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전집 제55권 / 제발(題跋) / 남명언행록 발문〔跋南冥言行錄〕
남명(南冥) 선생은 고상한 선비였는데 그 말씀은 대개 고상한 고언(苦言)이면서 각박한 경우가 많았다. 그가 말하기를, “정포은(鄭圃隱)의 죽음은 가소롭다. 그가 공민왕(恭愍王)에게 벼슬하여 30년을 떠나지 않았는데, 신우(辛禑) 부자를 왕씨(王氏)의 소생이라 여긴 것이라면 훗날 우왕(禑王)을 내쫓을 때 자신도 거기에 참여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요, 10여 년을 신씨(辛氏)를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쫓아내 죽이고서 후일 자신은 고려를 위해 죽었다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이는 심정은 무시하고 행적만을 논한 설로, 그 실제와 맞지 않는다. 포은이 고려를 위해 죽었으니 우리 태조 입장에서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나라를 창립한 지 10년 만에 다시 포장(襃獎)을 가하였으니, 이는 태조께서 직접 보고 기억하여 마음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제 세상이 오래 지나고 일도 묻힌 후에 와서 분명치 않은 일로 논의를 세워서 그 득실을 근거 없이 판단하니, 혹 지나치지 않은가. 퇴계(退溪)가 말씀하기를 “세상의 의논하기 좋아하고 들추어내기를 즐기며 남의 미덕을 이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쉴 새 없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 매양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으니, 후세에 포은의 마음을 알아준 자는 오직 퇴계뿐이다.
이굉중(李宏仲)이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서 퇴계의 말을 기록하기를 “당시에 계승한 자가 비록 신씨였지만 왕씨의 종사가 아직 망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이와 같이 섬겼던 것이다. 우씨(牛氏)가 사마씨(司馬氏)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왕도(王導)를 배척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 바로 이런 의리를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기록한 자의 오류인 듯하다. 아니면 혹 선생이 말하기 어렵게 여겨서 은미한 말로 가탁해 말한 것인가? 저 우씨가 사마씨를 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역사 기록에서 단정한 바이지 당시의 공론이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만일 정말로 고려의 상황이 진(晉)나라 때의 후사가 끊어진 상황과 같았다면 단지 그 종사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을 핑계 대고 구차하게 이성(異姓)의 조정에 벼슬해 녹을 먹은 것이니, 어찌 의리의 당연한 바이겠는가. 저 왕도는 한낱 적신(賊臣)일 뿐으로 본래 나라와 존망을 함께하려는 뜻이 없었다. 《자치통감강목》에서 폄훼하지 않은 것은 꼭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었으니, 어찌 이것에 비의하여 똑같이 여길 수 있겠는가.
또 양용수(楊用修)가 《진서(晉書)》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애초 현석도(玄石圖)에 소가 말의 뒤를 계승한다〔牛繼馬後〕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선제(宣帝)가 우씨(牛氏)를 매우 꺼렸는데, 마침내 술통의 내부가 2칸이고 주둥이가 1개인 술병을 만들어 술을 담아서 황제가 먼저 그 좋은 술을 먼저 마시고 다른 한쪽의 독주(毒酒)로 그의 장수 우금(牛金)을 독살하였다. 그러나 공왕(恭王)의 비가 끝내 소리(小吏) 우씨(牛氏)와 간통하여 원제(元帝)를 낳았다. 그런데 지금 《통감(通鑑)》에서는 그 글을 생략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우금은 결국 억울하게 죽었고 또 오명을 지게 되었다고 이를 만하다. 이런 설이 억울하게 죽은 우금에게 설욕이 되겠지만 또 우씨의 설을 핵실(覈實)하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일은 본래 심약(沈約)의 《송서(宋書)》에서 나온 것인데, 심약은 단지 하승천(何承天)의 글을 본으로 삼고 서원(徐爰)의 설을 방증으로 채집하였으니, 그 근원이 도청도설(道聽塗說)하는 야승(野乘)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여 깊이 신뢰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왕소(王邵)가 “기이한 이야기를 잘 만들어 내서 전대(前代)를 속였으니, 소리 우금과 간통했다는 설 같은 유가 이것이다. 후에 양 무제(梁武帝)는 알고서도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옛날에도 전대의 사안을 논의하여 이미 판별할 수 있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비록 고려의 일과는 또 다른 점이 있다 할지라도 단지 “왕도(王導)가 떠나지 않은 것은, 진(晉)나라가 비록 혈통은 끊어졌지만 종사가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어찌 가하겠는가. 이 점은 또 역사를 읽는 사람이 깊이 고찰해야 할 바이다.
[주-D001] 정포은(鄭圃隱)의 죽음은 가소롭다 : 《남명집(南冥集)》의 언행록(言行錄)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에 언급된 포은(圃隱) 기사가 본 발문에서 인용한 글과 비슷하다. 그 글에, “남명 조 선생이 일찍이 정포은의 출처를 의심하였는데, 제 생각에도 정포은의 한번 죽음은 자못 웃을 만합니다. 공민왕 조정에서 30년이나 대신 노릇을 하였으니 도로써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어야 한다는 도리로 볼 때 이미 부끄러울 만하고, 또 신우(辛禑) 부자를 섬겼는데 신씨를 왕씨의 소생이라고 여긴 것이라면 후일 내쫓을 때 자신 또한 참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10년을 왕으로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내쫓아 죽이니, 이것이 가하겠습니까. 만일 우왕(禑王)이 왕씨 소생이 아니라면, 진 시황(秦始皇)이 즉위하여 진나라 영씨가 이미 망한 격인데 그 뒤에도 여전히 아무 탈 없이 또 따라서 그 녹을 먹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후일에 왕씨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南冥曺先生嘗以鄭圃隱出處爲疑 鄙意鄭圃隱一死頗可笑 爲恭愍朝大臣三十年 於不可則止之道 已爲可愧 又事辛禑父子 謂以辛爲王出歟 則他日放出 己亦預焉 何也 十年服事 一朝放殺 是可乎 如非王出 則呂政之立 嬴氏已亡 而乃尙無恙 又從而食其祿 如是而有後日之死 深所未曉〕” 하였다. 글의 내용이나 표현도 본 발문과 거의 비슷하다. 정도가(鄭道可)는 정구(鄭逑)인데 조식과 퇴계에게 모두 수학한 인물이므로 이 편지에서 정구의 말을 조식의 생각으로 본 듯하다.[주-D002] 이굉중(李宏仲) :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굉중, 호는 간재(艮齋)이며, 이현보(李賢輔)의 종손이다. 10여 세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와 총애를 받았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주역질의(周易質疑)》,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간재집(艮齋集)》 등의 저서가 전한다.[주-D003] 왕도(王導) : 276~339. 자는 무홍(茂弘)이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낭야(瑯耶) 임기인(臨沂人)이다. 위진 시대의 명문대족의 후손으로 일찍부터 문재로 이름났다. 진 원제(晉元帝)를 도와 천도한 동진(東晉)을 안정시켰으므로 조야의 중망을 얻어 중보(仲父)라고 불렸다. 명제(明帝)와 성제(成帝)를 보좌하며 대장군(大將軍), 시중(侍中)을 거쳐 태보(太保), 사도(司徒) 등을 역임하였다.[주-D004] 양용수(楊用修) : 양신(楊愼, 1488~1559)이다. 자는 용수, 호는 승암(升庵)으로 명나라 학자이다.[주-D005] 현석도(玄石圖) : 삼국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에 하서(河西) 유곡(柳谷)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거북 모양의 돌이 나왔는데, 돌 위에 기린, 봉황, 석마(石馬), 희우(犧牛), 팔괘(八卦), 별자리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를 두고 위나라가 한(漢)나라를 이은 것을 나타낸 상서로 보고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사실은 진(晉)나라가 위나라의 뒤를 잇고 또 진 원제가 우씨(牛氏)에게서 나올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資治通鑑 卷73 魏紀》[주-D006] 공왕(恭王)의 비 : 선제(宣帝) 사마의(司馬懿)의 손자인 공왕의 비 하후씨(夏侯氏)를 말한다.[주-D007] 통감(通鑑)에서는 …… 생략하였다 : 《통감》에는 “공비(恭妃)가 소리(小吏) 우금(牛金)과 간통하여 원제를 낳았다.”라고만 기술하여 전후 상황을 생략하였고, 또 간통한 우씨와 우금을 같은 인물로 혼동하였다.[주-D008] 우금은 …… 만하다 : 《성호사설》 권26 〈우금지무(牛金之誣)〉에도 이와 관련된 사실을 자세히 밝혀 놓았으므로 참고가 될 만하다.[주-D009] 도청도설(道聽塗說) :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말하기를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道聽而塗說 德之棄也〕” 하여, 좋은 말을 듣더라도 온축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덕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로 한 말이다. 후에는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를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