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에서 말하는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은 원래 상세한 내용을 전달하기보다 제3자의 시선을 끈다든지 시각을 유도하기 위해서 사용되므로 시각 전달의 기능을 보완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기하ㆍ추상 도형, 다다이즘이나 쉬르레알리즘(surrealisme,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기법, 현대 전위예술의 특이한 기법 등은 일러스트레이션의 기법으로 쓰인다.
역사
일러스트레이션은 사진이나 도안 등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주로 삽화를 가리켰는데, 그 경우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의 〈사자(死者)의 서(書)〉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출현 이후 일러스트레이션은 사본장식(illumination)으로 발전하기 시작해서 15세기초의 〈베리공(公)의 호화로운 기도서〉에서는 사본예술의 정점에 도달한 듯한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본장식은 세밀화(細密畵)와 사람이나 동물의 그림으로 장식된 알파벳 첫글자(historiated initial), 그리고 여백장식의 3가지 요소로 구성되는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후에 쇠퇴해갔다
15세기 중엽의 활판인쇄술의 발명으로 삽화는 목판이나 동판 또는 석판으로 제작되었는데 16세기에는 목판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를 맞았다. 이때는 화가와 판각(版刻)을 맡은 조사(彫師)가 분업으로 대량생산의 요구에 맞추어 삽화를 제작했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단테의 〈신곡〉에, 알브레히트 뒤러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기도서에 각각 삽화를 그렸다. 또 과학적 목적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실제 시각경험에 근접하는 그림으로서 기술적·자연주의적 태도를 취했는데 예술적 성취도 동시에 이루었다. 17, 18세기의 스위스의 메리안 가족이 그린 동 식물 일러스트레이션은 오늘날 그 기록성보다도 예술성을 더 평가받고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사진제판이 실용화되면서 삽화는 각종 인쇄기술을 활용했는데 현대에는 언어표현에 종속적이던 삽화의 한계를 넘어 그 자체로서 독립된 예술임을 주장한다. 오늘날 일러스트레이션은 디자인·광고 등에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또 독자적인 예술의 한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1.선사시대의 동굴화
이 시기의 그림의 목적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문제였고 이러한 먹이 감을 위한 주술적 의미의 수단으로 미술은 행해진다. 우리가 문자를 사용하기 훨씬 이전에 인류는 그들의 표현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는 크로마뇽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주술적 수렵의식의 한 부분으로 인류는 시각적으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선사시대에는 사람은 거의 묘사되지 않았고, 주로 동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시대의 그림은 각 동물의 개성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당시 예술가들의 도구는 날카로운 돌이나 갈대 따위였다.
한 시대의 그림은 그 시대의 관심사를 담고 있다. 이들의 그림을 보면 그들의 관심사가 사냥에 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이 초창기부터 미술은 이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원래 선사시대의 원시인들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단순한 감상용이 아니었다. 감상용을 위한 작품이었다면 동굴의 깊숙한 곳에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미술이라는 존재는 생활을 위해 필요했던 수단, 좀더 정확히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신석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미술의 형태도 조금씩 변화가 나타난다. 사고 능력이 발전하며 추상 형태가 나타나기도 하고, 또 자신들만의 언어 수단으로 기호나 상징의 형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즉, 먹이 감을 구하기 위한 주술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던 미술이 인류 최초의 동굴벽화에서부터 점차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브뢰이유에 의하면 "짐작컨데 선사시대인 들에게 그림이 지닌 가장 큰 목적은 먹이 감을 잡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지극히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결국 먹이 감을 잡는 수단으로 미술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그들은 동굴에 자신이 원하는 사냥감의 모습을 그리고, 그 그림을 향해 창을 던지거나 창을 맞은 모습을 그리는 행위가 사냥감의 영혼을 빼앗아 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
2.이집트의 파피루스 그림
시대가 지나면서 인간의 문명은 발달 해 갔고, 인간의 창의력 또한 커져갔다. 정교한 연장으로 식량을 얻는 것은 더욱 쉬워졌고, 안전한 주거가 마련되면서 공동사회가 형성되었다. 이 때부터 말과 글 그리고 철학 등이 생겨났다. 더욱 다양하고 정교한 재료가 만들어졌고,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바로 이집트의 *파피루스이다. 파피루스에는 문자로 기록을 했는데, 그림은 글자를 보충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져 사용했고, 파피루스 일러스트레이션은 이집트 외에도 그리스와 로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들은 오랜 기간동안 보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원전 200년경에 발명된 것이 바로 *양피지(parchment)와 *모조피지(vellum)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죽음과 장례의식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사후에 대한 이들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과 환경에 대한 적응 욕구로부터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내세에서의 이상적인 삶은 현세에서의 삶과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그들은 현세에서의 신분이 내세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현세의 서민이 내세에서 왕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믿음은 갖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훌륭한 왕과 현명한 귀족이 다스리는 이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람직한 내세의 삶이라고 믿었다. 각 계층마다 사후에 대한 믿음은 그 계층이 현세에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삶의 모습과 일치했던 것이다. 또한 바람직한 내세를 얻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육신이 훼손되지 않고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먹을 양식이 계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부패하지 않는 미라와 사자의 이름과 내세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음식과 생활도구 등을 무덤에 그려 넣었다. 사자는 내세에서 주술로서 그림을 실제 음식 또는 물건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벽화에 생활과 밀접한 장면을 새긴 무덤이 발달하였다.
이집트 벽화가 측면으로 그려져 있는 이유는 고대 근동지방에 BC 5세기초까지는 *프리미티브 양식의 벽화가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포리그노토스·미콘·파나이노스 등과 같은 대 화가의 출현으로 BC 5세기 중엽부터는 알카이크 양식의 약속적 형태나 표현으로부터 탈피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자태와 사실에 가까운 이상적인 기법으로 모든 형상에는 입체감을 넣는 화법도 나왔다. 어떤 이들은 이집트인들이 묘사능력의 부족으로 벽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비례에 맞지 않고 신체구조상 불가능한 자세를 한 인체를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동시대의 그리스인들이 추구하였던 자연에 대한 그대로의 재현, 다시 말하자면 자연주의적 경향보다는 그들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관념을 그리고자 하였다. 눈과 몸통은 정면일 경우 가장 그 특징을 잘 보여주면 얼굴, 팔, 다리는 정면보다는 측면일 때 가장 그 각각의 특징들을 잘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 그래서 그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 방향에서 인체를 조합하여 그렸던 것이다. 즉 그리스 미술의 두드러진 경향인 "보이는 대로" 그리기보다는 마땅히 "보여야할 혹은 보여주어야 할대로" 그렸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눈"으로 그렸다면, 이집트인들은 "머리"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회화적 경향은 종교와도 관련을 지닌다. 그리스의 종교는 다분히 인간적인 신들로 현실적인 면이 강하였다면, 이집트의 종교는 내세관을 기본으로 하는 관념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 양식은 대단히 엄격한 규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미술가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했다. 좌상의 경우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야 하며 남자의 피부는 여자의 피부보다 더 검게 칠해야 했고, 모든 이집트 신들의 모습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하늘의 신 호루스(Horus)는 매나 매의 머리모양으로 그려야 하며 장의를 주관하는 신인 아누비스(Anubis)는 자칼이나 자칼의 머리 모양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미술가들은 상형문자의 형상과 상징을 명확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쓸 수 있도록 배웠어야만 했다. 기존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가장 뛰어나 미술가로 추앙되었고, '새로운 것','독창적인 것'은 요구되지 않았다. 그래서 3천년 이상 이집트의 미술은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3.그리스 시대
문명이 동방으로부터 그리스로 옮겨온 수세기 동안 몇 가지 발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문자기록과 함께 시각적 표현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꽃병이나 항아리 위에 역사적인 사건과 종교적 의식 그리고 일상생활과 같은 이미지들에 특별한 흥미를 갖고 묘사하였다. 특히 7세기경 그리스의 그림들은 그 시대의 삶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도자기 위에 그려진 그림들은 장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실용적 기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 꽃병들은 매매에 의해 거래되었는데, 유행과 수요팽창에 따라 도시국가에 부와 지위 그리고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이로 인해 예술가와 장인들의 기술과 개인적 재능이 장려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초기 일러스트레이터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고객의 취향과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고 있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신전들이 지어졌는데, 훌륭한 *프리즈와 조각 장식들 위에 그림들이 그려졌다. 벽화나 모자이크 그림들이 도시국가와 귀족들에 의해 사치스럽게 제작되었다.
새로운 힘을 가진 국가인 로마가 등장한 이후에도 그리스는 여전히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그리스 예술가들에 대한 주문이 그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당시 대부분의 작품들이 주문이나 수수료를 받고 제작되었다는 점이다.실제적인 요구 없이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이 중 신화는 적지 않게 양식의 변화와 해부학에 대한 지식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로마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름과 등장인물들을 추가하거나 변경시켰지만, 대부분 그리스 신들의 성격과 덕성을 충실히 따랐다. 로마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그들의 신화 역시 발전해갔고 신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그에 대한 믿음도 증대되어갔다. 점성학, 길조, 마술사 등이 나타났다. 이러한 발전 속에 기독교의 등장은 수많은 신들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고 유일신만을 섬기는 계기가 되었다.
▨
4.중세서양중세의 미술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로마 미술은 인간 중심의 미술이었으나 중세는 기독교 중심의 미술이었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민중을 천국으로 이끄는 안내자였다. 교회는 일상생활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예술의 중심지였다. 벽화, 조각, 모자이크 등의 중세 미술은 교회건축에 종속되었다.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통치기에 미술은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이상적이고 고전적인 특성들이 사라지고 신체비례의 규칙들이 깨어짐은 물론 도식적 표현을 주로 하는 자연주의로 인해 개체의 특징들이 사라졌다. 중세 또는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시대가 미술에서도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성서의 필사본도 함께 소개되었다. 이 책들에 그려진 그림에는 그리스의 경우와 달리 자연풍경은 볼 수 없다. 대신에 이미 존재하는 조각상이나 소묘, 회화 등이 참고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교회 벽화와 마찬가지로 세밀화(miniature)라고 불린다. 이 그림들은 필사가 들에 의해 일일히 손으로 베껴 그려졌다. 그려지는 과정 중에 실수가 생기기도 했으나 이 실수로부터 새로운 창안이 이루어졌다. 제각각의 스타일과 의식적 또는 무의식으로 개성이 혼합되는 속에서, 도미노 효과와도 같이 연속되면서 모든 미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5.르네상스
고대의 의식적 표현에서 벗어나 중세는 설명적인 미술로 변화되었다. 전쟁장면이나 정신적인 탐구, 철학적 사고 등이 현재의 만화나 그래픽 소설의 기법과 비슷하게 한 장의 종이 위에 네모꼴의 그림들이 연속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구텐베르그의 활자와 목판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텍스트와 일러스트레이션은 긴밀하게 결합되었다. 14세기에 오면서 해부학과 과학적 발전에 병행하여 회화에 대한 분석적이고 자연적인 접근이 재확립되고, 수학의 발달로 원근법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에는 지식과 이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물질적 세계에 대한 관찰과 탐구를 통하여 시각적 실제의 상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분야에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지오토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수평면으로 연결된 견고한 물체들을 통하여 형태를 이해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14세기에 프라 필리포 리피와 그의 제자 산드로 보티첼리, 그리고 그의 아들 필리포 리피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들은 선과 빛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고대 신화의 주제들을 표현하였다.
16세기경 전성기 르네상스에는 관찰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미술과 과학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보다 진보된 재료와 기법, 타고난 호기심, 비판적 관찰, 지적 관심이 정밀하고 민감하게 시각적 실재에 대한 상을 창조하는데 기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알브레히트 뒤러 같은 화가들은 이론과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이미지를 구성하였다. 그들은 해부학과 건축학 그리고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일생동안 그들 주제가 담은 신비를 탐구하고 발견해 나갔다.
이러한 분석적이고 묘사적인 작업들이 기술적 일러스트레이션의 시작이 되었다. 기술적 일러스트레이션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고 의학, 지형학, 전자공학 등의 서적들, 그리고 3차원 물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분야에 신뢰도 높은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동안 미술은 각 나라마다 그 성격을 달리했다.
이탈리아는 제스처나 얼굴표정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이고 감성적 본성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한 반면,
북유럽의 예술가들은 혼동기의 어둠, 절망, 두려움, 고통을 묘사했다.
6.현대 일러스트레이션
르네상스는 봉건제도의 종말을 가져왔고 그와 함께 독일의 30년 전쟁, 프랑스의 백년전쟁, 종교적 가치의 변화와 유럽일대를 강타한 무서운 전염병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히에로니무스 보슈와 같은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그는 공포와 지옥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친숙한 사물이나 동물 또는 해부학적 부분을 그 실체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과 병치시키는 기술을 가졌다. 보슈의 작품들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꿈이나 악몽에 대하여 막연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들은 사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공포에 대한 강조는 16세기의 피터 브뤼겔에게로 이어진다. 이탈리아에서 묘사법이 과학으로 확립되는 동안 북부 플랑드르 지방의 화가인 반 아이크는 빛과 색채에 의해 작품 표면에 관심을 집중시킨 유화기법을 발전시켰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판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인쇄기술은 마르틴 숀가우어에 의해 동판화로의 길을 열어주었고 그의 놀라운 기교는 독일에서 크게 인정받았으며 알브레히트 뒤러와 같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뒤러의 판화들은 거의 자신의 회화를 옮겨 그린 것이거나 복제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7.일러스트레이션 신문과 잡지의 등장1840년대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간 신문들이 인기를 끌었다. 1844년 전신의 발명으로 일간지들이 많은 소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사건들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민첩하고 유능한 일러스트레이터를 요구하게 되었다. 시사 일러스트레이션의 등장은 알러스트레이터 들에게 이제까지의 현실 도피적이거나 환상적인 작업으로부터 벗어나 실생활을 주제로 다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쟁을 시각적으로 다루었고 당시 일어난 크리미아 전쟁, 보물 전쟁, 미국의 남북 전쟁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무궁무진한 주제를 제공했다. 이 때에는 사진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각 저널리즘은 여전히 일러스트레이션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그들 앞에 주어진 사물이나 상황을 정직하게 표현하였다. 전쟁 외에도 철도부설과 같은 산업적인 발전이나 미개척지에로의 대여행 등을 소재로 다루었다.
8.만화의 등장과 발달
연속만화는 일러스트레이션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만화는 원래 일러스트레이션에 문구를 삽입한 연속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만화는 각기 독립된 사건들을 그 자체로 다루거나 아니면 다른 시대와 세계의 사건들을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가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최초의 연속만화는 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세기말에는 애니메이션 기술이 적용된 만화책이 등장하게 된다. 영화 기술적인 효과가 만화에 도입되었는데, 분위기나 신비함을 나타내기 위해 고전적인 원근법은 물론이고 명암법 등이 활용되어 빛과 어두움만으로 형태를 단순하게 표현한 그래픽 효과가 주목할 만하다. 이런 그림들의 스타일은 미술과 일러스트레이션에서의 운동들만큼이나 다양했는데, 초인적인 영웅들의 고전적이고 로맨틱한 묘사에서부터 연속적인 꿈을 나타내기 위해 초현실적인 배경이 사용되기도 했다. 1930년대의 만화책은 신문지와 같은 종이로 만들어졌는데 4분의 1 크기로 접쳐져 인쇄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8 × 11 인치로 규격이 정해졌다. 이 지면들을 통해 작가들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내거나 스타일을 변화시켰으며 또 정치적·사회적 논평을 하고 환상을 펼치기도 하였다. 초인적인 영웅에 대한 아이디어는 1938년 '수퍼맨' 을 창조해 낸 미국의 제리 시겔과 죠 슈스터에 의해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을 주요 독자로 삼으면서 만화출판은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만화책을 고정적으로 보는 독자들이 늘어나면서 1965년 무렵부터는 *옵셋인쇄의 기술적 혁신으로 그래픽 소설이라고 불리는 질적으로 고급한 만화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픽 소설은 최상의 작화, 디자인, 지질이 어우러져 단행본 또는 전집 형태로 출판되는데, 내용은 보통 상상을 초월한 환상이나 무시무시한 공포 등을 다루고 있다.
9.풍자 일러스트레이션 시대
19세기 전반 프랑스에서는 낭만주의가 정치 사회적 변동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자유나 정의 사상을 신화적인 여신이나 영웅들을 통해 인격화 시켰다. 낭만주의 운동의 결과로 연극무대에서는 정치적 도덕적 주제가 다루어질 수 있었고 이 운동은 19세기 내내 예술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사실주의의 출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작업실로부터 벗어나 실생활 속에 깃든 무궁무진한 주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 시기에는 성공한 부르주아 계급, 서민 계충, 신흥 중산층, 세탁부, 창녀, 술주정뱅이, 상인들이 낭만주의의 신화적인 영웅이나 여신들의 위치를 대신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그로 인해 정치적인 캐리커처가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캐리커처는 시각적 무기로서 모욕과 조소를 익살스럽게 표현하였다. 시각적 또는 개념적으로 과장된 주제들은 그 시대의 부조리에 모욕과 조소를 던지는 강력한 요소가 되었다. 신체적 특징이나 매너의 유별남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하는 것이 캐리커처이다. 얼굴표정이나 제스처는 간략한 선으로 묘사된다. 풍자 일러스트레이션의 구성요소들은 익살스러울 뿐 아니라 핵심을 찔러야 하는데, 여기에는 주제 및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캐리커처는 항상 새로운 사건들에 대한 논평을 대중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정치적인 잡지들의 근본목적은 언제나 동일했는데, 그것은 당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비판하는 미술과 문학을 발표하여 정권에 도전하고 그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캬바레, 클럽, *압생트주와 예술가 등, 밤의 세계라든가 온갖 사회적 부조리들이 예술가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 아주 상투적인 방식으로 예술가 적인 생활양식을 낭만적인 것으로 보도록 만든 원인이기도 했는데, 그런 편견은 귀족적인 화려함의 일종으로서, *로트렉 같은 작가가 활동한 환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회적 캐리커처나 일상생활의 표현들은 사진이나 로트렉의 독특한 그래픽 기법의 개발에 기초가 되었던 일본 판화의 영향에 힘입은 것이었다. 채색 석판화의 발달은 로트렉이 캬바레에 관한 포스터나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데 훌륭한 매체가 되었다. 당시 영국 화가들이 환상적인 영역을 주로 다룬 반면에, 로트렉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롭고 생생한 주제들은 그의 상상력이 현실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0. 19세기 영국의 북 일러스트레이션
'폴리매스'라는 말은 19세기의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일컫는 데 적합한 용어이다. 이 말은 한 분야를 넘어서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예로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는 판화가, 일러스트레이터, 공상가, 시인으로 이 말에 적합한 인물이다. 18세기 중엽 블레이크와 같은 일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적인 규칙과 이념, 그리고 사실주의와 산업혁명에 반발하였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서 미술과 문학에서 광범위한 현실도피주의가 나타났다. 산업혁명이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상업과 대량생산으로 향했으며 정신적이고 자연적인 미는 물질주의로 대체되었다. 1848년 윌리엄 홀맨 헌트는 존 에브릿 밀레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 함께 라페알전파를 결성하였다. 라파엘전파의 이념은 중세적인 전통을 단절시켜버린 당시의 가치관과 산업적 과정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들은 중세의 기사와 요조숙녀들의 시대야말로 도덕적인 순결과 정신적인 진정성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있지도 않은 진실을 추구한다고 하여 그들이 비판한 대상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활동한 윌리엄 모리스는 강한 사회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전적으로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을 출판하는 켐스콧 출판사를 운영하였다. 그는 새로운 기계시대에 반대하는 *[미술공예운동]의 주창자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이 시대의 문학과 일러스트레이션에는 공포, 고통, 추악함, 탐욕, 섹스, 죽음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환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은 보통 교훈을 암암리에 깔고 있는데, 대부분 당시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캐리커처 역시 발전하여 의인화와 인격화가 유행하였는데, 동물이나 식물 또는 기타 사물들에 인간적 성격을 부여하였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여 작가들은 자연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나타냈다. 비록 다양한 스타일이 사용되긴 했지만, 이 당시의 그림의 구성 전체에 흐르는 대담한 이미지, 선 그리고 질감은 장식적인 안목에 따라 모든 면과 요소들에 활력 적인 음양공간으로 넘쳐 났다. 더 이상 전통적인 서구의 원근화법은 사용되지 않고 대신에 환상적인 공간이 창조되었는데, 이는 수직적 구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높은 수평선과 함께 위에서 아래로 그려나가는 일본판화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자연으로부터 착안된 문양과 질감은 무궁 무진 하였고 각각의 모티브들은 상징적 힘을 획득한 채 뚜렷한 이미지와 순수한 디자인들로 엮어졌다. 1890년대에는 환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채색 *하프톤 기법이 도입되었다. 19세기 중후반 동안 *아르누보가 전 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예술개념이 그런 것처럼 아르누보 역시 그 기반이 되었던 본래적 정열과 논리는 유명무실하게 끝나버렸다. 산업화의 전진과 엄격한 순응에 반발하는 표현이었던 복잡한 선과 자연적인 형태는 디자인의 순수한 요소로 되어버렸다. 이는 어떤 면에서 과거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던 공식이나 구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풍부히 쏟아져 나온 정기간행물들의 영향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의 개념도 보다 확고해져갔다. 텍스트와 결합된 미술은 일종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림으로서, 어떤 사실을 발언하거나 독특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대중이 이해하기 쉽고 더러 통찰과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편 일러스트레이션은 소비자들에게 제품에 관한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하여 관심을 유발시키는 만큼 광고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정받게 되었다. 20세기 초 라디오와 TV가 등장하기 이전, 이들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간 정기간행물들은 매우 인기있는 오락과 정보의 수단이었다.
11.현대 미국의 일러스트레이션오랜 역사와 경험을 가진 유럽에 비해 미국은 아직 과도기에 있었으며 재능을 가진 유럽인들의 이주를 환영하였다. 미국에도 이미 많은 잡지들이 있었지만 특히 영국에서 출판된 일러스트레이션 잡지들이 그들의 시장을 미국의 가정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었다. 위대한 문학과 환상 그리고 모험이 이 시대의 한 장을 장식할 때 미국 일러스트레이션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하워드 파일은 일찌감치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들 선조들의 유럽적인 배경이 미국의 의식과 혼합된 것처럼, 파일의 예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초기 일러스트레이션은 아르누보,라파엘전파, 알프레히트 뒤러의 기법을 도용한 펜화였다. 펜화는 목판공의 기술을 활용하여 쉽게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많이 애용되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시기에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높은 수준과 윤리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일러스트레이션도 독자와 매체에 따라 달라져야만 했다. 점차 잡지들은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간 기사들을 줄이는 대신에 광고와 시사적인 내용을 늘려갔다. 아트디렉터와 편집자들은 갈수록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업에 시간적 제한을 가했는데, 이것이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복제생산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사진은 일러스트레이션을 대신해 전 세계의 사건들을 기록하였는데, 사람들은 예술가의 해석에 기반한 사실주의보다는 사진을 더 신뢰하였다. 점차 사진이 정착되어 갔으며 이는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착잡한 일이었다. 어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작품제작에 참고하기 위하여 사진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진술과 경쟁하는 동안 일러스트레이션의 낡은 형식들은 대중적 관심을 잃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디자인과 외형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사진술은 일러스트레이션의 적수 또는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서 꾸준히 발전해 나갔다.
대중문화의 출현과 함께 대량생산과 소비적인 상품들이 시장을 가득채웠다. 산업화 된 세계와 50년대의 이념에 대항하여 60년대의 젊은이들은 자연, 사랑, 공동체의 이름으로 뭉쳤다. 그들은 마약과 *사이키델릭, *옵아트와 *팝아트를 즐겼으며, 미술공예운동의 부활을 꾀했다. 한편 70년대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멋대로 놀아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두드러지면서 그들의 사회적 의식과 정치적 행동주의는 < 마더 존스 > 나 < 진보 > 같은 잡지에서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갈수록 사회의 모든 부분들이 스피디해졌다. 스피디한 자동차, 패스트푸드 체인점 등과 마찬가지로 아주 빨리 마르는 물감인 아크릴릭이 1954년 개발되었다. 미국문화의 다양성은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도 다양한 혁신의 문을 열어놓았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에는 과거의 모든 미술과 일러스트레이션 운동들을 해석하고 반영하는 새로운 작가들과 관념이 쏟아져 나왔다. 어린이 그림책에는 성인세계로부터 흘러나온 마술, 신화, 환상적인 상상력이 도입되어 고도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여주었다. 대개 이런 책의 기획자는 일러스트레이터들 자신인데, 그들은 자신의 창조력을 완전히 쏟아 부음으로써 개성적인 시각적 해석을 확립하였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중세 갑옷을 합성한 캐릭터라든지, 당대의 문제나 관심사에 대한 비평적 도구로써 성인들을 위해 동화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위대한 영웅들과 공상과학 소설을 주제로 한 환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 또한 꾸준히 독자층을 늘려갔다.
전기통신과 매스컴의 발달로 사람들 사이는 더욱 가깝게 결속되었고 취미와 관심이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점은 다양한 스타일과 기법, 태도를 통해 일러스트레이션 분야가 발전할 수 있도록 고무하였다.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같은 새로운 분야도 등장하였다. 매체에 상관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것은 처음에는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런 표현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지성과 정열, 장인정신과 노력의 복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거울로 된 건물의 벽면처럼 과거와 현재를 반영하고 희망적이건 묵시록 적인 예언이건 아무튼 미래를 투사한다. 이들은 기하학적 형태, 상상과 기억을 담은 선과 색채로써 공간 속에 표현된 우리문화의 취미와 관심들을 반영한다. 주제에 대해 때로는 어두운 방식으로, 때로는 화려하고 빛나게 조명되었을지라도 이들은 모두 인간의 역사를 대변하는 그림들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