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숨겨진 문화유산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어느 디지털카메라회사의 광고 문구다. 우리는 어릴 적 일기를 통해 까마득히 잊었던 기억의 실마리를 끄집어낸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을 설계 기록을 통해 원형대로 복원하기도 한다. 기억은 잊혀진 역사를 되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반면 망각은 역사 앞에 가장 큰 죄악으로 남기도 한다.
무너진 건물이나 하찮은 기록조차도 후손들에게는 소중한 기억과 유산으로 남는다. 좋은 기록뿐만 아니라 나쁜 기록 또한 그 시대의 아픔을 품고 있는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오래전 프랑스국경에서 멀지 않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옛 성을 여행한 적이 있다. 독일은 프랑스와 전쟁 당시 나폴레옹군대의 함포공격으로 파괴된 하이델베르크 성을 허물지 않은 채로 보존, 오늘날 유럽에서 손꼽히는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이 성을 보면서 독일인들은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성을,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 군대가 독일에 본때를 보여준 승전지였다는 자긍심을 갖는다고 한다.
호반의 도시, 안개의 도시 등 낭만적인 관광도시로 불리는 춘천은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기록이 없는 도시'로 회자돼 왔다. 고려 때에는 몽골침입으로, 조선시대엔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일제강점기 때엔 화재로 강원도청의 주요 건물과 자료들이 소실됐고 6.25전쟁으로 도심지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래서인지 문화재로 지정된 춘천의 옛 건축물로는 청평사 소양정 조양루 위봉문 등 채 열 곳도 안된다. 근대건축물은 6.25 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대부분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공건물의 경우 1959년에 강원도청사와 춘천시 청사가 잇달아 건립돼 근대건축사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현 춘천시청 본청건물은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남아있는 근대 건축물이라는 상징성이 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 시청사 뒤편 강원도지사 구공관의 경우 시청사보다 7년 뒤에 준공됐지만 보존가치를 인정받은 등록문화재로 이미 등재됐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민간 건축물쪽으로 눈을 돌려 보자. 후평동에는 100년이 넘는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언제 없어질지도 모를 옛 가옥이 한 채 있어 그 곳을 찾을 때마다 늘 마음이 안타깝다. 일제강점기 때 이규완 초대 강원도 지사가 지어 살던 고가옥으로 흔히 '이규완 가옥'이라고 부른다.
소설가 오정희 선생의 작품 ‘옛우물’ 속에 나오는 연당집이자 바보네 집이라고 알려지면서 아름아름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홍천출신 목수가 지었다는 이 집은 전통한옥 건물에다 네모지게 판 연못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게 설계한 2층의 누각을 잇대어 지었다.
춘천에서 2층 누각을 갖춘 한옥으로는 최초의 가옥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못 옛우물 목욕탕 저장고 창고 등을 잘 갖춰 고풍스러운데다 규모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쉽게도 2002년에 난 화재로 건물내부가 상당부분 불에 심하게 타 비오는 날엔 을씨년스럽다.
(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는 2012년 11월 유적답사를 통해 이규완 가옥이 갖는 근대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 조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 해 12월 춘천문화원에서 ‘춘천은 살아 있다’라는 주제로 열린 춘천의 건축유산 출판기념회 겸 열린 전시회를 통해 이규완 가옥의 실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강원대학교 건축학과에서 최근 이규완 가옥을 대상으로 정밀 실측작업을 마쳐 그 연구결과가 주목된다. 이규완 지사를 모델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인 소설가도 있다니 자못 거는 기대가 크다.
고가옥을 문화유산으로 정해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등록문화재'라는 제도가 있다. 이 제도는 기존의 문화재보호방식인 ‘지정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존의 지정제도는 규제에 의한 원형보존을 위주로 하므로 규제가 따른다. 반면 등록문화재 제도는 문화유산을 활용하면서 보존도 하는 게 주목적이어서 소유자가 등록문화재를 여러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가옥이 등록문화재인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가옥 소유자는 등록문화재 내부를 레스토랑, 민박, 판매점 등으로 꾸며 사업을 할 수 있으며, 개인박물관, 전시관, 교육관 등 공익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외관의 1/4 미만을 고치는 경우는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1/4 이상 변경시에만 관할 시,군,구 등에 신고하도록 사전신고절차도 쉽게 했다. 이규완가옥의 경우 등록문화재 등재 조건인 준공 50년 이상된 건축물인데다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해 등록문화재 등재가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와 관심있는 춘천시민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 밖에도 춘천시는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향토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는 길을 터 논 바 있다. 시는 지난 2013년 10월 31일 춘천시내에서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아 보호 관리할 수 있도록 ‘춘천시 향토문화유산 보호조례’를 제정 공포했다. 지정문화재나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지 않고도 보존관리에 드는 비용 일부를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조선시대 수부도시였던 원주시가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어 벤치마킹을 해도 좋을 듯 싶다. 원주시의 경우 일찌감치 지난 2007년에 향토유적보호조례를 제정해 지금까지 경천묘 창의사를 비롯해 모두 6개의 향토유적을 지정했다. 지난해에는 그동안 유형 향토유적에 한정해 왔던 유산의 범위를 무형 유적과 유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조례를 전면 개정했다. 현재 '원주어리랑'을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용역 중이며, 조수익 등 여러 강원도관찰사의 묘역을 향토유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전수조사를 올해 초 이미 마무리했다. 더 나아가 원주시는 2000년대 들어 영원산성을 사적으로 승격시킨데 이어 근처의 해미산성을 도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이밖에도 몇 개의 유산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춘천시는 지난 2011~2014년까지 4년간 본청에 학예연구사가 없이 문화재업무를 일반직이 관리토록 해 왔다. 시는 본청에 한명 있던 학예연구사마저 2011년 산하기관인 춘천문화재단으로 보내 문화예술업무를 전담토록 한 바 있다. 이 시기를 고고학계나 지역향토사학계에서는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못지 않은 '제 2의 암흑기'라고 부른다.
지난해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외청에 근무하던 학예연구관을 본청 문화예술과에 복귀시키는 한편 8급상당 기간제 학예연구사를 충원했다. 춘천시의회와 관심있는 춘천시민들의 지속적인 학예연구사 충원 건의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학예연구사의 충원으로 지역향토사학계와 전문가들이 춘천시에 거는 기대가 크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하중도 유적지 발굴성과를 비롯해 '향토문화유산 보호조례' 홍보, 봉의산성 발굴 재개, 법화사지터 발굴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이 이들의 관심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이규완 가옥처럼 사실상 방치상태에 놓여 있는 비지정 문화유산에 대한 전면적인 실태조사도 시급히 착수해야 한다는 게 학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시민과 함께 짓는 시청사’ 제안을 공모 중인 춘천시는 당장 등록문화재인 강원도지사구관사와 근대 건축물인 현 시청사를 보존할 것인지, 아니면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을 것인지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시민의 의견을 들어 신청사를 짓기로 방침을 세운 춘천시는 '옷장정리'부터 시작해 '낡은 옷'들은 버리되 추억과 사연을 간직한 '옷'을 잘 골라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정재억 (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 회장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카페회원만 읽기 너무 아까운데신문에 기고를 하여 공론화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맞습니다. 역사를 이루는데는 몇백년이 걸리지만 허물어 없애는데는 눈깜짝할 새... 그러나 현실은? 부수고 새로이 짓는데 급급하니//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