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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월드 계간평>
시조, 그 새로운 지평
宇玄 김민정 <시조시인, 문학박사>
2006년은 현대시조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여 시조단체에서 많은 행사들을 했다. 그러한 모든 행사가 앞으로 시조문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모든 시조시인들에게,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단 한 번의 기념행사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시조시인이 먼저 각성하고, 국민들이 시조가 우리의 진정한 전통문학이고, 시조가 우리시임을 인정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시조시인들은 작품창작을 활발히 하고, 작품수준을 높이며,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독자들이 많이 접하고, 읽고, 느끼고, 창작할 수 있게 분위기, 즉 독자가 동참함 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한다. 이론만으로, 말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이론에 따르는 실제적인 행동이 있어야만 가치는 비로소 창출되는 것이다.
좋은 시조를 쓰기란 시 쓰기보다 어렵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조로서의 속성과 시로서의 속성을 동시에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시와의 변별성도 지니면서 자유시를 능가하는 수준의 전통시를 써야한다는 것에 시조 쓰기의 어려움이 있다.
『시조월드』2006년 상반기호와 하반기호에도 많은 논단과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그 발표된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하반기호에는 김호길의 자선 대표작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한 편을 골라보았다.
내 영혼의 수풀 속에 딱따구리 한 마리 산다
피로와 나태가 감겨
혼곤해진 순간이면
딱,
딱,
딱,
부리로 쪼아
번쩍
불침을 놓는다 (김호길「딱따구리」전문, 『시조월드』 2006년 하반기호)
김호길의 시조집 '절정의 꽃'을 읽으면서 국방일보에 소개하고 싶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몇 편 골라보았는데, 그 중에 한 편이 이 작품이었다. 이 작품 외에도 몇 편 골라놓았다가, 미처 소개를 못하고 말았는데 『시조월드』 2006년 하반기호에서 다시 이 작품을 보게 되어 반가왔다. 역시 얼른 눈에 들어왔다. 좋은 작품이란 언제, 누가 읽어도 공감이 가고 좋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읽고 느꼈던 대로 '좋다'는 느낌이 그대로 살아났으니 말이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앉아 나무를 쪼듯 내 영혼이 '피로와 나태가 감겨 혼곤해진 순간이면' 딱따구리처럼 영혼을 쪼는 것은 늘 깨어있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항상 깨어있기를 바라는 정신 때문에, 생활에서의 긴장과 시적 긴장을 둘 다 늦추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이 이 짧은 단시조 한 작품 속에 그대로 살아난다. 그리고 행배열도 재미있게 하고 있다. '딱,/딱,/딱'으로 처리된 종장의 행갈이는 청각적 시어에다가 시각적 배열의 효과를 확보한 품격 높은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이용되고 있는데, 모든 작품에 이러한 배행법이 맞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이미지가 적절하게 잘 살아나고 있어 내용의 신선함과 함께 작품 배열 또한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래의 작품은 24인 신작특집에 실려있는 이승은의 「마른 추억」이란 작품이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많든 적든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과거 속에는 아름다운 추억도 있고, 싫은 추억도 있을 것이다.
그 때 못다 한 말 몇 마디는 끝내 남아
빗속에 바람 속에 꽃물로나 번지더니
씨방에 밑씨 보듬듯 잠시 머문 스물한 살.
참았다 터뜨린 울음, 그렇게 가을은 와서
물드는 잎새마다 잠귀를 열어 놓고
성깃한 가지 사이로 그렁그렁 별이 뜬다.
속절없이 차려 놓은 저 가을의 제물이여
다 못 지운 바람벽의 녹슨 못자국이여
서둘러 꽃잎 받느라 잠시 환한 손바닥이여.
(이승은, 「마른 추억」전문, 『시조월드』 2006년 하반기호)
세 수로 된 연시조인데, 이 작 품의 화자는 막연한 기억이 아니라 스물 한 살 아름답게 물오른 처녀시절의 추억을 말하고자 한다. 그 때 말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빗속에 바람 속에 꽃물'로 번질 수 있는 아름다운 말은 무엇이었을까.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을까. 이렇게 첫째 수에서는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충분히 남겨두고 있어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둘째 수에 오면 그리움이 나타난다. ‘참았다 터뜨린 울음’이란 탁월한 감각적 언어를 사용하여 붉게 물든 가을을 표현하고 있으며, 붉게 물드는 그 가을에 성깃한 가지 사이로 별처럼 그리움이 그렁그렁 뜨는 것이다. 스물 한 살 때 못 해준 말, 그것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그 때의 사람에 대한, 그 때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을이라 아름답게 느껴진 추억도 어쩌면 아직도 '다 못 지운 바람벽의 녹슨 못자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픔의 못자국이라 한들 지나간 추억은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꽃잎 받느라 잠시 환한 손바닥'이 되는 것이다. 옛날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모습이 종장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 작품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게 한다. 특히 셋째 수 안에는 가을에 느끼는 아름다운 추억과 그 추억들에 대한 상처와 그 모든 것을 감싸안아 환한 추억으로 만드는 그리움이 함께 들어 있어 짧은 시 속에 많은 내용과 짙은 서정성이 담겨 있는 좋은 작품이다. 특히 ‘말 몇 마디/꽃물로나 번지더니, 씨방에 밑씨 보듬듯, 참았다 터뜨린 울음, 물드는 잎새마다 잠귀를 열어 놓고, 서둘러 꽃잎 받느라 잠시 환환 손바닥이여‘ 등 뛰어난 감각적 비유들이 이 작품을 살리고 있다.
물수리에 낚아 채인 숭어 훨훨 날아간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채 날아간다.
生死가 한 몸이 되어 기막히게 날아간다.
인간마을 처마 끝에 저런 木魚 많을 거다.
물수리 벼락치듯 꽂힐 때를 기다리는
딱 한번 飛魚가 되어 훨훨 날고 싶어지는.
(한혜영,「날아가는 숭어」전문, 『시조월드』 2006년 하반기호)
그런가 하면 한혜영은 「날아가는 숭어」라는 작품에서 시적 상상력과 사고력을 마음껏 구사하고 있다. 말라르메의 말처럼 "시는 체험과 상상력의 영역이요 사고의 영역이다"라는 말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났다. 인간의 끊임없는 사고 속에서 시는 탄생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깊은 사유의 천착으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물수리에 채어 날아가는 숭어를 보고 숭어가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것으로 화자는 상상한다. 더구나 '生死가 한 몸이 되어 기막히게 날아간다'고 한다. 물수리와 숭어를 보면서 죽음과 삶의 동반이 의외로 다정해 보인다고 한다. 숭어가 아직 숨을 쉬며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죽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이다. 또 숭어 평생의 소원이었을 비행을 마침내 이루어 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과연 숭어는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을까 궁금해진다. 첫째 수에서는 시각적 감각을 표현하였다면 둘째 수에서는 내면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수에 오면 인간마을에 존재하는, 木魚로 상상이 옮겨진다. 차라리 물수리에 벼락치듯 채여 꽂히더라도 비어가 되어 날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어차피 목어라면 살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하늘을 나는 물고기 또한 상상속의 모습일 뿐이고, 스스로는 결코 날지 못하는 현실이라, 그리하여 비어이기를 꿈꾸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포기한 다음에야, 자기의 목숨을 저당 잡힌 다음에야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헛된 허영심, 헛된 욕망을 경계하는 화자를 만날 수 있다.
필부필녀 허기 채우는 든든한 국밥그릇
고려청자 조선백자 부러워할 일없네
제 모습 후회 않으니
막치소반에 얹힌들
(서연정, 「뚝배기」 전문, 『시조월드』 2006년 하반기호)
작품을 읽으면 어떤 작품은 진솔성이 느껴지고, 어떤 작품은 처음 읽을 때는 그럴 듯하다가도 두 번 정도 반복해 읽어보면 진솔성 없이 말장난만 했구나 하는 느낌, 속은 느낌이 든다. 두 말할 나위없이 기교가 없더라도 사람들은 진솔한 작품을 더 좋아한다. 서연정의 아래 「뚝배기」를 읽으면 졸박미가 느껴진다. 제목 자체도 「뚝배기」라 소박한 서민의 정서가 사람들의 감성에 와 닿게 된다. 특별한 기교가 없다. 수사법도 없다.
대교약졸(大巧若拙: 큰 기교는 오히려 졸박과 같다. 이것은 곧 졸박미는 그 자체가 커다란 기교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강호가도의 시조에서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 바로 졸박미이다. 고려청자, 조선백자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릇은 쓰임새가 다르고, 그 쓰임새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구태여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부러워할 일이 없다.
제 분수, 제 만족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제 분수를 알고 그것에 만족하면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기분수에 맞는 것을 아름답게 보아줄 수 있는 눈을 갖는 것도 또한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조 독자의 저변확대를 위해서는 진솔성 있는 작품이 많이 창작되어야 할 것이다.
겨울은 산새들을 허기지게 하지만
사람들은 새소리에 허기를 채운다
마른 꽃 맑은 향내로 빈 들녘을 채운다 (김경자, 겨울새, 시조월드 상반기호)
계절적, 향토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정감의 작품이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도 하는 작품이다. 계절인 겨울은 산새들을 허기지게 한다. 산과 들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이면 먹을 것들을 쌓아놓지도 않고, 준비해 놓지도 않은 산새들은 먹이를 찾지 못해 사람들의 마을로 내려오기도 하고, 눈 덮인 나무열매를 뒤적여 찾아 연명하기도 하지만, 추위와 굶주림에 떨다가 굶어죽기도 한다. 그러한 겨울에도 사람들은 산새소리를 들으며 허기를 채운다고 한다. 초장과 중장은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 공복을 채운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한 산새소리가 빈 들녘을 채우는 ‘마른 꽃 맑은 향내’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인간은 자연에게 베푸는 것은 없으면서 자연에게 받는 것만 많은 것이다. 자연을 보호하여야 그 자연이 다시 인간에게 베풀 것인데, 산새들이 살 공간, 산짐승들이 살 공간을 인간은 자꾸 파괴해 가는 것이다. 새소리조차 사라진 산과 들은 얼마나 삭막하랴. 겨울이면 그들에게 먹이라도 놓아주고 그들을 열심히 보호하는 것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기쁨을 얻는 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집을 짓더라도 축사는 짓지 말게, 소 돼지 똥오줌이 오염의 주범일세
결국은 바로 니 입에 똥오줌이 들어가
니 지금 뭐라켔노, 축사를 짓지 말어?
그 무슨 잠꼬대고, 집 한 채 지어놓고 그 속에 들어가 살면 그게 축사 아이가
님,
선생 하고 '님'자를 한 옥타브 높이거나 선생님!,하고 '님'자에 '!'를 붙이지마
이유도 묻지 말아줘, 지금 여기
축사야
(이종문, 「축사에 앉아서」전문, 『시조월드』 2006년 상반기호)
이 작품은 다른 이종문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조라는 개념의 형식적인 면에서 많이 일탈되어 있다. ‘이 작품은 시조’라는 관념 하에 읽어보면 세 수 짜리 평시조가 모인 연시조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지만, 이 작품이 만약 다른 자유시 작품과 섞여 있다면 시조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늘 형식과 내용면에서 실험 정신이 강한 이종문의 작품을 읽으면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시조의 형식면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가 평시조라고 정의되지만, 위의 작품에선 장구별도, 구구별도, 음보구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이어쓰기를 하고 있어 의미상의 단락으로 구분해 가면서 읽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수에서는 축사를 지어 가축을 기르고, 그 똥오줌으로 하여 우리의 환경이 훼손되고, 오염되고 있다는 화자의 생각, 그래서 축사를 짓지 말라고 훈계하지만, 둘째 수에서는 그것을 듣는 상대방 화자가, 집 한 채 지어놓고 그 속에 인간이 들어가 살면 축사가 된다는 말로, 곧 인간도 동물과 다를 게 하나 없다는 식으로 맞받는다. 즉 첫째 수와 둘째 수에서 작품의 화자가 다르며, 두 사람의 대화체로 구성되어있는 시조이다. 이 작품은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사설시조에서 보여주는 ‘재미와 재기발랄함’등도 보여준다. 셋째 수에 오면 다시 첫째 수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인간이 별로 존경스러울 게 없고 축사에 사는 동물이나 마찬가지니, ‘님’자에 톤을 넣어 부르거나 ‘선생님!’이라고 느낌표를 넣어 부르지 말라는 재미있는 발상의 시조이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이유가 종장에 나타나고 있어 셋째 수는 도취법을 사용하고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또 화장실에 앉아 대답을 하고 있는 듯이 ‘지금 여기’ 이후의 ‘축사야’는 다음 행에 한참 떨어져 쓰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시각적 거리가 이 작품에서는 독자에게 생각할 여유를 확보하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그러나 모든 시조작품을 이렇게 쓸 수는 없는 법,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며 시조의 일반 형태와는 거리가 있음도 독자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자칫 작위적이고 유치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은 무릎 접고 시집을 읽는 시간
시정의 말 갈피를 영혼으로 닦아낸
으늑한 내통의 길에 혼을 깊이 들이듯
그가 걸은 우주에 나를 포개는 시간
바닥을 길어낸 듯 피 묻은 자리마다
말들의 음핵을 찾아 살뜰히 헤매는 밤
우주의 오솔길에 시의 알을 슬 동안
그 안팎 온 말들이 다시 붙어 노닐고
내 안도 저와 같아야 밤새 붉어 뛰놋다
(정수자,「시집을 읽는 시간」전문, 『시조월드』 2006년 상반기호)
이 작품은 굳이 수 구분을 하지 않은 3수 연시조이다. 독자의 시각적 효과를 위하여 배행을 편하게 하고 있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남의 작품을, 시집을 읽는 시간이다.
어느 한 사람의 시집에는 그 사람이 지금껏 겪어온 삶이 녹아 있을 것이고, 닦아온 언어의 조탁이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한 권의 시집에는 그러한 작품을 쓰기 위한 그 사람만의 고통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화자인 시인은 다른 사람의 시집을 읽으며 ‘그가 걸은 우주에 나를 포개는 시간’을 갖는다. 한 권의 시집 속에는 그 시인이 걸어온 온 우주가 들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바닥을 길어낸 듯 피 묻은 자리마다/ 말들의 음핵을 찾아 살뜰히 헤매는 밤’이 되는 것이다. 화자는 한 편의 시 쓰기가 얼마나 고통인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고통을 이해하고 그 시 속에 들어있는 ‘말들의 음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시인이 ‘우주의 오솔길에 시의 알을 슬 동안’ 즉 시를 빚어내는 동안 ‘그 안팎 온 말들이 다시 붙어 노닐고’라고, 그 시인의 내면에 있는 모든 언어들을 동원하여 붙여보고 떼어보는 짓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을 한 시인을 이해하려는 듯, 한 사람의 독자인 화자도 ‘내 안도 저와 같아야 밤새 붉어 뛰놋다’라고 하여 그 시인의 심정이 되어 그 시인과 동일시되어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는 한 사람의 진지한 독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시집을 성실하게 읽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내 안도 저와 같아야’라는 왕방연의 고시조 인용부분과 ‘밤새 붉어 뛰놋다’라는 처용가를 연상하게 하는 종장처리가 인상적이다.
오래 생각을 담은
탱탱한 말풍선이다
불경기 늦가을에 떨이 된 석류 한 알
동박새
속말을 털 듯
층층이 시어를 쏟네
사랑도 그런 거지
너와 나 당긴 줄에
봄, 여름, 가을의 맘, 꼭지꼭지 앉히다 보면
끝물은 고추잠자리
네 속눈썹
파르르 떤다
(홍성운, 「석류」전문, 『시조월드』 2006년 상반기호)
석류를 보고 쓴 시각적인 작품이다. 첫 수에서는 ‘오래 생각을 담은/ 탱탱한 말풍선이다’라고 하여 석류의 겉모습을 시각적으로 감각묘사하고 있다. 늦가을에 마지막으로 수확한 석류 한 알의 겉껍질 속에 들어 있는 알알이 붉은 석류알들을 마치 ‘동박새/ 속말을 털 듯/ 층층이 시어를 쏟네’라고 동박새의 속말처럼 표현하고 있다. 동박새의 속말같은 석류알, 그것이 또한 층층이 들어있는 아름다운 시어로 비유되고 있다. 석류의 겉모습을 말풍선으로, 석류의 속은 ‘층층이 시어’라고 표현한 부분들의 비유가 이 작품을 신선하게 느껴지게 한다.
둘째 수에 오면 그것은 사랑으로 비약된다. 한 알의 석류가 익어가듯이 사랑도 ‘봄, 여름, 가을의 맘, 꼭지꼭지 앉히다 보면’ ‘끝물은 고추잠자리. 네 속눈썹/ 파르르 떤다’ 그렇게 가을끝자락쯤엔 고추잠자리처럼 물이 들고, 파르르 속눈썹 떨듯 전율되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첫 수는 석류에 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고, 둘째 수에 오면 의미의 확장을 가져와 사랑으로 연결된다. 봄, 여름, 가을을 통해 한 알의 석류가 익어가듯이 사랑도 그렇게 익어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조월드』 2006년 상반기와 하반기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시조는 형식적으로는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라는 ‘정제미’와 내용상으로는 ‘압축미’를 가져야 한다. 이것에 충실하고 있는 작품이라야 시조미학을 제대로 살리고, 시조작품으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자에게 낯설게 하기의 기법으로 신선함을 줄 수도 있으나, 시조는 근본적으로 정제미와 압축미를 가져야 한다는 그 기본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창작활동에 임해야 할 것이다. 시조가 세계화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시조다운 작품으로, 외국인에게 소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조월드』 2007년 상반기호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