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 김춘추의 꿈
신라의 삼국통일 주역으로 김유신 장군과 함께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이 트리오로 손꼽히고 있다. 신라 외교사절의 대표적인 인물로 역할을 하던 김춘추가 김유신이라는 절친을 만나 꿈에도 그리던 왕좌에 오르면서 통일의 기반을 닦는 주춧돌이 됐다.
또 무열왕의 아들로 그 아버지의 뜻을 쫒아 전장을 누비던 문무왕이 2대에 걸쳐 신라군의 사령관직을 담당한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호국용왕이 됐다.
김유신 장군과 무열왕, 문무왕은 경주 남산 뿌리에 설립된 통일전에 삼국통일을 이룩한 개국공신으로 나란히 영정이 모셔져 있다. 통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통일전을 벽처럼 에워 싼 갤러리에 전시돼 후손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다. 신라삼국통일기념비와 함께 통일전 앞에 그들의 사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들 개국공신의 흔적은 경주 전역에 흩어져 있다.
지난 호 김유신 장군의 흔적에 이어 무열왕 김춘추가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역사적인 흔적을 더듬어 살펴본다.
❚김춘추의 외교술
선덕여왕에 이어 신라 두 번째 여왕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무렵 신라는 여전히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받는 힘 약한 나라였다. 백제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빠진 신라는 김춘추를 당나라로 파견했다. 당나라 태종은 김춘추의 늠름한 모습과 영특함에 호감을 가지고 극진히 대접했다.
당 태종의 신뢰를 얻은 김춘추는 백제가 자주 쳐들어와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하는 길을 방해한다며 군사를 내어 백제를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김춘추는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준다면 신라 대신들은 당나라의 예법에 맞게 의복을 갖춰 입고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다짐해 태종의 환심을 샀다. 당 태종은 김춘추의 말을 듣고 군사를 지원해 백제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신라는 다음해부터 중국식 의관을 착용하고 ‘태화’라는 신라 연호 대신 중국의 연호 ‘영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춘추는 자신의 아들을 당나라에 볼모로 남겨두고 왔다. 또 김춘추가 그의 아들 ‘법민’을 사신으로 삼아 당나라로 보내면서 당나라를 떠받드는 ‘태평가’를 지어 바치도록 했다.
‘큰 당나라가 세워지니 위대한 왕의 뜻이 뻗어 나가네/ 전쟁이 끝나 온 세상이 평화롭고 문화가 발전하여 여러 임금이 뒤를 이었네/ 중략/ 옛 5제 3황의 덕이 하나로 이루어지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해주리’
태평가는 당나라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얻어야 하는 절박한 입장을 고스란히 드러낸 장면이다.
신라가 이민족 당나라와 손을 잡고 같은 민족 백제와 고구려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하면서 통일의 길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사관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의 이어지는 침략으로 멸망의 길을 걷기보다 당나라의 힘을 빌어서라도 나라를 지켜내고 끝내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김춘추의 외교술과 전략은 비판적인 사고로만 볼 일은 아니라는 분석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무열대왕기념비
김춘추는 풍채가 남다르게 늠름하고 재치가 있으며 문무에 뛰어났다. 김춘추는 신라의 영토를 넓혔던 24대 진흥왕의 아들 25대 진지왕의 손자이다. 진지왕은 국정에 소홀하며 여인을 좋아하다 왕위에서 쫓겨난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화랑 풍월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돼 나라에 충성을 하던 아버지 용춘의 뒤를 이어 김춘추는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왕권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김유신을 사귀면서 정권에 대한 욕망을 키웠다.
김춘추는 김유신과의 인연을 돈독히 하기 위해 정략적인 결혼정책을 추진했다. 김유신의 동생과 결혼을 해서 낳은 그의 딸을 환갑줄에 든 김유신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대까지 연이은 여왕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김춘추는 뛰어난 지략으로 국력을 키우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대시켜 결국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김유신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열왕은 신라 제29대 왕으로 52세에 즉위해 8년간 재위하다 59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를 공격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백제 의자왕은 영웅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해동의 ‘증자’로 불릴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두터웠다. 그러나 왕좌에 오르면서 자만심에 빠져 술과 여자를 즐기면서 정치에 소홀해 결국 삼천궁녀와 함께 백마강의 원귀가 됐고, 김유신과 김춘추의 이름을 높게 하면서 백제 마지막 왕이라는 슬픈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무열왕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백성이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 다리가 여덟인 돼지를 바치며 “이 돼지는 여섯을 하나로 합하게 될 징조”라고 아뢰었다고 전한다. 결국 무열왕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하자 묘호를 ‘태종’이라 부르며 통일전에는 태종무열대왕의 영전을 모시고 있다.
무열왕릉은 경주 북서쪽 선도산의 발뿌리 부분에 비교적 큰 규모의 고분으로 고목에 둘러싸여 있다. 사적 제2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좌측에 ‘태종 무열왕릉비’가 국보 제25호로 지정돼 비각을 지어 관리되고 있다.
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비문이 드러나면서 무열왕의 능이라는 사실이 정확하게 알려지게 됐다. 이 비는 거북이 고개를 들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의 받침돌에 몸돌은 없어지고,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용이 새겨진 머릿돌이 남아 있다.
무열왕릉비는 사실적인 표현과 생동감 넘치는 조각이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현대에서도 예술작품성이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무열왕 김춘추는 삼국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진골 출신으로 최초의 왕이 되어 왕좌에서 쫓겨나야 했던 할아버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면서 땀으로 꿈을 이룬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비석도 불후의 작품으로 남아 김춘추의 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있다.
❚화랑들의 전쟁
신라 화랑들의 무용담과 사랑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비롯해 많은 역사서에 기록되고 있다. 무열왕이 김유신 장군을 상장군으로 내세워 백제 토벌에 나선 전쟁에서 화랑들의 활약은 교과서에 기록되고 영화로 제작 상영되는 등 당시 전쟁은 물론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황산벌전투에서의 화랑 관창의 계백장군과의 싸움은 유명한 일화로 두고두고 이야기 거리로 전해진다. 화랑정신이 신라 삼국통일의 기본정신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교육되고 있을 정도이다.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가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였고, 김유신 장군 또한 김춘추와 함께 화랑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다.
신라 화랑들의 이야기는 ‘화랑세기’라는 역사서에서 기록된 내용에서 발췌된 것이 대부분이다. 화랑세기는 역사라는 이야기와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논쟁과 저자 또한 김대문이다, 아니다 등의 다툼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여성 낭도들로 시작해 남자 화랑으로 바뀌었고, 위화랑에서 시작해 미진부공, 모랑, 이화랑, 사다함 등으로 전해지면서 김춘추의 아버지 13세 용춘공, 15세 유신공, 18세 춘추공 등으로 이어진다. 19세 화랑의 우두머리는 김유신의 동생으로 ‘흠순공’이다.
화랑세기는 흠순공에 대해 “공은 여러 차례 대전을 거쳤으나 패한 일이 없고 시졸을 사랑하기를 어린아이와 같이 했다”며 “유신의 동생이고 보리의 사위다.
하늘을 뒤집는 큰 공은 좋은 짝을 얻는데서 비롯됐다. 오직 공의 덕은 만세에 이르리라”며 칭송하고 있다.
❚사천왕사와 망덕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비롯한 많은 역사서적과 보고서들이 사천왕사와 망덕사 앞에 호국사찰이라는 전치사를 쓰고 있다. 사천왕사는 남산의 맞은 편 낭산, 선덕여왕릉 진입로에 위치해 있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진행하는 7번국도변에 연접해 있어 승용차로 진행하면서 쉽게 ‘사천왕사지’ 유적을 소개하는 입간판을 볼 수 있다.
신라 679년에 당나라가 침입해 오자 사천왕사를 지어 문두루비법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이 소문이 당나라로 전해지자 신라는 당나라 왕실을 위해 사천왕사를 지었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신라는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보이지 않기 위해 남산방향에 망덕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망덕사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경덕왕 14년 755년에 중국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망덕사의 탑이 흔들렸다는데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니 마땅히 그럴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망덕사에서 제를 올릴 때 효소왕이 비루하게 생긴 중에게 “임금과 함께 공양했다고 남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자 “임금도 진신석가와 친히 공양했다고 남들에게 말하지 말라”면서 남산쪽으로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는 7번국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망덕사지는 사적 제7호, 사천왕사지는 사적 제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망덕사의 당간지주는 특이한 형식으로 보물 제69호로 지정됐다.
사천왕사지에는 통일신라 이전의 사찰 형식과 다르게 최초의 쌍탑가람형식으로 중요한 사적자료가 되고 있는 등 많은 공부거리가 있어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도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