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해탈도론』과 『청정도론』의 인용문들
『해탈도론』에는 스리랑카의 지명과 인명뿐만 아니라 서기 전후의 인도 본토의 인명과 지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해탈도론』이 의거하고 있는 비유나 인용은 『뻬따꼬빠데싸』를 상한선으로 하고 다수의 빠알리삼장과 고주석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청정도론』에는 그 후에 나타난 새로운 주석서들이 극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청정도론』의 성립과정을 고찰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청정도론』의 성립은 절반은 『해탈도론』의 이론을 참조하고 절반은 마하비하라 사원에 존재했던 고대 싱할리어 주석서들에서 참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청정도론』 가운데는 아래의 현존 삼장의 주석서들과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는 되도록 병행하는 부분을 주석에서 밝히려고 노력했으나 다 밝히지는 못했으며, 『마하빠까라낫타까타』 경우는 시간 관계상 전혀 밝히지 못했다.
『쌈모하비노다니』(Sammohavinodanī : Smh. = VibhA.)
『앗타쌀리니』(Aṭṭhasālinī : Ats. = DhsA.),
『싸만따빠싸다니』(Samantapāsādikā : Smp. = VinA.)
『빠빤짜쑤다니』(Papañcasūdanī : Pps. = MvA.)
『마노라타뿌라니』(Manorathapūraņī : M게. = AnA.)
『쌋담맙빠까씨니』(Saddhammappakāsinī : Spk. = PatisA.)
『쌋담맙빠조띠까』(Saddhammappajotikā : Spj. = NdA.),
『빠라맛타조띠까』(Paramattajotikā Ⅰ. :Prj. Ⅰ = KhpA.)
『빠라맛타조띠까』(Paramattajotikā Ⅱ. :Prj. Ⅱ = StnA.)
『빠라맛타디빠니』(Udānatthakathā : Paramatthadīpanī Ⅰ. : Ped. Ⅰ = UdA.)
『마하빠까라낫타까타』(Mahāpakaraņatthakathā = Pañcappakaraņatthakathā)
그렇지만, 쌈모하비노다니(Sammohavinodanī)와는 그 사분지일 이상이 『청정도론』과 병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청정도론』의 칠백여 쪽 가운데 이들 주석서와 일치하는 문장은 삼분지일 이상으로 삼백여 항목 가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주석서와 일치하는 문장들은 선정의 설명들에 관한 다소의 유사성을 제외한다면, 단 하나도 『해탈도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들 인용문은 붓다고싸가 마하비하라 사원에 보존되어 있던 마하비하라 파의 주석서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청정도론』에 등장하는 스리랑카의 인명과 지명들과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모두 이들 주석서들에 의거해서 붓다고싸가 부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앞의 스리랑카 역사에서 살펴보았듯, AD. 4세기경 인도 본토의 붓다가야에 건립된 스리랑카 사원 마하보디비하라 사원에 주석하던 수행승들은 대부분
아바야기리비하라 파의 수행승들이 대세를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마하보디비하라 사원에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아바야기리비하라 파의 수행승들이 많이 기거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논서인 『해탈도론』을 마하보디비하라 사원에 가져와 마가다 지방에서 유행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마가다 지방에서 유행하던 『해탈도론』의 두타품이 날란다(Nāḷandā) 대학의 수행승에게 알려지고 AD. 9세기경 티베트로 전해져서 번역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이 남인도에서 직접 티베트로 전해진 것보다는 타당한 가설일 수 있다. 더구나 남인도에서 불교가 흥륭하여 많은 저술이 행해진 적은 결코 없었다. 붓다고싸 이후의 학자인 붓다닷따도, 적지 않게 후대에 속한 앞서 기술한 붓다빨라도 모두가 남인도인이었지만, 스리랑카에 가서 불교를 배웠다. 붓다고싸는 마하보디비하라 사원 근처 출신자였다면, 아마도 마하보디비하라 사원의 스리랑카 수행승들로부터 스리랑카에 삼장의 주석서가 완비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스리랑카로 가서, 가장 순수하게 테라바다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던 마하비하라 사원에 귀의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국에서 인도로 구법여행을 한 법사나 인도에서 동방으로 온 법사에게서 남인도에서 불교학을 배웠다는 전례는 없지만 스리랑카에서 유학을 한 경우는 많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해탈도론은 남인도찬술이 아니라 스리랑카의 율장의 전문가였던 우빳띳싸가 스리랑카에서 『해탈도론』을 저술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양론을 비교하면, 최초의 네 가지 가설 가운데 우빠띳싸가 붓다고싸의 『청정도론』을 참조하여 『해탈도론』을 저술했다는 제2의 가설은 완전히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제3가설인 양론이 원천자료가 동일하고 서로 상대를 예상하고 저술한 것이라는 것도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제4가설 우빠띳싸가 원작을 지은 후에 대승적 영향을 받아 현재의 한역본의 원본을 지은 것이라는 주장도, 『해탈도론』에는 대승적 색채가 발견되지 않으므로,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해탈도론』 가운데 열 가지 초월의 길(波羅密)이나 열여덟 가지 고유한 원리(十八不共法)에 관한 이론도 빠알리불교의 전통과 일치하는 것들이다. 『번역명의대집』이나 『아비달마잡론』과 일치한다고 해서 대승에 속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결국 이러한 양론의 관계는 제1가설 즉, 붓다고싸가 우빠띳싸의 『해탈도론』을 참조하여 마하비하라 파의 입장에서 확대개편하여 『청정도론』을 저술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상이 양론의 관계에 대한 바빠뜨의 견해이다.
그러나 위의 제3가설을 지지하는 나가이(長井)와 히가타(干潟)의 설을 가볍게 부정할 수만은 없는 측면이 있다. 나가이는 빠알리문 『해탈도론』에서는 반야바라밀(반야바라밀)이나 보살마하살(보살마하살)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대승적 영향이 있다는 것이고, 히가타는 『해탈도론』에 다음과 같은 대승적 색채가 있다는 것이다.
1)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 소승이 아니라 대승의 것과 일치한다.
2) 남방상좌부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북방대승계에서만 사용되는 보살마하살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3) 한역문에서는 ‘과거는 이미 생겨나 없고, 미래는 아직 생겨나지 않아 없고, 현재는 지금 생겨난다’라고 현재유체과미무체(現在有體過未無體)의 이론에 상당하는 문장이 등장하고, 빠알리문에는 ‘과거는 이미 생겨난 것이고, 미래는 생겨날 것이고, 현재는 지금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삼세유체(三世有體)의 이론에 상당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4) 분별제품에는 빠알리문에는 없는 십송(十頌)이 있다. 그 가운데 ‘제일의 가운데 가고 옮이 없다.’라든가 하는 사상은 대중부적인 것으로 용수의 중관사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점 가운데 첫 번째의 십팔불공법에 대해서는 바빠뜨가 전술한 바와 같이 빠알리불교의 전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번역명의대집과는 크게 다른 것이므로 히가타가 잘못 본 것이다. 『청정도론』에도 십팔불법(aṭṭhārasabuddhadhamma : 十八佛法 : Vism. 325/9 : 124)이 등장하지만 그 열여덟 가지 원리가 열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고 해탈도론과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연히 소승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을 지칭하리라는 것은 추론해 볼 수 있다. 두 번째 보살마하살의 문제인데, 히가타는 보살마하살이 빠알리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나 사실은 《자따까》에는 보살도 보이고 마하살도 보인다. 다만 연속해서 복합어처럼 사용하는 경우는 없는데 이것은 대승불교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세 번째 한역문에는 과미무체설의 대중적인 사상이 반영되어 있고 빠알리문에는 삼세유체설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살펴보자.
『해탈도론』의 한역문에는 아비담설과 그에 해당하는 『청정도론』의 빠알리문은 아래와 같다.
[한역문] 於過去心 無已生 無當生 無現生. 於未來心 無已生 無現生 無當生. 於現在心刹那 無已生 無當生 有現生(大正32, 432b)
[퇴현역] 과거심은 이미 생겨난 것이라 없고 앞으로 생겨날 것은 없고, 현재 생겨나는 것도 없다. 미래심은 이미 생겨난 것도 없고 현재 생겨나는 것도 없고, 앞으로 생겨날 것이라 없다. 현재심찰나는 이미 생겨난 것은 없고 앞으로 생겨날 것도 없으나, 현재 생겨나는 것은 있다(大正32, 432b)
[빠알리문] atīte cittakhaņe jīvittha, na jīvati, jīvissati, anāgate cittakhaņe na jīvittha, na jīvati, jīvissati, paccuppanne cittakhaņe na jīvittha, jīvati, na jīvissati(Vism. 238/8 : 39)
[퇴현역] 과거의 마음의 찰나에는 그는 살았던 것이고 살고 있는 것이나 살 것은 아니다. 미래의 마음의 찰나에는 그는 살았던 것이나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살 것이다. 현재의 마음의 찰나에는 그는 살았던 것이 아니고, 살고 있는 것이고, 살 것은 아니다.(Vism. 238/8 : 39)
위의 양자는 명확히 히가타의 주장처럼 상이하다. 그 빠알리문은 『마하닛데싸』(Nidd. Ⅰ. 43)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역문에서 ‘아비담(阿毘曇)’이라고 한 것은 바로 『마하닛데싸』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왜 한역에서 달리 번역을 한 것일까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그 경우에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a) 승가바라(僧伽婆羅)의 원본은 한역본과 같은 것인가, 빠알리문과 같은 것인가? b) 한역은 오역이 아닌가? c) 고의적으로 개역한 것이 아닌가? 『해탈도론』은 앞서 주장한 것과 같이 근본불교는 완전히 상좌부적인 것이어서 특히 『비방가』, 『빠띠쌈비다막가』, 『닛데싸』 등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위의 논서들에서는 그 교리내용이 남방상좌부의 독특한 것으로서 다른 한역불교문헌에서는 유사한 교리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본론의 근본교리로 삼는 이들이 인용문의 원본을 대중부나 대승불교적으로 개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경우에는 완전히 빠알리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승가바라가 아마도 고의로 개역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경록(經錄)에 의하면 그 『해탈도론』의 원본은 캄보디아(扶南) 지방의 만다라선(曼陀羅仙)이 양무제 때인 AD. 503년에 건업(建業)으로 가지고 왔고,
그 이전에 중국에 온 캄보디아의 삼장 승가바라가 AD. 515년 건업의 점운관(占雲館)에서 역출한 것이다. 만다라선이 가지고 온 많은 범본이나 승가바라가 번역한 십 여부의 경전은 대부분 대승계통이다. 『해탈도론』만이 테라바다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승가바라가 상좌부의 교리를 잘 모른 채 『해탈도론』을 번역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역에는 독해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원문과 비교해 보면 서사에서의 오사나 오탈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경우가 아니므로 승가바라나 윤문자나 서사자의 무의식적 또는 의식적 변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네 번째로 히가타 교수가 빠알리문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역게송으로 대승적 색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 바빠뜨도 빠알리문의 부재를 인정한다. 그 문제가 된 부분을 열거하면 이와 같다.
[한역] 以不生故現在生 從於心失世間無
第一義中無去來 未來無聚唯轉生
住如芥子生諸法 彼法滅已是基初
世間以法初不雜 不見去來不見生
諸法不生如虛空 猶如電起臾滅(456b)
[퇴현역] 생겨나지 않는 까닭에 현재가 생겨나고,
마음이 괴멸함에 따라 세간이 없어지고
궁극적 의미로는 오고감이 없으니,
미래에 축적되어 오로지 전생하는 것은 없다.
송곳 끝의 겨자씨처럼 존속하니,
그 사실의 괴멸이 그 시초이다.
세간은 사실의 생겨남으로 뒤섞이지 않고
보이지 않게 오가고 보이지 않게 생겨난다.
제법이 생겨나지 않는 것은 허공과 같고,
마치 섬광처럼 일어나 잠깐 사이에 사라진다.
[빠알리문] anibbattena na jāto|paccuppannena jīvati|
cittabhaṅgā mato loko |paññatti paramatthiyā Ⅱ Vism. 625/20: 72
[퇴현역] 생겨나지 않으면 생성되지 않고 현재 생겨남으로 생존한다.
마음이 괴멸하면 세상은 멸하니, 궁극적 의미의 시설이다.
[빠알리문] anidhanagatā bhaggā|puñjo natthi anāgate|
nibbattā yepi titthanti|āragge sāsapupamā Ⅱ Vism. 625/20 : 72
[퇴현역] 이미 괴멸한 것은 남지 않고 미래의 축적도 없다.
현재 생겨나 존속하더라도,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
[빠알리문] nibbattānañca dhammānaṁ|bhaṅgo nesaṁ purakkhato|
palokadhammā tiṭṭhanti|purāṇehi amissitāⅡVism. 625/20 :72
[퇴현역] 사실들이 생겨나더라도 그들의 괴멸은 예정되어 있고,
괴멸의 원리는 현존하니, 과거와는 뒤섞이지 않는다.
[빠알리문] adassanato āyanti |bhaggā gacchantu’dassanaṁ|
vijjuppādova ākāse|uppajjanti vayanti cāti ⅡVism. 625/20 : 72
[퇴현역] 보이지 않게 와서 괴멸한 뒤 보이지 않게 간다.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여문은 충실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히가타 교수가 문제로 삼는 밑줄 친 부분만 보아도 ‘궁극적 의미의 시설이다.(Paññatti paramatthiyā)’를 ‘궁극적 의미로는 가고 옮이 없다(第一義中無去來)’라고 한 것은 원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번역한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vijjuppādova ākāse|uppajjanti vayanti cāti)’를 ‘제법은 생겨나지 않는 것은 허공과 같고, 마치 섬광처럼 일어나 잠깐 사이에 사라진다(諸法不生如虛空 猶如電起臾滅)’라고 번역한 것은 결코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한역이 비교적으로 엉더리인 것은 위의 빠알리문의 제일게송을 ‘생겨나지 않는 까닭에 현재 생겨나고(以不生故現在生) 마음이 괴멸함에 따라 세간이 없어지고(從於心失世間無) 제일의 가운데 오고감이 없으니( 第一義中無去來)’이라고 번역해 놓고 다른 곳에서 동일게송을 다음과 같이 빠알리문에 가깝게 ‘생겨나지 않으면 생존이 없고(於未生無生), 현재 생겨남으로 생존한다.(於現在有生) 마음이 괴멸하면 세상은 사멸하니(心斷故世死), 세상이 지멸한다고 설한 까닭이다.(已說世盡故 : 大正32, 432c)라고 번역한 것이다.
위의 열거한 게송들은 한역본과 빠알어본 모두 출전이 표시되어 있지만, 원래 마하닛데싸(Nidd. Ⅰ. 43)에서 인용된 부분이다. 한역문의 원본은 아마도 빠알리문과 동일한 문구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상으로 네 가지 점에서 『해탈도론』의 원본에 대하여 추측해 볼 때는 상좌부사상과 다른 대승사상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의 한역문으로 볼 때는 히가타 교수의 주장처럼 대중부적 내지는 대승적 색채가 나타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역 역경사 승가바라나 그 조역자들의 책임일 것이다. 그런데 『해탈도론』이 대승상좌부라고 불리는 아바야기리비하라 파의 논서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원전자체에 대승적 색채가 있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결코 어불성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승가바라의 원전의 인용문이 빠알리문과 그것과 반드시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없는 한, 원전에 아예 대승적 색채가 없었다는 것도 타당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나가이’가 지지하는 제3가설이 타당한 것일 수도 있다. 이들 문제의 해결에 빛을 비추는 것은 저자가 말한 것처럼, 『해탈도론』 가운데 『청정도론』에 보이지 않는 전적, 즉, 수다라열저리구(修多羅涅底里句 : 大正32, 426c), 『열저리바다수다라』(涅底履波陀脩多羅 : 大正32, 431c) 에서의 인용문이다. 이들 인용문은 현존 빠알리문 가운데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서명의 유사성으로 보아 『넷띠빠가라나』(Nettipakaraṇa)라고 생각되지만, 그 가운데 물론 없다. 『수다라열저리구』는 『쑤뜨라네뜨리빠다』(Sūtranetripada)와, 『열저리바다수다라』는 『네뜨리빠다샤뜨라』(理目足論 : Netripadaśāstra)와 동일한 전적을 지칭하는 것인데, 바빠뜨나히가타도 『네뜨리빠다샤스뜨라』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현존하지 않는 까닭에 뭐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에 그것이 『네뜨리빠다샤스뜨라』라면, 『해탈도론』은 다른 파의 것을 인용한 것이 되어, 타파로부터의 영향을 확증할 수 있는 번역이 된다. 또한 바빠뜨는 『해탈도론』에 이해하기 곤란한 인용서가 잇다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해탈도론』 가운데 ‘삼장’이라고 하는 전적에서 인용이 세 번 정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 세 번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이와 같다.
[한역] 如三藏所設一心是淫欲對治 歡喜是瞋恚對治覺是懈怠眠對治 樂是調悔 對治觀是疑對治(大正32, 416c: 삼장에서 설한 바에 따르면, 일심은 음욕의 대치(대치)이고 환희는 진에의 대치이고, 사유는 해태와 혼침의 대치이고, 행복은 흥분과 회한의 대치이고 숙고는 의심의 대치이다.)
[빠알리원문] samādhi kāmacchandassa paṭipakkho, pīti byāpādassa, vitakko thinamiddhassa, sukhaṁ uddhaccakukkuccassa, vicāro vicikicchāyāti peṭake vuttam.(Vism. 141/4 : 86 : 삼매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대치(對治)이고, 희열은 분노의 대치이고, 사유는 해태와 혼침의 대치이고, 행복은 흥븐과 회한의 대치이고, 숙고는 의심의 대치라고 『뻬따까』는 설했다.)
여기서 『해탈도론』의 삼장(三藏)이라는 역어는 원래 ‘뻬따가(Peṭaka)’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뻬따까’는 담마빨라에 의하면, 앞에서 열거한 『네띠빠까라나』(道論 : Nettipakaiaṇa)와 아울러 마하 깟짜나의 저술인데, 그의 저술인 『뻬따고빠데싸』(Peṭakopadesa)에 실제로 이 문장이 등장한다. 『해탈도론』의 다른 두 곳(415b; 415c)에서도 ‘삼장’의 인용문이 있는데 그것들은 청정도론의 빠알리문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뻬꼬바데싸』(藏訓 : Petakopades : 191, 101)에서 발견된다. 이 경우 한역의 ‘삼장’이라는 말은 ‘뻬따꼬바데싸’인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한역의 삼장이라는 말이 ‘뻬따까’인지 뻬따꼬바데싸‘인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바빠뜨에 의하면 그 둘이 별도여서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네띠빠까라나에 대하여 담마빨라의 주석서에는 ’뻬따까‘와 ’‘뻬따꼬바데싸’가 두 가지 명칭이 등장하고, ‘뻬따까’로부터의 인용문 ― yattha ca sabbehārā sampatamānā nayanti suttattaṁ byañjanavidhiputhuttā sā bhūmī hāra sampāto(Nett. xi.) ― 이 있지만, 이 게송이 현존하는 ‘뻬따꼬빠데싸’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뻬따까’와 ‘뻬따꼬빠데싸’가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그것에 관하여 저자는 어떠한 논술도 하지 않고 있다. 미즈노고겐에 의하면, 담마빨라의 주석에서 ‘뻬따까’는 마하깟짜나의 저술이다. ‘뻬따꼬빠데싸’도 그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동일인의 저술로서 유사한 명칭을 갖는 양자가 별개의 작품이라면, ‘뻬따꼬빠데싸’는 ‘뻬따까’의 주석일 수가 있다. 마하 깟짜나는 우선 삼장강요적인 저술인 ‘뻬따까’를 저술하고 나중에 ‘뻬따까’에 주석을 달아 ‘뻬따꼬빠데싸’라고 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뻬따까’는 용수가 지도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장론(藏論)이라는 전적이었을지 모른다.
§17. 『청정도론』의 트랜스크립션
1913년 하버드 대학의 랜먼(Lanman) 교수가 제1권에 해당하는 부분을 경이적인 분석과 함께 학술지(American Academy of Art and Sciences, vol, xlix, No. 3; Angust. 13)에 출간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동기가 되어 『청정도론』의 원전의 학문적인 편찬이 이루어졌다. 리스 데이비즈(Mrs. RhysDAvids) 부인은 미얀마 보노가 상할리 본을 대조하여 로마자로 트랜스리터레이션하여 빠알리성전협회에서 교열본으로 1920년 1권을 출간하고 1921년 제2권을 출간한 뒤에 1975년 합본하여 출간한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교열본의 참고자료들 – 주석서를 빼고 – 은 다음과 같다.
『Visuddhimagga of Buddhaghosa』 ed. by Rhys David, C. A. F(London : PTS, 1975)
『Visuddhimagga』 ed. by Henry Clarke Warren, revised by Dharmanada kosambi(Motilal Banarsidas : Delhi 1989)
『Visuddhimagga』 ed. by A.P.Buddhadatta, svaminbahanse Ceylon : The Alutgama Press. 1914
『Visuddhimaggo』 ed. for simon Hewavitarane Fund trustees. Colombo.
§18. 『청정도론』의 주석서
『청정도론』에 대한 정통적인 주석서로서는 6세기 중반 담마빨라((Dammapāla)의 저술로 알려진 『빠라맛타만주싸』(Paramattamañjũsā)와 저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쌍케빳조따니』(Saṅkhepattajotanī)가 있다. 전자를 『청정도론』의 『마하띠까』(Mahāṭīkā) - 특히 6세기초 아난다가 쓴 율장의 복주서를 『물라띠까』(Muhāṭīkā)에 비교하여 불린 이름이다. - 라고 하고 후자를 『청정도론』의 『쭐라띠까』(Cũḷaṭikā)라고 한다. 그 밖에 12세기 미얀마의 차빠다(Chapada)가 지은 『비쑷디막가간티』(Visuddhimaggagaṅṭhi)가 있다. 이 가운데 『쫄라띠까』는 주로 태국에, 『비쑷디막가간티』는 주로 스리랑카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 주석서는 『마하띠까』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마하띠까』인 『빠라맛타만주싸』는 빠알리성전협회에서 서적으로 출간된 적이 없어 읽고 쉽게 로마나이즈화된 판본이 존해하지 않고 미얀마 등의 고전적 판본들이나 데바나가리 판본만이 존재하므로 접근하기 쉽지 않고,
그 이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로마나이즈화된 인터넷판본이 존재하지만 사용의 편리를 위해 쪽 수를 산정하기가 쉽지 않은 결점을 갖고 있다.
『Visuddhimaggaṭṭhakathā』 ed. by Sayā Pye. Ragoon : P. G. Mundyne Piṭaka Press, 1909, 1910
『Visuddhimagga-Mahāṭikā(Paramatthamañjūsā)』; Ⅰ.Ⅱ. Devanāgarī edition of the Pāli text of the Chaṭṭha Saṅgāyana. Published by Vipassana Research Institute, Dhammagiri, Igatpuri-422403, India. 1998
『Visuddhimagga-Mahāṭikā(Paramatthamañjūsā)』; CD. Publish by Vipassana Research Instrtute. 1997.
그 저자인 담마빨리는 궤범사로 유명하고 많은 논서들이 그에게 귀속되어 있는데,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동일한 이름의 여러 저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름으로 잘 알려진 것으로 14권 정도의 작품이 존재한다. 싸사바방싸(Sāsanavaṁsa)는 그가 남인도의 바다라띳타(Badaratittha : 지금의 Chennai의 근처)가 고향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가 언제 스리랑카에 왔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의 뻬따밧투(Petavatthu)의 주석서의 서문에 언급된 것처럼, 붓다고싸가 거처했던 마하비라하 사원에서 주석했던 것 같다. 그는 《쿳다까니까야》에 속한 대부분 경전의 주석을 완성했다. 그러나 빠라맛타만주싸에 자주 인용되는 빠띠쌈비다막가 의 주석성니 쌈담맙빠까씨니(妙法解疏 : Saddhammappakāsinī)는 출신지가 어딘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 중세의 장로 마하나마(Mahānāma)가 저술한 것이다. 장로 담마빨라는 인용된 구절에 대해 언급할 때, 장로 마하나마처럼 같은 것을 말하는데, 더 많은 단어로 말한다. 담마빨라는 삼단논법의 달인으로 논리적 주장을 전개하면서 바라문 육파철학의 체계의 어떤 것에 관한 여러 논쟁을 곁들인다. 그는 깊은 소양을 가진 학자로서 난해하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신중하고 정확하다. 많은 저술들이 담마빨라에게 귀속되어 있고, 남방의 아비담마는 이 담마빨라가 완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 청정도론의 근현대적 번역과 그 문제점
빠알리어는 주석가들은 마다가어라고 부르는 초기불교의 경전어를 말한다. 빠알리경전은 다양하고 순수한 주제곡과 그 변주로 이루어진 섬세하거나 장엄한 선율을 지닌 오케스트라와 같고, 또는 니야나몰리가 좀 더 시각적으로 묘사하듯, 맑은 바다에 보이는 산호초의 풍경과 같아 절묘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유연한 깊이를 지니고 있다. 주석가들이 선호하는 뒤얽힌 형식주의 속에서도 그 절묘한 아름다움과 유연한 깊이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번역본에서는 주로 철학적, 인식론적, 심리학적 또는 다른 언어학적으로, 논의되는 어떤 관점이나 사물, 또는 사용된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의 조작과 착종되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깔루빠하나도 이미 지적한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식과정을 설명하는 문장의 번역과 관련하여, 현대의 번역가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빠알리본] tatta kiñcāpi cakkhundriye samvaro vā asamvaro vānatthi. na hi cakkhupasādam nissāya sati vā mutthasaccam vā uppajjati. apica yadā rūpārammanaṁ cakkhussa āpathaṁ āgacchati, tadā bhavaṅge dvikkhattuṁ uppajjitvā niruddhe kiriyamanodhātu āvajjanakiccaṁ sādhayamānā uppajjitvā nirujjhati. tato cakkhuviññānaṁ dassanakiccaṁ. tato vipākamanodhātu sampaṭicchanakiccaṁ. tato vipākāhetukamanoviññānadhātu santiraṇakiccaṁ. tato
kiriyāhetukamanoviññāṇadhātu voṭṭhabbanakiccaṁ sādhayamānā uppajjitvā nirujjitva, tadanantaraṁ javanaṁ javati.(Vism. 21/1 : 57)
[퇴현역] 그런데 그 경우에 시각능력에는 제어나 비제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시각감성에 의지하여 새김이나 망념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형상인 대사이 시야에 나타나면, 존재지속의 고리가 두 번 일어나고 사라질 때 작용적 정신세계가 전향작용을 성취하면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으로 시각의식이 관찰학용을, 그 다음으로 이숙적·무인적 정신의식 세계가 조사작용을, 그 다음으로 작용적·무인적 정신의식세계가 확정작용을 성취하면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 직후에는 통각(統覺)이 작용한다.(Vism. 21/1 : 57)
[페이마웅띤역] Whereby, if there is neither restraint nor nonrestraint in the faculty of sight, it is because there arises neither mindfulness nor forgetfulness with reference to sentient eye. But indeed, when the viside object enters the avenue of sight, then, on the cessation of the subconsiousness after arising two or there times the inoperative mind-element (or, the five-door-adverting) arise, accomplishing the funtion of adverting, and then cesses. then arise and cease in order, the visual cognition accomplishihg the funtion of seeing, the resultant mind-cognition accomplishing the funtion of receiving, the resultant element of mind-cognition without root-conditions accomplishing the funtion of determining. Immediately afterwards, apperception take place.(PPtin. 25)
[미즈노고겐역] そつ場合, 假令, 眼根たは律儀き不律儀きあゐことなしと雖も- 念も妄念も眼淨た依して生ずるきのたは 非ざれぼばり - 而も色ばる所緣が眼前た現はれ來る時, 有分が二回生じて滅せる後, 唯作の音界か轉向作用を成じつ生滅す. それより眼識 が見る作用を. 次に異熟の音界が頒敢作用を, 次に異熟無因の音識界が推度作用を 唯作無因の音識界が確定作用を, 成じつ生滅す. その直後た速行が作用す.(남청1권 43)
[니야나띨로까역] Zwar gibt es beim Auge Weder Zügelung noch Nichtzügelung, uud nicht zufooge der Sensibilität des Auges Achtsamkeit oder Unachts amkeit. dennoch, sobald das Sehobjekt ins Gesichtsfeld eintritt, kommt nach zweimaligem Aufstrigen und Verschwinden des Unterbewußtsein das funktionnelle Geist-Element – indem es die aufmerkende Funktion vollaieht – zum Aufsteigen verschwindet wieder. Daruf entstehen und verschwinden nacheinander: das Sehbewßtseinm das die Sehfunktion vollaieht; dann das karmagewirkte Denk-Element, das die reziepierende Funktion vollzieht; dann das karmagewirkte wurzelfreie Denkbewusstseins-Element, das die prufende Funktion vollzieht; dann das funktionnelle wurzelfreie Denkbewusstseins-Element, das die feststellende Funktion vollzieht. Unmittebar darauf erfolgt die Impulsion.(WRtil. 26-27)
[니야나몰리역] Herein, there is neither restrain nor non-restrain in the actual eye faculty, since neither mindfulness nor forgetfulness arises in denpendence on eye-sensitivity. On the contrary when a visible datum as object comes into the eye’s focus, then, after the life-continuum has arisen twice and ceased, the functional mind –element accomplishing the function of adverting arises and ceases. After that, eye-consciousness with the function of seeing; after that, resultant mind-element with the function of receiving; after that, resultant root-causeless mind-consciousnesselement with the function of investigating; after that, functional root-causeless mind-consciousness-element accomplishing the funtion of determining arises and ceases. Next to that, impulsind impels.(PPmol. 24)
[크리스쫑 마스] Lecontrṓle – ou l’absence de contrṓle – ne conceme pas la faculté oculaire. Car la vigilance et l’inattention ne dépendent pas de la sensibilité de l’œil. Mais quand un objet visible surgit dans le champ visual, le mode-exist entiel apparait et cesse deux fois. Ensuḯte apparaissent tour à tour un element mental foncionnel qui joue le rȏle d’un toumant, une conscience oculaire-qui remplit la fonction de voir l’objet, un element mental resultant qui a pour fonction de le recevoir la fonction de la sonder, et un element de conscience mentale, fontionnel sans causes, qui a pour role de determiner. Vient alors l’impulsion.(CPmaes. 50)
위 문장의 번역을 난해하게 만드는 두 가지 용어에 대해 번역가들의 번역용어를 살펴보자. 우선 ‘바방가(bhavaṅga)’에 대한 전통적인 한역은 『해탈도론』에 의하면 유분(有分)인데, 미즈노고겐(水野弘元)의 일역은 ‘유분’을 그대로 사용했다. 역자는 ‘존재지속의 고리’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에 대해 근대 아비담마 연구자들 사이에 심리학적으로 잠재의식이라고도 말하는 무의식상태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최초로 『청정도론』을 영역한 뻬 마웅띤(Pe Maung Tin : PPtin. 25)은 초기의 불교번역자들처럼 ‘잠재의식(subconsciousness)’이라고 번역했고, 그후의 니야나띨로까(Nyanatiloka : WPtil. 27)의 번역도 ‘잠재의식(unterbewusstsein)’이었다. 그러나 원어를 살펴보면, ‘잠재’라든가 ‘의식’이라든가 하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교철학적 인식에 근대 심리학적 용어를 무작위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문제를 파생시키자, 니야나몰리(PPmol. 24)는 ‘생명연속체 또는 생활연속체(the life-continuum)’라고 번역했는데, 후에 깔루빠하나는 이 번역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도 딜타이의 생의 철학이나 후설의 현상학적 용어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역자는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크리스쫑 마스(Christian Maës : CPmaës. 49)의 불역인 ‘존재-모드(lemode-existential)’가 원어에 가깝게 번역한 것을 참고로 좀 더 원에에 가깝게 ‘존재지속의 고리’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한역의 『해탈도론』에서 속행(속행)이라고 번역한 ‘자바나(javana)’에 대해서는 리스 데이비즈 부인의 번역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뻬 마웅 띤(PPtin. 25)은 철학적 의미에서의 ‘통각(통각 : appercep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니야나띨로까(WRtil. 27)는 ‘통각’이란 본래 윤리적 판단에 국한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므로 잘못된 번역이라고 비판하고, 독역에서 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충동 또는 자극(impulsion)’이라고 용어를 사용했다. 그의 이후에는 니야나몰리(PPmol. 24) 영역에서도 크리스쫑 마스(CPmaës. 50)의 불역에서도 ‘충동이나 자극’이 ‘자바나’의 번역으로 일반화 되었다.
이 ‘자바나’만이 인식과정의 단계로 업을 만들고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이다. 역자의 견해로는. 인식과정을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속행이나 충동보다는 ‘통각’이라는 것이 훨씬 좋은 전역이라고 여겨진다. 통각이란 원래 서양철학에서 지각에 항상 수반하면서 다양한 지각들을 통일하는 의식을 말한다. 예컨대, 칸트에서 통각이란 감성적인 소여들을 하나의 의식 속에서 통일하는 의식을, 곧 모든 경험에 수반하는 자기의식이다. 여기에 불교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새롭게 개념적 규정을 한다면, ‘자바나’는 ‘감성적인 소여들을 하나의 의식 속에서 윤리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통각’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청정도론』은 그 주춧돌인 오직 전체 주석의 건축물속의 부분으로서만 적절하게 연구될 수 있으나 빠알리성전협회본은 간행의 빠알리어본 청정도론은 주로 삼장과 관련해서만 인덱스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주제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색인도 없다. 주석서와 관련해서도 『앗따살리니』와 『법구경주석서』, 『자따까주석서』만이 번역되어 있다. 니야나몰리에 의하면, 『청정도론』에서만 빠알리성전협회본의 『빠알리-영어사전』에 포함되지 않은 실제 단어와 단어들이 2백 40개가 넘는다. 사전의 서문에서 밝힌대로 출간되었을 때, 아직도 많은 책들이 수집되지 않았으며, 경장으로부터도 많은 단어들이 누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복주서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단지 빠알리본에 입각한 『청정도론』의 번역은 난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현대적 번역들은 테라바다 불교의 학문적 이해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다.
1) 베 마웅 띤의 청정도론 번역
뻬 마웅 띤( Pe Maung Tin : 1888 – 1973)의 『청정도론』의 최초의 근대적 영역은 무려 10여 년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제1권이 출판된 것은 1922이었고 제2권은 1929년, 제9권이 1931년의 일이었다. 그는 랑군의 피 사야도(Pyi Sayadaw)의 미얀마어 번역(Ragoon, 1914)을 참조하고, 주석서로는 스리랑카의 담마빨라(Dammapala)의 마하띠까(Mahatika)를 참조하여 영역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1975년 최근의 판본은 삼권을 합본한 것이다. 초기번역이라 주석적 설명은 거의 없으며, 문법학적으로는 니야나띨로까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The path of Purity, Pe Maung Tin(trans.). pali Text Society, London, 3 vols., 1922-31 Part 1: Of Virtue, Part 2: Of Concentration & Part 3: Of Understanding; Pali Text Society, Londen. Lodon. 1975.
2) 니야나띨로까의 청정도론번역
독일 비스바텐 출신의 빅쿠 니야나띨로까(Nyanatiloka : 1878-1957)는 젊었을 때는 음악이론과 바이올린, 피아노, 비올라, 클라리넷의 사사를 받았고, 불란서 파리의 음악아카데미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1897년 ‘전설’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작곡하여 비스바덴에서 공연하였다. 동시에 철학을 사랑하여 플라톤의 향연, 데카르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하르트만, 그리고 특히 쇼펜하우어를 공부했다. 그러한 그가 1903년 스리랑카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니야나띨로까의 『청정도론』의 근대적인 독일어 번역은 뻬 마웅 띤이 청정도론의 제 1권 영역의 출간을 시작한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니야나띨로까의 독역은 파란만장한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거쳐 1927-1940년에 걸쳐서 독일어로 완간되었다. 그의 번역은 미즈노고겐의 일역보다 10년이 앞서 1927년 시작되어 1931년
(제1장-제4장), 1935년(제5장-제7장)을 출간하였으니, 완간된 것은 미즈노고켄의 일역과 거의 동시에 1940년이었다. 그가 무려 13년에 걸쳐서 심혈을 기우려 완간한 이 책은 특히 의식과 형성의 상응관계의 복잡성을 구조적 분석을 통해 법수적으로 체계화했다는 데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Der Weg zur Reinheit, Nyanatiloka & Verlag Christiani (trans.), Konstanz, 1952(German)
3) 미즈노겐의 청정도론번역
미즈노겐(水野弘元 : 1901-2006)은 일본 큐슈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청정도론』의 근대적 일본어 번역을 시도하였다. 빅쿠 니야나띨로까 보다는 10년이 지난 후에, 남전대장경의 일환으로『청정도론』 제1권을 번역한 이후, 나머지는 약 3년간에 걸쳐서 완역하였다.
그는 특히 바빠뜨(P. V. Bapat)가 『해탈도론과 청정도론의 비교연구』(Vimuttimagga and Visuddhimagga: A Comparative Study)를 출간(Poona, 1937)한 이후에 그것을 참조하여 『해탈도론』(解脫道論)의 번역용어를 천착하여 이 번역을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한문문화권에서의 번역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다. 특히 청정도론과 삼장의 주석서들과 병행관계를 소상히 밝혀 놓은 것은 당시로서는 큰 업적이었다. 그러나 『해탈도론』의 한역적 술어를 사용하고 일본어도 남전대장경 특유의 고어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일본현대들도 읽기가 난해하다는 점과 니야나띨로까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의식과 형성의 상응관계의 법수적 체계화를 반영하지 못한 점과 전근대적인 한문술어를 사용한 번역이라는 점에서는 새로운 번역이 요청되는 시점에 와있다고 볼 수 있다.
水野弘元 南傳大藏經 62-64卷 淸淨道論 1-3卷 1937년-1940(昭和12-15년) 大藏經刊行會
4) 니야나몰리의 청정도론번역
빅쿠 니야나몰리(Nyanamoli; 1905-1960)는 영국 캠브리지에서 태어나 스리랑카에서 1949년 빅쿠 니야나띨로까 앞으로 출가하여 제자된 후에 『청정도론』을 두 번째로 영역했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독일어를 몰라서 스승의 저술을 읽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가 번역을 시작할 무렵 독일인 스승인 나야나띨로까가 편찮았다. 다른 사형인 독일인 빅쿠 니야나뽀니까(Nayanaponika)의 도움으로 『청정도론』의 번역에서 스승의 독일어 판본과 일부 대조하고 또한 쏘마(Soma) 장로에게도 자문을 구하여 1953년 완역하였다. 완역된 책은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사진석판술로 1956년 초판이 인쇄했다가 1991년 캔디에서 제3판을 출판했다. 니야나몰리의 번역 시스템은 원래 워렌(Warren)-꼬쌈비(Kosambi)의 빠알리 판본에서 분류된 패러그래프를 사용하였고 물질과 의식과 형성에 대한 구조적 분석은 스승인 니야나띨로까의 독역본을 전적으로 채용하였다. 이로ㅆ 그는 난해한 『청정도론』을 완성도가 높은 번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것은 독자들이 다른 번역과 쉽게 비교하여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역자가 배려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Bhikkhu Nyanamoli(trana.),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1991, 2011.
5) 크리스쫑 마스의 청정도론번역
크리스쫑 마스(Christian Maës)가 최근 2002년 들어서 불어로 『청정도론』을 번역했다. 그는 웨렌(Warren)-꼬삼비(Kosambi)의 빠알리 판본에서 분류된 패러그래프를 사용한 빅쿠 니야냐몰리의 영역의 번역체계를 따랐고, 독자들이 판본을 비교하기에 용이하게 처리하였다. 그러나 니야나몰 리가 참조한 담마빨라의 주석은 참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번역한 용어에 대한 일반적인 주석도 거의 없고 단지 본문의 인용문의 삼장적 출처를 밝혀놓았을 뿐이다. 니야나띨로까가 심혈을 기울인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한 법수적 분석도 전혀 반영하지 않아 본문이해가 어려운 결점을 지니고 있다.
Le Chemin de la Pureté, Christian Maes(trans.), Editions Fayard, Paris 2002.
§20. 중요한 번역술어의 해명
1) 담마(dhamma)와 가르침, 사실, 현상, 원리
다양한 의미를 지닌 빠알리어를 거기에 일대일 대응되는 하나의 한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역에서는 가능했지만 초기의 한역경전들을 보면, 동일한 빠알리어 경전들도 역자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역에서는 모든 담마(dhamma)를 법(法)이라고 번역하는 등의 번역에서의 경직성이 강했다. 이러한 경직성은 한역 장경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담마(dhamma; sk, dhamma)는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담마는 부처님에게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 이래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진리, 선행, 해탈의 기본적인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담마가 단지 인간역사의 특수한 시기에 나타나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넘어서는, 시공간적으로 보편적인 원리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실, 진리, 정의가 하나로 통일되어 최종목표인 열반으로
이끄는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사실을 말한다. 그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사실 속에서 부처님은 과학적 인과관계를 배제하지 않았고, 우주 자체를 전적이로 인간의 입김을 배제하는 무도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부처님에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담마는 심비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작용하는 ‘윤리적 우주 자체’로까지 확장된다.
담마가 담마라자(法王 dhammarāja)가 될 경우에는 그 의미가 ‘정의로운 왕’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담마가 복수로 나올 경우에는 가르침이나 사실을 의미하는데, 사실에는 단지 물리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실까지 포괄한다. 거기에는 십이연기의 고리,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 여섯 감역, 깨달음으로 이끄는 다양한 수행방법도 포함된다. 그리고 두 경전(SN. 12 : 33; 42 : 11)에서 발견되는 ‘이미나 담메나(imana dhammena)’는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전(SN. 7 : 9, 11)에서 발견되는 ‘담마싸띠(dhammasati)’는 ‘원리가 있다면’이라고 번역이 가능하다. 또한 복수의 담마는 ‘현상’이나 ‘원리’ 또는 ‘사실’ 또는 ‘ 것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빠띳짜싸뭇빤나 담마(paṭiccasamuppannā dhammā : 緣生法; SN. 12 : 20)는 연기법과 대칭되는 의미에서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연생의 법’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을 두고 로께 로까담마(loke lokadhammā; 22 : 94)라고 할 때 그것을 ‘세상속의 세상의 사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해석될 때는 담마는 ‘상태’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담마비짜야삼보장가(dhammavicaya sambojjhaṅga : 擇法覺支)의 경우에는 담마(dhamma)를 생략하여 ‘탐구의 깨달음 고리’라고 번역했다. 담마야따나(dhammāyatana : 法處)의 경우에는 마나야따나(manāyatana)에 대응되는 말인데, 정신의 감역에 대한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사실을 의미하지만 역자는 ‘사실의 감역’ 또는 사실의 세계로 번역한다. 따라서 담마싸띠빳타나(dhammasatipaṭṭāna : 法念處)도 사실에 대한 새김의 토대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필자가 사용한 사실이란 광의의 의미로 유의법(有爲法)은 물론이고 정신의 대상으로서의 무위법인 열반까지 포함하는 전체를 지시한다. 빅쿠 보디(Cdb. 1777)는 그러한 정신의 대상으로서의 담마에 대하여 ‘현상(phenomena)’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불교를 단순히 현상론으로 해석할 소지가 많고, 열반도 단지 현상으로 전락하므로, 이 말은 단지 정신적인 현상을 명확히 지칭할 때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피했다. 담마다뚜(dhammadhātu : 法界)도 역시 ‘사실의 세계’라고 번역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마노빈냐나다뚜(manovinnānadhatu : 音識界)는 ‘정신의식의 세계’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복합어의 뒷부분을 구성하는 담마는 문법적으로 독특한 성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카야담마(khayadhamma), 바야담마(anicca dhamma), 니로다담마(nirodhadhamma)에서 담마는 단순히 ‘것’이라고 하거나 ‘해야만 하는 것’이란 문법적 의미를 지니므로 그것들은 ‘파괴되는 것, 괴멸되는 거이고 소멸되는 것’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닛짜담마(anicca dhamma), 둑카담마(dukkhadhamma), 아낫따담마(anattadhamma)는 ‘무상한 것, 괴로운 것,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2) 쌍카라(sankhara)와 형성
빠알리어 쌍카라는 한역에서 행(行)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불교술어 가운데 번역하기 가장 힘들고 난해한 용어이다. 이 용어에 대한 현대적 번역에는 ‘결정, 구성, 결합, 형성, 의도’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형성이다. 원래 쌍카라(saṅkhārā)는 ‘함께 만들다(saṅkaroti)’의 명사 복수형으로 ‘함께 만드는 것, 조건 짓는 것’ 뿐만 아니라 ‘함께 만들어진 것, 조건 지어진 것’을 의미한다. 단어의 철학적인 특성상 주로 복수로 쓰인다. 이와 관련하여 일곱 가지의 교리적인 문맥이 발견된다.
➀ 십이연기에서의 형성은 무지나 갈애와 관련하여 윤회를 지속시키는 능동적이고 의도적인 형성이다. 여기서 형성은 업(kamma : 業)과 동의어이고 세 가지가 있다. 즉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SN. 12 : 2) 또는 공덕을 갖춘 형성, 공덕을 갖추지 못한 형성, 중성적인 형성(SN. 12 : 51)이다. 신체적 형성에는 호흡이 포함된다.
➁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pancakkhandha : 五蘊)에서 형성은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대한 의도(SN. 22 : 56)로서 분류된다. 이때의 형성은 의도로서,
느낌과 지각 이외의 의식의 정신적 동반자는 모두 형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착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다양한 모든 정신적인 요소들이 모두 형성에 속한다.
➂ 형성은 가장 넓은 의미로 모든 조건지어진 것(SN. 22 : 90)을 뜻한다. 모든 것들은 조건의 결합에 의해서 생겨난다. 형성이라는 말은 우주전체가 조건지어진 것이라는 철학적인 조망을 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제행과 일체는 바로 이 형성을 말하는 것이다.
➃ 형성의 삼개조 –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 – 가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과 관련해서 언급된다.(SN. 41 : 6) 신체적 형성은 호흡을 뜻하는데, 그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자에 도달하려면, 그 소멸의 순서는 언어적 형성, 신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다.
➄ 네 가지 신통변화의 기초(四神足)와 관련하여 정신적인 힘의 기초로서 ‘노력의 형성(padhāna sankhāra)’이 있다.
➅ 그 밖에 수명의 형성(āyusankhāra; SN. 20 : 6; 51 ;10), 생명의 형성(jivitasankhāra; SN. 47 : 9), 존재의 형성(bhavasankhāra; SN. 51 : 10)이란 개념이 있는데 그것들은 각각 생명력의 상이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➆ 그 밖에 이 쌍카라(saṅkhārā)와 연관된 수동태의 쌍카따(saṅkhata : 有爲)란 단어가 있다. 쌍카라가 조건짓는 것이라면 쌍카따는 조건지어진 것을 의미한다. 쌍카라는 의도에 의해서 활성화되는 능동적 조건짓는 힘으로, 조건지어진 현상인 쌍카따를 만들어낸다. 이에 비해서 상카따는 수동적인 의미로 쌍카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존재의 다발이나 여섯 감역이나 조건지어진 현상세계를 의미한다. 쌍카타에 대해서 한역에 유위(有爲)라는 번역이 있는데 역자는 때로는 유위 때로는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 번역했다. 그 반대의 용어 아쌍카따는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즉 무위(無爲)를 뜻하는데 바로 열반을 지칭한 것이다.
3) 나무루빠(nāmarupa)와 명색(名色) 및 정신·신체적 과정
나무루빠(nāmarūpa)와 명색(名色)이라는 말은 불교 이전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일자인 하느님(梵天)이 세상에 현현할 때의 그 다양한 현현에 대해 사용된 말이다. 현현된 세계는 다양한 이름과 다양한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쌍윳따니까야》에 명색의 우파니샤드적 의미를 나타내는 ‘외부에 명색(bahiddha namarupam)’이라는 단어가 나온다.(SN. 12 : 19) 명색(名色)은 유일자인 신의 이름과 형상으로 현현한 것을 말하는데, 그것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개체의 인식적 측면과 재료적 측면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불교에 와서는 이러한 인식적 측면이 명(名), 즉 정신이 되었고 재료적 측면이 색(色), 즉 물질이 되었다. 그래서 정신적 요소에 속하는 느낌·지각·의도·접촉·정신활동(vpadanā, sannā, cetanā, phassa, manasikāra; SN. 12 : 2)은 명(名)이고 물질적 요소인 땅·물·불·바람(地·水·火·風)과 거기에서 파생된 물질(upādāya rupam : 所造色)은 색(色)으로서 모두 합해서 명색이라고 한다. 따라서 명색은 ‘정신·신체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니까야》에서 정신적인 요소를 의미하는 명(名)에 의식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의식이 물질적인 신체(色)에 접촉하나 정신과 관계된 느낌·지각·의도· ·접촉 정신활동에 연결되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색의 조건으로서의 의식의 전개(vinnānassa avakkanti; SN. 12 : 59)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과거세로부터 새로운 유기체의 시작 조건이 됨으로써, 현존재를 향해 의식이 흐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명색의 전개(nāmarupassa avakkanti; SN. 12:39, 5, 64)라는 말은 새로운 유기체의 시작을 뜻한다. 역자는 문맥에 따라 특히 시에서 쓰일 때, 그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정신 신체적 과정’이라고 번역한다.
4) 칸다(khandha)와 다발 및 존재의 다발
불교의 가장 중요한 술어 가운데 하나가 오온(오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명색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역자는 오온이라고 하는 것을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pañcakkhandha : 五蘊)이라고 번역한다. 이 다섯 가지에는 물질(rūpa : 色), 느낌(vedanā: 受), 지각(sañña : 想) 형성(saṅkhārā : 行) 의식(viññaṇa :識)이 있다.
여기서 온(蘊), 즉 칸다(khanda)라는 용어는 PTS사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① 천연적 의미 : 크기가 큰 것, 육중한 것, 거친 물체, 예를 들어 코끼리의 엉덩이, 사람의 어깨, 나무등걸 등으로 하나의 단위를 지니며 크기가 큰 것을 의미한다. 물, 불, 덕성, 부 등도 포함된다.
② 응용적 의미 : 집합적인 의미의 모든 것, 다발, 덩어리, 부분품들, 구성요소 등이다.
붓다고싸는 칸다를 ‘더미(rāsi)’로 보았다. 그러나 칸다는 어깨의 근육처럼 다발로 뭉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단순히 더미라는 말은 긴밀한 연기적인 의존관계를 반영하기에는 통일성이없는 개별적 부품처럼 인식될 수가 있다. 역자는 그래서 다발이라는 말을 쓴다. 물질은 물질의 다발이고 정신은 인식의 다발이다. 그들은 상호 연관적으로 작용한다. 정신·신체적 복합체를 표현하는 칸다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존재의 다발’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칸다를 ‘존재의 다발’이라고 표현한다. 그 원리는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으로 가장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노끈의 강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는 어떤 하나의 가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닥이 때때로 겹쳐지고 엇갈리는 섬유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Die Starke des Fadens liegt nicht darin, dass irgend eine Faser durch seine ganze Lange lauft, sondern darin, dass viele Fasem einander übergreifen: Wittgenstein, L,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Ludwig Wittgenstein Werkausgabe Band I, Frankfurt am Main, 1984, S. 278)
초기불교에서 윤회는 바로 존재의 다발(五蘊)의 지속적 연결이고 그것은 바로 이 노끈의 연결과 유사하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한 가닥의 정신적 섬유로서의 자아(atta, sk. ātman)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주이적(住異的)으로 무상하지만 겹쳐지고 꼬이면서 상호의존하며 수반되는 섬유들로서의 오온에 의해 확증되는 지속성은 있다. 이것은 언제나 변화하면서 지속되는 불꽃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윤회하는 것은 이러한 존재의 다발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다발 가운데 물질, 느낌·지각·형성·의식이 있다. 이 강누데 물질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의미하므로 물질이고, 특수하게 명상의 대상세계인 색계(色界)일 때는 미세한 물질계라고 번역을 하고, 단순히 시각의 대상일 때는 형상이라고 번역한다. 느낌은 감수(感受)라고 번역하는 것이 포괄적이긴 하지만 일상용어가 아니므로 피하고, 주로 경전에서는 고락과 관계된 것이므로 느낌이라고 번역한다. 지각은 사물을 이를테면 ‘파란색을 파란 색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형성은 위의 쌍카라 항목 ①,②에 설명했으므로 생략한다. 의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대상의 존재를 단지 알아채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이 파란 색의 물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단계에서는 아무런 인식이 없다. 그것이 파란 색의 물체라는 것을 아는 단계는, 지각(想)의 단계이다. 그래서 ‘시각의식’이라는 말은 곧 ‘본다’와 같은 뜻을 지닌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존재의 다발을 역자는 위와 같이 번역했다.
그 밖에도 ‘칸다’라는 말이 단순히 ‘여러 가지’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상호의존하는 연결관계를 나타내므로 그때는 그냥 ‘다발’로 번역한다. 계행의 다발(sīlakkhandha : 戒蘊), 삼매의 다발(samādhikkhanda : 定蘊), 지혜의 다발(paññakkhandha : 慧蘊) 등이 있다.
5) 쌉뿌리싸(sappurisa)와 참사람
빠알리어 쌉뿌리싸(sappurisa)라고 지칭하는 말은 한역에서 다양한 번역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도 그 적절성을 찾기가 힘들다. 빠알리성전협회의 빠알리-영어사전(PED)에서 어원을 추적하면 쌉뿌리싸는 두 단어 싸뜨(sat=sant)와 뿌리싸(purise)로 구성되어 있다. 어원적으로 싸뜨(sat)는 어근 as ‘있다’의 현재분사가 약변화한 어간이다. 이 싸뜨(sat)는 빠알리성전협회의 사전에 의하면,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① 존재하는(existing : 有)
② 진실한(true : 眞) ③ 착한(good : 善) 따라서 싸뜨에는 어원적으로 착하다는 의미 이전에, 실재한다는 의미에서의 진실 즉 참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뿌리싸(purisa)는 원래 단순한 ‘사람’ - 시민적인 의미에서 –을 지칭하지만 쌉뿌리싸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역 중아함경 37에서 이쌉뿌리싸(sappurisa)는 선남자(善男子)라고 번역한다. ‘싸뜨’ 또는 ‘쌉’은 선(善)으로 ‘뿌리싸’는 남자(男子)로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북전에서 선(善)이라고 번역한 것은 송나라의 구나발타라(求那跋楕羅)가 어떻게 번역한 데 원인이 있겠지만,
아마도 북방불교권의 번역에서 많이 사용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붓다고싸는 쌉뿌리싸를 ‘진리(dhamma)를 따르는 진실한 사람(saccpurisa), 즉 선한 사람(kalyānapurise)’으로 정의하고 있다. (Pps. VI. 79) 이러한 고찰을 참고한다면 쌉뿌리싸는 단순히 선남자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외연이 보다 넓고 깊은 참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한역에서도 북전의 법구경에서는 덕인(德人), 북전 아함경에서 정사(正士), 선사(善士), 정인(正人)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역의 정인, 정사라는 표현은 참사람과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참고로 Pps. IV. 79에서는 쌉뿌리싸(sappurise)를 ‘가르침(法 : dhamma)을 다루는 진실한 사람(saccapurise), 또는 선한 사람(kalyānapurise)’으로 정의한다. 이것을 영역에서 호너(I. L. Woodward)는 ‘가치있는 사람(a worthyman)’, 리스 데이비즈는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the noble minded person)’이라고 번역하고, 가이거는 ‘완전한 사람(der vollkommenen Menschen)’으로, 빅쿠 보디는 ‘훌륭한 사람(a superior person)’으로 번역했다. 경전에서 참사람은 오계(五戒)를 지키는 차원의 윤리적 인간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 아니다. 협의의 의미로는 혈통전환자(gotrabhu : 種動姓者)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성자인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四雙八輩)이 되기 직전의 참사람의 반열에 입문한 자(種姓者)’의 단계를 말하는데, 그는 선정이나 출세간적인 길에 들기 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마지막 의식단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 사람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참사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참사람에는 고귀한 제자들이 모두 포함되며, 주로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의 무리(cattari purisayugani atta purisapuggala : 四雙八輩)를 지칭한다. 이 중에서 흐름에 드는 길을 가는 님(sotāpattimagga : 預流向), 흐름에 든 경지에 도달한 님(sotāpattiphala : 預流果) = 흐름에 든 님(sotāpattipanna : 預流者)이 있다. 흐름에 든 님은 열 가지 결박[十結 : dasa samyojjanāni] 가운데 ①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 : 有身見) ② 의심(vicikicchā : 疑) ③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silabhataparāmāsa : 戒禁取)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천상이나 인간계에 태어나 열반에 들기 위해 한 번 들아오는 길을 가는 님(sakadāgāmimagga : 一來向), 한 번 돌아오는 경지에 도달한 님(sakadāgāmiphala : 一來果) = 한 번 돌아오는 님(sakadāgāmin : 一來者)이 있다. 한 번 돌아오는 님은 열 가지 결박 가운데 위 세 가지와 더불어 ④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kāmarāga : 欲貪) ⑤ 분노(byāpāda 혹은 paṭigha : 瞋恚 혹은 有對)를 거의 끊어야 한다. 셋째, 미세한 물질계의 천상에 도달해서 노력없이 열반에 들거나 거기에서 생애의 절반을 경과하거나 경과하지 않고 열반에 들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가는 님(anāgamiphala : 不還向),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님(anāgamiphala : 不還果) = 돌아오지 않는 님(anāgamin : 不還者)이 있다. 돌아오지 않는 님은 위의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완전히 끊은 자이다. 넷째, 거룩한 길을 가는 님(arahattamagga : 阿羅漢向), 거룩한 경지에 도달한 님(arahattaphala : 阿羅漢果) = 거룩한 님(arahat : 阿羅漢)이 있다. 거룩한 님은 위의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은 물론 ⑥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rūparāga : 色貪) ⑦ 비물질계에 대한 탐욕(arūparāga : 無色貪) ⑧ 자만(mana : 慢) ⑨ 자기정당화(uddhacca : 掉擧) ⑩ 무명(avijjā : 無明)의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를 말한다. 이 가운데 거룩한 님을 제외하면 일곱 가지 학인의 단계에 있는 학인(sekha : 有學)이라고 부르고 거룩한 님은 학인의 단계를 초월한 무학(asekha : 無學)이라고 한다.
6) 승가(승가 : saṅgha)와 참모임
초기불교에서 교단을 의미하는 승가(saṅgha : 僧伽)에 관하여 비구승가(bhikkusaṅgha : 比丘僧伽), 비구니승가(bhikkhunīsaṅgha : 比丘尼僧伽), 사방승가(cattudisasaṅgha : 四方僧伽), 현전승가(sammukhīisaṅgha : 現前僧伽), 승보(saṅgharatana : 僧寶), 성문승가(savakasangha : 聲聞僧伽) 등의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재가의 남자 신도(upasila : 優婆塞), 재가의 여자 신도(upasika : 優婆夷)의 승가란 말은 나타나지 않는다. 재가신자를 포함시킬 때는 승가라는 말 대신에 사부대중(catasso parisa : 四部大衆)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승가 안에 재가신도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사방승가는 시간적으로 삼세에 걸쳐 확대되고 공간적으로는 우주적으로 확대하는 보편적 승가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이 사방승가 안에는 재가신도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방승가도 재가신도에 관한 언급이 없이 비구 비구니 승가의 확장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현전승가는 시간 공간적으로 제한된 사방승가의 지역승가생활 공동체이다. 이 현전승가 역시 비구 또는 비구니 승가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재가신자인 재가의 남자 신도나 재가의 여자 신도가 없이는 사방승가와 현전승가의 이념이 성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출가자는 생활의 물자를 얻기 위해 노동할 수 없으므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재가의 여자 신도로부터 의식주를 위한 필수자구와 의약자구(四資具)를 공급받아야 생활공동체로서의 현전승가가 유지되며, 재가의 남자 신도와 재가의 여자 신도로부터 승가람(僧伽藍), 승가람물(僧伽藍物), 방(房), 방물(房物)등을 기증 받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지시켜야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승가’ 즉 사방승가가 성립할 수 있다. 한편 승보라고 하는 것은 불교도의 귀의처로 종교적 신앙의 대상 가운데 삼귀의(三歸依)의 하나가 된다. 초기불교의 경전에서는 그 구체적인 범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구사론(俱舍論)이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그 범주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승보(僧寶)에는 비구 비구니 승가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흐름에 들지 시작한 님인 예류향(預流向)에서부터 열반에 도달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四雙八輩)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승보의 개념은 《쌍윳따니까야》(SN. 12 : 41)에서 규정하는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고 보시받을 만하고 예경받을 만하여 세상에서 위없는 공덕의 밭이다. (yadidaṁ cātteri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 esābhagavato sāvakasaṅgho, āhuneyyo, pāhuṇeyyo, dakkhiṇeyyo, anjalikaraṇiyo, anuttaraṁ puññakkhettam lokassa)’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제자들의 모임은 성문승가의 개념이므로 참사람의 모임인 승가를 역자는 참모임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을 수행승, 수행녀, 재가의 신도, 재가의 여자 신도라고 번역한다. 비구승가는 비구승가 또는 수행승의 참모임,
수행승의 무리로, 비구니승가는 비구니 승가 또는 수행녀의 참모임, 수행녀의 무리로 문맥에 따라 번역한다. 성문승가는 제자들의 참모임 또는 제자들의 모임으로 번역한다. 재가신도는 남자일 경우 청신사 또는 재가의 남자신자 또는 재가의 남자신도, 그리고 여자일 경우, 청신녀 또는 재가의 여자 신자 또는 재가의 여자 신도로 번역한다.
7) 싸디(sati : 念)와 새김
우선 역자의 번역과 다른 초기경전의 역자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진 번역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싸띠(sati)’에 대한 것이다. 최근에 위빠사나 수행자들 사이에 이 ‘싸디’를 두고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마음지킴’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싸띠’는 내용적으로,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인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을 알아채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고려한다면, ‘싸띠’를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몇 가지 모순을 갖는다. 첫째, 모든 가름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 ‘싸띠’에만 별도로 원래는 없는 마음이란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둘째, 올바른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질 수 있다. 셋째, 네 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의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두고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넷째, ‘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에는 ‘마음’은커녕 ‘챙김’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이 ‘싸띠’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직접 《쌍윳따니까야》에서 정의 내린 부분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름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anussarati anuvitakketi.), 그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한다.(SN. 45 : 3)’ - 을 참고하여 번역하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 여기서는 분명히 기억과 사유가 새김의 전제조건으로 확실히 ‘싸띠’에 대해 해석학적 설명,
즉 기억과 사유의 일치점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싸띠’라는 말은 범어의 ‘스므리띠’(sk 늑샤)의 빠알리어 형태로 원천적으로 ‘기억’이란 뜻을 갖고 있으나,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란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그 둘 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말을 찾던 역자는 ‘새김’이 가장 적당한 번역어라고 생각했다. 새김은 과거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조각(彫刻)’ - 물론 사유를 은유적으로 이해할 때 – 이라는 의미를 모두 함축하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Satipaṭṭḥānasutta MN. 10 : 念處經)에 ‘싸띠’가 주로 관찰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으로서의 새김과 관계된 것이다.
8) 요니쏘 마나씨까라(yoniso manasikāra)와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
그 다음에 번역하기 난해한 것은 요니쏘 마나씨까라(yoniso manasikāra : 如理作意)라는 단어이다. 우선 요니쑈(yoniso)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모태(母胎)적으로’라는 말인데,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이치에 맞게’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한역의 여리(如理)라는 말은 그 가운데 ‘이치에 맞게’라는 뜻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번역하기 어려운 것이 ‘마나씨까라(manasikāsa : 作意)’라는 말인데. 이 말을 ‘주의를 기울임’이라고 번역하면, 새김의 특성과 중복되므로 적당하지 않고, 한역에서처럼 작의(作意)라고 하기에는 일상용어가 아니라 그 의미가 애매해진다. ‘마나씨까라’는 마나쓰(manas)와 까라(kāra)의 복합어로 정신과 활동을 의미함으로 역자의 번역에서는 ‘정신활동’이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요니쏘 마나씨까라는 주석서(Srp. Ⅱ. 21)에 따르면, ‘방편에 의한 정신활동으로, 교리에 의한 정신활동에 의해서(upāyamanasikārena pāthamanasikārena)’의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리스 데이비드 부인(Bhikkhu Bodhi)는 《쌍윳다니까야》의 번역에서 ‘주의 깊게 기울임’이라고 해석했다.(Cdb. 1584)
니야나띨로까(Nyanatiloka)의 불교사전(Buddhisisches Wörterbuch)에서는 ‘철저한 또는 현명한 숙고’이고, 한역에서는 여리작의(如理作意)라고 한다. 역자는 피상적이 아닌 연기법에 따른 심오하고 근본적 정신활동을 뜻한다고 보고 한역에도 부합하도록, ‘이치에 맞게 정신 활동을 일으킴’ 또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임’이라고 번역한다. 아요니쏘 마나씨까라는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일으킴’ 또는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임’이라고 번역한다. 단, 요니쑈(yoniso)’가 단독으로 등장할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또는 ‘이치에 맞게’라고 번역하고, ‘아요니쏘(ayoniso)’가 단독으로 등장할 경우에는 ‘피상적으로’ ‘철저하지 않게’ 또는 ‘이치에 맞지 않게’라고 번역한다.
9) 비딱까(vitakka)·비짜라(vicāra)와 사유·숙고
그 다음으로는 바딱까(vitakka)와 비짜라(vicāra)가 있다. 아비달마적인 전통에 의하면 ‘적용된 생각’과 ‘유지된 생각’이라는 뜻이지만, 역자는 ‘사유’와 ‘숙고’라고 번역했다. 까마비딱까(kāmavitakka)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입각한 사유를 뜻하고, 그 반대인 넥캄마비딱까(nekkahmmavitakka)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여윔에 입각한 사유를 말한다. 이것이 첫 번째 선정에 응용되었을 때는 ‘비딱까’는 일반적 의식의 사변적 특징이 아니라 마음을 대상에 적용하는 기능을 말하고 ‘비짜라’는 마음을 대상에 안착시키기 위해 조사하는 기능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아비달마적인 것이고 어떻게 보면 새김(sati)의 작용 – 새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 앉는다 – 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경전상의 첫 번째 선정에 대한 정의 –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떠나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떠나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윔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다.(SN. 16 : 9) -를 살펴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사유와 숙고는 앞에서 이야기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입각한 사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여윔에 입각한 사유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착하고 건전한 즉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유가 정밀하게 지속되는 상태는 곧 숙고라고 볼 수 있다.
10) 싹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와 개체가 있다는 견해
그리고 학자들 사이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싹까야(sakkāya)와 싹까야딧띠(sakkāyaditthi; SN. 1 : 21)라는 말이다. 한역에서는 각각 유신(有身)과 유신견(有身見)이라 한다. 싹까야(sakkāya)는 싸뜨(sat : 有)와 까야(kaya : 身)가 합해서 만들어진 복합어이다. 그러나 해석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존재의 몸’ 즉 ‘존재체(存在體)’라고 번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무리’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까야라는 말은 ‘신체적 현존재(Das körperliche Dasein : Ggs. I. 313)’라고 번역했고, 냐냐몰리는 ‘체현(embodyment)’, 대부분의 학자들은 ‘개성(Personality)’, 빅쿠 보디는 ‘정체성(identity)’이라는 단어를 번역으로 취했다. 그러나 싸뜨(sat)라는 단어는 원래 바라문교의 철학의 ‘영원한 존재’에서 유래하는 실체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철학적으로 보면 무상한 존재에 대한 전도된 인식하에서 성립한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배경 하에서만 싹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가 ‘개체가 있다는 견해’ 또는 ‘개체주의’라는 번역이 가능해진다. 물론 그것을 ‘개성적 견해’, ‘정체성의 견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번역하면, 우리말 자체에서 현대 심리학과 관련해서 난해한 해석학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유신과 관련해서 가이거는 하늘소녀가 ‘신체적 현존재(sakkaya : 有身) 가운데 살기 때문에 불행하다.(SN. 9 : 6)’고 번역한 문구에 각각의 번역 ‘개성’이나 ‘정체성’이나 ‘체현’이나 ‘개체’ 등을 대입해 보면, ‘개체’가 가장 무난함을 발견할 수 있다. 역자는 《쌍윳따니까야》의 초판본에서 유신과 관련해서 ‘존재의 무리’라고 번역했는데 이를 ‘개체’와 ‘개체가 있다는 견해’로 수정한다. 그러나 이 개체라는 말은 단순히 개인이나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와 연관된 정신·신체적인 과정을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1) 봇싹가빠리나마(vossaggapariṇāma)와 열반으로 회향함
그리고 한글로 번역이 어려웠던 단어 가운데 하나가 봇싹가빠리나마(vossaggapariṇāma; SN.3 : 18)라는 단어가 있다. 한역에는 사견회향(捨遣廻向) 또는 향어사(向於捨)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버림 가운데 향하는’이라는 의미인데 그 향하는 목표가 어딘지 불분명하다. ‘자아-극복으로 끝나는(Krs. V. 27)’ 또는 ‘해탈에서 성숙하는(Cdb. 1524)’등의 번역도 있으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빠리나마는 ‘성숙하는, 끝나는, 회향하는, 돌아가는’의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붓다고싸(S게. I. 159)에 따르면, 봇싹가는 버림(paricaga)의 뜻을 갖고 있고 빠리나마는 뛰어듦(pakkhanda)의 뜻을 갖고 있어 ‘포기하여 뛰어듦’을 뜻한다. ‘오염(kilesa)을 버림으로써 열반(nibbāna)으로 회향하는’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승 불교권에서는 회향이라는 단어가 ‘방향을 튼다.’는 의미보다는 ‘공덕을 돌린다.’는 의미가 강해서 오해의 소지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열반으로 방향을 트는’ 또는 ‘열반으로 돌아가는’이라고 하면, 전자는 어감상 안 좋고 후자는 모든 것이 열반에서 왔다가 회향은 ‘오염에서 돌이켜 열반으로 향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역자는 봇싹가빠리나마(vossaggapariṇāma)를 ‘완전히 버림으로써 열반으로 회향하는’이라고 번역한다.
12) 닙바나(nibbāna)·빠리닙바나(parinibbāna)와 열반·완전한 열반
열반(pāli. nibbāna; sk. nirvana)은 잘 알려져 있듯, 글자 그대로 ‘불이 꺼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중적 불교문헌에서 열반은 이 생에서의 열반[nibbāna : 열반]을 의미하고, 완전한 열반(parinibbāna : 열반)은 임종시에 도달하는 열반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열반에 대한 이러한 적용은 잘못된 것이다. 토마스(E. J. Tomas)에 의하면, 빠알리어에서 ‘완전한’을 의미하는 빠리(pari)라는 단어는 ‘상태표현’에서 ‘상태획득’으로 변화할 때 덧붙여진다. 그렇다면, 열반은 ‘해탈의 상태’이고 완전한 열반은 ‘ 해탈 상태의 획득’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제로 이 양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동사인 ‘열반에 든다(nibbāyati)’와 ‘완전한 열반에 든다(parinibbāyati)’도 실제로 의미상 구별 없이 해탈의 획득 행위에 쓰인다.
명사인 열반과 완전한 열반도 모두 완전한 깨달음을 통한 궁극적 해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동시에 모두가 육체적인 몸의 파괴를 통한 조건 지어진 존재로 부터의 궁극적 해탈에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말이 수행승이 살아 있는 동안의 해탈에 적용될(SN. 12 : 51; 22 : 54; 35 :31) 뿐만 아니라, 부처님과 아라한의 죽음에도 적용된다.(SN. 6 : 15; 47 : 13)
완료수동분사형인 닙부따(nibbuta)와 빠리닙부따(parinibbuta)는, 명사들 닙바나(nibbāna)와 빠리닙바나(parinibbāna)와는 다른 어원을 가진다. 전자는 니르-브리(nir- vṛ ‘덮다’)에서 후자는 니르-바(nir-vā ‘불다’)에서 유래했다. 전자의 분사에 고유한 명사형은 닙부띠(nibbuti)이다. 이 닙부띠는 때때로 닙바나와 동의어로 쓰이지만, ‘완전한 고요, 적멸’ 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빠리닙부띠(parinibbuti)는 《니까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초기에 이미 두 동사가 융합되어 빠리닙부따가 완전한 열반에 든자를 지시하는데 사용하는 형용사로 쓰였다. 동사처럼 분사형은 살아 있는 부처님과 아라한(SN. 8 : 2) 뿐만 아니라 사멸한 부처님이나 아라한(SN. 4 : 24)의 수식어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수동분사형인 빠리닙부따는 시에서는 유독 ‘ 살아 있는 아라한’과 관련해서 쓰이고, 산문에서는 ‘사멸한 아라한’에 한정된다. 경전상에서 사용법으로 보면, 명사형인 빠리닙바나는 ‘아라한과 부처님의 사멸’을 뜻한다고 할지라도 ‘죽음 후의 열반’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이미 살아서 열반을 얻은 자가 사멸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상에는 두 가지 열반, 즉 ‘잔여가 있는 열반(有餘涅槃 : saupādisrsanibbāna)’과 ‘잔여가 없는 열반(無餘涅槃 : anupādisesanibbāna)’이 있다. 여기서 잔여란 갈애와 업에 의해서 생겨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의 복합체를 말한다.(Itv. 38-39) 전자는 살아 있는 동안 아라한이 획득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뜻하고, 후자는 아라한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의 남김 없는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양자는 이미 자아에 집착된 유위법적인 세속적 죽음을 완전히 초월해서 불사(不死 : amata)라고 불리며, 아라한은 이미 자아에 집착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五取蘊)의 짐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ohitabhāro)에 있기 때문이다.
아라한에게 죽음은 애초에 적용되지 않는다. 동일한 완전한 소멸임에도 차이가 나는 것은 잔여가 있는 열반의 경우에는 ‘마치 도자기 만드는 사람이 돌리고 있든 물레에서 손을 떼어버려도 얼마간은 계속 회전하는 것처럼, 열반을 얻은 성인도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결정된 얼마 동안은 삶을 계속하면서 업에 대한 고락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업에 의해서 결정된 삶이 바로 경전에 나와 있는 아직 남아 있는 다섯 가지 감관에 의한 고락의 체험이다. 그리고 육체적인 삶의 죽음과 더불어 업의 잔여물인 다섯 가지 감관마저 사라져버릴 때 잔여가 없는 열반에 이른다. 이러한 두 가지 열반의 세계를 주석서는 각각 아라한의 경지를 얻을 때의 ‘오염의 완전한 소멸(kilesapari nibbāna)’과 아라한이 목숨을 내려놓을 때의 ‘존재의 다발의 완전한 소멸(khandhaparinibbāna)로 구별하면서, 열반인 ’닙바나(nibbāna)’와 ‘완전한 소멸’ 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는 ‘빠리닙바나(parinibbāna)’를 상호 교환 가능한 동의어로서 본다.
그러나 경전상에서 사용방식은 위 두 종류의 ‘빠리닙바나’는 ‘닙바나’의 세계에 접근하는 사건으로 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빠리닙바나’는 소멸하는 행위이고 ‘닙바나’는 소멸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닙바나’는 한역을 통해 열반으로 잘 알려진 우리말이므로 그리고 해석학적 관점에서 많은 다양성을 지닌 고유한 언어이므로 역자는 열반 이외에 다른 번역을 취하지 않는다. ‘빠리닙바나’에 대해서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하면 빅쿠 보디가 번역한 것처럼 ‘궁극적 열반’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우리말의 어감상 어려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역자는 ‘빠리닙바나’를 그냥 ‘완전한 열반’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동사인 ‘빠리닙바야띠(parinibbāyati)’는 ‘완전한 열반’이라고 번역한다. 그 행위자 명사인 ‘빠리닙바인(parinibbāyin)’은 ‘완전한 열반에 든 자’라고 번역하고, 완료수동분사인 닙부따(nibbuta)는 열반과 관계되기도 하고 관계되지 않기도 - ‘빠리닙바야띠’와 ‘빠리닙부따’가 《맛지마니까야》(MN. I. 446)에서는 단지 말의 훈련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 하기 때문에 ‘열반에 든’이나 ‘적멸에 든’으로, 빠리닙부따(parinib buta)는 ‘완전한 열반에 든’이나 ‘완전히 적멸에 든’이라고 번역한다.
13)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sattatimsa bodhipakkhiyadhammā)
초기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sattatimsa bodhipakkhiyadhammā : 三十七助道品, 三十七普提分法)의 각 항목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1) 네 가지 새김의 토대(cattāro satipaṭṭhānā : 四念處)
① 몸에 대한 관찰(kāyānupassanā : 身隨觀)
② 느낌에 대한 관찰(vedanānupassanā : 受隨觀)
③ 마음에 대한 관찰(cittānupassanā : 心隨觀)
④ 사실에 대한 관찰(dhammānupassanā : 法隨觀)
2) 네 가지 올바른 노력(cattāro sammappadhānā : 사정근)
① 제어의 노력(saṃvarappadhāna : 律儀勤)
② 버림의 노력(pahānappadhāna : 斷勤)
③ 수행의 노력(bhāvanappadhāna : 修勤)
④ 수호의 노력(anurakkhaṇappadhāna : 守護勤)
3) 네 가지 신통변화의 기초(四神足 : cattāro iddhipādā)
① 의욕의 삼매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변화의 기초
(欲三摩地勤行成就神足 : chand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iddhipāda)
② 정진의 삼매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변화의 기초
(勤三摩地勤行成就神足 : viriy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iddhipāda)
③ 마음의 삼매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변화의 기초
(心三摩地勤行成就神足 : citt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iddhipāda)
④ 탐구의 삼매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변화의 기초
(觀三摩地勤行成就神足 : vimamsasamādhipa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iddhipāda)
4) 다섯 가지 능력(pañsa indiyani : 五根)
① 믿음의 능력(saddh´indriya : 信根)
② 정진의 능력(viriy´indriya : 精進根)
③ 새김의 능력(sat´indriya : 念根)
④ 집중의 능력(samādh´indriya : 定根)
⑤ 지혜의 능력(paññ´indriya : 慧根)
5) 다섯 가지 힘(pañca balāni : 五力)
① 믿음의 힘(saddhābala : 信力)
② 정진의 힘(viriyabala : 定進力)
③ 새김의 힘(satibala : 念力)
④ 집중의 힘(samādhibala : 定力)
⑤ 지혜의 힘(paññābala : 慧力)
6) 일곱 가지 깨달음 고리(satta sambojjhaṅgā : 七覺支)
① 새김의 깨달음 고리(satisambojjhaṅga : 念覺支)
② 탐구의 깨달음 고리(dhammavicayasambojjhaṅga : 擇法覺支)
③ 정진의 깨달음 고리(viriyasambojjhaṅga : 精進覺支)
④ 희열의 깨달음 고리(pītisambojjhaṅga : 喜覺支)
⑤ 안온의 깨달음 고리(passaddhisambojjhaṅga : 經安覺支)
⑥ 집중의 깨달음 고리(samādhisambojjhaṅga : 定覺支)
⑦ 평정의 깨달음 고리(upekhāsambojjhaṅga : 捨覺支)
7) 여덟 가지 고귀한 길(ariya aṭṭhaṅgika magga : 八聖道)
① 올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 正見)
② 올바른 사유(sammāsaṅkappa : 正思惟)
③ 올바른 언어(sammāvācā : 正語)
④ 올바른 행위(sammākammanto : 正業)
⑤ 올바른 생활(sammāājīvo : 正命)
⑥ 올바른 정진(sammāvāyāmo : 正精進)
⑦ 올바른 새김(sammāsati : 正念)
⑧ 올바른 집중(sammāsamādhi : 正定)
위의 가각의 번역용어와 그레 대한 설명은 이 《맛지마니까야》 안에서 찾을 수 있으나, 다만, 네 가지 신통변화의 기초에 대한 의의와 다섯 가지 능력과 다섯 가지 힘의 관계에 대해서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설명하기로 한다.
네 가지 신통변화의 기초에서 ‘신통변화의 기초(iddhipada)’란 말은 ‘초월적 힘의 기초’를 말하는데, 원래 잇디(iddhi)와 빠다(pada)의 복합어이다. ‘잇디’는 원래 ‘성공, 성장, 번영을 뜻하는데, 인도의 요가 전통에서 이 단어는 명상을 통해 도달한 특별한 성공, 즉 사건의 일반적 질서에 도전하는 놀라운 재주를 행하는 능력의 성취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재주는 인도의 영성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신적인 지위를 증진하는 기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중(三昧)의 성취를 통해서 명상수행자가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자연적 인과과정이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집중에 든 마음은 일반적인 감각적 의식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의 내밀한 관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명상이 성취된 요가수행자에게 자연적 인과과정의 기저에 놓인 깊은 존재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게 하여 신비적으로 보이는 능력을 구사할 수 있게 만든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합리적인 윤리체계로 묘사되고 순수한 명상체계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니까야》 자체에는 부처님께서 신통의 힘을 행사하고 제자들이 그러한 힘의 발휘에 능통한 것으로 기술된 경들로 가득 차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부처님은 그러한 초월적 힘을 획득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가 부정한 것은 그러한 힘을 책임질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에게 그러한 힘을 신도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이교도를 교화하기 우해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그는 그러한 힘을 지닌 것 자체가 그것을 소지한 자가 순수한 지혜를 지녔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부처님은 또한 ’여섯 가지 곧바른 앎‘ 또는 ‘여섯 가지 초월적 지혜’라고 번역되는 찰라빈냐(chaḷabhiññā : 六神通)는 보다 높은 지혜의 넓은 범주 속으로 신통을 포함시킴으로써 명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정신적 성취의 유형에 대한 확장된 해석을 제공한다.
① 여덟 가지 유형의 초월적 능력(iddhi : 神足通)
②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하늘귀(dibbasota : 天耳通)
③ 타인의 마음을 읽는 앎(parassa cetopariyañāņa : 他心通)
④ 자신의 전생에 대한 새김(pubbenivasānussati : 宿命通)
⑤ 타인의 업과 과보를 아는 하늘눈(dibbacakkhu : 天眼通)
⑥ 번뇌 부숨에 대한 궁극적인 앎(āsavakkhayañāņa : 漏盡通)이 있다.
이 가운데 첫 다섯 가지 곧바른 앎은 세속적인 것이고 명상수행자의 장식물로서는 바람직 할지 몰라도 해탈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마지막의 번뇌의 부숨에 대한 궁극적 앎은 출세간적인 것이고 점진적인 수행의 절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보다 넓고 심오한 영적인 성취를 여기에 포함시켜서 초기불교의 교리적 구조 안에 인도의 요가적 수행문화에서 높게 평가되는 신통을 포함시킬 수 있었던 반면에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영적인 성취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 넣을 수 있었다. 네 가지 신통변화의 기초는 이러한 곧바른 앎 또는 초월적 지혜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서, 세속적이건 출세간적이건 신통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길[三十七助道品]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다른 유형의 길과는 다른 경향을 갖고
있다. 다른 것들은 오직 깨달음과 열반의 실현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네 가지 신통변화의 기초는 여섯 가지 초월적 지혜의 획득뿐만 아니라 아라한의 최상의 신통을 획득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능력(오근 : pañca indriyāni)과 다섯 가지 힘(오력 : pañca balāni)은 동일한 정신적 요소의 선택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 관계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청정도론』(Vism. 491)에 따르면, 능력이란 제석천 또는 자재자를 의미하는 인드라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드라의 표지, 인드라의 의해서 나타난 것, 인드라에 의해서 보여진 것, 인드라에 의해서 생겨난 것, 인드라에 의해서 닦여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드라는 원래 강력한 번개를 뜻하며, 아리안 족이 인더스 강 유역에 정착했을 때 유목민에게 풍요를 가져다 준 것은 번개였다. 번개가 치면 몬순이 시작되어 들판을 비옥하게 만들고 풍요롭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드라는 능산적(能産的) 지배자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경전에서 인드리야는 이러한 능산적이고 지배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앙굿따라니까야》(AN. Ⅱ. 150)에 의하면, 아마도 능력은 잠재되어 있거나 약한 초기단계를 나타내는 것 같고, 힘은 강하게 나타나는 발전적 단계인 것 같은데, 경전에서는 이러한 견해에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 두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유형들이 동일한 성질을 갖는 유형의 다른 양상에 사용되는 것으로 그 명명만이 다를 뿐 병행한다고 선언한다. 그것들은 섬 주위로 흐르는 하나의 강의 두 흐름과 같다. 주석서의 해석에 따르면 다섯 가지는 자체의 제어 즉 자재(自在)의 측면에서는 다섯 가지 능력이 되고, 반대가 되는 것을 극복하는 능력의 작용(作用) 측면에서는 믿음의 능력이 되고, 불신을 극복하는 작용을 지니고 있다는 측면에서 믿음의 힘이 된다. 능력들이나 힘들 사이의 상호관계는 경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주석서(Vism. 129~130)에서 농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알아둘 가치가 있다 : 믿음은 지혜와 한 쌍이 되어 정신생활에서 감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균형을 취한다. 그리고 정진과 집중이 한 쌍이 되어 활성과 제어의 균형을 취한다. 새김은 그 어느 것들에도 속하지 않지만 각각의 쌍을 상호 강화시켜 긴장 속에 균형을 유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