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
제2부-재활
환자 한 분이 휠체어를 타고 옥상에 나와있었다. 이 분은 병원 옥상 부지를 이용해 큰 화분을 가져와 고추, 상추 등 많은 작물을 재배한다. 이 분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한쪽 팔다리가 마비된 편마비(반신불수)이다. 화분에 지지대를 세울 때나 씨를 뿌리거나 화분 속의 김을 맬 때는 휠체어에서 내려와 네 개의 팔다리를 이용해 바닥을 기어다니며 땀이 범벅이 된 채 자신이 반신불수라는 사실을 잊고 일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한다. 재활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하다. 같이 지내다 보면 환자에게서 삶의 의미나 생활의 지혜 등을 얼마나 많이 배우는지 모른다. 화분 속에 먹다 남은 밥을 가져다 놓았다. 밥을 미끼로 참새들을 불러 모아 벌레와 해충을 잡아먹게 하여 농약 대신으로 활용하는 지혜까지 보여준다.
요양병원 환자는 대부분 70대부터 백 살이 넘은 사람까지 장기입원환자가 대부분이다. 죽을 때까지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입원환자에게 어떤 역할이 있으면 병이 쉽게 악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분은 옥상에서 농작물을 키우며 벌써 5년 이상 큰 후유증 없이 지내고 있다. 어떤 환자의 딸은 뜨개실 재료를 많이 갖다주며 “어머니, 손자 털옷 한 벌 떠주세요.” 한다. 그러면 할머니는 경증의 치매가 있는데도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열심히 뜨개질을 하는 덕분에 신체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까지 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아들은 멸치를 한 소쿠리 가져와 “어머니, 멸치 대가리 떼주세요.”하며 주고 가는 사람도 있다. 할머니는 치매가 있어도 왕년에 수십 년간 해왔던 멸치 대가리 떼는 작업을 하루 종일 하고 밤에는 피로하여 숙면도 취하고 아들 식당에 필요한 멸치 작업도 도우고 서로가 도움을 주는 바람직한 작업을 하고 있다.
고관절 골절로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요양하는 80대 중반의 환자가 있었다. 오후 회진을 하는데 이분이 의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한 1분만 시간 내어 저와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러지요.” 회진을 끝내고 다시 오니 그분은 의사에게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수술 후 통증과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제가 아들 둘과 딸을 두었습니다. 제가 독실한 천주교인이다보니 자녀들과 손주들도 모두 영세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지요. 저는 신앙생활을 50년 이상 했어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 해도 큰 치료가 된다는 것을 이분을 만나고부터 알게 되었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금반지 가운데 링이 있어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묵주라고 하셨다. 그분은 아마 의사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전도를 하는 동안에는 통증을 잊고 있었다. 그분은 목소리가 너무 작아 이야기를 들으려면 귀를 가까이 대어 아주 집중해야만 했다. “선생님. 오늘은 너무 두서가 없어 그런데 며칠 뒤에 정식으로 제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시간이 나십니까?”“모레 오후 회진 마치고 오후 5시쯤 어떻습니까?” “네, 좋습니다. 그때 의사선생님 몇 분 더 모시고 오십시오.” “다른 의사선생님은 어려울 것 같네요. 젊은 사람들은 영상물을 보기 좋아하지 사람 말을 열심히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요.”
이틀 뒤에 가니 그분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 이곳에 입원할 때는 허리와 무릎 통증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입원하고 한 주일쯤 지나고 나니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사람들도 눈에 보였습니다. 주치의였던 선생님의 눈이 보였고, 아픈 곳을 만져주던 선생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마흔셋에 남편을 잃고 아들 둘과 딸을 혼자서 키웠습니다. 학창 시절 저의 첫사랑은 책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놀러 갈 때 나는 항상 서점에 둘러 책을 보았지요. 그래서 전 친구가 없고 책이 친구가 되어주었어요. 책 속에는 사랑도 있고, 이야기할 친구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추억을 하나씩 쌓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저에겐 좋은 추억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여성은 문학소녀였다. 골절 수술에 따른 만성통증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낙심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이 여성이 문학소녀였다는 것에 번쩍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진통제보다 글을 쓰게 하는 것이 통증 완화와 회복에 훨씬 효과적일 것 같았다. “일기를 한번 써 보시지요. 하루에 한 줄이라도 좋으니 일기를 쓰면 통증도 훨씬 완화되고 뇌가 젊어지기 때문에 병도 빨리 나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일주에 한 번씩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며칠 후 회진 때 보니 그 여성이 일기를 열심히 쓰는 것이 보였다. 그전만 해도 이곳저곳 아픈 곳을 표현하는 데 정열을 쏟았는데 일기를 쓰고부터는 통증에 대한 호소가 별로 없어 놀라게 했다.
“선생님, 혹시 읽을 만한 시집을 구할 수 있을까요?” “아, 그래요? 제가 즐겨 읽는 시집이 있는데 드리지요.” 실의에 빠져 있는 환자에게 시집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이번에야 깨닫게 되었다. 시집을 읽고부터 통증이 사라져 진통제를 절반이나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진통제는 위장장애가 있어 구토, 복통, 설사, 식욕부진, 속이 메스꺼운 부작용이 있다. 진통제를 줄이자 식욕이 증가하여 식사를 잘하게 되고 식사를 잘하니 영양공급이 잘되어 신체 상태가 전반적으로 호전되고, 신체상태가 좋아지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병도 빨리 낫는 선순환의 굴레를 타게 되었다. 시집 한 권이 약 다섯 종류보다 더 좋은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의술의 발달과 생활방식의 개선으로 한 세대 전보다 평균수명이 20년이나 늘어났다. 노후준비는 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무엇을 하며 어떻게 노년을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