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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된 시간 관계로 다른 지역은 답사를 생략하고, 우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들 중심으로 답사를 진행했습니다.
성북동 해설 팀 : 신동수, 변현준, 심상진, 한미우
[ 성 북 동 답 사 ]
2018. 전통문화지도사 양성과정 시내 현장답사
1. 성북동 지역 "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
-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하였고 갑오개혁때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
성북동이 명칭: 도성밖 어영청 북둔지와 선잠단지.
영조때 도성방위 목적으로 북둔지를 마련하고 군인들의 가족들을 이전 시켜 마전(생포목을 빨거나 삶아서 볕에 바래는일)과 궁궐에 메주를 납품토록하고 과수재배(복숭아,앵두나무)등으로 생활 터전 마련.
풍광이 좋아 몇몇 양반들의 별장지로 활용.
* 조선시대 구경거리 : 1.인왕산의 살구꽃, 2.서대문밖 서지의 연꽃, 3. 동대문밖 동지의 수양버들, 4.세검정 근처 탕춘대의 수석, 5.성북동천의 복숭아꽃
- 일제시대
1911. 경기도 경성부. 1914.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936.한성부로 편입.1943. 區제처음 실시때 동대문구. 1949.성북구 관할 변경
1930년 이후 이주민 마을 형성
- 해방 이후 현재
해방 후 및 한국전쟁 이후 토방집 및 피난민 가옥.
1960년대 삼청동길, 북악산길등 본격적 개발. 남쪽-서민층 달동네. ‘북정마을’
김광섭의 ‘ 성북동 비둘기’(문명화로 인해 삶의 터전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존재). 북쪽-재벌, 유명인들 대 주택. 대사관저 40여개 - ‘대산관로’.
2000년 이후: 사설미술관, 카페, 고급 빵집 레스토랑등 성행
최근: 역사문화 마을 조성, 걷기 좋은 거리등 지정.
2. 최순우 옛집
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은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 박물관을 거쳐 해방 후 서울로 부임하면서 우리문화를 새롭게 발견하고 체계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1970년대 말 ‘한국미술 5000년 전’을 기획하고 일본과 미국에 순회 전시를 하여 당시까지 중국과 일본의 문화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세계에 알림으로서 우리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전시 기획은 우리박물관사에 가장 큰 획기적인 사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집은 혜곡선생이 197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고택이다. ‘달항아리’와 ‘배흘림기둥‘이라는 용어로 최초로 표현하며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담백한 필체로 담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을 비롯 많은 집필 활동을 이곳에서 하였다.
전형필 선생이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라면, 최순우 선생은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였고, 우리 전통 문화를 김환기화백은 그림으로 표현하였던 인물들이라 하겠다.
뒤뜰에 조선백자를 대표하는 달항아리가 자리 잡고 있어 재치와 여유가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안채의 대청과 사랑방에 마련된 작은 전시관은 선생의 원고와 사진 등을 전시한 곳으로 4월부터 11월까지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하며, 봄과 가을에는 이곳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 예술 교육 프로그램과 특별 전시회를 진행한다.
2002년 주변의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시민 기금으로 보존의 가치가 있는 땅이나 문화재를 구입하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통하여 지켜낸 공간으로, 조선시대 말기 가옥인 이곳은 화려함보다는 담백한 아름다움으로 부드러운 한국의 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은 구석구석 해곡 선생의 정성이 담겨 있다.
3. 선잠단지
국조오례의 중, 중사 -선농, 선잠, 우사에 대한 제사. (소사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
성종 때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는 기원을 드리기 위해 혜화문 밖에 세운 제단. 나라에서는 일반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해 왕비가 손수 뽕잎을 따고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는 행사인 ‘침잠례’를 열기도 했다.
선잠단은 1908년 사직단으로 옮겨 제사를 지내면서 폐허화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개인 소유가 되었다. 현재는 성북초등학교 옆길에 조그마한 터로 남아. 매년 5월 이곳에선 잠제례를 재현한다.
4. 간송 전형필(1906~1962)
간송 전형필선생은 23세때 증조부 전계훈 (배오개 상권 장악. 전국에 600만평 전답. 십만석 부자)의 재산을 상속.
고희동, 오세창(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당대 최고의 서예가)를 통해 문화재를 보는 안목과 지식을 습득.
민족문화유산이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것을 20대였던 1920년대부터 자신의 전 재산을 통틀어 문화유산을 사들이기 시작. 엄청난 양의 국보급 서적, 서화, 도자기, 불상 등을 사들여 일본으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막은 문화 독립 운동가였다.
1940년에 재단 법인 동성 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보성학교를 인수 후 이사장으로 취임.
이후 1947년에 고적 보존 위원회 위원, 또한 1954년에 문화재 보존 위원회 위원으로 피촉 되었고, 1960년에 고고 미술 동인회 발기인 등으로도 활약하였다.
간송은 한남서림 고서점 운영하면서 고서와 정선, 신윤복등의 미술 작품등을 대량 수집하였고, 당시 국내의 정보 및 수집은 이순황을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와 일본내의 정보를 전담하는 일본인을 두고 전문적으로 수집 활동을 하였다. 당시 서울의 고급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 청자기린형 뚜껑 향로(국보 제65호), 청자오리모양 연적(국보 제7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보물 제286호), 청자상감국목단당초문모자합(보물 제349호) 등 영국인 수집가 존 개츠비가 가지고 있던 청자(靑磁) 15여 점은 공주의 5000석 마지기 논을 팔아 기와집 400채 가격으로 구입하였으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은 기와집 10채에 해당하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고, 심사정의 대작 <촉잔도권(蜀棧圖卷>은 기와집 5채 값에 구입하고 수리비만 6채 값에 해당되는 금액이 들었다.
그 외에도 경매와 일본으로 넘어간 미술품들을 되찿기 위해 큰돈을 아끼지 않고 구입하였다.
간송 선생이 문화재 반출을 막고 수집하기 위한 수많은 일화들은 우리나라를 지켜내려는 투혼을 말해주고 있으며, 7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보화각을 방문하겠다는 사전 연락을 받고도 우리 고급 문화재를 쉽게 보여줄 수 없다는 자부심으로 보화각 정문 입구에서 1시간가량 대기 시켰다는 일화는 선생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북단장내에 1938년 한국 최초의 사설 박물관인 보화각(保華閣)(박길룡 설계)을 지어 유일하게 전해 오던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그가 수집한 5000여 점의 문화재 등 우리나라 문화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들을 보관해 왔다.
6.25 전쟁으로 인해 북한군이 간송의 수장 미술품을 이북으로 수송하려는 작업을 최순우, 손재형 두 분의 지혜로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으나,
이후 보화각을 확대하여 1966년 간송미술관과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새롭게 발족하였다. 미술관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설기관으로 되어 있어 미술관은 미술품의 보전·전시 업무를, 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사업을 맡고 있다.
미술관의 규모는 1층과 2층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그림·글씨·부도·석탑 등에 걸쳐 다양하다. 2016년 현재 『훈민정음』(국보 제70호)·「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신윤복필 풍속도 화첩」(국보 제135호), 김정희,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회화ㆍ서예 작품ㆍ자기ㆍ불상ㆍ서적과 국보 15점, 보물 10점 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이 등록되었다.
고미술품과 전적을 정리하여 1971년 이후 매년 봄ㆍ가을 2회(5월 말, 10월 말)에 걸친 수장품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으며, 장소의 협소를 해소하고자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2014년 이후 상설 전시관을 운영중이다.
도봉구 방학동에 전형필이 생활하였던 근대기 전통 가옥과 함께 묘소가 있다.
5. 李泰俊과 수연산방(壽硯山房)
尙虛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부모를 차례로 다 잃고 한국 각지를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후 1933년 성북동 수연산방을 짓고 그는 처음 경험해보는 안정된 삶의 터전을 에서 누리며 그곳에서 주요작품들을 썼다. 이후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면서 성북동은 경성의 대표적 문인촌이 되었다.
상허 이태준은 <달밤>, <무서록>등 깔끔하고 운치 있는 문장과 짜임새 있는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개성 있는 인물 묘사로 문학의 진수를 보여준 작가로서 1933년에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구인회’를 결성하여 이끌어갔다. 당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추구했던 카프에 반기를 들고, 이상, 박태원, 이효석, 김유정, 정지용, 김기림등 '한국 근대문학의 별’이라 부를 수 있는 위대한 작가들이 이 단체를 거쳐 갔으며 또한 청록파가 등단한《문장》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우리 문학사에 적지 않은 공적을 남긴다.
그는 일제 강점 기간에 보인 소극적 처세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일원이 되어 소련을 다녀온 후 1948년 홍명희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한국전쟁시 종군작가로도 내려와 자신의 집을 찿기도 했으나 1953년 임화 등 문인들과 함께 숙청 당 한 것으로 알려젔고 그 후 어렵게 생활을 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생존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시에는 정지용 산문에는 이태준”,
“ 러시아에는 체호프, 프랑스에는 모파상, 미국에는 오 헨리, 조선에는 이태준이 있다”는 말이 회자됐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단편소설의 완성자’라는 칭호가 붙여진다.
이태준의 <문장강화>(1939)라는 문학 개론서는 글쓰기의 대표적 교본으로 손꼽는다. 그는 작가의 개성적 시각과 표현력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미를 주장하며 한편 소설의 3요소 인물, 사건, 배경 중 인물을 가장 중요시 했다
- “문장에는 맛있는, 아름다운, 매력있는 무슨 요소가 남아 있어야한다”
- “생각이 많아야 글을 잘 쓸 수 있다”
- “소설은 인물의 발견이다”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작은 집’이라는 의미의 택호로 지은 수연산방은 1977년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
“ 훌륭한 건축은 청부업자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 주인의 인격으로 되는 것”이라는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의 말을 쫓아, 당시 유행이던 ‘문화주택’이 아닌 “조선건축의 순박, 중후한 맛”을 내기위해, 5명의 노련한 목수를 직접 고용하여 전통적 한옥에 혁신적인 평면구조와 근대적 소재를 결합시킨 독특한 개량한 한옥을 지어 이태준의 성품과 인격을 묻어내었다.
이태준에게 건축은 “ 그 속에 사는 사람의 교양, 취미, 모든 인격을 다 표현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외종손녀가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6. 만해 한용운(1879~1944).
초인적 열정가, 뛰어난 직관력, 자존심 강한 비타협성, 괴팍, 독설가, 고독
불교개혁 사상가, 민족시인, 독립운동가
1879. 08 충남 홍성군 출생
14세 결혼
18세 가출 (만주, 시베리아 방랑)
25세 귀향, 아들 보국 생(生)
1905(27세) 백담사 출가
1907년 고성 건봉사에서 수행 (수선안거)
1913년 ‘조선불교 유신론’ 발행
1914년 조선불교대전(팔만대장경 요약본) 발행
1917년 오세암에서 <오도송> 남기고 하산
불교개혁 운동에서 민족 독립가로 변신
1918년 일본, 만주 독립단체 방문
1918.9 계동 유심사에서 월간지 ‘유심’ 발간, 독립선언서 3000매를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지방에 배포 지시
1919년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 공약 삼장 작성. 낭독 후 3년 복역.
3.1운동시 천도교와 기독교 갈등을 무아사상으로 단결 유도,
용성스님(백상규, 대각사,1911) 참여.
1926년 저항문학 ‘님의 침묵’ 출판(1926)
1931년 신간회 활동, 조선불교청년동맹 활동
1937년 월간지 ‘불교’인수 후 논문 발표로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 불교관계 항일단체 ‘만당사건’ 배후자로 검거
1938년 장제스, 마오쩌둥에게 무장지원 요청, 실패
*정인보 -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청년들은 만해 선생을 본받아야 한다”
*홍명희 - “ 7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 보다 낫다”
** 만해 한용운 관련 일화
1. 서대문 형무소 수감중
가.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을 들이지 말 것. 3.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나. 극형에 처한다는 풍문이 돌아 이에 놀란 한 사람이 겁에 질려 훌쩍거리고 울자 만해가“ 이 비겁한 놈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그렇게도 슬프냐? 정 그렇거든 서명한 것을 당장 취소 해 버려라” 하고는 똥통에서 오물을 한주먹 꺼내 우는 사람 얼굴에 후려쳤다
2.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최남선이 인사를 하자“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 했소” 라고 일갈하고 가던 길을 재촉
3. 만해 부재중 어린 딸 영숙에게 최린이 거액 100원을 주고가자, 부인과 딸을 꾸짖고 최린의 집으로가 문틈으로 돈을 던지고 갔다.
*** 만해의 첫 아내 전정숙 사이에 난 아들 한보국(1904~1974)
홍성지역 신간회 활동. 고려 공산청년회 노동부(1931.7. 1년 옥고). 해방 후 홍성군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인민위원회 위원장. 월북. 김일성 뒤늦게 알고 만해를 높이 평가, 아들 평양시내 아파트 제공, 환갑상 차려주는 등 예우.
尋牛莊 (시도기념물 제7호,성북구)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의 집을 짓은 것.
총 112.99평의 대지 위에 17.8평의 건평. 단층 팔작 기와지붕,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형태. 서재로 쓰던 우측 방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한편에는 만해의 悟道頌이 그의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이다.
1937년 독립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김동삼의 장례를 치른 장소이기도 한데, 이때 조지훈의 아버지가 조사를 낭독하고 조지훈은 어려서 먼 발치에서 구경했다고 하는데 조지훈은 그 당시의 만해선생을 보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 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1984년 기념관으로 지정되어 쓰고 있다.
7. 북정마을
∙조선시대부터 성곽외곽에 마을이 조성된 후 일제시 영세민들과 한국전쟁이후 피 난민들이 대거 이주 마을 형성
∙궁궐에 메주 납품권한을 받아 마을사람들이 메주를 공동으로 만들때 북적거렸다 고 해서 북정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짐.
∙현재 도시마을공동체 사업 일환으로 도시재생기반 구축 결정
8. 한양도성
* 1394. 9. 1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
1394.10 한양천도
1395. 경복궁, 종묘등 준공
∙ 사대문과 사소문, 도시설계 : 좌묘우사, 전조후시 시전(운종가)
∙ 한성부- 5부 49방, 도성안 + 성저 10리
* 도성성곽축조
내사산(백악-인왕-목면-낙산)을 잇는 도성 18.3km
-1396(태조5) 1.9 공사시작
1차 118,070명 58,200자(9,767보)/ 2차 8.4~9.24 79,400명
-1421(세종3) 석성으로 개축. 322,460명 동원, 60cm X 90cm 장방형돌
-1704(숙종30) 도성수축공사 45cm X 45cm 크기의 정방형돌
∙ 기록문 각자
태조때 : 도성전체를 600척씩 구간구획, 천자문순서로 (180m 마다) 총 97개
세종때 :현존 각자 300여군데 중 100여개 군현, 명칭
숙종때 : 공사시작, 감독자, 실무자, 석수등 관련인물 직책 성명
순조때 : 여장안쪽에 새겨진 각자
∙ 안이토리의 애사: 각자에 3번(1707,9,10), 승정원일기(1711)에 부음 내용이 실림.
* 혜화문
한양도성의 동북문으로 처음 홍화문이었으나 중종5년(1511)때 혜화문으로 개명.
1928 문루철거,1938년 석축 철거. 1994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난 지금의 위치에 복원
**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립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중략-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