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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사랑방 스크랩 스리랑카의 승가 성립과 전개
부처님 마을 추천 0 조회 43 16.07.02 15: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스리랑카의 승가 성립과 전개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필자의 미발표 논문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공개하는 것은 초기경전의 전승에 관한 부정확한 정보들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 논문에서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니까야가 어떻게 해서 스리랑카에서 필사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배경과 스리랑카에서 상좌부(Theravada)가 어떤 우여곡절 속에서도 단절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가에 대해 현존하는 문헌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초기 상좌불교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주 --    

 

기원전 3세기 중엽, 아소까(Asoka, 阿育王) 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의 공로에 의해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되었다.1) 이것을 불교의 공식적인 전래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관한 정보와 인도의 강력한 불교 황제의 위대한 활동에 관한 소식이 이 섬에 전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2) 그러나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했다는 것은 그가 최초로 스리랑카에 불교의 승가를 성립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3) 율장에 의하면 변방에서 구족계(具足戒, upasampad?)를 수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섯 명의 장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때 마힌다는 다른 네 명의 장로들과 한 명의 사미와 함께 스리랑카로 건너와 최초로 불교의 승가를 성립시켰던 것이다.4)

 

스리랑카의 연대기에 의하면, 마힌다와 데와남삐야띳사(Dev?nampiya-tissa, 247-207 B.C.) 왕과의 첫 만남에서 왕과 수행원들은 불교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였다.5) 그 다음 날 마힌다와 그의 동료들은 수도 아누라다뿌라(Anur?dhapura)로 들어갔다. 그들은 왕이 마련해 준 왕궁에 머물렀다.6) 그러나 나중에 왕은 도시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인 마하메가와나(Mah?meghavana, 大雲林)’를 승가에 기증하였다.7) 마힌다는 이곳을 불교의 본부로 삼았다. 그 후 이곳은 유명한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가 되었다.8)

 

데와남삐야띳사 왕의 통치시기에 크고 작은 수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다.9) 이 새로운 종교는 빠른 속도로 국민들에게 전파되었다. 이 시기는 왕의 다른 네 명의 형제들이 각각 여러 지방을 나누어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이 시기는 불교의 영향으로 평화와 화합으로 나라가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중엽, 남인도의 촐라(Chola)의 왕자 엘라라(E??la)가 스리랑카에 침입하여 왕을 체포한 뒤, 45년간 이 섬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섬의 북쪽 지역은 비록 외국인 통치자의 손에 넘어갔지만, 남쪽 지역인 로하나(Roha?a)는 여전히 독립된 상태로 있었다.10)

 

이 장기간의 외국인 통치 시기는 결과적으로 스리랑카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른바 국가와 불교에 헌신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로하나의 둣타가마니(Du??hag?ma??, 101-77 B.C.)는 스리랑카의 초기불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적 영웅이었다. 그는 왕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교를 위해서적과 싸워야 한다고 외쳤다. 이 젊은 둣타가마니의 기치 아래 전 싱할라 민족이 하나로 뭉쳤다. 이것이 싱할라 민족주의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종교-국가주의의 일종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불교에 헌신하였으며, 전체 싱할라 국민들을 분발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불교도가 아니면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결국 싱할라 민족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불교도가 되었다.11) 

 

이와 같은 전통의 종교적 견해는 불교국가주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비구들이 공식적으로 정치 분야와 세속의 관심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둣타가마니는 자신의 창에 붓다의 사리를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싸웠다.12) 결국 둣타가마니는 외국의 통치자였던 엘라라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13) 그는 마하투빠(Mah?th?pa, Ruvanv?lis?ya)를 비롯한 많은 종교적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 뒤 왕위를 계승한 그의 동생 삿다띳사(Saddh?-tissa, 77-59 B.C.) 왕도 닥키나기리 위하라(Dakkhi??giri-vih?ra, 南寺)를 비롯한 많은 사찰들을 지었다. 14)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스리랑카의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로하나의 띳사(Tissa)라는 바라문이 기원전 43년 왓따가마니-아바야(Va??ag?ma??-Abhaya, 43-29 B.C.)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때 마침 남인도로부터 일곱 명의 타밀들이 마하띳타(Mah?tittha)에 상륙하여 강력한 무력으로 무장한 채 수도 아누라다뿌라를 향해 진군해왔다. 남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였다. 기원전 43년부터 14년간 다섯 명의 타밀들이 번갈아 가면서 아누라다뿌라를 지배하였다. 이 기간에 왓따가마니 왕은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지냈다.15)

 

그때 전례 없는 대기근이 들어 나라 전체가 황폐화되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었는데, 그들이 존경하던 비구들의 고기까지 먹었다. 그때 수천 명의 비구와 재가자들이 죽었다. 많은 사찰들이 황무지로 변했다. 마하위하라(大寺)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마하뚜빠(Mah?th?pa) 또한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다. 많은 비구들은 섬을 떠나 인도로 건너갔다. 국가는 그야말로 대혼란의 상태였다.16)

 

대장로들과 싱할라의 지도자들은 불교의 미래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다. 불교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싱할라 왕들도 불교를 지원해 줄 수가 없었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져온 삼장(三藏)의 구전(口傳) 전통을 계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비극적인 시기에 승려들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본 대장로들은 지역 족장들의 보호를 받아 마딸레(M?tale)의 알루위하라(Aluvih?ra)에 모여 진실한 교법을 유지하기 위해서’(cira??hitattha? dhammassa)17)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삼장을 문자로 기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사에서 최초로 주석서를 포함한 삼장 전체를 문자로 기록하게 되었다.18) 이것이 오늘날 현존하는 빨리 성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이 14년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타밀을 물리치고, 수도 아누라다뿌라를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는 니간타(Niga??ha, 자이나교)의 산사(山寺)를 파괴해 버리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앞에 붙인 거대한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ra, 無畏山寺)를 지었다. 왕은 이 절을 자신이 불행했던 시기에 자기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마하띳사(Mah?tissa)라는 스님 개인에게 헌납하였다. 또한 왕의 신하였던 다섯 명의 대신들도 자신들을 도와 주었던 띳사 장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각자 사찰을 지어 띳사(Tissa)라는 장로에게 바쳤다.19) 이것이 개인에게 사찰을 헌납한 최초의 역사적 사례이다.20) 

 

마하띳사는 초기에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는 외진 곳에 살았었다. 그런데 나중에 왕이 특별히 초빙하여 아누라다뿌라의 마하위하라에 머물게 하였다.21) 그런데 그는 과도하게 권력을 휘둘렀다. 이것은 마하위하라 승려들의 명예와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하위하라 승려들은 마하띳사가 속인과 교류했다는 죄목을 들어 빳바자니야-깜마(pabb?janiya-kamma, 驅出?磨)를 실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것은 왕과 대신들의 행위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하띳사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갈마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마하위하라 승려들은 율장에 의해 욱케빠니야-깜마(ukkhepaniya-kamma, 擧罪?磨)를 부과하려고 하였다. 마하띳사의 제자들은 분노하여 많은 승려들을 데리고 아바야기리로 간 뒤, 마하위하라로 되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이것이 스리랑카에서의 최초의 승가 분열(sa?gha-bheda)이었다. 이때부터 스리랑카의 불교는 마하위하라(大寺派)와 아바야기리-위하라(無畏山寺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비록 무외산사의 승려들이 대사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초기에는 두 부파 사이에 교리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율장에 따라 마하띳사를 징계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바로 인도의 밧지뿌뜨라(Vajjiputra, 犢子部)에 속하는 담마루찌(Dhammaruci, 法喜部)가 스리랑카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무외산사에서 그들을 받아들였다.22) 그러나 왕은 무외산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 혹은 그들의 견해를 공식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그 후 무외산사의 승려들은 인도에서 형성된 여러 부파들과 접촉하였다. 그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념들을 받아들여 비교적 진보적이었다. 그들은 상좌부와 대승을 함께 공부하였다.23) 

 

보하리까띳사(Voh?rikatissa, 269-291 A.D.) 왕의 치세 때 최초로 베뚤라와다(Vetullav?da, Skt. Vaitulyav?da, 方廣部)가 들어왔다. 이때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크게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보하리까띳사 왕은 방광부를 탄압하였다. 그 후 자신의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고타바야(Go?h?bhaya, 309-322) 왕은 불교도로서 모범적인 삶을 보여준 강력한 군주였다. 그의 통치시기에 무외산사에서는 방광부를 받아들였다. 또한 무외산사에 있던 승려들이 담마루찌(법희부)와 단절하고, 닥키나기리-위하라(Dakkhi??giri-vih?ra, 南寺)로 옮겨, 그곳에서 사갈리야(S?galiya, 海部)라고 하는 새로운 부파가 생겨났다.24)

 

한편 고타바야 왕은 방광부를 탄압하기 위해 취조했는데, 그들의 책을 불사르고 60명의 승려들을 국외로 추방시켰다. 섬에서 추방된 승려들은 남인도의 촐라(Chola)에 머물렀다.25) 그들은 인도의 대승불교 승려였던 상가미뜨라(Sa?ghamitra)와 접촉하였다. 나중에 상가미뜨라는 스리랑카로 건너와 대승불교를 전파시켰다. 고타바야 왕은 그의 두 아들의 교육을 상가미트라에게 맡겼다.

 

상가미뜨라는 두 왕자 중 형인 제타띳사(Je??ha-tissa)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동생인 마하세나(Mah?sena)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밀었다. 그런데 왕의 사망 후 형인 제타띳사(Je??ha-tissa, 323-333)가 왕위에 오르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스리랑카를 떠났다. 그러나 나중에 동생인 마하세나(Mah?sena, 334-362)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왔다. 26)

 

상가미뜨라는 무외산사에 머물면서 대사파의 승려들을 대승으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제자인 마하세나 왕을 설득시켜 대사파 승려들에게 공식적으로 공양을 베풀지 못하도록 금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대사파의 승려들은 아누라다뿌라를 떠나 로하나(Roha?a)와 말라야(Malaya)로 갔다. 그곳은 대사파에 의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사(大寺)9년 동안 황무지로 방치되었다. 상가미뜨라는 왕의 승낙과 소나(So?a)라는 대신의 도움을 받아 대사의 7층 건물인 로하빠사다(Lohap?s?da)를 비롯한 많은 다른 건축물들을 파괴한 뒤, 그 자재들을 무외산사의 새로운 건물을 짓는데 이용하였다. 한편 쩨띠야-빱바따(Cetiya-pabbata, Mihintale)는 무외산사의 법희부들이 차지하였다.27)

 

왕의 이러한 행동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파를 지지하던 국민들은 왕에게 등을 돌렸다.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신하였던 메가완나-아바야(Meghava??a-Abhya)는 말라야(Malaya)로 달아나 그곳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마하세나 왕은 그때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사를 복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양측은 서로 화해하였다.28)

 

그러나 성난 군중들은 이들에게 보복을 감행하였다. 왕이 총애하던 부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필경사의 딸은 비통한 마음으로 목수를 시켜 상가미뜨라를 죽여 버렸다. 상가미뜨라의 친구이자 대신이었던 소나(So?a)도 또한 살해되었다. 대사는 특히 훌륭한 공직자였던 메가완나-아바야에 의해 복구되었다.29)

 

비록 왕이 메가완나-아바야의 제안에 동의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대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사의 경계 내에 거대한 제따완나 위하라(Jetavana-vih?ra, 祇陀林寺)를 지었다.30) 이것이 스리랑카에서 세 번째 성립된 부파였다.31) 그리고 왕은 많은 사람들의 강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갈리야(S?galiya, 海部)를 따르는 닥키나라마(Dakkhi??r?ma) 혹은 닥키나기리(Dakkhi??giri, 南寺)의 띳사(Tissa)라는 장로에게 제따완나를 바쳤다. 이 때문에 대사파는 다시 한 번 왕과의 관계를 9개월 동안 단절하였다. 제따완나-위하라(祇陀林寺)를 접수한 띳사 장로는 승가회의에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았다. 공정하고 공평하기로 이름난 사법부 장관은 비록 왕이 원하는 것과는 반대가 될지라도 띳사를 환속시켰다.32)

 

마하세나 왕의 뒤를 이은 시리메가완나(Sirimeghava??a, 362-409) 왕은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대사파의 비구들에게 사죄하였다. 그리고 그는 파괴된 대사를 복구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33) 이 왕의 통치시기에 깔링가(K?li?ga)로부터 불치(佛齒)가 도착하였다. 이때 중국의 법현(法顯) 스님이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무외산사에 머물렀다. 법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무외산사에는 5,000명의 승려들이 있었지만, 반면 대사에는 3,000명만이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34) 한편 마하나마(Mah?n?ma, 409-431) 왕의 통치시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가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대사에 머무르면서 삼장에 대한 주석서를 빨리어로 옮겼다.35)

 

실라깔라(Sil?k?la, 524-537) 왕의 통치시기에 뿌르나(P?r?a)’라는 젊은 상인이 장사를 하기 위해 까시(K?si, 베나레스)에 갔다가 다르마다뚜(Dharmadh?tu, 法界)’라는 책을 스리랑카로 가져와 왕에게 바쳤다. 왕은 예전에 인도에서 대승불교와 접촉했기 때문에 이 책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예경하였다. 그는 이 책을 왕궁 근처의 기타림사에 보관해 두고, 1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열었다.36)

 

악가보디 1(Aggabodhi , 568-601) 왕 때에는 인도에서 온 조띠빨라(Jotip?la)’라는 스님이 공개적인 토론에서 방광부를 패배시켰다. 그 이후 더 이상 방광부로 개종하는 사람은 없었고, 무외산사와 기타림사 두 파의 승려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대사파에 복종하면서 살았다.37)

 

그 다음 왕위에 오른 악가보디 2(Aggabodhi , 601-611) 왕은 방광부의 공식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사보다도 무외산사와 기타림사를 더 좋아하였다. 왕비 역시 무외산사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 후 약 50년 동안 정치와 종교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 시기부터 왕들은 대개 오래된 종교의 건축물들을 수리하고 사찰을 확장하였으며, 대중적인 축제를 개최하고 불교를 정화하려고 시도하였다.38)

 

이 시기의 불교 정화(S?sana sodhana)’는 율장의 규정에 따라 담마깜마(dhamma-kamma, 法?磨)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정화는 왕의 명령에 따라 승가에서 실시하였다. 대부분의 승려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였고, 보수적인 승려들은 그것을 타락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때마다 왕들과 고승들이 정화를 시도하였다.

 

실라메가완나(Sil?meghava??a, 617-626) 왕의 통치시기에 무외산사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무외산사에 거주하던 보디(Bodhi)’라는 스님이 그 절에 있던 많은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왕에게 고소하였다. 그리고 율장에 따라 담마갈마(法?磨)를 개최하라고 왕에게 요청하였다. 왕은 정화를 실시하라고 보디 스님에게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런데 계율을 지키지 않았던 승려들이 동조하여 보디 스님을 죽여 버렸다. 왕은 격노하여 범죄에 가담한 자들의 손을 절단해 버리고, 족쇄를 채워 저수지 감시인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왕은 100명의 승려들을 국외로 추방시키고 승단을 정화하였다. 그 후 왕은 두 부파 간의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사파의 승려들에게 무외산사파와 함께 우뽀사타(Uposatha, 布薩)를 실시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의 요청을 거부하였다.39)

 

다토빠띳사 2(D??hopatissa , 650-658) 왕의 통치시기에 다시 왕과 대사파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 왕이 무외산사파를 위해 대사파의 영역에 속하는 땅에 빠리웨나(Parive?a, 講院)를 짓고자하였다.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에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왕은 자신의 계획을 강행했다. 그러자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의 공양을 거부하는 빳따닉꿋자나-깜마( pattanikkujjana-kamma, 覆鉢?磨)를 실행에 옮겼다.40) 그러나 왕은 대사파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41)

 

그 후 마나밤마(M?navamma, 676-711) 왕 때에는 분소의(糞掃衣, pa?suk?lika)를 입은 승려들이 유명해졌다. 세나 1(Sena , 831-851) 왕 때에는 바지리야(V?jiriya, 金剛部)’가 전해졌다. 이어서 세나 2(Sena , 851-885) 왕 때에는 무외산사의 분소의를 착용한 승려들이 다른 부파를 형성하였다. 왕은 이단의 견해들이 섬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서 감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왕은 세 부파를 정화하였다. 하지만 빠라끄라마 빤두(Par?krama Pa??u, 972-981) 왕의 치세기간에는 정치적 격변기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와 승가의 쇠퇴기였다.41)

 

위자야바후 1(Vijayab?hu , 1059-1114) 왕의 통치시기에 수도를 뽈론나루와(Polonnaruwa)로 옮겼다. 이때 승가의 단절된 계맥도 되살렸다. 미얀마로부터 승려들이 들어왔다. 대사의 본부도 뽈론나루와로 옮겼다. 고대 사원의 전통을 다시 되살렸다. 위끄라마바후 2(Vikramab?hu, 1116-1137) 왕의 통치시기에는 사찰이 황폐화되었고, 승려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그러나 빠라끄라마바후 1(Parakramab?hu , 1153-1186) 왕의 통치시기에 승가를 정화하였다. 세 개의 부파를 하나로 통일시켰다. 대사파의 우월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가마와사(G?mav?sa, 마을 거주자)와 아란냐와사(Ara??av?sa, 산림 거주자)를 재건하였다. 또한 복주서(??k?)들을 체계적으로 편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남인도의 상좌불교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이때 승가에서의 성직 계급제도의 조직이 형성되었다.42)

 

닛상까 말라(Nissa?ka Malla, 1187-1196) 왕은 승려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세 개의 승가 단체를 하나로 통일하도록 칙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승가에 누가 되는 행동을 삼가라고 승려들에게 요구하였다. 그 뒤 깔링가(K?li?ga)의 막가(M?gha, 1214-1235) 왕의 통치시기에 불교는 완전히 멸망하여 승가의 계맥이 끊어졌다. 이때 뽈론나루와 시대도 끝났다.43) 

 

위자야바후 3(Vijayab?hu , 1232-1236) 왕의 통치시기에 담바데니야(Dambadeniya)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작은 규모로나마 불교와 승가의 생명을 되살렸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빠라끄라마바후 2(Par?kramab?hu , 1236-1271) 왕의 통치시기에 큰 규모로 승가를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승가를 정화하여 승가에서 추방된 자들이 다시 승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승가 내부의 성직 계급제도의 조직이 절정에 달하였다.44)

 

부와나이까바후 4(Bhuvanaikab?hu , 1302-1346) 왕의 치세기간에 수도를 간가시리뿌라(Gangasiripura, 지금의 Gampola)로 옮겼다. 아란야와사(Ara??av?sa) 승려들에 의해 가달라데니야(Gadal?deniya)에 불교의 본부를 세웠다. 다르마끼르띠(Dharmak?rti) 대승정의 지도 아래 세 개의 부파를 정화하였다. 이때 아란냐와사 승려들에 의해 시암(Siam, 지금의 태국)에 싱할라 승가를 설립하였다.45)

 

꼿떼(Kotte)의 빠라끄라마바후 6(Par?kramab?hu , 1410-1468) 왕의 치세기간은 불교와 승가의 마지막 영광의 단계였다. 이 왕은 승가를 정화하고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시기의 꼿떼 주변과 섬의 남쪽 사찰은 배움의 학문적 중심지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 뒤 부와나이까바후 6(Bhuvanaikab?hu , 1473-1480) 왕의 통치시기에 미얀마의 담마쩨띠(Dhammaceti) 왕이 미얀마 승려들을 스리랑카로 파견하였다. 이 승려들은 ?라니야(Kelaniya)에서 구족계를 받고 미얀마로 돌아가 깔라니 시마(Kaly?ni s?m?)를 설립하였다.46)

 

1505년 포르투갈이 스리랑카에 침입하였다. 그때부터 불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Vimaladharmas?riya , 1592-1604) 왕의 통치시기에 락캉가(Rakkha?ga, 현대의 Arakan)로부터 구족계의 계맥을 되살렸다.47) 아라칸(Arakan)은 지금의 미얀마에 있던 나라였다. 그리고 위말라다르마수리야 2(Vimaladharmas?riya , 1687-1707) 왕의 치세기간에 또다시 아라칸으로부터 구족계의 계맥을 되살렸다. 그러나 이러한 복구도 오래가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그 후 끼르띠 쓰리 라자싱하(K?rti ?r? R?jasi?gha, 1747-1782) 왕의 치세기간인 1753년 웰리위따 사라낭까라(Velivi?a Sara?a?kara, 1698-1778) 스님의 주도로 태국의 우빨리(Up?li) 장로가 스리랑카의 캔디를 방문하여 다시 한 번 스리랑카에 불교승단을 복구시켰다.48) 이때 복구한 부파를 우빨리 장로는 자기 모국의 이름을 따서 시암모빨리 마하니까야(Sy?mop?li Mah?nik?ya)’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 이름은 시암 우빨리 계보(Siam Up?li lineage)’ 혹은 간단히 시암 니까야(Siam Nik?ya)’라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스리랑카에서 전승해 오던 대사파의 전통이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시암 니까야는 아스기리야(Asgiriya)와 말왓따(Malwatta) 사원에 각각 아란냐와사(Ara??av?sa, 山林 거주자)와 가마와사(G?mav?sa, 마을 거주자)의 전통을 되살렸다. 그리고 예전의 성직 계급제도를 되살렸다. 웰리위따 사라낭까라(Velivi?a Sara?a?kara) 스님은 승왕(Sa?ghar?ja)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끼르띠 쓰리 라자싱하 왕의 통치기간에 다시 한 번 상좌부 전통의 계맥을 되살렸다. 왕은 동생 라자디 라자싱하(R?jadhi R?jasi?gha, 1782-1798)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라자디 라자싱하 왕은 그의 조카였던 쓰리 위끄라마 라자싱하(?r? Vikrama R?jasi?gha, 1798-1815)에게 왕위를 인계하였다. 이 왕이 비운의 스리랑카의 마지막 왕이었다.49)

 

그 이전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침략을 받았지만, 그래도 싱할라 왕조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15년 영국의 군대가 수도 캔디를 공격했을 때, 싱할라 왕이 체포되었다. 181532일 캔디 왕조의 대표자들과 스님들로 구성된 식민지 의회에서 왕의 통치권을 영국 왕실로 넘긴다는 식민 조약(일명 캔디 협약)에 서명하고 폐위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486년 위자야(Vijaya)가 왕위에 오른 이래 그들의 나라와 불교에 영광과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2301년 동안 이어져 왔던 스리랑카의 불교 왕조가 끝나게 되었다.50)

 

그런데 처음 캔디 왕조와 영국 간의 조약을 체결할 때, 왕권을 영국에 넘겨주되 영국은 불교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즉 불교의 관습과 의례를 존중하여 그에 대해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불교를 박해하였다. 그 반발로 싱할라 민족주의적 자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자각은 불교부흥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스리랑카의 불교부흥운동은 1873년 모홋띠왔떼 구나난다(Moho??ivatt? Gu??nanda, 1823-1890) 장로가 빠나둘라(Panadula) 대토론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불교도들은 자신감과 활력을 갖게 되었다. 51)

 

그 무렵 우연히 스리랑카를 방문했던 미국인이 이 토론에서 크게 감명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 토론의 진행 상황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헬리 스텔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 32-1907) 대령은 이 토론의 보고서를 읽고, 1880년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 1831-1891) 여사와 함께 직접 스리랑카로 건너왔다. 그가 불교를 공부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스리랑카 불교도들의 정신 앙양을 위해 헌신하였다.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올코트의 영향을 받아 불교민족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52)

 

한편 1880년 올코트 대령과 블라바츠키 여사가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Anag?rika Dharmap?la, 1864-1933)는 당시 16세였다. 그는 자연적으로 그와 친분이 있던 구나난다 장로를 통해 두 외국인을 크게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그는 20세에 출가하여 스리랑카와 인도불교를 부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53) 현재의 스리랑카 승가는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가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흥망성쇠의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Notes:

1) Dpv. vii, 18, 19; xii, 39-54; Mhv. v, 195; xiii, xiv.

2) Walpola Rahula, History of Buddhism in Ceylon (=HBC), Third Edition, (Dehiwala: The Buddhist Cultural Centre, 1993), p.48.

3) Gunaratne Panabokke, History of the Buddhist Sangha in India and Sri Lanka (=HBSIS), (Kelaniya: The 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 University of Kelaniya, Sri Lanka, 1993), p.71.

4) Walpola Rahula, HBC, p.48.

5) Dpv. xii, 54; Mhv. xiv, 23.

6) Mhv. xiv, 53.

7) Mhv. xv, 8.

8) W. Rahula, HBC, p.52.

9) Mhv. xxi, 7.

10) W. Rahula, HBC, pp.78-79.

11) W. Rahula, HBC, p.79.

12) Mhv. xxv, 1.

13) 그러나 월폴라 라훌라의 이러한 해석은 『Mah?va?sa(大史)』의 잘못된 번역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Dhammavihari, "Recording, Translating and Interpreting Sri Lankan Chronicle Date", 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 10(2003), pp.101-116 참조.

14) W. Rahula, HBC, p.80.

15) Mhv. xxxiii, 37-42.

16) W. Rahula, HBC, p.81.

17) Mhv. xxxiii, 100-101; Dpv. xx, 45.

18) W. Rahula, HBC, p.82. 

19) W. Rahula, HBC, p.82.

20) W. Rahula, HBC, p.83.

21) Mhv. xxxiii, 82.

22) Nks. p.10; W. Rahula, HBC, p.84에서 재인용.

23) W. Rahula, HBC, pp.84-85.

24) W. Rahula, HBC, p.92.

25)  Mhv. xxxvi, 110-112; Nks. p.11.

26) Mhv. xxxvi, 113-117; xxxvii, 1-2; Nks. pp.11-12.

27) Mhv. xxxvii, 3-16; xxxviii, 75; Nks. pp.12-13; W. Rahula, HBC, p.94.

28) Mhv. xxxvii, 17-35; W. Rahula, HBC, p.94.

29) Mhv. xxxvii, 26-30; Nks. p.13; W. Rahula, HBC, p.95.

30) W. Rahula, HBC, p.95.

31) G. Panabokke, HBSIS, p.231.

32) Mhv. xxxvii, 38-39; W. Rahula, HBC, p.95.

33) W. Rahula, HBC, p.96.

34) W. Rahula, HBC, p.98.

35) Mhv. xxxvii, 243-244.

36) W. Rahula, HBC, p.102.

37) Nks. p.15; W. Rahula, HBC, p.103에서 재인용.

38) W. Rahula, HBC, p.104.

39) Mhv. xliv, 75-80; W. Rahula, HBC, p.105.

40) G. Panabokke, HIBIS, p.232.

41) W. Rahula, HBC, p.106.

42) G. Panabokke, HBSIS, p.232.

43) G. Panabokke, HIBIS, p.233.

44) G. Panabokke, HIBIS, p.234.

45) G. Panabokke, HIBIS, p.234.

46) G. Panabokke, HIBIS, p.234.

47) G. Panabokke, HIBIS, p.235.

48) Cv. xciv. 15.

49) http://en.wikipedia.org/wiki/Siam_Nikaya (2012215일 검색).

50) H. R. Perera, Buddhism in Sri Lanka: A Short History,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88), p.71; Kitsiri Malalagoda, Buddhism in Sinhalese Society 1750-1900: A Study of Religious Revival and Chang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6), p.78.

51) H. R. Perera, ibid., p.72.

52) Ibid., pp.77-79.

53) Ibid., pp.79-83.

54) Ibid., pp.8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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