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안 한다고 화를 내도 될까?”
규연이랑 승찬이랑 공원에서 연극연습을 하고 있던 현우는 15개월 된 예쁜 남자아기를 만났다.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와서, 자신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자 원숭이 흉내를 내며 놀아주었다. 그런데 나무 계단을 내려오던 아기가 휘청거리더니 넘어졌다. 아기 엄마가 달려와서 우는 아기를 안고는 현우에게 화를 내며 야단쳤다. “뭐하는 거니? 애가 넘어졌잖아. 어떡할 거야? 애 이마가 까졌잖아. 넌 죄송하다는 말도 할 줄 모르니?” 현우는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기엄마처럼,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도 될까?
잘못한 사람이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면 안 된다.
화를 내면 사과하려는 사람이 사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화를 내면 감정이 섞인 말들을 마구 쏟아붓게 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잘못한 사람은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못한다. 사과할 틈을 놓치는 것이다. 실제로 현우도 사과할 마음이 있었는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심지어는 화를 내는 사람에게 어떤 말이라도 하면 화만 더 돋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과의 말을 듣기는커녕 아무런 말도 들을 수가 없다.
물론, 화를 내지 않으면 잘못했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방식에 기인한다. 어린 아이를 훈육할 때, 잘못된 행동을 하면 화를 내고 혼을 내는 것으로 잘못임을 알려주곤 했기 때문이다. 왜 그것이 잘못인지 구구절절이 설명해봤자 아이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이가 알아듣도록 설명하지 못하는 어른들도 상당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화를 내야 그 행동이 잘못임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을 보아왔다면 화를 내는 것으로 아이를 혼내고, 사과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화를 내면 잘못한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할 뿐이다. 화는 감정이다. 감정으로 대하니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다. 감정이 상하면 자신의 행동을 살피지 않는다. 화를 내면서 전하는 말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로 들린다. 아이는 감정에 휘둘려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급기야 자신의 행동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이 더 잘못이라고 여기는 데까지 이른다. 그래서 잘못을 하고도 자신에게 화를 내는 어른의 처신이 더 크게 잘못되었고, 나쁘다고 우긴다. 현우처럼 잘못은 자신이 먼저 하고도, 화를 낸 아기엄마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집 작은 아이가 일찍부터 여러 번 깨웠는데도 일어나지 않더니, 늦게 깨웠다고 엄마 탓을 할 때가 있다. 아내는 잘 참는데 나는 가끔 화가 난다. 그래서 “엄마한테 뭐하는 거야!”라며 화를 낸다. 아이는 왜 자기를 혼내냐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엄마를 향해서는 엄마 때문에 아빠한테 혼난다고, “다 엄마 때문이야”라며 감정이 상해서 말한다. 감정을 건드린 후에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아빠가 화를 내면서 말을 하면, 아이도 화가 난다. 결국 아이의 화를 풀어주는 것은 아내의 몫이고, 화를 낸 나는 아내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아이로하여금 아내에게 사과하도록 하려던 것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이다.
이제 나는 아침에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커지면 무슨 일인가 궁금하지만 가급적 나서지 않으려 한다. 그러는 편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동이 잘못되었더라도, 왜 그랬는지 헤아려주는 것이 먼저인 듯하다. 일어나야 할 시각에 일어나지 못했을 때의 당혹스러움, 그로 인한 엄마를 향한 원망이 뒤섞여서 내뱉은 말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내에게 함부로 말하는 딸의 태도가 반복되지 않도록 나서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 중심의 생각이다. 작은 아이의 짜증스런 말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등교를 도와주는 아내의 속은 오죽할까. 아내는 아이가 현관을 나선 뒤에야 “정신이 하나도 없네.”라며 푸념섞인 말을 한다. 아내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내가 잠자코 있는 편이 낫다. 아이에게는 엄마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생각해보자고, 저녁에 넌지시 얘기해 주면 알아듣지 않을까 싶다.
사과는 사과하려는 마음이 생겨야 하고, 사과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야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사과를 강요하면, 사과를 하더라도 마음에 없는 사과, 형식적인 사과에 그치게 된다. 특히 화를 내면서 사과하라고 하는 것은 사과하려는 마음을 닫게 하고, 잘못을 방어하도록 만드는 처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