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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성김씨 괴정공파(槐亭公派) 괴산 백운문중(白雲門中)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근33세
시조(始祖)는 김 석(金 錫)으로 신라(新羅)金氏 38代(56代)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장녀 신란공주 (一名 낙랑공주)가 어머니이다.
신란공주(神鸞公主)는 왕건 태조의 셋째부인 신명태후(神明太后) 충주유씨(忠州劉氏)의 소생이다.
이로써 고려 왕건 태조의 외손이며 2代 혜종(惠宗), 3代 정종(定宗), 4代 광종(光宗)의 생질(甥姪)이다.
고려 초 무신(武臣)정치 시대에서 벗어나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文治 시대로의 전환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국방(國防)과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공을 세워 경종 임금 때 식읍 300호를 하사 받고 의성군(義城君)에 수봉 되었으며 제 8대 현종 때 덕유후(德儒侯)의 시호(諡號)를 받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의성(義城)으로 삼았으며 그 뒤 여섯 분의 선조(先祖)들이 의성군(義城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義城君 新羅 敬順王 第 4子 高麗太祖 外孫受封 義城子孫 因以爲貫]신라 경순왕의 제4자로서 고려태조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책봉되니 의성자손은 이로 인하여 본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9세 첨사공 김용비의 묘>
시조 김석에 의해 처음으로 개관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瑀) 대에서 크게 번성했는데, 장자 김용비(金龍庇)는태자첨사(太子瞻事)를,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의성김씨는 이들 대에서 5개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첨사공파· 수사공파· 충의공파· 찬성공파· 선락장군공파 등이 그것 이다. 의성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25만33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의성김씨 연혁과 인물
의성김씨는 김석이 성관을 연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 이어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군(君)으로 책봉된 사람이 7명이 나왔고,
시호를 받은 사람도 충의공 용주 외에 용소공 영열(英烈), 문원공 원(源) 등13명이나 된다.
[문과] 101명, [무과] 84명, [사마시 진사] 96명, [사마시 생원]173명
≪의성김씨 계보도≫
《의성 김씨(義城 金氏)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
고려(高麗) 개국(開國)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開放)한 의성김씨(義城金氏)는 8세손(世孫) 공우(公瑀)의 아들대에서 크게 번창(繁昌)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長子)인 용비(龍庇)가 태자첨사(太子詹事 : 동궁에 속한 종 3품 벼슬 )를 지냈고,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歷任)하여 명성(名聲)을 날렸다.
그외 고려(高麗)에서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暄)과 지예(之銳)의 맏아들 도순문사(都巡問使) 광부(光富)는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2등 공신이 되었으며,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 등이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격파하였다.
그뒤 계림윤(鷄林尹)을 지냈으며, 1379년 8월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門使)가 되었는데, 9월에 왜구가 단계(丹溪)·거창(居昌)·야로(冶爐) 등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 이르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 전서(工曹 典書)를 지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발문(跋文)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거익(居翼),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 춘(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옥(玉), 평장사(平章事) 연(衍) 등이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옥(玉)의 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 제와 사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종 2품 으뜸 벼슬)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태종(太宗) 때 추충 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 佐命功臣)에 올랐다.
도순문사(都巡問使) 광부(光富)의 아우인 판서 수덕(修德)의 아들 용초(用超)는 성품이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관이면서도 무예(武藝)가 뛰어나 활쏘기와 말 타기를 능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공민왕과 함께 사냥하면서 날아가는 새를 백발백중으로 맞추고, 백 발자국 밖의 나뭇잎을 맞추어 말 한 필을 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이 내용은 백문보(白文寶)가 지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1390년(공양왕 2) 왜구가 양광도에 침범하자 밀직부사로서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왜구 100여 명을 사살하면서 평정하였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으며, 호남도병마도절제사(湖南道兵馬都節制使)와 충청도병마도절제사를 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나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에서 살았다. 1406년(태종 6)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제문을 지어 보내고 3일간 조회(朝會)를 폐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다.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世宗)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형조 및 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종 2품 으뜸 벼슬)을 역임했으며, 을방(乙邦)은 고려 문신(文臣)으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 (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隱居)하였는데, 조선조에서 수 차에 걸쳐 벼슬을 제수(除授)하 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 둔번리(遁煩 里)라 불렀다고 한다.
광부(光富)의 손자(孫子)이며, 사농경((司農卿) 로(路)의 넷째 아들 숙검(叔儉)은 태종(太宗) 17년(1417) 정유(丁酉)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3[探花郞]위로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 인천지군사(仁川知郡事)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455년(세조1)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 되었다.
고려말에 병부상서를 지낸 의성군 남파 김광부(南派 金光富)의 현손이며 사농경(司農卿)에 오른 석포 김로(石圃 金路)의 증손이고, 사직 김자중의 아들 한경(漢卿)의 자는국보(國寶), 호는 도곡(道谷)이다.
1456년(세조2)에 개성 풍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적부터 학문이 뛰어나 재용감정(濟用監正)에 올랐으며 당시 연산군으로 인한 폭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지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의 뜻있는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여 연산군을 폐위 시키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한 반정공신이었다.
그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중종 즉위년인 1506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훈록(勳錄)되었고 정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반정을 성공시킨 뒤에 반정공신들이 자신들의 훈록을 둘러싸고 파를 지어 싸우는 것을 보고 중앙정치에 염증을 느껴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도리로 낙향을 하였다. 그리고 김실 서당과 도곡정을 짖고 독서와 강론을 하며 평생을 조용히 지냈다.
숙검(叔儉)의 손자이며, 첨정(僉正) 안중(安中)의 아들 전(巓)은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郞]위로 출사하여 성종 24년(1493)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종부시정(宗簿寺正),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지냈다. 전(巓)의 아우 헌(巚)은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난(亂)으로 인하여 국청(鞠廳)에서는 신진사류들을 중대한 죄인으로 문초하는 국치가 벌어지고, 많은 선비들이 사사되거나 투옥되는 일대 정국의 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連累)된 전(巓)은 파주(坡州) 교하로, 헌(巚)은 합천 삼가현(三嘉縣)의 거부(巨富)인 졸당공(拙堂公) 박총(朴聰) 처가댁으로 곧 바로 서둘러 낙향(落鄕)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의탁(依託)생활을 하면서 대평(大坪) 송지촌(松旨村 : 지금의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흠조(欽祖)는 중종반정(中宗反正)후에 검열(檢閱 )을 거쳐 단양(丹陽)·제주(濟州) 등지의 목사(牧使 )를 역임한 후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윤석(潤石)은 중 종(中宗) 때 등과(登科)하여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대사성(大司成) 유 학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 3품 벼슬)에 올라 군수(郡守) 세우(世 瑀)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조선 중기에서 명문(名門) 의성 김씨(義城 金氏)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의 형제를 들 수 있다.
안국(安國)은 1478년(성종 9) 참봉(參奉) 연(璉)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닦고, 연산군(燕山君) 때 별시문 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부수찬(副修撰)과 부교리(副校理)·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경상도(慶尙 道)와 전라도(全羅道)의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각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권장하고 [벽온방]· [창진방( 瘡 疹方)]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천문(天文)·주역(周易)·농사(農事)·국문학(國文學)을 비롯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己卯 士禍)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 提學)·좌찬성(左贊成 : 의정 부에 속해있던 종 1품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 [모재가훈(慕齋 家訓)]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안국(安國)의 아우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1509년(중종 4) 문과( 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으며, 이 조 정랑(吏曹正郞 )을 거쳐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병조(兵曹) 예조(禮曹)·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지낸 후 좌찬성 (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문(詩文)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비롯 한 훌륭한 저서(著書)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한편 생원(生員) 진(璡)의 아들 5형제는 모두 당대에 이름난 거유(巨儒) 퇴계(退溪) 이 황(李滉)의 문하(門 下)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맏아들 극일(克一 )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을, 둘째 수일(守一)은 찰방( 察訪)을 지냈으며, 셋째 명일(明一)은 효행(孝行)이지극한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넷째 성일(誠一)은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나주 목사(羅州 牧使)를 역임하고 사성(司成 )으로 통신부사(通信府使)가 되어 일본(日本)을 다녀왔다.
그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초유사( 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초유하는 일을 맡은 임시벼슬)로 참전하여 죽산(竹山)·함양(咸陽)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진주성(晋州城)을 사수하다가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는 성리학(性理學)에 능통했으며 사후 (死後)에 선무일등공신 (宣武一等公臣)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복일(復一)은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0년(선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낭관 (郎官)·전라도 어사(全 羅道御 史)를 거쳐 울산 군수(蔚山郡守)·창원 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와 풍기 군수(豊基郡守) 를 지냈다.
임진왜란 의병으로 증형조판서 김호(金顥)의 아들 제민(齊閔)의 자는 사효(士孝)이며 호는 오봉(鰲峯)이고,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선조 계유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동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임란을 당하매 아들 엽(曄)·섬(暹)·안(晏)·흔(昕)을 거느리고 역전하여 다대한 전과를 거둔 호남 삼대 창의장(倡義將)으로 이름을 남겼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강(忠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선복(善復)은 임진왜란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1544~1592]과 더불어 창의하여 1592년(선조 25) 8월 17일 충청도 금산 전투에서 칠백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히고, 비가 세워졌다. 청주시 문의문화재단지(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산 6-1)안에 충신각이 세워져 있다.
대호군 윤우(允祐)의 아들 응일(應一)은 합천군 용주면 고품마을 출신으로 자는 자순(子純)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44세의 나이로 스스로 삼가(三嘉)지역에서 구산(龜山) 윤탁(尹鐸), 봉사(奉事) 노흠(盧欽), 생원(生員) 권양(權養), 권제(權濟)등이 이끄는 삼가의병대(三嘉義兵隊)에 지원하여 용감한 의병활동(義兵活動) 중, 삼가의병대(三嘉義兵隊)가 곽재우(郭再祐) 군사와 합류하여 왜적이 서부 경남지방을 노략질하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宜寧)지방으로 침입하려고 벌인 정암진나루 전투, 진주성 전투등에 참전한 이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화왕성(火旺城)전투에 참전하여 충의(忠義)를 다하였다.
또한 윤우(允祐)의 손자(孫子) 두남(斗南)도 합천군 용주면 고품마을 출신으로, 자는 여앙(汝仰)이며, 호는 덕탄(㯖灘)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였으며, 나이 6세에 부친에게 글을 배워 15-16세때는 이미 문장에 통달하여 그 뛰어난 재주와 이름이 이웃 고을까지 떨쳤다. 26세되는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경상도 일대의 남명 조식(曺植)선생 문인들은 삼가(三嘉)에서, 그리고 내암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생들은 합천 가야면 숭산동(崇山洞) 일대에서 궐기하여 대대적으로 왜적토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삼가(三嘉)에서 입재(立齋) 노흠(盧欽), (龜山) 윤탁(尹鐸), 화음 (花陰) 권양(權養)등이 이끄는 삼가(三嘉) 향병으로 지원하여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장군의 진영으로 편성되어 의령(宜寧)의 정암진나루 전투등에 참전하였다.
특히 합천(陜川)을 중심으로 한 초계, 성주, 고령 일대에서는 3000여명의 대병력으로 낙동강(洛東江) 연안을 제압하여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호남(湖南)침공을 방어 하고 왜적의 거점인 성주성(星州城)을 수복 하는등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전란이 끝난 후 임천(林泉)에 다시 돌아와서 오로지 학문(學文)에만 전념 하였으며, 과업에는 뜻을 두지않고 부모봉양에 극진하였다. 또한 친족간의 정을 두텁고 화목하게 지내는데 노력하면서, 산속 냇가를 벗삼아 묻혀 지내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남에, 의병(義兵)으로 다시 출전하여, 경남 창녕(昌寧)의 "화왕성(火旺城) 전투"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직(殉職) 하였다.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당동 고호 세덕사(世德祠)에서 배향하고 있다. 사후에 효행으로 1634년(인조12) 증 선무랑(宣務郎)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추서되고 1650년(효종2년) 사정려(賜旌閭)되었다. 저서로는 19cmX25.4cm 크기의 “덕탄집(㯖灘集)”이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삼척 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아들 우옹이 명종(明宗) 때 문과( 文科)에 올라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역임했고,우굉(宇宏)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숙종(肅 宗) 때의 수찬(修撰) 여건(汝鍵), 대사헌(大司憲) 방걸(邦杰)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영수(永銖)가 장기 군수 겸 경주 병마절제사(慶州兵馬節制使)에 재임시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철종(哲宗) 때 [북 천가(北遷歌)]를 지어 국문학(國文學) 사상 중요(重要)한 업적(業績)을 남긴 진형(鎭衡)과 예조 참판(禮曹參判) 굉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영남유림(嶺南儒林)의 거두(巨頭) 흥락( 興洛)은 수차에 걸쳐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진 력하여 [서산집(西山集)]을 집필하였으며, 하락(河洛)은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무공(武功)을 세워,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원식(元植)·동삼(東三)·창숙(昌淑)·붕준(鵬濬)·황(榥) 등과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특히 의성김씨는 조선 말기에 들어와 많은 의병운동가, 독립지사, 의사, 열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안동김씨의 나라’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조선시대는 안동김씨의 권세가 막강하였는데 (조선 전·중기는 신 안동김씨가,후기는 구안동김씨의 세도가 심했다), 조선 말과 일제 때에는 의성김씨 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심지어 같은 가문, 집성촌 전체가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예도 있었다. 그리하여 의성김씨 한 문중에서만 독립운동유공자가 85명이나 배출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서로군정서를 창립하고 참모장을 역임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전봉준과 함께 갑오 농민전쟁을 지휘한 김도삼(金道三),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도화(金道和)가 유명하다.
심산 김창숙은 경북 성주 출생으로 어려서 유학을 배우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려 투옥되었다.
1909년 성명학교를 창립하여 육영사업을 진행했으며, 3·1운동 이후 망명을 결심하고,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된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박은식 등과 신문을 발간하고,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청년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폭파하도록 했다.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도 그의 지도하에 이뤄진 것이다. 그는 또다시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 형을 언도받고 대전 형무소에 복역하는 중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이때 받은 고초로 평생 일어서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설립한 성균관대학의 재단 분규로 총장직을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별세했다.
일송 김동삼의 본명은 긍식(肯植)으로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 등과 함께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 결성을 논의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교포의 안정과 교육 문제에 힘쓰며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때 설립한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1918년에는 서일·김좌진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다시 상하이임시정부 휘하로 들어가 서로군정서가 되었는데, 그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만주사변(1931년) 때 하얼빈에서 잡혀 강제 송환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는 중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의성김씨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춘(金在春)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김중위·김명윤·김원웅·김화남 등이 있으며, 수 많은 정관계·학계·재계 인사들이 있다.
역대 주요 인물
◆ 고려조
김석(金錫)(의성군(義城君)ㆍ시조(始祖))
김일(金逸)((평장사(平章事)) 2세
김홍술(金弘術)(의성군(義城君)ㆍ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 3세
김국(金國)(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4세
김경진(金景珍)(평장사(平章事)5세
김언미(金彦美)(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6세
김공우(金公瑀)(상서복야(尙書僕射)) 8세
김용비(金龍庇)(태자첨사(太子詹事)) 9세
김용필(金龍弼)(의성군(義城君)ㆍ수사공(守司空))
김용주(金龍珠)(시(諡) : 충의(忠毅)ㆍ평장사(平章事))
김방우(金邦佑)(수사도(守司徒))
김충언(金忠彦)(공부시랑(工部侍郞))
김공서(金公瑞)(상호군(上護軍))
김국적(金國迪)(평장사(平章事))
김동현(金同賢)(감문위별장(監門衛別將))
김성우(金聖佑)(문하시중(門下侍中))
김자연(金自然)(문하시랑(門下侍郞))
김용은(金龍殷)(군자감정(軍資監正))
김성단(김성단)(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김의(金宜)(監門衛上護軍)
김인지(金麟芝)(상서(尙書))
김인환(金仁桓)(예부시랑(禮部侍郞))
김서지(金瑞之)(소윤(少尹))
김태권(金台權)(좌사윤(左司尹))
김인수(金仁守)(문하시중(門下侍中))
김사려(金斯礪)(공조전서(工曹典書))
김여의(金如意)(예부상서(禮部尙書))
김상운(金祥雲)(첨의시랑(僉議侍郞))
김거두(金居斗)(공조전서(工曹典書))
김거익(金居翼)(정당문학(政堂文學))
김춘(金椿)(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옥(金玉)(좌사의(左司議))
김현주(金玄柱)(동지찬성사(同知贊成事))
김을방(金乙邦)(우위보승랑장(右衛保勝郞將))
김륜(金侖)(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김혁(金革)(중랑장(中郞將))
김연(金衍)(문하시중(門下侍中))
김굉(金紘)(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ㆍ상서복야(尙書僕射))
김인지(金麟芝)(고령군(高靈君))
김영(金英)(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10세
김지예(金之銳) 초계군수(草溪郡守). 병부상서(兵部尙書), 밀직부사(密直副使) 11세
김광부(金光富)(호(號) : 남파(南坡)ㆍ의성군(義城君)ㆍ병부판서(兵部判書) 12세
김자돈(金自敦)(지평(持平))
김광선(金光善)(군기좌윤(軍器左尹))
김세인(金世轔)(金世軔)(전서(典書))
김윤관(金允寬)(감찰어사(監察御使))
김계(金啓)(대영서승(大盈署丞))
김서진(金瑞珍)(전서(典書))
김준(金晙)(시(諡) : 정신(貞愼)ㆍ평장사(平章事))
김지선(金之宣)(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김규훈(金奎焄)(자(字) : 화극(和克)ㆍ호(號) : 초수(樵叟)ㆍ찬성사(贊成事))
◆ 조선조
김섭(金涉)(호(號) : 소정(疎亭)ㆍ직제학(直提學))
김도(金渡)(나주목사(羅州牧使))
김미(金湄)(직제학(直提學))
김영렬(金英烈)(號) : 맹암(孟巖)ㆍ시(諡) : 양소(良昭)ㆍ의성군(義城郡)ㆍ우상(右相))
김흥복(金興復)(상호군(上護軍))
김예(金輗)(호군(護軍))
김계종(金繼宗)(부호군(副護軍))
김신복(金申復)(부호군(副護軍))
김경복(金慶復)(개성유수(開城留守))
김하(金河)(충청도 절제사(忠淸道 節制使))
김로(金路)(호(號) : 석포(石圃 )ㆍ사농경(司農卿). 한성부좌윤. 증 이조참의. 증 호조판서 13세
김숙량(金叔良)(호(號) : 동헌(桐軒)ㆍ전중어사(殿中御使))
김숙검(金叔儉)(호(號) : 괴정(槐亭)ㆍ사헌부감찰 사간원 정언. 승문원사. 인천지군사. 직제학(直提學) 14세
김용초(金用超)(전라병사(全羅兵使))
김용기(金用起)(공조참의(工曹參議))
김눌(金訥)(부사정(副司正))
김자지(金子祉)(판개성윤(判開成尹))
김영진(金永珍)(밀직부사(密直副使))
김신검(金信劒)(좌상(左相))
김경룡(金慶龍)(개성유수(開城留守))
김자연(金自淵)(해주목사(海州牧使))
김원(金源)(시(諡) : 문원(文元)ㆍ주국상장(柱國上將))
김안중(金安中) : 호 월산(月山)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史) 15세
김온(金溫)(시(諡) : 문정(文正)ㆍ정랑(正郞))
김여손(金呂孫)(자(字) : 우문(遇文)ㆍ호(號) : 난곡(蘭谷)ㆍ중추부사(中樞府使))
김한우(金漢遇)(사정(司正))
감한계(金漢啓)(자(字) : 형운(亨運)ㆍ집현전(集賢殿)ㆍ승문원사(承文院事))
김박(金珀)(군자정(軍資正))
김축(金軸)(대사간(大司諫))
김여진(金麗珍)(부호군(副護軍))
김양회(金養會)(자(字) : 효선(孝先)ㆍ동래부사(東萊府使))
김전(金巓)호 송정(松亭) 사간원 정언(正言). 종부시정(宗簿寺正) 16세
김헌(金巘) 예문관 봉교(奉敎)
김순(金峋) 충순위(忠順衛)
김호(金顥)(자(字) :자순(子淳)ㆍ부호군(副護軍))
김제민(金齊閔)(자(字) : 사효(士孝)ㆍ호(顥) : 오봉ㆍ시(諡) : 충강(忠剛)ㆍ좌승지(左承旨))
김흔(金昕)(자(字) : 숙승(叔昇)ㆍ호(號) : 학산(鶴山)ㆍ군기감정(軍器監正))
김섬(金暹)(자(字) : 계승(季昇)ㆍ호(號) : 퇴휴재(退休齋)ㆍ군자부정(軍資副正))
김윤우(金允祐) 대호군(大護軍) 17세
김제안(金齊顔)(자(字) :사우우(士遇愚)ㆍ호(號) : 죽헌생(竹軒生)ㆍ학행(學行))
김흔조(金鍁祖)(자(字) : 경숙(敬叔)ㆍ판결사(判決事))
김내욱(金乃郁)(부정(副正))
김응숙(金應淑)(자(字) : 서광(瑞光)ㆍ공조참의(工曹參議))
김사언(金士彦)(자(字) : 언여(彦汝)ㆍ호(號) :반학당(伴鶴堂)ㆍ이조참의(吏曹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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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일(德一) : 부사직(副司直) 18세
김호지(金胡智)(함흥소윤(咸興少尹))
김안국(金安國)(자(字) : 국경(國卿)ㆍ호(號) : 모재(慕齋)ㆍ시(諡) : 문경(文敬)ㆍ좌찬성(左贊成))
김정국(金正國)(자(字) : 국필(國弼)ㆍ호(號) : 사재(思齋)ㆍ시(諡) : 문목(文穆)ㆍ예조참판(禮曹參判))
김남보(金南寶)(호(號) : 단촌(丹村)ㆍ시(諡) : 문민(文敏)ㆍ이조판서(吏曹判書))
김기남(起南) : 승사랑(承仕郞) 19세
김요(金曜)(부사(府使))
김민국(金敏國)(자(字) : 화여(和汝)ㆍ호(號) : 만회(晩悔)ㆍ승지(承旨))
김보일(金輔逸)(자(字) : 안여(安汝)ㆍ중추부사(中樞府事))
김영립(金永立)(자(字) : 성중(聖重)ㆍ부호군(副護軍))
김각민(金恪敏)(자(字) : 이중(而重)ㆍ부호군(副護軍))
김수선(金守善)(자(字) : 초일(初一)ㆍ상호군(上護君))
김성원(金聲遠)(자(字) : 士聲ㆍ호군(護軍))
김해(金瀣)(동돈녕부사(同敦寧府事))
김극예(金克禮) 자 백인(伯仁) 진사(進士) 20세
김극화(金克和) 정랑, 성균관 사예 20세
김극일(金克一)(자(字) : 백순(伯純)ㆍ호(號) : 약봉(藥峯)ㆍ내자사정(內資寺正))
김방걸(金邦杰)(자(字) : 사흥(士興)ㆍ호(號) : 지촌(芝村)ㆍ대사성(大司成))
김방조(金邦照)(자(字) : 사명(士明)ㆍ호군(護軍))
김송(金誦)(자(字) : 도원(道源)ㆍ호(號) : 운천(雲川)ㆍ병조참의(兵曹參議))
김태중(金台重)(자(字) : 언겸(彦謙)ㆍ호(號) : 적암(適菴)ㆍ학행(學行))
김성일(金誠一)(자(字) : 사순(士純)ㆍ호(號) : 학봉(鶴蜂)ㆍ시(諡) : 문충(文忠)ㆍ부제학(副提學))
김규(金煃)(자(字) : 광정(光庭)ㆍ호(號) : 정근재(定跟齋)ㆍ호군(護軍))
김명기(金命基)(자(字) : 용림(用林)ㆍ호(號) : 병간(甁艮)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김계기(金啓基)(자(字) : 덕보(德甫)ㆍ호군(護軍))
김시?(金是?)(자(字) : 자정(子正)ㆍ호군(護軍))
김복일(金復一)(자(字) : 계순(季純)ㆍ호(號) : 남악(南岳)ㆍ사성(司成))
김빈(金賓)(자(字) : 빈여(賓如)ㆍ호(號) : 갈천(葛川)ㆍ도승지(都承旨))
김홍일(金弘一)(자(字) : 도순(道純)ㆍ첨사(僉使))
김옥(金沃)(도호부사(都護府使))
김백령(金百齡)(호군(護軍))
김선계(金善繼)(자(字) : 효백(孝伯)ㆍ상주목사(尙州牧使))
김이중(金履重)(자(字) : 성보(聖甫)ㆍ군자감정(軍資監正))
김학구(金學耈)(자(字) : 문중(文重)ㆍ호군(護軍))
김치관(金致寬)(자(字) : 이률(而栗)ㆍ호(號) : 역락재(亦樂齋)ㆍ부호군(副護軍))
김석우(金碩祐)(자(字) : 원길(元吉)ㆍ호(號) : 경와(敬窩)ㆍ효자(孝子))
김희량(金熹良)(한성판윤(漢城判尹))
김대추(金大樞)(진주목사(晋州牧使))
김구련(金球璉)(첨절제사(僉節制使))
김주국(金柱國)(호군(護軍))
김행건(金行健)(호군(護軍))
김득현(金得賢)(오위장(五衛將))
김급(金汲)(호군(護軍))
김구정(金九鼎)(첨사(僉使))
김대기(金大器)(자(字) : 현거(鉉擧)ㆍ부사(府使))
김필성(金必成)(자(字) : 취백(就伯)ㆍ호군(護軍))
김건(金鍵)(부호군(副護軍))
김덕유(金德裕)(자(字) : 군현(君賢)ㆍ좌윤(左尹))
김지수(金地粹)(자(字) : 거비(去非)ㆍ호(號) : 태천(苔川)ㆍ천태(天台)ㆍ시(諡) : 정민(貞敏)ㆍ승지(承旨))
김하손(金賀孫)(자(字) : 여언(汝彦)ㆍ사복사정(司僕寺正))
김상손(金尙孫)(자(字) : 덕재(德哉)ㆍ호(號) : 지경(持敬)ㆍ학행(學行))
김도기(金道器)(자(字) : 자유(子由)ㆍ호(號) : 매곡(梅谷)ㆍ효행(孝行))
김지남(金地南)(자(字) : 대자(大貲)ㆍ호(號) : 구봉(九峯)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김원주(金元柱)(자(字) : 인보(仁甫)ㆍ호(號) : 자우(自愚)ㆍ호군(護軍))
김승음(金承音)(자(字) : 극상(克相)ㆍ호군(護軍))
김상음(金尙音)(자(字) : 여원(汝遠)ㆍ호군(護軍))
김추윤(金秋潤)(자(字) : 시원(詩遠)ㆍ호군(護軍))
김여량(金汝樑)(자(字) : 군용(君用)ㆍ부사정(副司正))
김철(金澈)(자(字) : 경등(景登)ㆍ훈련원정(訓鍊院正))
김태지(金泰祉)(자(字) : 희서(希瑞)ㆍ호군(護軍))
김익근(金益謹)(승지(承旨))
김진혁(金震赫)(도정(都正))
김성옥(金聲玉)(부호군(副護軍))
김대춘(金大春)(자(字) : 대일(大一)ㆍ호(號) : 서력재(徐力齋)ㆍ훈련첨정(訓鍊僉正))
김채하(金採河)(자(字) : 자연(子淵)ㆍ부호군(副護軍))
김진광(金振光)(절제사(節制使))
김하성(金夏聖)(전라수사(全羅水使))
김수담(金壽淡)(정주목사(定州牧使))
김기열(金起悅)(자(字) : 군습(君習)ㆍ공조참의(工曹參議))
김이길(金履吉)(자(字) : 자정(子定)ㆍ호(號) : 모와처사(慕窩處士)ㆍ학행(學行))
김백휴(金百休)(자(字) : 중숙(仲俶)ㆍ호(號) : 송하옹처사(松下翁處士)ㆍ학행(學行))
김만기(金萬起)(중추부사(中樞府事))
김몽기(金夢麒)(자(字) : 중상(仲祥)ㆍ부정(副正))
김하현(金夏鉉)(자(字) : 주백(周伯)ㆍ부호군(副護軍))
김팔원(金八元)(자(字) :순거(舜擧)ㆍ부호군(副護軍))
김한국(金翰國)(운거(雲擧)ㆍ부사(府使))
김학명(金鶴鳴)(자(字) : 천경(天卿)ㆍ학행(學行))
김극눌(金克訥)(자(字) : 사흠(士欽)ㆍ호(號) : 학보(鶴甫)ㆍ(護軍)
김대명(金大鳴)(자(字) : 이원(而遠)ㆍ부호군(副護軍))
김우인(金友仁)(자(字) : 인숙(仁叔)ㆍ부사(府使))
김세도(金世度)(군자감정(軍資監正))
김협(金協)(자(字) : 맹견(孟堅)ㆍ호(號) : 귀봉(龜峯)ㆍ부호군(副護軍))
김호(金護)(부호군(副護軍))
김덕겸(金德謙)(자(字) : 원익(元益)ㆍ부호군(副護軍))
김호(金鎬)(부호군(副護軍))
김우홍(金宇弘)(자(字): 면부(勉夫)ㆍ호(號) : 이계(伊溪)ㆍ목사(牧使))
김우굉(金宇宏)(자(字) : 경부(敬夫)ㆍ호(號) : 개암(開巖)ㆍ대사성(大司成))
김성구(金聲久)(자(字) : 덕림(德林)ㆍ호(號) : 팔오헌(八吾軒)ㆍ관찰사(觀察使))
김우옹(金宇顒)(자(字) : 숙부(肅夫)ㆍ호(號) : 동강(東崗)ㆍ시(諡) : 문정(文貞)ㆍ부제학(副提學))
김하욱(金夏旭)(자(字) : 군범(君範)ㆍ부호군(副護軍))
김덕남(金德男)(자(字) : 득부(得夫)ㆍ훈련원정(訓練院正))
김종혁(金宗赫)(자(字) : 창서(昌瑞)ㆍ부호군(副護軍))
김응지(金應地)(자(字) : 서중(瑞仲)ㆍ절제사(節制使))
김요보(金堯輔)(자(字) : 사순(士純)ㆍ호(號) : 우재(愚齋)ㆍ대사헌(大司憲))
김배(金培)(자(字) : 응립(應立)ㆍ군자감정(軍資監正))
김천길(金天吉)(자(字) : 영길판결사(永吉判決事))
김학룡(金鶴龍)(한성부윤(漢城府尹))
김내택(金乃澤)(향암(香菴)ㆍ첨정(僉正))
김?(金?)(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책(金策)(자(字) : 헌숙(獻淑)ㆍ훈련원정)(訓練院正))
김방(金磅)(자(字) : 석지(碩之)ㆍ부호군(副護軍))
김득희(金得希)(자(字) : 성집(聖集)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김이정(金以鼎)(자(字) :중구(仲九)ㆍ부호군(副護軍))
김두정(金斗正)(자(字) : 방숙(方叔)ㆍ부호군(副護軍))
김제약(金悌躍)(자(字) : 여순(汝順)ㆍ부호군(副護軍))
김희문(金希文)(자(字) : 경노(敬魯)ㆍ호(號) : 행은(杏隱)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관덕(金寬德)(자(字) : 경직(敬直)ㆍ부호군(副護軍))
김덕화(金德華)(자(字) : 성수(聖叟)ㆍ부호군(副護軍))
김덕해(金德海)(자(字) : 태성(泰聲)ㆍ호(號) : 화엄(華嚴)ㆍ중추부사(中樞府使))
김응선(金應善)(호군(護軍))
김귀석(金貴碩)(자(字) : 영세(榮世)ㆍ부호군(副護軍))
김종봉(金鍾鳳)(자(字) : 순서(舜瑞)ㆍ부호군(副護軍))
김찬휘(金讚煇)(자(字) : 경시(慶詩)ㆍ부호군(副護軍))
김장주(金章柱)(자(字) : 광숙(光淑)ㆍ부호군(副護軍))
김상경(金相慶)(자(字) : 필보(必甫)ㆍ호군(護軍))
김홍군(金洪軍)(자(字) : 치관(致關)ㆍ호군(護軍))
김덕재(金德才)(자(字) : 인수(仁壽)ㆍ중추부사(中樞府使))
김굉(金肱)(자(字) : 자야(子野)ㆍ호(號) : 귀와(龜窩)ㆍ예조참판(禮曹參判))
김제하(金濟河)(자(字) : 즙일(楫一)ㆍ호군(護軍))
김필경(金弼敬)(자(字) : 형수(亨秀)ㆍ호군(護軍))
김정수(金鼎壽)(자(字) : 계정(戒正)ㆍ호군(護軍))
김필기(金弼基)(군자정(君資正))
김원석(金元碩)(자(字) : 집중(執中)ㆍ부호군(副護軍))
김병현(金秉鉉)(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김여욱(金麗頊)(부호군(副護軍))
김용재(金龍載)(자(字) : 채운(채운)ㆍ동돈녕(同敦寧))
≪의성김씨 인물록(人物錄)≫
★ 시조 김 석(金 錫)
신라의 마지막(56代 /金氏 38代) 왕인 경순왕의 넷째아들이며
어머니는 고려 태조 왕건의 큰딸인 신란공주 일명 낙랑공주이다. 김알지의 28대손으로 고려 태조의 외손, 의성군에 책봉되어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 고려시대 인물록
7世 김녹광(金祿光) : 광주 김씨로 분적
김 석(金 錫: 義城金氏의 시조)의 6세손 언미(彦美)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1236년(고종23) 상장군으로서 몽고군을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의성김씨 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였다.
그는 1236년(고려 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시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가 봉군(封君)된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문호(門戶)를 열었으며, 녹광(祿光)의 아들 굉이 감찰 어사(監察御使)를 지내고, 손자 훤(호는 둔촌, 감찰 어사 굉의 아들)은 당대의 명신(名臣)으로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다.
8世 김훤(金晅)
1234년(고종 21) ~ 1305년(충렬왕 31) (廣州金氏로 분적)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용회(用晦).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였다. 1269년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세우자, 원나라는 원나라에 있던 세자 왕심(王諶: 충렬왕)을 동안공(東安公)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어 임연 일당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세자가 공(公)으로 책봉되면 임연 일당에게 이 사실이 도리어 이용당하게 되며, 따라서 국내정세가 불리해질 것이라고 주장해 이 계획을 중지하게 하였다.
1270년(원종 11)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가 되었을 때, 밀성 사람 방보(方甫)가 공국병마사(攻國兵馬使)를 자칭, 난을 일으켜 근처의 군현을 선동해 세력을 떨쳤다. 또, 부사 이이(李頤)를 죽이고 진도를 거점으로 활약하던 삼별초와 결탁하려 하였다.
이에 경주판관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군사를 내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안렴사(按廉使) 이숙진(李淑眞)을 회유해 난군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밀성의 도둑 무리는 괴수 방보의 목을 베어 항복해 난은 평정되었다. 또한, 삼별초의 잔적들이 군사를 나누어 경상도로 쳐들어 올 때 금주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예부낭중이 되고, 곧 이어 도호부사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총랑(摠郎)이 되었다가 전라도부부사(全羅道部夫使)가 되어 부임하던 중, 청호역(菁好驛)에서 전라도안찰사 노경륜(盧景綸)이 역을 통해 서울에 보내는 내선(內膳)의 대부분이 사선(私膳)인 것을 보고, 몰수해 국고로 돌렸다.
그런데 이 사실이 무고가 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양주부사(襄州副使)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다시 승진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르렀고, 밀직학사(密直學士)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충선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춘궁시독(春宮侍讀)으로 시종해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고를 입게 되자 병을 핑계로 귀국을 자청하고 사직하였으나, 뒤에 다시 찬성사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예서에 능하였다 한다.
9世 김개물(金開物)
1273(원종 14)∼1327(충숙왕 14). 고려 후기의 문신(廣州金氏로 분적)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초명은 서정(瑞廷), 자는 원구(元龜)이다.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김훤(金晅)이다. 김개물은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였으나 춘궁시독(春宮侍讀)으로 충선왕을 호종하였던 아버지 김훤(金晅)의 덕으로 충선왕대에 감찰사(監察史)로 발탁되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전부시승(典符寺丞)으로 있을 때, 내부령 강융(姜融)의 청탁을 거절하였다가 그의 참소로 국문을 당하고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5년 동안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유유자적하면서 한거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서정을 쇄신하려는 충숙왕에 의해 다시 사헌지평(司憲持平)에 등용되었다가 장세(張世)의 말 탈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충숙왕의 총신(寵臣) 왕삼석(王三錫)에게 모욕을 당하고 사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부당한 사직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김개물은 성품이 강직했으며 어려운 일이 있어도 태연하게 대처하였다고 한다. 또한, 시(詩)·서(書)·화(畫)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손님을 맞이할 때 술자리를 마련해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즐겁게 대했으며, 대간을 지낼 때는 쟁신(諍臣)의 기풍이 있었다고 전한다. 김개물의 아들로는 과거에 급제한 김섬(金銛)이 있다.
9世 김용비(金龍庇)
고려개국(高麗開國)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 김씨는 8세손 공우(公遇)의 아들대(代)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다. 장자(長子)인 김용비(金龍庇) : 태자 첨사(太子諂事 : 동궁에 속한 종 3품 벼슬) 고려조 용비(龍庇)(구세손(九世孫))는 김자광록대부태자(金紫光祿大夫太子) 첨사(詹事)인데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 습봉의성군(襲封義城君)하여 의성읍인(義城邑人)이 대공덕(大功德)을 찬양(讚揚)하여 진민사(鎭民詞)를 세워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봉행(奉行)하였다가 그 후(後) 본손(本孫)이 인수(引受)하여 오토산(五土山) 묘하(墓下)에 묘우(廟宇)와 재사(齋舍)를 건립(建立)하여 봉행(奉行)하고 있다. 차자(次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셋째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첨사공(용비)
9世 김용필(金龍弼)
아버지는 공우(公瑀)이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의 벼슬을 지내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9世 김용주(金龍珠)
아버지는 공우(公瑀)이고 登第하여 4대왕을 섬기면서 여진(女眞)의 난을 평정하여 추충공신(推忠功臣)에 녹훈되고 개성부사를 역임한 후 평장사(平章事)에 가자(加資)되었으며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본관을 개성으로 써 왔으나 1865년(고종 2년)에 특령으로 일부가 義城金氏로 환본 되었다.
10世 김 의(金 宜)
아버지는 太子詹事(諱 龍庇)이고 감문위 상장군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상서 좌복야로 추봉되었다
10世 김 굉(金 紘)
아버지는 太子詹事(諱 龍庇)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지내고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 에 봉해졌다.
10世 김 영(金 英)
아버지는 태자첨사 용비(太子詹事 諱 龍庇)이고 전객시(典客寺)의 판사(判事정3품)겸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정1품)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에 올랐다.
첨사공(용비)의 第三子 찬성사공(영)
10世 김성단(金成丹)
아버지는 門下侍郞( 諱 自然)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정2품)를 지냈다.
11世 김서지(金瑞芝)
좌복야 김의(金宜)의 둘째 아들로 흥안(現 성주) 도호부부사(都護府副使)를 지냈고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조현대부(朝顯大夫) 내영고(內盈庫) 소윤(少尹 종4품)을 지냈다.
11世 김 춘(金 椿)
좌복야 김의(金宜)의 셋째아들로 고려때 등과하여 은청광록대부 삼사문하시랑 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다
11世 김기지(麒芝) = 김남득(金南得)
고령 김씨(高靈 金氏) 시조(始祖) 김남득(金南得)은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11세손으로 첨사공 용비(龍庇) 의 장손(長孫)이며 고려(高麗) 때 전리좌랑(典理佐郞)을 역임(歷任)한 김의(金宜)의 넷째 아들이다. 그의 본명(本名)은 김기지(金麒芝)였으며, 1340년(충혜왕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여 감찰집의(監察執義)를 지냈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그 후 최유(崔濡)의 공민왕(恭愍王) 폐위(廢位)음모(陰謀)사건(事件)에 접반시랑(接伴侍郞)이 되어 무고함을 역설(逆說)하여 원나라 황제(皇帝)의 마음을 돌리게 하여 공민왕(恭愍王)의 왕위(王位)보전에 공(功)을 세웠다.
또한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가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받고 환국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에 따라 김기지(金麒芝)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의성 김씨(義城 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고령(高靈)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11世 김지예(金之銳)
태자첨사(太子諂事)를 지낸 9세손 용비(龍庇)의 孫子이며, 英(영) 의 맏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초계군수(草溪郡守)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문량(文良)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병부상서 밀직부사(兵部尙書 密直副使)에 증직 되었다
첨사공(용비)_찬성사공(영)의 第一子 문양공(지예)
11世 김자돈(金自敦)
태자첨사(太子諂事)를 지낸 9세손 용비(龍庇)의 孫子이며, 英의 둘째아들로 문과에 급제(태종(太宗) 16년(1416) 병신(丙申) 친시(親試) 을과1등(乙科一等) 2[亞元]위(2/9))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첨사공(용비)_찬성사공(영)의 第二子 지평공(자돈)
11世 김영렬(金英烈)
자는 열지(烈之)이며 호는 맹암(孟巖)으로 아버지는 복야 김굉(金紘)이다. 고려 전서로 태조 을해에 등과하여 수군절제사·안무사·수군도지휘사·삼군총제·병조참판·지삼군부사를 거쳐 추충분의익대공신(推忠奮義翊戴功臣)으로 녹훈되고 좌찬성을 지냈다. 사후에 우의정을 증직하여 양소(襄昭)라 시호하고 학림(鶴林)·옥산(玉山)·신천서원(新川書院)에 봉향되었다.
12世 김 옥(金 玉)
평장사 춘(平章事 椿)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정의대부(正議大夫 정3품) 좌사의(左司議)를 지냈다
12世 김 연(金 衍)
평장사 춘(平章事 椿)의 넷째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군국평장사(軍國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을 지냈다.
12世 김경복(金慶復)
맹암(孟巖 諱 英烈)의 셋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12世 김광부(金光富)
호는 남파(南坡)이며, 조부는 찬성사 영(英)이고, 아버지는 병부상서 김지예(金之銳)이다. 고려 충혜왕 초 대과에 장원 급제하여 군·계림윤(鷄林尹)을 거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에 유공하여 거듭 2등공신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 의성군(義城君)으로 녹훈되고 나아가서 원의 잔당을 요동에서 물리쳤다. 우왕 5년 왜구의 침입에 합포(合浦)도순무사 겸 합포원수로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찬성사공(英)_문양공(지예)의 第一子 남파공(광부)
12世 김태권(金台權)
아버지는 소윤 김서지(金瑞芝)이며 문예부 좌사윤으로 공민왕 계묘 흥왕사(興王寺)의 난에 공민왕을 호가하다가 해를 입고 순직하였다.
13世 김거두(金居斗)
아버지는 좌사윤 김태권(金台權)이며 고려 때 벼슬길에 올라 문하주서를 거쳐 공조전서를 지내고 경주부윤으로 민몰(泯沒)상태에 있던 『삼국사기』를 중간하여 발문을 남겼다.
13世 김거익(金居翼)
호는 퇴암(退庵)이며 아버지는 좌사윤 김태권(金台權)으로 고려 때 출사하여 광정대부 정당문학 겸성균악정을 지냈다. 조선조에서 우의정에 누징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부여 반월성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다.
13世 김현주(金玄柱)
평장사 춘(平章事 諱 椿)의 손자이며 옥(玉)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대사간(大司諫 정3품)에 이르렀으며 문예관(文藝館)의 대제학(大提學 종2품)과 광정대부(匡靖大夫 정2품)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13世 김 로(金 路)
호는 석포(石圃)이며, 증조부는 고려 찬성사 영(英)이고, 할아버지는 문양공 지예(之銳), 아버지는 고려 상의(商義), 합포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이며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3품 사농경(司農卿), 종이품 한성부 좌윤(左尹)을 지냈고,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잠저고인(潛邸故人)으로 호조판서를 추증받았다.
잠저(潛邸) : 나라를 처음으로 이룩한 임금이나 또는 종실(宗室)에서 들어와 된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이나 또는 그 동안에 살던 집을 이르는 말
고인(故人) : 오래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
상의(商議) : 고려말 공민왕대 첨설직(添設職)의 남발뿐만 아니라, 공공연한 뇌물의 횡행으로 재추직(宰樞職)까지 남발되었다. 상의(商議)는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 등의 형태로 재추의 관직 뒤에 붙여 그 관직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재추로서 도당(都堂: 都評議使司)에 합좌하여 국정을 의논하였으며, 고려 말기에는 도당의 구성원이 폭발적으로 증대하는 요인이 되었다. 심지어 그 수효가 최대 70∼80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단, 그 서열은 직사관(職事官)보다 아래에 있었으며, 도당에서 합좌는 하되 문서에 서명하지는 못하다가, 공민왕 말년부터 직사관과 마찬가지로 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색(李穡)이 지은「광통보제선사비명(廣通普濟禪師碑銘)」에는 1377년(우왕 3) 당시의 재추 49명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상의가 19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고려말에 재추의 수가 매우 많았음과 그 중에서 상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러한 현상을 관제의 문란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양반 수의 절대적인 증가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되었다. 즉, 관직 수는 적은데 비해 거기에 나아가고자 하는 양반 수가 많아짐으로 인해 그 과정에서 갖가지 부정부패가 일어나고, 그에 따라 관제의 문란도 야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문양공(지예)_남파공(광부)의 第一子 석포공(로)
13世 김용초(金用超) )[?~1406]
호는 내성재(內省齋) 고려 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문양공 지예(之銳), 아버지는 판서 김수덕(金修德)이며, 부인은 옥산 장씨이다. 아들로 김화(金華), 김경(金鏡), 김감(金鑑)을 두었다.성품이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관이면서도 무예(武藝)가 뛰어나 활쏘기와 말 타기를 능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공민왕과 함께 사냥하면서 날아가는 새를 백발백중으로 맞추고, 백 발자국 밖의 나뭇잎을 맞추어 말 한 필을 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이 내용은 백문보(白文寶)가 지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1390년(공양왕 2) 왜구가 양광도에 침범하자 밀직부사로서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왜구 100여 명을 사살하면서 평정하였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으며, 호남도병마도절제사(湖南道兵馬都節制使)와 충청도병마도절제사를 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나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에서 살았다. 1406년(태종 6)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제문을 지어 보내고 3일간 조회(朝會)를 폐하였다.
묘소는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 용현(龍峴)에 있다.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다. 김용초 신도비(金用超神道碑)와 영모당(永慕堂)이 있다
문양공(지예)_참판공(수덕)의 第三子 문절공(용초)
13世 김을방(金乙邦)
호는 둔번(遁煩)으로 아버지는 대제학 김현주(金玄柱)이며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흥위우위 보승낭장을 지냈다.
★ 조선시대 인물록
14世 김 섭(金 涉)
호는 소정(疏亭), 아버지는 고려때 정당문학(政堂文學)겸 성균악정(成均樂正)을 지낸 김거익(金居翼)이다. 조선조 태조 5년(1396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제학(提學)의 벼슬에 올랐다.
14世 김 미(金 湄)
퇴암(退庵 諱 居翼)의 넷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직제학(直提學 정3품)을 지냈다.
14世 김숙량(金叔良)
사농경 석포(石圃 /로 路)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당진감무(唐津監務)를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감찰공파 派祖
14世김숙검(金叔儉)
태종(太宗) 17년(14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探花郞]위(3/33) 문과에 합격 하였으며, 호는 괴정(槐亭)이고, 사농경 석포(石圃 / 로 路)의 넷째 아들이다.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괴정공파(槐亭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대표관직 : |부지승문사|인천 지군사
1417년 - 식년시 급제 1417년 - 정언 제수 1454년 - 인천 지군사 부임
1455년(세조1)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조선 전기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구가 속해 있던 인천군(仁川郡)의 지군사(知郡事)를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호는 괴정(槐亭)이다. 아버지는 김로(金路)이고, 할아버지는 김광부(金光富), 증조할아버지는 김지예(金之銳)이다.
김숙검(金叔儉)의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417년(태종 17) 정유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454년(단종 2) 6월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 있다가, 인천지군사(仁川知郡事)로 부임하여 1457년(세조 3) 7월까지 재직하였다. 숙검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위안동에 있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괴정공파 派祖
15世 김양중(金養中)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 21위(31/40) 문과 합격
김양중(金養中)은 조선 2대 왕 태종(太宗)의 정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동생 "민무휼"의 사위
석포(石圃 / 로 路)의 손자이며 숙온(叔溫)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 종5품)으로 원종공신3등에 녹훈되어 판교(判校 정3품)를 지냈다. 선조 12대 인종왕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외증조부_손녀딸[子 김익겸의 딸(女)]이 조선 인종비 인성왕후의 어머니이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생원공파
15世 김명중(金命中)
세종(世宗) 26년(144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위(12/33) 문과 합격
석포(石圃 /로 路)의 손자이며 동헌(桐軒 / 숙량 叔良)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제용감정(濟用監正)을지냈다.
집의(執義) :1392년(태조 1) 7월 관제제정 때 종3품 중승·겸중승 각 1명씩 두었다가, 1401년(태종 1) 7월 관제개정 때 고려의 제도를 본떠 집의 1명으로 고쳐 두었다.
제용감정(濟用監正) : 조선시대 제용감(濟用監)에 두었던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감찰공파
15世 김자중(金自中)
석포(石圃 諱 路)의 손자이며 叔良의 셋째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과 오위(五衛)의 司直을 거쳐 호군(護軍 정4품)을 지냈으며 건공장군(建功將軍 종3품)의 품계를 받았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감찰공파
15世 김안중(金安中)
사농경 석포(石圃 / 로 路)의 손자이며, 괴정공(槐亭公) 숙검(叔儉)의 첫째 아들로 호는 월산(月山)이며 첨정(僉正),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史)를 지냈다
성종(成宗) 14년(1483) 사정(司正) : 조선시대 5위(五衛)의 정7품
무송윤씨 족보 등재 관직명 : 윤충보의 외손자 김안중(金安中) 무첨정(武僉正) 종 4품
첨정(僉正) : 조선 시대에, 각 관아의 낭청에 속한 종4품 벼슬. 돈령부, 봉상시, 종부시, 사옹원, 내의원, 상의원, 사복시 따위에 두었다.
도호부사(都護府史) :도호부(都護府)의 으뜸 벼슬.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는 종3품(從三品)으로 임명(任命)했음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 괴정공파
15世 김남보(金南寶)
충의공(忠毅公 諱 龍珠)의 6대손으로 고려조 판도판서(判圖判書 정3품)를 지냈으며 조선조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이조판서(吏曹判書)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에 증직되었다.
16世 김갱수(金鏗壽) =16世 김익겸(金益謙) 동일인으로 추정 (자가 인로(仁老)로 동일)
세조(世祖) 5년(14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郞]위(3/28)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자는 인로(仁老), 사농경 석포(石圃 / 路)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는 김숙온(金叔溫)이고, 아버지는 김양중(金養中)이다.
1467년(세조 13) 부호군으로서 평안도순변사가 되어 야인들의 침입을 막았으며,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참여한 공으로 일자(一資) 승진되었다.
용맹을 갖추었으며 병기에도 밝아 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와 보경당(寶慶堂)에 왔을 때, 김순명(金順命) 등과 함께 활을 만드는 법을 강론하였다.
1468년 평안서도절도사로 나갔다. 1470년 가선대부가 되고 행훈련원도정을 거쳐 영안남도절도사가 되어 나갔다가, 아버지의 노환으로 인해 사직하자 왕으로부터 의약품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영안남도에 곤충들의 피해가 많이 생기자 다시 절도사로 나갔다.
1475년 경기도절도사를 거쳐 조전장(助戰將)이 되어 인산(麟山)에 파견되었으며, 곧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남도절도사를 혁파하려는 왕의 뜻에 반대하여 혁파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1476년 평안도절도사로 다시 나가 이산(理山)의 막응개목책(莫應介木冊)과 벽동(碧潼)의 양편목책(兩楩木柵)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으나 반대에 부닥쳤다.
1479년 서모의 노비를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단정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러 번에 걸쳐 탄핵을 받았다. 1484년 호조참판으로서 천추절을 축하하기 위해 전(箋)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7년 전주부윤이 되고, 벼슬은 전한(典翰)을 역임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생원공파
16世 김익겸(金益謙) = 16世 김갱수(金鏗壽) 동일인으로 추정 (자가 인로(仁老)로 동일)
사농경 석포(石圃 / 路)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는 김숙온, 아버지는 판교(判校) 김양중(金養中)이다
자는 인로(仁老)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을 지냈으며 조선12대 인종비 인성왕후가 외손녀 이다.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김익겸의 딸은 나주인 박용(朴墉)에게 출가하였으며, 박용(朴墉)의 딸이 인성왕후이다
※ 중종실록 50권, 중종 19년 2월 12일 정미 2번째기사 1524년 명 가정(嘉靖) 3년 세자빈의 간택을 의논하다
전교하기를,
"세자빈(世子嬪)의 일을 의논하고자 하니, 삼공(三公)과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부르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세자빈을 자전(慈殿)께서 이미 간택하셨는데, 박호(朴壕)086) 의 딸만큼 합당한 사람이 없다. 다만 가문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매, 영상(領相) 남곤(南袞) 등이 아뢰기를,
"박호의 아비는 박강(朴薑)이고 강의 아비는 박은(朴訔)인데 다 훈신(勳臣)으로 지위가 1품에 이르렀습니다. 박은의 먼 조상인 박상충(朴尙衷)은 전조(前朝)087) 에서 정당 문학(政堂文學)이었고,
박호의 처의 아비는 김익겸(金益謙)이고 그 아비는 김양중(金養中)이라 하는데 곧 원경 왕후(元敬王后)088) 의 동생의 사위입니다. 문벌로 보아도 쓸 만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박호의 딸은 내의(內議)가 이미 정해졌고 대신도 이와 같이 아뢰니, 정혼할 만하다. 빈의 집이 본디 여염에 있으므로 창호(窓戶)와 포진(鋪陳)이 구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니, 도감(都監)089) 에 물어서 마땅하게 장만하여 주라." 하였다.
※ 박호(朴壕) ----> 박용(朴墉)의 초명(初名).
【태백산사고본】 25책 50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6책 287면\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생원공파
16世 김한계(金漢啓)
자는 형운(亨運)이며 호는 휴계(休溪)로 아버지는 현감 김영명(金永命)이다. 세종 무오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현관을 거쳐 집현전사·승문원사를 지냈다. 記注官으로 있을 때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 하였다.
16世 김한철(金漢哲)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는 송호(松湖)로 아버지는 현감 김영명(金永命)이다. 예종 기축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현관을 거쳐 예조정랑을 지내고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낙향하였다.
16世 김 축(金 軸)
소정(疎亭) 諱 涉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정3품)을 지냈다.
16世 김경조(金敬祖)
渡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고 안동대도호부사, 전라도 관찰사(종2품),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성균관대사성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世 김자한(金自漢)
둔번(遁煩 諱 乙邦)의 손자이며 軸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 정3품)을 지냈다.
16世 김한경(金漢卿)
자는 국보(國寶)이며 호는 도곡(道谷)으로 아버지는 사직 김자중(金自中)이다. 무과로 출사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내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감찰공파
16世 김 전(金 巓)
[문과]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郞]위(3/33)
[생원] 예종(睿宗) 1년(146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4위(34/100)
[진사] 예종(睿宗) 1년(146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11위(16/100)
자는 사앙(士仰)이며 호는 송정(松亭)으로 아버지는 부사(府使) 김안중(金安中)이다. 생원으로 출사하여 성종 계묘 문과에 급제, 종부시(宗簿寺)·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 _괴정공파
16世 김 헌(金 巚)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지낸 김숙검(金淑儉)의 손자이고 인천 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를 역임한 김안중(金安中)의 둘째아들이면서 조선(朝鮮)의 문신인 김전의 아우가 된다. 관직은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난(亂)으로 인하여 국청(鞠廳)에서는 신진사류들을 중대한 죄인으로 문초하는 국치가 벌어지고, 많은 선비들이 사사되거나 투옥되는 일대 정국의 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連累)된 공(公)은 삼가현(三嘉縣)의 거부(巨富)인 졸당공(拙堂公/박총朴聰) 처가댁으로 곧 바로 서둘러 낙향(落鄕)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의탁(依託)생활을 하면서 대평(大坪) 송지촌(松旨村 : 지금의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 _괴정공파
17世 김흠조(金欽祖)
자는 경숙(敬叔)이며 호는 낙금당(樂琴堂)으로 아버지는 첨정 김효우(金孝友)이다. 연산 신유 문과에 급제하여 장례원(掌隷院) 판결사를 지냈다.
17世 김 통(金 統)
호지(好智)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校理, 正言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을 지냈다 증손 모재(慕齋)가 귀하게 되어 예조참판과 양관제학에 증직되었다
김사언(金士彦)
치재(恥齋 諱 玧)의 아들로 號는 반학당(伴鶴堂)이다. 만년에 문과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시독관(侍讀官), 기주관(記注官)등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김세우(金世瑀)
자는 공근(公瑾)이며 호는 약재(約齋)로 아버지는 참군 김정(金整)이다.연산 신유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18世 김윤석(金潤石)
낙금당(樂琴堂 諱 欽祖)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侍講院)사서(司書)를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과 사헌부 지평, 장령(종4품)을 지냈다.
17世 김윤우(金允祐)
봉교공(奉敎公) 대제학(大提學) 헌(獻)의 아들로 16世 송정공(松亭公) 김 전(金 전)의 양자(子)이다. 조선의무신. 자는 충경(忠卿) 연산군 무오(茂午)년 절충장군행의흥위 대호군(折衝將軍行義興衛 大護軍)역임. 통정대부(通政大夫)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괴정공파
17世 김익령(金益齡)
統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 종3품)을 지냈다. 그 뒤 사옹원(司饔院) 정(正 정3품)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다. 사후 이조판서겸 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18世 김덕일(金德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덕일(德一)선조는 대호군(大護軍) 윤우(允祐)의 차남이고 괴산(槐山)에 살기 시작하였다. 자는 子吉이며 광해군(1616년) 병진 3월 2일 별세하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 침곡(針谷)에 있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괴정공파
18世 김응일(金應一)
대호군 윤우(允祐)의 아들 응일(應一)은 합천군 용주면 고품마을 출신으로 자는 자순(子純)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44세의 나이로 스스로 삼가(三嘉)지역에서 구산(龜山) 윤탁(尹鐸), 봉사(奉事) 노흠(盧欽), 생원(生員) 권양(權養), 권제(權濟)등이 이끄는 삼가의병대(三嘉義兵隊)에 지원하여 용감한 의병활동(義兵活動) 중, 삼가의병대(三嘉義兵隊)가 곽재우(郭再祐) 군사와 합류하여 왜적이 서부 경남지방을 노략질하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宜寧)지방으로 침입하려고 벌인 정암진나루 전투, 진주성 전투등에 참전한 이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화왕산성(火旺山城)전투에 참전하여 충의(忠義)를 다하였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괴정공파
18世 김관석(金關石)
자는 의중(倚中)이며 호는 사우당(四友堂)으로 아버지는 장사랑 김윤적(金允迪)이다. 공은 효성스러운 천성에 덕을 갖추었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경향(京鄕)에 칭송되더니 사후에 덕천서원(德泉書院)에 배향되었다. 처음으로 倫洞에 터를 잡았다.
문양공(지예)_참판공_문절공_사우당공파
18世 김제민(金齊閔)
자는 사효(士孝)이며 호는 오봉(鰲峯)으로 아버지는 증형조판서 김호(金顥)이다.이항(李恒)의 문인으로 선조 계유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동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임란을 당하매 아들 엽(曄)·섬(暹)·안(晏)·흔(昕)을 거느리고 역전하여 다대한 전과를 거둔 호남 삼대 창의장(倡義將)으로 이름을 남겼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강(忠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00世 김선복(金善復)
조선 전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임진왜란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1544~1592]과 더불어 창의하여 1592년(선조 25) 8월 17일 충청도 금산 전투에서 칠백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히고, 비가 세워졌다. 청주시 문의문화재단지(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산 6-1)안에 충신각이 세워져 있다.
18世 김민국(金敏國)
자는 화여(和汝)이며 호는 만회(晩檜)로 아버지는 부제학 김치중(金致重)이다.공은 천성이 어질고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출사하여관이승지에이르렀다가 대북파(大北派)의 폐모론을 배척하여 벼슬을 버리고 제주도로 낙향·은둔하였다 [군수공派]
19世 김안국(金安國)
자는 국경(國卿)이며 호는 모재(慕齋)로 아버지는 증좌찬성 김연(金璉)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연산 계해 별시와 정묘 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지평·장령·예조참의·경상관찰사를 지내며 실학(實學)과 권선(勸善)·풍속순화와 사문진작(斯文振作)에 힘썼다. 전라관찰사로 재임할 때 사화로 파직되어 여주로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중종 정유 서환되어 삼조(三曹)의 판서·양관 대제학·의정부좌찬성·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냈다. 사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하고 인종묘정(仁宗廟廷)에 배향되고 오산(鰲山)·임강(臨江)·기천(沂川)·빙계(氷溪)·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19世 김정국(金正國)
자는 국필(國弼)이며 호는 사재(思齋)이고 아버지는 증좌찬성 김연(金璉)으로 모재 김안국의 아우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중종 기사 별시 갑과에 장원으로 등제하여 교리·정랑 등을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직제학·동부승지에 오르고 황해관찰사를 지냈다. 기묘사화로 고양(高陽)으로 낙향했다가 복직되어 병조참의·공조참판·경상관찰사·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사후에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문목(文穆)이라 시호를 내리고 오산(鰲山)·임강(臨江)·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되었다.
19世 김 진(金 璡)
자는 형중(瀅仲)이며 호는 청계(靑溪)로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김예범(金禮範)이다. 중종을유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가 성균관 생원으로 학업을 닦다가 뜻하는 바 있어 향리인 안동(安東)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자질(子姪)들을 충효로 훈육하여 세아들은 대과로 두 아들은 소과로 등제한 오현자(五賢子)를 길러내어 경세에 몰두한 경략가 였다. 후일 아들들이 귀히되어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주벽으로 모셨다.
19世 김희삼(金希參)
자는 사로(師魯)이며 호는 칠봉(七峯)으로 아버지는 증승지 김치정(金致精)이다. 중종 경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수찬·부교리를 거쳐 양조 정랑 의정부사인을 지내고 삼척부사(三陟府使)를 끝으로 물러났다. 청렴한 학자로 이황(李滉)·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등과 교우하며 사현자(四賢子)를 훈육하여 후일 넷째 아들 동강(東岡) 우옹(宇옹)이 귀히되어 이조판서를 추증받았다.
문양공(지예)_참판공_문절공_칠봉공파
19世 김담수(金聃壽)
자는 태수(台수)이며 호는 서계(西溪)로 아버지는 참봉 김관석(金關石)이다. 황준량(黃俊良)·조식(曺植)·이문건(李文楗)에게 수학하고 명종 갑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경전을 탐독하고 현우(賢友)와 학문으로 교우하여 사후에 청천(晴川)·낙암서원(洛암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양공(지예)_참판공-문절공_서계공파
19世 김기남(金起南)
자는 증오(仲五)이며,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덕일(德一)이다. 승사랑(承仕郞)을 지내고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증직 받았다. 신미년 8월 21일 졸하시다. 묘는 충북 괴산 문광면 응막령 선고비묘하에 오향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괴정공파
19世 김두남(金斗南)
자는 여앙(汝仰)이며, 호는 덕탄(㯖灘)이다. 26세되는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삼가(三嘉)에서 입재(立齋) 노흠(盧欽), 구산(龜山) 윤탁(尹鐸), 화음(花陰) 권양(權養)등이 이끄는 삼가(三嘉) 향병으로 지원하여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장군의 진영으로 편성되어 의령(宜寧)의 정암진나루 전투등에 참전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임천(林泉)에 다시 돌아와서 오로지 학문(學文)에만 전념 하였으며, 과업에는 뜻을 두지않고 부모봉양에 극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남에, 의병(義兵)으로 다시 출전하여, 경남 창녕(昌寧)의 "화왕성(火旺城) 전투"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직(殉職) 하였다.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당동 고호 세덕사(世德祠)에서 배향하고 있다. 사후에 효행으로 1634년(인조12) 증 선무랑(宣務郎)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추서되고 1650년(효종2년) 사정려(賜旌閭)되었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괴정공파
20世김극일(金克一)
자는 백순(伯純)이며 호는 약봉(藥峯)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명종 병오 문과에 급제하여 내자시정을 지내고 후일 사빈서원(泗濱書院)에 배향되었다.
20世 김극예(金克禮)
자는 백인(伯仁)이며 아버지는 승사랑(承史郞) 기남(起南)이다. 광해(光海) 7년(1615) 을묘식년(乙卯式年)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를 지냈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괴정공파
20世 김극화(金克和)
자는 달도(達道)이며 아버지는 승사랑(承史郞) 기남(起南)이다. 인조(仁祖) 20년(1642) 임오식년 (壬午式年)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 정랑을 지냈다
문양공(지예)_남파공_석포공_괴정공파
20世김여부(金汝孚)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의 아들로 중종 기유에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20世김우홍(金宇弘)
자는 면부(勉夫)이며 호는 이계(伊溪) 또는 지족당(知足堂)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중종 계축 문과에 급제하고 나주목사·영흥목사를 지냈다.
문양공(지예)_참판공_문절공_칠봉공파
20世김우굉(金宇宏)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개암(開巖)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에게 배우고 중종 병인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대사성을 거쳐 관찰사를 지냈으며 후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양공(지예)_참판공_문절공_칠봉공파
20世김우옹(金宇옹)
자는 숙부(肅夫)이며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直峰)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중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양관제학·이조참판·대사성·대사헌을 지낸 임난(壬亂)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사후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을 추증받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청천·회령서원(會寧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양공(지예)_참판공_문절공_칠봉공파
20世김성일(金誠一)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다. 이황(李滉)의 학지요체(學之要諦)를 득심(得心)한 학자로서 선조 무진 문과에 급제하고 삼조낭관,대사성,부제학,부승지,형조참의,경상병사,경상좌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였다.임난(壬亂)에 유공하여 선무원종공신일등에 녹훈되어 이조판서 의금부사 춘추관사 오위도총관 양관대제학을 추증받고 시호는 문충(文忠)이 내려졌으며 임천(臨川)·호계(虎溪)·사빈서원(泗濱書院)등에 배향되었다.
20世김복일(金復一)
자는 계순(季純)이며 호는 남악(南嶽)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며 문충공(文忠公)김성일(金誠一)의 아우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경오 문과에 급제하고 삼조낭관을 거쳐 울산군수·창원도호부사 성균사성을 지냈으며 종부시정으로 추증되고 사빈(泗濱)·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20世 김정룡(金廷龍)
자는 시현(時見)이며 호는 월담(月潭)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담수(金聃壽)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선조 을유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예안현감으로 군량미 수송에 공을 세웠으며 양조좌랑을 비롯하여 영월·풍기군수와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낙암서원(洛암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양공(지예)_참판공_문절공_사우당공파
20世 김택룡(金澤龍)
자는 시보(施普)이며 호는 조성당(操省堂)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양진(金楊震)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무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현관을 거쳐 헌납을 지냈다
20世 김지수(金地粹)
자는 거비(去非)이며 호는 태천(苔川) 또는 천태산인(天台山人)으로 아버지는 증병참 김서(金曙)이며 할아버지는 충강공(忠剛公) 김제민(金齊閔)이다. 광해병진 문과에 급제하고 교서판교감이 되고 폐모론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양조낭관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종성부사를 끝으로 고부로 낙향하였다. 고매한 인품으로 명망을 얻어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며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20世 김지남(金地南)
자는 대뢰(大賚)이며 호는 구봉(九峯)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성(金晟)이다.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관계진출을 단념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공조좌랑에 올랐으며 인조 무인에 무과에 급제하고 기사관·삼조좌랑·무장현감을 거쳐 직장·지평을 지냈다.
21世김 용(金 涌)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운천(雲川)으로 아버지는 찰방 김수일(金守一)이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숙부 김성일에게서 학문을 닦고 선조 경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검열이 되었다가 물러났다. 임란(壬亂)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수성(守城)하고 행재소에 가서 호가(扈駕)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환도하여 삼사·양조 현관을 지내고 예천군수·선산부사·여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김 주(金 주)
자는 여정(汝定)이며 호는 불구당(不求堂 )으로 아버지는 도사 김극계(金克繼)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인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여 무장현감·정랑·양산군수 겸 경주병마절제사를 지냈다. 義城金氏 世譜庚寅, 丙申譜 편찬을 주관하고 그 서문을 썼다.
김 욱(金 頊)
자는 신백(愼伯)이며 호는 사월당(沙月堂)으로 아버지는 감찰 김효가(金孝可)이고 할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옹)이다. 인조 갑자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과 흥해·서산군수 그리고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22世김시주(金是柱)
자는 이립(以立)이며 호는 개호(開湖)로 아버지는 병조참의 김용(金涌)이다. 광해조 계축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을 지냈다.
김시권(金是權)
자는 자중(子中)이며 호는 봉파(鳳坡)로 아버지는 익위사(翊衛司) 김집(金潗)이다. 숙종조 경오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냈다
김시영(金是榮)
자는 인여(仁汝)이며 호는 청음(淸陰)으로 아버지는 김즙(金즙)이다. 효종 정유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기주관. 성균관직강. 예조정랑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김창석(金昌錫)
자는 천여(天與)이며 호는 월탄(月灘)으로 아버지는 호군동추를 지낸 김이기(金履基)이다. 숙종조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문집이 있다.
김세호(金世鎬)
자는 경백(京伯)이며 호는 구주(龜洲)로 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김익기(金益基)이다. 숙종조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었으며 문집이 있다.
김덕제(金德濟)
자는 경언(經彦)이며 아버지는 부호군 김호(金鎬)이다. 숙종 을묘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만경현령을 지냈다
김 빈(金 빈)
자는 빈여(賓如)이며 호는 갈천(葛川)으로 아버지는 김시각(金是각)이다. 효종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외직으로 경주부사 광주목사, 한성좌우윤, 내직으로는 도승지, 예조참판을 비롯 사조의 참판을 지냈고 기로연에도 참여하였다.
김방걸(金邦杰)
자는 사흥(士興)이며 호는 지촌(芝村)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시온(金是온)이다. 현종 경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김극령(金極齡)
자는 남로(南老)이며 아버지는 통덕랑 김이표(金爾標)이다. 영조 기유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 황해도사. 춘추관기주관. 병조좌랑을 거쳐 운산군수를 지냈다.
김학배(金學培)
자는 천휴(天休)이며 호는 금옹(錦翁)으로 아버지는 김암(金암)이다. 현종 계묘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현령을 지냈다
김성구(金聲久)
자는 덕휴(德休)이며 호는 팔오헌(八吾軒)으로 아버지는 증이참 김추길(金秋吉)이다. 현종 기유문과에 급제하여 교리와 집의를 하고 병조참의 여주,홍주 목사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성균관 대사성도 지내다.
김여건(金汝鍵)
자는 천개(天開)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김성구(金聲久)이다. 숙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관을 거쳐 수찬을 지냈다
김세흠(金世欽)
자는 천약(天若)이며 호는 칠탄(七灘)으로 아버지는 주부 김태기(金泰基)이다. 숙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김성탁(金聖鐸)
자는 진백(振伯)이며 호는 제산(霽山)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김태중(金泰重)이다. 숙종 신묘 진사로 출사하여 을묘 문과에 급제하고 부수찬. 지평을 거쳐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김응렴(金應濂)
자는 성희(聖希)이며 아버지는 김이도(金以鍍)이다. 영조 경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김택수(金宅洙)
자는 도원(道元)이며 호는 휴촌(休村)으로 아버지는 증호참 김재령(金再齡)이다. 영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고 좌우승지. 돈영도정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김한로(金漢老)
자는 상수(商수)이며 호는 성와(省窩)로 아버지는 첨추 김치복(金致福)이다. 영조 신유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김 굉(金 굉)
자는 자야(子野)이며 호는 귀와(龜窩)로 아버지는 증이참 김광헌(金光憲)이다. 이상정(李象靖)에게 수학하고 생원으로 출사하여 정조 정유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현관을 거쳐 예조참판을 지냈다
김한동(金翰東)
자는 한지(翰之)이며 호는 와은(臥隱)으로 아버지는 좌랑 김경필(金景泌)이다. 진사로 출사하여 정조 기유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현관을 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김 직(金 直)
자는 경지(敬之)이며 호는 지애(芝厓)로 아버지는 김광호(金光鎬)이다. 정조 임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냈다
김 서(金 瑞)
자는 맹집(孟輯)이며 호는 응암(鷹岩)으로 아버지는 김정신(金鼎臣)이다. 순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김이상(金履常)
자는 무숙(懋叔)이며 호는 수와(睡窩)로 아버지는 생원 김국채(金國采)이다. 영조 을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김기찬(金驥燦)
자는 덕여(德汝)이며 호는 동곽(東郭)으로 아버지는 김주훈(金柱勳)이다. 정조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김희락(金熙洛)
자는 숙명(淑明)이며 호는 식헌(寔軒)으로 아버지는 증참의 김두동(金斗東)이다. 이상정(李象靖)에게 배우고 생원으로 출사하여 지평. 군수를 지냈다.
김희주(金熙周)
자는 穆)이며 호는 갈천(葛川)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시동(金始東)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정조 을묘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안악. 안주. 영흥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지냈다.
김낙풍(金樂풍)
자는 적여(績汝)이며 호는 삼낙재(三樂齋)로 아버지는 첨지중추 김성(金珹)이다. 순조 을해 평안도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병조참의를 지냈다
김희직(金熙稷)
자는 공숙(公叔)이며 호는 표림(豹林)으로 아버지는 김호동(金虎東)이다.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김두명(金斗明 )
자는 백원(伯圓)이며 호는 낙천와(樂天窩)로 아버지는 생원 김희용(金熙鏞)이다. 순조 을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김여서(金驪書)
자는 중연(仲淵)이며 호는 담운(淡雲)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희질(金熙質)이다. 순조 정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관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김규서(金奎瑞)
자는 국서(國瑞)이며 아버지는 첨추 김유성(金維城)이다. 순조 정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부승지를 지냈다
김건수(金建銖)
자는 공립(公立)이며 호는 만회(晩悔)로 아버지는 첨추 김재인(金在仁)이다. 순조 경인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승지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