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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1. 프롤로그
‘일경(日警)의 호랑이’ 노덕술
2002년 2월 28일,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은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전격 공개했다. 이것은 이후 2004년 오마이뉴스의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3,090명 발표로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논란을 촉발시켰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친일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특별법에 의해 만들어져 현재 활동 중에 있다. 그런데 국회 민족정기 의원 모임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등 그 어떤 단체가 발표하는 명단에도 빠지지 않는 이름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한 무리가 이른바 ‘일제 친일경찰’이다. 이들은 잔혹했던 일제의 충복으로서 동족을 앞장서서 탄압했다.
여기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 노덕술(盧德述). 반민법 제 3조(일본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에 의거, 애국지사 살상 혐의로 지목된 그의 일본명은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말단 순사로 경찰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해방 전 지금의 총경인 경시(警視)직에까지 오르는데... 그는 ‘일경(日警)의 호랑이’로 불리며, 일제 고문경찰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쳤다. 그에 대한 몸서리치는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자.
이원용(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 방송 후 2002년 작고) “애국지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몽땅 잡아들인다고 자기 부하들을 다 풀어가지고 참 좋지 않은 악행을 많이 했어요. 우리 한국..., 그 당시 조선으로 볼 때는 반역 행위고 매국노지요.”
김문환(통영 독립운동가 김재학의 조카) “노덕술이..., 이러면 통영에서 그때 당시로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악평입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가 물러난 해방 이후에도 노덕술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한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친위대로 말을 갈아타고 이른바 빨갱이를 잡는 반공경찰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 것이다.
강원룡(목사) “해방 이후에도 나쁜 짓을 얼마나 했다고, 정치 모략에는 항상 이 사람이 개입했어.”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그를 심판할 기회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53년 후인 2002년 MBC 현대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비로소 그를 역사의 법정에 불러 세운다. 그래서 당시 나는 프로그램의 제목을 ‘53년 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이라고 달았다. 한 해전인 2001년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 편에 이어 못 다한 얘기를 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편이 총론적인 접근을 했다면 ‘노덕술’편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친일 문제의 중요성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기대감도 있었다. 왜 그런 악질적인 인간형이 나왔는지, 그의 존재방식과 당시의 시대상황은 어땠는지 미상불 궁금한 점도 있었다. 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친일 문제와 관련하여 모두 3편을 연출하였는데 이 ‘노덕술’ 편(2002)은 ‘반민특위’ 편(2001)과 2년 뒤 ‘만주의 친일파’ 편(2004)을 잇는 연결판과 같은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2. 친일경찰 노덕술의 궤적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의 들머리는 노덕술의 궤적을 밟아가는 것으로 시작했다.
1948년 1월 서울 중부서. 2층 조사실에서 20대 청년 한명이 혹독한 문초를 받고 있었다. 이름은 임화, 본명 박성근. 그 며칠 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출근길에 괴한으로부터 저격을 받는 일이 벌어졌는데 임화는 그때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이었다.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이었던 노덕술은 자기가 속한 조직의 수장을 저격한 범인을 직접 문초하면서 물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지시하고 집행한다. 그런데 고문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황향주(전직 경찰, 해방 후 수도청 근무) “뭐 고문의 도는 말할 수 없었겠죠. 그래서 고문 받다가 피의자가 죽어버렸어요. 그걸 다른 데가 갖다가 묻든지 어떻게 처분했으면 그게 발견이 안 되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때 수사관들이 보고를 하니까 노덕술씨가 현장에 나와서 지휘를 했지요. “빨리 시체를 치워라.” 그런데 와서 보니까 겨울 한강변에 낚시꾼들이 구멍 뚫어 놓은 게 군데군데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거기 착안한 거야. “차 돌려라.” 그래서 인도교에서 차를 돌려 중지도로 내려가지고 거기 가서 보니까 얼음이 얼었는데 발로 가지고 이렇게 하니까 이제,, 얼음이 뚫리거든요. 그래가지고 시체 가져 와라고 해서 거기다 그냥 밀어 넣어버렸어요.”
당시 수도청에 근무했던 전직 경찰의 증언은 생생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게 한강 얼음 구멍에 사체를 유기한 이들은 가증스럽게도 마치 범인이 창문을 통해 도주한 것처럼 꾸미기까지 한다. - 여기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사건의 전형을 발견할 수도 있다(<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사>) - 그로부터 6개월 후, 날씨가 풀린 후 한강에 수장됐던 이 시체가 물 위로 떠오르면서 이 고문치사 사건 또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국민들은 이 경악할 만한 사건의 처리를 주목하게 되는데... 경무부가 노덕술을 전격 구속하자 수도청은 그를 조직적으로 빼돌린 후 그가 도주한 것처럼 발표한다. 세간에는 이번 일이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청장간의 알력으로 비치기도 했다. 여하간 이 사건은 노덕술의 술수와 냉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다.
노덕술은 1899년에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울산 보통학교 2년을 중퇴하고 13세에 일본인 잡화점에서 고용인으로 일했다. 이후 장생포 지서의 급사로 일하던 중 문득 뜻한 바가 있었는지 경남 순사 교습소를 들어간다. 필경 급사로 있느니 순사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라 추정된다. 1920년 교습소를 마치고 경남 경찰부 보안과에서 순사를 시작했다. 이것이 친일경찰 노덕술의 출발이다. 그는 말단 순사로 출발, 해방 당시에 경시직급까지 올랐던 조선인 경찰 8명 가운데 하나였다.(해방직전까지 조선인으로 경시가 된 자는 총 21명뿐이었다. 해방 당시 일제 경찰의 경시를 지낸 인물들은 최경진, 최연, 전봉덕, 이익흥, 윤우경, 노덕술, 손석도, 노주봉 등 8명이다. 노덕술은 일제시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경찰의 고위직에 승진한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안 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소학교 2년 중퇴 후 순사교습소 수료가 전부였던 그가 일제에 중용된 이유는 어디 있었을까. 알고 보면 비결은 간단하고 당연한 데에 있다. 작고한 이원용 반민특위 총무과장의 증언이다.
이원용(반민특위 총무과장) “그 당시에 조선 사람으로서 경시(警視)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겁니다. 지금의 경정, 총경 이 정도가 아니지요. 일본인 중에 힘 있는 사람도 올라가기 힘든 그 자리에 조선 사람을 배치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이뻐서가 아니라 수완 있는 사람 갖다가 앉혀 놓고 격려하고 ‘너를 그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은 한국 독립운동, 애국 지사라 칭하는 사람들 더 많이 잡아 들여라.’ 이거 아닙니까. 이게 낚시밥이에요. 미끼에요.”
해방 후 발간된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는 노덕술이 일제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28년 부산 동래경찰서 사법 주임이던 노덕술은 당시 부산 제 2상업고에서 비밀 독서회를 조직, 반일 잡지를 내던 애국학생 9명을 색출, 검거한다. 그리고 사법 주임이었던 노덕술은- 사법계는 일반수사업무를 맡은 부서 - 사건이 고등계 사무임에도 직접 담당하여 이 모임의 회장인 김규직 등 2명을 잔혹한 고문으로 끝내 사망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혁조회(革潮會) 사건’이다. 경찰사를 연구하는 동국대 김창수 교수도 이 사건에 등장하는 노덕술을 잘 알고 있었다. 김교수는 당시 노덕술이 아주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김창수(동국대 교수, 경찰사 연구) “젊은 학생들을 고문을 하는데 혀를 다 뺐다고,, 아주 악질적인 고문을 자행한 사람이 노덕술입니다.”
이 때 노덕술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던 김규직은 결국 이듬해 2월 스무 살 나이에 부산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느 덧 팔순을 넘긴 그의 누이동생은 그 때를 생생히 기억했다.
김차선(김규직의 누이동생) “그러니.. 동네 안이 난리법석이 났지요, 그랬는데 엄마는 지서로 가서 돌팔매질을 다하고... 오빠 묘가 있었는데, 나중에 엄마가 ‘자식도 없는데 저거 놔두면 뭐 하겠노.’하고 묘를 없앴어요. 그리고 나서도 너무 엄중하고 자꾸 조사도 나오고,,. 이러니까 엄마가 당초에 (자식) 없는 걸로 해라고 경찰들을 쫓아 보내고, 아버지는 화병으로 3년 만에 돌아가시고,,. 그러고 나니 집안이 수라장이 되더군요.”
친일경찰 노덕술은 이후 통영서로 소속을 옮기게 된다. 통영에서도 그가 한 일은 애국지사들을 색출, 고문하는 것이었다. 당시 경남 통영은 일찍 개항이 돼 일본인들의 왕래도 잦고 그만큼 일경의 활동도 삼엄했던 곳이다. 1932년, 통영서 사법주임이던 노덕술은 반일단체 ML당원인 김재학(金載學)을 검거한다. 김재학은 나중에 해방 후 제헌의원이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통영의 애국지사였다. 노덕술의 고문은 일본인 경찰보다 더 잔혹했다.
김문환(김재학의 조카) “하여간 통영에서 우국 청년을 잡아다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기엽, 노덕술.. 이런 사람들이 조선 형사로서, 조선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청년들을 몹시 괴롭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잡혀 들어가면 뭐 물고문, 전기고문 하고..., 뭐 반쯤 죽여버리지요.”
노덕술, 그는 애국지사들을 탄압한 대가로 승승장구한다. 1937년에 나온 ‘조선인총독부 직원록’을 보면 통영을 거쳐 양주경찰서에 있던 그가 이미 지금의 경감(警監)에 해당하는 경부(警部)의 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40년에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로 창씨개명까지 한 노덕술은 1941년에는 종로경찰서로 발령 났는데 드디어 경성으로 진출한 것이다. 이때 ‘관등 5, 공훈 훈 8’로 직급이 올랐다. 노덕술은 종로서, 김영호, 이구범은 서대문서에 있었는데 이 3명이 조선인 경찰 중 악질 3총사로 불려졌다고 한다. 일제 때 경찰로 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의 피체자(被逮資)였던 하판락(河判洛)조차 노덕술의 그런 ‘활약상’을 생생히 기억하고 증언했다.
하판락(전 일제 경찰 간부) “노덕술씨가 재주가 있어 가지고요, 일본 노래 같은 거 그런 걸 잘합니다. 술 좌석 같은데서 잘 어울립니다. 그 사람이... 더더구나 일본 사람들한테 참 인기가 있었지요.”
2002년 2월 국회 민족 정기 모임에서 708인의 명단을 발표했을 때 유일한 생존자였던 하판락은 노덕술과 같은 시기인 1949년 1월에 부산에서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던 인물이다. 나는 2001년 반민특위 제작 때에 당시 오마이뉴스 편집장이던 친일문제 연구가 정운현(현 친일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총장)의 도움으로 그를 어렵사리 찾아내 만났었고, 노덕술에 관한 증언을 듣기 위해 이듬해 다시 그를 찾아갔다. 첫 번 취재 때는 몰래카메라를 사용했었는데 두 번째에는 아예 카메라를 내놓고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하던 그도 노덕술 얘기를 해 달라니까 부담이 없었던 것일까.
하판락 “(노덕술씨가 반민특위에 체포됐다는 이야기는 그 당시에 들으셨어요?) 한 곳(같은 형무소)에 있었는데 뭐. 며칠 같이 있었지. (어디서요?) 서대문에 있다가 마포 형무소에... 서대문 있을 때 나갔지 아마. 그 양반이 사법계(司法係)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다소 고문이 있었고 무리한 짓도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법계는 사건도 많이 터지지요. 범죄자 데리고 가면 그것(고문)의 명수들 아닙니까..그러니까 우리 고등계(高等係)하고 사법계하고 전혀 딴판입니다.”
내가 만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리즈 친일파 연작 중 제1편 ‘반민특위’ 승자와 패자‘편의 들머리에서 부산의 독립투사 이광우(李光雨)옹을 고문한 일제 경찰로 등장하였던 이가 하판락이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 같은 사람이나 친일파지 자기처럼 먹고 살려고 또는 억눌려서 하는 수 없이 심부름이나 한 사람은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그 와중에도 고문 같은 짓은 자기가 아니라 사법계소속인 노덕술의 것이라고 변명하기도 했다. 무릇 친일파들이 능수능란하게 대응을 잘하는 그런 단면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덕술은 이후 1943년에는 평남 보안과장에 부임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막바지로 치닫던 그 시절. 제1경부 총감부 관방장을 겸임하면서 그는 경의선 열차를 무대로 다시 한번 일제의 충복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선봉에 나선 것이다.
김우전(광복군 출신, 인터뷰 이후 15대 광복회장 역임) “이전에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대개 서울서 신의주를 거쳐서 중국으로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평양에서 정주,, 정주에서 신의주, 이 구간에는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니까 여기서 그걸 이제 색출하고 그런 것을 하는 거지요, 노덕술이가 그 때도 악명이 높았어요.”
3. 해방 이후의 노덕술
조국이 가장 암울했던 시절, 동족의 피를 제물로 입신양명을 꾀한 고문경찰 노덕술. 그는 당연히 해방을 맞은 조국에서 가장 먼저 심판을 받아야할 사람 중 하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이들 친일파들은 일순간 숨을 죽였다. 그리고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민중들의 보복도 잇따랐다. 그들이 쏜 분노의 화살은 일본인보다 같은 동족으로 자신들을 괴롭힌 조선인 경찰 등을 향했다.
그것도 잠시, 일제가 물러난 이 땅에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되고 만다. 맥아더는 포고령을 통해 일제하 관리들의 현직 복귀를 천명, 친일파들의 숨통을 열어주는데.... 국민들 사이엔 친일파 청산에 대한 열망이 높았지만 새로운 점령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그들에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에겐 국내 보수기득권 세력과의 연대가 절실했다.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효율적 행정을 위해 일제하의 관리, 경찰들을 여과없이 등용한다
이기형(시인, 당시 동신일보 기자) “미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적에 우리나라가 36년 동안 독립투쟁했다는 거 거의 몰랐어요. 전혀 모르고 왔어요. 미개 민족이 힘이 센 일본한테 당해서 꼼짝 못하고 굴복하고 살았다. 이렇게 알았거든요. 실제로.”
또 하나, 친일경찰 등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해방공간에서 횡행했던 좌우익의 테러와 혼란이었다. 38선 이남에 친미 반공국가를 세우려던 미군정에겐 무엇보다 치안을 유지하고 좌익을 척결해줄 숙련된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미군정은 친일경찰 등용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를 몰랐을까. 이때를 증언해줄 인물로 미군정 고문을 지낸 장석윤 옹이 있었다. 1904년 출생인 그는 6.25 때 내무부 장관을 지내는 등 이승만 정권 당시 고위직에 있었다. 한 해전인 2001년 ‘반민특위’편 때에는 취재에 응했으나 2002년에는 노령으로 거동이 불편하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전해에 촬영했던 테이프가 남아 있어 관련 내용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장석윤(미군정 고문, 전 내무부 장관) “새로 구한 사람이 있었고, 일제시대 때부터 경찰이나 여기서 일한 사람들도 썼어요. 사람이 없으니까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경찰서를 맡겨야 될 거 야냐. 왜 친일, 일본인 밑에서 일하던 사람을 다시 쓰느냐 비난이 있었지만 그러나 정부, 나라를 운영하자면 그 사람들 없으면 안 되지. 노덕술이 같은 사람 말이에요. 그 중한 경험이 많고, 고등경찰한 사람인데.. 그러나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사람 볼 때 친일해 가지고서 한국에 뭐를 하고,,..그런 말들이 있지만 할 수 없이 썼었죠. 문제는 그런 사람들은 기술을 가지고 있고 공산당을 잡는다든지 강도 절도를 잡는다든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언제 새로운 사람을 훈련시켜 그 사람들의 기술을 배워요?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나라를 위해서 그 사람들을 썼었지, 개인이 친일파라고 뭐...”
거기다 새로운 주군(主君)을 찾던 친일경찰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이승만이었다. 오랜 미국생활로 국내에 정치 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보호막이 필요했던 그들의 구애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강원룡(목사) “이승만 박사가 돌아와서 정치를 하자고 보니까 이미 국내에 민족주의자 이런 사람들은 주욱 다 김 구 선생 밑에 가 있고, 그 다음에 약간 좌익적인 이 사람들은 여운형씨 밑에 다 들어가 있고, 그러니까 자기 기반이 없거든, 그래서 한국민주당하고 손잡았는데, 한민당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소위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그냥 다 끌어들여다가 정치 기반, 정치 세력으로 만든 거지, 그거 뭐,, 분명한 사실인데...”
일제가 패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미군정하의 경찰은 이들 친일경찰들로 채워졌다. 치안의 두 축인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이들은 수사 기술자가 필요하다며 노덕술을 비롯한 일경 출신들을 대거 중용한다. ‘직업적 친일이 아닌 생계를 위한 친일은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 경무부장 조병옥의 주장이었다. 이때 조병옥에 맞서 친일 경찰의 등용을 반대했던 이는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이었다.
최필립(최능진의 아들) “당시에 새로운 나라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경찰, 깨끗한 경찰, 일제시대에 흠이 없는 경찰로 새로 출발해야 하지 않느냐. 인재가 모자라면 새로 인재를 뽑자.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니고 양심이 필요 있고, 민족 정기가 필요한 거 아니냐.’ 하는 것이 항상 강조하시던 이야기죠.”
독립운동가 출신의 최능진은 ‘국립경찰이 친일경찰의 피난처가 되었다’며 조병옥과 맞선다. 그러자 46년 12월 조병옥은 그에게 사퇴를 종용하고, 최능진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강원룡(목사) “시간이 흘러가면서 최능진하고 조병옥이하고 맞질 않았어요. 맞지 않은 근본 이유는 조병옥이는 완전히 정치경찰로 갔거든... 최능진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그 둘 사이가 나빴다는 것은 세간에 완전히 돌았던 이야기죠.”
신연길(전직 경찰) “경무부도 그렇고, 수도청도 그렇고,, 전부 당시에 간부들은 친일경찰 일색이에요.”
실제로 46년 11월 미군정하 경찰 간부의 비율을 보면, 관구장의 63%, 총경의 83% 등, 경사 이상의 간부의 80%가 일제 경찰 출신이다. 일제 패망 후 1년 남짓만에 그들이 고스란히 부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 경찰이 설 자리는 추호도 없었다. 당시 일제 경찰 출신들을 미군정과 경찰 수뇌부에 천거한 이는 ‘친일경찰의 대부’로 불렸던 최연(崔燕)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발간된 <수도경찰발달사>를 보면 장택상 수도청장 휘하의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자리를 모두 일제 경찰 출신들이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노덕술도 등용된다. 명분은 좌익을 척결할 수사진의 강화였다. 당시 경찰은 그의 등용을 놓고 ‘화룡점정의 격’이라며 그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 수사진 강화와 노덕술씨 등용
장택상 부장(당시는 부장)은 제일 긴요한 수사진을 강화할 목적으로 적임자를 물색 선택 중 형사과장으로 수사계에 중진이요 민완가인 노덕술씨를 임용하였다. 씨는 20여 년간 경찰계에 봉직하여 사법(司法) 일관으로 범죄수사 사무에 전 생애를 바친 만큼 자타공히 그 민활한 수완을 경탄하는 동시에 수사계에 한 이채(異彩)를 띠우게 되었다. 씨는 해방전 평남도 보안과장으로 재임시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즉후 평양경찰서장으로 근무중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자 소련군에 체포되어 2개월에 긍(亘)하여 혹독한 신문재판을 받은 후 결백한 조선경찰관이란 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한다. 씨는 재생한 기분과 건국치안에 공헌할 각오로 새로이 당시 창궐하여 가던 테러 사건에 대비할 계획으로 소신을 말하되 “목적 여하를 불문하고 테러를 감행하여 같은 동족끼리 피흘린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는 상사의 지휘와 명령을 받아 남은 목숨을 내걸고 이러한 행동은 제지하겠노라”고 언명하였다. 맹장(猛將) 장부장의 노씨 등용은 화룡점정의 격이며 경찰 차장이던 최연 경시와 더불어 건국도상에 있어 조선 경찰의 일대 위관(偉觀)의 진용(陣容)이라 할 수 있다....”<수도경찰 발달사>
이후 형사과는 수사과로 이름을 바꾸니 일제 고문경찰 노덕술은 수도청의 수사과장으로 옷을 바꿔 입은 것이었다. 그는 1946년 4월 6일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를 검거해 수사 베테랑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한현우 외 4명을 일망타진하여 과학적 수사의 개가를 올려 조선경찰의 수사사(搜査史)를 장식하였다. 그 후 그 수훈은 해방 후 첫 번의 경찰관의 범죄검거에 대한 표창식이 경성지방심리원검찰청에서 거행되었을 시 노수과장 이하 수사과원에게 수여되었던 것이다...” 이상 <수도경찰 발달사>) 이후 그는 반공경찰로 맹위를 떨치며 출세가도를 달렸고, 46년 전평 주도의 철도파업을 진두 진압한다. 이때 장택상이 한 말은 그의 중용 배경을 짐작케 한다. 당시 수도청에서 근무하던 경찰이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이야기라니 더욱 실감이 난다,
강찬기(전직 경찰, 수도청 근무) “노덕술씨가 현장 지휘를 하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때 수도청장으로 있던 창랑 장택상씨가 말 타고 오더니 들어오자마자 노덕술씨 보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뭐 하는 거냐, 당신.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 식으로 해라 그 식으로. 아 일제 시대에 한국 사람들 잡아다가 취조하던 게 며칠이나 되었는데 그걸 못하고,, 그 식으로 해라. 빨갱이 공산당을 그 식으로 좀 다뤄서, 밝혀내라. 하고..손가락으로 지시하더라구.”
1947년 트루먼 대통령 특사로 왔던 웨드마이어의 보고서는 당시 민심을 잘 말해준다. (“한국 국립경찰의 활동은 한국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들에 장애가 되고 있다. 한국경찰의 활동은 극우주의자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들에게 비난을 받는 주요인이다. 극우주의자들과 그들의 젊은 사조직은 경찰과 유착돼 있다. 비난은 일본경찰 출신이 거의 80%에 달하는 한국경찰이 행사하는 영향과 통제의 노정에 주로 집중되었다. 한국인들의 분노는 그들의 해방이 일본의 압제라는 증오스런 상징으로부터, 폭력과 고문이라는 일본식 방법으로부터, 강압적으로 빈번하게 자행되는 무고한 한국인에 대한 야만적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촉발되고 있다. 이 분노는 종종 미군정으로 전이되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권위가 겪는다. 현재와 같은 한국 경찰의 폭력성과 맹목성이 개혁없이 지속되는 한, 이 정부가 남한에서 한국인에 의해 전적으로 자유롭게 표현되는 의지의 대표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웨드마이어 보고서, 194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친일 경찰의 등용은 무엇때문이었을까.
이항녕(일제 때 군수, 이후 홍익대 총장 등 역임) “그러니까 명목이 반공이지, 실질적으로는 그 사람들 살려준 거지, 살려준 거라. 살려주는데 명목은 이 사람들 있어야 공산당을 잡는다. 그러니깐 반공의 명목으로 그 사람들이 살아남은 거지.”
4. 반민특위와 노덕술, 친일파는 살아 있다
1948년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결성되면서 노덕술 등 친일경찰들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반민법은 독립운동자 가족을 살상(殺傷)한 일제 경찰에게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을, 독립운동을 방해하거나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들에 대해서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등 형벌을 중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임화 고문치사사건 이후 노덕술은 잠적했다. 알고 보니 후원자가 마련해준 거처에서 총애하는 기생과 도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9년초 그는 마침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다. 반민특위 조사관이 특경대와 함께 은신중인 노덕술을 전격 검거한 것이다. 반민특위 특경대 부대장으로 직접 체포에 나섰던 이병창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노덕술을 검거한 곳은 장충동의 한 주택가. 1949년 1월 25일 아침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병창씨는 취재진을 손수 현장까지 데려고 가 당시 정황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다른 자료에 따르면 노덕술은 관훈동 29번지(현재 인사동 경인화랑 근처) 당시 동화백화점 사장인 이두철의 집에서 기생 김해옥과 있다가 검거되었다고도 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에서는 이병창 선생의 육성 증언을 채택하였다.
이병창(반민특위 특경대 부대장) “그날 아침 8시쯤 되어서 체포했지. 배후 세력이 뒤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잡으니까 그네들이 전부 나와서 우리를 막으려고 그랬거든,, 그래서 ‘반민특위에서 나왔다!’고 하니까 물러섰어.”
당시 반민특위 추적 이전에 이미 고문치사 사건 주모자로 수배중이던 노덕술은 어처구니없게도 현직 경찰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고 권총까지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병창 “집 근처 공터에 짚차가 하나 서 있더라구. (어느 서 소속인지는 아세요?) 수도청... (수도청 소속 현직 형사들이 짚차 안에 있었다구요?) 응. 그리고 우리가 먼저 거기 권총을 압수했어요. 그 권총을 내가 뺏어가지고 있었고, 다음에는 붙들어서 수갑은 안 채우고 그대로 밧줄을 묶어서 왔어요.”
노덕술의 검거. 그것은 반민특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승만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노덕술이 체포된 이틀 뒤인 1월 26일 이승만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불러서 그의 석방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2월 2일 등 두 차례에 걸쳐 친일경찰 기술자들을 옹호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가 하면 심지어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체포한 조사관과 지휘자를 도리어 체포하라는 지시까지 내린다. (“법무부장관은 노덕술을 반민특조사관 2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내 금고에 2일간 수감하였다는 보고가 유하고, 대통령각하께서는 이 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1949년 2월 12일 국무회의 기록)
그런데 노덕술이 검거된 그 무렵 그가 주도한 또 다른 경악할 만한 사건이 터져나온다. 반민특위의 친일파 수사 등 압박으로 위기에 몰리자 친일 세력과 친일경찰들이 주동이 돼 우익 테러리스트 백민태(본명 정상오)를 시켜 특별검찰관 노일환과 김웅진 특별재판관 김장렬 등 반민특위 간부를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암살음모 사건). 이 사건은 암살을 청부맡은 백민태가 자수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사건을 접수한 검찰은 수도청 수사과장 최난수와 부과장 홍택희, 그리고 노덕술과 중부서장 박경림 등을 공동모의자로 기소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노덕술의 죄명은 ‘살인예비, 폭발물 취급 규칙 위반’이다. 그러나 사건기록에 따르면 노덕술은 전쟁기간중인 1952년에 공소기각된 것으로 되어 있다(서울지방법원 형사사건 번호 833호 498번). 하기는 이 때에는 반민특위가 이미 와해되었고 공산군과 격돌하는 전쟁 기간중에 노덕술을 징죄해야 할 이유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대표적인 고문경찰로 해방 이후 각종 정치 공작을 주도했던 노덕술의 반민법정 공판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재판장에 서순영, 검찰관은 서성달. 그러나 공판정에 선 그는 노련한 수사관답게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유감스럽게 노덕술의 재판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노회한 그가 반민 재판관의 추상같은 추궁에 어떻게 대거리했을지 참으로 궁금한데 기록의 산일(散逸)이 아쉽기만 하다.
이후 기세가 오른 반민특위의 수사는 활기를 띤다. 노덕술에 이어 사찰과장 최운하까지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경찰은 특경대 해체를 요구하며 집단사표로 맞선다.
황향주(전직 경찰, 해방 후 수도청 근무) “반민특위가 일제 경찰들, 간부들을 전부 잡아들이니까. 그래서 나온 게 지금으로 말하면 파업이에요. 쉽게 말하자면,, 그걸 유도한 거죠. (누가 사표를 쓰라고 하던가요?) 그러니까 그때 내가 경무계에 들어가니까 전부 회의실에서 전부 용지를 내주고,,, 공식 양식 같은 게 있어요. 무슨 사유로 인해서 사직한다는 내용은 잘 모르겠는데...표준 문장 같은 게 있었어요.”
마침내 49년 6월 6일 새벽. 친일 경찰 출신의 시경국장 김태선과 종로경찰서장 윤기병은 내무 차관 장경근과 이승만의 승인을 얻어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습격한다. 바로 6.6 사태다.
황향주 “긴급명령이라 해 가지고 들어왔는데, ‘반민특위 깃발을 달고 다니는 차는 무조건 정차시켜라, 안서면 실탄 사격해서라도 정차시켜 전부 잡아들이라.’하고.. 일제히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이걸 받았는데 어리벙벙해요. 그때 반민특위라고 하면 대단했습니다. 반민특위 깃발만 달면,, 그때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자지러질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고... 뭐 그랬지요. 그랬는데 별안간 일주일 만에 그게 뒤집어져버린 거야. 쿠데타가 난 것처럼..”
선우진(당시 백범 비서관) “지금 롯데호텔 건너쪽에 반민특위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쪽에 경찰이 새까맣게 모여 있더라구요.”
이원용(반민특위 총무과장) “6월 6일 그날 아침에 멋도 모르고 출근하면서 보니까 앞에 입초를 섰던 경찰관이 보이지를 않아요. 안으로 들어가니까 시커먼 옷 입은 경찰관들이 말이야. 한 이삼십 명 쭉 몰려오더니 손들어! 그러더라구요.”
이병창(반민특위 특경대장) “어떤 특경대원은 밥먹다 말고 붙들려서 바로 고문에 들어갔어요, 수돗물을 틀어놓고 앉혀서 거꾸로 묶어가지고 이렇게 돌려서 수돗물로 물고문을 하기도 했죠. 어떤 대원은 피똥을...”
심 윤(반민특위 조사관) “반민특위를 습격한 경찰들이 검찰총장이 가지고 있는 권총까지 무장해제 시켰으니깐. 말 다한 거죠. 완전히 그냥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어진 거죠.”
헌법기관인 반민특위가 경찰조직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이 사건은 이승만이라는 배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찰의 전격적인 작전은 반민특위를 단시간에 무력화시켰다. 이는 일제하 조선인 경찰관들이 승부수를 날려 단번에 전세를 뒤집은 것을 말한다. 친일경찰의 준동으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기회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6월 6일 그날로 최운하는 석방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포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노덕술도 6월 23일 만성기관지염을 이유로 병보석 출감하게 되고 곧 공소기각으로 처리된다. 이후 그는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헌병 소령으로 변신한다. 반민법 공포 이후 3백43일, 총 취급건수는 682건, 408건의 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나 실형을 받은 숫자는 7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들 역시 재심청구로 감형되거나 형집행정지 등으로 풀려나 친일파 숙청작업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반민특위는 그렇게 끝났다(정운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 증언 반민특위> 참조>).
5. 어떤 대조(對照), 노덕술과 전봉덕
노덕술이 출감한 지 3일째인 49년 6월 26일. 이번에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던 백범이 안두희의 총에 운명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백범 암살 사건은 알려진 바와 같이 안두희의 단독 범행으로 수사가 종결됐다. 그런데 지난 1992년, 안두희가 43년 만에 입을 열면서 또 한번 세상은 경악한다. 과연 희대의 역사미스테리인 이 사건의 배후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 그런데 여기에도 노덕술이 등장한다.
안두희(92년 생존시 뉴스데스크 자료화면) “장택상씨, 최운하, 노덕술이.. 또 그 다음에 누가.. 최운하.. 최운하, 장택상, 노덕술, 김창룡... 좌우간 이 정보원들은요, 말로 안하고 눈으로 말합니다. 피차 다.. 그 거이 진수인데.. 눈으로 몇 번 말해 보게 되면, 이 사람들 나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거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총격 현장에서 체포된 안두희는 헌병대로 인계돼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당시 헌병사령관으로 백범 암살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이가 전봉덕이다. 앞서 말하였듯 그 또한 일제 때 고등문관 시험 양과에 합격, 경시까지 올랐던 최고의 엘리트 친일경찰이었다.
강신옥(변호사, 1992년 국회 김구 암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그날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을 사령관으로 올리고, 장 흥씨를 헌병 사령관에서 직위 해제시켰다고. 그거 자체가 의심스러운 거 아냐? 왜 지금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2인자라고 볼 수 있는 훌륭한 분이 암살당했는데,
그 사람을 조사해야할 헌병사령부 직제 사령관으로 있는, 중국에서 독립운동한 장흥 사령관을 해임시키고, 친일파, 어떻게 전봉덕씨 같은 사람을 사령관에 임명했는가. 하니까 전봉덕씨가 역시 암살에 관계되어 있지 않는가 라는 의심을 하게 되어 있어요. 직위 자체가.. 그 당시 분위기를 봐서.”
한필동(1992년 뉴스데스크 자료화면) “전봉덕이가.. 그 공작 책임자죠.. 책임자죠.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요. 그래 가지고 그때는 극비로 했어요. 딴 과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몰라요.”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으로 알려졌던 전봉덕은 1992년에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김구 암살의 배후설이 나오자 급히 미국으로 재출국한 적이 있다.
강신옥 “그래 가지고.. 내가 전봉덕씨를 만나러 LA 출장을 일부러 간 겁니다. 그래서 상당한 이야기를 들을까 싶어서 갔는데 자기는 ‘형무소 소장 비슷한 위치에서 헌병 사령관으로서 그 사람의 신병을 우리 사령부에 인계해놨다가 보호하다가 조사받는 데까지 자기는 관리해 준 것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에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왜 특별한 대접을 했느냐 했더니 ‘자기는 그런 적 없다.’는 겁니다.”
법조계의 명망가로 변신했던 전봉덕의 인명사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 40년대 일제하에서 경찰을 지낸 행적만 빠져 있다. 1981년 한국 법사학회에서는 70세를 맞이한 전봉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법사학연구> 6호를 고희기념논문집으로 발간했지만 여기도 해방 후의 경력만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을 뿐, 일제 시기 친일경찰 경력은 빼놓았다. 그런다고 하늘을 가릴 수 있으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그의 기록을 얼마든지 재구성할 수 있다.
그가 유명한 것은 경성제대 학력에 고등문관 시험 양과 합격의 ‘신화’ 덕분이다. 전봉덕은 일제하에 치러지는 고문(高文) 시험을 그것도 하나도 아닌 사법과, 행정과 양과를 합격하는 등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고위직에 오른 엘리트형 친일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등관 수습기간을 거치자마자 바로 평안북도 보안과장으로 임명되는 등 파격적인 승진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이어서 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을 맡아 보안업무 이외에 화물 자동차 등 운송수단을 통제, 감독하면서 일제의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지원하다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 때에는 경무부 공안과장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육군사관학교 제1기 고급장교반에 입학에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3월에 헌병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국회 프락치 사건 때에는 특별수사본부 본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는 위에 나온 것처럼 백범 피격 이후 헌병사령관으로 등용된 것이다. 1950년 예편 이후에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거쳐 60년대에는 변호사로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이런 점에서 노덕술과 전봉덕은 여러 의미로 대조된다. 한 쪽은 보통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현장에서 몸으로 때워 일제에 충성했다면 다른 쪽은 영리한 두뇌형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세간에 악명은 노덕술 쪽이 더 높다. 그것은 아마도 노덕술이 실제로 일제이 폭압적 지배를 실현하는 최일선에서 직접적인 악행을 했고 그 피해자가 뚜렷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봉덕 쪽은 아마도 그 뛰어난 머리로 친일을 했을 것인데 이런 경우는 일의 성격상 직접적인 피해자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전봉덕은 헌병대 예편 이후 친일경찰 경력을 세탁하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경력을 쌓아 아마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에 폭넓게 인맥을 형성해 놓은 덕을 보았을 것이다. 고문기술과 공작의 악행적 역량만을 가졌던 노덕술과는 차원이 다른 셈이다. 그러나 친일의 해악성 면에서는 어느 쪽이 더 심한지는 짚어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전봉덕의 삶과 멘탈리티를 추적하는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6. 친일, 반공, 독재의 주구(走狗) 그리고 몰락
1952년, 이승만과 그의 친위대였던 친일세력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정권연장을 위한 가공할 사건들을 획책한다. 당시 국회는 임시 수도인 부산에 있었다. 그런데 재선을 앞둔 이승만은 국회 내에서 장면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자 당시 대통령 선출방식인 간접 선거로는 재선에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선우종원(변호사, 장면 총리 비서관 역임) “이런 대통령 어떻게 모시고 사냐. 또 뭐 이렇게 되니까 과거에 이 양반이 민주주의 어쩌고 하지만 사실 독재했다. 이런 이야기가 자꾸 퍼져 나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국회 내에서는 장 박사를 지지한다는 세력이 자꾸 늘어가는 거에요.”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특무대장 김창룡, 헌병대장 원용덕 등을 앞세워 부산의 기지창고가 간첩들에게 습격당하는 게릴라 침투 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빌미로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국제구락부에서 있었던 야당의 반정부 집회를 관제(官製) 테러로 덮친 후 야당 인사들을 줄줄이 연행했다. 국회의원들이 탄 출근버스를 통째로 헌병사령부로 끌고 가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선우종원 “내가 출근한다고 내려가 보니까 난리가 났어요. 보니까 장 박사를 가장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국회 내에 한 50명 있는데. 그 사람들이 탄 그 버스야, 바로. 내가 봤어요. 그 안에 누가 탔냐 보니까 전부 그런 사람들이야.”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해 조작된 이 사건은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등 일헌(日憲) 출신과 일경(日警) 출신들이 벌인 정치공작의 종합판을 보는 듯했다. 이승만은 이렇게 국회의원들을 협박,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어 52년 8월 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한쪽에서 전쟁을 치르며 고귀한 젊은이들의 선혈이 강물처럼 흐르는 와중에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피어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영국 기자의 유명한 말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부산정치파동의 불똥은 당시 장면총리의 비서실장인 선우종원에까지 미치게 된다. 세상이 다 아는 천하의 반공검사 선우종원을 장면 총리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빨갱이로 모는 국제공산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다. 선우종원은 음모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그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4.19가 나고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1960년 9월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귀국 직후 선우종원을 찾아온 이는 뜻밖에 노덕술이었다고 한다. 이 때 노덕술의 나이는 61세. 초라한 행색에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난 그는 보자기를 풀어 주섬주섬 서류뭉치를 꺼내놓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국제공산당 관련 문건이었다. 선우종원으로 하여금 8년간의 일본 망명 생활을 하게 한 문제의 정치공작 사건이다. 그런데 여기서 노덕술은 보통사람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각을 보인다.
선우종원 “그 사건을 조작할 때는 노덕술이 필경 일역을 했을 겁니다. 안 했겠어요? 부산 거기에서, 그만한 책임있는 자리에 있었고, 부산에서 일어난 일인데... 또 헌병대 내부에서 이루어진 일인데 안 했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건 제쳐 놓고 나한테 ‘홍택희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잡아 없애는 것이 선우선생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요..’ 이러는 겁니다. 근데 그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왔겠어요?”
노덕술은 바로 이 홍택희 카드로 선우종원의 신임을 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국은 바야흐로 4.19 직후. 어린 학생과 시민들이 피흘린 희생 덕택으로 정권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노덕술은 장면의 비서실장을 했던 선우종원이 민주당 정권의 새로운 실세가 될 것임을 예측하고 선수를 친 것이다. 선우종원이 일본에 망명을 가 있던 때 그는 서울 방첩대장으로 있다가 1955년 독직(瀆職) 사건으로 구속, 헌병 중령을 마지막으로 군복을 벗었다. 세상이 바뀐 뒤 그는 시쳇말로 끈이 떨어진 신세였고 새로운 배경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면 선거에 나가 떨어진 직후의 시점이기도 하다. 선우종원은 그 때 노덕술이 자기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말하자면 공작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 말려들면 안 된다. 그는 노덕술의 기대와는 달리 의연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노덕술은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선우종원 “내가 ‘이렇게 돌아온 것만 해도 천우신조인데, 누굴 죽이고 어쩌고 한단 말이냐.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니까 그렇지 말고 홍택희씨 만나면 우리 손잡고 같이 일하자고 해라. 나는 그럴 생각 조금도 없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니까 노덕술이 땀을 쫙 흘려요. 그 자리에서... 나도 깜짝 놀랬어요. 사람이 땀을 저렇게 흘려.. 그러니까 뜻밖의 내 답변을 들은 모양이야. 깜짝 놀라가지고 그랬는지...”
일제의 고문경찰로, 독재 정권의 친위대로 언제나 권력을 좇았던 노덕술. 정말 눈치 하나는 비상하다.
위에 나온 1955년의 독직 사건에 관해 좀더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죄명은 ‘장물 운반, 정치관여죄’로 군법회의에서 ‘파면, 전급료 몰수,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재판기록은 육군고등검찰기록실 소재). 김창룡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일세를 풍미하며 권세를 부리던 이의 말로 치고는 허망하다.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전직 경찰 변창선씨의 증언에 따르면 1962년경에는 서울경찰청 유치장에서 사식(私食) 넣어주는 일을 했다는 말이 있다.
궤적이 끊어지면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53넌 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편은 후반 마무리로 가면서 그의 고향으로 향했다. 노덕술의 고향은 울산시 장생포. 그가 태어난 생가에는 친척뻘되는 이가 살고 있었다. 정작 그들은 노덕술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듯하였다.
000 부인 “우리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라더라.. 삼촌요.. 수사를 너무 잘해 가지고 자꾸 계급이 올라갔다고 해. 저 사람이 어떻다 하면.. 얼굴만 보면 딱 알아내고.. 그만큼 수사를 잘 하더란다.”
이 댁의 부인은 친정아버지가 시댁이 좋은 집안이라고 혼사를 서두르는 바람에 졸지에 시집을 오게 됐다고 한다.
000 부인 “얼굴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나온다고.. 우리 큰집이 장생포에 살았는데.. 국회의원 나온다고 장생포에 왔었는데 보니까 돌아앉아 이렇게 있는데 키도 좀 자그마해 보이고... 이마가 여기가 민대 같이 난 뒷모습밖에 나는 못 봤어요.”
노덕술의 생가는 근동에서는 큰 인물이 난 터로 알려졌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고향인 울산에서 국회의원 출마까지 했다는 사실이었다. 울산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을 확인해본 결과, 그는 4.19 직후에 있었던 60년 7.29 선거에 울산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총 1,744표를 얻어 8명 후보중 6등으로 낙마했다(당선자는 당시 무소속 정해영 후보). 그는 반공투사 경력을 내세웠으나 일제 전력 때문인지 고향 마을에서조차 많은 표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병유(장생포 양로원에서 만난 노인) “일찍 총각 때 대처로 나가 가지고 자기네들.. 삼촌도 많고. 오촌.. 집안이 많았는데.. 전혀 장생포에 발걸음도 안 하고 그랬으니.. 해방되고 결국 6.25나고. 그래 가지고 출마를 한번 해 볼라고 왔다가. 결국 후보로 나와서.. 투표 결과가 안 좋으니까 인사도 없이 그냥 가고..”
시기로 보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마지막으로 선우종원 변호사를 통해 어떻게 해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향한 야심을 끝내 접지 않았던 노덕술은 결국 1968년 4월 1일 서울대 병원에서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거주했던 궁정동 집은 지금의 청와대 무궁화동산 자리다. 지번을 확인해 보니 공교롭게도 바로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 독재 권력을 누렸던 박정희가 시해된 10.26 사태의 궁정동 안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7. 중국은 친일파 청산을 어떻게 했는가
2001년 ‘반민특위- 승자와 패자’ 때에 나는 민족반역자 처리의 범본과 같은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리 사례를 취재하기 위하여 프랑스 현지 출장을 다녀온 바 있었다. 아마 한국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이 주제로 현지취재를 해서 방송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프랑스의 경우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독 항전을 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엄연한 승전국이었다. 그리고 드골을 필두로 한 항독 세력이 전후(戰後)의 프랑스를 주도했다. 다시 말해 4년 동안 나치하에서 적들에게 협력한 소위 collaborateur(부역자, 나치협력자)를 처단할 수 있는 현실적인 중심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친일파 청산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프랑스의 그것이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범본으로 꼽고 있는 프랑스의 숙청은 어떠했는가. 나치 패전 직후 곳곳에서 우선 레지스탕스가 주도한 숙청이 무수히 자행되었다. 전쟁의 열기가 사그러들지 않은 그 시점에 재판없이 즉결처분한 숫자만 만 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치에 협력한 여성은 머리를 삭발당하고 모욕을 받는 등 사적인 감정에 의한 보복도 많았다. 그러다가 드골에 의해 전담재판소와 비국민제도라는 법적 절차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미 그는 망명정부 시절인 1943년에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고 공언한 터였다. ‘정의의 법정’으로 명명된 드골의 기본구도는 임시정부 법무장관 망통 교수가 기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르면 파리의 최고재판소는 각료나 고위공직자를, 지방의 숙청재판소는 게쉬타포 앞잡이나 고문경관, 민병대원 등을, 시민법정은 비교적 가벼운 나치협력자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최고재판소는 비시내각의 세 요인을 법정에 세웠다. 민병대의 창설자로 히틀러에게 충성한 프랑스인 1호로 꼽히는 조세프 다르낭, 그리고 친나치 파시스트 총리 피에르 라발과 비시정권의 파리주재 대사를 했던 페르낭 드 브리농 등에게 모두 사형이 언도되고 그대로 집행되었다. 언론계에도 대숙청이 이루어졌다. 친나치신문에 히틀러를 찬양하는 기사를 쓰며 징용을 찬성하고 ‘레지스탕스는 테러범이니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브리지야크, 점령기 친비시정권 일간지 ‘오늘(Aujourd'hui)’의 정치부장 조르쥬 쉬아레스 등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들이 사형됐고 나치에 협력한 신문들은 폐간됐다. 언론인이 수난을 당한 것은 반역행위의 증거 수집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전에 친나치 입장을 보인 경우보다 독일 점령 후 나치의 선전원으로 전락한 부류들에게 가혹한 처리가 가해졌다.
통계를 보면 나치에 협력한 공직자 12만 여명에게 공민권 박탈 등의 행정처분이 내려졌고, 유기징역 이상은 4만 여명이 넘는다. 최고재판소를 통해 사형집행된 것만 767건(1951년 프랑스 정부의 의회 공식보고)이다. - 이 수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인민재판이나 즉결처분에 의한 것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1948년 미테랑 재향군인담당관(전대통령)은 의회보고에서 9만 7천여명설을 주장한 바 있다. 드골은 회고록에서 즉결처분을 포함해 1만8백42명이라고 밝혔고, 70년대 중반에 프랑스현대사연구소 2차대전전사편찬위원회는 정부의 기밀자료들을 검토해 9천9백1명이라는 수치를 제시했다. 사학자 로베르 아롱은 3만-4만 설을 주장했고 미국의 연구가 로트만은 신중하게 볼 때 1만 5천명 이상을 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주섭일, <프랑스의 대숙청> 참조) - 어떤 수치가 맞든 35년 식민지배에 단 한 명의 친일파 숙청도 이루지 못한 우리와 현저히 대비된다. 그렇다면 오늘의 프랑스인은 나치협력자 숙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미셀 토라발(의사,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미군 소속으로 대독 항전, 재향군인회 정보병과 회장) “만일 나치협력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면 프랑스는 아주 나쁘게 변했을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나치협력자들은 대간첩부대원들을 통해 정밀 수색되었습니다. 또한 프랑스는 독일군들을 최후까지 싸워서 쫓아내었으므로 나치협력자들이 전후 프랑스에서 정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부역자처벌에 관한 비난이 거세어지고 부역자들에게 호의적인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이미 낙인찍힌 부역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신부이며 하원의원이었던 데스랑쥐는 팜플렛을 발간하였는데 이것은 '새로운 테러'(부역자 처벌과 숙청을 의미함)의 희생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데스랑쥐는 숙청에 대해 원칙의 부족, 불형평등을 이유로 비난하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희생된 프랑스의 엘리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박원순)
프랑스가 단행한 나치협력자에 대한 ‘청산’과 ‘처단’은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부럽기도 한 대목이다. 그런데 2001년 당시 내가 프랑스 현지에서 받은 인상 중의 하나는 일부 프랑스인은 당시의 숙청이 너무 감정적이고 과했다면서 매우 진지하게 자성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전담재판소 설치 이전에 이루어진 즉결처분에 대해서 그러했다. 그에 대한 나의 심정은 뭐랄까... 프랑스니까 당시에 그렇게 숙청을 할 수 있었고, 프랑스니까 이제 반세기 이상 세월이 지나게 되니 그런 반성도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은 어떠했는가. 프랑스 다음으로는 한국처럼 좌우대립과 내전을 치른 나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순서다. 친일파 처리의 타산지석을 삼기 위하여 나는 2002년에는 중국 현지취재를 실행했다.
일제가 중국땅을 공략하면서 중국에서도 일본에 협력하는 무리들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만주국의 푸이(溥儀)다. 그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로 있다가 신해혁명과 함께 폐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1932년 동북지역에 괴뢰국가 만주국을 만들면서 그를 데려다 집정관이니 황제니 하며 얼굴마담을 시켰다. 일본 관동군은 그를 앞세우고 만주국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그의 본의야 어쨌든 푸이는 결과적으로 상당한 친일행위를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난징 괴뢰정부의 주석 왕징웨이(汪精衛, 일명 汪兆銘)였다. 원래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나 이후 변절했다. 그는 1940년 추종자들을 이끌고 일제에 협력하는 괴뢰정부인 난징의 국민정부를 세운다. 일제는 그를 도쿄에 초청해 대대적으로 환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만주국과 난징 정부는 일제가 중국을 분할 통치하면서 내세운 대표적인 친일 세력들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 두 개의 괴뢰정부를 온상으로 수많은 친일파들이 양산됐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들을 친일파라고하지 않고 ‘한간(漢奸 한족의 간신, 배반자)’이라고 칭하였는데, 이 한간은 단순한 친일이 아니라 일제에 적극 협력한 배신자, 즉 민족반역자와 매국노들을 가리킨다(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사용하는 ‘친일파’란 용어는 사안의 본질을 드러내기에는 적확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린쯔보(인민일보 논설위원) “일본에 투항한 관료들을 통계를 내 보니 40여 만 명이나 된다. 군대는 300여 만 명이나 된다. 만주국 경찰까지 포함하면 400여 만 명이다. 이 사람들이 적에 투항한 후 사실상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중국인민, 중국동포를 해치는 일을 했다. 예를 들어, 일본군과 협조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 치안유지라는 것은 중국인을 진압하는 것이다 - 중국인과 중국군대를 소탕하고 참살한다. 일본국이 중국을 침략하는데 이들 한간의 협조가 없었다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 한간의 협조가 없었다면 일본이 중국을 그렇게 오랜 기간 침탈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나자 중국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선택을 한다. 물론 그들에게도 국공내전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1945년 일제 패퇴 후부터 4년간 극심한 내전을 치렀다. 그러나 민족반역자, 한간을 처단하는 일만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민당 정부의 한간 처리는 그들의 점령지에서 법과 사법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 국민당 정부는 1946년 11월에 ‘처리한간안건조례’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1) 난징정부 조직의 간임직(簡任職 2등급 문관) 이상 공무원 또는 천임직(薦任職 3등 문관) 기관의 우두머리 2) 특임직(特任職 1등 문관) 공무원 3) 위 두 조항 이외 문무직 공무원 중 적의 세력을 믿고 인민에게 피해를 가져다 준 자 중 고소 고발을 가쳐서 4) 군사, 정치, 특무 기관 공작자 5) 전문대 이상 학교의 교장 및 중요책임자 6) 금융기관의 중요책임자 등 그리고 7) 난징정부 관할 범위 내에서의 신문사, 통신사, 잡지사, 출판사의 사장, 편집, 주필 8) 영화, 방송, 문화단체를 주도한 자 9) 신민회, 협화회, 참의회 등 친일단체에 참여한 자 10) 난징정부 관할의 문화, 금융, 실업, 자유, 자치 및 사회단체 인원으로 적의 세력을 믿고 인민에게 피해를 가져다 준 자 중 고소 고발을 거쳐서 ... 등을 검거한다...로 되어 있다. 단 한간이지만 항전(여기서의 항전은 공산당과의 전쟁을 의미)을 위해 협조하고 인민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는 자는 감형 처리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들 민족을 배반한 한간들에게는 재산 몰수에서 최고 사형까지 중형이 선고되었다(마스이 아스이치 저, 정운현 역, <중국대만친일파 재판사> 참조).
쓰위엔화(상하이 푸단대 교수) “해방전쟁시기에(국공내전을 말함) 한간 숙청은 두 곳에서 진행되었다. 공산당 해방구에서 엄정한 한간 심판이 있었으며, 국민당 지역에서는 주로 왕징웨이 괴뢰정부 때의 한간에 대한 심판을 진행했다. 국민당의 사법기관이 한간들에 대해 재판을 하였고, 일부는 군사법정에서 재판하였다.”
난징 괴뢰정부의 수장 왕징웨이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에 사망, 역설적으로 한간재판을 피했다. 하지만 져우포하이(周佛海) 등 주요 인사들은 구속되어 줄줄이 재판정으로 끌려나왔다. 져우포하이는 행정원 부원장을 지낸 난징정부의 거물이었다(그는 중국의 문호 루쉰의 동생이기도 했다). 그의 재판이 있던 날 수도 고등법원 앞은 민족 반역자에 대한 심판을 지켜보려는 인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4천여 장의 방청권이 바닥났다고 하니 당시 이 재판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한간재판은 일제 패퇴 이후 3년 동안이나 계속되는데 국민당 점령지에서의 처리건수만 4만 5천 건, 형이 확정된 수가 만 5천 건에 달했고 사형 집행도 3백5십 건이 넘었다. 일제에 협력하고 권세를 누렸던 인물들은 국가와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되었다. 흔히 한국의 경우 해방과 동시에 좌우대립을 하느라 친일의 기회를 잃었다는 식의 설명을 하곤 한다. 그러나 국공내전시기에 국민당 정부가 자신의 지배지역에서 집행했던 일련의 한간 처단 과정을 보면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간에게 피해를 입은 유족들을 취재하고자 했는데 다행히 베이징에서 위(郁)할머니 자매를 만날 수 있었다. 위펑(郁風), 위샤오민(郁曉民) 자매는 한간들에게 아버지가 암살되었다고 한다. 위 자매의 아버지 위화쓴은 강소성 고등법원 재판장이었는데 난징 괴뢰정부로부터 갖가지 회유와 협박을 받던 터였다. 1940년대에 상하이의 명문여학교에 재학중이던 이들 자매는 어느 날 학교에서 비보를 전해 듣는다.
위샤오민(郁曉民) “그날 학교에서 집으로 도착하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땅에 흐르는 피였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잘못된 줄을 알았다. 2층에 올라가서 무슨 일이냐고 어머니께 물었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 말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한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연속 다섯 발의 총알을 맞았다. 땅에는 유혈이 낭자했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항일지사들에 대한 암살과 감시의 목적으로 왕징웨이 정부가 운영하는 ‘특무공작대 76호’ 즉 비밀사찰 조직이 암약하고 있었다. 범인은 바로 이 특공대의 두목인 ‘암살왕’으로 불렸던 띵무어춘(丁默邨)이었다.
위샤오민(郁曉民) “아버지를 살해한 자의 이름은 띵무어춘. 그는 특무공작대의 두목이다. 그가 두 사람을 밀파하여 이 일을 지령했다. 하나는 샤오중밍이고 저격수다. 그는 일본 유학파이며 부친 암살을 계획하였다. 구체적으로 집행한 사람은 리쓰보우다. 한 사람은 총을 쏘고, 한 사람은 망을 보았다. 나중에 한간 재판에서 샤오중밍은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잔당들은 각각 형을 살았다. 개인적으로도 그들은 용서가 안 된다. 나는 절대로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위 펑(郁風) “용서할 수 없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우리 세대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매국노는 ‘말로가 나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고 상식이다. 누구나 지켜야 할 기본 도리이다. 한간은 끝이 좋지 않다. 않아야 한다.”
이번에는 공산당 지역을 알아보자. 만주국이 위치했던 동북 지방에서는 이 지역을 점령한 공산당에 의해 대대적인 한간 처단이 이루어졌다. 만주는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이 활동하던 무대로 중국공산당의 항일 투쟁의 근거지가 됐던 곳이었다. 공산당은 이미 1940년부터 ‘목전시정강령(目前施政綱領)’을 통해 한간들을 다스렸다. ‘쌍십강령’으로 유명한 이 강령을 보면 “한간을 엄중하게 진압한다.(...) 중죄를 지은 한간의 토지재산에 대해서 각급 정부는 지방민중의 요구가 있으면 법에 비추어서 몰수 할 수 있다...”는 등의 조항이 눈에 띈다. 국공내전 시기에는 국민당의 ‘처리한간안건조례’에 덧붙여 더 엄정한 기준을 만들어 집행했다. 이들의 한간처리는 국민당에 비해 엄격했고, 일관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도 공산당이 국민당보다는 훨씬 한간들에 대해 엄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은 한간을 ‘인민의 적’으로 삼았고 한간재판의 목적은 봉건주의 세력의 제거와 혁명의 기반굳히기 공작 차원이었다고 한다. 재판 과정도 국민당 정부와 달리 ‘인민의 낮은 지식 수준을 감안하여’ 인민재판의 방식을 택했다.
져우아이민(周愛民, 헤이룽장성 동북문화사연구회 회장)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대역죄를 저지른 이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민심은 동요된다. 그들은 일본 통치시기에 권세와 부를 누렸던 자들이다. 항일전쟁이 끝난 뒤엔 마땅히 그들이 영화를 누리지 못하게 해야 하며, 인민과 국가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1949년 5월 마침내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패주하고 그해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공산당은 ‘전범, 한간, 관료 자본가와 반혁명 분자의 재산몰수에 관한 지시’를 발표했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국민당과 공산당의 한간 처단은 1945년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숙청보다는 자파 세력을 확보를 위한 포섭과 순치 쪽으로 흐른 측면이 없지 않다.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어떠한 친일파 단죄도 하지 않은 한국에 비해, 한간 처단에 대한 인민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국공 모두 나름대로 법과 원칙을 가지고 민족반역자를 처리한 중국은 아무리 보아도 비교 대상이 아닐 수 없다.
8. 에필로그
친일파 청산을 제때하지 못한 우리는 반세기가 넘도록 오늘도 그 역사적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파리에 입성한 드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치 협력자에 대한 처단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잘못된 역사와의 단절을 통해서만이 그들이 열망하는 전후 프랑스 사회의 정의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한간 처벌은 인민들이 국가의 정통성을 평가하는 척도로 작용할 만큼 중대사였다.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마우쩌둥에 밀려 대만까지 퇴각하게 된 것도 국공 내전 말기에 들어 한간처리 과정에서 부패가 발생하는 등 엄정하지 못했다는 점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친일파 청산은 고사하고 60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지는 반민족행위자 인명사전 편찬을 놓고도 저항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역사적 작업이 필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윤경빈(14대 광복회장) “친일파를 우리가 그냥 두고 그 사람들의 매국행위를 이제껏 평가도 안 하고... 또 그 사람들 처벌도 못하고 그렇게 그냥 넘어가 가지고는 우리 민족의 자존이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이 다음에 다시 우리 민족이 위기가 왔을 때 누가 독립 운동을 하겠어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시대에 영합했고 권력을 좇았던 이들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잘못된 역사와의 단절을 위해서 친일파, 그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노덕술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단죄는 우리 국민들에게 ‘자기 안에 있는 노덕술’을 죽이고 거듭나기 위한 씻김굿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비굴과 위선을 광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53년 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을 방송한 의의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7년간 계속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나는 모두 5번을 참여했다. 첫해인 1999년 12월 12일 '언론통폐합...'편이 내 첫번째 프로그램이다. 이후 3번을 책임프로듀서로 임해 통산 43편의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한편으로 8편을 직접 연출했다. 그 중 3편이 친일 청산에 관한 것이었다. 친일파 관련 아이템을 세 편이나 제작하게 된 것은 2001년에 연출한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가 거둔 일정한 성과에 기인한 바 크다. 연로한 반민특위 관련자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육성 증언을 담아두어야 하겠다고 시작했다(실제로 증언한 분 중에서 방송 이후에 많이 돌아가셨다). 이후 친일파 문제를 한 편으로 끝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2002년에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을, 2004년에는 '만주의 친일파'편을 제작했다. 2002년과 2004년 사이에 나는 1년간 중국 연수를 다녀왔다. 그래서 한 해를 건너뛴 이후인 2004년의 세번째 아이템에는 연수 효과가 어느 정도는 들어 있다.
시리즈 첫편인 '반민특위'편은 그동안 이런 저런 계기 때마다 재방송돼 통산 ‘6방’의 기록을 세웠다. '친일경찰 노덕술', '만주의 친일파'도 두 번 방영되었다. ‘노덕술’편은 시청자의 반응도 뜨거웠다. 시청률이 두 자리 수 즉 10%를 넘었는데 이는 100편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중에서 베스트 10에 꼽히는 기록이다.
2005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년이 모두 끝난 후 월간 MBC가이드가 선정한 역대 베스트 10에 이 친일파 시리즈 3부작이 들기도 했다. 많은 분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그런데....그러면 뭐하나...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립운동의 후예들이 몰락해 있는 우리 사회의 이 가치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친일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발족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연좌제도 소급제도 안 되니 친일 문제에 대한 냉소주의만 불러올 뿐이다. 현실에서는 이미 늦었고 이제 역사와 다큐멘터리의 영역으로만 남았다.
항간에 정아무개는 방송계의 친일파 전문이냐는 얘기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말을 듣기에는 몹시 어중되고 부끄럽다. 친일연구가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기려 2005년에 처음 제정된 제1회 임종국상의 언론 부문에서 황송하게도 필자가 수상했다. 외람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나의 남은 꿈이 있다면 2001년에 방송된 '반민특위- 승자와 패자' 편 말미에 너무 짧게 다룬 경남 통영의 반민특위 조사관 김철호 선생의 의문스런 죽음에 대해 천착하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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