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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서의 전달과 작중화자
강 돈 묵
수필은 생득적으로 작가의 삶이 드러나는 문학이다. 다른 장르의 문학이 전환적 표현을 들고 나옴에도 불구하고 전혀 주저함이 없이 비전환적 표현을 표방하고 있다. 이렇게 허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데에는 나름 깊은 고민이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출혈을 감내하면서까지 고집하려 하니 아쉬움도 있다.
우선 수필은 작가의 고백문학이기에 언제나 작가의 삶이 글 속에 녹아 있기 마련이다. 작가가 체험한 사실만을 가지고 글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은 수필가들에게 너무도 불공평한 요구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나 희곡작가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끌어들여 글을 쓸 수 있는데 반해, 수필가들은 미래를 떼어내고 과거와 현재만을 가지고 글을 쓰라고 요구하는 것이 되니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데도 수필은 생득적 특징만을 내걸어 계속 비전환적 표현만을 고집할 것인가.
또 수필에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에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수필이 작가의 삶으로 채워지는 문학 장르라면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치열한 삶의 현장이 리얼하게 그려져야 할 텐데, 이런 데에서는 빗겨가려 한다. 수필의 현장을 보면 삶의 현장이 그려지기는커녕 소재로 다루는 것마저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분명 작가의 삶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서 현장성이 열악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수필은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더 치열하게 현장에 충실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절박한 현장에서 비켜나와 관조와 회고와 달관과 사유만을 일삼는 수필가는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작가 자신이 드러나는 문학이라 하여 늘 수필가들은 점잔만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가. 삶의 현장에서 한 걸음 떨어져 나와 괜히 고고한 척 세상을 바라다보던 것은 지난 세월의 수필가들 모습이다. 이제는 작가라면 작가답게 자신이 처한 현실에 과감히 다가설 필요가 있다. 시대정신과 사회 문제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겨우 관조나 회고나 취미로 채우려했던 지난날의 안이함은 바꾸어야 한다. 수필가에게도 현실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결하는 작가정신이 요구됨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작가의 체험이라는 것은 분명 과거 지향적 처리를 요구하게 된다. 수필이 그동안 담당해 온 과거 지향적 사고는 수필의 내용에 한계를 긋는 역할을 해 왔다. 정보의 사회를 거쳐 창조의 사회를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것이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된 점은 없었을까. 농경사회에서의 추억이 빈번하게 자리하고, 물질문명에 물들지 않은 상태가 인간의 본질로 간주되어 독자들의 이목을 끌고 오지는 않았을까. 지난 세월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작품의 배경으로 깔아놓으면 대단한 가치로 여겼던 과거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나서기보다는 과거 농경사회 적 추억을 더듬는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가령 ‘고향’하면 으레 농촌이나 어촌이나 산촌이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아예 고향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을까.
수필이 진정 작가의 삶을 다루는 문학이라면 좀 더 현장과 밀착하여 치열하게 부딪칠 일이다. 삶의 주변이나 서성이는 수필가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꿰뚫는 작가여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도 수필가들의 진지함에 쌍수를 들 것이고, 그 치열함에 신뢰를 보내며 가깝게 접근해 올 것이다. 앞으로 수필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길은 바로 이 길이다. 삶을 토대로 하여 쓰는 글이면서 삶의 현장과는 일정한 거리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뒤틀린 구조다. 이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필가들이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삶의 현장을 누빌 필요가 있다.
또 이러한 심리는 작중화자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태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떤 위치, 어떤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술하는 입장에 따라 글의 전달에도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최선의 소통방법을 모색한다. 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구성도 달라져야 하고, 문장의 길이도 결정되어야 하고, 사용하는 어휘도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화법에도 변환이 필요하고, 작중화자의 역할에서도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을 화법이라 일컫는다. 여기에는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이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아무런 변경 없이 그대로 전달해 주는 방식을 직접화법이라 하고, 전달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전달해 주는 방식을 간접화법이라 한다. 이 화법의 정확한 활용은 전달 효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글 안에서 직접화법으로 하느냐, 간접화법으로 하느냐에 따라 얻어지는 효과는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직접화법이었던 말을 간접화법으로 바꿀 때에는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전달동사를 평서문, 의문문, 명령문 등에 맞게 전환시켜 주어야 한다. 또 인칭대명사와 접속부사도 적절히 문맥에 맞게 바꿔야 하며, 특히 시제의 일치를 위하여 전달동사가 과거형이면 종속절의 시제도 타당하도록 조절해야 한다. 이런 사항에 모순이 생기면 진실된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수필이 작가의 삶을 토대로 이루어지면서도 치열한 작가정신에서는 비켜서려는 태도는 화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과감하게 설파하지 못하고 빗대거나, 돌려서 말하거나 묵시적 전달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더러는 계산된 기법으로써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가 중심에서 조금은 이탈하여 수필의 주변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바라보려는 태도를 취한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한 발 물러서서 관망하려는 데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작중화자가 작품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기피하려는 태도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 더러는 의도된 작중화자의 처리와 화법으로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는 수필에서 작중화자가 갖는 기능과 화법이 갖는 효과를 살펴보기 위해 강호형의 <웃으면서 화내기>, 노혜숙의 <블프, 그들만의 잔치>, 그리고 박흥일의 <타작마당>을 살펴보기로 한다.
강호형의 <웃으면서 화내기>
수필이 작가의 삶에서 우려져 나온 글이란 것은 숙지의 사실이다. 작가의 삶 속에서 취택된 소재의 본질을 찾아내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수필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그마한 소재에 커다란 삶의 의미를 얹게 된다. 이때에 다른 이와는 차별화된 작가만의 시각이 있다면 독자는 더욱 감동하게 된다.
또 전달하는 기법이 특이하면 독자는 감동의 깊이를 더 한다. 그래서 수필가들은 언제나 전달의 효과를 위해 작중화자의 변환과 화법에 심혈을 기우리게 된다. 감동의 효과를 기대하며, 최선의 소통방법을 찾아나서는 것이 작가다. 글은 작중화자의 위치에 따라 이야기의 패턴이 달라진다. 그 방법도 주관적 위치에서 담대하게 기술하기도 하고, 현장감을 위해 직접화법을 차용하기도 한다. 수필에서 대화는 대부분의 경우 절약해 두었다가 요긴하게 활용하는 편이다. 이는 대화를 아껴두었다가 절대적인 자리를 찾아 효과를 배가시키려는 작가의 계산된 구성이다. 흔히 수필가들은 자신이 화자가 되어 담대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가장 요긴한 자리를 만났을 때에 직접화법을 등장시켜 의미를 배가시킨다. 대부분 수필가들은 대화를 요긴한 전달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호형의 <웃으면서 화내기>에서는 제목에서 말해 주듯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을 가지고 독자 앞에 나서고 있다. ‘웃다’와 ‘화내다’는 확실히 다른 감정이다. 그러나 이런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맛보고 드러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고민이다. 그것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면 심리 고약한 사람으로 밀리게 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작가는 이 문제를 서두에 올리면서 글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 같은 상반된 두 감정의 융합을 요구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는 통쾌감을 느낄 정도의 속이 시원한 재담이다. 이런 재담은 독자들의 체증까지 쏟아내려 배설시키는 효과를 얻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뇌리에 남아 삶의 활력소로 작용하게 된다. 배설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 작가 강호형은 이런 화법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코미디언 출신 정치인이 있었다. ‘코미디의 황제’ 고 이주일 씨. 그가 국회의원 임기 4년을 마쳤을 때 누가 소감을 묻자,
“처음 일 년 동안은 내가 국회의원이 돼서 거기 앉아있는 게 신기하더니, 나머지 삼년 동안은 저것들이 다 어떻게 국회의원이 됐을까 그게 신기하데.”
하더란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꾼들의 행태를 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반대, 인신공격, 신상 털기, 모욕적인 욕설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섬뜩한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당한 사람들이라고 점잖게 넘어갈 리가 없다. 일폐군폐一吠群吠, ―주거니 받거니 으르렁대는 서슬에, 그들이 언필칭 나라의 주인이라고 추켜세우는 국민들만 낯 뜨겁다 못해 화가 나서 차라리 코미디 같은 정치라도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웃으면서 화내기>에서는 여러 개의 명쾌한 재담을 동원하여 큰 효과를 얻고 있다. 코미디언 출신의 과테말라 대통령의 재담, 국회의원 이주일의 회고담, 영국 처칠 수상의 재담, 독일 철의 여인 대처수상의 재담,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재담, 그리고 한국의 정치가들의 재담을 들먹이면서 오늘날 한국 정치 현장에 밀착시키고 있다.
요즈음 한국 정치가들의 화두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이다. 책이 나오지도 않았고, 집필진도 꾸려지지 않았는데 야당에서는 친일을 들먹인다. 이에 대한 말싸움에서 작가는 야당의 재담을 인용한다. ‘ㄸ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압니까?’ 그러면서도 이 재담을 입에 담은 야당 대표의 처절한 처지에 연민을 느낀다. 대통령 선거는 물론 재보선에서 연패하여 비주류의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그의 딱한 처지 때문이다. 그래서 ‘ㄸ’에 얽힌 또 다른 속담을 내세우며 작가의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대변한다. ‘ㄸ싸고 매화타령 한다.’
강호형의 <웃으면서 화내기>에서는 직접화법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직접 전달하는 기법을 선택함으로써 신뢰의 바탕을 구축한다. 수필의 구성에서 절제된 대화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여운의 효과까지 주는 매력적인 기법이다. 작가 강호형은 인용한 여러 에피소드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대화를 처리한 부분만을 독자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글의 묘미를 한층 더 살리고 있다. 거기에다 골개가 들어있는 부분만이 제시되어 독자들은 그것을 접하는 순간마다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된다.
상반된 두 감정의 굴레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고민이다. ‘웃을 일보다 화나는 일이 많은 세상을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웃으면서 화내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작가의 마무리는 그래도 현실에 대한 끝없는 애정임이 틀림없다.
노혜숙의 <블프, 그들만의 잔치>
작가가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하나의 배설작용이다. 작가는 그 배설작용을 문자를 통해서 행동으로 옮긴다. 문자의 조립으로 완성된 배설은 작중화자가 어떤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경우, 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 제 이야기를 남의 입을 빌어 하는 경우,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처지에서 하는 경우, 아주 다양한 작중화자의 변환이 가능하다. 이의 선택은 작가가 말하려는 내용에 따라, 또 기대하는 효과에 따라 결정될 일이다. 그래야 체증이 내리쏟아지는 시원한 배설을 경험할 수 있다.
작가 노혜숙은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현실에 철저히 끼어들어 고민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속으로 파고들어 체험하고 판단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나 되듯이 현장과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아예 첫 문장에서 자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시한다. “나라님이 온 백성을 위해 큰잔치를 배설했다. 잔치는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블프: 블랙 프라이데이 약칭)’라고 명명했다.”고 확실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작가의 고민은 또 있다. 어떠한 위치에서 웅변해야 효과가 있을지를 헤아려 본다. 자신이 느낀 바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나면 작가 일 개인의 생각으로 멈추게 된다는 사실도 안다. 작가는 고민 끝에 자신을 완전히 객관화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야 자신에 멈추지 않고 사회 속으로 확대해 갈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것은 작가가 체험한 현실을 고발함에 있어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려는 욕심이기도 하다.
소시민 노 씨는 근처에 마련된 잔치마당으로 구경을 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꽹과리소리가 요란한 것이 제법 흥겨운 판이 벌어졌는가 싶었다. 고개를 빼고 잔치판으로 들어서니 이게 웬일인가. 상하上下가 뚜렷이 구별되어 상이 차려져 있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상석엔 입장절차가 까다로웠다. 평소 산해진미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입석불가였다. 규정을 어길 시 심각한 소화불량에 걸린다는 이유였다. 하석에 차려진 음식은 굳이 잔치음식이라 할 것이 없었다. 흔히 먹던 가정식백반이기 때문이었다.
노 씨는 산해진미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켰다. 앞앞에 놓인 팻말에는 한 달 급여에 해당하는 숫자가 씌어 있었다. 저 음식을 다 먹는다면 소화불량이 아니라 급체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관의 기회는 주어졌으나 그림의 떡처럼 먹어볼 수 없는 잔치에 노 씨는 허기가 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심사가 뒤틀린 노 씨는 밤새 ‘블프’ 해석 작업에 들어갔다. 결과는 이러했다.
작가 노혜숙이 이 글에서 ‘소시민 노씨’로 시점의 변화를 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 자신이 작중화자이면 1인칭 시점으로 ‘나’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끌고 가면 된다. 그런데 작가는 굳이 ‘소시민 노씨’로 변환시켜서 의미의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철저히 객관화시켜서 효과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 글에서 ‘소시민 노씨’가 작가 자신임은 뒤에 일층 이벤트 매장에 가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대를 가지고 건질 만한 물건을 찾아 기웃거리던 나는 매장을 빙빙 돌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노씨가 갑자기 ‘나’로 변환되고 있다. 하나의 글에서 작중화자가 바뀌는 것은 더 깊이 고민해 볼 일이지만, ‘소시민 노씨’가 작가 자신임이 확실해지는 대목이다.
이 글에서의 작가가 ‘소시민 노씨’로 변환하여 독자 앞에 나서는 행위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비열한 행동이 아니고, 글의 전달 효과를 헤아린 치밀한 계산에서 얻어낸 결과이다. 작가 노혜숙은 대한민국을 쇼핑하라며 거창하게 벌린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가 큰 실망만 안겨주었다고 비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블프’를 ‘블랙 구라데이’라고 비꼬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삶터인 현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현장에 뛰어들어 그곳에서 느끼고 어그러짐을 지적을 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작가는 현장 고발의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한다. 전통시장은 철저히 배제된 대형 백화점만의 잔치인 점, 할인율의 수정으로 먼저 구매한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손해 의식, 할인율은 높였으나 올린 가격으로 인해 행사 의미 퇴색, 화장품과 가전제품과 명품 브랜드의 불참, 워낙 고가인 제품으로 느껴야 하는 위화감 같은 것들 때문에 제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 노혜숙의 고발의 초점은 결국 이러한 일을 자초한 정치인들에게로 맞춘다. 아무리 긍정 시각으로 바라보려 해도 그러지 못하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 정부가 끼어들 일이 아니며, 환경이 다른 미국 정책의 모방은 안 된다는 지론이다. 소비자, 제조업체, 유통업체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정책이어야 한다고 방향도 제시한다.
작가 노혜숙은 한국수필의 현실이 치열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달관과 회고와 관조와 사유만을 일삼는 데에서 빠져나와 현장감 있는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작중화자를 자신이 맡지 많고, ‘소시민 노씨'에게 넘김으로써 고발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박흥일의 <타작마당>
놀이터는 어린이들의 공간이다. 어른들에게는 어린 날을 추억할 수 있는 그리움의 공간이다. 작가 박흥일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터의 그네에 몸을 맡기고 싶은 적이 있었지만, 차마 겸연쩍어 그러질 못하였다. 늦은 밤의 고요를 틈타 실행에 옮기고 보니 어김없이 달그림자를 밟고 뛰놀던 타작마당으로 끌려가고 만다.
박흥일의 추억여행이 시작된다. 그 추억의 공간적 배경은 타작마당으로 한정한다. 그러나 시간적 배경은 전후좌우의 구분이 없다.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에 무슨 질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지각 당시의 자극의 크고 작음에서 더 남고 지워지고 한 추억이니, 어쩌면 떠오름의 순서는 자극의 정도에 맞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픈 추억이 앞에 놓이는 것은 그만큼 자극이 컸다는 증좌이다. 아픈 추억이 지나가고 나니 이제 특이했던 추억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지난날에 경험한 추억여행은 계속된다.
설익은 완두콩을 따먹다 책 보따리를 빼앗긴 채 타작마당에 손을 들고 꿇어앉아 벌을 받았지. 눈먼 동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옆집 할머니의 꽃상여가 타작마당에 눌어붙는 바람에 상두꾼들은 ‘어화 넘자’를 외치며 목이 쉬었지. 대보름 달집에 콩을 볶아 먹으면 이빨이 튼튼하다는 말에 숯다리미를 들고 자리다툼도 하였지. 뒷집 형님은 생솔가지 겨울 땔감을 바리바리 해놓고,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타작마당 귀퉁이에서 큰절을 올리고 황소 눈물을 훔치며 군대로 갔지. 옹헤야 도리깨소리가 멎고 보리타작 짚불에 간칼치 굽는 냄새가 진동하면, 꼴깍거리는 침을 참느라 목구멍이 아렸지. 타작마당을 명경같이 쓸고, 우물을 치고, 장승에 금줄을 치고, 집집이 청솔가지를 세우고 황토를 뿌리던 날, 지신밟기 풍물패가 꽹과리를 치며 타작마당을 돌았지.
타작마당은 입방아 방송국이었지. 동동구리무 방물장수가 타작마당에 전을 벌리면 동네 누나들이 모여들어 도회지 냄새를 맡았지. 딸막이네 엄마가 씨받이를 들인다는 입소문도 타작마당에서 펴졌지. 여동생을 업고 놀면 등이 갈라진다는 뜻 모를 소리도 타작마당에서 들었지.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낯선 남자 품에 얼싸 안겨♬∼.’옆집 마도로스 형님의 유성기를 듣고 귀동냥한 ‘댄스의 순정’을 멋모르고 부르다가 엄마 손에 끌려 나가 뒤통수를 맞았지.
자신의 기억에 떠오른 사건들의 기술에서 작가는 현재의 상황과는 차별되는 기술방법을 취하고 있다. 현재 상황은 흔히 사용하는 서술형 종결어미를 사용하고, 추억 속의 상황은 이와 다른 종결어미 ‘-지.’ 하나로 국한하고 있다. 그것도 과거의 기술이니 앞에 반드시 과거시제를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았/었-’을 붙여서 사용한다.
이 ‘-지’는 용언이나 ‘이다’의 어간 또는 선어말어미 ‘-으시-’, ‘-었-’, ‘-겠-’의 뒤에 붙여 사용하는 종결어미이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친근한 말투로 서술하는 뜻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실에 대하여 상대에게 친근한 말투로 묻는 뜻을 나타내거나, 말하는 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상대에게 다시 확인하여 묻는 뜻을 나타내거나, 상대에게 어떤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는 뜻을 나타내거나, 상대에게 어떤 행동을 하도록 권유하는 뜻을 나타내는 해체형의 어미이다.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일을 기술하는 서술어의 종결어미를 ‘-지’ 하나로 국한한 것은 무슨 의도일까. 여기서는 현재의 일반적인 기술과는 차별화하여 과거의 것을 드러내려는 화법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추억을 친근하게 기술함으로써 추억여행의 분위기 조성에 기어코자 한 배려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런 기술의 방법은 일부 독자들에게는 식상한 기법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견해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열거나 사건의 열거는 각별히 주의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글 쓰는 이들이 가장 실수하기 쉬운 문장이 열거문장이다. 열거를 할 때에는 통사론적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하고, 열거되는 사물이 동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또 열거하는 어휘도 순서가 있다. 가령 화단에 있는 화초를 열거해도 눈에 보이는 대로 기술하기보다는 춘하추동의 순서를 잡고, 초본과 목본의 가름을 한 다음 꽃의 크기와 같은 것으로 순서를 잡아 기술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열거하는 어휘 앞에 수식어가 붙으면 뒤의 것까지 꾸미게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기억이 질서 없이 되살아나는 것이라 해도 <타작마당>에서는 그 기억들을 모아 분류하고 동질적인 것들은 묶어서 단락 처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순서를 잡아 기술하였더라면 독자들에게 부담을 덜어주어 이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타작마당>에서는 작중화자가 작가 자신으로 되어 있지만, 굳이 ‘나’로 고개를 들이미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수동형이 발달하지 않은 한국어에서는 대부분의 문장 주체가 인간이다. 수필이 작가 자신의 고백문학이기에 주어가 ‘나’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문장 주체가 인간인데, 작가 자신이 작중화자라면 그 문장의 주어는 ‘나’인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굳이 ‘나’를 드러낼 필요가 없다. 이것이 한국수필 문장의 특징이다.
이번에는 수필에서 전달의 효과에 기여하게 되는 작중화자의 변환과 화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수필이 작가의 고백문학이라 하여 굳이 모든 수필이 1인칭만을 고집할 일도 아니며, 수시로 필요에 따라서는 시점도 변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쓰는 수필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 어떤 화법이 최선인가를 늘 고민한다. 글의 내용과 전달의 기대감 속에서 작중화자의 변환도 시도한다.
게재에 한번 생각해 본다. 사람의 말을 아무런 변경 없이 그대로 전달해 주는 방식인 직접화법에서 굳이 ‘말하다’라는 어휘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필요 없는 과소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직접화법은 반드시 따옴표(“ ”)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말하다’를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 ‘말하다’를 붙이는 것은 이중소비이고, 비경제적이라는 생각이다. 차라리 그 여유를 다른 부분의 표현에 할애해 주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사실 기왕의 문장에서 ‘말하다’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면 매우 다양하다는 데에 놀라게 된다. 그만큼 이 말의 쓰임이 복잡하고 섣불리 쓸 수 없는 어휘이니 아껴서 써야 한다.
작중화자의 적절한 변환, 분위기에 맞는 정확한 화법은 전달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글의 내용은 작중화자의 위치에 따라 그 효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좀 더 올바른 화법을 익힘으로써 전달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자 함은 작가들이 갖는 소망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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