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심론』의 선정론
2)멸진정과 구차제정
멸진정은 상수멸정(想受滅定, saṃjña-vedita-nirodha)이라고도 한다. 상(想)과 수(受)의 지멸은 분별 사유를 여의는 직접적 조건이며, 논리적 사유나 추론과 분석을 초월하게 한다. 이것은 점진적인 행의 지멸로 모든 감각기관이 매우 투명하고 청정하며 고요해진 상태이다. 따라서 감정과 사유가 투명하고 청정한 상태의 완성이며, 이 같은 마음의 확립 없이 반야 지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멸진정은 『구사론』에서 "모든 아라한으로 멸진정을 얻은 것을 구해탈(俱解脫)이라 하며, 지혜와 선정의 힘으로 번뇌와 해탈의 장애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머지 멸진정을 얻지 못함을 혜해탈(慧解脫)이라 하며, 단지 지혜의 힘으로 번뇌의 장애를 벗어났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처럼 멸진정은 심해탈과 혜해탈을 갖춘 수행자만이 들어가는 선정이다. 그러므로 여덟 가지 삼매를 증득한 불환자(不還者, anāgāmī)와 번뇌가 다한 자만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또『금강심론』에는 사선‧사무색정‧멸진정의 구차제정을 갖추어 수행하기를 권장하며, 『유가사지론(Yogâcārabhūmi)』에는 여래의 성스러운 머무름[聖住]도 '공(空)에 머무름[空住]'과 '멸진정에 머무름[滅盡定住]'이 많다고 설한다. 벽산은 아래에서 멸진정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수(受)와 상(想)을 멸했다는 것은 수‧상음에 치우쳐 이름을 드러낸 것이다. 상이 끊어지고 수가 없어졌기에 이름이 멸수상(滅受想)이다. 멸진정이란 일체에 대해 통하는 마음과 심수(心數)로 이름을 드러낸 것이다. 마음과 심법의 일체가 함께 사라졌기에 멸진이라 한다.
위와 같이 멸진정은 수음과 상음의 두드러짐으로 드러나, 두 가지가 끊어지고 없어짐으로 멸수상이라고도 한다. 즉, 수음과 상음의 느낌과 생각이 멸하며, 또 마음과 심법의 일체가 멸한 것이라 한다. 또 경론을 인용하여 "마음과 마음 작용을 멸함이 멸진정이다."라고 하며, "저 마음과 마음 작용의 멸함이 멸정이며, 항상 오염된 마음 등을 행함이 소멸한 까닭으로 멸수상정이라 한다."고 설한다.
특히 느낌과 생각의 마음 작용을 싫어하고 등지며 이것을 일으키므로, 이러한 멸진정은 해탈이라는 명칭도 얻게 되었다. 또 불환과(不還果) 이상의 성자(聖者)가 열반에 임시로 드는 상을 일으키며, 이런 선정에 들어가는 최장의 시간이 7일이다.
초기 경전에는 열 가지 장애(saṃyojanānaṃ)를 멸하면, 사과(四果, Cattāri sāmañña phalā)를 성취하여 아라한이 된다고 한다. 즉, 불환자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장애를 완전히 없애고, 화생하여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멸진정에 들어 열 가지 모든 장애를 소멸하고, 심해탈과 혜해탈을 모두 구족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한편 『유가사지론』에는 선정의 즐거움을 다양하게 설하고 있다. 첫째는 얕은 즐거움으로 무소유처 이하의 선정이고, 둘째는 중간의 즐거움으로 비상비비상처이며, 셋째는 수승한 즐거움으로 생각과 느낌이 사라짐이다. 다시 말해 멸진정은 수승한 즐거움으로 모든 생각과 느낌이 사라진 적정(寂靜)의 즐거움이다. 아래에서 벽산이 설하는 멸진정의 법문을 들어보기로 한다.
멸진정이란 색음을 멸진함에 따라, 수‧상‧행‧식 사음(四陰)의 오염된 마음을 멸진하는 삼매이다. 초‧이지(二地)에서 색음을, 삼‧사지에서 수음을, 오‧육지에서 상음을, 칠‧팔지에서 행음을, 구‧십지에서 식음을 상하품(上下品)의 열 번을 겹쳐, 다섯 계위로 멸진함이다.
사선과 사무색정에서 색음(色陰)을 멸하였다면, 멸진정에서는 사온으로 분별하는 마음을 멸진하는 삼매라는 뜻이다. 이는 십지(十地, Daśa-bhūmi)를 두 가지씩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각기 하나의 오온을 다섯 계위에서 차례로 멸하게 된다. 십지는 『화엄경』에서 설하는 깨달음을 이루는 열 가지 단계이다. 십지 외의 계위도 『화엄경』 등에서 설하는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등각‧묘각 등이다. 일반적으로 십신에서 십회향까지는 범부이고 초지 이상은 성자이다. 십신이 외범부(外凡夫)이고 십주에서 십회향은 내범부(內凡夫)이다. 다시 『금강심론』의 법문을 들어보기로 한다.
십신위에서 색음을, 십주위에서 수음을, 십행위에서 상음을, 십회향위에서 행음을, 십지위에서 식음을, 다섯 번 겹치는 십위로 멸진함이다. 열 번 겹치는 오위는 십주위부터 다섯 번 겹치는 십위는 삼지부터 차례로 멸진함이다. … 그리하여 사선‧사무색정에 이를 더하여 구차제정이라 칭하며, 사선과 사무색정은 삼승성자와 외도가 함께 수행하 나 아홉째의 멸진정은 성자에 한정하는 것이다.
앞의 인용문에서는 오음을 각기 십지의 두 가지 지위에 배대하여 한 가지씩 멸한다면, 위의 인용문에서는 각기 다섯 계위에 배대하여 오음을 한 가지씩 멸한다고 설한다. 즉, 십지의 열 단계에서 두 지위씩 각각 오음을 멸하던 것을, 다섯 계위의 열 단계에서 각기 오음을 멸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오음의 거친 것부터 미세한 것을 멸하는 것처럼, 점점 수승한 단계로 올라가며 멸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멸진정은 상온과 수온의 멸함을 중요하게 설하는데, 오온은 모두 유위에 포섭되고 다 조작된 것이며, 어떤 법도 하나의 조건으로 생겨난 것은 없다. 이러한 오온을 각기 한 단어로 요약하면, 방소(方所)‧위(位)‧분별‧작(作)‧집지(執持) 등이다.
『금강심론』에는 오온을 차례대로 각기 깨닫는 지위에 대치하여 멸한다고 한다. 이처럼 오온 각자에 대한 탐욕을 끊으면 대상이 끊어져, 식(識)은 지원받지 못하고 증장‧형성하지 못하므로 해탈하게 된다. 마치 거센 불길이 연료 공급이 없으면 꺼지고, 연료[行]가 사라지면 유위식(有爲識)은 고요하며 활동성을 보이지 않는다. 곧 식의 소멸로 현생의 열반 성취이므로, 멸진정을 열반에 빗대어 많이 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사선과 사무색정에도 오온을 각기 "걷고 돌이켜서[轉]"라고 말하고, 다시 멸진정에서 사음을 설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세히 보면 멸진정에서 오온을 설함은 '멸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온을 "걷고 돌이켜서"라는 말이 '멸진'이란 말로 바뀐 것이다. 사선정에는 사온을 돌이켜 사덕으로 전환하는 것을 설하며, 멸진정에는 느낌과 생각이 멸하는 단계로 오온이 멸진됨을 설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사선의 사온은 분별하는 네 가지 성품이 공덕의 네 가지 성품으로 바뀌며, 멸진정의 오온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모두 멸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즉, 사선에서는 사대의 분별 성품을 사덕으로 바꾼 것이며, 멸진정은 온전히 오음만을 상대하여 멸한 것이다. 구차제정의 단계별 수행으로 볼 때는 사선정의 수행이 있으므로, 멸진정에서 수월하게 오온을 멸할 수 있는 것이다.
멸진정의 과정을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표 7> 멸진정의 오음 멸진
수행 계위 | 멸진정 | 보살 십지 |
십신위 | ⇨ | 색음 | 멸진 | ⇦ | 초지‧이지 |
십주위 | ⇨ | 수음 | 멸진 | ⇦ | 삼지‧사지 |
십행위 | ⇨ | 상음 | 멸진 | ⇦ | 오지‧육지 |
십회향위 | ⇨ | 행음 | 멸진 | ⇦ | 칠지‧팔지 |
십지위 | ⇨ | 식음 | 멸진 | ⇦ | 구지‧십지 |
<『금강심론』수행론 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