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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벌개혁과 기업구조조정
IMF 체제 및 신정부 출범 이후 대대적인 기업구조조정이 전개되고 있다. 기업구조조정이 곧 재벌개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간에 상당부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업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는 대기업들이 주로 재벌그룹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재벌계 기업 중에서 상장된 회사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어 국내외적으로 많은 이해관계자의 이해가 걸려 있다고 할 수 있다.
1999년 4월 1일 기준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30대 기업집단 소속 계열사는 686사이다. 전년도의 804사에 비해 무려 118사가 줄어든 수치이다. 재벌그룹 소속사는 비단 30대 기업집단만에 그치지 않고 경우에 따라 50대 또는 100대 기업집단으로 확대될 수 있으며 이들 기업집단 소속 대기업들이 재벌개혁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기업구조조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기업구조조정의 범위에는 재벌그룹에 속하지 않은 독립계 기업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기업구조조정 내지 재벌개혁은 사업구조 재구축, 재무구조 건전화, 지배구조 개선 및 투명성 제고, 부실기업 정리, 외국인투자 유치 등 광범위한 활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배구조 개선이나 투명성 제고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서 지속적인 제도개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단기적인 위기극복 내지 과거의 누적된 문제를 풀기 위해 부실기업 처리나 재무구조 및 사업구조에 관한 처방도 함께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그간 정부와 업계의 협력하에 M&A, 사업매각, 빅딜 등 사업구조 재구축과 부채비율 축소, 상호지급보증 해소 등 재무구조 건전화에 일차적인 관심이 기울여져 왔다면 이제 게임의 룰 내지 제도적 틀로서 경영투명성 제고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최대의 중점을 두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제도의 구축이나 규칙의 정비는 정부의 정당한 역할로서 정부개입의 시비와는 차원을 달리 한다고 할 수 있다.
근년 재벌그룹을 비롯한 대기업의 구조개혁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실적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이미 6대 이하 그룹의 절반가량이 화의, 법정관리, 워크아웃으로 그룹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등 나름대로 구조조정이 진행되었으나 상위그룹의 경우 상대적으로 구조조정 성과가 미흡한 편이다.
대우사태의 발생은 그간의 구조조정 성과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적어도 대우의 경우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재무구조의 취약성이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느 그룹이든 추후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뒤따르지 않게 되면 언제라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으며 구조조정은 무엇보다 금융시장의 신뢰를 구축한다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이런 가운데 1999년 8.15 경축사를 통해 발표된 정부의 재벌개혁 방안은 기존의 재벌체제가 향후 어떠한 모습으로 바뀔 것인가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른바 신재벌정책으로 불리우는 재벌개혁 방안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재벌개혁의 제도화라는 의미이다. 종래의 5대원칙에 더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 순환출자 및 부당내부거래 억제, 변칙상속 및 증여 차단 등 세가지 원칙이 추가되었는 바, ‘5+3 원칙’을 기본으로 제도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재벌체제의 비효율성을 제거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표명되었다.
둘째로 이번 재벌개혁 방안에서는 앞으로 재벌이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개별기업 단위로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는데 이를 두고 재벌해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재벌해체라는 말이 사용된 적은 없고 정부의 방침이 실질적인 재벌해체를 겨냥하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기존의 선단식 경영을 지양하고 독립경영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향후 대기업조직의 구조조정이 진전됨에 따라 종래의 재벌체제가 어떻게 변모해갈 것인가와 관련하여 두번째 이슈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재벌개혁의 목표는 종래의 재벌체제가 가지는 폐해와 부작용을 해소하여 보다 투명하고 책임있는 경영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전반적인 제도개선을 통해 그룹체제의 부정적 측면을 불식한다면 굳이 그룹체제를 해체하지 않고서도 그룹체제의 순기능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룹조직의 의의
(1) 기업조직의 발달
기업조직은 해당기업의 발전단계나 업종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 단일사업을 영위하는 대기업의 대부분이 직능별 조직(F형:function)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다가 영위하는 사업분야가 많아지게 되면 복수의 사업부별로 분권경영을 하는 사업부제 조직(M형:multi-division)이 나타나게 된다. 때로는 직능별 조직과 사업부제 조직의 장점을 절충한 매트릭스 조직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림Ⅱ-1 참조).
근대기업의 조직형태는 내부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고안된 직능별 조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직능별 조직은 19세기 수직통합과 지리적 확대에 의해 기업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다양한 직능과 시장을 통일적으로 관리하는 수단으
그림Ⅱ-1 대표적인 조직형태
로 발달되었다. 대기업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명확한 권한과 체계적인 의사소통을 요건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이면서 직능별로 분화된 조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20세기 들어 제품의 다각화와 사업영역의 확대로 업무가 점점 복잡해지고 직능부문간의 조정이 어려워지자 복수의 관리기구가 분권화되어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사업부제 조직이 보편화하게 되었다. 사업부제 조직은 다각화 기업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으로 평가되었으며 “조직구조는 채용하는 전략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된다”(Structure follows strategy)고 하는 첸들러(Chandler, 1962)의 유명한 가설을 정립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사업의 다각화가 더욱 진행되면서 철저한 사업부제하에서 전체의 이익보다 각 사업부의 이익을 중시하고 직능별 관리의 중복이나 조정의 어려움이 드러나게 됨에 따라 사업부문별 관리와 직능별 관리를 혼용하는 매트릭스 조직을 채용하는 기업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매트릭스 조직은 본래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명령체계 이원화, 책임소재 불명확 등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실행상의 한계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사업부제 조직의 변형으로 주요 사업부문별로 전략사업단위(SBU)를 설정하고 전사적인 방향성을 추구하는 SBU 조직이 한때 유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네트워크 조직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네트워크 조직이란 각 조직단위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중시되고 본사역할이 줄어들면서 유연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조직형태를 말한다. 네트워크 조직을 M형과 대비하여 N형으로 부르기도 한다(Bartlett & Ghoshal, 1993).
(2) 또 하나의 기업조직
이상의 여러가지 조직형태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역시 사업부제 조직이다. 오늘날 많은 국가의 기업들이 사업부제를 채택하고 있다. 오다기리(Odagiri, 1992)에 의하면 미국이나 영국의 전체기업중 사업부제 채택비율은 70%를 넘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50% 내외이며 일본의 경우 44%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7.7%의 기업이 사업부제를 채택하고 있다(신유근, 1992). 이들 수치는 기업일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대기업의 사업부제 채택비율은 이보다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구기업의 사업부제와는 다른 형태의 기업조직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발달되어 왔다. 이른바 계열형 기업조직이 그것인데 서구기업들이 사업다각화의 결과 복수사업부로 구성된 거대기업을 형성해온 반면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독립된 법인격을 갖지만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갖는 계열사들이 기업그룹 내지 계열구조를 형성하는 상반된 성장경로를 보여왔던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기업의 사업부제 채택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밀그롬과 로버츠(Milgrom & Roberts, 1992)는 서구기업의 M형에 비해 일본기업의 계열구조가 나름대로 경제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계열구조가 M형구조와 같은 본부조직을 갖지는 않지만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종합상사나 주거래은행을 통해 최적의 자원배분과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M형구조와 계열구조는 조직운영의 원리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산하 조직의 성격이나 법적 실체(legal entity)의 측면에서는 대비되는 속성을 갖는다( 그림Ⅱ-2 참조).
그러나 같은 계열구조라 하더라도 일본의 6대 내지 독립계 기업그룹과 한국의 재벌체제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기업그룹에 속한 각 계열기업이 시장거래를 초월한 장기계속적 거래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영위업종의 범위나 연결구조의 강도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재벌체제는 일본의 6대 기업그룹에 비해 매우 강한 연결구조를 가지면서 같은 강연결 구조에 속하는 일본의 독립계 기업그룹과 달리 다양한 영위업종에 진출해있다. 다양한 업종에 걸쳐 있으면서 동시에 강한 연결구조로 맺어져 있는 것이다. 강력한 권한을 갖는 그룹본사를 정점으로 다양한 계열사간에 경영자원의 교차보조와 공동활용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한국형 재벌체제의 특징이다( 표Ⅱ-1 참조).
그림Ⅱ-2 M형구조와 계열구조
80년대 이후 미국에서 새로운 조직형태로 등장하고 있는 LBO 조합도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M형과는 다른 조직구조를 갖는 LBO 조합은 파트너들로 구성된 조합의 본부 아래 다양한 업종의 독립기업이 각각 자율경영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조합의 가치를 극대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의 재벌구조 비슷하게 독립된 법인격을 갖는 다수 산하기업이 본부조직의 통제를 받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지만 사업부문간에 상호보조가 금지되고 개별기업 경영자의 권한이 보장되며 자본시장으로부터 효율적인 감시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훨씬 발달된 조직구조라고 할 수 있다. 젠슨(1989)은 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기존의 공개기업이 쇠퇴하는 반면 LBO 조합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하였다.
표Ⅱ-1 한국과 일본의 계열구조
일 본 |
한 국 | ||
6대 |
독 립 계 | ||
영위업종 |
다 양 |
소 수 |
다 양 |
연결구조 |
loose coupling (weak tie) |
tight coupling (strong tie) |
tight coupling (strong tie) |
3. 그룹조직의 효용과 한계
(1) 기업그룹의 효용
최근 추진되고 있는 재벌개혁과 관련하여 그룹형 기업조직의 공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계열구조 또는 그룹체제를 해체 내지 탈피해야만 소기의 구조조정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룹조직의 장점을 살려가면서 동족지배의 폐해나 단점을 해소하는 방안은 없는지 등이 주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하에서는 우리나라 재벌체제를 비롯한 개도국의 기업그룹들이 전략적 관점이나 제도적 맥락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관련된 연구를 중심으로 계열구조 내지 그룹체제가 가지는 효용과 한계 및 바람직한 구조조정의 방향에 대해서 정리하고 지배구조 개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카나와 팔레푸(Khanna & Palepu, 1997)는 그룹체제 및 다각화전략을 제도적 관점에서 해석한 연구로 주목할 만하다. 이들에 의하면 개도국의 기업조직중 대규모의 다각화된 기업그룹이 지배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즉 경제활동에 관련된 각종 제도들이 정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업 스스로 제도적 공백을 메꾸기 위해 다각화를 추구하게 되고 그 결과 그룹체제가 보편화된다는 논리이다. 그간 계열구조나 그룹체제가 형성되게 된 배경에 관해 여러가지 설명이 있었으나 비교적 새로운 시각이라고 할 것이다.
경제활동에 관련된 제도는 다섯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 상품시장을 둘러싼 제도의 측면이다. 개도국의 경우 상품시장에 관한 정보의 부족으로 신뢰를 구축하는데 높은 비용이 들지만 그룹체제를 통해 일단 신뢰가 확보되면 여타 계열기업이나 사업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한국의 재벌도 그룹의 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둘째 자본시장의 제도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자본시장이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재무보고, 신용분석, 위험자본, 증권감독 등 각종 금융중개기관(기능)이 발달되어 있어야 하는데 개도국 시장에서는 자본시장의 인프라가 정비되어 있지 않음으로 해서 적절한 투자확보가 곤란하거나 자금조달이 일부부문에 편중되기 쉽다. 그러나 그룹체제를 통해 자본시장에 대한 우월한 접근이 이루어지며 내부자본시장을 활용하여 신규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셋째 노동시장에 관한 제도도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대부분의 개도국에 있어서 잘 훈련된 인력이 부족하다거나 환경변화에 따라 고용조정을 하기 곤란하다는 제약이 있기 마련이다. 그룹체제를 활용하게 되면 내부노동시장을 통해 환경변화에 따른 인력의 재배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되고 핵심인력을 지렛대로 하여 신규사업의 육성에도 도움이 된다.
넷째 정부에 의한 규제환경이 그룹체제를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개도국 시장에서는 사업기회나 인허가에 관련된 광범위한 정부개입이 이루어지고 관료의 재량이 많은 것이 보통이다. 기업그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관료와의 연결고리를 구축하고 경험을 쌓아 기업성장을 위한 최대자산으로 활용하게 된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대정부관계를 유지하는 비용은 작아진다. 때로 뇌물이나 부패관행이 규제회피의 기능을 대체하기도 한다.
다섯째 계약의 이행에 관한 제도의 정비가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개도국의 경우 광범위한 정부개입에도 불구하고 현장레벨에서 계약을 이행토록 하는 효과적인 메커니즘이 결여되어 있고 법원을 통한 분쟁해결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기업그룹의 조직형태에서는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계약의 파기를 자제하고 재산권을 존중하는 인센티브가 작용함으로써 공급업자나 고객이 가급적 기업그룹과 거래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생긴다. 계약의 이행에 관한 신뢰성은 외국인투자를 유치하고 기술을 도입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되며 경쟁우위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상의 다섯 가지 제도적 미비와 그룹체제에 의한 기능대체는 왜 개도국 시장에서 대규모의 다각화된 기업그룹이 보편적인 조직형태가 되었는가를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그룹체제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모든 기업그룹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지만 그룹체제를 통해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를 실현한다면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표Ⅱ-2 에서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표Ⅱ-2 그룹체제와 가치창출
제도적 차원 |
그룹체제에 의한 기능대체 |
자 본 시 장 |
벤처캐피탈 기업, 사적 자본제공자, 뮤츄얼펀드, 감사인 |
노 동 시 장 |
관리기구, 경영대학원, 인증기관, 헤드헌트기업, 재배치서비스 |
상 품 시 장 |
인증기관, 규제관청, 비법원중재서비스 |
정 부 규 제 |
로비스트 |
계 약 이 행 |
법원, 비법원중재서비스 |
자료:Khanna, T. and Palepu, K., “Why Focused Strategies May be Wrong for Emerging Markets”, Harvard Business Review, 1997, p. 48. |
개도국 시장에서는 경제활동에 관련된 각 제도가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업그룹이 그 기능을 대체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부가가치가 창출될 수 있다. 그러나 기업그룹이 영위하는 사업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게 되면 조정이나 통제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투자의 효율성이 떨어질 염려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각 계열기업이 독립적으로 경영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할 것이다. 요는 복잡성과 조정비용을 상회하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규율이나 내부감시장치를 정착시키고 기업그룹의 일체성을 유지하며 투명성을 제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2) 지배구조상의 결함
한국의 재벌형 기업조직을 비롯한 그룹체제가 나름대로 효용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부작용이나 한계를 지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계열구조 내지 그룹체제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지만 주로 지배구조상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최근 카나와 팔레푸(1999a)의 연구나 벱척 외(Bebchuk et. al, 1999)의 연구에서는 기업그룹체제가 지배구조상의 결함을 초래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카나와 팔레푸(1999a)는 집중된 소유구조하에서 생길 수 있는 지배구조의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특히 가족통제에 의해 운영되는 기업그룹의 감시체제가 독립기업에 비해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실증연구를 통해 입증하였다. 인도의 기업그룹을 대상으로 분석한 연구결과는 한국의 재벌형 기업조직에도 상당부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외부감시가 아닌 내부통제에 의존하고 있는 가족경영의 기업그룹에서는 소수의 대주주가 전 계열사에 걸쳐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여러가지 지배구조상의 결함이 나타나게 된다. 첫째,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고 외부감시의 압력을 덜 받음으로 해서 전반적인 감시체제의 효율성이 저하하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투명성의 대용변수(proxy)로서 그룹내 금융거래의 정도를 사용하고 있는데 지배주주가 적절한 공시없이 자금을 그룹의 타 계열사에 이동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많고 그 결과 지배주주에 의해 소수주주권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둘째,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계열사간 상호주식보유로 인하여 외부기관에 의한 감시와 견제가 곤란해지고 反M&A 장치(anti-takeover devices)로 작용함으로써 적절한 외부통제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때 계열기업군에 비공개기업이 끼어 있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셋째, 전문화된 금융중개기구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충분한 기술이나 유인이 없기 때문에 효율적인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보공시, 증권분석 등에 관한 제도의 미발달로 정보의 이용가능성이 극히 낮은 상태에서 충분한 감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넷째, 정치세력과의 연계가 밀착되어 있고 로비가 성행함으로써 지대추구행위가 보편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지대추구행위의 한 형태로 정치적 연계를 활용하여 기업이 외부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거나 그룹이 강점을 갖는 사업분야에 대해 경쟁을 제한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그룹체제에 대한 상대적 감시비용이 높아지게 되는데, 기업그룹에 출자하고 있는 국내기관투자가의 감시역할이 미흡한 반면 외국기관투자가는 훌륭한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상기 연구의 또 하나의 주장이다. 즉 국내외 기관투자가의 존재와 기업그룹의 성과를 연관시켜본 결과 외국기관투자가의 지분참여가 있을 때 성과가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외국기관투자가의 감시기능이 작용하고 있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외국기관투자가가 직접적으로 기업그룹의 경영활동에 대해 감시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그룹계열에 비해 그룹계열에 덜 투자하는 경향을 보이거나 투자하는 경우에도 투명성의 문제(그룹내 금융거래 빈도)가 작은 곳을 선택하게 됨으로써 간접적인 감시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외국기관투자가가 개도국 시장에 대해 새로운 자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감시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룹체제가 외부기구에 의한 감시를 받기 어렵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벱척 외(1999)는 지배주주 또는 기업그룹이 비효율적인 지배구조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밝혔다. 즉 지배주주가 적은 지분으로 단일기업 또는 기업그룹에 대해 완전한 통제력을 행사함으로써 많은 대리인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유지분과 실제 통제력과의 괴리를 가져오는 장치에는 주식피라미드, 상호주식보유, 이중주식발행 등 세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들의 장치로 인해 보유지분에 상응하는 현금흐름권리(cashflow rights)와 실질적인 통제권(control rights)은 분리되며, 지배소주주(controlling minority shareholder)는 현금흐름권리를 상회하는 통제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때 지배소주주가 초래하는 잠재적인 대리인비용의 크기는 통상적으로 논의되는 지배대주주(controlling majority shareholder)의 대리인비용보다 큰 것이 일반적이며 높은 부채비율을 활용하는 경우의 대리인비용을 초과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현금흐름권리와 통제권을 분리시키는 각각의 장치에 대해 개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차별적인 투표권을 부여하는 이중주식발행의 경우 단일기업에 있어서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현금흐름권리와 통제권의 분리가 이루어진다. 이점에 관해 복수의 기업이 개재되는 주식피라미드, 상호주식보유의 장치와 구별이 된다. 지배소주주가 보유하는 지분의 현금흐름권리 비율을 α라고 할 때 α에 모든 투표권을 부여하는 대신 1-α에 대해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지배소주주의 완전한 통제가 가능해진다.
이상의 세 가지 장치 중에서 한국의 재벌형 기업조직은 주식피라미드와 상호주식보유가 혼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각각의 세가지 장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기업 규모, 프로젝트 선택, 통제권 양도 등 주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대리인비용을 발생시킬 잠재적인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지배소주주의 명성유지 동기나 소수주주권 보호규정으로 인하여 대리인비용이 한없이 커질 수는 없지만 지배소주주인 경영자가 보유하는 현금흐름권리가 작을수록 이들이 초래하는 대리인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4. 구조개혁의 방향
앞에서와 같이 효용과 한계를 동시에 갖는 기업그룹이 과거의 행태대로 유지될 수 있다면 별 문제 없겠으나 아시아 경제위기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여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됨에 따라 바람직한 구조개혁의 방향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흔히 계열구조 내지 그룹체제를 해체하게 되면 문제의 상당부분이 해결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으로 카나와 팔레푸(1999b)를 꼽을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그룹체제에 의해 대체되어온 시장제도가 충분히 발달되기 전까지 기업그룹의 해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시장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단기적으로 성과와 시장제도 대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내부개혁을 추진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이 현실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업그룹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져 성과를 높이거나 능력을 제고할 수 있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해 경영전략의 발본적인 개혁이 요구되고 있다. 그간 시장압력이나 지배구조 수단의 부재로 수익성보다는 외형성장이나 시장점유율을 중시해 왔으나 최근의 금융위기로 더 이상 수익성 없는 성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첫째 내부정보시스템 내지 내부유인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다. 신뢰할만한 회계제도와 업적평가체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원활한 퇴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 일방적인 자산매각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최대로 살릴 수 있는 퇴출방안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재무전략의 개혁이 필요하다. 외부차입방식을 지양하고 장기적 자기자본이나 외국인투자를 확보하도록 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시장제도 대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업그룹 본사의 역할이 획기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기업그룹의 본사는 통제모형(command model)에 의존해 왔으나 향후 벤처캐피털 기업이나 LBO 조합과 같은 역할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간 그룹본사가 계열사간의 자금이동, 상호지급보증 등 재무적 조정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특정부문에 과도한 투자가 이루어지거나 채산성없는 부문이 퇴출하지 않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러한 역할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룹내 금융거래는 기존사업의 자금조달과 신규사업의 자금조달 두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시장제도의 미발달로 그룹체제가 이러한 기능 모두를 대체해 왔으나 이제는 기존사업의 자금조달에 관해서는 그룹본사가 아니라 상업은행 내지 자본시장이 이를 수행토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룹본사는 신규사업에의 투자를 담당하는 역할에 집중함으로써 스스로 벤처캐피털 기업이나 LBO 조합의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벤처캐피털 기업의 세 가지 원칙으로 위험자본의 제공, 투자회사간의 자금이동 금지, 경영에 대한 간섭 배제 등을 드는데, 이는 기업그룹의 본사역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기업그룹의 본사는 지주회사 조직을 채택하고 상호보유 관행을 제거하는 구조조정을 함으로써 투명성과 설명책임(accountability)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이 상기 연구의 주장이다. 이는 최근 지주회사 설립요건 완화가 구조조정의 활성화를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지, 구조조정이 상당히 이루어진 결과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그룹본사가 전통적인 통제모형에서 벗어나 자금조달과 투자결정의 측면에서 벤처캐피털 기업이나 LBO 조합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외에도 그룹본사는 그룹전반에 걸친 활동에 주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채용이나, 교육훈련, 품질관리, 고객서비스, 기업윤리 등이 그 대상이다. 또한 투명성이나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을 위해 그룹본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각 계열사가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갖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전제로 그룹의 로고나 브랜드 등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도국 시장의 일반적인 기업그룹 형태가 우리의 재벌조직과 다른 측면도 있겠지만 이상의 논의는 우리의 재벌개혁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끝으로 향후 재벌체제의 구조개혁이 원활히 진전되기 위해서는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사업구조 재구축이나 재무구조 건전화도 필요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대증적인 요법이며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아니다.
과거에 금융기관의 심사기능과 주식시장의 평가메커니즘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기업의 사업구조 선택이나 재무구조 상태에 대한 적절한 시장규율이 작동하지 않았다. 과거의 누적된 문제를 풀기 위해 그간 한시적으로 정부정책에 의해 과잉․중복투자 조정, 핵심분야 경쟁력강화와 같은 사업구조조정과 부채비율 축소, 상호지급보증 해소와 같은 재무구조조정을 추진해 왔으나 앞으로 시장기능이 정착되면 이러한 정부역할은 축소될 것이다.
기업지배구조는 기업경영을 둘러싼 권한배분구조이자 의사결정구조로서, 지배구조의 개선이나 선진화를 통해 재벌체제의 부작용을 원천적으로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과잉․중복투자 해소, 부채비율 축소, 부실대기업 워크아웃 등은 재벌체제에서 빚어질 수 있는 폐해의 결과를 치유 내지 처리하는데 반해 기업지배구조는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한 원인을 문제삼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지배구조를 선진화하고 경영투명성을 제고하는 정책은 공정한 게임의 룰과 제도적 틀을 만들고 이것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는 정부의 고유한 역할에 해당한다. 지배구조의 정비를 통해 특정 소수의 독점적 권한행사나 비효율적 의사결정을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기업부실,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추궁이 제도적 틀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재벌조직에 있어서의 기업지배구조|작성자 rlaalsdn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