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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건 공장장님의 수기형식의 글 입니다. 지금의 대한유화가 있기까지 노고를 높이 생각하게 하는군요. 우리 모두 공장장님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시다. 제목 : 대한유화 시절
1971.5.28. 정식으로 회사가 설립된 날이었다. 이정림 사장께서 저녁에 집으로 초대하여 기념 회식이 있었다. 이정호 부사장, 강수철 전무, 그리고 초기 사업계획이며 차관선과 기술선 선정 및 은행/대관 업무등 기획업무를 담당했던 서영환 과장, 경리의 홍정기 과장, 총무의 진용섭 과장, 그리고 새로 나와 함께 입사한 호남비료에서 모시고 일 했던 남상온 부장과 나 이렇게 뫃이게 되었다. 울산 현장에 있는 건설의 전문환 과장과 전기/총무의 김상면 과장은 참석을 못하였다. 사장님께서 회사창립의 감회를 피력하시고 “우리회사는 부사장파도 없고 전무파도 없다. 모두 힘을 합쳐 좋은 회사를 만들어 보자!”당부하시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였다. 푸짐한 중국요리에 당시 귀하던 양주 Johnny Walker를 마시며 단합대회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나에게는 과장 직함으로 명함을 만들어 주면서 “과장은 회사의 간부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은 무슨 일이나 해야한다”하면서 당장 울산으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울산시에서 건설한 70'공영아파트가 있었다. 4층짜리 15평 아파트인데 회사에서 4세대를 확보하여 4층 한간에는 부사장님과 전무님이 거의 주말에 울산에 내려오시는데 숙소로 사용하고 옆의 세대는 일본에서 손님이 오시면 접대용으로 제공하고 3층에 한 세대는 남부장님 그리고 일층의 한세대는 나에게 할당되었다. 나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일 했다. 우선 자재과장이 되어 건설 자재와 창고관리를 하게 되었다. 자재창고가 지어졌으나 텅빈 공간이었다. 창고와 부지공간을 적절히 활용해야했다. 공장 부지를 둘러보고 공장배치도(Layout Drawing)를 부리런히 익혔다.
기다림이 오래 된 터라 회사의 정식발족과 동시에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가시적으로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짓소엔지니어링에서 藤田侃雄라는 나이 많은 현장소장이 부임하였는데 田中이라는 젊은 토목건축 기사를 대동하였다. 6.14일경으로 기억하는데 철강재를 위시한 공장건설을 위한 첫 배가 들어오게 되었다. Invoice, Packing List, 그리고 Bill of Lading등 이른바 선적서류를 사전에 입수하여 내용을 파악하는 일방 어느 자재가 어느구역의 철골자재인가 일일이 따져서 부두에서 하역후 공장부지에 반입할 때 하치장소를 대응지정하고 약도위에 표시하여 하역회사에 제시하며 협조를 부탁하였다. H-Beam, T-Beam, Channel, Angle등 철골자재는 한 곳에 뫃아 놓으면 가공작업은 편리하지만 서로 섞일 수 있고 또 옮기는 비용도 예상되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위한 배려에서였다. 하역회사 간부가 나중에 우리회사의 부사장님과 전무님을 보고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하역작업을 했지만 사전에 미리 검토하고 이런 안내서를 만들어 일을 수행한 예가 없었다고 탄복을 했다. 선적 차수가 거듭될 수록 부수되는 수많은 자재가 들어왔다. 목재 포장Box도 무척많았다. 페자재로 버리기에는 아까워 활용방안을 생각해보기로했다. 창고는 중앙부분이 높고 양쪽으로 날개를 펴듯 대칭으로 되어있었다. 공간활용도를 넓히기 위하여 창고한편에 선반을 설치하기로 하고 전무님께 말씀드려, 시중에서 철재 Angle을 사서 가공하여 뼈대를 만든다음, 선반 바닥은 일본에서 선적해오는 자재의 포장 Box의 목재 각목과 판재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각 선반마다 위치번호를 붙여 나중에 찾아 쓰거나 관리하는데 편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나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부사장님이나 전무님이 무척 좋아하셨다. 일본에서 손님이 래방하거나 비가와서 공사를 못하는 날이면 가끔씩 요정에 간부들을 대동하고 수고를 위로하였는데, 香園이라는 요정의 큰 방에 愼之爲寶라는 額字가 걸려 있었는데 강수철 전무님이 “愼宗健 과장은 우리회사의 보배야!”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몸둘바를 몰랐는데 만좌의 분위기는 진지하였다. 외부 손님이 회사에 종종 방문할 때도 같은 칭찬을 거듭하시었다. 일본시절 근로생활의 표현으로 겟스가스목구긴긴(月火水木金金)이라하여 그 때 토요일은 반공일이라 12시까지 일하고 오후부터 쉬었는데, 토요일도 금요일같이 일했다는 것이었다. 건설현장에서는 비가 와야 공치는 날이라하여 쉬면서 서류정리와 도면보기 공사준비등을 병행하여갔다. 제일 먼저 지반조성공사, 즉 Boring을 실시하여 지내력을 검사하고 공장배치도와 결부하여 경우에 따라 Pile박기 또는 터다지기등 작업을 실시한다. 다음에는 간선 용수 배관을 지하에 매설하는 작업, 지상 배수로 작업과 전선매설 溝渠공사, 현장 건물건축공사(철근골조, 벽돌쌓기, 방수마감, 바닥 미장, 도장등), 공장시설용 철골공사, 열교환기 및 탑조류 설치공사, 배관공사, 전기공사,계장공사, 도장공사등으로 Plant 건설이 진행이되었다.
예로부터 개성 상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신용본위의 商道는 물론이고 심지어 분뇨를 수거해가도 혀로 맛을 보고 가져갈 정도로 철저하고 빈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개성상인의 상도를 회사의 사장님과 보좌하시는 부사장님과 전무님으로부터 생생하게 보고 배우게 되었다.
1) 먼저 거래상대로 일등회사를 선정하지않았다. 일본의 기술선인 짓소는 일제시대 이북에 흥남질소비료공장을 운영하던 유수한 회사였으나, 전후 일본에서는 2~3류의 석유화학회사였다. 더욱이 짓소엔지니어링은 짓소석유화학의 기술부와 공무부를 합쳐서 회사로 만들었으며 3~4류회사였다. 社運을 건 큰 Project를 수행하게되어 위로 경영진으로부터 말단 사원에 이르기까지 총력을 경주하게 된 것이다. 선적 Schedule도 착착 제때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장건설이 계획대로 진척되었다. 예상보다 앞섰으면 앞섰지 지연되는 것은 없었다. 韓日 共助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 양측에서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준비하며 정성을 기울였는지 지금생각해도 탄복할 일이었다.
국내 施工會社도 일류를 선택하지않았다. 제일토건이라는 3~4류 회사를 선정하였다. 이 회사 역시 사장이 직접 뛰며 인력과 장비를 제 때에 手配하여 일을 消化했다. 우리회사에서는 까다로운 감독을 하지않아도 되었다. 전문환 과장 혼자서 뛰어 다니며 꼼꼼히 챙기고 확인하여期成高 請求가 올라오면 그대로 인정해주고 매월말에 현금으로 결제를 하였다. 당시 어음으로 그 것도 2~3개월 심지어 6개월 어음으로 결제하던 현실에 비추어 파격적인 일이었다. 전무님 말씀이 “계약이란 피차 믿고 일하자는 약속이다. 너 죽고 나 살자는 것이아니다. 갑이 큰 손해를 보아도 맘이 안좋고 을이 손해를 보아도 안 좋다. 共生共存해야하는 것이다.”하시면서 공사계약을 全工程을 묶어 一括契約을 하지않고 한 단계 한 단계 進陟시키면서 계약을 해나갔다. 그러면서 前段階 공사에서 을이 손해를 보았으면 크게 補塡해 주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見積을 잘 못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塔槽類 製作공사중 알미늄 탱크공사가 있었는데 당시 한국내의 모든 알미늄 용접기와 용접사를 다 동원해도 공사가 如意칠 않아 苦戰하게 되었다.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않았을 뿐만아니라 뒤에 손해를 다 보전해주었던것이다.
2)국내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토목건축부문에 관한한 국내기술 수준이 결코 뒤지지않음을 인정하고, 설계 ,감리, 시공 모두 한국측에서 담당하도록 업무 분담을 하였다. 철골재, 강판, 스테인레스판,鋼管만은 일본에서 도입하여, 도면을 제공받아 국내(공장부지내)가공 및 제작키로 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단지내 한양화학이나 동서화학 같은 경우 가공품 및 제작품을 국내에서 다만 조립하여 짜맞추는 선에서 건설을 진행한 것에 비하면 내용면에서 하늘과 땅차이였다. 전술한 공생의 바탕위에서 갑과 을 쌍방이 유익하도록 운영하다보니 모든 것이 계획 대비 실행율이 거의 100% 에 가까웠고, 전체적인 공정 진척이 차질 없이 이루어져 13개월만인 1972년 6월 말로 완공을 하고 7월 한달 냉각수 계통 통수 및 가동, 단위기계 시운전, 탑조류 및 배관 세척 및 충진물 충진/설치, 질소공장 가동 및 질소충진, 수소공장 가동, 계기 조작용 공기압축설비 가동, 受電, 개별 計裝 시스템 조작시험, 工程 溶劑인 n-Hexane 輸入 및 充塡, 펌프 操作시험, 제2용제인 Methanol 搬入 및 系統 조작시험, 원료 Propylene 輸入 및 부두에서 공장부지까지는 동서석유화학에서 매설한 배관을 賃借사용하여 저정탱크에 受入, Propylene 정제공장 가동,용제 정제공장 가동을 거쳐 전 Process에 Make-Flow 운전을 하고 이어서 Blow Down 및 Flare Stack 點火,최종적으로 촉매조제 공장가동 촉매공급계통 조작등 일련의 總合的인 試運轉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공장에 필요한 인력으로 幹部(부장 1인, 총무 겸임 계전과장, Polymer 생산과장, 공무겸임 제품 조립과장으로 진용을 갖추었고, 과장대리급으로는 생산에 2인, 조립에 1인 그리고 시험분석에 1인)는 모두 8명이었다. 호남비료에서 3인, 공영화학에서 2인, 대한프라스틱에서 2인, 대한알미늄에서 1인 모두 不實會社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었다. 개개인으로는 훌륭한 자질과 실력이 있지만 회사의 경영이 부실하여 빛을 못보던 사람들이어서 자기를 알아주고 책임을 맡기니 물불을 가리지않고 근면성실하게 일을 해냈다. 이미 裝置産業의 경험이 다 있으니 다른 회사처럼 6개월 또는 3개월간의 외국파견교육도 불필요하고, 그져 1개월 정도 모델공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운영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든 일을 실질적으로 판단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여러 계층의 Supervisor가 왔기 때문에 평소 읽고 쓰기는 하였으나 회화가 부족한 일본어를 이들 기술감독자들과 접촉하면서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 되었다. 한창 공장건설중인 1972년 3월에 일본 기술연수를 가게 되었다. 난생처음 일본땅을 밟게 된 것이다. 회사에 제공된 기술정보(PP제조공정 설명서, 물질收支,P&ID, 촉매관련 특허, 원부재료 Spec`및 특성등)를 몇 번씩 숙독하였고 예상 질문을 준비하는등 공부를 많이하고갔다. 일본 千葉縣 GOI(五井)석유화학단지에 있는 짓소석유화학이 모델 공장이었다. Polymer생산은 1,2,3line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근에 완공한 제3line이 우리울산공장과 같은 30,000MT/Y 용량의 공장이었다. 나는Polymer공장의 조업, 즉 용제정제, 원료정제, 촉매조제,중합공장의 운전상황을 살펴보며 과거 Trouble사례등을 집중 수집하고 질문을 하였다. 실질적으로 생산과장인 나에게 참고가 될만한 정보와 자료를 되도록 많이 入手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羽田공항에 내리니, 회사에서 마중을나왔다. 안내인을 따라 Mono-Rail을 타고 東京시내로 들어가서 다시 千葉線 전철로 갈아타고千葉驛에 내려 지정한 호텔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짓소엔지니어링의 千葉 사무소에 들러 회사의 Briefing을 받고 인사를 나눈뒤 승용차로 五井공장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승용차는 Call-Taxi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출퇴근을 두 대의 Taxi로 해결하였다. 공장에서 점심은 도시락을 준비하여 제공하였다. 회사의 거의 모든 간부와 사원이 도시락을 지참하고 와서 점심을 함께 뫃여 먹었다. 노조가 있었는데 회사와 협력적이고, 근무시간에 회사일을 보다가 일과후에 노조일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교대근무 상황도 알아보았다. 4조3교대였는데 조원의 업무배당과 관할구역등을 파악하였다. 이렇듯 기술연수도 실질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귀국하여 공사의 진척도를 보면서 4월 달에 생산직사원을채용하게 되었다. 약 40명을 모집하는데 신문공고를 보고650여명이 지원을 하였다.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해 선발을 했는데, 나는 전무님의 사람평가방법을 참고하였는데주로 공고생을 선호하였지만 인문고출신중에도 좋은 인재가 더 많으니 소질과 인품에 전공보다 더 비중을 두었다. 경남북이 주였지만 서울등 타지역에서도 왔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은 인재들을 채용하였다. 이들이 이후에 이어지는 시운전준비와 시운전에 핵심역활을 하게 된다. 나는 낮에는 공장에서 눈코 뜰 새없이 바쁘게 일하고 밤에는 사택에 와서 운전Manual을 한글로번역하였다. 회사에서는 이미 사택아파트를 완공하여 입주시켰다. 이렇게 대한 유화는 무에서 유로 점점 그모습을 갖추어 갔다. 드디어 1972년 8월 5일 모든 시운전 준비를 마치고 촉매투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정림 사장님을 위시하여 이정호 부사장님, 강수철전무님, 일본측에서 昆 吉郞사장과 取締役들 마루베니의石鍋부사장등 Project 관련 주역들이 Control Room의계기판 앞에 도열하여 있고 10:00에 나는 일본 기술감독 丸山과 함께 촉매를 투입하였다. 평상시보다 강도를 높여다소 과량을 투입하였다. 초기 시스템내에 觸媒毒이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였다. 물기나 산소, 원료중 불순물이 바로 촉매독이었다. 12:00시가 지나자 모든 VIP들은 다 떠나가고 현장에는 나를 비롯하여 실무진들만 남게되었다. 重合反應이 일어나지않은 원인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특히 시스템 의 세척과 질소 치환등 준비과정의 소홀이 없었는지 점검하였다.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야근 조가 바뀌고, 나는 며칠째 뜬 눈으로 샜지만 조금도 피곤이없었다. 정신 바짝차리고 계속 공정 순찰과 새촉매 조제 및 투입을 계속했다. 새벽에 끝공정 2차 건조기 Sight-Glass(관찰창)를 통하여 밀가루 같은 것이 약간씩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기술감독의 이야기로는 좀 더 두고 보자는 것이었다. 8월 6일 세벽 4:00경이 되니 밀가루가 훨씬 많이 출렁이는 것이 관찰되었다. 일본 기술감독 濱田의 말이 틀림 없이 중합이 되어 PP Powder가 生成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試料採取管을 通해 하얀 분말을 만져보고 한 없는 감회에 젖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석유화학제품이 생산되는 순간이었다. 이 감동을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 맞보게 된 것이다. 바로 영빈관으로 강수철 전무님께 보고를 드렸다. 아침식사를 일찍 마치고 어제의 VIP들이 들이닥쳤다. Control Room에서 샴페인이 터뜨려 졌다. 감격의 장면이었다. 바로 청와대에 보고 되었다. 사실 울산 석유화학단지는 포항 제철단지와 함께 혁명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 정책사업이었다. 울산 석유화학단지는 여러 업체들이 공동 추진하는 형태여서 不況期라 서로 눈치보며 그 추진상태가 지지부진했는데, 그래서 PP사업자로 대한유화가 새로 지정되었는데, 제일 後發인 대한유화가 건설진도의 선봉이 되더니, 제일 먼저 시운전을 실시하여 성공적으로 가동하게 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와대에서는 주간 단위로 단지내 공장 건설 진척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매주 Color사진으로 공장건설 현황을 보고하도록하였다. 13개월 만에 준공하여 상업생산에 들어가게 되니 청와대로서는 다른회사의 건설을 독려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준 셈이었다. 1972년 10.03에 석유화학단지 종합 준공식이 거행되었는데 우리 강수철 전무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철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를 계기로 대한 유화는 청와대의 단단한 신임을 받게되고 산업계의 견학코스가 되었다. 또한 정부의 기계공업 국산화 정책의 본보기이기도 하여 여러모로 강수철 전무님은 공업한국의 신화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부지를 암반을 깎아 조성한 구역을 고른 안목과공장을 13개월이란 짧은 공기로 완공한 것, 그리고토목건축부문을 위시하여, 탑조류를 국내제작하는등 프란트 국산화율을 높인 점등은 모두 건설비를 줄이는 효과로 나타나서, 제품의 원가를 낮추는 요인이 되었다. 항상 공생을 기본원리로 하는 기업에서 결국 제품 판매가를 낮게 책정하게 된 것이다. 다른 회사들은 일본에서 수입하는 수입대채품의 기준에서 판매가를 설정했던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였다. 품질좋고 값싼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게되니 청와대의 신뢰와 환심을 사게 되었고, 이러한 실적은 이후 사업 확장과 회사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 고밀도 폴리에틸렌 사업자 결정과정에서 대한유화가 당당히 경합자인 한양화학을 제치고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게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와대에서 서류심사에 대한유화의 원가계산이나 사업성은 수치 하나하나를 믿을 수가 있다. 粉飾이나 誇張이 없다는 것이었다. 믿음이란, 신용이란 인간관계의 밑천인 것이다.
만드는 대로 팔렸으므로 증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몇 달 지나니 중합기의 除熱能力이 현저히 떨어져 생산에 制約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냉각수 약품처리와 나아가 중합기 제열 시스템의 Closed Loop화로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게 되고, 공장 설계를 재검토하여 소위 Bottle-Neck를 찾고자 하였다. 중합공장만 키우면 조립 공장은 2-Line으로 되어 있어 여유가 있었다. 원료 Propylene 정제부문이 문제였다. 당초 순도 98% 프로필렌을 85%까지 활용하고 이후 리사이클 콤프렛서에서 85%프로필렌 일부를 빼내어 98%까지 정제해서 다시 공급하는 기준으로 공장이 설계되어있었다. 중합기안에는 용제인 헥산속에 프로필렌, 그리고 불순물인 프로판이 용해되어 있고 그 중 프로필렌이 촉매의 표면에서 중합되어 농도(또는 순도)가 떨어지게되는 것이다. 나는 특허 정보를 보니 용제로 헥산 대신헵탄을 사용한다든지, 나프타나 디젤을 쓰는 공법도있다는 것이다. 다만 산소 또는 아세칠렌 유도체인 촉매독만 없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프로판도 헥산보다 끓는 점이 낮을 뿐 반응에 무관한 飽和炭化水素物質이다. 따라서 프로판을 헥산으로 간주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않는 것이었다. 요는 중합기안에서 프로필렌 농도가 어는 선까지 내려가면 촉매효율이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기술선인 짓소에서 검토한 바가 없었고 85%를 나름대로 하한으로 설정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현장 Test를 실시하였다. 83%, 80%, 77%, 73%, 70% 그 결과 촉매가 더들어 간다거나, 중합제품의 품질이 달라진다든지 하는 현상은 나타나지않았다. 대부분 프로필렌은 나프타 분해공법으로 생산하게 되는데나프타분해 공장의 프로필렌 Spec`은 수분이나 아세칠렌등 촉매독은 다 제거되고 순도 95%min이었다. 이러한 검토를 거쳐 프로필렌 Sorce가 나프타 분해 공장이면 안심하고 수입하여 그대로 중합용으로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프로필렌 순도를 95%-98%로 정제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정제탑을 70%~80%회수 프로필렌을 95%선까지 정제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학공학의 지식을 이용하여 정제탑의 構造와 諸元을 토대로 蒸溜精製時 탑내에서Flooding현상이 나타날 것인가 검토를 하였다. 다행이 문제가 되지않았다. 이렇게 중합기와 리사이클 프로펠렌의 농도계산법을 활용하여, 원료 프로필렌 정제설비를 중합기 회수 低純프로필렌의 Up-Grade용으로의 轉換構想이 정리되어, 나는 강수철 전무님과 짓소엔지니어링의佐藤기술상무와 小泉 과장 앞에서 Presentation을 실시하고, 질의응답을 거쳐 重合部門 50%增産 방안을 확정하였다. 조립공장도 1-Line 더 늘리는 선에서 증산Project가1973년 가을에 완료되었고 실제 설계용량의 180%선의 생산을 시현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모두 원가절감은 물론 생산량증대로 회사경영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전사원 특별Bonus를 받게 되었다. 프로필렌 정제로 부생하는 프로판은 油公(현재SK)에 引渡하도록 되었으나 필연적으로 헥산이 미량 混在함으로 引受를 기피하였다. 처리방안이 없어 하는 수 없이 Flare-Stack에서 태우는수 밖에 없었으나 아깝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공정폐가스와 함께 부생프로판을 사용하는 산업용 보일러를 설치하여, 공장에 사용하는 중저압 Steam을 自給하게 되니 二重三重의 得이 되었다. 석유화학단지는 중앙에 支援公團이라는 회사가 위치하고, 주위에 각 계열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지원공단은 각 계열사에 용수(냉각수와 정제수),전기 그리고 각종 Steam등 (所謂 유티리티라 칭함)을공급하고 또한 각 공장에 정비용역을 지원하는 개념으로건설되었다. 말하자면 단위공장은 생산부만 있는셈이었다. 지원공단은 열병합발전을 하고 폐열 Steam을 공급판매하는 회사여서 Steam 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다른 대안이 없어 계열사들이 앙앙불락이던참에 우리회사 페열보일러를 설치하여 상당부분의 Steam을 자급하게되니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최종적으로 폐수처리 설비를 설치하여 청정폐수를 방류하게 되고 일부는 소방용수로 활용하는 쾌거를 이루는등 실로 대한유화 시절은 내 젊음과 엔지니어로서의 정열을 마음껒 발휘한, 아무리 일해도 지칠줄 모르는 즐거운 시기였다.
잊을 수 없는 일은 1973년 10월 23일로 기억되는데쥐한마리가 변전실에 들어가 合線短絡 사고를 일으켜공장이 비상 Shut-Down된 사례가 있었다. 중합기는순간의 정전이라도 발생하면 중합물을 저어주는 攪拌機가정지되고 중합반응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중합기 전체가 떡시루가 되어 버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이 정전사고 나아가 중합기 교반정지사고였다. 강수철 전무님은 $100만짜리 쥐라고 하시면서 보관하여교훈과 경계로 삼으라고 하시었다. 중합기 복구는 실로눈물겨울 지경이었다. 물을 집어넣고 끓인 다음 可燃物이다 除去 된 다음 찬물을 부어 식히고 다시 질소로 불어내고 그리고 나중에 Blower로 공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들어가서 광산에서 곡괭이로 광석을 캐내듯 조금씩 조금씩 쫗아내었다. 진도가 느리고 시간이 한 없이 소비되었다. 최신공장에 이런 부문이 있다니! 나중에 비상발전기를설치하고, 정전시에는 즉각 천천히 저어줄 수 있는 소형모터를 덧붙여 설치하여 개선하게 되었다. 이렇듯 닥치는 문제는 항상 해결하면서 개선하여 공식적인 기술외에 Know-How라는 것이 있게 된다. 경험이란 이렇듯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되니 PP공장에관한한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고밀도 폴리에틸렌은 이름은 폴리 에틸렌이지만 용도는PP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았다. 반드시 대한유화에서 사업화해야할 품목으로써, 두 제품을 서로 보완하게 되니 利點이 많았다. 유공에서150,000MT/Y의 에틸렌으로는 需要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프타 분해 공장을 새로 건설하는 일은 실로 지난한 일이었다. 결국 麗水 지구에 호남에틸렌 공장이 들어 서게 되는 것이다. 이 때도 청와대에서 대한유화로 하여금 주체가 되어 추진하라는 종용을 많이 한 줄로 안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한국의 석유화학공업의 양상 그리고 나의 人生歷程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원료가 부족하니 PP도 고밀도 폴리에틸렌도 Switch하여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중합반응기가 4기여서 나중에 고밀도폴리에틸렌의 중합설계를 하여 분자량분포를 임의로 조절하는 획기적인 발견 및 개선을이룩하게 된다. 고밀도폴리에틸렌 사업의 초기에 짓소의 촉매기술의 不實로 異常重合物이 생성되어 배관과 펌프가 막히는수많은 Trouble을 겪고 강수철전무는 PP촉매로 고밀도폴리에틸렌(HDPE)을 중합하는 공법을 만들어 내었다. 나중에 後學들이 개선하여 상업운전을 성공적으로수행하는 Process로 정착운영되고 있다.
Plant 국산화 사업과 관련하여 내가 강수철 전무님대신 위원이 되어 과기처와 기계공업협회등 간부들과팀웍을 이루어 활동한 일도 있었다. 대한유화의 사례를토대로 Presentation 자료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전문가에게 시키자고 탐탁하지않아하더니 정작 자료를보고는 탄복을 하던 일이 생생하다. 성공적인 시운전후에 ‘74.3 생산부장으로, 공정개선 및 증산의 주역으로‘78.3 생산기술 이사로, 안정가동과 회사의 성장과 더불어 ‘80.3 상무이사 및 공장장으로 이렇게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하여갔다. 이렇듯 대한유화는 잊을 수가 없는 직장이었다. 지금도 옛동료들이 그 때를 추억하며 나에게 전화를걸어 회고담을 하게 된다. 고락을 같이 하던 일은우리 머리 속에서 지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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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한유화맨 가족모두가 필독해야할 글입니다
모두가 주위의 동료들께 이글 읽기를 권유하는 켐페인을 전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