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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힘
제1부 탐욕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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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월가와 금융은행 종사자들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2007년 시작된 금융위기,(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니알 퍼거슨)미국에 국한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가
월가 거대회사를 부도로 몰아가고 대서양의 은행들을 국유화 시킬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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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경제를 얼마나 초토화시켰든지 이 다큐멘타리의 제목을 '돈의 추락'으로 바꾸어야 되는게 아닌지
모르겠내요 돈이 우리에게 깊이 개입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랜 세월 내려온 금융사의 뒷 이야기,은행의 지원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었고,채권시장의 움직임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주식시장을 기반으로 대형제국이 일어섰고,화패가치의 붕괴가 프랑스 혁명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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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런던에 이르기까지 돈의 번영은 곧 인간의 번영이었다.하지만 결코 순탄치만 않았다.
금융사는 반복되는 위기의 역사였고 오늘날의 금융위기도 그 중 한페이지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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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부동산과 중국의 산업화까지 금융의 막대한 힘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은행이 파산하거나 금융시장이 붕괴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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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과 프라임 대출의 차이는 무엇인지,돈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가 쉬울텐데,이래서 금융사,
제1부 탐욕의 시작, 금융위기라고 하지만 세계에 떠도는 돈의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올해 미국의 총통화 공급규모는 8조7천억 달러로 작년보다 12%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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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돈을 챙기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대공황이후 펀드매니저 조지소로스는 작년에 24억 달러를 벌었다.미국 평균연봉의 4만천배에 이르는 금액
이고,월가라면 잘 했다고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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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약500년전 잉카제국에는 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잉카인들은 귀금속을 미적인 가치로만 평가함.금은 헤비메탈,은은 달님의 눈물이라고 했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은 가치의 단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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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532년 돈때문에 바다를 건넌 유럽남자(프란시스코 피사로)를 만났다.
이 남자는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함.엘도라도의 전설을 따라 페루를 찾은
피사로와 개인 정복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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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하마르카(페루 북부 산악지대 카하마르카 주의 수도로 잉카문명의 흔적이 발견됨)전투에서 잉카군을
무찌러고 본격적으로 금을 찾아나섬.부의 언덕이라는 곳에서 해발 4800미터가 넘는 산은 말 그대로 돈의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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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통치 250년 동안 안데스 산맥 광산에서 무려 6만2천톤이상의 은을 캐냈다.
잉카인은 왜 금과 은에 열광하는지 의아해 했다.피사로와 그 동료에게는 금속이상이었다는 이해하지
못했다.금과 은은 곧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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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저장,계산의 단위,휴대할 수 있는 권력이었다.광산의 동굴에서 원주민들은 여기서 일을 했다.
8명중 1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광부들은 비슷하다.원주민을 학대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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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낸 은은 수은으로 정제한 뒤에 은궤,은전으로 만들어 유럽으로 보냈음.스페인 왕들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으로 부유해졌다.포토시에서 캐낸 은으로도 스페인의 정치적,경제적 몰락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은의 가치를 타락시킬 정도로 은을 너무 많이 체취한 것이 피사로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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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전은 스페인을 더 이상 부유하게 해주지 못했다.똑같은 물건에 더많은 가치가 매겨지면서 가격이
오르기만 했다.은은 그 교환가치 만큼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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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토판에 금융거래를 기록했음.중요한 것은 점토판 주인에게도 곡식을
4되를 주었다.영국의 지폐에 문구"소비자 요구시 20파운드를 지불할 것을 약속합니다"가 있다.
지폐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나 바빌론의 점토판과 같이 지불하겠다는 약속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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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 10달러 뒷면에는"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라고 씌어 있다.우리가 믿는 신을 의미하지는 않고 물건
이나 노동을 제공하고 종이 지폐를 받는 것은 과거 스페인과 같이 너무 많은 은으로 가치를 떨어뜨리듯이
종이의 질을 떨어뜨리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그 가치를 믿고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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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돈에도 만족을 한다.외환딜러는 컴퓨터 화면으로 환을 사고 파는 일을
한다.(하루 3조달러가 오고 간다)모두 신용만으로 가능하다 돈은 없지만 믿는다는 것이다.
이 점을 스페인 정복자들은 간과했는데 돈은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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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를 발행한 중앙은행에 대한 믿음,화폐를 발행한 은행에 대한 믿음,돈은 금속이 아니라 믿음인 셈이다.
은이나 금속,종이든 받는이가 믿으면 그 뿐이다.돈은 상호신뢰 체제의 근간을 이루며 오늘 빌려준 돈을
내일,모래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신용=크레딧은 라틴어 크레도=나는 믿는다가 그 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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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이란 믿음이 없으면 세계 경제사는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다.현대의 대출과 차용이 얼마나 의존적
인지 모른채 살고 있다.돈이 세상을 모두 움직이지 않고 물건,용역 들도 있다.고대 도시 바빌론도 그렇고
볼리비아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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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예상과 달리 초기 대부업자들은 환영받지 못했다.고마워 하기는 커녕 천대를 받았다.
이유는 서기 1200년경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도시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로마유산 중 하나인 단위가
커지면 숫자계산이 복잡해지는 체계였다.
각기 다른 주화가 유통되던 피사에서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숫자중심의 정립이필요했는데 간단한 계산에도
주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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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동방제국인 이슬람과 중국 송나라의 경제활동은 훨씬 발달했다.유럽은 근대적인 재무체계를 도입
해야 했다.이 때 피이사에서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같은 젊은 세관원의 아들로 그의 이름을 딴 피보나치
수열로 유명하다.동양수학 사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슬람 숫자가 로마숫자보다 우월하다고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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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부터 로마인들은 간단한 셈조차 어려워 했다.그런데 아라비아 숫자를 쓰니 종 계산을 쉽게 할 수
있었다.로마자로 백분률로 계산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나 피보나치는 이자 계산법,백분률 등에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고,이후 수학을 응용(피보나치의 리베르 아바치)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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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금융제도가 발전하기에 적합했다.피보나치의 고향 피이사도 그중 하나였으나
동방과 교류가 많았던 베네치아는 대부업의 시험장이 되었다.
베네치아는 문학사상 가장 악명을 떨쳤던 대부업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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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 고향 베네치아에 나오는 샤일록이다."베네치아의 상인",두캇(12세기~1차 대전까지 사용금화),
안토니오가 보증을 씀(신용이 있다는 말),배가 침몰하거나 위험에 대해서 대부업자는 보상을 받는것,
그 보상을 이자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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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 해외무역은 이같은 금전거래없이는 불가능했음.오늘날까지 국제무역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
근데 왜 샤일록은 돈대신 안토니오의 죽음을 요구했나.어째서 세익스피어는 악명높은 비정한 인간을 등장
시켰는가,그 해답은 샤일록이 대인이라는데 있음.베네치아에 2주 이상 머무는 유태인은 등에 커다란
원을 그리거나 머리에 둥그란 모자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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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누오보(유대인 강제 거주지역)라는 특정지역에 갇혀 살았다.
비록 천대받기는 했지만 유대인 존재는 용인되었다.그 이유는 기독교들이 하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그것이 바로 대금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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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보나치가 이자를 계산했을지 몰라도 이자를 거두어 드린 것은 샤일록이었다. 건물에서 유대인들은
돈놀이를 했다.작은 의자에 앉아서 돈을 거래했는데 이탈리아어"방크(작은 의자)"에서 은행이란 의미가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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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대인에게 돈을 빌리러 왔는가 하면 기독교인들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을 금지했다.
피렌체 대성당 천장에 중세의 엄격한 교리는 유럽의 금융발달을 가로 막았다.
상인이 이자를 받으면 지옥에 간다는 교리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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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벽화에 단테신곡이 있는데(제7지옥에는 고리대금업자 자리가 따로 있다),고리대금업자가 목에 무거운
지갑을 걸고 영원히 고문을 받는다.
이자를 받는 것은 유대인에게도 금기사항이다.구약 신명기에는 형제에게 이자를 받으면 안된다고 했다.
같은 유태인이면 안되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문제 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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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유태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게토누우보라는 역에 살았고,돈이라면
유태인이라는 고정관념이 수백년동안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대금업은 유태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것이
대금업이었고,샤일록은 결국 법원으로부터 좌절하는데 "일파운드의 살점의 소유권은 인정하지만 안토니오를
죽이는 것은 허용하지 않음"그리고 유태인인 샤일록에게 살인미수라는 죄목으로 재산몰수와 사형언도가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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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종을 하여 샤일록은 겨우 살아 남았다.알고보면 상당히 위험한 직업이고,베네치아는 경제와
유태인의 혐오에 다시한번 생각해보겠금 한다.그런데 그토록 멸시하던 유태인의 돈을 갚았을까요?샤일록의
동료들이 같은 말로를 겪지않은 이유는 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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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원시적인 대부업이 있다.현대판 샤일록도 쉽게 볼 수 있다.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셰틀스톤에서
철재건축 양식으로 서구에서 가장 험한 동네 중 한 곳으로 곳의 남성 평균 수명은 예순넷으로 방글라데시
남성평균수명보다 조금 낮다. 주민들은 대부분 연금을 타기전에 사망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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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까지 와서 돈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또 모르는 일이죠.그 주인공은 고리대금업자입니다.
그들에 담보로 연금카드를 주면 돈을 빌려준다.연금으로 우체국에가서 연금을 받아 이자를 더해서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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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록의 영업구조와 동일하고 현재 스코틀랜드의 고리대금업은 성행중입니다.글래스고 고리대금업자의
장부중 일부인데 재미가 있는데요,10파운드를 빌려주면 주말에 12.5파운드를 돌려 받는다.1주일동안
이률이 25%인데 연이율로는 천백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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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생활비로 5.9파운드를 쓰는 사람이 무슨 수로 그 정도의 이자를 낼 수 있을까요.
이들 모두 갚을 수나 있을까요? 하지만 이곳 글래스고에서는 채무불이행이 불가능합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상해를 입는 경우도 종종 있다.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으면 손해가 크기 때문에 대금
업자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니 내어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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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부터 21세기 스코틀랜드에 이르기까지 고리대금업자는 천대를 받았읍니다.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에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대부업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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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해도 돈을 벌지 못하고 너무 비정하게 대해도 빚을 갚지 못할테니 말이죠.
정답은 덩치를 키워 강해지는 것이다.드디어 은행을 만들 때가 온 것이다.15세기 이탈리아 신용대부의
핵심을 해 온 게토지역에 드디어 은행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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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함께 한 가문이 부흥하게 됩니다.바로 메디치가문(르네상스 이탈,동방무역과 금융업)입니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가로서 동방무역과 금융업으로 번성했음.메디치가의 번성과 함께
신용시대가 도래함.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자 새로운 권력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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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문의 권세는 피렌체 곳곳에 유산으로 남아있다.약400년동안 메디치가의 딸들이 황실로 시집을
갔고 아들 셋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마키아 벨리(르네상스 시대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이론가로 '군주론'의
저자)가 메디치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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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는 막대한 모든 곳에 영향력을 행사했는데,미케란제로부터 갈릴레오까지 메디치가문이 르네상스
전체를 후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곳 우피치 미술관에는 메디치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예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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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메디치가는 무슨 돈으로 미술품을 사들렸을까? 우리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데 메디차가는
깐디오라는 환전업 조합가운데 가장 운이 좋았고,의자에 앉아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반치디에','따블리에"로
불렸다.양모조합 거리인 바로 그 곳에 디차의 은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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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0년대 이전만 해도 메디치가는 동네 불량배에 지나지 않음.믿을만한 금융서비스가 아닌 저질 폭력으로
유명했음.피렌체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른 벌로 메디치가의 사람 5명이 사형을 당했다.
*그
러든 중에 메디차가의 지오바니 디비치 데 메디치(양모조합 거리에서 소규모 사업을 이끌던 메디치가를
이탈리아의 명가로 성장시킨 인물)는 메디치가의 영업을 합법화하는데 힘섰다.
결국 고리대금 반대법을 피할 수 있는 그 꿈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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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은행의 장부를 보면 해외무역에서 상업어음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당시 교회는 대출이자
받는 것을 금지했는데 하지만 약삭빠른 환전상이라면 무역거래에 필요한 환전서비스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자가 없으니 죄는 아니고,그저 환전에 대한 적은 수수료를 받았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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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불을 받을 경우 그 기간만큼 수수료가 붙었는데,위험을 무릎쓰고 메디치은행에 돈을 맡긴 예금주에게도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졌다.이자가 드러나지않는 상태로 신용을 사고 팔았다.고리대금업이 은행업으로
진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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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로 세그레토에는 지오반니 메디치가 집필한 책으로 메디치은행의 성공담을 기록함.
메디치가의 은행비밀은 규모보다 다양화를 추구한데 있다.이전의 이탈리아 은행은 개별 사업체여서 단
한건의 불량채권으로도 타격을 받았다.하지만 메디치은행은 조합형태로 운영이 되었다.
바로 이 분권체제가 엄청난 수익의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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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은행은 지오반니의 통솔아래 피래네에서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에까지 영업망을 넓혀 나갔다.
규모확장과 분산을 통해서 대출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이는 곧 체무자의 비용을 낮추는 것으로,
고리대금업자와 은행,샤일록과 메디치가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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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신고용으로 작성한 자산목록이 끝이 없는데,플로린화(13세기 피렌체에서 통용 되던 금화)로 당시로
엄청난 금액을 보유하고 있었다.1429년 지오반니는 '후계자들에게 자신이 만든 금융기준을 지켜라'하고
세상을 떠났다.지오반니의 장례식은 대금업을 떳떳한 장사,돈이 남는 장사로 만든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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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코시모는 통해 부의 축척이 권력의 축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부친이 사망한 후,20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는 군주나 다름이 없었다.교황은 말했다.정
치는 코시모의 집에서 이루어진다.그가 선택하는 이가 관직을 맺고 법도 전쟁도 평화도 모두 그가 결정
한다.우리가 부르지 않을 뿐 그가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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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 작(메달을 들고 있는 청년)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표하는 것으로 유명함. 죽은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바친 작품이다.그림의 메달에'이탈리아의 아버지'라 되어 있다.1
50년만에 메디치가는 뒷골목 불량가에서 유럽 금융계의 큰손으로 탈바 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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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의 작(동방박사의 경배)에는 메디치가가 이룩한 금융혁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나오는 세 동방박사의 실체는 코시모와 그의 아들 피에로,그리고 지오반니입니다.
(그림에 왼쪽 로렌조가 메디치가에 선사하기 위해 주문한 그림입니다)지옥으로 떨어질 은행가들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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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힘을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이 아닐까요.결국 메디치가에 의해서 현대 금융업이 탄생했다고 봐야 한다.
돈의 힘으로 정치권력을 거머쥔 것은 메디치가가 처음이었다 금융의 세계는 스스로 좋다는 원칙을 깨달
았기 때문이다.규모를 키우고 사업을 다양화시켜서 위험을 분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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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뿐만 아니라 외환업무에도 집중함으로서 불량채권을 줄일 수 있었다.이모두가 코시모 가족에게는
휼륭한 사업모델이었다.그러한 메디치가도 불사신은 아니었다.
귀족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려주었다가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귀족들은 돈을 갚지도 않고 태연한
얼굴로 돈을 받으로 온 직원을 쫏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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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은행이든 불량채권은 골치거리다.언젠가는 은행가들은 이 해묵은 문제들을 해결한 것처럼 보였다.
자신들이 메디치가의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믿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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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테네시주 멤피스(피렌체의 지구반대쪽 도시),세계 경제의 판도는 르네상스시대와 달리 변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현대금융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크게 달라졌다.
미국은 채무를 발판으로 성장한 나라이다.메디치 은행이 부유층을 상대한 반면에 미국은행들은 누구
에게나 돈을 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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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는 파란 스웨디 신발,리 바비큐 구이,파산자들로 유명하다.
멤피스 사람들은 빚을 갚느라고 허덕인다.쇼핑몰이름이 노골적이고,식료품 가격은 저렴하다.
저소득자에게 세금감면제도를 알려주는 세무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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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소유권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백화점만한 전당포도 있다.
전당포에 팔게 없으면 피를 팔 수 있는 곳도 있다.파산자를 상대로 먹고 사는 곳이 있어 놀랍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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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글래스고의 동쪽끝이 떠오릅니다.하지만 고리대금업자가 돈대신 차를 떼가는 것은 천지차이
입니다.이곳에는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 같은데 대부업으로 돈을 버는데가 넘쳐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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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라는 사람은 채무자의 빚대신 차를 회수하는 일을 하고 있다.총을 잡고 탄환을 넣는게 보였다.
얼굴에 한대 얻어 맞고 죽는 줄 알았다.갑자기 채무자가 '트럭을 내어 놓든가,목숨을 내놓든가'라고
소리쳤다.영화의 한 장면같군요.저도 직업을 바꿔야 하겠어요.
긴장감이 넘치죠.파산의 도시에서 차를 회수 당하는 경우는 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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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회수 연합은 매주 차량 500대 가량을 되팝니다.자동차는 경매로 팔리고 새주인 역시 대출이자가
밀리면 회수되어 재경매됩니다.멤피스에서 하는 일은 다른 채권 회수자들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 말고는 다른 불량 담보물의 경매가 쉽게 이루어 진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 곳 주민들은 빚지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세계에서 제일 성공한 자본주의 경제가 손쉬운
파산에 기반을 두고 있는게 신기할 따름입니다.집안에 남는 물건없이 차까지 회수 당하고 나면 파산전문
변호사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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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 주민중 13000명이 파산신청을 했습니다.그럴 경우 월납입금이 오르게 됩니다.
파산자들은 매주 파산변호사와 만나 채무이행 계획을 세웁니다.이 경우에는 주택융자금이 있내요.
차2대 할부금,다른채무 항목은 없는 것같은대요.사실은 차가 3대입니다.
이웃주민 소유의 차량인데 그것을 담보로 잡혔군요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채무금액이 어느 정도고 빚을 얼마 정도 갚은거죠.241달러였는데 107달러로 줄였군요.
와 월부금을 반으로 줄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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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서 2006년까지 미국에서는 매년 백만건에서 2백만건의 파산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대부분 돈을
갚는 대신 파산을 선택한다.중세이탈리아와 영국에서 파산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선 좀 다른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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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본주의 특색은 빚을 졌다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세기 미국에는 19세기 영국
처럼 빚을 갚지 못하면 끌려가는 채무자 감옥도 없습니다.
1898년부터 모든 국민에게 파산법에따라 채무청산과 개인회생신청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되는 천부인권도 추가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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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법은 기업가를 위해서 존재합니다.새로운 사업이 가능하겠금 말이죠.한두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한번의 실패때문에 좌절하는 것을 방지 할 수 있다는 뜻이죠.오
늘의 파산자가 내일의 억만장자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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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성공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초기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소설가 마크 트웨인
(톰소여의 모험,왕자와 거지 작가),코메디언 버스트 키튼(찰리 채플린과 함께 미국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헨리포드(미국 포드 자동차 설립자) 이들의 성공은 실패후 재기의 기회가 주어졌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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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입장에서는 대출 가운데 일부가 연체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파산법 13장에 따르면 채무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채무이행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 뿐이니까요.
세익스피어의 안토니오처럼 대부업자를 불쌍한 채무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취급을 했서는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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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은 경제성장의 기초입니다.하지만 은행의 출연이 가능해야 고리대금업에서 한단계 더 올라갈 수
있습니다.채무자들이 정상적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고리대금업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
니다.투자자도 돈을 믿고 맏기는 은행이있어야 자신의 지갑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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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은행의 해결책이라면,지난해 왜 다들 파산신청을 했으며,왜 금융위기가 터졌을까요?
멤피스의 불량채권이 세계적 금융위기를 야기한 배경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은행의 주택담보 대출이 증권의 형태로 바뀌어 무분별한 투자자들 사이에서 거래 되면서 은행과 채무자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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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은행업이 아주 간단했습니다.3-6-3의 법칙 즉 예금이자는 3%,대출이자는 6%,오후3시에는
골프치러 간다.요즘들어 금융업이 지나치게 복잡해졌다.
연일 금융혁신으로 멤피스의 가난한 가정에서 받은 주택담보 대출을 CDO(부채 담보부 증권),회사채나
대출채권 등 기업의 채무를 기초자산으로 유동화 증권을 발행하는 금융기법,겉으로는 그럴듯한 투자상품
으로 바꿔버렸다.납을 금으로 만들고,쓰레기를 우량채권으로 만드는 금융연금술이 가능했던 것은 은행과
함께 현대금융의 양대 축을 이루는 채권시장이 급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제2부 지불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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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수상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현대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쥐고 있다.그들은 세계채권시장을 좌우
하는 이들이다.빌그로스는 세계최대 채권운용사 핌코의 회장입니다.이회사는 무려 7조달러나 되는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사람들은 그를 채권시장의 황제,미스터본드라고 부른다.
*
채권(정부 혹은 은행이나 회사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하기 위해 발행하는 유가증권)징수할 세금보다
지출할 돈이 많을 때가 더많다.이럴 경우 채권을 팔아서 그 차액을 메운다.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구입한
채권을 처분하고 싶을 때,금융거래시장에 내다팔면 됩니다.
*
금융의 역사에서 채권은 은행의 대두 다음으로 큰 혁명입니다.정부가 돈을 빌릴 수 있는 큰 창구가 열린
거죠.약600년전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채권은 전쟁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
채권시장은 워털루 전투의 승패를 결정했고,세계적인 금융가문을 탄생시켰다.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한 원인이기도 했죠.아르헨티나와 같은 부국정부를 무릎굻게 했을 정도로 채권시장의 힘은 막강합니다.
*
오늘날 세계각국 정부와 회사들은 채권을 담보로 엄청난 돈을 빌리고 있다.약85조 달러의 채권이 거래되고
있죠.우리의 운명은 채권시장에 달려있죠.채권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 자산가치가 높은 집값은 하락합니다.
*
2007년 여름에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이런 혼란 속에서 미국의 국공채는 투자자의 안전한 은신처가
되었습니다.만약 빌그로스가 채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세계경제는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맞을
것입니다.
빌그로스는 영화007에서 나오는 제임스 본드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일종의 살인면허가 있는
셈이죠
*
그리스의 철학자 헬라크레이토스는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다'라고 말했다.채권시장도 알고보면 전쟁
이죠.피렌체와 피에타,시에네 등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들은 중세의 대부분을 전쟁 속에서
보냈다.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과 돈이었다.
*
피에르 반 헤이든(돈자루와 궤의 전쟁)그림에는 돼지저금통과 보물상자,동전이 가득한 자루들이 창과
칼사이에 어집럽게 놓여있다.그러며 '이 전쟁은 돈과 재물때문이다'라는 문구도 적혀 있다.
다시 말하면 돈이 없으면 전쟁도 없다.
*
채권시장을 통해 전쟁에 자금을 지원하는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에 최고 발명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르네상스 시절 도시국가들은 주변국의 영토와 재산을 흡수하기 위해서 콘도티에리(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용병집단)를 고용했다.
*
1360~1370년대 활동한 콘도티에리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이 있다.피렌체 대성당에 전시된 그림 속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영국 잉글랜드 에섹출신 인 그는 타고난 전쟁광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존호크 우드 경, 이탈리아어로'저바니 아큐터'라 부름.이 성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피렌체 사람들이 보상명목으로 지은 것 중 하나다.
*
호크우드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돈만 받으면 누굴 위해서도 싸웠다.
밀라노,카도바, 피이사는 물론 교황까지도 그를 고용했다.피렌체에 베큐궁전에 전시된 이 벽화는 2364년
피이사와 피렌체의 전쟁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당시 호크우드는 용병대장이었지만 15년 후에는 돈을 받고 피렌체를 위해 싸운다.계속되는 전쟁으로 계속
되는 전쟁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결국 위기에 처한다.
*
이들 국가들의 지출은 해마다 2배로 늘었고,시민들이 내는 세금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용병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느라 늘 적자에 허덕였다.피렌체 공문서에 있는 자료에는 14세기 초에
5만플로린화(13세기 피렌체에서 통용되던 금화)가 500만 플로린화로 늘었다고 함.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렇게 엄청난 금액을 어떻게 충당을 햇을까요? 답은 바로 피렌체 시민에게 있습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에 시민들로부터 빌려 쓴 것입니다.
물론 의무적으로 말이죠.시민들은 이러한 강제성을 수반한 대부의 댓가로 의지한 것이다.
*
장부에 적힌 이 부채의 목록이 바로 정부의 채권입니다.당시 정부채권은 유동자산이 급전이 필요할 때면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이 장부는 피렌체정부가 시민들을 어떻게 투자가로 변신시켰는지를 보여준다.
*
채권은 도시국가의 파산을 맊았고 시민들은 이자를 받아서 오히려 남는 장사였죠.
채권시장은 시민들의 거래를 허락했습니다.그러자 공공채무가 정리된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이 멋진 발상에도 치명적인 결점은 있었다.아무 이득이 없는 전쟁을 계속하기엔 한계가 잇었던
것입니다.
*
이탈리아 도시들은 부채가 늘자 채권을 더 많이 발행했습니다.하지만 그럴수록 채권의 가치는 떨어졌
습니다.결국 베네치아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16세기초 베네치아에서는 군인들이 여러차례 폭동을 일으
켰는데,그 일로 베네치아의 채권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
1509년부터 1529년까지 베네치아의 몬테뉴 채권은 액면가의 10%에 거래되었다.전쟁중에 채권을 사려면
좀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정부가 원금이나 이자를 지급 못할 수도 있어니까요.
하지만 채권은 액면가에 따라 이자가 지급되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액면가의 10%를 지급하고도 액면가의
50%까지 받을 수 있죠.이것이 바로 채권시장의 원리입니다.
*
위험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것이죠.또한 금융시장 전체이자률을 결정하는 것이
역시 채권시장입니다.르네상스시절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안된 채권이 전체금융시장의 이자율까지
좌지우지하게 되었습니다.채권은 이미 막강해진 것이죠.
*
그후로도 계속 채권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로스차릴드가는 워털루전투(1815년 6월 나폴레옹 1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영국,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벌인 전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재벌의 저택이다.
*
자타가 공인하는 금융황제를 배출했죠.그는 19세기 진정한 채권의 황제였습니다.
엄청난 부를 소유했던 네이션은 자신이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큰소리쳤다.또한 국가의 신용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고 했다.
*
이는 뛰어난 채권 거래상이자,훗날 세계최대 은행의 주인이 될 네이슨 로스차이드를 두고 1828년 영국
의회의 급진파 의원이었던 토마스 톰슨이 한말이다.채권시장은 채권시장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엄청난
부를 선사했다.이들은 유럽전역에 41채나 되는 저택을 소유했던 만큼 큰 부자였다.
*
버어킹 엄셔에 위치한 이 저택은 현재 네이션 로스차일드 4대손인 제이콥 로스차일드가 관리하고 있습
니다.4대선조는 영리한 분이셨고,늘 뭔가에 집중했는데 함께 있으면 결코 즐거운 사람은 아니었다.
*
1810년부터 1836년사이 마이암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은 국제금융계의 거물로 급부상합니다.
영국에서 로스 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이 3째 아들 네이션이었다.
네이션의 고손자인 에벌린 로스차일드는 네이션이 설립한 은행의 회장직에서 최근에 물러났다.
고조부는 야망이 컸다.그래서 영국으로 이주했다.어리석음을 싫어했는데,아무래도 내력이죠.
*
네이션 로스차일드가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그는 항상 누가 보지못하게 주덴도이치(히브리 문자를 사용한
독일어로 우편물 내용을 엿보는 걸 맊기 위해 사용했음)편지를 보면 그가 형제들에게 자신의 직업정신을
심어 주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사랑하는 큰형님,저에게 편지로 제생각을 전하는 것은 제 의무입니다 형님은 아실거예요
저는 줄곳 지금까지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 카드놀이,영화감상 같은 취미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1년 즐거움은 화풀이죠'
*
열정과 타고난 경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네이션은 게토의 무명에서 런던의 채권시장의 황제로 우뚝 설
수 있었다.그리고 다시한번 금융시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데 그 역시 전쟁을 통해서 였죠.
*
1815년 2월18일 아침, 영국과 네들란드,독일병사 6만7천명이 영국의 웰링턴 공작의 지휘 아래 벨기에
남동부에 위치한 워털루에 포진하고 있었다.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진격해 오고 있었다.워털루전투는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결과로
두나라 금융의 우열을 가르는 전투였다.전쟁자금을 약탈에 의존했던 프랑스와 채권에 의존한 영국과의
금융싸움이었다.
*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정부는 전례없는 엄청난 채권을 발행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백만장자가 된 것은 워털루전투가 채권가격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
100년후 나치독일은 유대인 가문의 부당이익을 폭로하기 위해서'영화-로스차일드 가문'의 상영을 허가한다.
영화에 따르면 네이션은 프랑스 장군을 매수해 영국군의 우세를 확인한다.그리고 나서 영국군이 졌다라고
영국에 헛소문을 퍼뜨린다.
*
놀란 영국인들이 채권을 헐값에 처분하자 네이션은 서둘러 채권을 사들입니다.
하지만 1815년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로스차일드 가문은 거짓정보를 흘려서 큰돈을 벌 것을 예상을
했는데 최대 위기를 맞는다.
*
당시 상황은 영국 정부는 채권판매로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게 되는데,하지만 웰링턴 공작에게 돈은 쓸모가
없었다.군인들에게 급료를 주고,시민군들에게 사례금을 주려면 언제 어디서나 지불 가능한 통화가 필요
했다.결국 네이션 로스차일드는 채권시장에서 빌린 돈으로 금으로 바꿔 웨링턴 공작에게 전달합니다.
*
이를 계기로 전쟁 당사국은 물론 전유럽의 운명이 바뀌었다.이 편지 한장이 로스차일드가와 영국정부의
운명을 바꿔놓았다.1818년 1월11일 영국 재무장관은 영국군 총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영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임명할 것을 명령합니다.
네이션의 임무는 대륙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많이 모아 프랑스 남부로 진격 중인 월링턴 공작에게 전달
하는 것이었다.네이션은 유럽전역에 뻗어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신용 네트웍을 이용해서 작전을 성공적
으로 수행합니다.
*
전쟁중에 많은 양의 금을 운반하려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큽니다.하지만 로스차일드가문은 위험한 만큼
고액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어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죠.
곧이어 이들 가문은 영국정부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로 부상합니다.영국군 사령관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네이션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임무를 존경스러울 만큼 수행했다.
그가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를 믿는다.
*
로스차일드는 가족중심의 은행 네트웍을 구축해 전쟁자금을 지원했다.세째는 런던에,장남은 프랑크푸르트에,
막내는 파리,네째는 암스테르담에 있었고 둘째는 유럽을 오가며 작전을 도왔다.
*
예를들어 파리의 금값이 런던보다 비쌀 때는 파리에 있는 제임스가 금을 팝나다.런던에 있는 네이션이
사는 방식이죠.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의 요지에 형제들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금융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활용했던 것이죠(제이콥 로스차일드)
*
어쨋든 세계를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점은 놀랍습니다.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유배지인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옵니다.로스차일드 가문은 즉시 금괴,은괴,동괴 들을 싸모으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이 주도한 이전의 전쟁이 그러했듯이 즉,장기전이 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금을 찾을테고 가격도 오를테니까요.
*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계산착오였습니다.하루동안의 치열한 공격과 반격끝에 프로이센 군대가 확대하면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월링턴 장군은 새로운 승리를 거두었다.반면 로스차일드가는 아니었죠.
*
네이션 로스차일드는 빠른 소식통을 접해 나폴레옹의 패배소식을 접하고 기뻤다.그는 영국내각에 공식
보고가 전달되기 이틀전에 이미 승전보를 들었습니다.그러나 영국의 승리는 네이션에게 득이 될게 없었다.
그는 무용지물이 된 금을 싼 값에 샀을 뿐이니까요. 그와 그의 형제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금더미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
전쟁이 끝나면 전쟁이 해산될 것이고 군인들에게 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게 되어 치솟았던 금값은 폭락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니까요.엄청난 손실을 코앞에 두고 네이션은 결심을 합니다.
해결책은 오직하나,로스차일드 가문의 금을 이용해,도박을 하는 것이었다.바로 채권시장을 통해서 말입니다.
*
1815년 7월 20일 런던코리어 신문은 네이션이 공채를 대량 매입했다고 말했다.즉 영국채권을 사들렸다.
워털루 전쟁의 승리로 채권가격이 치솟을 것에 네이션은 승부수를 띄웁니다.
채권의 대량매입으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네이션은 게속해서 채권을 사들였습니다.
채권을 팔라는 형제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렸다.
*
그 후로 일년이나 계속해서 말입니다.1817년 7월 채권가격이 40%까지 상승하자 네이션은 채권을 되팔기
시작했습니다.당시의 시세차익은 현재로 치면 6억 파운드에 이릅니다.로스차일드 가문은 채권을 사고 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돈은 곧 권력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죠.
*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들에게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보다는 사람들이 너희들을 두려워하게 하라고
당부했다.실제로 19세기 중반에 금융권을 지배하는 동안은 로스차일드 가문은 존경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지금은 증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반유대주의의 편견을 자극했기 때문이죠
*
포스트를 수집하는동료가 몇달전에 반유대주의를 표방한 독특한 포스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로스차일드 가문을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는 못된 사람으로 표현했더군요.
유대인들이 행했던 자본주의 경제활동을 아주 실랄하게 비판한 포스트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판하는 이유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기도하는 그들의 양면성 때문입니다.
*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필요했다.전쟁을 통해서 부를 창출했으니까요.전쟁이 없었다면 19세기 국가들은
채권을 발행할 필요도 없었겠죠.그런데 이보다 더 큰문제는 이젠 자금을 마련하려면 정부는 엄청난 빚을
져야되고 만약에 빚을 갚지 못하게 되면 이미 발행한 채권에 문제가 생기고 말죠.
19세기 중반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펀드메니저가 되어 국공채를 관리합니다.그로인해서 전쟁을 통해서 얻는
득보다 실이 많게 되죠.
*
로스차일드 가문은 돈의 힘으로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승리를 도왔고 미국 남북 전쟁에서도 영향을
주었습니다.채권시장의 황제가 전쟁의 조정자가 된 것이죠.
워털루 전투가 끝나고 50년후 즉,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났다.이전쟁 역시 배후에 채권시장
이 있었죠.
*
하지만 채권을 믿고 승부수를 띄운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패하고 맙니다.전쟁이 발발하고 2년뒤인 1863년
6월 미국 남북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마지하게 됩니다.
당시 북군은 미시시피주 잭슨을 점령하고 남군을 서쪽의 빅버그까지 후퇴시킵니다.북군에 포위된 채 크게
저항하던 남군은 한달만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
버거 전투후 미시시피강은 북군의 손에 넘어가고 남군은 동서로 분열됩니다.그렇다고 남군이 패한 결정적인
요인이 빅버거의 대후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패전의 진짜 이유는 바로 재정문제였다.빅버거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은 미시시피강과 멕시코만이 만나는 곳에 뉴올리온스 항이 있습니다.
*
파이크 요세입니다.영국의 공격으로부터 뉴올리온스를 지키기 위해 1812년에 세운것이죠.
하지만 50년후 북군이 뉴올리온스를 공격했을 때 요새는 그만 함락당하고 맙니다.
당시 뉴올리온스는 남부의 주력 수출품인 목화의 판로였기 때문에 손실이 아주 컸다.
*목화무역을 주도할 수 없게되자 남부의 운명은 달라졌다.목화는 채권시장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수단
이었기 때문이죠.500여년전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 처럼 남부연합은 시민들에게 채권을 팔아 전쟁비용을
충당하고자 했습니다.하지만 남부의 자본은 한정되어 있었죠.
*
궁리끝에 남부연합은 유럽금융최대 가문인 로스차일드가에 손을 내민다.남부연합이 이를 낙관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뉴욕의 로스차일드 대리인이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대통령에게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로스차일드가는 남부연합의 손짓에 주저했다.
*
남부에 돈을 빌려줄 수 있지만는 이미 가치를 상실한 남부의 채권을 사들이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것이
었다.결국 로스차일드가는 맡지 않기로 결정했죠.결국 궁지에 내몰린 남부연합은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
습니다.바로 목화를 이용하는 것이었죠.
남부는 목화를 채권지급 담보물로 내놓았습니다.이자로 지급하지 못할 경우 이자로 대신 지급하겠다며
투자자를 안심시켰죠.
*
결국 남부의 대리인들은 남부연합의 채권을 팔기위해 유럽의 주요도시로 떠났다. 그들은 유럽의 금융요지를
중심으로 채권을 팔기위해 노력했지만 투자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한 무명회사가 목화담보 채권을 시장에 내놓자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회사채권을 목화로 전환할 수 있었고 그것도 전쟁전 가격으로 말입니다.
*
목화담보채권은 남부의 전략적 후대가 되었습니다.목화의 공급을 제한할 경우 목화와 채권의 가격이 동반
상승할테니까요.이제 남부연합은 목화로 영국을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1860년 영국의 리버풀항은 섬유산업에 필요한 목화를 수입한는 주요 관문이었습니다.
당시 리버풀로 들어오는 목화의 80%는 미국 남부에서 생산되는 것들이었죠.
*
목화의 중요성을 아는 남부연합은 리버풀로 출항하는 모든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습니다.
영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죠.결국 남부의 의도대로 목화값이 치솟았고 남부연합의 목화
담보 채권도 덩달아 가격이 올랐습니다.
출항금지조치는 영국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방직공장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해야 했습니다
*
결국 1862년 말에 모든 방직공장이 가동을 멈추었습니다.맨채스터 남부에 위치한 이 방직공장에는 노동자
400여명이 근무했는데 목화가 없으니 할일이 없었다.결국 공장 노동자들의 절반가량이 해고됐고,지역주민중
1/4가량이 빈민구제를 받았습니다.그들은 이 사태를 두고 목화기근이라고 불렀지마는 이는 인위적인 기근
이었다.
*
영국경제는 침체에 빠졌고 목화담보채권의 가격은 계속 상승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남부가 채권시장을
마음대로 조정하려면 투자자들이 채권에 이자를 지급받지못할 경우 남부가 나서서 목화 소유권을 보장해
준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했습니다.
*
앞서 1862년4월28일 뉴올리온스가 함락되었을 때 미국남북전쟁이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한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결국 남부의 주요 항구가 북군의 손에 들어가자 목화를 손에 넣고 싶어하는 투자자들은
북군해군의 봉쇄선을 뚫어야 했습니다.
남부연합이 목화공급을 중단하자 1863년 랭커셔의 방직공장들은 중국과 이집트 인도지역에서 새로운 목화
공급원을 찾았습니다.
*
그러자 목화담보채권에 대한 투자자들의 남북경제의 신뢰가 동시에 붕괴되었습니다.
목화공급능력을 과시했던 남부연합이 보기좋게 무너진 것이죠 국내채권시장이 몰락하자 당장 전쟁비용을
지급해야 했던 남부연합은 루이즈애나 박물관에 있는 여러 지폐들을 마구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부연합은 총17억달러를 발행했다고 합니다.
*
북부연합도 지폐를 발행했는데 전쟁막바지에 후에 그린백이 장당 50센트였다면 남부의 그레이 백은
1센트에 불과했다.결국 남부는 극심한 인플레에 시달렸다.
1865년1월에 물건값이 기존가격에서 90배로 치솓게 되었다.
*
승부를 채권시장에 걸었던 남부는 결국 전쟁에서 패했습니다.하지만 최악의 인플레를 몰고온 이런
무모한 시도는 그후로도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
오늘날의 채권시장은 전세계의 주식시장을 합한 것보다 그 규모가 큽니다.
한국가의 흥망성쇄를 결정하기도 하죠.채권시장의 황재라 불리는 이 사람은 한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활약한 카드 선수였던 사실을 아십니까?
*
저는 블랙잭 선수였는데 최초에 직업선수중 한명이었습니다.꽤 잘 나갔죠.라스베이거스를 정복해보고
싶은 마음에 60년대 말부터 카드 플레이어로 활동했습니다.빌그로스는 현재 채권 시장에 황제가 되어
거액의 채권펀드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
빌그로스의 채권거래는 금융시장과 정부를 비롯해서 연금기금과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에도 영향을 주죠.
하지만 세계금융시장을 호령하는 채권황제도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바로 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가 위협적인 이유는 채권의 고정가치이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
예를들어 물가가 10%상승했는데 고정이율을 가치가 5%밖에 안된다면 채권소유자들은 인플레로 5%나 손해
보는 거죠.그렇기 때문에 인플레 초기에 채권가격이 하락하는 것입니다.어떤 경우엔 폭락을 지속하기도
합니다.
*
인플레라는 고약한 녀석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악화되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르헨티나를 예를들어보죠.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1946년 2월부터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때마침 대통령에 선출된 후안 페론 대통령이
브에노스아이레스 중앙은행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은행에 넘쳐나는 금을보면"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은
행전체가 금으로 가득차 걷기조차 힘들다니"아르헨티나는 은의 땅이란 뜻으로 부와 풍요를 상징합니다.
*
수도를 따라 흐르는 리오델라프라타강 역시'은의 강'이란 뜻이다.한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영국의
최고급 백화점인 헤로즈 백화점이 있었는데,1912년에 설치된백화점은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과거를 말해
주고 있다.아르헨티나와 미국의 1인당 GDP가 불과 18%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그런 시절도 있었죠.
*
결론적으로 말해 아르헨티나와 같은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금융위기가 반복되면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경우입니다.아르헨티나는 금융위기를 여러번 겪었습니다.
하지만 1989년 위기는 과거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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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2월초였는데도 전례없는 더운 날씨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턱없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의 전력설비때문에 정전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하지만 정전문제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죠.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금융위기의 파국은 몇가지의 단계를 거칩니다.
*
첫번째 단계는 징수한 세금에 비해 정부지출이 과다한 경우입니다.전쟁이 원인일 때가 많죠.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 내전과 1982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국과의 전쟁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1989년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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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물가가 10%나 상승했고 불과 한 달만의 일이었죠.정부는 은행을 폐쇄하고 이자를 낮추는 등 환율
폭락을 맊기위해 노력했습니다.효과는 없었죠.한달만에 아르헨티나의 화폐의 가치는 달러에 비해서 140%나
하락했습니다.설상가상으로 아르헨티나는 공공부문의 적자해소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세계은행은 대출을
동결했습니다.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자,아르헨티나 정부는 공채를 발행해 재정적자를 메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며칠 후면 인플레로 휴지조각이 될 채권을 살 생각이 전혀 없었죠.
*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난관에 봉착합니다.그해 4월 한 슈퍼마켓이 물건값을 30%나 올리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분노했고 쇼핑카드를 부수기까지 했죠.진열장은 텅비었지만 가계주인들은 새물건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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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은 끔직했어요.같은 물건인데도 아침저녁 가격이 달랐어니까요.적당한 가격에 팔 수 없었죠.
판 순간에 또 오르는거예요.하루에 3~4번 이상 가격이 올랐어요
중앙은행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국공채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
외채도 빌릴 수 없고 누구도 채권을 사려하지 않자 절망에 빠진 아르헨티나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
를 더많이 발행하기에 이릅니다.하지만 효과가 없었죠.
4월28일 금요일 마침내 아르헨티나의 국고가 바닥났습니다.기자회견장에서 중앙은행 부총재가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죠.아르헨티나 조폐국에서 종이가 떨어져서 돈을 찍어낼 수 없다는 뜻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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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재는 월요일이면 화폐가 발행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하지만 돈을 찍어낼수록 돈의 가치는 하락했고
정부는 점점더 액면가 높은 돈을 발행했습니다.
5월에는 커피한잔 값이 50% 올랐고 신발3켤레의 가격이 소한마리의 가격과 맞먹었습니다.
*
1989년6월 물가상승률은 월100%에 육박했습니다.1년에 12000%가 상승한거죠.예를들어서 5월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한 식당에서 식사값으로 만아우스트랄(아르헨티나 화폐단위),6월에 2만 아우스트랄을,다음달에는
6만아우스트랄을 지불해야 했죠
이렇게 지표를 가득들고 나가야 한끼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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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시민들은 이틀에 거쳐 폭동을 일으켰고 굶주리다 못해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매끼를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드려 먹든 이들이 부엌에서 스프로 끼니를 떼우거나 굶어야 했습니다.
*
하이퍼인플레 때문에 가장 큰 사람들은 일당을 현금으로 받는 근로자들이었습니다.
매달 고정급여를 받는 공무원들도 피해를 받죠.연금수령자들과 투자금의 이자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채권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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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현금이 필요했던 중산층은 보석과 시계,식기등을 내다 팔기까지 했는데 당시 확보한 골동품을 파는
가계들이 지금도 성업중입니다.경제학자 존메이난드 케인즈는채권 소유자들의 안락사를 예언하면서
인플레가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금융재벌의 부를 잠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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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프레가 전세계를 휩쓸던 1970년대는 케인즈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채권황재도, 채권소유자도 보란듯이 소생했습니다.채권시장이 부활하자 놀란 미국의 관리들은 방금
찍은 새 채권을 팔아 구제금융에 투입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습니다.
이같은 채권황재의 부활은 채권투자자의 수가 증가했기때문에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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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채권시장이 탄생했던 이탈리아로 다시 가 볼까요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노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입니다.노령화 사회에선 채권과같이 수익이 고정화된 채권이 주로 거래됩니다.
그런데 인플레가 연금과 예금의 실제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란 걱정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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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인플레에 관대했던 중앙은행은 채권시장에 그 해결책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또한 정부가 금융위기로 파악하는 은행을 구제할 계획이라면 신중해야합니다.
채권을 더팔아 국고재원을 확보할 생각이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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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처럼 정치권력과 금융시장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언제나 그랬든 것처럼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는 미스터 본드나 채권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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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혹시 정부에 돈을 빌려주기보다 특정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선호하십니까?
과연 어느 쪽이 위험성은 낮으면서 수익성이 높을까요.다음편에서는 주식시장의 거품의 붕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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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금융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는지 그 이유또한 설명해드리죠.
제3부 주식시장의 거품과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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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은 다국적 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남아메리카의 자연을 사람의 힘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한 기업이 있읍니다.
150억 달러를 투자해서 볼리비아에서 브라질 동쪽해안에 이르기까지 남미대륙을 가로지르는 송유관을
아르헨티나 남부에 있는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이르기까지 장장 650만 키로미터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장의 송유관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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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 야망을 드러내는 거대한 시도는 바로 주식회사의 등장때문에 가능했다.
16세기 화폐와 신용거래 부문에서 혁신이 일어났고 17세기는 채권이 탄생했습니다.
다음단계는 공동소유의 기반을 둔 유한책임회사의 출현이었다.그런데 이 회사에 더욱 힘을 실어준 것이
있습니다.바로 주식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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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논 녀석이 주식은 미래의 수익에 대한 예측을 기반으로 주식의 가격이 결정
됩니다.그런데 최근에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보았듯이 주식시장은 쇼크마켓,즉 충격시장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이렇듯 미래는 불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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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에게는 낙관적인 성향이 있죠.뉴욕주식의 주가가 동반상승할 때 투자자들이 도취감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죠.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전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은 '비이성적인 과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과열된 주식시장은 언제 트질지 모르는 비눗방울과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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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의 거대한 사업을 벌인 엔론사를 두고 주식과열은 비이성적이었고 그 거품이 터졌을 때 거품은
터졌을 때 주식시장은 참담했습니다.엔론사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기업 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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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거래가 이루어진 400여년동안 엔론사태가 첫주식사기는 아니었습니다.이런 일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죠.그리고 현대금융 위기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회계부정,주가조작 몇세기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
되는 일이죠.주식시장에 거품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은 인류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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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네치아에는 금융역사를 통틀어 깜짝 놀랄만한 일화가 있습니다.프랑스 국가의 에덴바르 출신
존로 업저과 삶을 기리며,이는 주식시장에 거품을 만든 주인공이 잠든 곳입니다.
존로는 살인자에 상습적인 도박꾼이었고,하지만 금융행위에서 만큼은 천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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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가치에 처음으로 거품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죠.
존로는 한때 미국 병사의 1/4을 소유한 적이 있다.하지만 역사상 최초의 주가폭락으로 그 모든 것을
잃었죠.에덴버르에서 암스테르담,파리,뉴올리온스를 거쳐 베네치아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벼락출세와
파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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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루이지애나 박물관에는 존 로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습니다.깡마르고 갈망하는 표정,존로는
스코트랜드인의 모습(프랑스에서 활동한 재정가로서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해 서인도회사로 발전시킴),
미천한 신분에서 유명인으로 종국에는 파멸에 이른 존 로는 1671년 영국 에던버르에서 부유한 금세공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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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에는 한 여인을 두고 결투를 벌이다 상대를 죽여서 사형선고를 받았다.여기서 끝나지 않고,
존 로는 감옥을 탈출해서 네들란드로 도피하게 된다.도피처로 암스테르담을 선택합니다.
존 로에게 행운이 있죠.1690년대의 암스테르담은 세계금융 혁명의 1번지였다.
당시 네들란드는 베인과의 전쟁때문에 국영복권을 만들어 팔고,위조가 쉬운 주화로 부터 상인들을 보호
하고자 사실상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을 설립하게 됩니다.
*
이시기에 네들란드에서 존로의 관심을 끈 것이 있습니다.바로 주식회사였습니다.
주식회사는 전세계에 걸쳐 활동한 네들란드 상인들 덕분에 생겨날 수 있었다.이들은 주로 아시아 지역과
거래를 했습니다.동인도는 향신료때문에 아주 매력적인 도시였죠.
고추,경양,육두부,생강같은 그런 향신료가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있었죠.
*
음식 맛도 내주고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으니까요.네들란드 상인들은 뱃길로 향신료를 뱃길로 보다 신속
하게 운반하고 싶었습니다.돈 냄새를 맡은 것이죠.최초로 동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네들란드 상인들을
그린 그림입니다.향신료를 구하러 반탐으로 떠난 상인들은 향신료를 가득 실고 4척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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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3월 1일 출항,1599년 7월19일 귀항,과연 얼마만큼의 이윤을 창출했을까요.
우려와 달리 단한번의 항해로 선박건조비용을 모두 회수했습니다.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그것을 향한
항해는 길고 위험했습니다.이때문에 상인들은 공동으로 출자해 위험을 분산했습니다.
그결과 동인도 회사가 약간 골치아픈 일이 생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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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 네들란드 정부는 네들란드 회사들을 모두 합병했습니다. 동인도 회사들을 위해서였죠.설립당시에
정부로부터 받은 면허장이 여기에 있습니다.희망봉에서 마젤란 해협까지 이르는 구간까지 무역에 이르는
전매권을 인정한다고 기재가 되어있습니다.세계 절반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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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들란드 연합 동인도 회사 구조는 독특했습니다.자본금은 네들란드의 주요도시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정작회사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라고 권유함으로서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같은 투자의 위세입니다. 이그림은 동인도회사의 창업주 바스카가인데 창업자 중
한명이 밀크 바스카 가문의 초상화입니다
바스카의 참여자 17명은 수천길드를 내고 이사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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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에는 동인도 회사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주식,즉'미래에 발생할 수익에 대한 수익에 대한 권리'를
일정부분 부여했습니다.바로 이것이 다국적 기업에서 발행한 세계최초의 주식입니다.지금으로부터 400년전
의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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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후 바스카의 이사진은 주식을 환불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투자자들에게 되파는 것은 인정합니다.
주주들에게 선언했습니다.동인도 회사의 주식거래를 시작으로 세계 최초 주식시장이 문을 열게 되죠.
주식의 등장은 금융시장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주식가격이 결정되는 것을 창조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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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로는 주주들이 동인도회사 주식을 매매로 통해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에 주목했습니다.1610년 세계최초의 주식회사는 세계를 정복할 태세를 갖추었습니
다.면허장을 갱신하고 새 주주들도 모집했습니다.물론 주식거래도 활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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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때로는 전쟁도 불사했습니다.동남아 전역에 공장과 상점을 세우고 나니,
이번엔 경쟁자인 스페인과 영국의 진출을 견재해야 했습니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전함 40여척과 1만명에 이르는 사병을 거느렸습니다.이들의 힘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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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군사력은 무역을 위한 필수조건이었죠.그렇다고 동인도 회사의 성공비결이 빠타바아 함대에
탑재한 함포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이들의 성공은 여느 대기업처럼 비용절감을 위한 규모의 경제,
경제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네트웍의 외부성(한사람의 행위가 제3자의 경제적 후생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현상)의 활용능력에 있었습니다.바타비아 함선은 반은 전함,반은 다국적 기업에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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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면 규모가 적고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결국 1620년 네들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습니다.그 결과 주주들은 돈방석에 앉았죠.네들란드동인도 회사의 첫 장기 주주 명부입니다.
모두 엄청난 돈을 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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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당시 1000길드를 투자했다면 1736년에 그 가치는 무려 7000길드에 이르게 됩니다.
동인도 회사는 매년 이익의 16,5%를 배당했죠.베르크 바크 가문에 6000길드는오십만 갈드 자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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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티르담에 숨어 지내든 존로에게 네들란드 동인도 회사는 하늘의 계시에 가까워었습니다.
당시 존로는 도박판을 전전하고 있었는데,동인도 회사와 이회사의 주식거래를 중개했던 증권거래소
그리고 암스테르담 길드에 매혹되었습니다.
*
하지만 뭔가 좀 부족해 보였습니다.천재 금융가인 존로는 결함을 발견합니다.우선 주식을 제한 한 것부터가
못맏땅했습니다.게다가 암스테르담 은행의 보수적인 운영도 이해가 되지않았죠.
상인들 간에 자금이체가 통해 자금이체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막상 시민들이 사용하는 은행
권은 발행하지 않았습니다.
*
이에 존로는 암스테르담의 주식개선 방안을 놓고 고민하기에 이릅니다.독점무역회사와 발권은행이 합쳐
진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일들이 가능하겠죠.
존로는 네들란드에 새로운 금융제도를 할 계획을 세웁니다.1716년 존로는 자신의 주식무대를 실험할
무대로 프랑스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왜 프랑스는 그를 받아들였을까요.이유는 당시 프랑스 재무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의 잦은 전쟁 탓에 빚더미에 올랐습니다.1715년 루이14세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15세를 대신하여
오를레앙공이 섭정을 하는 동안 무려 3번이나 국가부도가 났습니다.
*
존로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죠.존로의 생각은 네들란드식 은행을 세워 경제를 살리는 것이었죠.
다른 점이 있다면 이같은 100리부르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었죠.
은행에 투자금이 들어오면 정부의 막대한 부채와 통합운영하는 방식입니다.
*
지폐를 발행해서 프랑스의 교역을 확대하고 경제력도 키울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보면 일거양득이었죠.통합운영으로 정부의 빚은 은행주식으로 전환했고 군주는 원하는
만큼 돈을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
존로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절대 군주는 권력이 제한된 군주보다 더많은 융자를 보다 낮은 이율로
받을 수 있다"신용에 있었서도 권력은 단 한사람에게 집중되어야한다.절대권력은 오를레앙공의 손안에
있었죠.존로는 오를레앙 공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습니다.
금융공학을 통해 프랑스패권을 부활시키는 것만큼 또 휼륭한 목표가 있을까요?
*
하지만 존로에게는 또다른 생각이 있었거든,존로가 말하길,은행의 설립은 내계획 중 유일한 것도,위대한
것도 아니다.나는 인도의 발견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으로 전유럽을 놀라게 하리라.
존로의 두번째 계획은 바로 독점무역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전국민이 이 회사의 주주가 되고,그리고 존로 자신은 대표이사가 된다는 것이죠.
*
이 원대한 계획의 중심에는 신대륙이 있었습니다.미국 미시시피 강가에 펼쳐진 루이지애나의 거대한 땅이
바로 그것이었죠.마침내 존로는 대식민지와의 독점무역권을 따냈습니다.
이후 프랑스 국민들은 주식구매를 권유받았고 이사진 명단 맨앞에 이름이 올랐죠.
*
이것은 통화팽창(통화수축에 따른 불황상태에서 경제성장을 위하여 통화를 조금씩 늘려 구매력을 높이고
물가를 올리는 정책)에 가까웠습니다.그로인해서 1716년에 경기불황으로 몸살을 앓던 프랑스 경기가
가까스로 회복이 되었죠.
*
프랑스 왕실에서는 공공부문의 부채를 독점무역권과 세금징수권이 있는 미시시피회사의 주식로 전환시킬
수 있었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대중들은 주식투기의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미시시피회사의 주가는 고공행진
을 하게 되었죠.1712년 9월사이 주가는 액면가인 5천리브로를 넘어서 1712년 12월에는 1만리브로에
이러렀습니다.
*
존로의 주식사무소가 있었던 거리입니다.이좁은 골목에서 투기에 사로잡힌 파리 시민들이 주식을 사려고
혈안이 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주가가 오를수록 구매욕구는 올라만 갔습니다.전형적인 주가과열
사태였죠.
*
이 때부터 프랑스에 백만장자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1720년 1월에는 이들 백만장자 중에는
존로가 가장 부유했습니다.루이 14세는'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그에 반에 스코틀랜드 출신자 도망자 존로는 '내가 곧 경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까지 올랐습니다.
*
프랑스 방돔광장,이곳에서 존로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융권력을 손에 넣게 됩니다.
프랑스 재무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더 많은 권한들을 행사했죠
간접세의 징수,국가부채의 관리,26년이 넘는 조폐창의 감독,미시시피 회사의 운영,이 회사는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과의 독점무역권을 누렸었죠.
*
또한 오늘날 미국영토의 1/4을 차지하는 루이지애나 독점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개인재산도 엄청났다.
마자랭궁,방돔광장 인근에 있는 건물,교회저택 12채,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수많은 농장들,거기다 일억
리브르 상당의 미시시피 회사주식까지,12년전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전문 도박꾼에 첩자로 의심받던
남자가 지금은 대단한 성공이죠.1720년1월 존로의 승리는 완벽해 보았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살인범이 프랑스 재무장관으로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
하지만 존로는 멈춰야 할 때를 몰랐습니다.오히려 미시시피의 주가를 올리려고 화폐를 더 찍어낼 궁리를
했죠.당시 존로가 소유했던 마자랭궁에는 그의 은행과 그의 회사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자신의 회사 주가를 끌어올리려면 일단 복도를 지나서 그의 주식사무소에 들렀다가 다시 은행권 발행
사무소에 들러면 그만이었습니다.
*
한마디로 말해서 내부거래였던 것입니다.그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폰지사기라 부르는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이탈리아계 미국인 사기꾼 찰스 폰지의 이름을 딴 것이죠 다단계 투자사기 처럼 투자자의
투자원금으로 앞사람의 이익을 챙겨주다 끝나는 식이었읍니다.
*
존로는 회사를 인수하고 배당금을 지불하기 위한 재원을 주식 3매경으로 마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폰지사기(고수익을 제시하며 투자자를 끌여들여 뒤에 들어오는 투자자의 원금으로 앞사람의
이익을 챙겨주다 끝내는 수법)처럼 언젠가는 터질 거품이었읍니다.
*
지폐도입과 프랑스의 경기부양에는 성공을 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거품은 언제터질지 몰랐읍니다.
1720년대초 프랑스는 미시시피 거품,즉 투자광풍에 휩쌓였습니다.
무명의 도박꾼에서 프랑스 경제의 주인이 된 존로, 하지만 아무리 숲이 울창해도 하늘을 전부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
존로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서 큰 수익을 낼 것을 장담했습니다.에덴 동산과같은 루이지애나에서
우호적인 원주민들로부터 값비싼 재화를 싸게 구입할 것으로 상상했죠.원주민들로부터 재화를 얻어면
미시시피 강변에 뉴올리온즈를 통해서 프랑스에 들여올 예정이었습니다.
*
식민지에 정착할 이주민들만 있으면 완벽했죠.존로는 프랑스인들이 식민지 개척보다는 주식투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개척민들을 모집했습니다.마침내 수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약속의 땅 루이지애나로
떠났습니다.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처잠했습니다.
*
불행하게도 약속의 땅 루이지애나는 벌레가 들끌는 늪지였든 것입니다.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이민자의
80%가 황열병과 같은 전염병과 기아로 숨지게 되었습니다.루이지애나의 독점무역권은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죠.
*
당시 네들란드 만평의 내용입니다.이곳이 그 유명한 미시시피 땅입니다.존로의 교활한 속임수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날렸죠.아무리 주식이 인기가 있다해도 그저 바람과 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
존로의 성공뒤에는 대중들의 믿음이 있었죠.미시시피 사태는 그 믿음을 배반한 사건이죠.
존로의 사업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미시시피의 주가는 하락했습니다.주식폭락을 막으려고 존로는
오를레앙 공에게 주식의 공식 발행가격을 내릴 것을 요청했습니다.
*
바로 이 순간에 절대권력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죠.곧이어 주가는 곤두박질쳤습니다.
성난 군중은 은행앞에 몰려들었고 시민들이 던진 돌에 창문은 산산이 부셔졌습니다.
12월이 되자 미시시피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
1730년에 발행된 이 지도에는 세계 최초의 주식시장이 거품때문에 어떻게 무녀졌는지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행운의 여신이 선물을 던지고 있고,아기 천사들에게 주식을 건네받은 투자자들이 미소를 짓고
있죠.그런데 부서진 인쇄기 옆에서 주식을 찍고 있는 천사들이 보이죠.그리고 거품을 만드는 천사들도
보이내요.
*
오른쪽에는 표정이 심각한 남자들이 있는데 이중 한명이 자살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결국 미시시피 거품은 과열되다 못해 폭발했죠.존로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좆겨 황급히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생전에 다시는 부인과 딸을 보지못했죠.
베네치아로 돌아온 그는 도박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그러다 1729년에 결국 생을 마감했습니다.
*존로가 일으킨 거품의 파열때문에 프랑스의 금융발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인들은 주식과 화폐를 멀리했고,프랑스 왕가의 재정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가 않았죠.
루이15세와 16의 국정운영은 갈수록 도탄에 빠졌습니다.결국 프랑스 왕가의 재정파탄이 혁명을 불러오게
됩니다.
*
1719년에 터진 미시시피 거품이 주식 역사상 가장 큰 거품인 사건은 아닙니다.단지 주식시장의 거품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을 뿐이죠.금융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은 1929년 10월24일에 터진 뉴욕 월가의
주가
대폭락 사태입니다.
*
이날을 검은 목요일이라고 부를 정도면 그 정도를 아시겠죠.이 날을 기점으로 미국 주가는 3년 동안
추락을 거듭하다 1930년 6월 바닥을 칠 때는 무려 86%나 빠졌습니다.
*
뉴욕월가의 주가 대폭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불황을 몰고 왔습니다.미국의 국내 총생산은 급격하게
감소했으며 실업률은 25%에 육박했습니다.그렇다면은 왜 주가폭락이 일어난것일까요?
*
학계에서도 의견은 분분합니다.기술적인 분석이야 얼마든지 가능하겠죠.사건의 핵심은 집단심리에 있었
습니다.제아무리 똑똑한 투자자라고 해도 주가가 오르는 강세장에서는 비이성적인 과열에 사로잡히고
맙니다.동물들도 마찬가집니다.무리들이 방향을 틀때는 무섭게 돌변합니다. 조그만 낌새에도 벼랑을
항해 돌진하게 마련이죠.한마리가 공포를 느끼면 그때는 공포의 냄새를 맡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
공포의 대상이 뭔지도 모른채 거저 두려움에 휩싸여서 달리는 것이죠.결국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겁니다.늘 그런 식이죠.주식시장용으로 매수세가 매도세로 전환되고 황소가 곰이 되는 순간입니다.
소떼에 비유를 했는데요.요즘은 인간심리가 시장에 반영된다는 것입니다.
*
시장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기복이 아주 심합니다.순시간에 탐욕이 공포로 바뀌고 우울증을 넘어 신경쇄약
증을 보이기도 하죠.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측할 수 정도로 자주 발생을하는 것은 아닙니다.
*
금융시장의 움직임을 통계적인 분포로 추측할 수 있다면 폭락이나 폭등도 없겠죠.
하지만 연중 대부분을 평균적인 분포에 머물다가 예측할 수 없는 수치에 이를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키를 예로 들어 봅시다.키가 120센티미터 이하이거나 240센티미터 이상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
수학시간에 배운 정규분포도입니다.빈도에 따라 자주 발생하는 것들은 가운데에,아래쪽은 그 보다 낮거나
높은 것들입니다.곡선이 꽤 가파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치에 가까우니까요.하지만 금융시장에서
변화는 매우 완만한 곡선에 가깝습니다.빈도가 낮거나 높은 움직임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
바로 이 부분(정규분포 곡선의 급한곡선과 완만한 곡선사이)이 긴꼬리,혹은 두툼한 꼬리입니다.
주식시장의 움직임이 사람의 키와 같은 분포를 보인다면 주가가 10% 이상 하락하는 일은 500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하는 정도겠죠.마찬가지로 주가가 20%이상 폭락하는 일은 동화 속 이야기일 것입니다.
*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이러한 일은 일곱번이나 발생했습니다.1987년10월,사람들은 대공황이 재현될거라고
겁에 질렸는데,우려와 달리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한 달동안 죽어있던 주식이 급등세로 돌아섰죠.
하지만 이 시기에 발생한 거품은 범죄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
미시시피 회사가 터트린 거품 속에서 18세기를 맞이했다면 20세기를 마무리하는 거품은 다른 곳에서
터졌습니다.투자자들을 탐욕의 꿈 너머로 몰아갔던 한 회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는 전세계 금융회를
바꾸어 놓겠다고 호은장담했는데 막강한 정치인맥을 활용해서 강세장의 맨위에 올라섰습니다.
*
포춘지가 6년 연속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한 바로 엔론사(2001년 회계부정으로 파산 신청함)엔론사가
파산한지 7년이 지났습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서 차츰 잊어져 가고 있죠.하지만 엔론사의 분식회계는 오늘날까지 전세계 영향을 미치고
잇습니다.
*
2000년 8월 미국 휴스턴에 있는 엔론사의 주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솓았습니다.
엔론사는 네브라스카주의 작은 천연가스 회사로 출발하여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월가로부터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죠.
*
하지만 투자자들이 역사의 교훈을 새겨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러졌을 것입니다.엔론사의 이야기는 주인공만
바뀌었지 280년전에 있었던 미시시피 거품과 유사합니다.
존로가 프랑스에 재정개혁을 목표로 삼았다면 엔론사의 회장 켄 레이(엔론사의 대규모 회계부정을 함)는
국제 에너지 시장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
거대 전력회사들은 수년동안 에너지 산업을 지배해 왔습니다.에너지를 직접 생산해서 소비자들에게 팔았죠.
켄 레이는 에너지 은행을 만들어 생산자와 소비자를 중개 해 에너지를 팔고자 했습니다.엔론사는 세계최대
에너지 회사로 만들고 싶어했어죠 엔론사의 전직 임원인 셰런 왓킨스의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정말 좋은 시절이었습니다.아이디어만 괜찮다면 엔론사의 자금 지원으로 사업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존로처럼 켄 레이도 권력가까이에 있었습니다.조지 허버트 부시 대통령에 선거 자금을 지원해서 많은
이득을 봤죠. 부시 대통령은 에너지 사업과 관련한 금지된 것을 풀었습니다.전세계로 부는 에너지 민영화
추세를 타고 엔론사는 자산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
특히 중남미 지역에서는 콜롬비아,에쿠아도르,페루,볼리비아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송유관 사업을 벌였죠.
켄 레이는 절친한 친구 조지 부시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서 이 곳 아르헨티나에서 세계 최대 천연가스관을
건설했습니다.엔론사는 에너지뿐만 아니라 흙,물,공기같은 자원을 비롯해 심지어 인터넷 대역 폭까지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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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미시시피 사건과 흡사한 일이 뉴욕 월가에서 벌어지고 있었죠.비이성적인 과열에 대해서 경고했던
앨런 그린스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주식시장에서 자금이 유동적 공급될 때 거품이 생성됩니다.
1990년 6월부터 1995년 2월까지 기준금리를 한차례 올린 결과 엄청난 유동성이 확보됐죠.
*
투자자들을 비롯해서 스톡옵션을 받은 임원들은 엄청난 부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1997년부터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엔론사의 주가는 다섯배로 뛰었고 20달러는 순식간에 90달러가
되었죠.그야말로 미시시피 사태의 재현이었습니다.
*
당시 휴스턴에 있던 원유 매장도 낙관적이었는데 이곳조차도 처음 경험하는 풍요였읍니다.
이곳 리보 오크스는 휴스턴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입니다.켄 레이와 임원 대부분이 이곳 휴스턴에 살았죠.
엔론이 파산하던 해에 최고위층 150명에게 평균530만 달러가 돌아갔습니다.
고급 자동차가 잘 팔릴 수밖에 없었죠."그당시에 엔론사의 임원들은 연봉을 훨씬 넘는 금액을 보너스로
받았습니다.
*
연봉의 75%로 받으면 무안해 할 정도였죠.적어도 보너스로 연봉에 4배~5배는 받아야 체면이 섰으니까요.
꽤 큰 금액이죠.켄 레이는 회사를 운영할 때 다음과 같은 윤리 기준을 내세웠습니다.
엔론사는 어떤 기업과도 정직하게 거래를 한다.법과 규칙을 준수하고 무엇보다 신용을 우선한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
하지만 엔론사 역시 정교한 사기극을 펼칠 수는 없었습니다."엘파습니다. 엔론사의 데이비드입니다.
전력수요가 적어서 수요가 좋질 않내요" 엔론사 직원과 엘파스 전기회사 직원과 나눈 대화를 녹음한
것입니다.전력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발전소를 가동을 중단하는 것을 논하고 있죠.
"화력발전 1대를 끋다가 가동하는데 얼마나 걸리죠.3~4시간이면 충분하죠.그럼요.
괜찮다면 1대 정도는 잠시 끄두죠.그러죠."
*
결과적으로 엔론의 주가는 상승했지만 소비자는 정전때문에 불편을 겪어야 했죠.
엔론사는 이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을 온갖 방법으로 횡령했습니다.장부를 조작해서 자산을 증액하기도
했죠.그리고 특수목적 법인을 설립해서 대차대조표 상의 부채를 줄였습니다.이중에는 튜코나 렢터와
같이 기업명이 독특한 법인도 있었습니다
*
엔론사는 손실을 이익으로 둔갑시키고자 다양한 속임수를 섰습니다.하지만 오래가지를 못했죠.
장부를 조작하다보면 결국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야망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켄레이와 임원들은 수억달러의 주식을 시장에 내다팔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대중들에게는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고 헛소문을 퍼트렸죠.
*
존로가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 폭락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켄 레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1년 11월15일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엔론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수상은 당연했습니다.190년대 말 앨런 그린스펀의 금융정책 결과로 엔론 거품 및
IT거품이 터졌으니까요.그 수상식이 꺼지고 2주만에 엔론사는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
과연 빚이 어느 정도 였을까요.2001년 엔론사는 파산신청을 하려고 채권단과 맞난 자리에서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대차대조표에서는 장기차입금이 130억 달러라고 나와 있었지만 사실은 380억 달러
라고 밝혔죠.무려 250억달러의 부채가 장부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
부채규모에 다들 놀랐겠군요.설마 그정도 일줄은 상상도 못했겠죠.그럼요.모두 놀라서 쓰러질 지경
이었어요.엔론사의 직원 4500명이 해고되기 바로 전날 임원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으로 보너스가 지급
되었습니다.2006년 5월 켄 레이는 유가증권법 및 통신법 사기죄로 기소되었는데 유죄선고를 받았습
니다.
*
그의 심복 제플린 스틸링은 2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죠.켄 레이는 형이 확정되기전 콜로라도 주에
있던 아스펜에서 휴가를 보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가 저지런 부정한 수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오히려 엔론사가 벌인 분식회계
는 서양금융권에 관심을 끌었죠.
*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같은 부정행위때문에 오늘날에 금융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엔론사의 분식회계 방식에 마치 전염병처럼 금융권에 퍼진 것입니다.엔론사의 거래원들과 은행직원들,
그리고 에너지 거래소 직원들까지 말이죠.금융시장 전반이 도피한 것입니다.
*
유한 책임주식회사는 놀라운 조직입니다.하지만 이 회사가 등장하고 부터 기업의 부정회계는 늘었고
주식시장도 비이성적일 때가 많았습니다.사실 기업과 주식시장은 쌍둥이와 마찬가집니다.
한쪽이 이유없이 날뛰면 다른 쪽도 따라서 날뛰니까요
*
지난해에 발생한 위기에 경험했듯이 금융시장은 우리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용경색이 시작되고 주가가 반토막이 난 경우를 세계각국의 주식시장에서 쉽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과도한 낙관에서 과도한 비관으로 바뀌고 사람들의 탐욕이 과도한 공포로 돌아
서는 순간 주가는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니까요.마치 안데스 산맥처럼 말입니다.
*
투자자로서 바라는 것은 단하나 정상에서 내려올 때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평탄한 언덕을
따라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위태로운 금융시장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돈의 힘 4부에서는 수익만큼 중요한 위험요소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그때까지 이 질문을 채택해
보세요.보험에 가입하셨나요 아니면 해치상품에 투자하셨나요.
제4부 위험한 거래
*
재테크의 기본은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것입니다.최근에 금융위기를 겪었던
우리에게는 다가올 미래에 다가올 불안감이 큽니다.세상 곳곳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죠.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불행한 일을 겪기도 하죠.불의의 재난을 당하기도 하죠.
*
2005년 미국 뉴올리온즈는 허리케인인 카트리나가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문제는 불확실한 미래에
어떻게 대비하느냐는 것입니다.스페인의 문제니까 스스로 해결하는게 정답일까요?아니면 국민들이
보내온 성금이나 구호물자에 의지하는게 편이 좋을까요?
*
그것도 아니면 정부가 재난에 대비해서 납세의무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질문은 길었지만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보험입니다.보험하면 영국을 빼놓을 수 없죠.
*
다른 나라 국민들과 비교하면 영국의 국민은 보험료를 많이 내는 편이죠.안전한 나라 영국에 살면서
왜 보험에 의지하나고요? 먼저 돈과 위험 관리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직자가
고안한 생명보험에서부터 복지국가의 흥망,해치펀드의 성장,억만장자의 출연을 검토해보죠.
*
위험관리란 끝이 없는 싸움과 같이,삶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삶이 예측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미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어서 종종 곤경에 빠집니다
우리는 예측가능한 위험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
2005년 뉴올리온스를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현재 미국 뉴올리온스는 또다른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재난을 극복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위험관리 목적으로 보험을 들었는데
막상 보장을 받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겠죠.
허리케인이 뉴올리온스 한복판을 강타하지는 않았습니다.북동쪽으로 살짝 비켜갔습니다.
*
하지만 주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재난은 시작되었습니다.여기는 폰샤트레인 호수와
미시시피강을 연결하는 수로가 있던 곳입니다.폭우를 동반한 허리케인때문에 수위가 높아졌고 제방은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죠.뉴올린온스 구지역은 결국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구지역 동쪽에 있는 세인트 버나드역은 주택을 소유한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
그들이 가입한 민간보험엔 보상약관이 명시되어 있었죠.당시 지방의회 의원이었
던 리파타는 대피명령에 따르지 않고 시청에 남았습니다.하지만 물이 계속 차오르
자 건물 옥상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보시다시피 여기까지 물이 차 올랐습니
다.아!여기까지요? 예,물이 계속 올라왔죠.건물 안으로 물이 밀려와서 15분 만에
수위를 4미터를 넘어섰습니다.아! 세상에
*
건물 위에서 밖을 내려다 보았는데 도로는 완전히 물에 잠겼고 지금은 부서진데다 차들은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수위가 굉장히 높았죠.적어도 5~6미터는 되었을 겁니다.물살도 급했죠?
녜,물살도 이 쪽 도로를 휩쓸고 지나며 모든 걸 집어삼켜버렸습니다.
세인트 버나드 전지역이 침수되는데 걸린 시간은 15분,주택 2만6천채 중 다섯채만 물에 잠기지 않았습니다.
*
허리케인과 홍수로 뉴올리온스 주민 2000여명이 희생당했습니다.세인트 버나드에선 48명이 희생되었는데
이중 상당수는 이중 상당수는 침수된 집에 갇혀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문에 적힌 표시는 차안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표시입니다.잡병이 창궐했던 중세도시를 연상시키는군요
*
현재 뉴올린온스 주민들은 또다른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이번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숨통을 조이고
있죠.주택에 대한 손해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서 주민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정작 큰일을 당했을 때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민간보험의 구조적인 모순을 한남자가 폭로하고
나섰습니다.
*
해군 조종사 출신인 크라그스 변호사는 소송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주로 민감한 쟁점들을 문제를
삼아왔습니다.이를테면 담배회사가 폐암경고를 소홀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는 시기였죠.
결국 담배회사와 석면 제조사는 각각 2480억 달러와 5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수입료도 많이 받았죠.담배소송에서만 무려 14억 달러를 벌었다고 합니다.
*
그러고서는 미국보험사를 상대로 여러차례 소송을 걸었습니다.허리케인 때문에 집이 파손된 주민 수백명은
보험회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면서 크러그스에게 집단소송을 의뢰했죠.
저 곳에 집이 있었나요.저 공터뿐만 아니라 트레일러가 있는 자리에도 집이 있었어요.크러그스도 허리케인
피해자입니다.
*
미시시피 남쪽에 파스타굴라치에 집이 한채 있었는데 허리케인때문에 파손되어서 결국 걸어야 했죠.
이 부근이,현관이군요.바로 여깁니다.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졌네요.공터나 다름없군요.
보험제도를 어떻게 보완하죠.경제적 여건이 되어서 새집을 지을 수 있겠군요.
대다수는 그럴 돈이 없죠.가입자들이 보장을 제대로 받을려면 현행 보험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
보장내역을 확실히 할 방법이 있습니까? 방법은 있습니다.시중에서 판매되는 약품에는 약효뿐만 아니라
부작용에 대한 경고와 복용시 주의사항이 적혀 있어서 효능과 위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보험약관은 너무 어렵고 복잡한 것이 문제죠.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약관을 수정
해야 합니다.
*
크러그스는 보험사에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그 결과 가입자 수백명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던 미국 굴지의 보험사가 지급에 합의했죠.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보험사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크러그스는 유리한 판결을 받기위해 판사를 매수한 유죄가 확정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
이를 틈타 보험회사들은 허리케인 피해 소송을 무마하고자 걸프 해안의 일부지역에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이 때문에 피해가 심각했던 뉴올리온스 일부지역은 보험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
습니다.주택융자도 받을 수 없나요? 예 그렇습니다.주민들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집을 다시 짓거나 보험료가 저렴한 지역으로 이사를 갈 수 밖에 없죠.
*
지역사회도 타격이 큽니다.주민들이 마을을 떠나는 바람에 이 지역은 사실상 마비 상태입니다.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지 3년만에 세인트 버나드 인구는 전체1/3로 줄었습니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상황의 연속입니다.카트리나 참사가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보장을 받을 줄 알았는데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때로는 보험금 액수는 얼마 되지 않는데 청구
절차가 복잡한 경우가 있죠.
*
그런데도 가입자는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야 한다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누가 이런 제도를 만든
걸까요?보험의 주된 목적은 만약을 대비한 저축입니다.
허리케인 피해 보험금 청구 소송은 좋은 교훈을 주죠.보험금을 받을려면 약관을 꼼꼼히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근대 보험역시 신중하고 알뜰한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비관적이라고 하죠.연일 비가 오는 궂은 날씨 때문일까요.
아니면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참패해서 일까요.어쩌면 엄격한 칼뱅주의 교리에 영향을 받아서 인지도
모릅니다.
*
교회 이야기까지 나왔군요.1744년 근대보험을 창안한 인물은 스크틀랜드국 교회의 성직자들입니다.
훗날 보험시장은 수십억 파운드로 성장을 하죠.18세기 말 그레이 프라이어스 묘지 근처에는 시체 도둑들이
많습니다.그들은 에던버르 대학교에 해부용 시신을 공급하고 간 것으로 유명하죠.
*
하지만 교회는 성직자 두사람 업적때문에 더 유명합니다.주인공은 로버트 월리스와 알렉산더 웹스터입니다.
보험의 창시자가 스코틀랜드 성직자였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직자라고 하면은 신중하고 검소하며 철저하게 금욕적인 생활태도를 고수하는 모습이 쉽게
연상이 되니까요.
*
로버트 월리스는 수학의 천재이면서도 술도 잘 마셨습니다.친구들과 씨끌벅적하게 술마시기를 즐겼죠.
월리스와 웹스터는 동료 성직자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가족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했습
니다.
*
고민 끝에 월리스와 웹스터는 이들을 구제할 방법을 생각해 내었죠.최초의 보험은 이렇게 탄생했던 것입
니다.당시 월리스가 작성한 문서가 스코틀랜드 국가 기록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
이것은 그중 일부인데요.돈이 필요한 유가족이 몇명인지 치밀하게 계산한 내용이 치밀하게 잘 나와
았습니다.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성직자들로 부터 걷은 보험료를 고스란히 유가족에게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는 겁니다.보험료를 가지고 기금을 만든 후에 그 돈을 가지고 수익사업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죠.
*
그기서 나온 수익률을 유가족에게 지급하면 보험료의 원금을 건드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거죠.
이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미래에 발생할 유가족의 수가 얼마나될지 파악해야 됩니다.
월리스와 웹스터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계산해 내었습니다.
*
스코틀랜드의 성직자 유가족을 위한 보험은 금융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 해냈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스코트랜드 성직자 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보험이 등장했죠.
1815년에는 보험의 영역이 확대되어 나폴레옹 전쟁 유가족에게도 보험금이 지급이 되었습니다.
*
워털루 전투에선 군인 4명중 1명이 목숨을 잃었죠.하지만 보험에 가입했다면 유가족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그러니까 군인들은 죽어서도 가족을 지킬 수 있었죠.
두 성직자가 생각해냈던 최초의 보험은 스코티시 위도우스라는 세계적인 보험회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채무에 시달리던 영국의 작가 월터스 코트 일화는 무척 흥미롭죠.그는 1826년 보험에 가입할 당시 채권자
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죠
19세기 중반에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일만큼이나 보험 가입이 일상적이었습니다.
*
1744년 두 성직자가 씨름하는 동안 사람들은 이 제도가 거대한 보험 시장으로 성장 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하지만 월리스는 이미 250년 전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보험 가입자가 많을수록 보험금 지급 계산방식이 쉽다는 사실을 말이죠.
보험 가입자 개인의 수명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지만,가입집단의 평균수명은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
한마디로 말하면 보험의 기능은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단 보험에 가입에 가입했을 때만 가능하죠.보험의 종류는 무척 다양합니다.하지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죠.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과 형편이 어려워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당시 빈민층의 삶은 가혹했습니다.자선단체에 의존하거나 시설이 열악한 빈민구제기관에서 근근히 생활을
했죠.하지만 1880년이 되자 소외된 이들을 구제하자는 소리가 높았졌습니다.
위험의 개념이 확장된 것이죠.결국 이런 사고의 확장이 근대복지 국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
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을 지는 개념,이것이 바로 복지국가(국민의 복지증진과 행복
추구를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보는 국가형태로 사회보장제도,최저임금보장 등 다양한 복지정책을 폄)입니다.
*
흔히들 복지국가로 영국을 꼽지만,강력한 복지정책을 최초로 실시한 나라는 일본입니다.
일본은 20세기 전반에 많은 재난을 겪었습니다.1923년 도쿄에선 강진피해가 심각했죠.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온스를 강타했을 때 민간보험은 사실상 효력이 없었습니다.
*
20세기 초 일본에서는 국가가 위험 관리에 나서야 한다는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죠.초기에는 제국주의적
색채가 강했습니다.일본은 복지국가 건설에 나섰지만 이는 전쟁을 위한 것이었죠.
*
복지국가는 이타주의를 실천하기보다는 전쟁에 투입할 군인과 노동자가 필요했던 일본정부의 야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국가 건강보험은 국민의 건강을 보장할 뿐만아니라 제국건설에 필요한 군인들을 안정적
으로 공급해 주는 기능도 했습니다.
*
모든 일본인은 군인이다 라는 전쟁구호는 모든 일본인은 모두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구호와 일맥상통했죠.
그런데 여기에 제동이 걸렸습니다.일본이 세계최강의 경제대국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부터 였죠.
일본의 전쟁국가로는 실패했습니다.
*
제국을 확장하려는 야심은 3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1945년에 일본증시의 주가가 미국의 맹공격에 급없이
하락했죠.목재건물들은 불길에 휩사였고 도시 인구 약1/3은 집을 잃었습니다.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만이 전쟁의 화를 면할 수 있었으며 1945년 일본은 전쟁국가이기를 포기했지만 그렇
다고 복지국가 정책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일본은 큰 교훈을 얻었죠.민간보험만으로 위기를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다.일반인들이 미국 공군의 공격에
맞서기란 불가능했어니까요.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민의 위험을 떠앉는
것이었죠.
*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영국의 경제학자로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를 확립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베버리지 법안을 제창함)가 고안한 사회보장제도는 전쟁이후에 탄생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유명하죠"일본정부는 47년10월 복지정책을 고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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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 자문 위원회는 일본판 베버리지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제도안을 내놓았죠.
일본 국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보고서에는 사회보장제도 정책의 의도가 명확이 기록되어 있죠.
빈곤을 가져오는 모든 원인을 국가가 관리하도록 했죠.질병과 부상,장애,사망,출산,대가족,노후와 실업,
원인을 막론하고 가난한 국민들은 국가로 부터 최저생계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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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봉건영주나 신이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하던 시절도 막을 내렸습니다.복지국가가 나서서 미래에
발생할지 모를 위험을 해결해 줄테니까요.교육비가 없으면 국가가 대신에 지원해 줍니다.일자리가 없으면
국가가 생활비를 대주죠.병이 심하면 치료비를 대주고 은퇴를 해도 돈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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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시에는 유가족에게 돈이 돌아가죠.전쟁이후 일본에 복지후원은 모든 국민은 연금을 받아야 한다로
단어 몇개만 바뀌었을 뿐입니다.일본의 복지제도는 한동안 놀랍도록 효과적이었습니다.
공중보건과 교육부문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죠.1970년대 후반에 일본 스스로 복지 강대국이라 자부할
만큼 복지기반이 안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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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정책은 효과가 있었습니다.일본은 전국민의 복지를 책임졌고 경제적으로도 눈부신 성장을 이루
었습니다.1968년에는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났죠
당시 미국의 한 경제학자는 2000년에는 일본이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예측했다죠.
*
복지국가의 개념은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제국을 확장시키려는 야심찬 계획을 접고 국민후생에
집중한 전략이 큰 성과를 거둔 것이죠.하지만 성공을 확신하던 일본의 복지국가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1970년대에 이러르서는 일본의 복지국가 정책이 자리를 잡은 듯 보였습니다.하지만 일본이 아닌 지역에서는
사정이 달랐죠.영국을 비롯해 서양의 복지국가 정책은 자본주의 경제의 신개념인 동기부여를 배제한 제도
였습니다.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보상을 받고,일하지 않으면 낙오되었는데 이와는 많이 달랐죠.
*
결국 스테그프레이션(경제불황과 물가상승이 동시에)이 발생해,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동시에 진행됐죠.
그렇다면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
지난 25년간 세계경제는 기존의 복지국가 개념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때마침 한 학자가 방향을
제시하고 나섰죠.그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괴물을 경제에 끌여들였습니다.바로 위험요소입니다.
1976년 미국 시카고 대학에 재직중인 밀턴프리드먼 교수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
프리드먼 교수는 간단한 공식 하나로 경제학 대가의 반열에 올랐죠.MV=PQ(M은 통화량,V는화폐 유통속도,
P는 물가,Q는 총거래)통화량이 증가하면 물가는 오른다는 것이죠.
화폐수량설의 핵심입니다(화폐공급량의 증감이 물가수준의 등락을 정비례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경제이론)
*
경제학의 대가인 프리드먼 교수조차도 쉽게 해답을 찾지못한 문제가 있습니다.바로 복지국가의 실패원인
입니다.한편 칠레의 상황은 프리드먼의 이론을 검증하기에 완벽했습니다.
1973년 9월 칠레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덴를 축출하기 위해서 탱크부대가 산티아고로 진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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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를 공산국가로 만들려는 마르크스주의자인 아옌덴의 노력은 경제위기와 쿠테타로 막을 내렸습니다.
카레라 호텔 발코니에서 아옌덴의 반대세력은 공군이 대통령관저인 모네다궁을 폭격하는 모습을 감상
하면서 샴페인을 터트렸죠.이 곳 모네다궁에서 아옌덴은 반군에 맞설 준비를 했습니다.
그의 우상인 피델 카스트로가 선사한 AK47소총을 들고 있었죠.
*
아옌데가 창밖을 내다봤을 땐 이미 탱크가 진격해 오고 있었습니다.칠레의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꿈이 무너진 것이었죠.반군이 포위해 오자 아옌데는 집무실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총격의 흔적이 건물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1973년 9월 칠레의 상황은 세계적으로
위기를 맞은 복지국가의 문제와 대안경제 체제의 필요성을 실감케 했습니다.
칠레에선 생산량이 감소하고 물가가 폭등해 전국민을 상대로한 복지제도가 쓸모가 없었죠.
*
아옌데는 구소련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해결책으로 제시했지마는 장관들은 이를 결사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없었습니다.이 때에 프리드먼 교수가 나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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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프리드먼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칠레로 건너갑니다.프리드먼 교수는 모네다궁을 방문해서
칠레의 새로운 대통령 아우그스토 피노체트를 만났습니다.프리드먼 교수는 정부부채를 줄여 연간 900%에
달하는 물가상승률을 진정시켜야 한다며 피노체트을 설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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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후 칠레 군사정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정부지출을 27%나 줄였죠.인플레이션은 최근 발생한 문제가 아닙니다.
40년전 사회주의를 추구할 때부터 시작해서 아옌덴 정권들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
사람들은 경제와 관련해 피노체트 대통령에게 조언을 해주는 프리드먼이 못맏땅했습니다.
공산주의자인 사람 2000여명을 사형에 처하고 3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고문가하는 군사 독재자에게
경제조언이라니
*
사실 프리드먼이 방문하기 전부터 시카고 학파(미국의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경제학자로
신자유주의 학파라고도 불림)의 경제모델은 칠레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이곳 산티아고 카톨릭 대학에서 젊은 경제학자들은 시카고에서 연구를 계속했고 균형예산과
통화정책의 준칙강화,자유무역의 필요성을 배워 귀국을 합니다.
*
그들이 바로 프리드먼의 제자들이었죠.그런데 이들 경제학자의 제안은 프리드먼의 제안보다 급진적이었죠.
복지국가와 정반대의 모델이었죠.신자유주의 경제혁명은 영국이나 미국에서 시작된게 아닙니다.
이곳 칠레에서 시작되었죠.
*
복지국가 해체론을 주도했던 중심에는 젊은 경제학자 호세 핑예나가 잇었습니다.
칠레 경제는 절망적이었습니다.50년간 보호무역정책과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사회주의 국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아옌덴 정권에 들어서 경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
복지국가는 맞는데 그 때문에 재정이 크게 악화됐죠.1979년부터 81년 사이에 핑예나와 그의 동료들은
새로운 연금제도를 도입했습니다.공적연금을 민간연금으로 전환하는 방식인데요.
월급에서 원천징수하는 방안 대신에 근로자가 소득의 10%를 민간기업이 유치하는 개인연금 저축계좌에
납입하고 낮은 보험료로 상해보험과 생명보험을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
이제도의 핵심은 자신의 노후는 스스로 책임진다는데 있습니다.핑예라는 일종의 도박을 한 거죠.
원천 징수방식을 고수할 것인지 개인계좌 적립방식으로 전환할 것인지 근로자들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전체 근로자의 80%가 새로운 연금제도로 전환했습니다.
*
아,여기서 잠깐만요.프리드먼의 제자들과 핑예라가 군사 독재자에게 협력한 일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들의 개혁이 칠레의 민주주의에 부활에 기여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저는 기여했다고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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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피노체트는 10년후 민주선거를 거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10년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죠.민주주의는 꽃 피었고 개혁을 단행한 결과,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습니다.연금개혁으로 국민 스스로가 노후에 대비했고 칠레 경제는 만족으로 활성화 되었습니다.
*
이 곳 칠레 은행에서 중개인들은 연금기금을 주식시장에 투자했습니다.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죠.
개인연금 저축의 평균 수익률은 10%가 넘었는데,1987년부터 20년간 칠레 주식시장은 18배나 상승을 했습
니다.물론 문제점도 있었죠.
*
모든 국민이 정규직 근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연금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죠.
여기는 산티아고 교외에 라 빅토리아에 있는 공산당 본부입니다.피노체트 정권에 반대파가 모이던 곳이죠.
당시에 주민 대부분은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연금가입비를 내지 못했습니다.
*
그러니 혜택을 받을 수 없었죠.이 곳에선 체 게베라(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피델 카 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일으켰던 인물)와 같은 사회주의자가 환영을 받습니다.
핑예라는 인기가 없죠.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빈곤층은 얼마되지 않는 보조금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겠죠.
*
하지만 경제성장은 빈곤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경제성장은 모두에게 혜택이 되었습니다.
칠레에 빈곤층 비율이 50%에서 13%로 감소했을 정도죠.놀라운 성과입니다.
연금계획이 중요한 역할을 한거죠.프러드먼의 제자에 의한 개혁정책은 칠레의 경제성장에 기여했습니다.
*
경제계획 이전에 15년동안 칠레의 연간 경제성장은 0.17%에 불과했지만,하지만 그 이후 15년 동안 경제
성장률은 20배에 달합니다.남미에 있는 다른 국가에 빈곤율이 40%인데 반해서 칠레는 15%에 불가했죠.
이 곳 산티아고의 눈부신 풍경을 보니,다른 나라에서 칠레의 연금제도를 도입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
영국의 대처(영국의 최초 여성 총리로 과감한 시장주의 경제를 도입해 경제부흥을 이뤘으며 '철의 여인'
으로 유명함) 수상은 칠레의 이러한 경제성장을 반기는 입장이었죠.
경제가 회생하려면 국가의 복지책임을 줄여야 한다는 게 대처수상의 생각이었습니다.
*
하지만 연금개혁이 필요한 국가는 따로 있었습니다.바로 일본이었죠.물론 일본의 복지제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1970년대 일본인의 예상수명은 1위를 기록했죠.
문제는 일본의 복지제도가 너무 방만하다는 것입니다.
*
일본의 후생 노동성에서 퇴직인구의 부양문제로 고심하고 있습니다.경제활동을 하는 젊은 층의 수가
적어서 인데요.1960년대는 11명의 근로자가 퇴직자 1명을 부양해야 했었죠.
하지만 2025년에는 근로자 2명이 퇴직자 1명을 부양해야 합니다.
*
다시 말하면 후생노동성 직원 2명이 퇴직한 직원 1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30년 사이에 사회보장 비용 증가율은 국민소득 증가율 대비 4배가 됐습니다.
현재 일본의 건강보험 공단은 적자상태고,연금기금도 바닥났습니다.한 때 성공적이었던 복지제도가 국가
경제를 침체시키고 있죠.
*
보험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상품이었습니다.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이 창안한 보험은 일본식 복지제도로 발전
했고 국가가 많은 책임을 져야 했죠.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911터러나 카트리나 재해는 보험제도와 복지국가의 한계를 보여줍니다.하지만 미래에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방법으로 보험과 복지가 전부는 아닙니다.
요즈음은 해치펀드라는 것을 이용합니다.그렇다면 해치펀드는 무엇이고 해치의 정확한 뜻과 유래는 무엇
일까요.
*
해치펀드(국제증권 및 외환시장에 투자해 단기이익을 올리는 민간투자 기금)는 조금 생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치펀드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죠.
해치펀드 매니저로 성공한 캔그리핀은 6천만 달러의 세잔의 그림을 쌋고 드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죠.
재스퍼 존스의 작품은 8000만달러에 구입을 했습니다
*
자선단체에 수억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죠.캔그리핀은 유명한 해치펀드인 시타델 투자그룹(세계 최대규모의
글로벌 금융회사)입니다. 저는 2007년 신용경색 위기를 모면하면서 10억달러 이상을 벌어 들였습니다.
*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그 비결은 정확한 계산과 뛰어난 직관으로 위험을 성공적으로 관리한데
있었습니다.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습니다.조금씩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직관이 탁월하고 빠른 사람이 유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
하지만 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느냐 피하느냐에 문제는 각자의 판단력에 달려있습니다.
위험관리를 뜻하는 해치는 농업분야에서 유래했습니다.농부들은 수확한 곡물이 시장에서 얼마에 팔릴지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가격을 정확히 예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파종기에 미리판매가격을 확정하고,그 가격에 상인들이 수확물을 사는 일종의 선물계약을
맺어 위험에 대비했죠.
*
선물계약(미래의 일정한 시점에 일정량의 특정상품을 미리 정한 가격에 매매하기로 맺은 계약),농부는
가격이 떨어지지않게 상인은 가격이 오르지 않게 선을 그어놓은 겁니다.
이런 식의 선물계약으로 농부와 상인 둘다 손실에 대비를 했죠.
*
양측에게 이득이었죠.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유리했습니다.자본형성과 투자를 장려하고 열심히 일해서
자산을 추척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했습니다.세부규칙이 정해지고 어음 교환소가 설치되는
등,선물계약이 제도화 되면서 본격적인 선물시장이 등장했습니다.
*
바람의 도시라고 불리는 시카고에서 문을 열었죠.1874년에 설립된 선물시장에서
는 상품의 거래가 일반적이었습니다.그런데 조건에 따라 권리행사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선물,즉 옵션이 등장을 하죠.여기서부터 용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원칙은 아주 간단합니다.
*
선물계약은 기존 자산에서 나온 것으로 파생상품이라 불립니다.파생상품 중에 옵션(주식,채권,주가지수 등
특정자산을 미리 정해진 가격에 사거나 팔 수 있음)이라는게 있습니다.
콜옵션 매입자는 이를테면 베럴당 120달러에 원유를 살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1년안에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로 오르면 수익성이 높은 내가격옵션이 되고,콜옵션을 행사하면 30달러의
수익을 얻죠.
*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에 머무르거나 하락을 해도 콜옵션 매입자는 살 권리를 포기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손실은 콜옵션 매입 프리미엄으로 한정이 됩니다.이런 식으로 그린피는 억만장자가 됐죠.
*
파생상품은 이론상으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획기적인 방안이었습니다.기존보험보다 체계적이고 더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죠.지난 10년간 금융시장은 파생상품이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2007년말에는 파생상품계약의 추정가치가 무려 596조달러 이는 미국 전체 경제의 40배에 달하는 규모
입니다.
*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1000명의 사람들이 200억달러를 굴리는 일은
21세기에나 가능한 일입니다.50년전에는 불가능했죠.물론 해치펀드에도 문제가 있죠.억만장자 투자가인
워렌버핏은 파생상품을 일커르서 금융상품을 대량살상 무기라고 했죠.
*
그는 미국 거대보험 회사 AIG의 몰락도 예견했습니다.이 곳 런던에 유럽본부가 있죠.
AIG는 보험보다 파생상품에 치중한 탓에 위기로 내몰린 것입니다.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려는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 것일까요?
*
보험회사는 실망만 안겨줬고, 복지국가는 무너졌습니다.파생상품은 이익과 함께 엄청난 손실도 가져왔죠.
최근들어 많은 사람들이 미래대비하고자 집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퇴직하기 전까지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기 때문에 집에 투자하는게 최근의 추세죠.
*
연금개혁이 실패해도 걱정이 없습니다.안락한 집이 있으니까요.그런데 연금이나 보험의 대안으로 삼기에
집은 한계가 있습니다.손실 대비책이 없고 부동산 시장에 국한되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세상 어디를 가도 집만큼 안전하고 든든한게 없다고요.과연 그럴까요?
제5부 안전자산,집
*
매력적인 부동산 시장,과연 매력만 있을까요? 최근들어 부동산 시장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영미권에선 부동산 보드게임인 모너풀리가 인기인데요 소작농을 착취하는 독점지주의 횡포를 알리려고
1903년에 만든 지주게임이 원조이죠.
*
30년후 실업자 찰스 애로우는 애틀랜트 시티를 배경으로 지주게임을 변형한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서 특허를
받았습니다.모너풀리 게임에선 부동산 거래가 자유롭죠
모노풀리 게임에서 이기려면 부동산을 가능한한 많이 소유하는게 유리합니다.더좋을 전략을 부동산 주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죠.흔히들 집이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데요.
*
금융권에선 주택 소유자에게 대출을 해주는게 제일 안전하다고들 합니다.대출금을 갚지 못할 땐 집을 회수
하면 되니까요.채무자가 집까지 들고 잠적할 수는 없겠죠
영미권 국가에선 재산권 소유 민주주의(모든 시민이 개인 재산을 소유해 정치,경제적 삶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민주주의 이론)부동산 소유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죠.
*
한편 사람들이 너도나도 부동산을 소유하자 소유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주택구입자금 대출용으로 무려
수조달러가 시중에 풀렸죠.여기에는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이 주로 받았죠.서브 프라임 대출금(신용등급이
낮은 사람이 집을 담보로 받는 대출금),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금융자산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가격도 얼마든지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다는 것이죠.
*
집이 가장 안전하다는 속담이 이제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부동산이 안전하다는 진리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부동산을 맹신한 나머지 좋은쪽만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
과거에는 상류계급만이 부동산을 소유했습니다.상류계급은 토지권리권과 정치적 특권을 후손들에게 물려
줬죠.부동산이 없는 사람들은 영주에게 소작료를 내야 했고 선거에서 투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
오늘날의 영국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2400만 핵타르에 이르는 토지면적중에 2/3를 19만 가구가
독점하고 잇으니까요? 다른게 있다면 정치권력이 분산됐다는 점이죠.
영국 상원의 개혁으로 귀족의 정치적 권력은 갈수록 약해졌습니다.
*
귀족이 몰락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특히 금융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830년대까지는 대지주 귀족이 큰 돈을 벌었죠.30여개가 넘는 귀족가문에 연간 총수입은 6만 파운드,
지금으로치면 무려 1억5천만 파운드에 이릅니다.그렇다면 농업의 발달로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는데도
귀족들이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안타깝게도 그들은 부동산의 속성을 몰랐습니다.귀족들은 토지를 수입원으로 보았습니다.
토지의 가치를 맹신하고서 무리하게 돈을 빌렸죠.토지란 담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간과했던 것입니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아야 했죠.그런데 1840년대 중반부터 빌린 돈을 갚는 것이 힘들어 졌습니다.
*
영국 버킹엄셔어에서는 방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귀족들이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
니다. 영국 스토우 하우스는 18세기의 신고전 양식의 건물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개인 저택이었습니다.화려한 기둥과 정교한 타원형 천장이 정말 놀랍군요.
*
그런데 저택내부가 다소 허전해 보이시죠.예전엔 로마시대 동상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신고전 양식으로 정교하게 만든 벽난로는 이런 투박한 것으로 바뀌었군요.이유가 뭘까요.
화려한 대저택이 이렇게 껍데기만 남게 된걸까요.
*
저택의 주인은 근대 최초로 발생한 부동산 위기의 첫 희생자입니다.버킹엄 샌더스 공작, 리처드 템플
그랜빌 2세가 주인공이죠.스토우 하우스는 공작의 자산중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그에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자메이카에 2만7천 핵타르에 이르는 토지가 있었죠.
*
재산이 엄청났던 공작은 돈을 물쓰듯 했습니다.공작이라는 높은 신분을 과시하듯 사치를 일삼는 것은
물론이고,정부를 여러명 두며 방탕한 생활을 했죠.그런데 1845년부터 사정이 달라졌습니다.곡물가격이
하락세로 접어들면서 농경지에서 나오는 수입이 감소했죠.
*
교외의 땅값은 곤두박질 쳤습니다.땅값이 폭락하자 토지를 담보로 빌린 돈을 갚을 수가 없게 됐죠.
그랜빌 공작은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음에도 저택을 화려하게 꾸미기에 바빳습니다.
공작은 빅토리아 여왕과 엘버트 공의 방문을 앞두고 스토우 하우스를 초호화 저택으로 새단장했습니다.
*
홀 15곳에 값비싼 가구를 잔뜩 들여놓았죠.또한 금실로 수놓은 비단을 깔아서 바닥을 장식했습니다.
저택을 둘러본 여왕이 한마디 했죠."내 궁전 어디에도 이렇게 호화스런 궁전은 없는 것 같군요.
결국은 집단장에 지나치게 돈을 쏟아부은 결과로 공작의 사치스런 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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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8월 공작의 아들은 스토우 하우스 안에 있던 모든 집기를 경매에 부쳤습니다.
화려했던 대저택의 밀려드는 입찰인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스토우 하우스는 사립기숙학교로
쓰입니다.
*
이처럼 부동산의 자산가치는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밭이나 넓은 땅을 물려 받는 것보다 안정적인 직업과 꾸준한 수입이 더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그랜빌 공작부인은 옷장에 가득했던 드레스까지 런던의 관리들에게 몰수당하고 공작과 이혼했습니다.
*
공작은 스토우하우스 소유권을 포기하고 세를 들었습니다.그는 칼턴크럽이라는 정치살롱에서 회고록을
작성하기도 하고 여배우의 뒤를 따라 다니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버킹엄 샌더스 공작이 몰락하고 나서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
부동산 소유자만 투표했던 시절은 가고,성인이면 누구나 투표를 하게 됐죠.귀족중에 농사 수입이 줄어
들면서 시민 참정권이 확대된 것입니다.그렇다고 사유재산제도가 보편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38년까지만 실거주자 소유한 주택은 영국전체 주택에 1/3이 안되었습니다.
*
주택보급을 통한 부동산 소유 민주주의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그것도 금융사상 최대의 위기속에서
말입니다.나라마다 표현은 다르지만,집에 대한 생각은 비슷합니다.
내집만한 곳이 없다고들 하죠.요즘은 누구나 집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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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2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자가 거주자 비율은 40%에 불과했죠.과거 영국의 계급에선 상류층만이
재산을 소유했습니다.훗날 미국에선 금융위기를 겪는 동안 누구나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됐죠.
*
1920년 대공황 당시 미국 경제는 추락 일로에 있었습니다.대출을 받아서 집을 장만한 사람들은 융자금을
갚을 방법이 없었고,월세를 내는 길마저 막막했던 임차인들은 구호물자로 연명을 했죠.
미국 전역이 불황에 허덕이는데 공업도시 디트로이트는 특히 더 심했습니다.
자동차 업계는 고용 인원을 절반으로 줄였고 임금마저 절반으로 삭감했죠.
*
1932년이 되자 사람들의 불만이 더드어 폭발했습니다.같은 해 3월 7일 포드 자동차회사에서 해고당한
5000명은 실업수당 지급을 촉구하며 공장으로 향했습니다. 이제부터 벌어질 사태는 미국의 주택정책의
변화를 몰고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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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근로자들이 비무장 시위를 벌이며 포드,리버리치 공장에 도착한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경찰들이
근로자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해,이 사건으로 노동자 5명이 희생됐습니다.
장례식에는 6000명이 참석해 세계 노동자의 노래를 부르며 희생자들을 추모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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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기관지는 포드 창립자의 아들인 에드셀 포드가 학살을 방관했다고 비난했습니다.막대한 자본을
보유한 포드사와 가진 것 하나없는 해고 근로자 집단,양쪽의 골깊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었던
걸까요? 에드셀 포드는 멕시코 화가 제고 리베라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향후 상호협력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이런 벽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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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생산성을 공유하는 사회를 꿈꿔 왔습니다.
리베라가 보기에 공장은 그가 보기에 바라던 사회와 정반대였던 것이죠.
자본가가 노동자를 끊임없이 착취하는 불평등한 구조였습니다.
*
1933년에 벽화가 공개되자 시의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리베라의 그림을 두고 디트로이트 정신을
조롱하는 공산당 선전벽화라고 비난하고 나섰습니다.그림의 힘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대공황이 빚은 사회갈등을 해소하려면 그림보다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몇몇 나라에선 전체주의 노선을 택했지만 미국은 뉴딜정책을 추진했고 여기에는 주택정책도 포함됐죠.
내집 장만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자,루즈벨트 행정부는 재산소유민주주의를 도입했습니다.
공산혁명을 마기에는 완벽한 방법이었죠.
*
미국 정부는 주택보유를 장려하고자 시장부양책을 내놓았습니다.주택담보대출 기관에서 돈을 빌렸는데
이후에 은행이 파산했다면 돈을 빌린 사람들의 예금만큼은 정부가 책임지고 보호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
새로 설립된 연방 주택청에서 장기간 낮은 이자로 자금을 융자해줬죠.모기지대출기간이 20년,혹은 30년
으로 늘어난 것도 1930년대 이후부터 입니다.또한 주택모기지 대출 시장을 미국 전역에 확대하고자 연방
주택 저당조합인 패니메이를 창설했죠.
*
부부가 모델하우스에 들어갑니다.남편은 집안을 대충 둘러보지만 아내는 편리한 집구조가 마음에 드는
것같군요.매월 갚아야 할 이자가 길자,많은 사람들이 집을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을 사고 싶은 것 같은데,그럴만한 돈이 없군요.
*
그런데 잠깐,매월 갚아야 할 융자금이 지금내는 월세보다 저렴하내요.뉴딜정책이 실시된 이래 의외의
많은 집들이 들어섰습니다.이를 발판으로 현대 미국경제가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1930년대부터 미국정부는 모기지 대출시장이 효과적으로 운용되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택구입자가 급증했고 최근엔 모기지 사태까지 왔죠.
*
여기서 잠깐만,그런데 주택구입 장려정책에서 소외된 집단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1941년 당시에 대출을 받아 디트로이트의 이런 집들을 지으려면 어느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융자여부가
결정되었습니다.부동산 개발회사에선 백인거주 지역 남쪽에 2미터 높이에 있는 장벽을 세웠습니다.
*
집을 지으려면 연방주택 지원 기준에 맞췄어야 했는데요.백인들이 많이 사는 장벽 넘어간 구역에만 대출이
허용됐던거죠.주민 대부분이 흑인구역에는 신용불량을 이유로 해서 대출을 승인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
주택정책으로 도시가 양분된 겁니다.겉으로는 신용등급을 내세웠지만,엄연한 인종 차별이죠.
어쩌면 연방정책에서 이런 차별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연방주택 융자 위원회에서 제작한
이 지도에는 흑인이 많은 남동쪽 지역과 이곳 바우더워 그레이그스는 빨간 바탕에 D등급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
이 처럼 신용등급으로 구역을 나누는 관행은 한동안 계속 되었습니다.D등급 구역 거주자가 대출을 받으
려면 백인구역 거주자에 비해서 상당히 높은 금리를 부담해야 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 이러한 관행은 프라임과 서브 프라임이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
60년대인 신용등급이 인권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흑인이 집을 살 길이 사실상 막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차별정책엔 대가가 따릅니다.
1967년 7월 23일 디트로이트 곳곳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인종차별에 분개한 흑인들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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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차별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 폭동은 5일 동안 계속되었고 시민 43명이 목숨을 잃었죠.
약탈당하거나 큰건물이 3천채에 달했습니다.이 사건으로 정책 결정자들은 흑인들에게 유리했던 주택보급
정책에 문제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
마침내 흑인들에게 주택을 보급해 사회를 안정시키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든
든한 집이 생기면 사회에 대한 불만도 잠잠해질꺼라고 생각했던 거죠.영국의 대처 수상은 이 교훈을
신속히 실천에 옮겼습니다.80년대 보수주의 세력은 세상 고유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을 핵심과제로 삼았
습니다.
*
고민 끝에 영국 국민들에게 공영주택을 특별할인가에 분양해 줌으로서 내집 장만의 길을 열어주었죠.
이는 한편으로 영국인이 담보대출을 그만큼 많이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죠.
영국에선 1980년대까진 정부지원으로 융자를 받아 집을 사는 방식이 유리했습니다.
*
60~70년대엔 금리가 비교적 낮았고 물가도 상승하는 추세에서 주택담보대출 원금에 실질적 상환부담을 덜
수 있었죠.하지만 정부입장에선 물가안정에도 신경을 쓰야만했습니다.결국은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는
없었죠.
*
영국과 미국은 주택담보 대출을 장려하고 나서 금리를 인상했으며 이런 주택정책의 결과로 80년대 후반
이들 두나라 부동산 시장은 유래없는 불황과 호황을 맞이했습니다.
서브 프라임 역시 80년대에 대두되었는데요.이후 미국 모기지 시장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고,끝모를
침체의 늪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
최근에 발생한 미국 부동산 시장에 침체가 전세계 금융위기로 확대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습
니다.그런데 이런 연쇄 금융위기가 처음은 아닙니다.1943년 미국 정부조사 기관에 비디오 테잎 한개가
배달되었습니다.텍사스주 델라스 외곽 고속도로 옆 넓은 땅을 주택단지로 단장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죠.
*
그런데 지금은 공터뿐이군요.조사단이 이 지역 부동산 사업을 조사한 결과 희대의 금융사기단이 저질은
사건의 내막이 드러났습니다.부동산 투자가 안전하다는 믿음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죠.
엄밀히 말하면 부동산이라기 보다는 가상 부동산이었던 것입니다.
*
잠시,저축대부조합 이야기로 돌아가보죠.저축대부조합은 뉴딜정책에 힘입어 성장했으며 1970년대엔 미국식
재산소유 민주주의에 기여하였죠.
하지만 저축대부조합은 두가지 문제에 봉착했습니다.인플레율 상승,높은 금리였죠.이때부터 저축대부조합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예금이자를 지불해야하는데 주택자금대출에서 회수되는 돈은 고정되어 결국 경영난에
직면했죠.
*
보다 못한 미국정부는 금융규제를 완화했습니다.1982년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감에 넘쳤습니다.
"모두에게 유익한 정책입니다"물론 일부 집단은 유익했죠.각종 규제로 수익이 부진했던 저축대부조합은
규제완화를 기회삼아 실적을 올리려고 다양한 대출상품을 개발했습니다.
*
금리를 인상해서 예금자로부터 자금을 모운 뒤,그 돈으로 대출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규제만은
풀리지 않았죠.예금자의 돈은 정부가 보호했습니다.어디서든 사기꾼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이 돈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댈러스 한 외곽에 있는 식당입니다.
*
순박한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20년전에는 어땟을까요.당시 댈러스엔 사기성이 짙은 대출기관이
많았습니다.그들과 한패가 된 부동산 업자들이 이 식당에 단골들이었죠.
쉬운 돈벌이 재미가 들린 사기꾼들은 이곳에서 사람들을 유인했습니다.80년대니까 가능한 일이었죠.
*
당시 텍사스 지역엔 미개발 지역이 많았습니다.엠파이어 저축대부조합은 부동산 개발업체 한 곳과 작당을
해서 허허벌판에서 큰 돈을 벌여 들였습니다.엠파이어 저축 대부조합은 사기집단이었습니다.
그 중심엔 스펜서 블레인 회장과 중학교를 나온 동업자 대니포크너는 남의 돈을 끌어다 쓰는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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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파이어 저축대부조합은 고금리 예금으로 예금자를 유치했습니다.그 돈으로 집을 지었죠.
이 곳 포크너 포인트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에 주택단지를 개발했습니다.포크너 크랙,포크너 크립,포크너
파운틴 등 상당히 많죠.포크너 오우크 등등 포크너의 특기는 땅값 부풀리기입니다.
*
헐 값에 땅을 싸들인 뒤에 개발이 된다면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했죠.또한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엠파이어
저축대부조합에서 대출을 받게 했습니다.포크너는 글을 읽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어지간히 급했나보죠.
투자자들은 현장도 답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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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이 전부였죠.1944년이 되자.일체의 부동산 난개발은 극에 달했습니다.
정부가 보장한 예금은 개발자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갔죠
엠파이어 저축대부조합의 자산도 급격히 늘었습니다.1200만 달러가 2년만에 2억5천 7백만 달러로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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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포크너와 엠파이어 저축대부조합이 주택을 과잉공급한대다 외곽 고속도로 주변
의 주택수요가 저조해서 투자가치가 없었죠.1983년 3월 정부조사관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공사는 중단이
됐고,집 수백채가 철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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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4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허허벌판이로군요.1971년 포크너와 블레인은 사기죄로 형이 확정되어
수감되었습니다.한 수사관은 이 사건을 일커러 미국 역사상 가장 무모한 부동산 사기극이라 했습니다.
이 사건에 이어서 저축대부조합 500곳이 줄줄이 파산했는데 조사결과 200여곳에서 내부자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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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대부조합이 초래한 파산규모는 무려 1530억 달러,미국경제를 뒤흔든 심각한 금융위기였죠.
정부는 규제완화가 원인이 된 책임을 수습에 나섰습니다.물론 그 비용은 국민이 낸 세금에서 충당했죠.
이를 계기로 재산소유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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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80년대 일어났던 저축대부조합의 연쇄파산은 20년 후에 닥칠 부동산 위기에 비하면 영향력이 작은
편이죠.저축대부조합 사태는 미국에 국한되었지만 최근에 발생한 서브 프라임 사태는 세계금융의 뿌리를
뒤흔들었습니다.
*
1940년대엔 흑인과 백인의 거주지역을 나누는 장벽이 세워졌습니다.이 시기에 흑인이 대출을 받기엔
사실상 불가능했죠.
하지만 60년후 이들에게도 대출의 문이 열립니다.국민 모두에게 내집장만의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2002년10월 부시대통령은 소수민족 550만 가구에 내집마련의 꿈을 이루어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
연방정부가 대출규제를 완화하자 모기지 회사들은 대출상품을 개발해서 고객확보에 나섰습니다.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서브 프라임 해당자도 대출을 받게 됐죠.소득도 직업도,없다구요,걱정마십시요.
NINJA대출을 받을 수 있읍니다.
*
하지만 새로 도입된 대출은 고정금리를 30년간 유지해주던 과거 시스템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사실 80년대부터 주택담보대출 방식이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대출기간이 짧아졌고,고객은 만기전에
이자만 내는 방식을 선호하게 됐는데,이는 금리부채에 취약한 금리구조를 양산했죠.
*
그렇다면 금리가 오를경우 서브 프라임 대출자가 파산할 가능성을 은행들이 고려하지 못한 걸까요?
물론 은행들도 위험에 대비했습니다.하지만 그 방법이 서브 프라임의 주요원인이 됐죠.
바로 증권화입니다.모기지 회사는 주택을 담보로 내준 서브프라임 대출을 은행에 되팝니다.
*
은행들은 사들인 증권화하죠.다양한 대출을 한대 묶은 다음,다시 여러종류로 나눈 다음,그 중 최상급은
트리플A등급 적격등급으로 인정을 합니다.이 증권을 해외 투자자에게 팔아서 수익을 남기죠.
투자자가 내는 돈은 앞으로 받을 이자에 비해서 아주 적습니다.
*
증권화가 왜 문제냐고요.모기지 대출이 이루어지는 곳과 해외 투자자가 사는 곳에 거리를 생각하면 답은
간단합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받은 모기지 대출을 노르웨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알 길이 없죠.
*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금리는 낮고 실업자가 될 염려도 없는데 거기다가 부동산시장까지 호황이었
다면 결과는 좋았을 것입니다.하지만 디트로이트의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런데도 서브 프라임 회사는 주택가치가 폭락하고 실업률과 금리가 폭등하는 디트로이트 지역에 2006년
한해 동안 무려 10억달러 이상을 투자했습니다
*
금융위기는 다른 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이 곳 멤피스 법원에서는 목요일 오후에 재판이 서너차례 열립
니다.주택 30채가 경매될 예정인되요.대출을 받은 사람들이 매월 이자조차 내지 못하자 모기지 회사가
집을 압류했기 때문입니다.
*
멤피스는 압류도시로 전락을 했죠.지난 5년도안에 평균 4가구 중 1가구가 압류경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2007년 여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시장이 붕괴하자 그 여파는 전세계 금융시장으로 퍼졌습니다.
헤지펀드가 무너졌고,유서깊은 투자은행이 파산했습니다.
*
생존하는 은행기관들도 수천억의 빚더미에 올랐죠.30년전 뉴딜정책으로 탄생한 페니메이를 기억하시죠.
페니메이와 자매회사격인 프레딕 메이는 미국 모기지 시장의 양대산맥으로 성장했는데요.
이들이 휘청거려 모기지 시장 전체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2008년 9월 이 두회사를 국유화하는데요.
*
월가를 주름잡던 베어스턴,리먼브라더스,메릴린치는 결국 사라지고 말았죠.이번 금융위기는 과거와 달리
전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노르웨이의 도시 라나,헴렛,카스피엘달,나르비크에선 시민들이 낸 세금을 서브
프라임 증권에 투자했습니다.
그 결과 투자원금에 85%를 잃었죠.손실규모가 무려 1억달러에 이릅니다.
*
영미권에선 부동산을 신뢰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경기만 잘타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어서 다른 투자상품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죠.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부동산만 믿었다간 손해를 보기쉽죠.
주식과 마찬가지로 가격이 한없이 오르다가 어느 시점에서 추락할 수 있습니다.
*
1989년부터 1995년사이 영국 집값은 평균 18% 하락했습니다.물론 일본에 비하면 낮은 수치죠.
아 전망이 좋군요.실내장식도 개성이 넘치고,맘에 듭니다.아 여긴 보일러실이군요.
이집을 구입한다면 가격이 어느 정도됩니까? 200만 달러쯤 됩니다.
*
아 그렇군요.영국 돈으로 100만 파운드 정도면 도쿄에서 괜찮은 집 한채를 구입할 수 있겠군요.
집값이 비싸다구요? 한 때는 이보다 몇배는 나갔습니다.1985년을 기점으로 5년을 기점으로 5년동안 일본의
부동산 가격이 3배나 껑충뛰자,은행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습니다.
*
하지만 실상은 거품에 가까웠죠.1990년 마침내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터졌습니다.
도쿄의 부동산 가격 하락률은 무려 75%,이전의 수익은 물거품이 됐죠.아,집값이 200만 달러라고 하셨는데,
부동산 거품이 터지기 직전엔 얼마였습니까? 지금가격에 3배요.그러니까 600만달러 정도쯤 됐죠.
*
맙소사,영미권의 부동산은 일본에 비할게 아니군요.결론적으로 말하면 부동산은 안전자산이 아닙니다.
집값은 얼마든지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는 거지요.부동산 비유동적인 자산입니다.
필요할 때 현금화하기 어렵다는 뜻이죠.바로 이점이 영미권에서 주장하는 재산소유 민주주의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개발도상국에서 재산소유 민주주의는 어땠을까요.
*
부동산을 포함해 모든 자산시장은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재산소유 민주주의에는 한계가 있죠.
그런데도 사업가나 자영업자는 부동산을 담보로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
그렇다면 가난한 나라도 재산소유 민주주의를 도입하면 잘 살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경제침체가 일상이
된 나라,아르헨티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이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곽의 빈민가로 도심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죠.그런데 이런 빈곤 속에 부가 있다고 주장한 학자가 있습니다.
*
페루 출신의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는 전세계 개발도상국의 빈민가엔 수조달러에 이르는 부가 잠재
되어 있지마는 그 가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이지역 빈민들은 직접 지은 집에 살고
있더라도 집에 대한 합법적인 소유권이 없다는 점이 문젭니다.
*
다시 말하면 소유권이 없으므로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는 없죠.대출을 받을 수도 없고,자본을 마련할
방법도 없고,창업을 포기할 수 밖에요.관료주의도 문젭니다
소유권 등기에 몇년씩 걸리기도 하고 또 무작정 기다려야 할 때도 많습니다.
에르난도 데 소토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려면 실현되지 못한 자본이 금융에 적극적으로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쪽에 있는 킬메스 지역 이곳의 빈민 거주지에서 데 소토의 이론을 검증해 보고자
합니다.극빈층이 모여 사는 판자촌이죠.하지만 조금 더 가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80년대 초부터 이곳 주민들은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몇년 후 이들은 집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
하기에 이르렀죠.결국 정부는 월세를 꾸준히 내는 가구에 한하여 채권을 주고 20년후에 소유권으로 전환
할 수 있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
울타리를 세우고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개까지 키우고 있군요.소유권이 보장되니, 부동산 관리를 잘
하겠죠.부동산의 가치를 보고 매매까지 내놓았군요.데 소토의 이론에 허점이 있었죠.
금융기관에서 주민들의 주택에 소유권을 인정한 경우는 극히 더물었습니다.4%만이 모기지 대출을 받았죠.
*
집을 담보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금융기관의 권한입니다.가장 확실한 담보는 소득이죠.
이 사실은 19세기 대 지주를 비롯해서 디트로이트의 주택 소유자들,이곳 칠레 주민들도 공감할겁니다.
개발 도상국에서 파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죠.
*
굳이 주택담보대출에 의지할 필요가 없읍니다.여성이라면 더욱 그런데요.부동산이 없어도 부를 창출하는
여성들을 만나 보겠습니다.볼리비아 인근에 있는 알소시에서 찻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베티는 무담보로 소액대출을 받았죠.같은 방식으로 대출을 받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
금융서비스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소액 금융을 잘 활용한 사례입니다.커피장사할려고 돈을
빌렸나요? 그렇다는 군요.장사를 할려고 대출을 받았다고 합니다.그럼 빌린 돈은 갚았읍니까?
장사해서 번 돈으로 갚았다는군요.아,예 그렇군요
개발도상국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소액 금융이 활발합니다.담보로 제공할 집이 있던 없던 남성보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신용평점이 높은게 현실이죠.여성이 돈을 헤프게 쓴다는 것은 편견일 뿐이다.
*
이 영성들은 재정상태가 좋아 보이질 않는군요.전재산이 몇푼 안될뿐이죠,하지만 담보없이 돈을 빌리죠.
볼리비아의 대출기관에서 여성들은 신용을 높게 평가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카르멘 벨라스코가 설립한 프로므헤르는 가난한 여성의 경제활동을 지원합니다.
*
담보없이 돈을 빌려주고,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할 염려도 없습니다.일단 기간내에 돈을 갚고 이자를 내기
위해서 저축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우리기관에서 여성들에게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대출
제도를 잘 몰라서 처음엔 힘들어 했지만 차츰 빌린 돈을 갚으며 뿌듯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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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프로 무헤르 사무실엔 활기가 넘칩니다.가난한 여성의 삶을 바꿔놓은 소액금융의 힘을 실감할 수가
있죠.제 뒤로 빌린 돈을 제때 상환하려고 여성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집이 안전자산이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여성의 신용이 안전자산인 그런 시대로군요.
물론 소액 금융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수는 없읍니다.대출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못하듯 부동산
투자만 맹신해서도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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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른다는 답이 많습니다.하지만 부동산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시절도 있었죠.
부동산으로 승부하려던 사람의 결과는 암담했습니다.2008년 전 세계에 부동산이 하락했습니다.
북미,남미,유럽등 세계전역에 예외는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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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보유자가 늘면은 자본주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수도 있지만 집을 담보로 계속해서 부동산을 사들
이는 비정상적인 형태가 자본시장을 왜곡하기도 합니다.창업을 하거나 목돈이 필요할 때는 부동산이
유용하죠.하지만 대출을 받아서 부동산투기에 매달리는 행위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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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킹엄셔어,볼리비아,이곳 스코틀랜드,세상 어디서든 경제의 핵심은 수입과 부채의 균형입니다.
다음편에서는 세계경제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한 두축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제6부 이머징마켓, 차이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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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이 계속 팽창하던 2006년 전세계 국민 총생산,그런데 같은 해 그 두배가 넘는 19조 달러의 시장이
있었습니다.주식,채권시장이죠.2006년 금융파생상품의 규모는 어땠을까요?
전세계 국민 총생산의 10배,무려 473조 달러였죠.2007년 하반기 부터 지구촌 금융네트워크가 한층 강화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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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송수단이나,통신망으로 연결된 차원을 넘어서 국제투자은행과 24시간 외환거래실이 금융 네트워크를 주도
하죠.지난 5회에 걸쳐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신용,주식, 보험,부동산 시장 발전과정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확산됐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요?
*
금융의 세계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세계화 시대,경제활동에 좋은 점이 많죠.
홍콩이 거대 무역항으로 성장한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하지만 세계화에 동반되는 취약성도 있습니다.
금융은 정교한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충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고,금융에서 통제할 수 없는 정치적인
변수가 있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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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금융이 마비될 뻔 했던 심각한 위기가 몇 차례나 있었죠.
10년 전만해도 아시아와 같은 이머징마켓이 금융대란에 휩싸일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신용경색으로 타격을 받은 쪽은 타국이었고 아시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죠.
*
세계경제의 판도가 바뀐데는 이유가 있습니다.중국에 대한 미국의 자금의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인데요.
이처럼 미국과 중국이 공생하는 관계를 일커르 차이메리카(니 알퍼거슨 교수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를 말함)라고합니다. 차이메리카가 세계 금융취약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
100여년전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금융의 세계화가 일어났지만 얼마 못가서 전쟁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날 그같은 상황이 재현 안된다는 보장은 없읍니다.한때 사람들은 이머징마켓을 위험부담이 큰 시장
으로 인식했습니다.해외투자로 큰 수익을 낼 수 있지만 현지 시장상황이 악화되면 큰 손실을 보게 되니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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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위기를 딛고 다시 떠오른다는 리이머징마켓이 주목받고 있습니다.요즘 가장 주목받고 있는
리이머징마켓은 바로 중국입니다.중국에 투자해서 거둬들인 돈이 엄청나다고 하죠.
실제로 20년간 중국경제는 홍콩을 모델삼아 눈부신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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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투자자들은 큰 수익을 노리고 세계 최대 인구인 중국시장에 꾸준히 진출했습니다.
일부 외국인 투자들이 막대한 손해를 봤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돈이 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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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되었다고 하지만 투자는 여전히 어렵습니다.다른 나라 기업의 정책까지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한편 외국에서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1914년 이전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섰습니다.자국정부에 파병을 요청하는 방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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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을 앞세운 정책 덕분에 영국의 투자자는 세계 어디서든 마음놓고 경제활동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었
읍니다.영국 해군은 총포를 동원해서 세계화 시대 첫 장을 열었습니다.
이시기에 주목할 인물로는 윌리엄 자딘(동인도 무역회사 소속 무역선의 선장으로 자딘메디슨사를 설립함.)과
제임스 메디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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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832년 중국남부 광조우에 무역회사를 설립해서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주된 수입원은 마약밀매였습니다.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아편을 수입해서 중국인들에게 판매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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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인들에게 아편이 금지되어 있었죠.한편 아편밀매를 근절하라는 황재의 명을 받은 린저신은
1831년 10월 광조우에는 영국상인들의 아편판매는 원천봉쇄했고 창고에서 아편 2만상자를 압수해서 바다에
버렸죠.값으로 따지면 무려 200만 파운드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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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손실을 입은 자딘은 영국에 돌아가서 파병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마침내 1840년 8월23일 이 곳
홍콩에 영국군함이 상륙하게 됩니다.중국은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그 기반이 크게 흔들렸죠.
한편 자딘의 예측대로 영국해군은 중국을 쉽게 무너
뜨렸습니다
*
중국 남서부 지역이 영국에 넘어갔고 그와 동시에 아편시장이 개방되었어 중독자가 급증했습니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중국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죠.이 때 자딘과 메디슨은 홍콩에 본사를 개설했고
무역으로 세계화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1900년경 자딘 메디슨사는 사업을 다각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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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면직공장,보험회사를 설립했고,주룽에서 광조우를 잇는 철도공사에 착수했죠.
1913년 당시 런던에는 해외차선을 보유한 거대 투자가가 있었는데 앞서 언급했던 로수차일드 가문입니다.
자,투자원장을 보실까요?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했던 해외증권은 20여가지나 되는데요.
먼저 발행채권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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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이집트,독일,헝가리,이탈리아,목록 하단에는 철도회사 증권이 11개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4곳,캐나다에 2곳,그리고 주룽,광조우 철도회사에도 투자했군요
이처럼 세계 경제의 주축이 무역이 금융으로 이동하면서 금융세계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최초로 진행되었던 세계화는 얼마 못가서 중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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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죠.한편 1914년 6월18일 오스트리아 제국 후계자 프란치 베르디난도
대공이 보스니아에서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습니다.사건발생직후 금융시장은 큰 변동을 보이지 않았죠.
하지만 이 사건은 세계 금융시장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몰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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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들은 유럽대륙에서 전면전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뒤 늦게나마 깨달았지만 당시 세계 경제의 유동성은
나빠지고 있었죠.금융위기가 전세계로 퍼지자 금융세계화도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일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런던타임즈 경제면에 실린 기사 내용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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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에서 황태자가 암살되고 황태자 죽은 7월22일까지 암살사건이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하지만 그로부터 열흘후인 8월1일자 기사를 한번 볼까요.
타임즈지는 증권시장이 폐장되었다고 보도합니다.폐장은 이듬해1915년 1월4일까지 계속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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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들은 경제가 마비될거란 것을 전쟁직전까지 왜 몰랐을까요? 당시 사람은 세계가 금융혁신과 경제
통합을 이루어 안정된 상태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죠.전쟁직전까지 세계경제는 적신호가 아닌 청신호를
보였습니다.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
한세대에 걸쳐 구축된 안정된 체제라해도 한 며칠만에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그리고 1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복구하는데는 수십년 이상이 소요됐죠.최초의 금융세계화는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그 후 세계금융은 침체상태의 일로였고,심지어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
1944년 승전을 앞둔 연합국은 새로운 금융질서를 세우기로 했습니다.무역은 자유화하되,금융의 이동은
엄격히 규제하기로 했습니다.국가간 자금이동은 반드시 국가로 통하도록 했습니다.
새로운 금융질서 확립과 함께 워싱턴 DC에 국제기구 두곳이 탄생했습니다.
IMF,다른 하나는 국제부흥개발은행이었죠
*
한편 1970년대부터 중동산유국들이 엄청난 돈들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이 돈을 서구은행이 유치해서
대출에 재투자하자 국제기구들은 규제를 완화했죠.비로서 금융세계화가 다시 열렸습니다.
은행들은 수익이 클 것으로 기대되는 지역에 오일달러를 빌려주었습니다.
수익이 큰 만큼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죠.
*
그후 7년동안 남미지역에선 차익금이 4배로 증가했습니다.무려 3150억달러를 빌렸죠.
1982년이 되자 멕시코 정부는 대외채무를 갚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얼마후 남미대륙 전체가 파산위기
에 내몰렸죠.예전 같았으면 정부가 무력을 동원해서 외국에 빌려 준돈을 받아낼 법도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났습니다.
*
이제 IMF와 세계은행이 이런 문제를 맡게 되었습니다.물론 이 두 기관이 무력을 행사 할 수는 없었죠.
대신에 대출을 해 줄테니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여 긴축제정을 운영하라고 남미국가들을 압박했습
니다.미국 경제학계는 이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물론 반대도 있었죠.
*
IMF와 세계은행이 설립취지에 벗어나는 정책을 추진한다면서 많은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이들 두 기관이 제3세계 경제생명을 쥐고 있으며, 독재자를 지원하고 미국제국주의 확산을 돕는다고
비판이 쏟아졌죠.이를 비판하면 탄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반세계화 운동이 거세지면서 음모론까지 나돌았죠.
*
에콰도르 대통령 하이메 롤로스와 파나마 대통령 오마아르 토리우스가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다가 암살
되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습니다.하지만 세계은행과 IMF가 제3세계 지도자를 암살했다는 주장에는
석연치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1970년대 에콰도르와 파나마가 미국에서 빌린 돈은 미국전체 대출금에서 0.14%에 불과했습니다.
*
미국 수출시장 전체를 봐도 에콰도르와 파나마가 차지하는 비율은 0.4%로 아주 미미했죠.
지도자를 암살해야 할 만큼 큰 시장은 아니었습니다.IMF가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금융세계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금융저격수라 불리는 금융모델이 등장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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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함정을 지닌 금융상품,바로 해치펀드입니다.해치펀드는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돈을 회수할
수있다는 점이 매우 위협적입니다.게다가 자금회수 기간도 매우 단축됐죠.
세계은행 대출기간은 몇년이지만 해치펀드는 몇주,심지어 며칠 후에 돈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헤치펀드계의 제왕 조지소로스를 만나 볼까요.소로스는 헝가리출신 유대인으로 런던에서 유학후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까지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불안전성과 인간의 불안전성으로 유명합니다.인간의 행동은 예기치 못한 행동을 낳기도 합니다.
다시말해 결과가 기대치에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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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는 일이란 대채로 불안전하기 마련이죠.소로스의 재귀성 이론(금융시장의 참여주체가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면서 행동하기때문에 시장의 변화와 상호작용,역동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론)에 따르면
금융시장은 완벽하게 효율적이거나 이성적일 수가 없습니다.
*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이란 비이성적인 수많은 투자자의 무지와 편견을 반영한 섯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소로스는 사람의 기분이 들뜻다가 가라앉는 것처럼 시장은 호황과 불황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소로스가 이끄는 퀀텀펀드는 공매도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죠.공매도란 가격 하락을 예상하고 주식을
고가로 매고한 후 가격이 떨어지면 재매수해 되갚는 방식입니다.
*
소로스는 하락장에서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그가 하락에 승부수를 걸자 영국금융이 위기국면에 내몰렸다는
지적이 있었죠.1992년 9월16일 영국중앙은행은 영국의 파운드화 매도전략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실 소로스같은 투자가와 영국정부가 맞붙는다면 투자가가 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액의 단위부터 달랐으니까요.
*
매일 수조달러를 거래하는 외환시장과 외환보유고가 얼마되지않는 영국재무부가 맞붙었으니까요.
결과는 아주 뻔했죠.당시 파운드화는 유럽환율제도를 통해 독일 마르크화에 연동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이 통일비용지출문제로 금리를 인상하자 영국도 금리를 인상해 대출금 이자비용이 가중되었습니다.
*
소로스는 영국의 유럽환율제도 탈퇴에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하리라는 것을 예측했죠
소로스 인생 최대의 도박이었습니다.파운드화 가치하락을 확신한 그는 퀀텀펀드 자본초액보다 큰 돈
100억달러를 투자했죠.위험부담이 컸든 만큼 수익도 컸습니다.
관점에 따라선 파운드화 공매도를 차익을 노린 거래로 볼 수도 있고 전략적인 투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
저도 파운드화의 가치하락을 예상했습니다.하지만 저에게는 투자할 만한 돈이 없었죠.
그런데 묘하게도 저가 베르디 오페라'운명의 힘'을 보러 간 날,파운드의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영국 재무부 장관 노먼 나몬트가 이 곳 재무성 정원에서 영국이 유럽환율제도에서 탈퇴하겠다고 발표한
후에 파운드화는 폭락했죠.
*
소로스는 파운드화의 연간 수익의 40%에 이르는 10억달러를 벌었습니다.아,궁금한게 한가지가 있는데요.
예상이 적중해서 큰 돈을 벌었는데 그 때 기분이 어땟습니까?
물론 내기를 해서 이긴거니 기분이 좋았죠.게다가 수익도 올려서 더할나위없었습니다.
*
소로스는 집단적 심리를 읽는 능력,즉 직감능력을 강조했지만,그 직감능력이 틀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직감대신에 수학을 이용하면 어떨까요? 높은 투자수익을 보장하는 공식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놀랍게도 현실과 다른세상을 가정해서 공식을 완성했죠.
*
국제교역량과 금융거래가 늘어나면서 경제의 취약성도 높아졌습니다.한 곳에서 발생한 위험이 다른 곳에
쏙쏙 전파되었죠.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복잡한 갈등,비이성적인 감정이 없는 세상을 가정해 봅시다.최신정보를 수집해 언제나 수익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으며 일상에 충격과 동요가 없으며,있다해도 이를 예측해 볼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시죠.
*
이처럼 매사가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세상이 존재한다면 주식폭락사태란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수백만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하겠죠.이런 가정하에 천재경제학자들이 예측이 가능한 가상세계를
만들었습니다.물론 현실엔 없는 곳이죠.
*
1993년 미국 코넷티컷주 한 그림이 제 사무실에서 수학 천재 두명이 만났습니다.미국스탠포드 대학교수인
마이런 숄츠는 옵션가격을 결정하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죠.
미국 하버드 대학교수인 로버튼 머턴은 퀀츠,즉 수리모델에 기초한 돈을 버는 프로그램의 원조입니다.
*
이 건물 사무실에서 그들은 금융혁명을 구상했죠.그들이 고안해놓은 아이디어는 옵션계약을 기반으로
합니다.시중가 100달러의 주식을 예로들어보면,지금부터 1년내에 주식값이 200달러로 상승한다면 이 주식을
미리 사두는게 이득이겠죠.
시세차익으로 100달러를 벌테니까요.그리고 예상이 빗나간다 해도 큰 손해는 없죠.
손해는 옵션을 매입한 가격에 한정됩니다.문제는 옵션의 가격이죠.
*
답은 정교한 공식에 있습니다.퀀츠프로그램으로 거래하는 투자자들은 이 공식을 블랙박스라고 부릅니다.
공식의 관건은 옵션의 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이죠.주식을 일정시점에 매입한다고 할 때,일정기간의 가격
변동을 감안해서 옵션가격을 산출하는 겁니다.
*
물론 가격을 직감만으로 결정하지 않고,정확히 계산해야죠.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고된 작업이었
습니다.노력끝에 머턴과 숄츠는 옵션가격을 산출하는 공식을 완성했습니다.
*
복잡한 공식이야기가 나오니까 잘 모르시겠다고요.투자자들이 그러면 좋아하겠군요 이들의 입장에선 사람
들이 옵션 가격설정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유리하니까요.머턴과 숄츠가 주축이 된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
(머턴과 숄츠가 설립한 미국의 금융회사로 막대한 수익을 내며 급성장했으나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상태
이후 파산,구제 금융으로 회생함)정확한 예측을 기반으로해서 창사후 2년동안 어마어마한 수익을 기록하며
급성장하게 됩니다.
*
저평가된 증권을 대량매수한 것도 수익률에 크게 기여했죠.직원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고급승용차도
불티나게 팔렸습니다.그런데 고수익을 유지하려면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거래를 많이 하려면 자기자본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요.
*
1997년 8월 롱털캐피털 자본금은 70억달러에 못미쳤지만,채무금액은 무려 1260억달러나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쯤되면 부채를 걱정하는게 당연하겠죠.하지만 쇼츠와 머턴은 아주 의연했습니다.
*
그들이 자부하는 완벽한 공식에 따르면 위험은 제로에 가까웠으니까요.실제로 롱텀 캐피탈은 100가지에
이르는 거래전략을 구사했습니다.그기다 7600가지가 넘는 금융 포지션을 취했죠.
이 중 한두개는 잘못될 수는 있죠.하지만 수많은 거래가 동시에 잘못될 위험은 없다고 믿었던 것이죠.
*
롱텀캐피탈은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거래를 했지만,실제로는 미국 유럽시장의 옵션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옵션은 주식가격의 변동에 따라 수익이 달라집니다.옵션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자,주식시장의 변동시장이
높아지리라는 불안심리가 감돌았죠.
하지만 롬텀캐피탈의 예측은 달랐습니다.주식시장 변동성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
이는 투자자들의 옵션행사가 줄어든다는 뜻입니다.그래서 옵션가를 낮추고 대량매도했죠.
위험한 시도라고요?롱텀캐피탈은 손실을 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전망을 했습니다.
거의 제로로 봤죠.롱텀캐피탈에겐 주식시장의 등락이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습니다.
*
수학이 롱텀캐피탈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듯 1997년 10월 머튼과 숄츠에게 노벨경제학상이 수여됐죠.
직감이 놀랍다고 해야 할까요? 금융수학이 위험을 최소화했으니까요.
블랙박스로 무장한 롱텀캐피탈은 조지소로스를 앞선 어마어마한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998년 여름 승승장구하던 헤지펀드 메니저들이 여가를 즐기는 동안에 노벨경제학상에 빛나는
블랙박스 시스템은 위협을 받게 됩니다.
*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진 것이죠.진화론에 소행성 충돌과같은 외계의충돌이 생물의 대량멸종과 같은 것을
초래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1998년8월17일 엄청난 충격이 금융계를 강타했습니다.정확히 어디였나고요.
*
미국의 정반대에 있는 이머징 마켓이 표적이 됐죠.정치불안,석유수출대금 감소,자유화 정책이 실패로
러시아 금융이 붕괴되었습니다.다급해진 러시아 정부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했고,그 결과 세계금융시장의
충격의 여파가 커졌습니다.주가는 급락했죠.
앞서 롱텀 캐피탈은 변동성이 낮아 옵션 행사가 저조하리라 예측했고,옵션을 낮은 가격에 대량 매도했
습니다.
*
그런데 변동성이 커지자 옵션행사가 늘어 손실이 발생했죠.롱텀캐피탈은 하루에 3500만 달러가 넘는 손실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하지만 1998년 8월21일, 단 하루만에 총자산의 15%인 5억5천만 달러를 잃었
습니다.롬텀캐피탈의 계산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
할말을 잃은 롱텀캐피탈 직원들은 주식거래판에 뜨는 어이없는 숫자를 응시하면서 눈을 의심했자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열흘만에 회사의 자산가차는 45%까지 추락했죠.
구제금융없이는 회생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재력으로 따지면 조지 소로스만한 사람이 없었죠.
*
하지만 금융공학을 굳게 믿은 롱텀캐피탈이 비이성 재귀성이론을 배운 조지 소로스에게 구제를 요청하기가
자존심이 좀 상했겠죠.롱텀 캐피탈과 상의할 당시의 분위기는 어땟읍니까?
조찬을 함께 했는데 롱텀 캐피탈 측은 긴장했지만 저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죠.
자금을 지원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구원의 손길은 없었습니다
일단 당시 상황이 너무 위험했고,저한테 충분한 자금이 없었습니다.
*
위기에 몰린 롱텀 캐피탈이 회생하려면 은행들이 전적으로 협력해야 했죠.이 사건으로 금융권 연쇄파산
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미국월가의 14개 은행을 동원해서 롱텀캐피탈에 긴급자금
수십억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
그렇다면 정확한 통계로 무장한 롱텀캐피털은 예측이 빗나간걸까요? 소로스는 건재한데 말이죠.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간과한 것이 문제였습니다.투자자들의 불안한 군중심리 또한 고려하지 않았죠.
문제는 더 있습니다.롱텀 캐피탈은 90년대 이후 5년 동안 주식시장 자료에 근거해 예측을 했죠.
그런데 1987년에 있었던 주식 대폭락사태를 자료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
1917년 러시아 혁명후 일어났던 금융위기도 자료에서 배제했죠.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수학엔 능했
지만 역사에는 무지했습니다.또한 이론 자체는 완벽했지마는 현실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롱텀캐피탈의 롱텀이란 말에 무색하게 단기간에 몰락했죠.
*
그렇다면 이와같은 금융위기가 재발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동안 해치펀드의 수도 늘었고 규모도 더
크졌으니 금융구제가 가능할지도 모르죠.어쨋든 막대한 자금을 축척한 나라를 찾아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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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금융시장은 영미권 국가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합니다.1997년 아시아지역 전체가 금융위기가
휩싸였지만 2000년 이후 금융시장은 7년연속 호조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세계적으로 주식,채권시장이 호황을 누렸고,상품거래도 파생상품을 비롯해 자산시장 전체가 호황
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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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까 사치품 수요가 크게 늘었고,고급 와인들이 잘 팔렸죠.그런데 이런 호황의 이면에 의문이
남습니다.이율이 상승하고 정치변동이나 무역 불균형이 심화 되었는데도 주가는 급등했죠.
이런 모순속에서 중국의 한도시는 급성장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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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양쯔 강변에 자리한 유서깊은 도시 충칭은 서양과 교류가 활발한 동부 교역 지구에서 2~3키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하지만 충칭의 경제성장 속도는 빠릅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세계 각국을 돌아 다녔지만, 이런 곳은 정말 처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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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공사가 진행중입니다.저쪽에서는 교량을 건설하고 있군요.30개가 넘는 교량을 세우고 있으며,저쪽
편에선 철도공사가 한창이죠.6개월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농지였습니다.
공사를 마치며는 수백만 제곱미터 새땅에 건물이 들어서게 될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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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충칭을 서부의 금융 중심지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하는데요.머지않아 이곳은 세계금융의 중심이
되겠군요.현재 중국엔 백만장자가 34만5천명이 넘어며 억만 장자도 100명이상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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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외세의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의 중국은 단기간에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며 이머징마켓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중국에 뚜렷한 금융위기가 없었던 이유는 투자자금을 해외에서
지급받지 않고,자국내 저축에서 조달했기 ] 때문입니다.해외자금을 동원해 투자를 하기도 했지만 공장
처럼 유동화가 어렵운 직접투자 형태가 아주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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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중국은 막대한 저축예금을 기반으로 금융세계의 흐름을 뒤바꾸었습니다.과거의 영미권에서 아시아에
차관을 제공했다면 이제는 중국이 부유한 나라 미국에 돈을 빌려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 미국의 경제적 긴 공생관계를 일커러 차이메리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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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의 증권 거래소 풍경이 무척 흥미롭군요.주민들은 이곳에서 점심도 먹고 탁구도 치고 저축한 돈으로
투자도 합니다.때로는 도박에 가까운 투자를 하죠.중국경제도 이곳 풍경과 유사합니다.
저축으로 목돈을 마련한 중국인들은 어떻게든 투자의
기회를 노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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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달리 임금이 많이 오른데다 이중 상당액을 저축합니다.저축을 잘하지 않는 미국인들과 대조적인
모습이죠.이 어마어마한 예금은 기존의 자금흐름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거대한 자본은 이제 중국에서 미국으로 물밀듯 흘러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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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미국은 극심한 무역적자를 기록했습니다.무려 8000억 달러를 세계각국에서 빌려야 했죠.
반면에 중국은 미국의 무역적자보다 많은 25%이상 무역흑자를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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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축한 자금 대분을 미국에 빌려줬죠.이제는 중국이 미국에게 살림미천을 대주는 상황이 되가고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요.미국인의 1인당 GDP는 4만4천달러입니다.
물론 중국에도 억만장자가 제법 많고,보시다시피 이곳 중심 역시 발전했지만 1인당 GDP는 고작 2000달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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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중국이 GDP가 22배나 많은 미국에 돈을 빌려주게 되었을까요?
그 배경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중국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제품을 대량 생상해 소비천국인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물론 가격이 낮을수록 상품이 잘 팔리겠죠.결국 위안화의 환율강세를 막고 외환시장에서 수십억달러를
사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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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이런 전략이 미국에 유익했죠.미국은 저렴한 중국산 제품을 주문해서 배로 잔뜩 실어 온후에
월마트를 비롯해, 대형할인점에서 판매했죠.대형 할인점은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에 아웃소싱(비용절감과
효율성 증대를 위해서 업무를 외부에 위탁하는 일)을 주고 큰 이윤을 얻었습니다.
2006년도 월마트는 90억 상당의 제품을 중국에서 외주생산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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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국도 중국에 판매한게 있습니다.수십억 달러의 채권을 팔아 자금을 확보했고 미국내 금리를 낮출
수 있었습니다.이른바 윈-윈,양측에 유익한 전략이었죠.
이것이 차이메리카입니다.세계 총생산의 33%에 이르는 규모이죠.또 지난 8년동안 세계 경제성장을 주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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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소비를,중국에선 저축을,완벽한 결합같죠.맞죠.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찮았습니다.
중국이 돈을 빌려줄수록 미국은 점점 차관에 의존했습니다.2000년 이후 신규 은용대출과 채권 및 파생
상품에 계약이 넘쳐 났는데 차이메리카의 영향이 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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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는 주택 모기지 시장에 엄청난 자금이 시중에 팔렸습니다.신용등급이 낮은 사람은 물론이고,소득이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에게 NINJA대출까지 등장했죠.2007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습니다.사태가 있기전 미시간주와 테네시주에서는 대출금을 갚지 못해 가압류되는 사람들을 조사
하며,그의 심각성을 짐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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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국의 금융시장에서 이머징마켓에 불과했던 서브 프라임 모기지가 전세계 금융위기로 확산되리
라고는 아무도 상상하기 힘들었죠.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몰고올 엄청난 파장을 예측한 이들은 많지
않았죠.
영국에서는 1866년이래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해서 노든녹 은행이 국유화 되었고,미국에서도 손꼽
히는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도 파산했습니다.
*또한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손실규모가 천문학자적인 규모에 이르렀습니다.
은행간 매출이 불가능해졌죠.미국 재무부는 7000억달러에 이르는 금융구제 법안을
내놓았습니다.2008년 6월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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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 그랬을까요? 하지만 이곳 홍콩에서는 침체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렇다면 차이메리카의 윈윈전략이 효력을 상실한 걸까요? 중국의 경제는 미국의 경제와 무관하게 지속적
으로 성장하고 있을까요?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중국의 대미수출에 차질을 빚은 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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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수가 급증했고 중국은 8%이상 경제가 성장을 했죠.한편 100년전 세계화가 시작되던 시절에도
차이메리카와 유사한 경제적 공생관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세계금융의 중심에 선 영국과 유럽의 산업경제를 대신하는 독일이 공생관계였는데 얼마 못가서
전쟁으로 끝이 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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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영국은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중국도 공생과 경쟁관계를 반복하다 대립할 수 있습니다.
국내 총생산을 놓고 볼 때 빠르면 2027년에 중국이 앞설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죠.
그럴 경우 미국의 공장문을 닫아야 한다며 자유무역을 비판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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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제가 침체될 경우,비판의 소리도 높아지겠죠.주가가 급락하는 광경을 지켜 볼 때면 1차세계대전
당시와 같이 금융위기가 재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대답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구도에 따라 달라지겠죠.무역마찰이나 대만이나 티벳등 마찰이나 분쟁의 소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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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선의의 경쟁이었다 하더라도 중국이 돌연 미국에 자금공급을 중단한다면 경제전쟁이나 큰 혼란이
일어나겠죠.차이메리카 체제의 본질은 혼란 그 자체에 인지도 모릅니다.
사자와 염소,뱀이 뒤섞인 신학적인 괴물,키메라처럼 말입니다.미국과 중국의 분쟁이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현 경제계를 이끄는 사람들이라면 인류역사를 통틀어 안정과 번영이 영원한 시대는 없었음을 명심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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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어느날 위기가 닦치면 어느날 위기가 수면위로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금융시장은 4000년에 걸친 경제적 결과입니다.하지만 지구촌 금융시장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호황과 불황,비이성적인 과열과 침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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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체제가 너무 복잡해서 위기에 취약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4000년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돈은 인류의 진보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금융의 혁신은 세계를 연결하고 통합했습니다.
금융이 없었다면 인류는 농경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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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융은 인간의 본성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입니다.금융공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죠.
인간은 위험을 과소 평가하는 행위가 강하고 기분이 들뜯다가 어느새 가라앉기도 하고 역사적 교훈을
쉽게 망각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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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성을 대표하는 사랑에도 기복이 심하듯,인간이 개척한 금융도 굴곡이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환생이 빚어낸 차이메리카 역시 굴곡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출 처 : Youtub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