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눈을 떠야 눈부심을 아는 것처럼
글 김은경(시인·약사·제3회 인천시장애인문학공모전 대상수상자)
참으로 긴 빗줄기였다. 눈을 감을 때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눈을 떴을 때도 비가 내리는 나날이었다. 처음에는 아침에 우산 하나 챙기면 될 일로만 생각했다. 해가 뜨면 그만일 일로 생각했다. 하루 이틀 비는 이어지고 밤에 비가 들이쳐 이불이 젖을 염려에 창문마저 닫고 자는 날이 늘어났다. 비가 내리는 것을 우리가 어쩌지는 못할 일이었다. 그러다가 하루해라도 뜰 날이면 못다 말린 옷가지와 이불들을 담장마다 빼곡하게 걸쳐 소독하였다. 그날 밤 우리들은 하얀 아기 면기저귀 같은 이불에서 종알거리며 뒹굴다 잠이 들었다. 이제 긴 비는 그치고 하늘은 스스로 파랗고 찬란하다.
우리 집엔 네 명의 남자아이들이 산다. 저녁 무렵 현관은 어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둘 자리가 안 보일 정도로 색색의 신발들로 빼곡하다가 아침이 되면 썰물 빠져나간 작은 개펄처럼 허전해진다. “다녀왔습니다.” 와 “다녀오겠습니다.”가 파도처럼 드나드는 문으로 아이들은 하루하루의 이야기와 학교숙제와 기쁨과 아픔과 희망과 의논들을 함께 묻혀 들어와 수도 없이 쏟아놓는다. 수능대비 문제집부터 아기 기저귀까지 택배로 배달되는 우리 집에 밤이 오면 장애진단을 받은 세 명과, 건강한 세 명의 식구들이 섞여 깊은 잠에 든다.
남편은 분리되는 것보다 어울림을 좋아한다. 초대형 모기장을 사서 그 안에서 함께 자자는 남편의 말을 따라 우리는 제일 큰 모기장을 구해 거실을 뺑뺑 둘러 끈을 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여섯 명이 들어가는데, 아기는 굴러나가지 않도록 가운데에 눕힌다. 자다가 발차기를 한다고 의심받는 큰 아이와 셋째 아이는 아기와 멀리 떨어지게 가장자리로 가야한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아기 곁에서 잠이 들면 아침에 젖은 이불에서 자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후 모기장 안에서 일어나 앉아 가만히 바라보면 민박집에 와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재작년 초여름, 막내가 엄마 뱃속에 있다는 소식을 세 아이들에게 알려야 했다. 먼저 아이들을 배불리 먹여놓고 알리기로 남편과 합의를 하고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으로 모두 불러 모았다. 아기소식을 들은 세 명의 남자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약 떨어진 인형처럼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몇 초 후, “엄마가 몇 살인데 애기를 낳아?” 하는 큰 아이와, “걔가 어떻게 엄마 뱃속에 들어갔어요?” 하는 볼멘 둘째의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 열 살 먹은 셋째는 “엄마 아기 지금 어디 있어?” 하고 눈을 반짝였다. 놀게 당장 데려오라는 말이었다.
이제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기를 함께 돌본다. 기저귀를 갈고, 옷을 꺼내다 입히고, 우유를 먹이고, 책을 읽어준다. 오늘 아침엔 그 아기가 깨어나 형아들이 학교 가는 소리에 문을 열고 혼자서 ‘빠빠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 모습에 모두 좋아서 박수를 쳤다. 이유도 모르고 아기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같이 따라 손뼉을 쳤다.
나에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장애가 깃들어 있다. 1세대에서 발생한 유전자 상의 장애가 2세대에서도 나타날 가능성은 짐작할 수가 없다. 둘째 아이에게 장애가 유전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정장을 입고 조용히 앉아있던 나는 아이의 엑스레이 사진이 걸린 서울대병원 정형외과에서 온 몸의 혈관을 한 번에 터트리며 무너졌다. 내게 장애를 허락하신 부모님이 그 모습을 보고 계셨고, 둘째는 유모차 안에서 한없이 예쁜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또 다른 삶이 반복된다는 생각이 축축한 버섯처럼 온 몸 구석구석 돋아 올랐다. 하지만 그 예쁜 눈의 아이는 언제나 엄마를 기다렸고, 그러는 사이 아이와 나 사이에는 내가 어린 시절 부모님과 가졌던 유대감보다 더욱 밀도 높은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제가 좋아하는 엄마와 같은 몸을 가져서일까. 그래서일까. 아이는 엄마인 나보다 세상을 덜 무서워했으며 나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나이 무렵의 내가 세상으로부터 혼자 맞아야 했던 공포는 아이에게는 분명히 덜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은 오히려 엄마를 변화시켰다. 아이가 옆에 있을 때 나는 장애라는 화살을 더욱 보란 듯이 처리하기로 하였다. 부모로부터 보호받는 장애가 아니라, 스스로 장애를 처리하는 방법을 아이가 배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들을 직시하고 인정하며 뚫고 나가라고 강하게 주문하며 끝없이 기다려 준 남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강한 몸을 가진 남편은 세상의 모든 건강한 이들이 40년이 넘도록 던져준 아픔을 통 털어 혼자 막고 서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넷째를 가졌을 때 우려하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남편은 일언지하로 “우리는 아기 낳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넷째의 걸음마가 늦어질 때 우리 부부는 아기의 장애를 알게 되었지만 늦었을지라도 아기가 첫 발을 떼었을 때 남편과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의 장애를 알았을 때 부모의 역할은 국가보다도 중요하다. 얼마큼을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보지 않은 장애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아이의 실제 중심에 적중하기가 어려울 터이다. 부모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물어보고 참어라 강요하며 때로는 어떻게든 그 삶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부모의 모습을 어떻게든 보아야 하는 아이를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가슴에 반발이 없을 거란 단정도 하면 안 된다. 부모는 장애라는 과녁에 날아온 화살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가상의 고통을 겪는다. 그 고통을 그렇게라도 ‘짐작’하며 ‘이해’하고자 한다는 설명은 아이에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가상은 어떤 의미로든 실제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해가 세상을 견뎌내도록 완전히 도와주지는 못한다. 먼저 그 고통을 스스로 해석하고 뛰어넘어 제 자리를 찾아 세상에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호통 쳐 주는 것이 어쩌면 더 고마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눈을 떠야 비로소 눈부심을 배운다. 찬란함을 부러워하기 전에 먼저 눈을 뜨고 문을 열어 빛을 향해 발을 내딛을 용기가 우리에겐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릴수록 우리는 희망의 힘을 믿는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우리 네 명의 아들들도 이렇게 자라나 세상의 감추어진 구석들에게 촛불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닫힌 문마다 하나씩 열어 기꺼이 손 내밀어 함께 달려주길 바래보는 나는 이제 나무 같은 엄마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