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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구성원이 동시에 행복할 수 있는가?
“모든 구성원이 동시에 행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나리오 세 가지를 먼저 틀로 잡고 시작해보겠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모두가 다른 개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집단”, 두 번째 시나리오는 “모든 구성원이 비슷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 집단”, 세 번째는 “모두가 똑같은 개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집단”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부터 설명해 보겠다. 첫 번째 시나리오와 같은 상황들은 여러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학교, 회사, 직장 등 정말 많은 곳이 있지만, 지금 내가 있는 샨티 학교를 기준으로 설명하겠다.
현재 샨티 학교에는 개성이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에 따라 서로 개성이 비슷해 친한 사람이 있지만, 개성이 완전 정반대여서 서로 사이가 안 좋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나이, 성격, 취향, 마인드, 생각, 말투 등등이 다 다르다. 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별생각 없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샨티 학교엔 이런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꽁꽁 묶어둔 곳이다. 손발이 잘 맞든 안 맞든 그냥 일하라고 던져둔 곳, 이게 샨티 학교의 실태이다. 학생과 교사 모든 구성원을 포함해서 과연 우리가 손발이 잘 맞을까? 아니 애초에 의견부터 서로 잘 맞을까? 최소한 비슷하기라도 할까? 아니 절대 아니다. 내가 비록 샨티에 보조교사로 일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샨티 학교 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손발, 생각, 의견이 잘 맞지 않는다. 학생과 교사, 교사와 교사, 학생과 학생 보통 이 세 가지로 의견충돌이 많이 생기는데,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피곤하며 지치고 힘들다. 어떨 땐 이 사람과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까지도 생긴다. 하지만, 난 이러한 과정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를 하는 데 있어서 생각, 의견충돌 없이 편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이에 따라서 각자의 개성이 있고, 각자의 개성이 달라 의견충돌이 생겼을 때 이를 싫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있다. 내가 이러한 충돌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순 없기 때문이다. 나의 어떠한 점에서 호감을 얻는다면 나야 좋지만, 반대로 비호감을 느낀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에게서 느끼는 비호감마저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안 좋은 어떤 점을 고칠 수 있겠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나의 안 좋은 점 또한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남에게 정이 없는 이상 잘 안 고쳐질 것 같다.
첫 번째 시나리오의 결론은 “불특정 다수의 개성이 한곳에 모이게 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다 다르므로 힘든 상황이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 의견충돌이 자주 일어나므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의견충돌은 당연한 과정이다. 그러나 서로가 이해되지 않는 깊은 괴리감에서 스트레스받고, 행복도는 낮아진다.”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시나리오인 ‘집단 구성원 모두가 비슷한 개성을 가졌다면 어떠할까?’ 완전히 100% 똑같은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슷한 개성이란 최소한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뜻한다. 또 가장 중요한 개성중에 마인드가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게 당연하다.”라는 넓은 아량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게 중요하다. ‘비슷한 개성’과 ‘넓은 아량’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개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집단은 과연 행복할까?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구성원들과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힘들고 지칠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시나리오와 다른 점이 있다면, 힘든 시간보다 함께한 행복한 순간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청년반’처럼 말이다. 누구라고 언급은 안 하겠지만, 각자의 생각 차이 때문에 의견충돌이 있었다. 물론 그 순간만큼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에게 맞추려는 노력했고 그 결과 우리 청년반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여기에서 중요 포인트는 “서로를 이해하며 맞추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이루려면 아까 말했듯이 넓은 아량의 마음가짐 즉,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게 당연하다.”라는 마인드가 정말 중요하다. 이러한 마인드가 있다면, 의견충돌이 일어나도 그것을 부드럽게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은 자동으로 따라오게 돼 있다. 만약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상식선 밖의 행동을 하는 이해 불능의 사람이 있고,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계속하고,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을 때 화가 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정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상’이라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든 것을 품고 갈 수 없다. 그것이 자신한테 있어 가시넝쿨(위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가시에 찔리지 않게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거나, 가시를 폭신한 잔디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시나리오의 결론은 “비슷한 개성과 넓은 아량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집단도 인간이기에 힘든 상황이나 의견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힘든 상황과 의견충돌을 부드럽게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 덕분에 힘든 순간보다 행복한 순간들이 더 많은 것이다.”라고 생각된다.
마지막 세 번째 시나리오인 “모두가 똑같은 개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집단”인 상황에서의 행복도에 관해서 이야기 해보겠다. 모두가 100% 똑같은 개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집단의 구성원 개성에 따라서 이야기의 흐름이 나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기계처럼 성실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원칙주의이며 일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고 극 이타적인 사람”, 두 번째는 “누구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며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그 때문에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일하기를 싫어해 남에게 떠맡겨 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 잘하지만, 일을 시작하기 전의 과정에서 시간을 많이 쓰는 극 이기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틀을 잡겠다. 이제 두 가지 개성의 차이점으로 샨티 학교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투영하여 인해 집단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어떤 일이 생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샨티 학교의 특수성이란, 기숙학교라는 점과 교사, 학생 둘 다 최소한의 각자 맡은 역할을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교사와 학생이 맡은 최소한의 역할이란 학교가 돌아기위한 공식적인 일 또는 사적인 일말이다. 예를 들어 규칙을 지킨다던가 학교 내부를 정리, 청소 한다던가 수업참여를 열심히 하고,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수업을 만드는 것들처럼 말이다. 정말 사소하게는 설거지까지 예시로 들 수 있겠다. 또한 학생들과 소통하며 놀기 좋은 환경까지 샨티 학교의 특수성에 포함시키겠다.
만약 첫 번째 구성원들만 있는 샨티 학교라면 어느 학교보다도 실적이 좋으며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학생들의 성장은 하늘을 찌르고 대안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학교 원탑으로 오르게 될 것 같다. 이에 따라 잘 잡혀진 체계와 뛰어난 선생님들 덕분에 신입생들도 빠르게 적응하며 신입생들이 더 들어오게 되고, 샨티 학교의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돈도 많이 벌며 현재 샨티 학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학교를 하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재미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샨티 학교에 있으면서 정신이 피폐해질 정도로 힘들고 체력적으로 지친다. 하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알아가고 느끼는 재미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재미도 모른 체 오로지 일만 하는 개미가 가득한 샨티 학교는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이타적이라곤 하나 다른 이의 이익만 추구하는 인생은 재미없을 것 같다. “샨티 학교가 잘 돼서 명성도 오르고 돈도 많이 벌 텐데 행복하지 않을까?”라고 의문을 품지만, 돈은 행복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의 범위는 늘어남으로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은 우리의 행복도에 미미한 영향만 끼칠 뿐이다. 돈으로 얻은 행복은 금방 무뎌지기 마련이다. 무뎌지는 데 드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을뿐더러 인간이라면 돈으로 얻은 행복은 쉽게 무뎌진다.
두 번째 구성원인 “누구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며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그 때문에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일하기를 싫어해 남에게 떠맡겨 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 잘하지만, 일을 시작하기 전의 과정에서 시간을 많이 쓰는 극 이기적인 개성”을 가진 구성원들만 있는 샨티 학교는 어떨까? 교사와 학생 둘 다 말이다. 우선 개판이 될 것 같다. 주방, 기숙사, 화장실, 교실, 분리수거장 등등 쓰레기와 먼지로 가득할 것 같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서로가 일하기 싫어하며, 의견논쟁은 일상이 될 것이고, 서로에게 정이 쌓이는 계기가 없을 것 같다. 백번 양보하여 열 명의 사람 중 두 명에게만 두 번째 개성을 가지고 여덟 명의 사람이 첫 번째 개성을 가졌다고 가정해보자, 나머지 여덟 명은 행복하며 평화롭게 생활할 수 있을까? 아니 열 명이 구성원 중 내가 있다면, 한 명만 저런 개성을 가져도 힘들 것 같다. 열 명의 집단이기에 여덟 명이 일을 열심히 해보아도 일하지 않은 두 사람의 몫은 나머지 사람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기 때문이다. 남이 저지른 일을 본인이 수습하는 데 있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한두 번이라면 괜찮겠지만, 계속해서 남에게 일을 떠맡겨 버리는 일이 반복된다면? 인간이란 특성상 스트레스가 쌓여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분노와 논쟁으로만 가득한 학교가 될 것이다.
사실 세 번째 시나리오에서의 첫 번째 개성은 나의 개성에서 몇 가지 더 추가하고 극단적으로 과장한 개성이고, 두 번째 개성은 내가 생각한 “일 같이하기 싫은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낸 극단적인 개성이다. 애초에 정말 샨티 학교 구성원이 두 번째와 같은 개성을 가지고 있다면 샨티 학교는 이미 폐교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난 모두가 100% 똑같은 개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집단이 생길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개성이 완전히 똑같은 사람 찾기도 쉽지 않은데 똑같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여럿 모여 집단을 만들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지 않아도 사회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개성의 일부분인 생각과 의견이 비슷하여 만든 집단이나 기관이 있을 순 있지만, 백 퍼센트 똑같은 개성을 가진 구성원들로 만들어진 집단은 사회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말에 확신하는 이유는 윗글에서 충분히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다 다르므로 개성이 같을 순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모두의 개성 다 같아 버리면 서로에게서 얻을 수 있는 지식 혹은 지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전이 없어 비효율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시나리오의 결론은 “극 이타적 개성과 극 이기적 개성처럼 모두가 똑같은 개성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극 이타적이어도 극 이기적이어도 서로 약간의 차이점과 서로간의 소통을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며 이야기하고 얻는 즐거움과 행복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와 개성이 똑같은 사람과 이야기한다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아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사실 세 번째 시나리오의 일부분은 우리 샨티 학교의 이야기이다. 일을 열심히 하며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몇 명, 일을 열심히 안 하고 본인의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사람이 몇 명으로 샨티 학교에서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저 두 예시는 내가 과장하고 극단적으로 했지만, 실제로 있는 일들이다. 물론 샨티 학교에서 배우며 많이 나아진 아이들도 있지만, 아직 아이들의 경험이 충분치 않아서 생기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아직 교사로써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경험이 충분치 않은 아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샨티라는 공간에 교사와 학생이 아닌, 같이 성장하는 사람 으로써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의 TMI는 여기까지다.
“모든 구성원이 동시에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결론은 ‘두 번째 시나리오’가 가장 행복도가 높은 집단인 것 같다. 한 번 더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인간이기에 다 다르다. 각자의 인생을 살다가 ‘샨티 학교’라는 명분으로 모이게 된 사람들이기에 서로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우린 싸우기도 하고 같이 울기도 하며 웃고 떠들고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다른 점에서 비호감을 느껴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숙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말에는 우리의 의식이 완벽하게 담겨 있는가?
“우리의 말에는 우리의 의식이 완벽하게 담겨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의식’이란 무엇인지 정의해 보아야 하는데, 사실 의식이란 내 딴에 있어서 매우 어려우면서도 내가 전혀 알고 있지 않은 전문 분야에서 다루는 주제라 신경과학자인 ‘크리스토프 코흐’의 말을 빌리며, 이 글을 시작해보겠다.
코흐는 신경과학 분야에서 의식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이론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정보통합 이론’ 다른 하나는 ‘라이벌 이론’이다. ‘코흐’의 저서 ‘생명 그 자체의 감각’에 따르면 ‘의식이란 뇌가 지각하는 모든 경험, 그 자체와 같다.’라고 주장한다. 가령 오늘 커피를 마신다고 했을 때 우리의 의식은 과거에 커피를 마시면서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커피를 마시면서 들었던 음악”, 다른 사람에게는 “전에 마셨던 커피의 원두 맛”,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애인과 마셨던 커피 종류” 등등 커피를 마시면서 있었던 기억을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의도치 않게 커피에 관련해 느끼고, 보고, 듣고, 생각했던 것, 범위를 더 넓히면 주변 환경까지도 기억하게 된다. 간단하고 쉽게 설명하자면, ‘의식이란? 어떤 일을 할 당시의 모든 정보를 뇌가 받아들이면서 나타나는 총체적이고, 복잡한 작용이라고’ 코흐는 설명했다. 그리고 이런 정보들이 서로 인과관계를 통해 연결될 수 있는 원리가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정보통합 이론’이다.
‘정보통합 이론’에 대해서 알아봤으니 다음 이론인 ‘라이벌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라이벌 이론’은 ‘전역 작업공간 이론(Global Workspace Theory)’이라고도 불리는데, ‘라이벌 이론’에 따르면 ‘수많은 정보가 우리 뇌 속에 있지만, 우리가 24시간 그 정보들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뇌 속에 일종의 무대가 있고, 수많은 정보 가운데 특정 정보가 그 무대에 오르면 인간이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라고 표현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갑작스럽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순간’처럼 말이다. “의식하지 않은 나의 정보는 나의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지만, 이 의문은 답변해가면서 스스로 생각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라이벌 이론’으로 돌아와 내 생각엔 ‘파블로프의 개’ 역시도 어쩌면 ‘라이벌 이론’에 포함되는 일종의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강아지에게 종소리라는 특정 정보를 청각으로 듣게 하고, 종소리라는 정보가 ‘일종의 무대’에 오르게 된다면, 강아지가 침을 흘리는 것이 마치 ‘라이벌 이론’과 같은 결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파블로스의 개’는 이번 주제와 상관없는 ‘조건반응’이라는 것을 알아낸 실험이었지만, ‘라이벌 이론’과 ‘파블로스의 개’가 말하고자 하는 결이 비슷하다고 느껴져서 한번 이야기해 보았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정보통합 이론’, ‘라이벌 이론’을 토대로 “우리의 말에는 우리의 의식이 완벽하게 담겨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해보겠다. 사실 난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는 우리에 의식이 담겨있다.”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대화를 예시로 들자면, A와 B가 놀고 있는 사이에 배고프다고 느낀 A가 B에게 “B야 나 배고파 우리 뭐 먹으러 갈래?”라고 한다면 내가 생각했을 때 A의 말에서 A의 의식이 없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A의 신체가 배고픔을 느꼈고, 이를 전달받은 의식이 ‘배고파, 먹을 것을 찾아야 해’라는 메시지를 말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말할 때 의식이 완벽하게 담겨있는가?’ 즉 100% 의식이 담겨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위 질문에 답하기 위해 또 하나의 기준인 ‘의식의 완벽함’에 대해 기준을 세워보겠다.
‘의식의 완벽함’의 대한 내가 생각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할 때 무엇에 관한 지식을 반드시 100% 알고 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100%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정보통합 이론’, ‘라이벌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항상 지식 100%를 의식하기 못하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식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의식의 100%를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머리를 다쳐 뇌가 손상되었거나, 뇌가 제기능을 못 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말에 의식을 100% 담고 있는 건가? 이들 또한 의식의 100%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은 개성과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A의 의식, B의 의식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A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은 A의 개성이라고 생각되고 B 역시 A와 같은 이유로 B의 의식도 B만의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머리를 다치고 뇌가 손상되어 본인이 말하는 것에 의식이 100% 담기지 않았다고 한들 이것 또한 이 사람들의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이 90%, 80%, 70% 아니면 1%의 의식만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성이 자신의 경험과 주변 환경에 따라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코흐’가 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한 ‘의식이란 뇌가 지각하는 모든 경험, 그 자체와 같다.’라는 말은 내가 주장하는 개성과 비슷한 이유로 의식, 개성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의식의 완벽’에 대한 내가 생각한 기준의 결론은 어디까지나 의식이 개성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질문의 답변은 “우리의 말에는 우리의 의식이 항상 완벽하게 담겨 있다”라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스스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가?
‘왜 우리는 스스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가?’ ‘스스로를 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말이지만, 좀 더 깊이 생각했을 때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아는 것’이 ‘스스로를 알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질문은 변형시켜 “왜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점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가?”로 질문을 바꾸겠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하고 많은 일을 시도,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일을 실행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설계도처럼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또는 어떻게 풀어갈지 구상하게 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본인의 능력이 어디까지 닿는지 안 닿는지를 알아야 구상을 시작하는데 있어 본인의 능력에 맞게 일을 해결 할 수 있다. 내가 뭘 알고 있고, 뭘 모르고 있는지, 어떤 것을 알려면 어떤 노력에 얼마의 시간을 투자할지를 아는 것이 ‘메타인지’라고 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내가 언제부터 공부하면 되는지, 어떤 과목을 더 공부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메타인지’다. 공부를 잘해서 ‘메타인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메타인지’를 가지고 있어서 공부를 잘하는 거다. ‘메타인지’가 탑재되어있는 사람은 똑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본인의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장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부족한 단점을 보수하거나 장점의 특기를 살리는 등 선택지가 자연스럽게 뒤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을 볼 때도 높은 성적을 얻은 학생과 낮은 성적을 얻은 학생의 공부법에서 서로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2017년 EBS 제작팀은 수능 상위 0.1% 고등학생들 공부법을 조사해본 결과, 일반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사교육 의존도는 생각보다 낮았다. 0.1% 학생들은 습관적으로 학원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의 힘으로 공부하다 모르는 게 있거나 혹은 본인의 힘으로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면, 그때 학원에 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도움 받는다. 다시 말해 도움이 필요 없으면 학원에 가지 않고, 그 시간을 개인 공부 시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3시간은 개인 공부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99.9% 일반 학생들은 학원에 가지 않고, 개인 공부 시간을 가지 않아서 0.1%의 학생들 보다 성적이 낮게 나오는 건가?” 생각이 들지만, 나도 공교육을 배우고 일반 학교에서 시간으로 보낸 사람으로서 일반 학교 학생들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공부에 시간을 얼마나 많이 투자하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본인이 무엇을 알고, 모른 것을 모르는 학생이 10시간을 공부에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인지하는 학생이 공부하는 3시간을 따라잡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공부를 잘해서 ‘메타인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 ‘메타인지’를 가지고 있어서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하지만 ‘메타인지’ 능력은 갖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메타인지’를 위해선 많은 노력과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하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객관화’이다. 객관화란 ‘자기에게 직접 관련되는 사항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거나 생각하는 일’을 뜻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A와 B가 있고, ‘각자의 방이 너무 더러워 방 청소를 깨끗이 해야 한다.’ 가정했을 때 A의 기준에서 자신의 방은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청소를 안 하는 반면, B의 기준에서 자신의 방이 더럽다 인정한 뒤 청소를 열심히 했다. 이런 상황처럼 A, B 둘 다 ‘메타인지’ 능력을 키울 그릇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객관화’ 능력이 낮다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그릇이 있는 게 의미가 없어진다.
자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왜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점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해보겠다. 먼저 이 질문에 약간의 위화감을 느껴서 반문하자면, “그럼 자신의 한계점을 누가 알아줘?”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생각했을 때 인생, 즉 삶은 자신을 알아가며 나만의 삶을 통해 나만의 방식을 개척해 나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면 남에게 “나 좀 알아주세요!”라며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 의무, 삶, 인생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들을 남에게 떠넘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들은 주로 아이, 아기처럼 신체, 생각 등의 성장이 일반 성인보다 현저히 덜된 인간이 보이는 행동이다. 따라서 아이, 아기와 반대로 신체와 생각이 충분히 성장한 성인은 본인 책임져야 할 것을 명확하게 알고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몇 가지 예외 상황도 있지만, 성인이 된 사람은 사회 또는 집단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 사회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의무 등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한계점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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