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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 후집 서(櫟翁稗說後集序)
어떤 사람이 역옹(櫟翁)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전집(前集) 기술(記述)에는 조종(祖宗) 세계(世系)의 원근을 서술(敍述)하고 이름난 공경(公卿)의 언행(言行)도 비교적 많이 실었는데 도리어 골계(滑稽)로 끝맺었으며, 후집(後集)의 기술에는 경사(經史)에 대하여 강론한 것은 얼마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장구(章句)를 다듬어 꾸민 것뿐이니, 어찌 특이한 조수(操守)가 그렇게 없는가. 이것이 어찌 품행이 단정한 선비로서 해야 할 일이겠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둥둥 북을 치는 격고장(擊鼓章)도 국풍(國風)에 들어 있고 너울너울 춤추는 빈지초연장(賓之初筵章)도 소아(小雅)에 편입되어 있는데, 더구나 이 기술(記述)은 본디 무료하고 답답함을 달래기 위하여 붓가는 대로 기록한 것이니, 실없는 이야기가 있은들 뭐 괴이할 것이 있는가. 부자(夫子 공자)도 ‘박혁(博奕 쌍륙과 바둑)놀음이 아무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하였으니, 장구를 다듬어 꾸미는 것이 박혁놀음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또 내용이 이렇지 않다면 패설(稗說)이라 이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중사(仲思 이제현(李齊賢)의 자(字))는 서(序)한다.
[주-D001] 격고장(擊鼓章) : 이는 위(衛) 나라의 주우(州吁)가 환공(桓公)을 시해(弑害)하고 자립하여 송(宋)ㆍ위(衛)ㆍ진(陳)ㆍ채(蔡)가 연합, 정(鄭) 나라를 칠 적에 여기에 종군(從軍)하던 위 나라 사람이 주우를 원망하는 시로, 옛날 결혼할 적에 아내와 함께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같이 살자던 약속이 이제는 허사가 되겠다고 탄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격고는 군대들이 훈련 연습하는 것을 말한다. 《詩經 邶風 擊鼓》
[주-D002] 빈지초연장(賓之初筵章) : 이는 위 무공(衛武公)이 술에 탐닉했다가 뒤에 뉘우쳐 자신을 경계하기 위하여 지은 시로, 술자리를 처음 벌였을 적에는 점잖다가 술이 취할수록 예도(禮度)를 잃어 의관(衣冠)의 매무새가 흩어지는 줄도 모르고 춤추면서 벌이는 추태를 서술한 것이다. 《詩經 小雅 賓之初筵》
역옹패설 후집 1(櫟翁稗說後集一)
김 밀직(金密直) 승용(承用) 이 나에게 이르기를,
“《좌씨전(左氏傳)》에 ‘그대의 나라에서 포모(包茅 다발로 묶은 띠)를 바쳐야 하는데 바치지 않았으므로 축주(縮酒)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축(縮) 자는 무슨 뜻입니까?”
[주-D001] 그대의 …… 못하였다 : 이 말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칠 적에, 초 나라가 명분 없는 침략이라고 항의하자 제 나라의 관중(管仲)이 답한 말 가운데 있다. 《左傳 僖公 4年》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두원개(杜元凱 원개는 두예(杜預)의 자)의 주(註)에 ‘띠를 묶어서 이것으로 술을 거르는 것이다.’ 하였소.”
하니, 김공(金公)이 인하여 말하기를,
“과거 영광군(靈光郡)에 있을 적에 띠를 엮어 술을 거르는 것을 보았는데 술이 지극히 맑아서 견직물(絹織物)의 자루에 넣어 거른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하였다. 내가 집 사람들을 시켜 시험하여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을 상고하니 ‘술을 거르는 데는 띠를 쓴다.’ 했는데, 정씨(鄭氏)는 ‘술을 거를 때 띠를 쓰는 것은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 설(說)이 두원개의 주(註)보다 더욱 자세하다. 그런데 세상에서 술을 거를 적에 견직물 자루를 쓰고 띠를 쓰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신(神)에게 제향 올릴 때 쓰는 것으로 사람들이 마시기 위한 것에 쓸 수 없어서인가. 소동파(蘇東坡)의 시(詩)에 “모시(茅柴)로 거른다.” 한 것이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황경(皇慶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초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이 연경(燕京)에 가 있을 적에 시(詩)를 바친 자가 있었는데, 지(支) 자 운통(韻統)의 치(差) 자로 압운(押韻)하였다.
문사(文士)들이 다투어 그 운자에 따라 시를 지어 올렸는데 모두 치(差) 자를 참치(參差 고르지 않은 모양)라고 달았으나, 두 사람만이 유독 다르게 달았다. 한 사람은 치치(差差 고르지 않은 모양)라 하였는데, 이는 한공(韓公 한유(韓愈))의 시(詩)의 ‘칼날의 흰 빛이 가지런하지 않다.[鋒刃白差差]’를 인용한 것이고, 한 사람은 옥치(玉差)라고 달았으니, 이는 송옥(宋玉)과 경치(景差)를 말한 것이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송본(宋本) 압운서(押韻書)에는 평성(平聲)인 지(支) 자 운통의 치(差) 자 아래 주(注)하기를 ‘경치(景差)는 인명(人名)이다.’ 하였으므로, 이를 취하여 음(音)이 치임을 입증하였으나, 학사(學士) 이의(李顗)는 말하기를,
“송본 압운서는 소략하여 전거로 삼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하였는데, 뒤에 《한서(漢書)》의 고금인명표(古今人名表)를 보니 경치의 치는 그 음이 도하반(徒何反)이라 되어 있었다
[주-D002] 도하반(徒何反) : 이는 도 자의 ‘ㄷ’과 하 자의 ‘ㅏ’를 합쳐 ‘다’로 발음한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고금인명표(古今人名表)에는 경치(景瑳)의 치에 대한 음을 자하반(子何反)으로 기재하고 치(瑳) 자는 치(差)로도 쓴다고 되어 있는데, 본문의 도하반은 글자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급총서(汲冢書)》는 육경(六經)과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많으며, 순(舜)ㆍ우(禹)ㆍ문왕(文王)에게 모두 큰 악명(惡名)을 씌웠으니 이는 더욱 해괴한 일이다.
[주-D003] 《급총서(汲冢書)》: 진(晉) 나라 태강(太康) 2년(281)에 급군(汲郡) 사람 불준(不準)이 위(衛) 나라 양왕(讓王)의 무덤을 발굴하여 얻었다는 선진(先秦)의 고서(古書)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조만(曹瞞 조조(曹操))과 같은 자가 스스로 악행이 많음을 알고서 ‘당세에는 누구도 두려울 것이 없으나 오직 두려운 것은 후세의 공론이다.’ 하고, 이에 대성인(大聖人)을 무함(誣陷)하여 자기에 대한 비방을 분산시키고자 땅을 파고 무함한 책을 묻어놓은 다음, 다행히 그 책이 후세에 발굴되어 세상 사람을 기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칠을 올린 대쪽의 자획(字畫)이 예스러움만 보고서 믿으니, 이 또한 잘못이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병진년(1316, 충숙왕 3)에 내가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아미산(峨眉山)으로 제사지내러 갔었는데, 조(趙)ㆍ위(魏)ㆍ주(周)ㆍ진(秦)의 옛 지역을 거처 기산(岐山) 남쪽에 이르렀으며, 다시 대산관(大散關)을 넘고 포성역(褒城驛)을 지나서 잔도(棧道 절벽과 절벽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 길)를 건너 검문(劍門)으로 들어가 성도(成都)에 이르렀다. 여기서 또 뱃길로 7일을 가서야 비로소 이른바 아미산에 도착하였다. 인하여 이 적선(李謫仙 이태백(李太白))의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구(詩句)가 기억났는데,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태백산에 조도(鳥道)가 있으니 / 西當太白有鳥道조도라면 아미산 정상까지 횡단할 수 있으리 / 可以橫絶峨眉巓
[주-D004] 조도(鳥道) : 나는 새만이 겨우 갈 수 있는 험준한 산길을 말한다.
태백산은 함양(咸陽) 서남쪽에 있고 아미산은 성도(成都) 동북쪽에 있으니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함양으로부터 수천 리를 가야 성도에 이르는데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므로 그 길이 한결같지 않으며, 또 성도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 6백 여 리를 간 뒤에야 아미산에 이르기 때문이다. 비록 산천(山川)을 따라 도로가 우회(迂廻)하고 있으나 그 지세(地勢)를 헤아려보면 두 산의 사이는 그리 멀지 않으므로 사람은 진실로 왕래할 수 없지만 조도라면 횡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백낙천(白樂天 낙천은 백거이(白居易)의 호)의 장한가(長恨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쓸쓸한 찬바람에 누런 먼지 흩날리는데 / 黃塵散漫風蕭索구름다리 얼기설기 검각에 오르니 / 雲棧縈紆登劍閣아미산 아래엔 행인(行人)도 적고 / 峨眉山下少人行여린 햇빛에 깃발도 광채를 잃네 / 旌旗無光日色薄
이는 당 명황(唐明皇)이 성도로 행행(行幸)할 적에 거친 곳을 말한 것이다. 만일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아미산은 당연히 검문(劍門)과 성도(成都)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보건대 그렇지 않았다. 뒤에 《시화총귀(詩話總龜)》를 보고서 옛사람도 이에 대하여 논란하였음을 알았다. 아마도 백낙천은 서촉(西蜀)에 가보지 않았던 것 같다.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계해년(1323, 충숙왕 10)에 내가 임조(臨洮)에 갈 적에 가는 길이 건주(乾州)를 지나게 되었다. 당 무후(唐武后)의 묘(墓)가 황화역(皇華驛) 서북쪽에 있었는데, 세속에서는 이를 아파릉(阿婆陵)이라 불렀다.
[주-D005] 당 무후(唐武后) : 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말한다. 고종이 죽자 자기 아들 중종(中宗)을 세웠는데 마음에 맞지 않았으므로 폐위시키고 둘째 아들 예종을 세웠다. 그러나 곧 폐위시키고 자신이 정권을 휘두르면서 국호(國號)를 주(周)라 고치고 요직(要職)에 친족을 앉혔으나, 뒤에 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내가 시(詩) 한 편을 남겼는데 그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구양영숙(歐陽永叔 영숙은 구양수(歐陽脩)의 자)이 무후를 당기(唐紀)에 넣은 것은 대체로 반고(班固)ㆍ사마천(司馬遷)의 오류를 답습하여 더욱 잘못한 일이다. 여씨(呂氏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는 비록 천하를 통제하였으나 그래도 어린 아들을 황제라는 이름으로 세워 한(漢) 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였는데, 무후는 이씨(李氏)를 억누르고 무씨(武氏)를 높였고 당(唐)이라는 국호를 고쳐 주(周)라 일컬었으며 종사(宗社)를 세우고 연호(年號)를 제정하였으니 흉역(凶逆)이 더할 나위 없다. 당연히 잘못을 드러내어 바루어서 만세(萬世)에 보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높여서야 되겠는가. 당기(唐紀)라 일컬으면서 주(周)의 연호를 쓴 것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기록하는 자가 반드시 먼저 연대(年代)를 표시하고 다음으로 내용을 기록하는 것은 조강(條綱)을 문란시키지 않으려는 때문이다. 그대의 말대로 한다면 중종(中宗)이 이미 폐위(廢位)된 뒤에는 그 연대를 빼버리고 쓰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천하의 일을 장차 어디에 붙여 기록하여야 하겠는가.’ 하므로, 이르기를 ‘노 소공(魯昭公)이 계씨(季氏)에게 쫓겨 건후(乾侯 지명(地名))에 가서 살 적에도 《춘추(春秋)》에 소공의 연대를 적지 않은 때가 없었으니, 방릉(房陵 중종(中宗))의 폐위가 이와 무엇이 다른가. 사서(史書)를 만드는 데 있어 《춘추》를 본받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했다.”
[주-D006] 노 소공(魯昭公)이 …… 살 적에 : 이 말은 《춘추좌전(春秋左傳)》 노 소공 28년과 29년 조에 보인다.
하였으며, 그 시(詩)는 대략 다음과 같다.
구공이 진실로 명유이기는 하나 / 歐公信名儒필삭에 잘못을 범하였도다 / 筆削未免失어찌하여 주 나라의 찌꺼기로 / 那將周餘分당 나라의 일월을 더럽혔는가 / 黷我唐日月
뒤에 회암(晦庵 주희(朱熹)의 호(號))의 감우(感遇) 시를 열람하였는데 그 시에,
어찌하여 구양자는 / 如何歐陽子사필(史筆)을 잡고서 지공한 사실을 흐렸는가 / 執筆迷至公
하였다. 나는 책을 어루만지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후생의 천루(淺陋)한 학문으로 이에 대하여 논한 것이 주자(朱子)의 생각과 다름이 없을 줄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하였다. 범씨(范氏)의 《당감(唐鑑)》에도 이런 의논이 있는 것을 보고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터뜨렸고 따라서 스스로 이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 적음을 후회하였다.
순자(荀子)는 매양 자궁(子弓)을 부자(夫子 공자(孔子))와 동격으로 치켜세워 중니(仲尼)니 자궁이니 하였다. 당(唐) 나라 양경(楊倞)이 말하기를 “자궁(子弓)은 중궁(仲弓)이고, 자(子) 자를 붙인 것은 그가 자기의 스승임을 드러낸 말이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여 보건대, 순경(荀卿 순자)은 맹자(孟子)보다 뒤에 태어났고 중궁은 자사(子思)보다 먼저 태어났다. 맹자도 자사에게 직접 배우지 못하고 자사의 문인(門人)에게 수업(受業)하였는데 순경이 어떻게 중궁을 사사(師事)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자궁이라는 사람이 응당 따로 또 한 사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궁의 공덕(功德)이 세상에 전하여지지 않았으니 과연 부자와 짝할 만한 사람이었는지 의심스럽다. 그 제자인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性惡說) 하나만 보더라도 그 연원(淵源)을 알 수 있거든, 하물며 다시 전수받은 사람이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한 이사(李斯)였음에랴!
《역경(易經)》 건괘(乾卦)의 구삼(九三 밑에서 위로 세어 세 번째의 효(爻))에만 용(龍)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육효(六爻)를 둘씩 셋으로 나누어 삼재(三才 천(天)ㆍ지(地)ㆍ인(人))에 배정하는데, 첫째와 둘째 효는 땅을 뜻하고 셋째와 넷째 효는 사람을 뜻하고 다섯째와 여섯째 효는 하늘을 뜻한다. 이미 연못을 떠났으나 아직 하늘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니, 용의 헤아릴 수 없는 신기한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삼(九三)에는 바로 인사(人事)를 말하고 용의 상(象)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구사(九四)로 올라가면 하늘에 가까워져 그 변화를 신기하게 할 수 있으므로 ‘혹 못에 있으면서 뛴다.’ 하였다.
[주-D007] 구삼(九三)에는 …… 말하고 : 이는 《역경(易經)》 건괘(乾卦) 구삼의 효사(爻辭)를 말하는데 그 효사에 “군자(君子)가 종일토록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고 조심하면, 처지가 위험하더라도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다.
구이(九二)에 ‘밭[田]에 있다.’ 한 것은 못을 떠난 것이 아닌가. 밭은 물가를 말하는 것으로 용이 돌아다니는 곳을 이름이니, 구름과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천구(天衢)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역경》 곤괘(坤卦) 상륙(上六)에, “용(龍)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르다.[玄黃]” 한 데 대하여 해설하는 사람은, “음(陰)과 양(陽)이 함께 상(傷)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여기에서 용이라고 한 것은 양(陽)이 아니고 음(陰)이면서 스스로 양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음(陰)이 이미 극성하여 스스로 양인가 의심하므로 그 피가 검고 누르다고 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바야흐로 음이 양과 맞서면 반드시 음이 상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한 것인데, 해설하는 자가 어째서 갑자기 양도 함께 상한다고 말하였는가.
암말[牝馬]의 상(象)이 유순(柔順)하다고 이정(利貞)한 곤덕(坤德)을 다 포함할 수 있겠는가. 《역경》의 저자(著者)가 사람이 알기 쉬운 것을 취택하여 상(象)을 만든 것뿐이다. 아무리 헤아릴 수 없는 신화(神化)를 부리는 용이라 할지라도 건도(乾道)를 다 포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경(禮經)》 단궁편(檀弓篇)에, “공씨(孔氏)가 출모(出母 아버지에게 쫓겨난 생모(生母))의 상(喪)에 복(服)을 입지 않는 것은 자사(子思 공급(孔伋))로부터 시작되었다.” 하고, 자사가,
“급(伋)의 처(妻)가 된 자는 백(白 공급의 아들 자상(子上))의 어머니가 된다.”
하였다. 이는 아마도 계모(繼母)로서 출모(出母)가 된 자의 경우를 말한 것이요, 생모(生母)는 아닐 것이다.
유자후(柳子厚 자후는 유종원(柳宗元)의 자)의 남악비(南岳碑)에,
“가섭(迦葉)에서 24세인 사자(師子)에 이르러 갈라져서 달마(達摩)가 되었고 달마에서 5세인 홍인(弘忍)에 이르러 더욱 갈라져서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전등록(傳燈錄)》을 상고하여 보매, 사자는 파사사다(婆舍斯多)에게 전하고 파사사다는 불여밀다(不如密多)에게 전하고 불여밀다는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전하고 반야다라는 보리달마(菩提達摩)에게 전하였으니, 어떻게 사자에 이르러 분리되어 달마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자의 방출(傍出)로 달마달(達摩達)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유자후가 아마도 이 달마달을 보리달마라고 생각한 것 같다.
북원(北原)의 흥법사비(興法寺碑)는 우리 태조(太祖 왕건(王建))가 비문(碑文)을 짓고 최광윤(崔光胤)이 당 태종황제(唐太宗皇帝)의 글씨를 모아 돌에 모각(模刻 본을 떠서 새기는 것)한 것인데, 사의(辭義)가 웅장하고 깊고 거룩하고 아름다워 현규(玄圭 검은 빛의 홀(笏))에 적석(赤舃 바닥이 두 겹으로 된 붉은 신)을 신고 조정에서 읍양(揖讓)하는 것 같으며, 크고 작은 글자와 해서(楷書)와 행서(行書)가 서로 알맞게 배열되어 난새와 봉새가 물 위에 떠서 초연(超然)한 기상을 머금고 있는 듯하니, 참으로 천하의 보물이라 하겠다.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에 예종(睿宗 고려 제16대 임금)이 지은 당률사운시(唐律四韻詩) 한 편을 새긴 비석이 있는데, 그 뒷면에 태자(太子) 아무가 썼다 하였으니, 아무는 인종(仁宗 고려 제17대 임금)의 휘(諱 해(楷))이다.
이때에 왕과 태자가 모두 정신을 가다듬어 학문을 닦아 훌륭한 선비를 연방(延訪)하였으므로,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ㆍ이오(李䫨)ㆍ이예(李預)ㆍ박호(朴浩)ㆍ김연(金緣)ㆍ김부일(金富佾)ㆍ김부식(金富軾)ㆍ김부의(金富儀)ㆍ홍관(洪灌)ㆍ인빈(印份)ㆍ권적(權適)ㆍ윤언이(尹彦頤)ㆍ이지저(李之氐)ㆍ최유청(崔惟淸)ㆍ정지상(鄭知常)ㆍ곽동순(郭東珣)ㆍ임완(林完)ㆍ호종단(胡宗旦) 등의 현사(賢士)와 명신(名臣)이 조정에 포열(布列)되어 있으면서, 토론하고 윤색(潤色)하여 부지런히 힘썼으므로 중화(中華)의 풍도가 있었으니 후세에서는 따를 수 없다.
명왕(明王 명종(明宗))이 손수 필사(筆寫)한 《전한서(前漢書)》의 기(紀)ㆍ지(志)ㆍ표(表)ㆍ전(傳) 99편의 제목을 전일 상서(尙書) 유인수(柳仁脩)의 집에서 보았다. 명왕은 만기(萬機)를 보살피는 여가에도 전적(典籍)에 마음을 두었으며, 필찰(筆札)의 오묘함 또한 옛사람에 못지 않았으니 아무리 찬탄하여도 오히려 부족하다. 인하여 양정수(楊廷秀)가, 명종이 덕수궁(德壽宮)에다 써놓은 《한서(漢書)》 열전찬(列傳贊)을 보고 지은 시(詩)가 기억났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소신은 외람되이 선비의 옷차림으로 / 小臣濫巾縫掖行효경 한 권도 아직 필사하지 못하였으니 / 手抄孝經未輟章어찌 일찍이 한사(漢史) 쓸 마음인들 가졌겠는가 / 何曾把筆望史漢두 번 절하고 엎드려 읽으니 땀이 옷을 적시네 / 再拜伏讀汗透裳
이 시는 사람의 속마음을 잘 묘사하였다고 하겠다.
옛사람의 시(詩)는 눈앞의 경물(景物)을 묘사하였지만 의미는 말 밖에 있으므로, 말은 끝이 났지만 맛은 끝이 없다. 도팽택(陶彭澤 도연명(陶淵明))의,
동쪽 울타리 가에서 국화를 꺾다가 / 採菊東籬下우두커니 남산을 바라본다 / 悠然見南山
한 시와 진간재(陳簡齋 간재는 진여의(陳與義)의 호)의,
문 여니 비 온 줄 알겠는 것이 / 開門知有雨늙은나무 반쯤 젖어 있네 / 老樹半身濕
한 시가 이런 유(類)이다. 나는 유독,
못 둑에 봄풀이 돋았구나 / 池塘生春草
한 시를 사랑하는데, 여기에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가 여항(餘杭)에 나그네로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화분에 난초를 심어 보내 주어서 책상 위에 놓아 두었었다.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세속의 일을 수작할 때에는 그 향기를 느낄 수 없었으나, 밝은 달이 창을 비추는 깊은 밤에 고요히 앉아 있으면 난초의 향기가 코를 찔렀는데, 맑고 그윽한 그 향기가 못내 사랑스러웠으나 말로는 형언할 수 없었다. 나는 흔연(欣然)히 혼자 말하기를,
“이 즐거움은 혜련(惠連)을 만나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의 시구(詩句)를 얻은 것과 같다.” 하였다.
[주-D008] 혜련(惠連)을 …… 것과 같다 : 매우 즐겁다는 뜻. 혜련은 사혜련(謝惠連)을 말하는데, 그는 10세 때부터 글을 잘 지었다. 그의 족형(族兄) 사영운(謝靈運)이 칭찬하기를 “시구(詩句)의 대를 맞추려 고심할 적이면 혜련이 척척 대를 맞추었는데 그 글귀가 매우 아름다웠다. 언젠가 하루종일 시를 구상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혜련을 만나서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라는 글귀를 얻었다.” 하였다. 《南史 謝惠連傳》
두소릉(杜少陵 소릉은 두보(杜甫)의 호)의,
지역이 편소하니 강물이 촉 지방을 흔들고 / 地偏江動蜀하늘이 머니 푸른 나무가 진 지방에 떠 있구나 / 天遠樹浮秦
한 시구(詩句)가 있는데, 내가 일찍이 진(秦)ㆍ촉(蜀) 지방을 유람하였다. 촉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양자강(揚子江) 물이 민산(岷山)에서 시작하여 성도(成都) 남쪽을 거쳐 동으로 삼협(三峽)을 향하여 흐르는데 물결의 광채와 산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져 흔들렸다. 진중(秦中)은 지방이 천 리인데 지형이 손바닥처럼 평평하였으며, 장안성(長安城) 남쪽에서 삼면(三面)을 바라보면 푸른 나무가 무성하고 그 밑의 들빛이 하늘과 맞닿아 마치 푸른 나무숲이 큰 물 위에 떠 있는 듯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두소릉의 이 시구가 진과 촉 지방의 신기하고도 절묘한 것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경치에 연유하였음을 알았다.
사경쯤 산 위에 달 뜨니 / 西更山吐月샐녘 물빛이 누대를 비추네 / 殘夜水明樓진세(塵世)에 큰 거울 열렸으니 / 塵匣元開鏡풍렴이 저절로 걷혀지네 / 風簾自上鉤
이 시(詩)에 대하여 졸옹(拙翁 최해의 호) 최해(崔瀣)는,
“사람들은 뒤의 두 구가 모두 달을 말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진갑원개경(塵匣元開鏡)은 물빛이 누대를 비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는,
산협은 푸른 강을 끼고 솟아 있고 / 峽束蒼江起바위는 고목에 둘러싸였네 / 巖排古樹圓구름 위로 치솟아 초 나라의 기운을 눌렀고 / 拂雲埋楚氣바다로 달리면서 오 나라의 하늘에 차네 / 朝海蹴吳天
한 기부영회(夔府詠懷) 시에서 구름 위로 치솟는다[拂雲]는 것은 고수(古樹)를 뜻하고 바다로 달리면서[朝海]라는 말은 창강(蒼江)을 뜻한 것과 같으니, 또한 시가(詩家)의 한 격식(格式)이다.” 하였다.
위언(偉偃)이 그린 소나무 그림에 대하여 희롱하여 지은 시에서는 그를 희롱하는 말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고소(姑蘇) 주덕윤(朱德潤)은 그림 솜씨가 매우 절묘하였는데, 나에게 말하기를,
“무릇 송백(松柏)을 그림에 있어 마디져 꾸불꾸불한 것과 크고 작은 쌓인 바윗돌은 비교적 그리기 쉬우나, 하늘을 향하여 우뚝 치솟은 모양은 가장 그리기 어렵다.
이 시의 뒤 네 구인,
내게 한 필의 좋은 동쪽 나라 비단이 있으니 / 我有一匹好東絹소중하기 채색비단에 못지않다네 / 重之不減錦繡段이미 혼란한 광택 닦아버리게 했으니 / 已今拂拭光凌亂그대 붓 휘둘러 곧은 줄기를 그려 주게나 / 請君放筆爲直幹
한 것은 바로 언(偃)을 희롱한 것이다.” 하였다.
[주-D009] 그대 …… 그려 주게나 : 이 말의 숨은 뜻은 위언(韋偃)의 이름 자가 누울 언(偃) 자이므로 누운 소나무만 그리지 말고 곧은 소나무도 그리라고 희롱하는 말이다.
설 사성(薛司成) 문우(文遇) 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태백(李太白)의 청평사(淸平詞)에,
한 가지 고운 꽃에 향기 머금은 이슬 맺혔는데 / 一枝仙艶露凝香무산의 사랑 이야기 부질없이 남의 애를 끊는구나 / 雲雨巫山枉斷腸묻노니 한 나라 궁중에서 누가 이와 같았는가 / 且問漢宮誰得似가련쿠나 비연이 화장에만 의지한 것이 / 可憐飛燕倚新粧
하였는데, 의(倚)의 뜻은 의지한다는 것이니 조후(趙后 이름은 비연(飛燕))가 한(漢) 나라의 궁중에서 총애를 독차지한 것은 화장에만 의지하였을 뿐이라는 말이고, 가련(可憐)의 뜻은 조소(嘲笑)하는 말이다.”
[주-D010] 무산(巫山)의 사랑 이야기 : 초 회왕(楚懷王)이 고당(高唐)이라는 곳으로 유람갔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는데, 꿈에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이 “나는 무산에 사는 여인으로 왕이 유람왔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침석(枕席)을 받들고 싶습니다.” 하므로 인하여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는데, 여인이 돌아갈 적에 “나는 아침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비가 되어 늘 양대(陽臺) 아래 있습니다.” 하였다. 깨어보니 과연 그 여인의 말과 같았으므로 조운(朝雲)이라는 묘당(廟堂)을 세웠다 한다. 《宋玉 高唐賦》
유 빈객(劉賓客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킨다)의 금릉회고(金陵懷古) 시에,
야성의 물가엔 조수(潮水)가 찼고 / 潮滿冶城渚정로정에는 햇살이 비꼈네 / 日斜征虜亭채주엔 풀빛이 새롭고 / 蔡州新草綠막부엔 예처럼 푸른 연기 이네 / 幕府舊煙靑흥폐는 인사에 말미암는 것인데 / 興廢由人事산천은 덧없이 예대로구나 / 山川空地形후정화 한 곡조가 / 後庭花一曲애절하여 들을 수 없네 / 哀怨不堪聽
하였는데, 이 시가 이른바 네 사람이 용(龍)의 턱을 더듬어서 몽득(夢得 유우석의 호)이 여의주(如意珠)를 얻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화(詩話)》에는 “왕준(王濬)이 누선(樓船)을 타고 익주(益州)로 내려간다.[王濬樓船下益州]”를 몽득(夢得)이 얻은 여의주라 하였다.
[주-D011] 후정화(後庭花) : 진 후주(陳後主) 때의 가곡명(歌曲名)으로, 후주가 연회를 베풀 적에 귀인(貴人)ㆍ여학사(女學士)ㆍ압객(狎客) 등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여, 그 중 가장 잘 된 것을 뽑아 악곡(樂曲)을 붙이고 아름다운 여인을 선발, 이를 노래부르고 춤추게 하면서 즐겼는데 그 중 한 곡이 바로 이 후정화이다.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陳書 皇后傳》
[주-D012] 용(龍)의 …… 아니겠는가 : 쉽게 지을 수 없는 아주 잘 된 글을 말한다. 《莊子》 列禦寇에 “쑥대로 발을 엮어 파는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못 속에 들어가 천금의 값이 있는 구슬[珠]을 가지고 나오자, 아들에게 ‘이 구슬은 용의 턱 밑에 있는 것인데 네가 이를 얻은 것은 용이 졸았기 때문이리라. 용을 잘못 건드려 깨웠다면 너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위에 서술한 몽득의 시가 구슬에 해당하는 좋은 글이라는 뜻으로 씌었다.
[주-D013] 왕준(王濬) : 진(晉) 나라 홍농(弘農) 사람으로 익주 자사(益州刺史)를 지냈으며, 오(吳) 나라를 치기 위하여 누선(樓船)을 제조, 드디어 오왕(吳王) 손호(孫皓)를 사로잡고 오 나라를 멸하였다. 《晉書 卷42》
몽득(夢得)의 금릉오제(金陵五題) 가운데,
산은 첩첩이 고국을 둘러 있고 / 山圍故國周遭在조수는 빈 성을 치다가 쓸쓸히 물러가네 / 潮打空城寂寞回회수 동쪽에 뜬 옛 달은 / 淮水東邊舊時月깊은 밤 여장 넘어 비쳐오네 / 夜深還過女墻來
주작교 가에는 들꽃이 피었고 / 朱雀橋邊野草花오의항 입구엔 석양이 비꼈네 / 烏衣巷口夕陽斜옛날 왕씨 사씨의 당 앞에 날던 제비 / 舊時王謝堂前燕무심히 백성들의 집으로 날아드네 / 飛入尋常百姓家
살아 설법할 적엔 귀신도 듣더니 / 生公說法鬼神聽죽은 뒤 빈 집엔 밤인데도 문이 열렸네 / 身後空堂夜不扃예좌는 적막한 채 티끌만 쌓였으니 / 猊座寂寥塵漠漠중정의 달빛이 정경에 어울리네 / 一方明月可中庭
[주-D014] 예좌(猊座) : 부처나 고승(高僧)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한 이 3편(篇)은 모두 가작(佳作)이다. 백낙천(白樂天)은 유독 조타공성적막회(潮打空城寂寞回)라는 구를 좋아하여 머리를 흔들면서 읊다가, “이 시를 읊고서야 내가 후세의 사인(詞人)들은 다시 시문(詩文)을 이렇게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가 일찍이 제3편을 써서 걸어놓았더니 어떤 이가, “어째서 ‘밝은 달빛이 중정에 가득하다.[明月滿中庭]’ 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으나 동파는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이 시(詩)에 대하여 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자)와 자후(子厚 유종원(柳宗元)의 자)의 글은 고금(古今)의 사람들이 서로 강적(强敵)이라 일컬어오고 있는데, 한유와 유종원의 글에는 논(論)ㆍ문(文)ㆍ서(書)ㆍ의(議)ㆍ서(序)ㆍ전(傳)ㆍ비(碑) 등이 갖추 있다. 한유의 송문창서(送文暢序)ㆍ오자왕승복전(圬者王承福傳)ㆍ서장중승전후(書張中丞傳後)ㆍ평회서비(平淮西碑)와 유종원의 복수의(復讐議)ㆍ재인전(梓人傳)ㆍ수양묘비(睢陽廟碑)ㆍ평회이아(平淮夷雅) 등의 글을 종류대로 편찬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 반복하여 읽으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굴원(屈原)의 천문(天問 《초사(楚辭)》의 편명(篇名))에 대하여 유자후(柳子厚)가 그 문(問)에 따라 답(答)한 글을 천대(天對)라고 하는데, 모두 글이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 집에 주회암(朱晦庵 회암은 주희(朱熹)의 호)이 이에 대하여 주해(注解)한 책이 있는데, 이를 읽으면 이른바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풀리고 즐겁도록 문리(文理)가 순하여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래 학사(學士) 민상의(閔相義)의 집에서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가 여기에 대하여 주(注)를 낸 것도 보았는데 더욱 이해하기 쉬웠다. 위의 두 선생과 왕일(王逸) 등 세 사람의 설을 엮어서 집해(集解)를 만든다면 또한 배우는 자들에게 한 가지 다행한 일이 될 것이다.
구양영숙(歐陽永叔 영숙은 구양수(歐陽脩)의 자)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나의 글 여산고(廬山高)는 누구도 그만큼 잘 지을 수 없고 태백(太白 이백(李白))이라야 지을 수 있으며, 명비후편(明妃後篇)은 태백으로서도 지을 수 없고 자미(子美 두보(杜甫))라야 지을 수 있으며, 명비전편(明妃前篇)은 자미로서도 지을 수 없고 나라야 지을 수 있다.”
하였다 하는데, 이는 후세의 호사자(好事者)들이 여산고의 음절(音節)이 태백의 시와 비슷하고 명비후편의 음절이 자미의 시와 비슷한 것을 보고서 함부로 만들어낸 말이다.
소노천(蘇老泉 노천은 소순(蘇洵)의 호)이 구양공(歐陽公)에게 올린 편지에,
“ …… 집사(執事)의 문장은 맹자(孟子)나 한자(韓子 한유(韓愈))의 문장이 아니요 구양자(歐陽子)의 문장입니다.”
하였는데, 시(詩) 역시 그러하다. 가령 이백(李白)ㆍ두보(杜甫)로 하여금 구공(歐公)과 같은 시를 짓게 하여도 반드시 똑같게 짓지는 못할 것이며, 구공으로 하여금 이백ㆍ두보와 같은 시를 짓게 하여 지었다 하더라도, 우맹(優孟)이 손바닥을 치면서 담소(談笑)하는 것과 같으리니 이를 진짜 손오(孫敖)라 할 수 있겠는가.
[주-D015] 우맹(優孟)이 …… 있겠는가 : 아무리 모방하여도 진짜와 똑같게 할 수는 없다는 뜻. 《史記》 滑稽傳에 “우맹이 손숙오(孫叔敖)의 의관(衣冠)을 입고 손바닥을 치며 담소(談笑)하였는데 한 해쯤 되자 손숙오와 똑같았으므로 초왕(楚王)을 위시하여 좌우(左右)의 근신(近臣)들도 분별할 수 없었다.” 하였다.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의 시(詩)로서 아동들이 학습하고 있는 《송현집(宋賢集)》 속에 들어 있는 10여 수(首)는 모두 절묘하다.
해 기우니 섬돌 그림자 오동나무로 옮겨가고 / 日西階影轉梧桐발 걷으니 푸른 산이 눈앞을 가로막네 / 簾捲靑山簟半空남쪽 시내에 석양이 비치니 놀이 절로 일고 / 南澗夕陽煙自起서산은 아득하여 보일 듯 말 듯하구나 / 西山漠漠有無中
동강에 나뭇잎 지고 물은 질펀한데 / 東江木落水分洪시든 갈대밭의 조는 오리는 운애(雲靄)에 묻혀 있네 / 睡鴨殘蘆掩靄中북쪽 사람 고향에 돌아가 이 경치 못 잊어 / 歸去北人多憶此집집마다 병풍에 그림 그려 놓았네 / 每家圖畫上屛風
물빛과 산 기운 푸르고 푸른데 / 水光山氣碧浮浮해질녘 돌아가려다 잠깐 또 머무네 / 落日將還又小留이로부터 이 경치 길이 꿈에 뵈리니 / 從此定應長入夢꿈속에서 옛친구와 놀리라 / 夢中還與故人遊
금화로에 향불 꺼지고 누수(漏水) 소리 가냘픈데 / 金爐香盡漏聲殘산들산들 부는 바람 으스스 춥구나 / 剪剪輕風陣陣寒봄 경치 마음 괴롭혀 잠 못 이루는데 / 春色惱人眠不得달 기울어 꽃 그림자 난간 위로 올라 있네 / 月移花影上欄干
강 어귀에 돛 내리니 달은 으스름한데 / 落帆江口月黃昏목롯집에 등이 없으니 문 닫으려 하네 / 小店無燈欲閉門모래 언덕에 반쯤 솟은 단풍나무 시들어 가는데도 / 半出岸沙楓欲死배를 매었던 지난해의 흔적만은 남아 있네 / 繫舟唯有去時痕
나와 단청이 둘 다 환신(幻身)이라 / 我與丹靑兩幻身세간에 유전하다가 끝내 티끌이 되는 것을 / 世間流轉會成塵다만 이 몸이 남의 몸 아님 알겠으니 / 但知此物非他物지금 사람이 옛사람과 같으냐고 묻지 마오 / 莫問今人猶昔人
수양버들 늘어진 샛길엔 보랏빛 이끼 덮여 있고 / 垂楊一徑紫苔封원락에는 사람의 말소리 쓸쓸하네 / 人語蕭蕭院落中한 그루 살구꽃 손을 부르듯 / 唯有杏花如喚客담에 의지한 채 두어 가지 석양 속에 붉었네 / 倚墻斜日數枝紅
시냇물 맑게 흐르고 고목은 푸르른데 / 溪水淸漣樹老蒼봄볕 즐기며 시냇가를 거니누나 / 行穿溪水踏春陽깊은 골짝 우거진 숲 사람 없는 곳인데 / 溪深樹密無人處그윽한 꽃 향기만 물 건너 풍겨오네 / 只有幽花渡水香
이와 같은 시는 한 자 한 구가 모두 야광주(夜光珠)를 소반 위에 굴리는 것같이 사랑스럽다. 원택(元澤)의,
물가의 산빛에 사창이 푸르른데 / 水邊山映碧紗窓소나무 밑 석상에는 도서가 가득 쌓였네 / 松下圖書滿石牀외객이 오지 않으니 봄이 정히 고요한데 / 外客不來春正靜꽃 사이에서 우는 새만이 석양을 전송하네 / 花間啼鳥送斜陽
한 시는 참으로 형공(荊公)의 시법(詩法)을 체득한 것이다. 무산고(巫山高) 시(詩) 가운데,
백월(白月)이 해처럼 방과 창을 비추네 / 白月如日明房櫳
한 구절이 있는데, 이벽(李璧)이 주해(注解) 하기를, “백월(白月)은 구슬을 말한 것이다.” 하였고, 유수계(劉須溪)가 이를 비평하기를, “반드시 구슬만이 스스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벽의 속기(俗氣)는 숨길 수 없다.” 하였다.
어떤 중이 묻기를, “동파(東坡)가 오강삼현(吳江三賢)을 희롱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희롱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므로, 내가, “삼업(三業)을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D016] 삼업(三業) :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말하는데, 신업은 살생ㆍ투도 등 몸으로 짓는 죄업, 구업은 입으로 짓는 죄업, 의업은 사념(思念)으로 짓는 죄업을 말한다.
하니, 중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기에, 내가, “범려(范蠡)는 서시(西施)를 얻었느니 신업(身業)을 지은 것이요, 장한(張翰)은 농어[鱸魚]를 생각하였으니 구업(口業)을 지은 것이요, 육귀몽(陸龜蒙)은 남을 속여 재물을 취하였으니 의업(意業)을 지은 것입니다.” 하니, 중이 크게 웃었다.
동파(東坡)가 이공택(李公擇 공택은 이상(李常)의 자)의 백석산방(白石山房)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희롱하여 지었다.
우연히 흐르는 물 따라 높은 산에 오르니 / 偶尋流水上崔嵬오로봉(五老峯) 푸른 얼굴 활짝 열렸네 / 五老蒼顔一笑開만약 이태백을 보거든 말 전하여주게나 / 若見謫仙煩寄語광산에서 머리 세었거든 일찍 내려오라고 / 匡山頭白早歸來
[주-D017] 광산(匡山)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대광산(大匡山)으로 이백(李白)이 여기서 머리가 세도록 글을 읽었다 한다.
이를 만약 ‘동파가 오로봉을 시켜 이태백에게 말 전하여 달라.’ 한 것으로 풀이하면 잘못이다.
[주-D018] 이를 …… 잘못이다 : 이 말은 이공택(李公擇)에게 이백을 만나거든 말 전하여 달라는 것으로 풀이하여야 된다는 뜻이다.
과거 내가 이것을 최졸옹(崔拙翁)에게 물었더니, 아랫구를 세 번 되풀이해 읽고도 이의가 있는 듯 대답하지 않으므로, 내가 큰 소리로,
“높게 착안하시오.” 하였더니, 옹이 곧 깨닫고 서로 크게 웃었다.
진간재(陳簡齋)가 상사(相師)에게,
서목임은 전부터 내 스스로 알거니와 / 鼠目向來吾自了구장은 원래부터 세상과 어긋나네 / 龜腸從與世相違취한 김에 스님에게 묻노라 / 醉來却欲憑師問산에 가득한 단풍잎 속에 석장 날리는 뜻을 / 黃葉漫山錫杖飛
한 시를 주었는데, 구법(句法)의 공교함이 이와 같았다. 동파(東坡)는,
불꽃처럼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은 운수가 있다지만 / 火色上騰雖有數급류 같은 벼슬 길에서 용퇴하는 사람 어이 없으랴 / 急流勇退豈無人
하였으니, 더욱 호탕한 사람이라 하겠다.
[주-D019] 서목(鼠目) : 소견이 작다는 뜻. 쥐의 눈은 작으면서도 밖으로 툭 불거져나와 있어 흡사 탐욕스러워하는 모양이므로 전하여 이렇게 비유한다.
[주-D020] 구장(龜腸) : 마음이 세상과 잘 조화되지 못한다는 뜻. 시(詩)의 한 짝은 대(對)를 이루지만 한 구는 대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예로 육구몽(陸龜蒙)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격류와 침석만 말하였을 뿐[但說激流幷枕石] 선복과 구장은 말하지 않았네. [不辭蟬腹與龜腸]” 《西溪叢話》
선군(先君 이진(李瑱))이 《산곡집(山谷集)》을 열람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과거 강도(江都)에 있을 적에 선달(先達 문무과에 급제는 하였으나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 이담(李湛)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심악군(深岳君)과 우연히 이름이 같았다. 있었는데, 시를 지으면 말이 엄격하고 뜻이 참신하였으나 인용하는 고사(故事)가 험벽(險僻)하여, 당시의 숭상하는 바에 배치되었으므로 마침내 드러나지 못하였다. 대개 부옹(涪翁 황정견(黃庭堅)의 호)의 시체(詩體)를 공부하여 너무도 똑같게 된 사람이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고심(苦心)하여 학문을 닦은 선비로서 요직에 있는 사람의 인정을 못 받아 늙어 죽도록 드러난 이름없음이 이 선달(李先達)과 같은 자가 그 얼마이겠는가. 정말 애석해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