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한국인 신부의 손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천주교성당
(2014. 9.
20)

풍수원성당(豊水院聖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69호
얼마전 프란체스카교황께서 우리나라에 다녀 가신 후 실망만 안겨주는 우리나라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보편적 인간애를 몸소 보여주신 교황의 행보에 매력을 느껴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물론 교황께서 돌아가시자마자 곧바로 헛발질 해대는 정, 염 두 추기경이 실망을
줬지만......
아뭏든 대형교회들의 세습과 부패, 사회부조리에 대한 외면, 정치권력과의 밀착
등으로
기존 신자들이 떨어져가고
있는 반면에 이와 반대로
천주교는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두 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계기도 서로 다른데 기독교는 1800년대
후반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힘을 업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됐지만 천주교는 자발적으로
뿌리를 내려서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우리 천주교의 자랑이라고 한다.
그 실체들은 솔뫼성지, 남양성지,
미리내성지, 베론성지, 매괴성지, 등 많은 성지들에서 볼 수
있고
명동대성당을 비롯해 전주 전동성당,
아산 공세리성당, 감곡 매괴성당, 원주 용소막성당,
새로 복원된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등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건축물로 남아 있다 .

저런 표정의 소유자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풍수원성당 본당으로 가는 길

1801년 신유박해 이후
1802년~1803년경 경기도 용인에서 신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40여명의 신자들이
팔일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이곳 풍수원이며
이후 80여년동안 신자들은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고종 3년) 교회 대박해(병인년)와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때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던
중
산간벽지이며 산림이 울창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에 알맞는 곳이라
신자들을 모아 터전을 삼았다.
일부는 화전으로, 일부는 토기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20년간을 지내다가 1888년 6월
20일
조선교구장 민대주교께서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불란서 르메르이신부가 부임하여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됐고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등 12개군을 관할하였으며
당시 신자 수는 약 2,000명이었고 초가집 20여간을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일부는 화전으로, 일부는 토기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20년간을 지내다가 1888년 6월
20일
조선교구장 민대주교께서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불란서 르메르이신부가 부임하여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됐고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등 12개군을 관할하였으며
당시 신자 수는 약 2,000명이었고 초가집 20여간을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정규하
신부
1896년 2대 주임으로
정규하(아우구스띠노)신부가 부임하여 중국인 기술자 진베드로와 함께
현재의 성당(벽돌 연와조 120평)을
1905년에 착공,1907년에 준공하여 1909년 낙성식을 가졌다.
신자들이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 나무를
해오는 등자재를 현지에서 조달했다.
풍수원 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한국 최초의 성당이며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자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풍수원성당 홈페이지 발췌 및
축약)

성당 입구 천장에 매달린 등을 보니
나도 모르게 경건해졌다.

풍수원성당의
내부
풍수원성당은 우리나라
초기 성당건축물답게 의자가 없는 마루로 되어
있다.




내가 중구 정동에 있을
때의 배재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교실 건물과
채플을 하던 정동교회 건물이 풍수원성당, 구사제관과 비슷하다.
아마 건축연대도 풍수원성당과
비슷하리라 여겨진다.

구
사제관
구, 사제관은 별돌조 건물로 본당
옆에 있는데 원형이 비교적 잘 유지되어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등록문화재163호로 지정되었다.

"십자가의
길" 시작점에 있는 예수상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매우 뜻깊고 중요한 길이자
순례코스로 제대로 한바퀴 도는데
네시간 가량 걸린다고 한다.
나는 비록 신자는 아니지만 산책삼이
걷는데 대개 15분~20분 정도 걸리며
천주교를 믿지 않아도 걷고 나면
정신이 맑아짐을 느낄 수 있다.

산책로

유물전시관
이 유물전시관에는 값바싼 골동품은
없으나 가까이는 불과 30~40년 전까지 시골에서 볼 수 있었던 물건들,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질박하고 고졸한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유물전시관에서
관람객이 주의해야 할 사항》
유물을 손으로 만지면 안된다.
물론 유물을 보호하려는 측면도 있겠지만
유물의 보존을 위해 강한 약품을 발랐는데 그 약품이 인체에 해롭기 때문이다.







디딜방아
우리나라에 몇 대 남지 않은
디딜방아로 발을 사용하지 않고 앉아서 손으로 작동하도록 제작됐슴을 봐서
아마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디딜방아로 추정한다고 한다.

해산줄
해산줄 역시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데 나 역시 영화에서나 봤지 실물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대대로 물려가며
사용했을터,산고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손잡이의 닳고 닳음에서 알 수
있었다.

곤장, 곤봉, 경찰봉,
족쇄
위의 유물들도 사극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실제로는 몇 남지 않은 소중한
유물이란다.

인걸개
주로 강원도의 소도 들어가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서 일할 때
주로 아내가 소처럼 끌고 남편이
쟁이질을 하던 도구란다.
그렇게 고단하게 살다간 그들의
지난했을 삶에 숙연해진다.

절구

좌 : 종이
독(곡물저장), 우 : 싸리나무 독(곡물저장)

약장

키
많이 사용한 건지 보관이 잘못된
건지는 몰라도 무지 낡았다.

머슴돌/들돌
머슴들에게 들게 하여 들어 올리는
정도에 따라 힘의 세기를 측정하여 품삯을 정했다고 한다.
그러면 일회성 힘에 대해서만 가늠하고 중요했을 지구력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일까?

돌우물

가마터

첫댓글 아름다운 사진과 정성담긴 글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풍수원 성당...멋져부려...저 바이크타고 여기 지나다가 인증샷 찍은거 있다능.ㅋ
석이님 요즘도 바이크 타시나?
유물전시관은 한번 가보고 싶네요^^
귀한 유물은 없어도 정감 있는 전시물들이 많으니 한 번 들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