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사업체를 잘 운영하시던 부모님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늘 생태적인 삶을 동경하셨습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후쿠오카 마사노부 선생의 자연농법을 주야로 연구하셨는데, 정신세계사에서 출간한 인도 요기들의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저에게 선물로 주셨으니, 어찌보면 애초부터 자본주의적 세속의 흐름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환경 속에서 자라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당신들의 사업의 정점에서,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땅끝 해남의 심산유곡으로 92년의 봄날 갑자기 귀농을 하셨습니다. 열살 먹은 저는 선택의 여지없이 부모님과 더불어 서울을 떠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시골살이에 적응을 해야 했는데, 그게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별보고 달보며 농사를 열심히 지었습니다.
제도교육에 대한 부모님의 반감이 너무 크셔서 저를 아예 학교에 안보내실 줄 알았습니다만, 그래도 다행히(?) 초등&중등교육은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모양새로 마무리 하게 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이 워낙 욕심이 없으시다보니,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라난 저는 너무도 욕심이 많아서 심산유곡에서도 죽어라 공부를 하였고, 어쩌다보니, 과학고에 들어갔습니다.
과학고를 가보니, 그곳은 제가 와야할 곳이 아님을 즉각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재'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저 뭐든 열심히 하는 인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동기들과 선배들이 맨날 무슨 올림피아드 입상 운운할 때, 저는 법정스님과 류시화 시인의 책에 빠져서, 이상한 학교에서 더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일종의 도인이 되어버린) 제 부모님의 삶을 따라 저도 깊은 산속에서 숲을 가꾸며 살겠노라는 이상한 발원을 하여,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지방대학의 산림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하는 '미친'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방대학 산림학과에 가보니, 그곳은 제가 와야할 곳이 아님을 즉각 알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무슨 '뜻'을 두고 오는 곳이 애초에 아니었던 것이지요. 공무원 시험합격을 위해 모인 일종의 '학원'같은 곳이었습니다. 동기들과 선배들이 맨날 지방직 7급 특채 운운하고 교수님들이 맨날 기술고시 운운하실 할 때, 저는 생태인류학과 공동체주의, 유영모&함석헌 선생의 말과 글에 빠져서, 고립된 전공분야 안에서 더 고립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그간의 귀농살이 경영에 실패, 크게 파산을 해버린) 제 부모님의 삶을 따라서, 집도 절도 없이 길 위를 떠도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한국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제도권 밖의 공부길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기회도 얻었고, 그 세월이 십여년이 지나니, 이 나라 저 나라를 일종의 잡상인으로 멀리 떠도는 삶을 살아보게도 되었습니다. 그 어느 곳에도 몸과 마음을 안착시켜보지 못한 처지의 저에게, 세상의 모든 교회와 절, 성당과 모스크가 제 집이나 다름없었고, 그 모든 '성소'들은 늘 이방인인 저를 환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여기입니다.
제가 선택한 게 하나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모든 일이 다 오롯이 제 선택인 것 같기도 합니다. 늘 문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늘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항상 제 관점에서 저를 정의하고 갈무리하여, 여태껏 제대로 흘러 왔는지, 앞으로는 제대로 흘러갈 수 있을지를 확인하려는 강박에 평생을 시달려 왔는데, <깨수>에 와서부터는 그런 욕망을 내려놓았습니다. 저는 무정형의 무엇이고, X인 동시에, Y일 수도 있으며, Z가 아니어도 좋은 그 무엇입니다. 저는 쉼없이 흘러가는 인연으로서의 물질이며, 지금 여기 이렇게 뭉쳐져 있으므로 곧 흩어질 에너지의 흔적입니다. 그 무엇이어도 좋고, 그 무엇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더는 제 삶을, 아니, '저'라는 존재를 제 깜냥으로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를 온전히 포기하며, 그 포기의 힘을 빌려, 돈오를 선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 혹은, 최초의 '시도', 그것이 바로 돈오선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