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 100권, 성종 10년 1월 1일 무오 1번째 기사 1479년
밀성군 이침의 졸기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 ·예장(禮葬)하기를 전례(前例)와 같이 하였다. 이침(李琛)의 자(字)는 문지(文之)이니, 세종(世宗)의 후궁(後宮) 신빈(愼嬪) 김씨(金氏)가 낳았는데, 정통(正統) 병진년에 나이 7세(歲)에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해졌다. 세조(世祖)가 그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며 우애(友愛)가 가장 돈독함을 가상히 여겨서 금병(禁兵)을 맡게 하였으며, 예종조(睿宗朝)에 남이(南怡)가 반란을 모의하다가 복주(伏誅)되자, 책훈(策勳)하여 수충보사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의 칭호[號]를 내려 주었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여서는 또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었고,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0세이다. 부음(訃音)을 알리자, 임금이 심히 애도(哀悼)하여 철선(輟膳)하고, 시호(諡號)를 장효(章孝)라 하였는데, 온순하고 겸손하여 위엄이 있음[溫克令儀]이 장(章)이요,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김[慈惠愛親]이 효(孝)이다. 침(琛)은 타고난 성품이 현명하고 민첩하며 몸가짐이 단중(端重)하여 집에 희첩(姬妾)을 두지 않고, 삼가 법도(法度)를 지켰으므로, 역대 임금[列聖]의 특별히 사랑함이 쇠하지 않았고, 항상 사옹원(司饔院)·문소전(文昭殿)·종부시 제조(宗簿寺 提調)가 되었다. 아들 이계(李誡)는 운산군(雲山君)이요, 이당(李譡)은 춘성군(春城君)이며, 이당(李𧭢)은 수안군(遂安君)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침(李琛)은 현명하고 분명하여 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어, 세조(世祖)가 재능과 덕량이 있다고 여겼다. 모든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명하여 종실(宗室) 속에 임하게 하여 가장 위임(委任)을 받았으며, 치산(治産)하는 데 부지런하여 가산(家産)이 아주 부유하였다." 하였다.
▶ 졸기(卒記)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
▶ 철조(輟朝) 국상(國喪)을 당하거나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혹은 재앙이 있을 때 임시로 조회(朝會)를 정지하던 일. 정조(停朝).
▶ 정통(正統)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남이(南怡) 1441(세종 23)∼1468(예종 즉위년). 조선 전기의 무신. 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할머니는 정선공주(貞善 公主: 태종의 4녀)이다.
▶ 복주(伏誅)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 또는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게 함
▶ 철선(輟膳) 수라를 거둠
▶ 사옹원(司饔院)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 문소전(文昭殿)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사당.
▶ 종부시(宗簿寺) 종부시는 종친간의 친목을 꾀하고 비위를 규찰하며, 10년에 한 번씩『선원록』을 수찬하고 3년마다 종실보첩을 작성하였음. 또 왕자·왕녀의 혼가(婚嫁) 때 이를 갖춰 준비하는 일도 주관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