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鼠竅之烟 夕則蓊鬱室中 木偶可目爛 泥塑可喉嗽 况有血氣者乎 余其闢小牖西向坐 順烟勢而瞬有理 息有機 目不爛 喉不嗽矣 十指皆凍皴 屭贔如古蟾 革晝納袖 夜藏衾 不觸不爬 時其屈伸而斡旋於無事之地 想忘之域 但除害馬者而已 今鮮軟生新𦘺耳
쥐구멍으로 새는 연기가 저녁이면 방안에 가득하여 나무로 만든 장승이라도 눈물이 흐를 지경이고 진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라도 기침을 할 만한데 하물며 혈기가 있는 자이겠는가. 내가 작은 창을 열어 놓고 서쪽으로 앉아서 연기를 피하면 눈도 깜박일 수 있고 숨도 쉴 수 있으며, 눈물도 나지 않고 목구멍에 기침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열 손가락은 모두 얼어 터져 억세기가 오래된 두꺼비 가죽 같다. 낮에는 소매 속에 넣고 밤에는 이불에 감추어 부딪지 않게 하고 긁지도 않으면서 때로 구부리고 펴서 무사하고 신경이 쓰이지 않는 곳에 두어 다만 해마(害馬)를 제거할 뿐이었는데 지금은 곱고 부드럽게 새 살이 났다.
雙眼有風熱 鎖筆硯 囚書帙 誓不見潑明之窻 闔眼深深 安靜扶心 久而眸酸 半開眼凝見純黑之物 久則明漸養而風熱退也 肝屬木陽也 眼屬肝而善回轉流注 則動物也 况邪風捶木 客熱熏肝 眼安得不病 闔者至靜 可以鎭動 黑者水屬 而亦靜象也 老子曰 五色令人目盲 余改之曰 四色令人目盲 黑色令人目明也 夫赤 目賊也
두 눈에 풍열(風熱)이 있어 붓과 벼루를 닫아두고 서책도 넣어놓고 맹세코 밝은 창문은 보지 않고, 깊이 눈을 감고서 안정하게 마음을 가다듬으니, 조금 지나자 눈동자가 시었다. 눈을 반쯤 떠서 새까만 물건을 오래 응시하니 밝은 것이 점점 커지고 풍열이 물러갔다. 간(肝)은 목(木)에 속하니 양(陽)이고, 눈은 간에 속하여 잘 회전(回轉)하고 유주(流注)하니, 움직이는 물건이다. 하물며 사풍(邪風)이 목(木)을 치고 객열(客熱)이 간(肝)을 쬐니 눈에 어떻게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닫는 것은 지극히 고요하여서 움직이는 것을 진정할 수 있고 검은 것은 물에 속하는데 또한 고요한 모양이다. 노자(老子)가 ‘오색(五色)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경이 되게 한다.’ 하였는데 내가 고치기를 ‘네 가지 빛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경이 되게 하고 검은빛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밝아지게 한다.’ 하였다. 붉은 것은 눈의 도적이다.
號雲我 又曰 松穆館主人 字虞裳者曰李彦瑱 譯學而通日本人言語也 庚申生 癸未入日本 翌年廼還 性悟竗 有能詩聲 丙戌元日 尹曾若 獲其詩軸一,日記紙三 使人示我 詩是遊日東者 而雜體四十首
호(號)가 운아(雲我) 또는 송목관주인(松穆館主人)이요, 자(字)는 우상(虞裳)이란 자가 이언진(李彦瑱)이다. 역학(譯學)을 배워 일본말을 한다. 경신년 생인데 계미년에 일본에 가서 이듬해에 돌아왔다.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묘하여 시에 능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병술년 원일(元日)에 윤증약(尹曾若)이 그의 시축(詩軸) 하나와 일기(日記) 세 편을 얻어 사람을 시켜 내게 보였다. 시(詩)는 일본에 놀 때 지은 것인데 잡체(雜體) 40수(首)였다.
余奇之 與曾若小帖曰 菰蒲中往往有奇士 伏而不出 吾輩平生苦癖 搜羅古初之奇書 不知訪現在之騷雅而爲師友 眞睫在眼前而不見者也 虞裳之什 淹博而不濫 幽奇而不癖 超悟而不空 裁制而不短 且筆氣蒼勁 日記三紙 破碎中逸媚橫生 正是人外物 吾但恐悟解深而病不離身 九疇之一曰 或不饒耶 恨不讀其全集也 其稿名歐血草 或曰游戱稿
내가 높이 평가하여 증약에게 작은 쪽지를 적어 보내기를 ‘초야에 가끔 기이한 선비가 묻혀 있으나 은둔하고 나오지 않는다. 우리들이 평생에 옛날의 기이한 글은 지나칠 정도로 찾고 있으나, 현재의 좋은 글을 찾아서 사우(師友)로 삼을 줄은 알지 못하니 참으로 눈썹이 눈 위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상의 시는 깊고 넓으나 넘치지 않고 그윽하고 기이하나 괴벽하지 않고 매우 뛰어나지만 공허하지 않고, 간략하나 짧지 않고 또 붓 기운이 고아하고 굳세다. 일기 세 장은 격식을 벗어난 중에도 뛰어나게 아리따운 태도가 넘쳐 흐르니 정히 보통 사람의 글은 아니다. 나는 다만 글을 너무 깊이 보다가 병이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수(壽)가 넉넉하지 못한가. 그 전집을 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했다. 그 초고(草稿)의 이름은 구혈초(歐血草), 혹은 유희편(遊戱篇)이라 부른다.
李虞裳軸自跋曰 痔卧壹岐島舟中 風聲雨聲水聲蛙吠聲擧集 灯下人間世 牢騷鬱陶至矣 間聞老奴 未曉寱語說園圃中事 情不得不動 而喉不得不癢之矣 吐而筆之 斷爛無序 其言萬里行李之所經者什一 而平生志業之所存什九 一切無摸擬心矜忮心 平濤鼓枻 以取適於道路耳 甲申六月二十八日 試雞毛筆 書于昌原客館 斜陽明窻 蟬聲滿樹
이우상(李虞裳)이 시축(詩軸)의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치질로 일기도(壹岐島) 배 가운데 누워있는데 바람 소리, 비 소리, 물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가 모두 등잔 밑에 모였으니, 인간 세상의 불평과 답답함이 지극하다. 간혹 늙은 종이 자면서 농사일에 대하여 잠꼬대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움직여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붓을 잡고 쓰니 단란(斷爛)하여 차서가 없다.’ 하였다. 만리 동안 행리(行李)의 경과를 말한 것은 10에 1이고 평생 지업(志業)이 담겨 있는 것은 10에 9인데 일체 모방하는 마음도 자랑하고 질투하는 마음도 없다. 오직 잔잔한 물결에 돛대를 두드리며 길에서 유유자적한 것을 취할 뿐이다. 갑신년 6월 28일에 닭털 붓으로 창원(昌原) 객관(客館)에서, “저녁 볕은 창에 밝고 매미 소리 나무에 가득하네.[斜陽明窓 蟬聲滿樹]” 라고 썼다.
其壹陽舟中詩曰 雨脚侵香穗 踈囪午夢初 病多仍奉佛 名斷尙貪書 苽熟生眞蒂 蟲游化小魚 苟能謀五畒 夫釣婦看蔬
일양(壹陽)에서 배를 타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빗발이 향기로운 이삭을 침노하고 / 雨脚侵香穗
성근 창에 낮꿈이 처음이다 / 疏窓午夢初
병이 많아서 부처를 신봉하고 / 病多仍奉佛
이름은 끊어졌으나 오히려 책을 탐한다 / 名斷尙貪書
외가 익었으니 여문 꼭지가 생기고 / 苽熟生眞蒂
벌레가 물에 들어가 작은 고기로 변했다 / 蟲游化小魚
만일 오묘를 경작할 수 있으면 / 苟能謀五畝
남편은 낚시질 아내는 채소를 키우리라 / 夫釣婦看蔬
又曰 自吾能作佛 心悟不師初 墨抹臨摹帖 爐燔剽窃書 貪嗔皆害馬 恩怨已忘魚 道在貧堪樂 終年食但蔬
또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내가 부처가 된 뒤에는 / 自吾能作佛
마음으로 본심을 깨달아 / 心悟不師初
먹으로 모방한 서첩을 지우고 / 墨抹臨摹帖
표절한 글을 화로에 사른다 / 爐燔剽窃書
탐하고 화내는 것이 모두 해가 되고 / 貪嗔皆害馬
은혜와 원망을 이미 잊었다 / 恩怨已忘魚
도는 가난해도 즐기는 데 있으니 / 道在貧堪樂
중년토록 채소만 먹는구나 / 終年食但蔬
其海覽篇祭海神 皆瑰奇譎 特多不能錄 余每嘆東國局於門閥 懷寶而窮餓者多 獨崔簡易少受用文章價 然承文提擧 豈活妻子而足榮簡易哉 屢以大事入明朝 只借銜或工曹禮曹判書 或吏曹參判 徒謾上國人耳 東人那肯呼之以崔判書乎 何異夜天子也 如虞裳者 持被直玉堂 爇紅蠟艸白麻 有何不可哉
그 해람편(海覽篇)․제해신(祭海神)이 모두 괴기(瑰寄)하고 휼특(譎特)하나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내가 동국(東國)에서 문벌에 얽매여 좋은 자질을 가지고도 굶주린 자가 많은 것을 항상 탄식한다. 다만 최간이(崔簡易)만이 조금 문장(文章)의 값을 인정받았으나, 승문제거(承文提擧)가 어찌 처자를 살릴 수 있으며 간이를 영광스럽게 하였겠는가. 여러 번 큰일로 명 나라에 갔으나 다만 이름만으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예조 판서(禮曹判書)․이조 참판(吏曹參判)이라 했으니 한갓 상국(上國) 사람을 속인 헛된 이름인데 동국 사람이 어찌 즐겨 최 판서(崔判書)라고 불렀겠는가. 그러므로 야천자(夜天子)와 무엇이 다른가. 우상(虞裳) 같은 자는 특별히 옥당(玉堂)에 숙직하면서 조서(詔書)를 초(草)한들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는가.
余愚下百無一能 而但人之有才 若己有之 此是百瑕中一瑜耳 不識虞裳之眉目何如 而余熟言之慣論之 且寫其詩文于雜記中 或謂之好事 吾當不少沮也
나는 어리석고 용렬하여 백 가지에 한 가지도 능한 것이 없으나 다만 다른 사람의 재주 있는 것을 내가 가진 것같이 생각하니 이것이 백 가지 결점 중에 한 가지 아름다운 점이다. 우상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익히 말하고 자주 논하며, 또다시 그 시와 문을 잡기(雜記) 가운데에 쓰는 그것을 두고 혹 일 벌이기 좋아한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그치지 않으리라.
人旣一墮于地 無論富貴貧賤 不如意事 十常八九
사람이 한 번 세상에 나면 부귀빈천은 말할 것도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대부분이다.
一動一止 掣者蝟興 眇然之身 前後左右無非肘也 善運肘者 雖千掣萬掣 不置肘於心 亦不爲肘所僕役 時屈時申 各極其宜 則不惟不傷肘 亦不損吾和氣 可自然遊順境中耳 彼祝髮入山者 苦不耐其掣之多也 然刺血鈔經 行脚乞米 反苦不勝 渾身之肘觸處皆掣也 是躁擾爲祟耳 如胡孫爲群蝎所螫 不知或避或除 善計處蝎之方 只煩惱騷屑 左爬右嚼 不少須臾耐了 蝎螫愈肆 斃而後已
한 번 움직이고 그치는 데에 받는 제지가 고슴도치 가시처럼 일어나므로 조그만 몸의 전후 좌우에 얽히지 않은 것이 없다. 얽힌 것을 잘 운용하는 사람은 비록 천번 만번 제지당하여도 얽힌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또한 얽힌 것에 사역되지도 않으면서 때로 굽히고 때로 펴서 각각 그 마땅함을 극진히 하면 그 얽힌 것이 나를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내 화기(和氣)도 손상되지 않아 자연스럽고 순조로운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 저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얽어매는 것에 견디지 못하는 자가 많다. 그런데 피를 뽑아 경문(經文)을 베끼고 걸어다니면서 쌀을 동냥하는 것을 도리어 온몸이 제지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여긴다. 이것은 인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재앙인 것이다. 마치 원숭이가 많은 갈(蝎)에게 쏘이면 갈을 피하며 제거하고 처치하는 방법을 세울 줄은 모르고, 걱정하고 쩔쩔매면서 긁고 깨물기만 하다가 얼마 안 가 더욱 쏘면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마는 것과 같다.
壞緜綻縫 虱必聚族 荒墻古竈 鼠必營宅 狐之妖媚 必於幽林之陰森也 梟之叫嘯 必於黑夜之窅暗也 窟室遼絶 盜賊之藪焉 叢祠昏翳 鬼魅之窩焉 此皆白日昭朗 無幽不燭 則不惟不掩其迹 不能少措其陰昏之計
해어진 솜의 타진 옷솔 틈에는 이가 많이 모이고, 거치른 담 오래된 부엌에는 쥐가 집을 짓는다.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것은 깊숙한 숲의 음삼(陰森)한 곳에서요, 올빼미는 어두운 밤 컴컴한 곳에서 운다. 멀리 떨어진 굴 속에는 도적이 모여들고, 컴컴한 숲 사당에는 귀신과 도깨비가 보금자리를 삼는다. 이러한 것들은 밝은 해가 환하게 비치면 그 자취가 없어질 뿐만 아니고 그 음험한 계교를 부릴 수도 없게 된다.
夫小人眙盱翕張 目語額瞬 處零碎之事 其巧譎如詛 出恒平之語 其隱暗如謎 若夫營財肥己之事 戕物陷人之言 其陰狡尙何言哉 悲矣悲矣 吾之一片神明 舍乾淨通亮地也 何彼乃把作陰譎淫㐫之萃淵藪 凡諸憸夫之攸爲 小則虱鼠之咀齧 其次狐梟之爲不祥 大則盜賊之殘害 鬼魅之魘迷 無不溢現於眉睫之間 吻牙之旁 人之生生之氣 黯然消鑠久矣
소인(小人)은 눈을 희번덕거리고 눈짓과 고개짓으로 보잘것없는 일을 처리할 적에도 교활한 것이 남을 해하는 것 같고, 평상한 말을 할 때도 숨기고 컴컴한 것이 수수께끼와 같다. 재산을 관리하고 몸을 살찌게 하는 일과 물건을 해치고 사람을 헐뜯는 말 속에 숨은 그 음휼한 것을 어찌 말할 수 있으랴. 몹시 서글픈 일이다. 나의 신명(神明)은 깨끗하고 통명한 곳인데 어찌하여 저들은 음휼(陰譎)하고 음흉(淫凶)한 것이 모이는 연수(淵藪)로 삼는가. 무릇 간인(奸人)이 하는 짓은 작게는 이나 쥐같이 깨물고 다음은 여우와 올빼미처럼 상서롭지 못하고 크게는 도적의 잔인한 짓과 귀신이 홀리듯 하는 행동이 눈썹 사이와 입가에 나타나 생기가 점점 소멸된다.
君子則不然 出言也祥吉 處事也明白 表裡通透 無一纖翳如盎春之恬風 沐霜之昭月 又如靑天白日 通衢大道 八囪玲瓏 重門洞開 是之謂淸明在躬 志氣如神 和順積中 英華發外 其蘊畜而發施 不過淵嘿雷聲 尸居龍見而已 是以 人可以陽明爲瑞慶 陰暗爲旤厄也
군자(君子)는 그렇지 않아서 말이 점잖고 처리하는 일이 명백하여 안팎이 같아서 하나도 가린 것이 없다. 그래서 성한 봄의 조용한 바람이나 서리로 씻은 듯한 흰 달과 같다. 또 청천백일 아래 훤히 트인 길과 팔창(八窓)이 영롱한데 중문이 활짝 열린 것과 같다. 이것을 두고 청명한 것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과 같고 화순한 것이 가운데에 쌓이면 영화(英華)가 밖으로 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 온축한 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 침묵하여도 뇌성과 같고 시신처럼 있어도 용처럼 보이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양명한 것을 상서와 경사로 삼고 음암(陰暗)한 것으로 화와 액을 삼는 것이다.
丙戌正月初六日 金雅士希文晦默來訪 希文甲子生 故李進士龜祥門人也 爲人甚醇雅 余曰 天下之可讀者 惟經書耳 不必一時多讀百千遍 惟有暇則讀雖十遍二十遍亦可 而只以盖棺後 方訖讀爲心 其餘子史諸家 何必多讀 然僕稍知讀書之爲可好 而羸弱不克去 可懼可懼
병술년 1월 6일에 김 아사(金雅士) 희문(希文)․회묵(晦黙)이 방문하였다. 희문은 갑자생(甲子生)이다. 그는 이 진사(李進士) 구상(龜祥)의 문인(門人)인데 사람됨이 대단히 순수하고 얌전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하에 읽을 것은 경서뿐이며 반드시 한 번에 백번 천번을 읽을 것이 아니라 여가가 있으면 열번 스무번만 읽어도 좋다. 다만 죽은 뒤에야 그만 읽는다고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 나머지 자사(子史)․제가(諸家)야 반드시 많이 읽을 것이 무엇 있나. 그런데 나는 글을 읽는 것이 좋은 줄은 다소 알고 있으나 몸이 약하여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니 두려운 일이다.” 하였다.
希文曰 兄言甚善 僕亦以經書爲主 而其它作家之文 不過涉獵而止 若欲利益文章 則多不過五十遍爲何如 莊子讀逍遙遊 則其它可推而知也 或有讀莊子千遍者 豈非浪費心力耶
희문이 말하기를, “형의 말이 대단히 좋다. 나도 경서를 기본으로 여기고 기타 작가(作家)의 글은 오직 섭렵하는 정도로 그친다. 만일 문장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하려면 읽는 횟수가 50번을 넘지 않는 것이 어떠한가. 《장자(莊子)》는 소요유(逍遙遊)만 읽으면 그 나머지는 짐작할 수 있다. 혹《장자》를 천 번을 읽는 자가 있다는데 어찌 심력(心力)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余曰 平日胸中 有磈磊氣 時時作無故之悲 而噓唏之極 誦離騷九辨 尤感觸層疊 平心讀論語 其氣必按下 如此者數 始知聖人氣象 千載之下 能点化客氣如此也 僕得效頗深 宗人有年少而慷慨者 與僕夜語 語次到陸秀夫負宋帝入海事 宗人淚忽湧于眼 僕亦惻愴良久 試誦曾點浴乎沂風乎舞雩章畢 二人者始言笑自若也
내가 말하기를, “평소 가슴속에 불평한 기운이 있으면 때때로 까닭 없이 슬픔이 생겨 탄식하는 것이 극도에 달하게 된다. 이때 이소(離騷)와 구변(九辨)을 외면 더욱 감촉(感觸)하는 것이 겹쳐진다. 그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논어(論語)》를 읽으면 그 기운이 반드시 풀어진다. 이처럼 여러 번 한 뒤에야 비로소 성인(聖人)의 기상이 천년 뒤에도 능히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와 같음을 알았으니 효험을 얻은 것이 매우 깊다. 일가 사람 중에 소년으로 강개(慷慨)한 자가 있는데 나와 밤에 이야기하다가 육수부(陸秀夫)가 송 나라 상흥제(祥興帝 남송(南宋)의 마지막 임금 조병(趙昺)을 가리킨다)를 업고 바다에 들어가던 일에 미치자 그가 문득 눈물을 흘리니 나도 또한 슬펐다. 한참 뒤에 증점(曾點)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쐰다는 글을 읽고서야 두 사람이 비로소 얘기하고 웃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하니,
希文曰 兄言何其與余心甚合也 僕亦有此氣 每當蟲吟月白之時 感激者深 去年上北漢山中 讀論語 雪後登東城門 疊嶂峨峨 雪色眩眼 意甚蕭然 忽忽不樂 急歸讀論語 始帖然恬靜矣 兄言果爾也 昔呂伯恭多氣凌厲 病中讀論語 始變化氣質 自古爾爾也
희문이 말하기를, “형의 말이 어찌 그렇게 내 마음과 같은가. 나도 또한 이러한 기상이 있어서 항상 벌레가 울고 달이 밝은 때에는 감회가 깊다. 지난해에 북한산(北漢山)에 올라가서 《논어(論語)》를 읽다가 눈이 내린 뒤에 동쪽 성문에 올랐더니, 첩첩한 산봉우리는 뾰쪽하고 눈빛은 눈을 어지럽게 하였다. 마음이 매우 쓸쓸하여 뜻이 없고 즐겁지 못하므로 급히 돌아와 《논어》를 읽으니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형의 말이 과연 그렇다. 옛날에 여백공(呂伯恭 백공은 여조겸(呂祖謙)의 자(字))은 기운이 지나쳐 매우 억세었으나 병중에 《논어》를 읽다가 비로소 그 기질을 변화하였으니, 예전부터 이러하다.” 하였다.
余曰 顧今亦多豪傑有志之士 而爲科擧之學 所誤委吾身軆於詞章 决吾性命於科擧 旣辛苦得一科後 不但不更繙閱經書 又盡拋棄從前之詞章 因與不識丁字同 豈不痛恨乎 生今之世 不可不爲擧子業 而修人事待天命 此六字甚好 不熱中可也 兄亦能如此否
내가 말하기를, “지금에도 또한 호걸스럽고 뜻이 있는 선비가 있는데 과거(科擧) 공부 때문에 내 몸을 사장(詞章)에 맡기고 내 생명을 과거에 건다. 이미 고생하여 과거에 합격한 뒤에는 다시 경서를 읽지 않을 뿐 아니라 종전의 사장(詞章)도 모두 포기하여 정(丁) 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같이 된다.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닌가. 지금 이 세상에서 과거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으나 사람의 일을 하고 나서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대단히 좋으니 과거에 열중하지 않는 것이 좋다. 형도 또한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하였다.
希文曰 僕之初心 亦於科擧淡然 稍知科擧外有一好事可爲故也 及至父兄勸之 朋友譏之 不得已做擧子文 始初時 意內怏怏不快活 且晝則汩沒於排鋪結搆 其初心庶幾梏亡 夜必懊惱不可言 正如白身之人 初爲人奴僕 服役勞苦 其心恒有係著 不可造次間斷 置心於科字上 今則久而恬然 科慾漸長 至落榜則愁沮 亦有朋友皆屈 而吾獨得之 則可喜之心 豈不哀乎 僕之本心 豈其然哉 今世不知幾豪傑爲科擧所誤 銷泐其良心也 若以大眼目觀之 天子之大臣極蔑如也 今以一小紙題名 頒示於一隅數千里 其所得幾何 此至細碎也 雖然 奈何哉
희문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처음에는 과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과거 외에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조금 알았기 때문이었다. 부형이 권하고 친구들이 비방하므로 어쩔 수 없이 과문(科文)을 지었는데 처음에는 뜻이 앙앙(怏怏)하여 쾌활하지 못했다. 낮에는 과문의 배포(排鋪), 결구(結搆)에 골몰하여 본심이 거의 없어졌다가 밤이 되면 뉘우치는 마음이 생겼다. 마치 백정이 처음 남의 노복이 되어 고생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항상 얽매여 잠시도 과거 공부에 마음을 뗄 수 없었다. 오래된 지금에는 마음이 편안하여지고 과거에 대한 욕심이 점점 일어나 낙방하게 되면 마음이 상하게 된다. 또 친구들은 모두 떨어졌는데 나 혼자 합격하면 기뻐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나의 본심이 어찌 그러하였겠는가. 지금 세상에서 몇 명의 호걸이 과거로 인하여 그 양심이 소멸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큰 안목으로 본다면 천자의 대신도 매우 보잘것없는 것이다. 지금 종이 한 조각에 이름을 써서 몇 천 리 되는 한 구석에 반포하여 보인들 그 소득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은 지극히 세쇄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하였다.
余曰 兄言露出眞情 甚善甚善 大抵吾輩 朝鮮國人也 語音衣服 風俗法制 一從我國 若欲超脫違俗 非妄人則狂夫也 然其意思度量 則中原不可舍也 何必躬到中原然後可也 今經籍莫非中原人所爲 若善讀則吾之意思度量 始不局縛耳
내가 말하기를, “형의 말이 사실을 보여주니 대단히 좋다. 대저 우리들은 조선국 사람이다. 말소리․의복․풍속․법제를 한결같이 우리나라를 따라야지 만일 초탈(超脫)하여 시속을 어기려고 하면 망령되거나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생각과 도량은 중원을 버릴 수 없다. 어찌 몸소 중원에 가서 배워야만 되겠는가. 지금 경적(經籍)은 중원 사람이 만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일 잘 읽는다면 나의 생각과 도량이 비로소 국촉(局促)하고 속박(束縛)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希文曰 僕對兄畢露眞情 豈欺心而亦有何謙辭 顧吾資品 中下之間也 自幼頗有志焉 今吾輩年紀 不可謂不少 而侍父母安過了 可謂無事人 然其中居然經歷二十許歲 顧其案則無一少成 不覺恐懼 此後年漸壯而事愈夥 憂患疾苦 固知其叢萃也 豈不爲與草木同腐哉 若冥頑無知則已 旣稍有知覺而不能充之 是以惴惴也 若有嚴師賢友 與共周旋 庶幾有益 而苦無師友 自就孤陋耳 然自以爲有好善之心 聞有善人 則未嘗不有願一交之心耳 李雅士亨祥 兄知之乎 嘗聞立脚甚固 眞所謂以明道 希文自期待者也 僕嘗欲一見願交 訪其家而不逢耳
희문이 말하기를, “내가 형을 대하여 진정을 모두 드러낸 것이다. 어찌 마음을 속이며 또한 무슨 겸사가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나의 자질은 중등과 하등 사이다. 어려서부터 뜻이 조금 있었고 지금 우리들의 나이가 젊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부모를 모시고 편안히 지내니 걱정 없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 동안 그럭저럭 20여 년을 지냈는데 학업을 돌아보면 하나도 성취한 것이 없으니 나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낀다. 이 뒤에 나이가 점차 많아지고 일이 더욱 많아지면 근심과 고통이 쌓일 것을 알겠다. 어찌 초목과 함께 썩지 않겠는가. 만일 어둡고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다면 할 수 없지마는 이미 조금 지각이 있는데도 넓히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두려워한다. 만일 엄한 스승과 어진 벗이 있어 함께 어울리면 보탬이 있을 것인데 사우(師友)가 없어 고루하게 되니 괴롭다. 그러나 생각건대 착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있어서 착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한번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다. 이 아사(李雅士) 형상(亨祥)을 형은 아는가. 일찍이 들으니 그는 근본(根本) 세우기를 아주 견고하게 한다 하니 참으로 명도(明道 송 나라 성리학자인 정호(程顥)의 호(號))와 희문(希文 송 나라의 명신(名臣)인 범중엄(范仲淹)의 자(字))같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한번 보고 사귀고자 하여 그 집에 갔다가 만나지 못하였다.” 하였다.
余曰 有好善之心者 顧今有幾人 兄有此心 則不害爲賢士也 李雅士亨祥 人物固卓如也 僕愛之重之焉 僕之同宗 而且與僕同辛酉生 故情義尤厚也 字正夫 自幼資品淸明醇眞 旣早孤 且無師友 好讀書 穎悟而識見漸長 今大拓藩籬 博而就約 爲工夫氣象亦好 不僕役於拘縛 而言語動止 無不井井入䂓矩 吉祥雍穆之氣 洋溢於言動之間 僕雖不才 期其爲大儒也 文章亦洒然可誦 然知者知耳 世人豈盡知正夫之深淺也哉 夫此輩人人必嘲笑 僕不暇嘲笑 而畏心先生耳 能掃除輕薄 擺脫煩躁 危坐讀經 求古聖賢心 非大過人 豈如是牢乎 今聚千人於此 擇如此人 則果有之乎無之乎 多乎寡乎 自量吾身 則頹墮不能收拾 終是汩汩俗臼人 只自愧恨之不暇 那敢嘲笑自樹立之奇士乎
내가 말하기를, “착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금 몇 사람이나 있는가. 형은 이 마음이 있으니 어진 선비가 될 만하다. 이 아사(李雅士) 형상(亨祥)은 인물이 참으로 탁월하므로 내가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다. 나와 동종(同宗)이고 같은 신유생(辛酉生)이기 때문에 정의가 더욱 두텁다. 자(字)는 정부(正夫)인데 어려서부터 자품이 청명하고 순진(醇眞)하였으며 일찍 부모를 여의고 또 사우가 없었으나 글 읽기를 좋아했다. 영오(穎悟)하여 점점 식견이 생겨서 크게 범위를 넓혔다. 지금은 박문약례(博文約禮)로 공부를 하고 기상이 또한 좋아서 얽매여 있지 않다. 언어와 동작이 정연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고 길상(吉祥)하고 옹목(雍穆)한 기운이 언동(言動) 사이에 넘친다. 나는 비록 지혜롭지 못하나 그가 큰 선비가 되리라 기대한다. 문장도 또한 속됨을 벗어나 읽을 만하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알지 세상 사람이 어찌 다 정부의 얕고 깊은 것을 알겠는가. 이런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지만 나는 조소할 겨를이 없이 경외(敬畏)스러운 마음이 생긴다. 경박한 것을 없애고 번잡하고 조급한 것을 벗어 던지며 꿇어앉아 경서를 읽어 예전 성현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 아주 남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어찌 이와 같이 견고하겠는가. 지금 천 사람을 여기에 모아놓고 이런 사람을 고른다면 과연 있을까, 없다. 많을까, 적다. 스스로 내 몸을 헤아려 보면 축 늘어져 있는데도 수습하지 못하니 끝내 번잡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 점이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인데 어찌감히 자신을 수립하는 특이한 선비를 조소하겠는가.” 하였다.
希文曰 僕旣喪尊師後 心地忽孤寂 若無所依着 始紬繹南華經及佛書 旣久之 漸到寂滅 一轉眼則萬物皆無耳 父兄親戚甚憂 勸勉道誘 使之更讀經書 以就眞宲 今除拔幾盡 脫危而安 不爲狼狽人 極是多幸
희문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존사(尊師)를 잃은 뒤에 마음이 갑자기 외롭고 쓸쓸해져서 의지할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남화경(南華經)》과 불서(佛書)를 연구하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점점 적멸(寂滅)에 이르러 눈앞의 모든 만물이 무(無)로 보였다. 부형과 친척이 매우 근심하고 권유하여 다시 경서를 읽어서 진실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제는 거의 위험한 곳을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낭패한 사람이 되지 않았으니 극히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余曰 僕亦以經書 爲一生依歸地 然亦往往有此病 或極虛靜 極煩惱 極憤怒 極悲哀時 虛無之想 空蕩蕩橫出來 眼目頓爾殊絶 宇宙間萬品 無非幻妄耳 然此想之變滅 亦斯須間耳 且此想之現發 亦無常 兄則除拔幾盡 是到八九分好境 若僕 不及兄遠矣 兄之尊師 有遺孤而遺文之散落者 或收聚否
내가 말하기를, “나도 또한 일생을 경서에 의지하여 마음을 두고 있으나 역시 가끔 이러한 병통이 있다. 그래서 극히 허정(虛靜)하거나, 극히 번뇌(煩惱)하거나 극히 분노하거나, 극히 슬퍼할 때에는 허무한 생각이 공연히 생긴다. 안목이 돌연히 달라져서 우주 사이에 만 가지 품류가 환롱(幻弄)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생각이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 잠깐이고 또 이 생각이 나타나는 것이 일정하지 않다. 형은 잘못된 것을 거의 다 버렸으니 이것은 팔구분 좋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형을 따르기가 어렵다. 형의 존사에게 아들이 있으니 흩어진 유문(遺文)을 혹 수습해 두었는가.” 하니,
希文曰 先師無一塊肉 寡妻貧欲死 此天理之未知處也 吾師立志堅確 自期於孔子地位 平生文字 信口寫出 不暇刻畫 亦自裂棄不收 僕惜之 收拾於斷爛之餘 藏置若干紙也
희문이 말하기를, “선사(先師)는 혈육이 하나도 없고 과부로 있는 아내도 가난하여 죽을 지경이니 이것은 천리의 알 수 없는 점이다. 우리 스승은 뜻을 세운 것이 견확하여 공자(孔子)같이 되려고 했고 평생에 문자(文字)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써낼 뿐이요 다듬고 규획(規劃)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지은 글을 스스로 찢어버리고 거두지 않았다. 내가 아깝게 생각하여 없어지고 썩은 나머지를 수습하여 약간의 유고를 간직해 두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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