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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바로 알기 11 - 칼빈주의 5대 강령과 아르미니우스주의 5대 강령: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작성자백선영|작성시간24.09.18|조회수90목록댓글 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https://youtu.be/har5KBNpGrs?list=PL4P6SBDceLgHrmxALXoBoM1VulmdlmP4h
칼빈주의 5대 강령과 아르미니우스주의 5대 강령: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_칼빈주의 바로 알기 11 :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개혁신학 , 설교, 강해(2021.11.05)
칼빈주의 바로 알기 11
칼빈주의 5대 강령과 아르미니우스주의 5대 강령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지금까지 10회에 걸쳐서 칼빈주의 바로 알기 강해, 칼빈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명백한 사실들: 역사를 통해 두 종류의 교회 운동, 자유 교회와 국가 교회
(*) 국가 교회: AD 313년의 기독교 공인, 정치와 종교의 혼합, 국가 교회 시작, 어거스틴 자유의지 박탈, 무천년주의, 전적타락(인간 자유 박탈), 무조건적인 예정 등 국가 교회 기초 확립, 루터와 칼빈 시대까지 국가 교회 이어져 내려옴.
종교개혁 당시 모든 나라가 국가 교회 시행,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없음
자유 교회: 국가 교회는 신약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반박하며 신약 성경에 있는 지역 교회 즉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눈에 드러나게 되었다.
국가 교회를 주장하고 옹호하던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회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들은 사람들
국가와 교회의 분리, 유아 세례 반대,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침례, 그런 성도들만의 교회 회원권
여러 종류의 이름
루터, 칼빈, 츠빙글리의 시대에는 재침례교도들(메노나이트와 침례교도), 귀 뒤로 침레교인들
이들이 피를 흘리면서 지키려 했던 것이 바로 영혼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약 교회 국가 교회(천주교, 칼빈, 츠빙글리)가 빼앗으려 했던 것이 영혼의 자유, 종교의 자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주에서 회중 교회 형성, 여전히 신정 저치 국가 교회
1638년 로저 윌리암스 최초의 침례교회, 침례교인들 투쟁, 드디어 미국 헌법, 수정 조항 1조, 토머스
제퍼슨 댄버리 침례교회에 보내는 편지
교회와 국가 사이에 분리의 벽((A Wall of Separation between Church & State)을 세워야 한다. 즉 국가가 국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한 종교의 자유
오늘 < >,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칼빈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국가 교회 주의자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다.
이를 통헤 아르미니우스 주의 추종자 등 처형, 박해하는 과정,
그러나 하나님은 칼빈주의 교회가 아니라 아르미니우스 주의 교회를 사용해서 세상을 변화시킴
네덜란드의 상황
칼빈(1509-1564),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함
칼빈주의 5대 강령: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9일 네덜란드의 도르트 종교 회의에서 만들어짐도르트 회의는 국가가 요청한 회의이다.
즉 국가 교회를 하던 네덜란드 정부가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이다.
AD 313년 콘스탄틴 이후 국가의 수장 혹은 정부의 대표가 공회라는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교리를 정하고 신조를 정하는 이상한 행태가 국가 교회 안에 존재하였고 이와 동일한 일이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다.
네덜란드는 개혁 교회 국가들 중에서 가장 늦게 개신교 국가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1581년에 국가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
네덜란드 신앙 투쟁의 역사는 국가 독립 투쟁의 역사
당시 세상, (*) 스페인 지배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스페인의 종교인 천주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엄청난 핍박
당시 네덜란드:
의미: (*) 라인강 하구에 있던 저지대 지역, 17개 지방을 한 군주가 통치함
(*) 지금의 베네룩스 3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북쪽은 화란족, 폴란드어, 중앙은 플레밍족 플래미쉬어, 남쪽은 왈룬족 프랑스어
지리, 문화의 차이: 교회와 시민 관할권이 다름
당시 군주는 카를 5세: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일부를 다스리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아버지로부터 네덜란드, 어머니로부터 스페인을 상속받음
카를 5세는 네덜란드를 하나의 주권국으로 통일시킴
가장 큰 문제: 인종과 언어 17개 지방, 교회 관할권(어떤 교구 독일 지역 관할, 어떤 교구 룩셈부르크관할
카를 5세: 1521년 보름스에서 루터를 만남,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 반대, 재침례교도들 반대 선언
17개 지방에 종교 재판소 설치, 종교 생활과 관련해서 1524-1550년까지 수많은 금지 규정 발표(금지 서적 지정 등), 이것들은 모두 루터파와 재침례교도들 탄압 조치, 헤이그, 암스테르담 등에서 화형 등 악랄한 일 진행, “카톨릭을 믿어라.”
카를 5세 이후 그의 아들 필립 1555년 스페인과 네덜란드 상속, 그는 우둔한 사람,
1589년에 스페인으로 이주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음,
자기의 이복 여동생 마가렛을 섭정으로 세우고 스페인 군대를 주둔시킴,
종교 재판소를 늘림
이때 오렌지의 윌리암 공이 등장함, 네덜란드 전역에서 전쟁, 스페인의 침략
드디어 1581년 7월 26일, 오렌지 공 새로운 개신교 국가 세움
나라가 두 쪽으로 분리됨
북쪽의 7지방은 칼빈주의자들의 개신교 국가(네덜란드),
남쪽 10지방은 카톨릭 국가(벨기에)
왜 네덜란드는 칼빈주의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1581년 네덜란드 국가 설립, 종교 개혁 당시 국가 교회 시대, 모든 나라가 국교를 정해야만 한다.
1. 네덜란드의 국민감정: 스페인은 절대 안 된다. 스페인의 카톨릭은 절대 안 된다.
그러면 개신교가 선택지 , 루터파나 칼빈파냐? 여전히 국가 교회
재침례교회 같은 국교 불인정 교회는 안 됨
루터교는 근접한 독일 국교,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2. 당시 칼빈주의자들, 용병을 끌어들여서라도 국가를 구하려 함, 종전 이후 경제 회복에 앞장섬,
칼빈의 제네바 독재와는 달리 장로회주의에 의한 대표자 중심의 위임 정치
3. 그래서 네덜란드는 당회라는 교회 법원이 모든 회중을 다스리는 장로회주의 선택
1561년 벨직(벨기에) 신앙고백
여하튼 네덜란드는 1578년에 장로교를 국교로 정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장로교를 좋아하는 국가
4. 국가는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장로교 국가 교회를 하려고 하는데 개혁 교회 신학자들 사이에 분란이 생김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라틴어 개명, 1560-1609)
(*) 나무 위키, 칼빈 사망(1564) 4년 전에 네덜란드에서 출생함
(*)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는 네덜란드의 목사이자 신학자로 아르
미니우스주의의 창시자이다.
아르미니우스는 1560년 네덜란드 아우데바터르(Oudewater)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그의 홀어머니는 어린 아르미니우스를 개종한 가톨릭 신부 에밀리우스 양자로
맡겼고, 그 신부가 죽은 후에는 마르부르크의 한 교수가 그를 루터파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스페인 사람들이 아우데바터르를 점령했다. 그곳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기를 거부하자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 그중에는 아르미니우스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있었
다. 이러한 정치적 편협성이 준 상처는 그가 후에 종교적 편협성에 반항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로테르담의 개혁교회 목사 베르치우스(Petrus Bertius)의 집에 머무르고 베르치우스 목사는 그를
레이던 대학교로 보냈다. 이 대학교는 1575년 오렌지 공 윌리엄이 설립하였다. 여기서 아르미니우스는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암스테르담 교회의 후원자들로부터 목사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으로 제네바 대학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주의 주창자인 베자(Théodore de Bèze)와 다른 스승들
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그는 이때에 극단적인 칼뱅주의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는 자가 되었다. 그는
제네바 교육을 받은 뒤에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훌륭한 설교가이자 천부적인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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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가였으며 또한 겸손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특히 강해 설교로 유명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1589년 즉 개신교 국가가 된 지 8년 뒤에 당시 학식 있는 성도(목사가 아님)인 디릭 코른헤르트(Dirck
Coornhert, 1522-1590)가 베자의 신적 작정(이중예정론) 이론을 논박하는 학술과 강연을 하고
저서를 발행했는데 이는 신학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 이중 에정
코른헤르트는 법률가였고 합리주의적 인물로 이중예정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코른헤르트는 베자가 말한 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죄의 원인이시라면 하나님은 바로 죄의 창시자가 된다는 것에 관해 논의했
다.
코른헤르트가 매우 뛰어나게 그 논의를 이끌어가자 칼빈주의의 전체 체제와 정치적 안정성 자체가 침해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정부 내에서 생겨나게 되었고 개혁파 사람들은 신학적 견해에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반박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네바에서 돌아온젊은 신학자 알미니우스가 적합해 보였는지 그에게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는 글을 써 주도록 부탁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우선 성경 자체, 로마서에서 나타나는 예정에 관한 진지한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의 교리의 중심지가 되는 로마서 9장에 관심을 집중했다.
로마서에 관하여 연구를 진행할수록아르미니우스는 바울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베자가 주장한 예정론을 논박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개인 구원은 항상 신적 작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이루어졌고 여기에 하나님의 의가 놓여 있었다. 즉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든 데 있지 무조건적으로 선택받는 데 있지 않다.
그럼에도 아르미니우스는 예정에 대한 자신의 믿음(칼빈주의 믿음)을 단념하지 않고 다른 시야에서 성경적인 예정을 보았다. 그는 초대 교회 교부들의 책을 읽고 학문적으로 검토를 하여 어떤 훌륭한 교부도 베자의 견해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는 것과 칼빈의 이중 특별 예정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받아들여진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어거스틴도 펠라기우스의 논쟁 전에는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이러한 연구 결과로 인해 코른헤르트의 주장을 이단이라고 논박할 수 없었다.
그는 이 후 로마서를 강해할 때에 타락 전 예정설에 강조를 두지 않고 로마서의 참되고 풍성한 의미를 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권위가 사람들의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앙 신조가 아닌 성경이 단 하나의 정통적인 근거가 되기를 원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신적 작정(이중 예정)에 관한 타락 전 예정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
1. 이중 예정설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2. 과거 1500년간, 그것은 책임 있는 기독교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지도 않았었고 전체 교회에 의해 수용되지도 않았었다.
3. 그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
4. 그것은 창조되지 않은 사람에 관해 무조건 선택에 의거한 작정을 만든다.
“만약 베자와 고마루스가 가르친 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를 짓게 하는 원인으로 만든다면 하나님은 곧 죄의 창시자이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 전 예정설이 결코 이런 결론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오류를 비난하는 데 전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자기의 성경 강해에 대한 입장을 변호할 기회가 공적으로 주어질 때마다 건전하고 차분한 학식으로 매번의 논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아무도 성경 해석을 기초로 하여 그를 논박할 수 없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으로 인하여 교회의 분쟁이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 아파했으며 공식적인 공청회를 원했지만 그의 생전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신학적으로 성숙한 후에 그는 레이던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었고 거기서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의 극단적 칼빈주의(Hyper Calvinism)와 부딪쳤다. - 아르미니우스 스승
신약 교수인 고마루스는 아르미니우스에게 성경적 권위에 근거해서 도전했고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성경적 해석을 교회의 신조들에 종속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아르미니우스는 기독교의 권위가 사람들의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한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 네덜란드의 교회 지도자들은 아르미니우스가 성경을 최종적 권위로 여기며 설교하는 데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칼빈주의적 신조를 실제적인 최종 권위로 만들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국가 교회, 정권 유지
아르미니우스는 이러한 신학적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49세의 나이로 1609년에 세상을 떠났다.
예정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의 원리들
1. 예정 교리는 1차적으로 논리적이거나 철학적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적이어야 한다. 이 점은 후에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원리가 되었다.
2. 예정은 반드시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작정이 아닌 그리스도가 구원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3. 구원은 반드시 복음적이어야 한다. 즉 사람은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다.
4.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이론은 다 비성경적이다.
아르미니우스 5대 강령 - 죽을 때까지 칼빈주의자이지만 예지 예정을 주장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한 점: 그는 예정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유 의지와 함께 일하는 예지 예정을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한 인간의 구원은 그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의 기회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 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반대한 것이다.
(*) 칼빈주의 TULIP
(*) 아르미니우스 5대 강령
1. Natural Inability(자연적 무능력) :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남아 있다. 믿을 수 있다.
2. Conditional Election(조건적 선택) :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그들만 자기 백성으로 선택/예정하신다. 여기서 복음을 믿는 것이 선택의 조건이 된다.
3. Unlimited Atonement(보편 속죄)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차별 없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4. Resistible Grace(거부할 수 있는 은총) :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총은 이를 믿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믿지 않기로 거부할 수도 있다.
5.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 : 신자는 인내로써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신자를 붙드신다. - 구원을 잃을 수 있다.
아르미니우스 사후에 그의 추종자들은 유능한 학자이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s, 1583-1643)가 교수직을 계승하고 스승을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논쟁을 계속했다.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을 축출하려고 했다. 이 문제는 신학적 문제를 넘어 정치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은 당시 궁정 목사로 있던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을 위해 상의했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항론(Remonstrance)’을 제출했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해 줄 것을 홀란드 정부에 요구했다(1610년).
그래서 이들은 항의자들(Remonstrants),R을 D대신 집어 넣어 강한 항의자로 표현)이라 불렸다. 항의: Remonstrance , Remonstrants
이들은 아르미니우스가 가르친 것을 기초로 ‘항론 5개조’를 작성하여 네덜란드 교회의 교리적 입장에 대한 공식표현인 벨직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와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
(Heidelberg Catechism, 1563)를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에 대항하여 칼빈주의자들이 답한 것이 도르트 총회에서 결정된 TULIP이라고 불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즉 (*) TULIP은 네덜란드 산이다
도르트 종교 회의(총회, Synod)
(*) 도르트(도르트레히트) 총회는 1618년 11월 13일에 시작이 된 뒤 7개월 동안 무려 154번의 회의를 계속한 후에 1619년 5월 9일에 끝났다.
회의의 공식적인 구성원들로는 102명의 네덜란드 정통 칼빈주의자들과 외국에서 온 27명의 칼빈주의 대표자들이 있었다. 회의를 위해서 네덜란드 정부는 유럽의 여러 나라 교회에 대표 파송을 요청했다.
잉글랜드,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 유럽의 모든 개혁교회 대표들을 초청했다.
그런데 프랑스 교회는 당시 로마 가톨릭적인 정부 때문에 대표단을 보내지 못했다. 그리고 회의는 라틴어로 진행했다.
참석한 102명의 대표자들 가운데 18명은 칼빈주의 정부가 임명한 위원이었고 아르미니우스파 대표의 참석은 처음부터 봉쇄되었다.
13명의 아르미니우스파 대표는 회의가 시작된 지 여러 주일 후에 죄인의 신분으로 소환되어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받았다. 의장이나 서기 등 모두 엄격한 칼빈주의자로 모든 결의는 일방적이었다.
교회 사가(史家) 필립 샤프의 말대로 “그리하여 아르미니우스파의 운명은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 회의는 그야말로 사람에 의하여 예정된 칼빈주의 예정론의 예정대로 된 승리였다.
6개월간이나 계속된 종교회의는 154번의 회의를 거치며 만장일치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 교리를 공식적인 칼빈주의의 입장으로 선포하였고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단으로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여기에서 이단으로 선포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사상이 이단이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 도르트 회의가 끝난 후 관용파의 지도자인 올덴바네펠트(Johan van Oldenbarnevelt, 1547-1619, 아르미니우스 주의를 지지한 정치가)는 1619년 5월 참수형에 처해졌고, 도르트 신경에 서명을 거부한 100여명의 목사들은 아르미니우스로 간주되어 국외로 추방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아르미니우스에게 종교적 관용이 주어진 때는 1625년 이후였다.
칼빈주의 5대 강령
도르트 회의에서 결정된 칼빈주의는 극단적 칼빈주의(Hyper Calvinism) 5대 강령이다.
약 100년 이후에 태어난 웨슬리는(1703-1791) 이러한 극단적 칼빈주의를 비판하여 이중예정론을 거부했다.
아르미니안의 추종자 일부는 펠라기우스 주의(Pelagian rationalism)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만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인간을 고양하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신학적 자유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인간이 죄로 묶여 있고 그래서 구세주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교육과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함으로 인간을 곤경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복음적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항의자들(Remonstrants)의 5가지 주장에 기초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고 모든 사람은 그러한 사랑을 영접해야 할 개인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아르미니우스 주의와 펠라기우스 주의는 원천적으로 다른 것이다.
존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 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우리 곧 복음적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게 원죄를 인정하고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가르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으며 신자들도 영원한 믿음의 파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은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믿는다.
근본적으로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칼빈주의의 도덕 무용론, 율법폐기론(Antinomian)적 경향에 대한 윤리적 반동이었다.
만약 인간들의 운명이 모든 면이 예정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면 거룩함(성결)에 대한 윤리적 요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 강조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영향을 받거나 지지하는 사람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와 그의 형제 찰스 웨슬리가 있으며, 미국의 복음전도자 D.L 무디와 빌리 그레이엄을 들 수 있다.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오순절교회(순복음)는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주스의 영향을 받은 교파이다.
오해
아르미우스 주의는 칼빈주의를 지지하는 국내의 보수적인 교단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곤 한다.
사실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칼빈주의 신학을 반대하는 신학이기도 하고 또 사람의 행위(구원 유지)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이 영향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생기는 발판이 되기도 하기에 보수주의자들은 간혹 아르미니우스주의가 곧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일반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그저 칼빈주의 신학과 같지 않은 견해이고 신앙생활에 사람의 행실과 노력을 조금 더 중요시 여길 뿐이고(구원 유지) 자유주의 신학과 같이 성경의 권위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신학이 아니다.
아르미니우스 주의 신학은 행위를 조금 더 중요시 여길 뿐 믿음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또한 아르미니우스주의 = 자유주의라는 인식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교단들은 전부 진보적이라는 인식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성결교의 예성교단 등은 보수적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칼빈주의를 지지한다 해서 무조건 보수인 것도 아니다.
국내 장로교단 중 심히 자유주의 성향을 띤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있다.
또한 성공회도 꽤나 진보적인 교단이며 천주교와 비슷한 분위기도 있는 교단이지만 성향은 온건한 칼빈주의 성향이다.
칼빈주의자가 아니면 아르미니우스 주의자인가?
신광은 목사, (*)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이 지금까지 그토록 치열하게 지속되어 온 이유는 두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 모두가 둘 중 하나 아니면 안 된다는 원칙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칼뱅주의 아니면 아르미니우스주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1. 광대한 기독교 신앙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단 둘로 압축하려는 것은 무모한 시도이다.
그러한 이분법적 태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양분하려는 자기중심주의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만일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철저히 약화시키는 태도의 극단을 1이라 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약화시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강조하는 태도의 극단을 10이라고 해 보자.
이런 스펙트럼에서 1은 이슬람 숙명론쯤 될 것이고, 10은 무신론적 인본주의쯤될 것이다.
내가 볼 때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 스펙트럼에서 2~9 사이 어디쯤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다시 기독교 신앙의 범주 내에서 위의 스펙트럼을 다시 짜 보자. 그렇다면 1은 하이퍼칼뱅주의쯤 될것이고, 10은 펠라기우스주의쯤 될 것이다. 이 스펙트럼 상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아마도 2부터 9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인데, 필자 생각에 요한 웨슬리 같은 복음적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대충 3~4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않을까 싶다.
성경적 입장
(*)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첫 번째 4개 강령은 성경적이다.
다섯 번째는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성경대로 정확하게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을 비교해 보면 '조삼모사'다.
왜냐하면 칼뱅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지만 당신이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당신이 구원받은 건 확실하지만 그 구원이 영원히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둘 다 안심할 수 있는 체계는 아닌 것이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의 역사성
어거스틴 전까지는 100% 아르미니안 주의
어기스틴 이후부터 칼빈까지는 100% 칼빈주의, 어거스틴 주의
칼빈 사후, 아르미니우스 논쟁, 많은 사람들 희생되고 팝박 당함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시대정신: 개인 인권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개인이 자신의 운명과 신앙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하는 자율적 인간관, 평등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출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정신이 점차 아르미니우스주의가 근대인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대다수 종교 개혁 이후 다양한 교파,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나사렛, 오순절 등 전 세계 기독교회의 다수가 아르미니우스 주의(예지예정을 따름)
왜?
극단적 칼빈주의 5대 강령, 설교, 선교 등 불필요
웨슬리의 주장,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받는다. 디엘무디 등
지금도 대다수 장로교 목사들, 교육은 칼빈주의,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는 만인구원설
결론
칼빈주의 5대 강령은 국가 혹은 국가 교회가 강제로 정한 교리이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국가 교회가 아니다. 자유 교회이다.
그 결과: 아르미니우스 추종자들 처형, 추방
양심의 자유 박탈
그러나 하나님은 칼빈주의가 아니라 성경에 훨씬 더 가까운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을 통해 세사에 복으을 선포하심
우리는 킬반주의자도 아니다. 왜? 5개가 다 성경과 다르므로
우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아니다. 4개는 옳고 1개는 틀리므로
칼빈, 도르트 회의 등의 국가 교회, 양심의 자유 부정
이런 것은 신약 성경의 신약 교회가 아니다.
다음 시간 칼빈의 가르침이 요약된 제네바 바이블과 개혁 신학의 문제
정동수 목사님 프로필
- 학 력 -
인하대학교 기계공학 학사(1982)
캐나다 뉴브런스윅 주립대 기계공학 석사(1984)
미국 매리랜드 주립대 기계공학 박사(1988)
미국 펜사콜라 신학대학원 석사(2001)
목사 안수(2001)
- 경 력 -
현,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1992-현재)현, 사랑침례교회 담임목사
http://www.cbck.org/html/ 사랑침례교회
http://www.keepbible.com/ 킵바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