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즐거움과 자랑
2025. 2. 9(주일낮예배) 로마서 5:1-11
여러분은 세상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가? LG 최종면접 때였다. 면접관은 원과 타원의 차이를 말해보세요 하고 질문했다고 한다. 그때 문과이고, 특히 수학을 못하는 취준생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순서였던 한양대 공과대 석박사인 취준생이 원은 중심점이 하나이고, 타원은 중심이 두개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공대를 나온 취준생은 중심점으로 원과 타원의 차이점을 설명한 것이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저렇게 대답을 잘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더 커졌다. 그리고 이제 문과를 나온 이 학생도 대답을 해야할 순서가 되었다. 그때 이 취준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상력과 응용력과 연상능력을 다 동원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은 LG 로고이고, 타원은 삼성의 로고입니다. 원은 중심축이 한 개라 안정적이지만, 타원은 중심축이 두 개라 불안정합니다.
여학생의 대답을 들은 면접관들은 다 크게 웃었다고 한다. 여학생은 한양대공대 석박사인 취준생의 대답에 자신의 재치까지 넣어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답을 한 것이다.
이 정도의 재치를 가지고 있으면 자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재치가 없어서 마땅히 해야 할 말도 못해서 힘들어 할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자녀들이 대기업에 취업하고, 또 한 평생 수고하고 살아서 지금은 돈 걱정하지 않고 해외여행도 다니고, 자녀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할 때 걱정없이 줄 수 있으면 자랑할 것이 많을 것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내 인생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도 자랑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자랑할 수 있겠는가? 미국 일리노이주 네이퍼빌장로교회를 섬기는 데인 오틀런드 목사님은 우리가 몰랐던 예수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인간에 대한 올바른 분류법은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뉘어져야 한다.
데인 오틀런드 목사님은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내가 죄인인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으로 사람은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사람은 모두 죄인인가? 창세기 3장은 죄의 기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든 짐승 중에 가장 간교했던 뱀은 여자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여자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지금까지 여자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어!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런데 뱀의 말을 듣고 난 여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았을 때 뱀의 말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이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가 진행되어지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말이 먼저 생각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유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에 평안이 있겠는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느냐? 고 물었을 때 아담은 오직 자기만 보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는 치졸한 대답을 한다. 지금 아담의 눈에는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과 두려워 떠는 여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죄의 모습은 창세기 6장에도 반복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창세기 6장 2절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왜 취하였는지를 알려준다.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였는지 창세기 6장 2절을 읽기 바란다.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은 셋을 통하여 태어난 언약의 백성을 말한다. 그런데 그 언약의 백성이 언약을 받지 못한 사람의 딸들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한 것이다.
이것이 왜 죄가 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전 10:31)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이 생각나지 않고,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생각이 가득했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채웠기 때문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죄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세계 3대 심리학자인 윌터 미셀박사가 연구결과를 정리한 마시멜로 테스트 라고 하는 책이 있다. 그 책에 빌 클린턴 대통령과 타이거 우즈가 성스캔들에 빠진 이유에 대하여 질문한다. 미국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대통령 빌 클린턴이 르윈스키 사건으로 탄핵 위기까지 간다. 타이거 우즈도 마찬가지이다. 골프황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타이거 우즈는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인하여 14명의 여성과 성스캔들에 휩싸이면서 TV광고와 후원맺은 기업과의 계약이 취소된다. 그런데 그 책에서 윌터 미셀 박사는 클린턴 대통령과 타이거 우즈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 유혹을 즐기려 하였겠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유혹을 떨쳐버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유혹을 즐기려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안타깝지 않는가?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부와 명예로 자신들의 유익만 바라본 사람들이다. 그 결과 타인을 무시하고, 또 자신이 가진 것을 과시하고 누리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의 모습은 종교와 신앙에도 나타난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든다. 그런데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하고, 또 앞으로도 인도할 하나님을 만들려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우상이 되었다.
잘 기억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필요에 따라 만들면 우상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것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이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것이 불안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거기에 신상을 두었다. 자신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하나님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금송아지였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없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은 우리의 상태를 3가지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6절에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라고 우리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연약할 때라는 말은 구원받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전혀 없는 무익한 상태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8절)와 원수 되었을 때(10절)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아서는 상태에 놓였을 때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심각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약할 때, 죄인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 6절, 8절, 10절을 읽기 바란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되었을 때, 또 원수되었을 때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아니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또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즐거움이고, 자랑이다. 비록 우리는 누구처럼 말을 잘하지도 없고, 한평생 수고하며 살았지만 남은 재산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한숨쉬고 내가 뭐하며 살았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숨쉬어야 할 그때에 기억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즐거움이고, 또 자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자랑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있는가? 렘브란트가 그린 명화 중에 호메로스의 흉상을 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작품이 있다. 이 그림에는 멋진 옷을 입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의 초라한 흉상을 부러운 듯한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가난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엄청난 부를 누렸다. 그래서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평생 가난하게 산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쓴 호메로스를 부러워하고 있다.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난한 호메로스를 부러워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 렘브란트는 가난했던 시절 예술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림이 인정을 받아 많은 돈을 벌게 되면서 렘브란트는 비록 가난했지만 순수한 열정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때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부와 명예를 다 가졌다고 즐거움이 가득하고, 참된 자랑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비록 가난해도 진리를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여 열정을 품고 있을 그때가 가장 즐겁고 참된 자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의 자랑은 부와 성공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죄인되었을 때에,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