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절로 찾아간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성철큰스님 평전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어머니는 또 가슴이 무너졌다. 소리 없이 선방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겨보았다.
역시 문이 잠겨있었다.
아들이 잠근 문을 열어 달라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돌아섰다."
어머니 강상봉이 범어사 원효암을 찾아갔다.
큰절 범어사에 들러 아들을 찾으니
원효암에서 여름 안거 중이라 일러주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한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계절이 바뀌면 약과 의복을 마련하여 성철을 찾아갔다.
그러나 성철은 어머니를 아예 만나주지 않았다.
해인사에서도 그랬고, 범어사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원효암은 금정산 중턱에 있다.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범어사 암자 중에서는 가장 높아
큰절에서도 한참을 올라가야했다.
어머니는 잡목 사이로 나있는 숲길을 보따리를 이고 올라갔다.
등짝에 한여름 불볕이 쏟아졌다.
온 몸이 땀에 젖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힘들게 찾아감이 다행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설마 이리 고생해서 찾아가는 에미를 내치진 않겠지.’
원효암에 도착해서 두리번거리는데
스님 하나가 먼저 보고 말을 건넸다.
“보살님, 이 염천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철 스님이라고 여기 있지요.”
“선방에 있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에미되는 사람입니다. 좀 불러주시오.”
“잠시 기다려보시지요.”
스님이 선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스님의 키가 유난히 작다고 느꼈다.
아들 성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키 작은 스님이 이내 혼자서 나왔다.
“만나지 않겠답니다.”
그렇게 전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허둥거렸다.
어머니는 또 가슴이 무너졌다.
소리 없이 선방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겨보았다.
역시 문이 잠겨있었다.
아들이 잠근 문을 열어 달라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돌아섰다.
이고 간 보따리를 풀어
선방 앞에 한약과 과일, 옷가지 등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기다리지 않고 원효암을 나섰다.
내리막임에도 큰절로 내려오는 길은 다리가 풀려 힘이 들었다.
쉬엄쉬엄 걸으니
비로소 새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오솔길에 주저앉아 어머니는 아들을 떠올렸다.
서운한 마음이 엷어졌다.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좌우지간 별난 사람이야. 내가 낳았어도 그 속을 모르겠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 무렵 ‘황도(皇道)불교’란 용어가 등장했다.
황민화정책을 불교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황민(皇民)은 ‘일본 천황의 백성’이라는 뜻이니
황민화정책은 조선백성을 황국(皇國)의 신민(臣民)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황도는 ‘천황의 도’를 뜻하고 있음이니
조선불교를 황국의 종교로 예속시킴이었다.
이에 소위 총독부 산하 불교단체 간부들은 재빨리 호응했다.
제국주의의 전쟁을 미화하고 승려와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중앙기관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모든 사찰이 국위선양무운장구를 기원하는 재를 지내도록 독려했다.
8월이 되자 친일 학승 권상로와 김태흡이 청년들에게 참전을 부추기는 시국강연을 열었다.
또 주요 간부승려들이 중국 화북지역으로 떠나는 일본군을 환송했다.
이후 중앙교무원 간부들은 날마다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을 향해 합장했다.
‘중앙종무원에서는 이와 같은 출동부대 송영과 아울러
중일전쟁에 나간 일본군인과 그 가족들을 위한
위문금을 경성시내 사·암과 포교소에서 모금하여 일본군에 갖다 바쳤다.
그해 8월20일 오후 6시에는 용산역에 도착하는 출정장병 유골 영접차
이종욱, 황금봉, 한성훈, 권상로, 최응산, 이태준, 이상열 등의 조선승려들이
조기를 들고 용산역 구내에 출영하였다가
유골 행렬과 함께 계행사(階行社)에 가서 일본군 영전에 독경·분향했다.’ (임혜봉 지음 ‘불교사 100장면’에서)
31본산 주지들은 주지회의를 마치고
신궁을 찾아가 단체로 참배했고,
불교단체들은 황군 위문단을 파견했다.
조선불교 개혁을 부르짖던 승려들도 하나둘 친일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조선불교가 몽땅 왜색으로 물든 것은 아니었다.
비록 초라하고 궁해도 선방에는 수좌들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성철은 1937년 가을 범어사를 나와 통도사로 향했다. 동안거를 하기 위함이었다.
자장 스님이 646년(선덕여왕 15년) 창건한 통도사는 불보(佛寶)종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영축산이 통도사를 품고 있다.
부처님이 설법한 인도의 영축산과 닮아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경허선사가 선풍을 크게 일으킨 이후
근현대에는 성해, 구하, 경봉, 벽안 스님 등 고승들이 주석했다.
통도사 백련암은 1374년(공민왕 23년) 월화 스님이 창건했고,
1634년(인조 12년) 현암 스님이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백련암 선방은 숱한 고승들이 깨달음을 얻어간 명소였다.
만해 한용운도 백련암에서 ‘불교대전’을 집필했다.
백련암은 1935년 다시 선방을 열었는데
당시 통도사 주지인 경봉 스님은 백련암 선방에 쌀 200가마를 보냈다고 한다.
이후 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통도사 백련암에 이르자 우선 우람한 은행나무가 성철을 맞았다.
오래 되어 늠름하고 더 푸르렀다.
적어도 500년은 그 자리에서 백련암을 지키며 선객들의 깨닫는 순간을 지켜봤을 것이다.
은행나무야말로 꼼짝하지 않고 화두를 들고 서있는 진정한 선객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비범해 보였다. 은행나무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붙들고 왔는가?”
이듬해 봄 스승의 부름을 받고 다시 부산 범어사로 돌아왔다.
동산 스님이 지키고 있는 내원암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성철은 바르게, 또 치열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선방스님들은 그렇지 않았다.
성철이 보기에 화두를 건성으로 들고 흉내만 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동산은 그런 선객들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성철은 스승에게 선객은 모름지기 용맹정진해야 옳다며 대중들을 경책해달라 요구했다.
동산이 이를 받아들여 선객들에게 용맹정진하라 일렀다.
그러자 선방 대다수 스님들이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모든 불평이 성철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성철은 꿈쩍도 안했다.
“생사해탈을 기약해야 하는 선객들이 이만한 것도 참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탈이 나고 말았다.
말싸움이 결국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스승이 성철을 불렀다. 우선 상좌부터 나무라야 했다.
“공부하고 싶으면 자네만 열심히 하게.
앞으로 억지로 공부하게 만들지 말게.
그것이 함께 사는 요령일 수도 있음이야.”
그래도 성철은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불경이 아니었다.
깨달음을 향한 ‘분노’였다.
성철은 불경의 가르침대로 대각(大覺)이야말로 스승에 대한 최상의 보답이라 여겼다.
또 동산 스님과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눈에 부잣집 안주인처럼 보이는 보살이 찾아왔다.
그러자 동산이 공손하게 맞이하더니 주지실로 안내했다.
공양시간이 되자 직접 밥상을 들고 들어가 대접했다. 성철이 이를 목격했다.
도인풍의 외모에 반듯한 몸가짐으로 기품을 잃지 않던 스승이
보살에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니 부아가 올라왔다.
보살이 돌아가기가 무섭게 쫓아가 따져 물었다.
“출가승이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는데, 스님은 어찌 보살에게 밥상을 들고 가십니까?”
동산이 그런 제자를 한편으로는 다독이고 한편으로는 꾸짖었다.
“자네도 나중에 절 살림을 책임 맡으면 알게 될 거네.
주지는 주지대로 할 일이 있는 거야.
이 절에 머물고 있는 대중들을 굶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적어도 선객들에게 수행할 여건은 마련해줘야지.
이 어려운 때 쌀 몇 십 가마씩 시주하는 보살한테 밥상 좀 나르는 게 무슨 큰 흠이라고.
설령 흠이 되더라도 그만 둘 생각은 없네.
자네는 그렇게 시주 받은 밥 먹고 힘내서 수행하면 되고,
나는 부지런히 쌀 모으면 되는 것 아닌가.”
성철은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어려운 절 살림을 꾸려나가는 스승과 구도의 결기가 시퍼런 제자의 부딪힘이었다.
형편이 좋으면 뉘라서 보살에게 밥상을 차려가겠는가.
스승은 현실을 헤아리지 않는 제자가 섭섭했다.
친일승들이 종권을 쥐고 호의호식을 할 때
저 남쪽 가난한 절에서는 이렇듯 스승과 제자가 승려의 품격을 따지고 있었다.
성철은 훗날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님은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래?”
수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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