다(맑스-엥겔스 전집 6권, 535쪽). 이 수고에서 맑스는 단 기간에 상승하기도 하고 하락하기도 하는 임금 변동이 ‘변화하는 상업의 유행, 계절, 상태’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임금이 일단 하락하면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다시 상승하는 것을 가로막는 효과가 단속적으로 작동하고, 그 결과 장기적인 견지에서 보면 “임금의 최저치는 …이제까지 절대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하락하며”, “…노동자가 교환에서 획득하는 상품의 양은 언제나 보다 적게 된다”고 주장한다. 맑스는 이런 문제에 관해 여전히 리카도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으며, 리카도처럼, “이윤과 임금의 반비례관계”가 엄격히 존재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같은 책, 543, 544, 554쪽). 이런 사실로부터, 자본가의 이윤 증가는 모두 임금의 하락을 전제하며, 자본가의 축적은 궁핍을 통해 노동계급을 절멸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점이 이해되는 것이다. 맑스의 이러한 일면적인 견해는 요강에서 리카도의 이윤 이론을 전복함으로써 바로잡힌다. 임금과 이윤의 직접적인 역(逆)동일성은 단기적으로만, 그리고 착취의 강도(예를 들면 생산 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경우에만 계속된다. 어느 정도 장기적인 경우, 특히 경제순환의 상승 국면에는 임금과 이윤의 절대량이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 동안 노동자는 다음에 닥칠 공황에 대비하기 위해 얼마 되지 않는 저축 자금을 모으는 위험을 무릅쓸 수도 있고, “좀더 고상한 만족, 심지어 문화적 만족이라도, …[예컨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여론의 환기, 신문 구독, 강연 참석, 자녀 교육, 취미 계발 등, 단지 자신과 노예를 구별지을 수 있을 만한 문명의 혜택”(이 책, 1권 292쪽)을 구성하는 부분에 조금이나마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소비 영역을 넓히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번영기에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양상이란 “자본에 대한 역사적 정당화는 물론 당시에 자본이 지닌 힘이 근거하는, 본질적 문명화의 계기이다.”(이 책, 1권 292쪽) 게다가 경제주기와는 상관없이, 개별 자본가들 사이의 이윤 배분 기제에 의해 노동계급의 한 부분이 “잉여임금”(이 책, 2권 56쪽)의 형태로 자신들이 생산한 잉여가치의 극히 작은 부분을 받는 일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문제의 일면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또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 첫째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노동의 중지”(실업), “노동자의 지위 하락”, 생명의 고통스런 고갈이 나타나는 공황과 “번영”이 교차하면서 순환 과정을 밟아 나간다(이 책, 3권 16-17쪽)(맑스가 영어로 작성한 부분. 생산 능률 향상과 결부된 실질임금의^ 절대적 감소). 게다가 위기에 의해 조정되지만 그 위기와는 별도로, 자본주의의 진전과 더불어 잉여인구, 즉 자본에게 유용한 고용 부분에 대해 잉여로 존재하는 노동계급의 비율도 전체적으로 증가한다. 이 잉여노동력의 일부분은 곧 다가올 자본주의적 축적 시기들을 대비해 예비 부분으로 유지된다. 또 다른 일부는 영구적인 극빈자로 국가 세입으로 연명하며, 그 나머지는 룸펜이 된다(이 책, 2권 262-266쪽). 이 잉여 인구 전체−자본주의적 축적의 필요에 따른 상대적 잉여인구−는 자본이 자체의 내재적인 한계들과 장벽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커진다(이 책, 2권 262쪽). 마지막으로, 주기적인 과잉생산 위기가 그 가혹함이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한층 대규모로” 되풀이하여 일어난다(이 책, 3권 17쪽). 따라서 요컨대 상대적 빈곤화로 나아가는 장기적인 역사적 경향은 절대적 빈곤화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노동계급의 비율이 증가하는 장기적인 역사적 경향을 동반한다. 이때 노동시장에 잔류한 노동계급 전체는 절대적 빈곤화가 보편적인 숙명이던 시기의 경험, 달리 말해 증가일로에 있던 첨예한 위기로 인해 산산조각 나며 점증하는 불안정을 수반하던 시기의 참혹한 경험을 다시금 겪게 되는 것이다.(요강3,283-285)
따라서 요강에 등장하는 이론−논점의 대부분이 나중에 자본론에서 정교해진 이론−은, 단일 요소나 단일 추세를 정식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임금의 수준이 전체로서의 물질적 조건들의 구성요소들 중의 하나만을 겨우 보충하는 데 그치는, 노동계급의 실제적 삶의 경험에 더욱더 적절하게 부합한다. 요강에서 만들어진 이론은, 노동조합의 적실성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구래의 이론에 비해 정치적으로 우월하다. 이전의 단일 요소에 기반한 선형적인 절대적 빈곤화 테제에서라면, 그러한 조직들이 경제적으로 어떤 유용성을 지닐 것인가를 파악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독일에서는 정확히 이런 테제에 기반해서 바이틀링과 라살이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결속을 가로막기 위해 유사한 이론인 소위 ‘임금 철칙’을 사용했다. 영국에서는 오웬의 신봉자인 ‘시민’ 웨스턴이 동일한 결론을 주장하기 위해 그 같은 임금 이론에 근거했다. 맑스가 요강에서 행한 리카도의 이윤 학설에 대한 비판과 전복, 그리고 임금론의 필연적인 분기(分岐)와 같은 기본적인 요소로 인해, 그는 나중에 제1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이틀링-라살-웨스턴으로 이어지는 운동 경향을 분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잉여가치와 이윤 사이의 차이는 맑스로 하여금 착취적 무역 관계를 개략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이 책, 3권 178쪽).)(요강3,285-286)
여기에서는 소외론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겠다. 그러나 소외론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간단한 언급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요강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의 하나여서, 그저 조금만 논평하더라도 어느 정도 광범위한 논평의 의미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요강3,286)
맑스는 더 이전의 저작들, 그 중에서도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소외’가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의 여부, 또는 소외가 특수하게 역사적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서,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명백하지 않은 진술을 남겨 놓고 있었다. 요강보다 총체적인 일관성과 명쾌함이 훨씬 부족했던 이 저작에서 맑스는 ‘소외’ 개념 자체를 ‘대상화’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했으며, 이러한 동일성에 기초하여 소외를 표현하고 있었다. 혹자는 대상화−즉, 사물로 되는 것−가 수렵경제^보다 발달한 모든 인간 사회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용어가 소외에 관한 맑스의 전형적인 시각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강에서 이러한 논점이 딱부러지고 전체적으로 견실하게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구절들 가운데 한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간략한 발췌문을 인용하겠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특정하며 역사적인 사회 발전 단계에 철저히 갇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회적 노동력의 대상화의 필연성은 살아 있는 노동과 맞선 소외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현상한다.”(이 책, 3권 125쪽)(요강3,287)
따라서 예컨대, 455쪽(이 책, 2권 77-78쪽)에서처럼 소외는 기본적으로 특수한 소유관계, 즉 적대적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매매(소유권의 양도)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본래의 사법적, 경제적 의미를 대부분 다시 획득하고 있다. 이런 예로는 779쪽(이 책, 3권 53쪽)에 인용된 스튜어트의 용어 사용을 들 수 있겠다.(요강3,287)
소외가 지배적인 대상화 형태인 역사적 국면은 단지 통탄할 불행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와 동시에 소외의 폐지를 가져올 전제조건들을 만들어내는 명확한 진전의 단계, 즉 진보의 단계임이 판명될 수밖에 없다. 소외와 대상화 개념 사이의 관계가 지닌 이런 진보적 면모는 낭만적 비판에 맞서 강조되어야만 한다(예컨대 이 책, 1권 143쪽과 2권 147쪽 및 3권 723쪽을 볼 것).(요강3,287)
마지막으로 요강에서는 ‘유적 존재’인 인간 대신 매우 폭넓고 일반적으로 정의된 개인성의 두 가지 유형이 논의되고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사적 개인’으로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이자, 상품, 즉 노동력의 ‘소유자’이기도 한 사적 소유자로서의 개인을 의미한다. 이때 개인은 교환과 가치 관계 속에 실존하는 개인이다. 사적 소유관계의 폐지는 이러한 종류의 개인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조건들을 폐지하는 것과 같다. 사적 개인의 자리는 사회적 개인에 의해 대체된다. 사^회적 개인은 계급 없는 사회에서의 개인이며,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덜 발전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 직접적인 사회적 본질 때문에 더욱 더 발전하는 인격의 유형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난에 찌든, 하찮고 제한된 개인성에 반대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은 필요와 능력의 전면적이고 완전하며 풍부한 발전을 드러내 보이고, 보편적으로 발전하는 특성을 띠게 된다(이 책, 1권 143쪽, 185쪽, 212쪽과 2권 381-384쪽 및 3권 16쪽, 125쪽 등).(요강3,287-288)
수고의 발전된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이 자리에서 내친 김에 이후의 논자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 만큼 당연히 유명해진 기계와 자동화를 다룬 부분(이 책, 2권 340-388쪽)에 대해서도 한 마디 꼭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맑스는 특히(그리고 덧붙이자면 이런 통찰은 이미 헤겔에게도 나타난다), 분업의 진전 및 자본주의적 생산 규모의 증가와 더불어 기계체계가 점점 자동화됨에 따라, 산업 공정에서 노동자의 역할이 능동적인 역할에서 수동적인 역할로, 주인의 위치에서 톱니바퀴 같은 존재로, 심지어는 참여자에서 관찰자로 변형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일부 저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구절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손노동과 산업노동 및 이러한 노동을 담당하는 계급이 사라지고, 아마도 공학자와 기술자라는 ‘새로운 전위’가 이들을 대체할 것이라고 암시하는 걸까? 이 부분을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기계화와 자동화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 진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반대 경향이 존재한다는, 여러 다른 구절들에서 명백하게 개진된 맑스의 진술을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대 경향의 예로는, 살아있는 노동보다 기계에 투자되는 비용이 증가함으로써 일어나는 이윤율의 저하를 들 수 있다. 기계에 대해 논의한 바로 그 구절에서도 맑스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따라서 가장 발전한 기계가 노동자로 하여금 야만인보다, 또^는 그 자신이 가장 단순하고 조잡한 도구를 가지고 있던 때보다 더 긴 시간을 노동하도록 강요한다.”(이 책, 2권 384쪽)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이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물론 맑스의 저작 그 어느 곳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노동을 수행하는 산업노동자가 폐지되리라는 예언을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맑스의 주장은 그 반대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다.(요강3,288-289)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 말고도 기존의 이론들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킨 다른 수많은 언급들을 인용할 수 있다. 맑스의 이론은 생산 영역 외에 유통 영역에서도 국가 형태에 관한 이론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략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자본주의적 독재의 근거로서, 후자는 민주주의라는 외피의 근거로서 말이다. 맑스는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실상 자신의 저작 속에 국가 형태론이 내재해 있다고 말하고 있다(맑스-엥겔스 전집 30권, 639쪽). 그러나 물론 그 이론은 많은 발전이 필요하다고 본다.(요강3,289)
맑스의 시대 이후 가치론−가치법칙−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국가들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되었다. 요강에 담겨 있는 방대한 분량의 논점들이 이 문제와 관계되어 있다.(요강3,289)
그 유명한 1859년 서문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자본론에서는 이 문제에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요강은 이 문제에 관한 한 길고 광범위한 논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반대로 1859년 서문의 정식화는 한 마디로 말하면 요강의 요약인 셈이다.(요강3,289)
이 같은 논평들은 계속될 수 있다. 요강은 맑스가 미래 사회에서 출현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풍부하고 전면적으로 발전한 개인의 출현을 이론상으로 선취한 것과 같다. 각 시대마다 어떤 이는 그 시대로 되돌아가는 반면, 어떤 이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요강3,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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