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근대문화유산중 가장 먼저 이름이 오른 이승만 별장을 다녀왔다. 이승만을 보러 간게
아니다. 당시의 건축양식을 보러 갔을 뿐, 정식명칭은 귀빈사이다.
건축당시 갑호 관사로 대통령이 두차례 이용을 했었다고 하니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았을 것이다. 소유는 정부에서 갖고 있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목장사업의 실패로 민간에
넘기고 말았다.
남조로 길을 타고 대천동 사거리까지 간다. 좌회전해서 민오름 앞 거슨세미오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반대편 차단봉이 쳐진 앞에서 하절기만 이용가능하다는 안내판을 본다.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미리 3일전부터 전화로 학술조사란 명목으로 팀원들이 예약을 한
덕분에 전화로 확인하고 문까지 열어두어 구경을 잘 할 수 있었다. 개인소유다보니
어쩔 수 없다지만 문화재를 관리하는 제주도와 문화재청의 관심이 필요하겠다. 목장
방역때문이라니....해결책이 없을까?
제주도청의 홈페이지에 기록된 내용으로는 제주의 건축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았단다. 근데
저 멋들어진 일제시대때의 돌담양식은 뭘까?
집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미국 남부의 건축양식이었다고하니 그런가 했을뿐이다. 다만
방이 많았고 난방도 스팀히터방식이었다.
마루와 지하의 공간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수리할때 좋을것 같았다.
당시의 것들인지는 모르겠다. 설명을 해주는 이도 없었으니 오래된 양식 같기는 했다.
테이블이 자개가 섞여 있어 한국식인듯 했으나 전체적인 모양은 서양을 따른 것.
나무도 원목보다는 합판인듯 보였다. 낡고 오래되어 재활용도 힘들것 같았다.
제주석을 쌓고도 건축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았다니 대체 무슨 연유로 그런 글을 도청에 올렸던
걸까? 비전문가가 쌓았다는 말인가? 제주석을 누가 나르고 다듬고 헀을까?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과 전쟁전에 살육을 하고도 무엇이 그리 기쁜지 기쁠희자를 두개나 써
놓았다. 이승만이 쓰라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반성하고 후회해도 시원치 않을 사람이 ..
저 글자를 보고도 아무말이 없었으니 지금껏 남아 있을 것이다.
중학생 무렵, 반공영화를 학교에서 많이도 봤다. 아마도 당시 베트남과 동남아의 공산주의자
들을 다룬 영화중에 캄보디아 크메르루즈를 다룬 영화를 기억할것이다. 자국민을 죽였던
세기의 살육자라며 온 세계에 알렸던 미국의 영화였다. 이승만이라고 캄보디아의 그들보다
나을 건 없었다.
57년 정부관계자들의 송당목장 방문...
정문에 이렇게 하절기만 가능하다고 붙여 놓으니 가 볼 수도 없는 근대문화유산이 되어 버렸다.
사전에 문의하면 학술적 탐방만 가능하다고 한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벤 플리트 한미재단 이사장의 제주
방문시 목장사업제의로 시작된 송당목장내에 건물을 축조하기로 협의하여 미군의 자재 지원을
받으며 국군 공병대가 축조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벽돌조 박공지붕 형태의 지상 1층 건물로,
연면적이 99㎡인 소규모 귀빈 숙사이다.미국식 정원형 단독 주택으로 건물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국가 원수가 거주했던 곳의 주거사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입식 구조, 식당과 침실이
분리된 내부 공간, 인테리어 등 이국적인 건물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본을 참조
시간이 지나 2018년이다 보니 이국적 특징은 잘 알기 어려웠다. 다만, 두차례 다녀간 숙소를
이승만 별장이라 불러야하나 생각해 보았다. 제주에는 정부소유이던 서귀포 허니문하우스도
이승만 별장이라 불렀고 속초의 화진포와 진해에도 이승만 별장이 있었다.
제주의 근대문화유산 리스트이다. 대부분이 대정의 알뜨르 비행장 인근에 있고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게 많다. 근대 문화유산의 개념이 어떻든 개항이후의 역사유적에 대한 보존을 하자는
생각이다보니 그랬을것이다.
내가 어릴적 뛰어 놀았던 민가의 집들도 근대문화유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제주의 집들이 부숴지고 신축되어 모두다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내 기억이 있다면 남의 기억도
있고 우리들의 공동체의 기억도 있은것이다. 권력의 기억이 아니라 소시민의 기억도 보존해 갈
일이다. 역사는 권력자만 등장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