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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태조(太祖)의 왕세자(王世子) 책봉(冊奉)에 관한 고찰(考察)
글쓴이: 강훈기
이 글은 신천강씨 대종회보 제27호에 실린 글입니다.
고려(高麗) 말에 불세출의 명장이었던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1392년 7월 17일에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했습니다. 조선의 국왕이 된 태조 임금은 8월 7일에 강씨(康氏) 부인을 현비(顯妃)로 책봉하여 국모(國母)로 삼았고, 이어서 8월 20일에는 국모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하여 새 조선을 이끌 국본(國本)을 정(定)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한씨 부인 소생의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이 호시탐탐(虎視眈眈) 기회를 엿보다가 태조 임금이 병환 중임을 틈타 1398년 8월 26일에 기습적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제일 먼저 조정(朝廷)의 주도 세력이었던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 등을 살해한 다음, 궁궐을 장악하고는, 왕세자인 이방석과 그의 형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을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했고, 경순공주(慶順公主)의 남편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또한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정안군 이방원은 극구 사양하는 둘째 형 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를 왕세자로 세우고,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때문에 졸지에 권력을 잃은 태조 임금은 더는 옥좌(玉座)를 지킬 수 없게 되자, 환란을 당한 지 열흘도 못 채우고 9월 5일에 왕세자인 이방과에게 양위(讓位)하고는 물러났습니다.
그 후 18개월만인 1400년 1월 28일에는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과 정안군 이방원이 공석인 왕세자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했던 선죽교에서 동복형제(同腹兄弟) 간에 맞선 전투에서도 정안군 이방원은 형을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회안군 이방간의 세력까지 제압한 그는 드디어 1400년 2월 1일에 형인 정종(定宗)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왕세자(王世子)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13일에는 마침내 정종으로부터 양위 받아 등극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太宗)입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해 그 시대의 역사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면, “제1차 왕자의 난”을 “정도전의 난” 또는 “방석의 난”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니면 무인년에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바로잡았다고 해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 했습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 여러 원인 중에서 가장 큰 원인으로 태조 임금이 어린 서자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운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지나친 욕심 탓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위주로 관련 기사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어느 것이 옳고, 그른 지를 가려보기 위해, 조선 태조의 왕세자 책봉에 관한 검토를 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 태조는 왕세자 책봉에 장자(長子)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는 2명의 부인에게서 8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한씨(韓氏) 부인은 6명의 아들로 방우(芳雨), 방과(芳果), 방의(芳毅), 방간(芳幹), 방원(芳遠), 방연(芳衍)을, 그리고 강씨(康氏) 부인은 2명의 아들로 방번(芳蕃), 방석(芳碩)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왕세자에 책봉된 이방석은 태조 임금의 막내였기 때문에 장자(長子)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이 태조 임금에게 왕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功勞)로서 세울 것을 청했습니다.
[어린 서자 이방석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 처음에 공신(功臣) 배극렴(裴克廉),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를 존중하여 뜻이 이방번에 있었으나, 이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사적으로 서로 이르기를, “만약에 반드시 강씨(康氏)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 아들이 조금 낫겠다.”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장자(長子)로서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서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렴이 말하기를, “막내아들이 좋습니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결정하여 세자로 세웠다.] <태조실록, 태조 1년(1392년) 8월 20일 기사>
태조 임금의 왕자 중에서 적장자 원칙을 따랐다면 당연히 진안군(鎭安君) 이방우를 왕세자로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진안군 이방우는 지윤(池奫)의 딸과 결혼했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 이숙묘(李叔畝)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런 연유 때문이었는지 진안군 이방우는 창왕(昌王)을 옹립할 때 아버지인 이성계의 편을 들지 않고 이색을 지지했습니다. 이성계의 개혁세력이 아니라 그 반대인 구세력을 지지했던 사실이 새 조선의 왕세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하자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지란(李之蘭)의 <청해백집(靑海伯集)>에 의하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철원의 보개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일부 사학자(史學者)들이 내세우는 주장을 살펴보면 처음에 태조 임금이 장자 우선 원칙을 지켰으면 형제간의 골육상잔(骨肉相殘)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큰아들이 은둔해 버렸으므로, 둘째 아들로 세웠으면, 정안군 이방원이 난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주장에는 그 나름대로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원칙을 따르지 않고 영안군 이방과를 왕세자로 세운 사실에 동조하고, 그 논리를 수용한 데서 나온 주장입니다.
원래 왕위 계승(王位繼承) 원칙은 중국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데, 왕위를 왕에서 왕의 적장자(嫡長子)로, 왕의 적장자에서 왕의 적손자(嫡孫子)로 물려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장자 원칙(長子原則)은 근본적으로 부자(父子) 관계의 항렬(行列)로 계승되는 종법(宗法) 체제에 바탕을 둔 것이지, 연장자(年長者)를 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혈통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어서 아들이 없을 때는 양자(養子)를 들여 적자(嫡子)로 삼으면 왕의 동생이나 조카보다도 우선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물려주듯이 성인(聖人)이 성인(聖人)에게 물려주는 선양(禪讓)으로, 왕위를 물려받을 자의 성품(性品)과 덕목(德目)을 먼저 헤아려 어진 사람을 세우는 원칙입니다.
따라서 태조 임금이 왕위 계승원칙 중의 적장자 원칙을 정확히 지켰다면, 적장자인 진안군이 은둔했으므로, 그의 적장자인 봉녕군(奉寧君) 이복근(李福根)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태조 임금은 이 원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장자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지, 그의 왕자 중에서 연장자(年長者)인 둘째 왕자를 왕세자로 세우지 않아 장자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음의 인용문은 <태조실록>에서 발췌한 기사들로 이방원의 뜻을 좇아 작성한 상소문과 왕세자 책봉 교지에 적힌 글의 일부분입니다.
[이에 정안군이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소(疏)를 올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자로 세우면서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인데, 전하(殿下)께서 장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웠으며, 도전 등이 세자(世子)를 감싸고서 여러 왕자를 해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신령에 힘입게 되어 난신(亂臣)이 형벌에 복종하고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적장자(嫡長子)인 영안군(永安君)을 세워 세자로 삼게 하소서.”] <태조실록, 태조 7년(1398년) 8월 26일 기사>
[임금께서 마침내 영안군(永安君)을 책명(冊命)하여 세자로 삼고 교지(敎旨)를 내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우되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의 상도이며, 종자(宗子)는 성(城)과 같으니 과인(寡人)의 기대(望)이다. 다만 그대의 아버지인 내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장자(長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워 이에 방석(芳碩)으로써 세자로 삼았으니, 이 일은 다만 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남은 등도 그 책임을 사피(辭避: 거절하여 피함)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에 만약 초(楚)나라에서 작은아들을 사랑했던 경계로써 상도(常道)에 의거하여 조정에서 간(諫)했더라면, 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 같은 무리는 다만 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세자로 세우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였다. 요전에 정도전·남은·심효생·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제1차 왕자의 난을 말함)을 도모하여 국가의 근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 죄인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왕실(王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방석(芳碩)은 화(禍)의 근본이니 국도(國都)에 남겨 둘 수가 없으므로 동쪽 변방으로 내쫓게 하였다. 내가 이미 전일의 과실을 뉘우치고, 또 백관(百官)들의 청으로 인하여 이에 너를 세워 왕세자로 삼으니, 그 덕을 능히 밝혀서 너를 낳은 분에게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고, 그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사직(社稷)을 진무(鎭撫)하라.”] <태조실록, 태조 7년(1398년) 8월 26일 기사>
여기에 기록된 왕세자 책봉 요청 상소문에는 태조 임금이 적자를 버리고 어린 아들을 세웠고, 왕세자를 감싸는 무리가 여러 왕자를 해치려 하여 그 일당을 참형에 처했으니, 적장자인 영안군을 왕세자로 세워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태조 임금의 왕세자 책봉 교지에는 자기가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운 것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이었다고 실토하면서, 과거의 과실을 뉘우치고, 영안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고 했습니다. 덧붙여 몰래 반역을 도모한 일당을 참형시켜 왕실이 편안해졌다고 하면서, 화의 근본인 이방석을 동쪽 변방으로 내쫓으라고 했습니다.
이 실록 기사를 앞의 왕위 계승원칙과 비교하여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다소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왕위 계승원칙의 종법 체제에 맞지 않는 연장자를 적장자라고 내세웠습니다. 둘째가 태조 임금이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 때문에 잘못했다고 마음에도 없는 잘못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셋째가 조정의 실세인 정도전 등이 반역을 도모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거꾸로 그들이 왕자들을 해하려 한다고 해서 참형에 처했다고 했습니다. 넷째가 태조 임금이 화의 근본인 방석을 동쪽 변방으로 내쫓으라고 명령했는데도 이를 어기고 살해했습니다. 따라서 관련 기사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정안군 이방원의 주도아래, 그의 뜻대로 작성된 상소와 교지(敎旨)를 태조 임금에게 올려 압서(押署: 기명날인)하게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권력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부당한 거사였지만,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세워야 했으므로 정적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태조 임금에게도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에도 없는 기록을 남기도록 강제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정안군 이방원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저지른 권력 찬탈 행위에 대해 도덕성과 정통성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훗날 태종 임금은 취약한 도덕성과 정통성 때문에 양위(讓位) 소동을 벌이는 등 몇 차례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왕위 계승원칙에 어긋나는 주장을 내세워 부왕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속죄의 교지를 내리게 했으니 태조 임금에게는 커다란 치욕이 되었을 것이고, 그런 치욕을 견딜 수 없어 바로 옥좌에서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왕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워 권력을 찬탈한 태종 임금은 과연 이 장자 원칙을 얼마나 잘 지켰을까요?
처음에 태종 임금은 적장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를 왕세자에 책봉했기 때문에 적장자 원칙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왕세자인 양녕대군이 말썽을 일으키자, 그를 폐하고 다른 왕자를 세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지(傳旨)를 내립니다.
[옛날에는 유복자(遺腹子)를 세워 선왕(先王)의 유업(遺業)을 이어받게 하였고, 또 적실(嫡室)의 장자(長子)를 세우는 것은 고금(古今)의 변함없는 법식이다. 제(禔)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장자(長子)는 나이가 다섯 살이고 차자(次子)는 나이가 세 살이니, 나는 제(禔)의 아들로서 대신시키고자 한다. 장자가 유고(有故)하면 그 동생을 세워 후사(後嗣)로 삼을 것이니, 왕세손(王世孫)이라 칭할는지, 왕태손(王太孫)이라 칭할는지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의논해서 아뢰어라.]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년) 6월 3일 기사>
그러니까 종법(宗法) 체제의 적장자 원칙에 따라 양녕대군의 장자를 왕세자로 세우려고 하니까 어떻게 칭할지를 묻는 질문서를 신하들에게 내린 것입니다. <태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의정 유정현과 좌의정 박은을 빼고는 조정의 신하 42명 모두가 양녕대군의 아들로 왕세자를 세워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태종 임금은 점을 쳐서 세워야 하겠다고 했다가, 끝내는 어진 왕자를 세우겠다고 하여 충녕대군(忠寧大君) 이도(李祹)를 왕세자로 세웠습니다.
이는 태종 임금이 종법 체제의 근본원칙은 물론, 지난날 자기가 대의명분을 세운다고 내세웠던 연장자 승계원칙마저 지킬 수가 없게 되자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 아주 좋은 사례입니다. 즉 조정 신하 대부분이 따르자고 대답한 종법에 의한 왕위 계승원칙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또한, 지난날 그가 편법으로 영안군 이방과를 왕세자로 세웠던 것처럼, 둘째 왕자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세워야 했는데 그것마저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나아가 조선 왕조가 적장자 원칙을 얼마나 지켜졌는지 살펴본 결과는, 태조 임금을 제외한 26명의 임금 중 적장자 원칙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 받고 왕위에 오른 임금은 단지 7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안군 이방원은 태조 임금이 적장자가 아닌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워서 잘못했다는 트집을 잡아 부왕을 권좌에서 내려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태종 임금 자신도 적장자 원칙을 끝내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태종 임금의 후대 왕들도 적장자 원칙을 30%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 왕세자 이방석은 서자(庶子)가 아니었다
왕세자 이방석(李芳碩)이 실록에 “어린 서자(庶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방석이 첩(妾)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배경에는 신덕왕후가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라 정실이 아닌 첩이고, 이방석은 첩의 아들이니까 “서자”라는 것입니다.
고려 말 사회에서는 상류층의 귀족들이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두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성계 역시 이러한 풍습에 따라 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한씨 부인은 향처였고, 강씨 부인은 경처였으며, 두 분 모두 정실(正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기사가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조(前朝: 고려조)의 말엽에 대소 원인(大小員人)이 경외(京外)에 양처(兩妻)를 함께 둔 자도 있고, 다시 장가들고서 도로 선처(先妻)와 합한 자도 있으며, 먼저 취첩(娶妾)하고 뒤에 취처(娶妻) 한 자도 있고, 먼저 취처하고 뒤에 취첩한 자도 있으며, 또 일시(一時)에 삼처(三妻)를 함께 둔 자도 있어서, 그가 죽은 뒤에 자식들이 서로 적자(嫡子)를 다투게 되니 쟁송(爭訟)이 다단(多端)하였으나, 그때에는 처(妻)를 두고 취처(娶妻)함을 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17년(1417년) 2월 23일 기사>
그런데도 신덕왕후 탓에 왕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태종 임금은 그 분풀이로 신덕왕후를 후궁(後宮)으로 폄훼(貶毁)했고, 정릉(貞陵)을 파헤쳐 원래의 장소였던 정동(貞洞) 황화방에서 도성 밖 사을한 기슭(지금의 정릉 자리)에 버려두어, 죽어서도 오랜 세월을 푸대접속에 지내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잔혹한 푸대접도 1669년(현종 10년)에 이르러 해소되는 전기가 일어났습니다. 송시열이 앞장서 태조 임금의 현비였던 신덕왕후가 종묘에 부묘(附廟)되지 않은 문제를 들추어냈습니다. 그전에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간헐적으로 있었으나, 이때 와서 빗발치는 조정 대신들의 주청과 사림(士林)의 상소로 마침내 현종 임금이 수락한 것입니다. 그 결과 폄훼됐던 신덕왕후의 신위가 260여 년이 지나서야 회복되었고, 종묘(宗廟)에 부묘되었으며, 황폐했던 정릉도 처음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날의 모습이 갖춰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종 임금의 가혹했던 처사는 바로잡혔고, 그 후 이방석도 서자가 아닌 적자의 위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또한, 태종 임금은 왕세자 이방석이 어리다는 것도 문제 삼았습니다. 물론 책봉될 당시에는 11살이어서 분명히 어렸습니다. 이 기사의 속셈은 장성한 왕자가 여럿이 있는데도 그 중에서 제일 어린 왕자를 왕세자로 세운 것이 문제였다는 점을 들추어 내려는 의도로 풀이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지로 조선왕조에서 왕세자를 책봉한 사례를 보아도 보통 7~10 정도의 나이 때였습니다. 태종 임금도 양녕대군이 10세 때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문제로 삼을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였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할 당시에 생모인 중전도 젊었고, 부왕도 57세여서 얼마든지 왕세자를 양육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실지로도 태조 임금은 74세까지 수명을 누렸습니다.
나아가 태종 임금이 왕세자 이방석을 서자라고 낙인찍은 것이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태조 임금이 승하한 바로 다음 해인 1409년(태종 9년)에 태종 임금이 세운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명(健元陵神道碑銘)”입니다. 거기엔 신덕왕후가 태조 임금의 차비(次妃)인데 처음에 현비(顯妃)로 봉했다가 사후에 시호를 신덕왕후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태종 임금도 분명히 신덕왕후를 태조 임금의 정비(正妃)로 인정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어떤 이유로 <태조실록>의 기사를 곡필(曲筆)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신덕왕후가 정비이니까 그 아들 이방석은 서자가 아니라 분명한 적자인데 실록에 서자라고 곡필해 놓은 것입니다.
[차비(次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처음에 현비(顯妃)를 봉하였으나 먼저 훙(薨)하자, 시호(諡號)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고 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9년(1409년) 윤 4월 13일, 태조 건원릉 신도비문, 권근 찬)>
그러면 왕세자 이방석을 적자가 아닌 서자로 낙인찍은 태종 임금은 과연 적서(嫡庶) 문제를 얼마나 잘 처리하고, 또 얼마나 잘 지켰을까요?
태조 임금의 부친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은 3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조 임금의 모친인 최씨(崔氏) 부인이 신덕왕후와 같은 둘째 부인이었습니다. <태조실록> 1393년(태조 2년) 9월 18일 기사를 보면, 환조의 “정릉 신도비명(定陵神道碑銘)”에 태조 임금의 생모인 둘째 부인 최씨(崔氏)는 정실인 의비(懿妃)로, 첫째 부인 이씨(李氏)는 여종인 비(婢) 내은장으로 이원계를 낳았고, 셋째 부인 김씨(金氏) 역시 여종인 비(婢) 고음가로 이화(李和)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신덕왕후를 첩으로 몰아 왕세자인 이방석을 서자로 낙인찍은 사례 때문에 하륜(河崙)은 환조의 첩 자식을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태종 임금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안군 이화를 의안대군(義安大君)으로, 조정의 관직은 영의정부사(정1품)로, 그의 모친은 정빈(定嬪)으로 봉작(奉爵)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의안대군 이화는 2명의 처(妻)로 선처 안씨(安氏)와 후처 노씨(盧氏)가 있었습니다. 그의 사후에 두 처의 자손들이 재산을 가지고 다투자, 이번에도 태종 임금은 선처와 후처를 같은 정실로 인정하여 토지를 그 자녀들에게 각각 반(半)으로 나누어 주도록 했습니다.
[의안 대군 이화의 과전(科田)을 선처(先妻)와 후처(後妻)의 자녀에게 반씩 나누게 하다.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과전을 나누어, 반은 그 선처에게 주고, 반은 그 자녀(子女)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화의 선처 아들 완성군(完城君) 이지숭(李之崇)과 후실(後室) 아들 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 등이 그 아비의 과전(科田)을 다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태종실록, 태종 9년(1409년) 4월 9일 기사>
태종 임금 때에도 재상과 사대부 등이 여러 처를 얻거나, 첩을 처로 삼는 자까지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자에 대해서는 명(明)나라의 제율(制律)에 따라 모두 조사하여 죄로 다스리고, 이를 고쳐 바르게 하지 않거나, 헤어지지 않는 자는 <춘추>의 예(例)에 따라 선처(先妻)의 자녀만 적(嫡)으로 인정하여 봉작하고 토지를 나누어 주되, 나머지는 첩으로 한다는 교지를 내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규정을 두어, 이 교지를 내리기 이전에 있었던 사례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의안대군 이화의 둘째 부인을 정실로 인정해준 전례 때문이었습니다.
[적첩(嫡妾)의 분수를 세울 것을 사헌부에서 상소하다 <중략> 그러나, 전조(前朝)의 말년에 예의(禮義)의 교화가 행해지지 못하고 부부의 의리가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경(卿)·대부(大夫)·사(士)들이 오직 제 욕심만을 좇고 정애(情愛)에 혹하여서 처(妻)가 있는데도 처를 얻는 자가 있고, 첩(妾)으로써 처를 삼는 자도 있게 되어, 드디어 오늘날 처첩이 상송(相訟)하는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중략> 신 등은 일찍이 매빙(媒娉)·인례(姻禮)가 갖추어졌느냐 약(略)하였느냐를 가지고 처·첩으로 정하였으니, 앞으로는 자기 자신이 현재 첩으로써 처로 삼은 자나 처가 있는데도 처를 얻은 자는 아울러 모두 안율(按律: 죄를 조사하여 다스림)하여 처결하고, 당자가 죽었어도 다시 고쳐 바르게 하거나 이이(離異)하지 않는 자는, 원컨대, <春秋>의 중자(仲子: 혜공의 애첩)를 폄(貶)하여 성풍(成風: 풍속을 이룸)한 예에 의하여 먼저 사람을 적(嫡)으로 하여 봉작하고 체전(遞田: 토지를 나누어 줌)한다면 성인의 교화가 흥기할 것이요, 처·첩의 분수가 밝아질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년) 3월 10일 기사>
이처럼 이중잣대를 가지고 치리(治理)했으면서도 태종 임금은 1415년(태종 15년)에 첩의 자식에 대해 관직의 진출을 금지하는 내용까지 추가하여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악법 중의 악법인 “서얼금고령(庶孼禁錮令)”까지 반포했습니다. 그 후 세종 임금 때에도 의안군 이화의 자손들이 또다시 복상문제로 말썽을 일으켰지만, 세종 임금 역시 이 문제를 전례에 따라 처리했습니다. 그렇다면 신덕왕후도 당연히 복위시켜야 했는데, 세종 임금은 신덕왕후를 오히려 더 깎아내렸습니다.
[“예문에 적자(嫡子)가 둘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씨와 노씨의 사이는 적서(嫡庶)로서 말할 수 없고, 또 수교(受敎)에 ‘영락 11년 (태종 13년; 1413년) 계사 3월 11일 이전에, 아내가 있으면서 또 장가든 자는 선후(先後)를 논할 것 없이 다 아내로 인정한다.’ 하였으니, 우선 계모(繼母)의 복대로 복상(服喪)하도록 청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7년 을사(1425년) 7월 9일>
▣ 태조 이성계는 왜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나?
조선을 개국한 태조 임금은 왕세자를 세우는 일에 틀림없이 많은 고심을 했을 것입니다. 조선의 첫 임금으로서 새 나라의 천 년 대계를 위해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태조 임금에게 제일 먼저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적장자 원칙에 따라 왕세자로 세워야 할 큰아들 진안군 이방우였습니다. 게다가 개국에 공이 큰 왕자를 세우자는 개국공신들의 건의에 대해서도, 또 다른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개국에 공이 큰 왕자를 세우려면 장성한 왕자여야 하는데, 생존해 있는 왕자 중 이방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고려 왕조의 지배계층이었던 구세력의 집안과 혼인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새 나라를 개국한 태조 임금으로서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구세력과 혼인을 맺은 아들을 왕세자로 세운다면, 고려 왕조의 잔재를 척결하는 작업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에 변방 시골의 무장이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여러 아들을 지배계층의 집안과 혼인을 맺게 한 덕분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지만, 이들과 혼인을 맺은 탓에, 개국에 공을 세운 왕자를 세우는 것이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태조 임금이 이를 무시하고 왕세자를 세웠다면 틀림없이 둘째인 영안군 이방과를 세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안군은 이성계가 치룬 많은 전투에도 참여하여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조정에서는 반대세력과 다투는 과정에서도 정안군 이방원처럼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여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또한 정안군 이방원이 가장 큰 공로로 내세우는 정몽주 살해사건에도 동참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왕위계승 원칙에서 적장자 이상으로 중요시하는 성품과 도덕성에 대해서도 과격한 정안군 보다는 온유한 영안군이 훨씬 태조 임금의 맘에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나라의 기틀을 다져야 하는 태조 임금의 입장에서는 구세력을 척결하는 일을 망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태조 임금이 얼마나 구 왕조의 세력을 척결하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왕씨 일족을 몰살시킨 사례만 보아도, 그 척결 의지(意志)가 어떠했는지 바로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랬기에 태조 임금으로서는 자기 왕자 중 아직 결혼하지 않은 방석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방석은 중전인 신덕왕후의 아들입니다. 중전의 아들로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만세의 상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전의 소생이 아닌 왕자를 세운다면, 그 후 그들 사이에 일어날 갈등과 다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버젓이 중전으로 앉아 있는 왕비의 권위와 공로도 고려해야 했을 것입니다. 신덕왕후와 그녀의 집안은 태조 임금이 변방 시골의 장수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데 발판 역할을 했고, 고려 조정에서 수많은 권력투쟁을 할 때에도 왕후는 마다치 않고 밤낮으로 남편을 내조(內助)했습니다. 한씨 부인의 자손들이 만든 역사 기록인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한씨 부인의 내조 기록은 찾기가 어렵지만, 강씨 부인의 내조 기록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임신년(1392년) 6월에 이르러 태종이 남은과 더불어 계획을 정하고 몰래 조인옥, 조준, 정도전, 조박 등 52인과 더불어 추대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크게 성낼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고, 태종이 들어가 신덕왕후에게 아뢰어 전달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고사본말>
더구나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여 그의 세력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상황에 놓여있을 때, 이방원을 해주로 보낸 것도 강씨 부인이었습니다. <태조실록>에는 이방원이 주도해서 정몽주를 살해한 것처럼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탓에 대부분 사람들은 이방원을 최고의 공로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관련 기사들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아주 설득력이 빼어난 또 다른 논리가 나옵니다.
정몽주를 살해한 일에 참여하고 모의했던 주동 인물은 이지란, 이화, 이방과, 이방원, 이제, 조영무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건을 모의할 때마다 신덕왕후의 저택에 모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강씨 부인의 사위인 이제, 조카사위인 이지란, 조카의 사위인 조영무가 참여했고, 모의장소가 강씨 부인의 저택이었기 때문에, 강씨 부인이 이 모의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강씨 부인은 삼한국대부인(정1품)으로 그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씨 부인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대목이 <태조실록 총서>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살해한 사실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성계가 불같이 화를 내자, 이를 무마한 사람이 강씨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록 기사에 “강씨 부인이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라고 한 대목을 좀 더 깊이 새겨보면 “어머니께서는 이 일을 다 알고 처리했으면서도,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계십니까?”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태조실록>에 이방원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처럼 기록해 놓은 것은 오직 그의 공로를 돋보이게 해야 할 사유 즉 자신의 반역에 대한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康妃)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더욱이 강씨 부인이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깊이 관여했고, 앞장서 활약했음을 시사해주는 유물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1932년에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이성계와 강씨 부인의 이름이 새겨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갖춤입니다. 조선을 개국하기 1년 전인 1391년 5월에 이성계와 강씨 부인이 주도하여 금강산에서 제일 높은 비로봉에서 불사리를 봉안하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 의식에는 놀랍게도 1만여 명이 발원자로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귀부인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습니다. 또한 사리장엄구에는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는 문구가 있는데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할 자를 기다린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발원은 이성계가 이미 왕을 능가하는 사실상의 권력자였다는 추측을 할 수 있고,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에 이처럼 새 나라의 기원을 위한 거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의식을 주도한 인물로 이성계와 강씨 부인의 이름만 있고 한씨 부인의 이름은 빠졌습니다. 한씨 부인이 생존해 있을 때인 데도 그 이름이 빠져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강씨 부인이 이성계가 주도하는 대업(大業)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분명하게 시사해줍니다. 더구나 강씨 부인의 막강했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이 사리장엄구의 갖춤 안에 유독 부친인 강윤성(康允成)의 이름도 함께 들어 있는 사실입니다.
[분충정난 광복섭리 좌명공신 벽상 삼한 삼중대신 수문하시중 이성계(奮忠定難 匡復燮理 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물기씨(勿其氏)] <사리장엄구 갖춤의 원통형 은반의 표면에 새겨진 명문(銘文)>
[9월 정축일에 임금이 신 권근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에 있을 당시 중외에서 근로할 때나 화가위국(化家爲國: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움)하는 날에도 신덕왕후의 내조가 실로 많았다. 여러 가지 중요한 정무에 임할 때에도 충고하고 돕기를 부지런히 하였는데, 이제 뜻밖에 세상을 떠나니 경계(옳지 않은 일이나 잘못된 일들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시킴)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어진 정승을 잃은 것 같아서 내가 매우 슬프다.”] <권근(權近)의 정릉원당 조계종본사 흥천사 조성기 중에서>
그런데도 사극이나 태종 임금에 관련된 역사자료를 보면 대부분 이방원이 조선의 개국에 앞장서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가 왕세자에 책봉됐어야 했다고 합니다. 태조 임금이 사랑했던 신덕왕후의 말만 듣고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이방원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물론 이 주장이 전부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태조 임금이 신덕왕후를 참으로 많이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이 주장은 일방적으로 태종 임금의 공로를 돋보이게 기록한 <태조실록>의 기사에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개국은 어디까지나 태조 이성계가 존재해서 가능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아무리 높은 점수를 준다 해도 기껏해야 부친을 도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것은 조선의 개국은 어디까지나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해서 이성계와 그를 지지한 개혁세력이 이루어 낸 결과라는 점입니다. 고려 말의 조정에서 수많은 권력투쟁을 치르면서 그와 함께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인물들 모두의 공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도전이 내세웠던 것처럼, 태조 임금과 개혁세력 간에 앞으로 세울 새 나라에 대한 논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 둘째 “왕권정치”에서 “신권정치”로 가닥을 잡는 일 등을 말입니다.
그래서 태조 임금과 개국공신들은 처음에 제안했던 장자 원칙과 개국에 공을 세운 왕자를 세우는 것도 논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걸림돌을 피해야 했고, 개국 초이므로 조선의 천 년 대계와 새로운 정책 방향에 맞는 어진 왕자를 세우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도전이 내세운 신권정치가 단지 정도전만의 주장이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시국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새 조선의 기틀을 만들어 갈 제목으로, 구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없고, 이해관계가 없는, 자질이 뛰어나고, 좋은 성품을 가진 왕자를 세우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중전인 신덕왕후가 이방번을 밀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에는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운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잘 설명해주는 글이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정국본(定國本)에 실려 있습니다. 이 글은 권력을 찬탈한 세력이 쓴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조선을 설계했고, 실지로 왕세자를 세우는 일에 참여했던 정도전이 쓴 글이라서 더욱 깊은 신뢰를 줍니다.
[세자(世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의 선왕(先王)은 반드시 맏아들로서 세자를 세웠으니 왕위계승 분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반드시 어진 아들로서 세자를 세우기도 하였으니 덕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천하 국가를 바르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중략> 우리 전하께서는 즉위한 직후에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먼저 동궁(東宮: 왕세자 이방석)의 위를 바르게 하고 서연관(書筵官)을 설치하여, 문하좌시중 조준(趙浚), 판중추원사 남재(南在), 첨서중추원사 정총(鄭摠)이 학업이 높아 세자를 교육하고 권면할 만하다고 믿어서 세자의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신(臣) 또한 불민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사(貳師)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신은 비록 학문이 엉성하고 깊지 못하여 세자의 타고난 훌륭한 덕을 제대로 보필하기는 어려우나 마음속으로는 항상 세자를 잊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의 동궁은 자질이 뛰어나고 성품이 온화하고 문아(文雅)하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서연(書筵)에 참여하여 연구와 토론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있으니, 앞으로 일취월장하여 반드시 그 학문이 밝게 빛날 날이 올 것이다. 세자의 위를 바르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정국본 중에서>
지금까지 태조 이성계의 왕세자 책봉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정안군 이방원이 난을 일으키면서 내세운 것은 태조 임금이 적장자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태조 임금이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왕위 계승원칙의 근본인 종법 체제를 정확히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지, 정안군 이방원이 주장한 방식의 적장자 원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정안군 이방원이 내세운 적장자 원칙은 적장자가 유고 시에는 적장자의 아들로 물리는 근본원칙이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태종 임금 자신도 적장자 원칙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 내내 이 원칙은 30%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태종 임금의 논리대로 적장자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고일어났다면 조선 왕조 내내 숱한 피비린내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안군 이방원이 내세운 적장자 원칙은 단지 자신의 반역행위에 대한 대의명분을 세워 도덕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다음에 왕세자 이방석이 서자였다는 실록 기사는 신덕왕후가 중전인 현비로, 중전의 아들인 이방석이 적자로서 왕세자가 되었기 때문에 전혀 시빗거리가 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태조 임금의 건원릉 신도비명에 적힌 내용과 1669년에 신덕왕후의 신위가 회복되어 종묘에 부묘된 역사적 사실이 그 이유를 잘 대변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문제로 삼아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왕세자 이방석을 서자로 낙인찍은 행위는 그 어떤 정당한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태종 임금의 앙갚음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태종 임금은 신덕왕후와 왕세자 이방석에 대해서는 문제가 아닌 서자 문제를 문제 삼았지만, 진짜 서자 출신인 의안대군과 그의 모친에게는 별난 특혜를 다주었습니다. 또한, 의안대군의 후처도 첩으로 하지 않고 정실로 대우해주었습니다. 세종 임금 역시 이화의 자녀들이 복상 문제로 다투자 태종 임금이 행한 전례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왕세자 이방석을 서자라고 한 <태조실록>의 기록 역시 곡필한 것으로 드러났고, 태종 임금은 자기가 세운 법칙을 편파적으로 처리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태조 임금이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새 조선의 기틀을 만들어 갈 제목으로, 구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없고, 이해관계가 없는 왕자를 세웠을 것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개국 초에 반드시 단행해야 하는 구세력 척결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피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태조 임금과 개국공신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새 조선의 천 년 대계와 정책 방향에 맞는 성품이 좋고 덕목을 갖춘 왕자를 세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조선 설계의 주역인 정도전이 이방석을 적극 밀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태조실록>에도 “정도전 같은 무리는 다만 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세자(이방석)로 세우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였다”는 기사까지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안군 이방원에 못지않은 공을 세운 중전 신덕왕후가 이방번을 밀었는데도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옛말에 “크게 될 나무는 떡잎만 보아도 안다”는 말이 있듯이 비록 11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왕세자 이방석은 정도전의 글처럼 성품(性稟)이 온화(溫和)하고 문아(文雅)하여 왕세자로서 뛰어난 자질(資質)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개국공신들도 신덕왕후가 추천한 “이방번 보다는 이방석이 낫다”고 했을 것이고, 태조 임금과도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와 같이 태조 임금이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운 것은 <태조실록>의 기사처럼 자격이 없는 어린 서자를 총애하는 신덕왕후의 간청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르기에 문제가 있는 적장자 원칙을 택하지 않고, 시국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구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없고 이해관계가 없으며, 나아가 새 조선의 정책 방향에 맞는 어진 성품과 덕목을 갖춘 왕자를 세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안군 이방원이 일으킨 난은 한마디로 왕권에 대한 야욕 때문에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난을 일으킨 동기가 태조 임금의 왕세자 책봉에 대한 잘못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타당하지 않은 명분이었음이 확인됐습니다. 그것보다는 도덕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법이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훗날 태종 임금은 취약한 도덕성과 정통성 때문에 양위(讓位) 소동을 비롯해 몇 차례의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그가 내세운 명분이 타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서자 문제는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 삼았고, 감정에 치우친 앙갚음이었던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정도전의 난” 또는 “방석의 난”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무인년에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바로잡았다고 해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고쳐져야 합니다. 승자가 취약한 정통성과 도덕성을 확보하기 위해 독단(獨斷)으로 지어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정안군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이 태조 임금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일으킨 명백한 반란(叛亂)으로 귀착된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도전의 난” 또는 “‘방석의 난”은 “방원의 난”이라 해야 하고, “무인정사(戊寅靖社)”는 “무인란(戊寅亂)”으로 고쳐져야만 합니다.
태조 임금이 승하하자 마자, 바로 다음 해인 1409년에 태종 임금은 <태조실록>의 편찬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당대에 실록을 편찬하고, 더구나 사건의 당사자들이 살아있는 마당에 시기상조라는 건의를 했지만, 태종 임금은 듣지 아니하고 강제로 착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태조실록>은 오랜 기간동안 수차례의 개수작업을 거쳐 1451년(문종 원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자그마치 40년이 넘게 걸린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곡필 사례가 “방원의 난” 때문에 <태조실록>의 편찬이 이처럼 오래 걸렸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승자가 왜곡시킨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왜곡된 역사가 바로잡아질 때 우리의 역사는 더욱 빛나는 역사를 만들어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태종 임금의 자손이 통치하던 조선 왕조 때였는데도, 태종 임금에 의해 폄훼되었던 신덕왕후의 신위(身位)가 회복되어, 종묘에 부묘되었고, 정릉도 현재와 같은 모습이나마 갖춰졌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거울삼아, 잘못된 우리 문중의 역사를 바로잡는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장을 세상에 널리 알려 그 주장이 하나하나 받아들여질 때 우리 문중은 더욱 빛나고 발전해 나가리라 확신합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