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헌은 후은김선생신담록(後隱金先生新膽錄) 제1권 가운데 실려 있는 의병항쟁에 관한 기사전문이다. 후은 김용구(金容球)는 학문에 조예가 깊고 기록해 둔 문헌도 많았으나, 정미(丁未)년 8월에 의병을 일으키자 왜적이 그 집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 버렸기 때문에, 후은이 손수 쓴 문헌으로는 오직 이것만이 남아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책은 1907년 정미(丁未)8월 8일 기삼연(奇參衍)과 같이 나라의 원수 갚을 것을 천지신명께 맹서하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해인 무신(戊申) 4월 13일까지 약 8개월간에 걸친 창의일기로서 이 기간에 영광(靈光)·함평(咸平) 등 10여 고을에 걸쳐 산야와 벽촌을 종횡하면서 적과 혈투를 전개하던 이야기가 그날그날 쓴 이 일기에 소상하게 실려 있다.
정미 8월 11일에 동지 박용근(朴溶根)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자 수백 인의 자원병이 따르게 되었는데, 그날 밤으로 그들을 무장시켜 가지고 다음 날 영광읍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적병과 접전하였으나 불행히 병기가 좋지 못하여 적에게 패한 이야기가 적혀 있고, 또 큰 일을 시작해 놓고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여러 곳으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를 찾아 다녔는데, 담양(潭陽)으로 고녹천(高鹿川)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에 가서 탐문한즉 그가 지리산 상봉 토굴사(土窟寺)에 있다 하므로 곧 석벽과 밀림을 헤치고 간신히 사찰 앞에 도달하여 성명을 고하고 토적 구국의 방략을 의논하고 행동을 개시하여, 8월 26일 화개시(花開市)에서 왜적 10여 명을 포살하던 이야기와, 또 며칠 뒤 연곡촌(蓮谷村)에서 적병과 접전 끝에 10여 명을 포살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그 다음에 쌍계사(雙溪寺)에서 왜적 40명과 문수사(文殊寺)에서 10여 명을 무찔러 도주케 한 사실이며, 또 고창(高敞)읍과 담양 추월산(秋月山)에서 천여 명의 적과 싸워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사실이 적혀 있다. 무신 2월 8일 그의 휘하 이백경(李伯卿)이 영광에서 적과 싸워 수십 명을 죽이고 이백경 자신은 장렬한 최후를 마치던 이야기는, 후은이 통솔하는 의병진의 눈부신 전공을 알려 주는 중요한 기록이며, 이 해 4월 11일 무장선운사(茂長禪雲寺)에 유진하면서 적을 유도하여 수십 명의 적을 포살했으나, 마지막 4월 17일 싸움에서 패하여 후은이 부상을 당하여 정신까지 혼미해지므로 군권을 포대 박도경(朴道京)에게 맡기고 눈물로써 장병들과 작별하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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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소일기(義所日記)
이 불초한 몸은 천품이 어둡고 어리석으며 타고난 성질이 망녕되고 조급한데다가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적다.
이에 스스로 몸을 버리려 하여 감히 사람이라는 무리에 끼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타고난 옳은 성품이 아주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으니 어떻게 하면 이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세상에 나자 송사(松沙) 선생에게 가서 공부하여 학문을 하는 요점을 얻어 들어서 중국과 오랑캐와의 구분과, 옳고 그른 분별을 알게 되고, 이끌어 도와주시고 일깨워 주시는 은혜를 두터이 입어 못난 몸에도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의 바탕이 둔하고 흐려서 항상 글과 무술(武術)이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는 마음 간절했다.
마침 국가의 일이 어려운 때를 당해서 곤전(坤殿)께서 화를 당하신 후로 안에 있는 간사한 무리와 밖에 있는 적들이 창자처럼 서로 연해서 국가의 형세 금시에 기울어지게 되었으나,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이 못난 몸이 한 가지도 능한 것이 없이 한갓 걱정하고 근심할 뿐이다.
을사(乙巳) 10월에 이르러 역신(逆臣)들이 적들의 앞에서 도깨비처럼 서둘러 5개 조약을 억지로 맺게 하고, 휴지(休紙) 1장으로 3천리 강토를 팔아 던지며, 빈주먹으로 5백 년 정권(政權)과 종사(宗社)와 토지를 빼앗아 가게 하여 생령(生靈)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은 천년 이래 동방에 없던 큰 변란이다.
마음 아프고 한스러워 잠자고 밥 먹는 것이 달지 않아 짐승처럼 사는 것이 차라리 사람으로서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여 여러번 자살하려 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이미 죽기로써 마음을 먹었으면 한 놈의 원수와 적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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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죽는 것이 한결 죽어서 유익함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병오(丙午) 첫 봄부터 고을 안에 사는 지사(志士)들을 찾아보고 국가를 회복할 계획을 꾀해 보았다.
그러나 맨 손, 빈주먹으로 일이 몹시 어렵기만 하다.
이때 성재기옹(省齋奇翁)이 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하는 데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내가 그를 찾아가고 옹(翁)이 나에게 온 것이 여러 달이 되었다.
이에 동지들을 규합해서 일심계(一心契)를 창설하여 매달마다 서로 모여서 깊이 상의하고 꾀하여 방법을 계획해 왔다.
이리하여 정미(丁未) 7월 그믐에 이르렀다. 이에 우리는 8월 8일을 기해서 영광(靈光)에서 거사하기로 비로소 약정이 체결되었다.
정미(丁未) 8월 8일.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씨와 함께 나라의 원수 갚기를 꾀하고 거의(擧義)할 것을 동맹(同盟)하여 하늘과 땅에 고하고 피를 마셔 맹서했다.
8월 11일. 족숙(族叔) 형식(炯植)씨와 선비 박용근(朴溶根)·오태윤(吳泰允)·이영화(李永華)·정희면(鄭熙冕)·이종택(李鍾宅) 등 여러 사람과 의병(義兵)을 모집하니 좇기를 원하는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밤중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병기를 가진 자가 백 명이나 모여 들었다.
12일. 오후에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영광읍(靈光邑) 성 안에 이르러 적병과 접전하여 날이 저물 때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기계가 날카롭지 못하여 크게 패하여 군사를 물려본 군 황량티(黃良峙)에 이르러 잤다.
13일. 새벽에 떠나서 삼서면(森西面) 대곡리(大谷里)(지금은 장성(長城)에 소속됨.) 나씨(羅氏)집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고 바로 그 면 수산리(首山里)에 사는 일가 규삼(圭三)의 집에 이르렀다.
낮이 지난 후 다시 떠나서 장성(長城) 서삼면(西三面) 금동(金洞)에 사는 서윤원(徐允元)의 집에 이르러 성재(省齋)의 소식을 물은즉, 요새 진원면(珍原面) 고산리(高山里)에 갔다고 한다.
이에 우리는 군사를 장성(長城)에 머물러 둔 채 이영화(李永華)·권협(權挾)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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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 성재(省齋)를 기다려 함께 오라 하였다.
14일. 바로 진원면(珍原面) 고산리(高山里)에 이르러 성재(省齋)의 간 곳을 물으니 주인 기 소년(奇少年)이 말하기를,
“여기 오시지 않았읍니다.”
한다.
이에 기 소년과 함께 그곳을 떠나서 담양(潭陽) 중동(重洞)에 이르러 또 성재(省齋)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도 역시
“오시지 않았읍니다.”
한다.
우리는 또 송사(松沙) 선생을 찾았으나 선생도 역시 출타했다 한다.
하는 수 없어 기 소년과 나는 그곳에서 잤다.
15일. 아침 밥을 먹은 뒤에 그곳을 떠나 담양(潭陽) 상백동(桑栢洞)에 사는 김원일(金元一)의 집에 이르러 이틀 밤을 잤다.
17일. 창평(昌平) 교촌(校村) 고사홍(高士洪)의 집에 가서 잤다.
18일. 담양(潭陽) 제심리(堤深里)에 이르러 녹천(鹿泉) 고광순(高光洵)씨의 창의(倡義)한 일을 탐문했으나, 그 지방 인사(人士)들이 그의 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는 교촌(校村)으로 돌아와 잤다.
19일. 도로 상백동(桑栢洞)으로 돌아와서 잤다.
20일. 그곳을 떠나 옥과(玉果) 청단리(靑丹里)에 사는 제갈성범(諸葛聖範)의 집에 이르러 무후(武侯)의 사당을 참배하니 무후(武侯)의 출사표(出師表) 중에 있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라에 바쳐 죽은 뒤에 그친다.’ 그 한 말이 내 마음을 찌른다.
21일. 곡성(谷城) 산마을에 사는 박(朴)씨의 집에 이르러 이틀 동안을 묵었다.
23일. 그곳을 떠나 남정(南亭) 김(金)씨의 집에 이르러 이틀을 쉬었다.
25일. 나는 구례(求禮) 화암사(華岩寺)에 이르러 자세히 고녹천(高鹿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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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義兵)이 있는 곳을 탐지해 보니 지금 지리산(智異山) 상봉(上峰) 토굴사(土窟寺)에 있다고 한다.
나는 돌을 기어오르고 숲 속을 뚫고 나가 간신이 절 앞에 당도했다. 성명을 통하려고 명함을 들여보냈더니 녹천(鹿泉)은 바로 문 밖까지 나와서 손을 잡고 맞아 드려 상좌(上座)에 앉힌다.
녹천(鹿泉)은 말한다.
“그대가 영암(靈岩) 김용구(金容救)인가. 그대와 우리 2집은 세의(世誼)가 있을 뿐 아니라, 또 사돈의 의까지 맺었는데, 지금에야 겨우 만나니 그 기쁨 이루 말할 수 없도다. 그러나 2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나는 지금 군사는 패했고, 그대도 역시 패군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잔 말인가.”
나는 웃고 말한다.
“한 번 이기고 한 번 패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인데 무슨 큰 관계가 있겠읍니까. 지금의 사세가 저들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오니 자취를 감추고 군사를 모아 완비하기를 도모하면서 겁내는 마음들을 권장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올시다.”
녹천(鹿泉)이 또 말한다.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보아도 30~40명에 지나지 못하고 오래 산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또 군사를 모으는 계교도 되지 않기로, 불가불 내일은 군사를 데리고 산 밖으로 나갈 생각인데 그대 마음엔 어떠한가.”
나는 대답한다.
“지금의 군사 일은 어른께서 주장하시어 생각대로 처리하시옵소서.”
말을 마치고 진중(陣中)의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선봉(先鋒)은 김대수(金大秀), 중군(中軍)은 장봉래(張奉來), 주기감(主器監) 김연(金淵)으로서 이 3사람은 서울 사람이다.
또 후군(後軍) 진사(進士) 고광수(高光秀)는 남원(南原) 사람인데 모두 몸집이 크고 건장하니 가위 사람을 얻었다고 하겠다.
26일. 행군(行軍)해서 화개시(花開市)에 이르러 왜병 10여 명을 쏘아 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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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연곡사(蓮谷寺)로 들어가 유진(留陣)했다.
27일. 군사를 옮겨 칠불사(七佛寺)에 옮겨 유진(留陣)했다.
28일. 토왜(土倭) 수 명을 쏘아 죽이고 연거푸 6일 동안을 머물렀다.
9월 4일. 행군(行軍)해서 또 연곡사(蓮谷寺)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5일. 김대수(金大秀)·장봉래(張奉來)·김연(金淵) 3사람이 주장(主將)과 합의치 않아 작별하고 갔다.
6일. 왜병 20여 명이 바로 연곡촌(蓮谷村)으로 들어와 의병(義兵)이 있는 곳을 물어 보므로, 우리는 곧 군사 50여 명을 내어 바로 연곡촌(蓮谷村)을 향해서 서로 싸워 적병 10여 명을 쏘아 죽이니 남은 왜병들은 모두 도망했다.
7일. 연곡촌(蓮谷村)에 머물러 군오(軍伍)를 정리했다.
9일. 적병 40여 명이 와서 쌍계사(雙溪寺)에 둔치고 결전하기를 청한다.
10일. 녹천(鹿泉)이 군사를 내어 치려고 하자 나는 말한다.
“우리 군사가 비록 백여 명이라고는 하지만 본래 훈련이 없고 또 병기가 날카롭지 못한데 저 적들은 병기가 정리(精利)하니 실로 당하기 어려운즉 차라리 자주자주 진을 옮기는 이만 못할 것입니다. 그런즉 담양(潭陽)·장성(長城)·고창(高敞)·영광(靈光) 등지로부터 남북쪽 각군을 순회해서 원근에 있는 지사와 힘센 군사들이 바람을 따르듯 좇아 마음을 합쳐 힘을 같이 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녹천(鹿泉)이 말한다.
“우리 군사는 이미 백여 명이 넘고 저놈들은 40~50명에 지나지 않으니 족히 두려울 것이 없은즉 그대는 의심치 말고 앞으로 하는 일이나 보도록 하라.”
이 말을 듣고 그 밤으로 바로 무장(茂長)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 살이치(殺夷峙)를 넘어 신동(新洞) 김준화(金準化)의 집에 들어가 의병의 간 곳을 물으니 서태서(徐泰瑞)의 말은 과연 헛말이었다.
의병은 지금 군사를 모집해 가지고 문수사(文殊寺)로 갔다는 것이다.
이에 나는 그 집에 머물러 잤다.
16일. 이른 아침에 행장을 재촉하여 문수사(文殊寺)로 들어가니 과연 성재(省齋)가 군사 30명을 거느리고 와서 묵고 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면서 말하는 것이 태연했다.
서로 군무(軍務)를 협의하고 부오(部伍)를 나누어 정하고 군율(軍律)을 정제하고 있노라니 1사람이 인사를 청한다.
이에 성명을 통하고 보니 그는 바로 참봉(叅奉) 김준(金準)이다.
준(準)은 말한다.
“어제 저녁에 내가 시험 삼아 군중의 형세를 보니 볼 만한 것이 없었소. 그러나 나는 진외(陣外)의 사람이므로 비록 허술한 데가 있어서 아직 입밖에 말을 내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이요. 그러나 이제 대형(大兄)이 군사를 정돈하는 제도를 보니 정히 내 뜻과 같은즉 가히 함께 군중 일을 의논할 만하오.”
이리하여 그와 나는 서로 마음을 허락했다.
이날 밤 왜적 수10 명이 포를 쏘면서 오니 군중이 크게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나는 이에 칼을 빼 들고 군사를 신칙하여 일제히 사격하게 하니 왜병의 사상(死傷)한 자가 10여 명이나 되고 남은 왜병은 모두 도망했다.
17일. 새벽에 군사를 옮겨 장성(長城) 통안촌(通安村)에 이르러 김감찰(金監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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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잤다.
이튿날 새벽녘에 행군(行軍)해서 현내 지금 삼계면(森溪面) 등지에 이르러 여러 병졸들과 23일에 삼계면(森溪面) 수각(水閣) 앞 산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
18일. 바로 떠나서 나주(羅州) 갈마지(渴馬池)에 사는 참봉(叅奉) 김준(金準)의 집에 이르러 밤새도록 군무(軍務)를 토의하고 23일에 수각(水閣) 앞산에서 모이기로 했다.
19일. 함평(咸平) 나산(羅山) 안덕함(安德咸)의 집에 이르러 조용히 수작하고 떠났다. 바로 가서 그 면(面) 유덕산(有德山)에 사는 참봉(叅奉) 김찬문(金贊文)의 집에 이르러 서로 뜻하는 바 일을 의논했다. 이 2사람은 일찍부터 의병에 따를 뜻이 있던 사람들이다.
뒷 약속을 남기고 작별한 뒤에 이문리(二門里)에 사는 선비 홍(洪)씨의 집에 이르러 잤다.
20일. 이곳을 떠나서 함평(咸平) 해보면(海保面) 하구밀(下九密)에 사는 일가 사람 성서(聖瑞)의 집에 가서 자면서 밤새 뜻하는 일을 의논했다.
21일. 그곳을 떠나서 장성(長城) 동화면(東化面) 정(丁)씨의 집에 이르러 잤다.
22일. 장성(長城) 삼계면(森溪面) 산적동(山廸洞)에 이르러 잤다.
23일. 오후에 약속했던 군병들이 모두 도착했다. 이날 밤 군사를 거느리고 수각(水閣) 앞 산에 이르러 진을 치고 군오(軍伍)를 정비(整備)했다.
24일. 부오(部伍)를 나누어 정했다.
성재(省齋)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를 삼고 나를 추대하여 도통령(都統領)을 삼았다. 참봉(叅奉) 김준(金準)으로 선봉(先鋒)을 삼고, 진사(進士) 이철형(李哲衡)으로 중군(中軍)을 삼고, 진사(進士) 이남규(李南奎)로 후군(後軍)을 삼고, 김태수(金泰洙)로 호군(犒軍)을 삼고, 김익중(金翼中)으로 참모(叅謀)를 삼고, 김봉수(金鳳樹)로 서기(書記) 겸 참모(叅謀)를 삼고, 이영화(李永華)로 주기감(主器監)을 삼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재목에 따라 그 책임을 정하니 수 백명 군중이 환호(歡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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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뛴다.
이에 노래를 지어 부른다.
“우리 2천만 예의민족(禮義民族)이 어이 왜적에게 굴하며, 우리 3천리 금수강산을 어이 왜적에게 주랴. 아아! 우리 동포 형제들이여!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수적(讎賊)을 멸하고, 우리 성상(聖上) 모시세. 만만세.”
한바탕 쾌하게 즐기고 나서 행군(行軍)하여 주곡(舟谷) 참봉(叅奉) 이은성(李殷聲)의 집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25일. 무장(茂長) 원송면(元松面) 암티(岩峙)에 사는 승지(承旨) 강대식(姜大湜)의 집에 이르렀다.
승지(承旨)는 소와 술을 가져다가 장병들에게 먹인다.
오후에 행군(行軍)해서 바로 무장(茂長) 읍내(邑內)에 다달아 적과 서로 싸워서 적의 괴수를 쏘아 죽이니 다머지 적들은 모두 놀라고 겁내어 달아났다.
이에 그들의 병기와 모든 기구를 빼앗았다.
군수(郡守) 서상경(徐相璟)과 함께 시사(時事)를 의논하는데 내가 하는 말을 모두 들어 준다.
크게 군사들을 먹이고 나서 그날 밤 행군(行軍)하여 10리쯤 되는 석곡면(石谷面) 덕산(德山)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26일. 행군(行軍)하여 바로 고창(高敞) 읍내(邑內)에 이르러 적병과 서로 싸워 적병 20여 명을 죽이니 나머지 적은 도망했다.
이에 그 병장 기계를 수확하고 인하여 성중에 머물렀다.
그러나 왜병과 친한 자가 비밀히 소식을 왜적에게 통했기 때문에 불의에 새벽녘에 적병 50여 명이 우리 군사가 술 취해서 자는 틈을 타서 성에 들어와 포를 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은 창황 전도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혹은 도망하고 혹은 숨으니 형세가 어찌할 수 없이 되었다.
이에 성재(省齋).김준(金準)·김임중(金翼中)·이남규(李南奎)·유인수(柳寅壽)로 더불어 함께 서서 남은 군사 수10 명을 호령해서 싸움을 감독한 지 2,3시간 만에 적추(賊酋)의 죽은 자가 여러 10명이 되었다.
그러나 참모(叅謀) 김익중(金翼中)이 적의 탄환을 맞고 죽었으며 군인 1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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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죽었다.
이때 적은 모두 도망했고 우리 군사도 역시 퇴병해 돌아오니 뒤에 따르는 자가 겨우 18명에 지나지 않는다.
27일. 행군(行軍)해서 고창(高敞) 고수면(古水面) 연동(蓮洞)에서 아침밥을 먹고 신동(新洞) 김준화(金準化)의 집에서 낮을 지낸 다음 바로 떠나서 장성(長城) 황룡면(黃龍面) 계동(桂洞)에 있는 일가 사람의 집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28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황룡면(黃龍面) 통안리(通安里) 봉동(蜂洞)에 있는 일가 사람의 집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29일. 풍편에 들으니 후군장(後軍將) 함평(咸平) 진사(進士) 이남규(李南奎)가 고창(高敞) 용두촌(龍頭村)에서 유숙하다가 적에게 붙들려 갔다 한다.
이에 사람을 보내서 탐문한즉 과연 헛말이 아니었다. 분하고 한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30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동화면(東化面) 시량동(始良洞)에 이르러 선조(先祖) 죽헌부군(竹軒府君) 묘소에 참배하고 인하여 재사(齋舍)에서 잤다.
10월 1일. 행군(行軍)하여 삽티(鍤峙)에 이르러 진사(進士) 이철형(李哲衡)과 만나서 군사를 합쳤다.
기경호(奇京鎬)의 집에서 점심밥을 먹고 도로 시량동(始良洞) 재사(齋舍)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2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황룡면(黃龍面) 황룡리(黃龍里)에 이르러 성재(省齋)를 만났다.
둘이서는 적을 파할 계책을 세우면서 거기에서 유진(留陣)했다.
3일. 행군(行軍)해서 동화면(東化面) 연산동(蓮山洞)에 이르러 낮을 지냈다.
고창(高敞) 싸움에서 흩어져 간 포(炮)군이 와서 모이는 자가 수10 명이나 된다.
그들에게서 적의 정세를 탐지해 보고 받고 그곳에서 유진(留陣)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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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군사를 돌이켜 장성(長城) 괴정리(槐亭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에 있는 적의 형세를 정탐시켰다.
5일. 괴정리(槐亭里)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탐하러 간 군사들이 오지 않아서 답답하게 해를 보냈다.
6일. 행군(行軍)해서 봉동(蜂洞)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적의 정세를 정탐시켰다.
7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서삼면(西三面) 세포리(細浦里)에 있는 박(朴)씨 집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비로소 정탐 갔던 보고를 듣고 인하여 그 집에서 유숙했다.
이 집 주인은 곧 우리집 외척(外戚)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각 진의 형세를 잘 얻어 들을 수 있었다.
8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용정리(龍亭里)에 이르러 고창(高敞)에 있는 적의 정세를 탐지해 듣고 서씨(徐氏)의 묘재(墓齋)에서 군사를 머물렀다.
9일. 그곳에서 가까운 평암리(萍岩里)로 진을 옮겼다.
10일. 그대로 평암(萍岩)에 머무르면서 군무(軍務)를 정비하고 적의 형세를 정탐했다.
11일. 밤에 행군(行軍)하여 동화면(東化面) 시랑동(始良洞) 재사(齋舍)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이곳에서 함평(咸平) 등지에 있는 적의 정세를 탐지시켰다.
12일. 밤에 행군(行軍)하여 장성(長城) 탑정리(塔亭里)에 가서 유진(留陣)했다.
13일. 그곳에서 머무르면서 광주(光州)의 정보를 탐문했다.
14일. 서삼면(西三面) 증암리(甑岩里)로 진을 옮겼다.
15일. 그곳에서 머무르면서 고창(高敞)의 정보를 탐문했다.
16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삼서면(森西面) 수산(首山)에 이르러 유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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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행진(行陣)하여 함평(咸平) 월야면(月也面) 외티(外峙)에 이르러 나주(羅州)에 있는 적의 실정을 탐지해 보니 고막원(古幕院)으로 물러갔다 한다.
18일. 외티(外峙)에 머무르고 있는데 갑자기 산 밖에 불꽃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간다.
영광(靈光) 소식을 탐지해 보니 왜추(倭酋)가 수백 명 군중을 거느리고 바로 우리 집으로 가서 불을 놓고 촌사람들을 잡아 몹시 심하게 때렸으며, 가구와 집기(什器)를 모두 불 속에 던져 버렸다 한다.
또 국사(菊史) 정희면(鄭熙冕)을 사로잡아서 광주(光州) 감옥으로 보냈다 한다.
나는 마음이 놀라고 분하고 답답한 마음이 가슴에 막힌다.
탄식하기를,
“지사(志士)가 국가에 보답하는 날에 사사로운 원수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하고 칼을 짚고 일어서면서 말한다.
“위로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니 그대들은 칼을 빼어 들고 나서라.”
이리하여 나는 말을 채찍질하여 군무(軍務)를 정비했다.
19일. 장성(長城) 삼서면(森西面) 원당리(元當里)에 진을 옮겼다.
20일. 행군(行軍)해서 함평(咸平) 능동(陵洞)에 이르러 영광(靈光) 본가의 소식을 탐지했다.
왜추(倭酋)가 우리 가족들을 위협해서 온 식구가 옷을 벗고 의지할 곳 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해원(李海元)이 내 식구들을 찾아 친히 보호하고 있다 한다.
21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삼계면(森溪面) 합천(合川)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22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삼서면(森西面) 관동(冠洞)에 이르러 광주(光州) 대티(大峙)에 있는 적의 정세를 들어 보니 그날 밤에 수산(首山)으로 진을 옮겼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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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장성(長城) 용암리(龍岩里)에 진을 옮겼다.
24일. 장성(長城) 조양리(朝陽里)에 진을 옮겼다.
25일. 행군(行軍)하여 장성(長城) 백양사(百羊寺)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적의 정세를 탐지했으나 흡족지 못했다.
이에 그곳에서 4,5일을 묵었다.
28일. 집 자식 기봉(起鳳)이 와서 나를 보고 또 기성재(奇省齋)께 뵈니 성재(省齋)는 말하기를,
“그대가 비록 형제가 있다고 하지만 부자가 모두 군중에 있는 것도 오히려 옳지 못한 일이거늘 하물며 그대가 외아들인데 될 일인가.”
이렇게 타이르고 나자 나도 또한 그 지각없음을 책망했다.
그믐날.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북하면(北下面) 대기리(大機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1월 1일. 장성(長城) 삼서면(森西面) 대곡리(大谷里)로 진을 옮기고 집 자식 기봉(起鳳)을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영광(靈光)에 있는 적의 정세를 탐지했다.
2일. 수각리(水閣里)에 군사를 옮겨 유진(留陣)했다.
3일. 행군해서 영광(靈光) 진량면 산하티(山下峙)에 이르러 저녁밥을 먹은 후 해시(亥時)쯤 되어 성재(省齋)와 이철형(李哲衡)·김태수(金泰洙)·친수(親隨) 김봉수(金鳳洙)·좌익(左翼) 김창복(金昌卜)·우익(右翼) 허경화(許敬化) 등과 함께 행군(行軍)해서 바로 법성포(法聖浦)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왜적과 접전해서 왜추(倭酋) 10여 명을 쏘아 죽이고 왜적이 사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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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호에 불을 놓았다.
여기에서 그들의 기계를 모두 빼앗고 저들의 재물을 추호도 범하지 않고 모두 불 속에 던졌다.
이튿날 새벽 인시(寅時)에 행군(行軍)해서 무장(茂長) 원송면(元松面) 축동(築洞)에 이르러 조금 쉬었다.
4일. 행군(行軍)해서 영광(靈光) 대마면(大馬面) 성산리(城山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5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월평(月坪)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고 오후에 장성(長城) 오동촌(梧桐村)에 이르러 적과 접전해서 적병 20여 명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는 바로 장성(長城) 단전리(丹田里)로 진을 옮겼다.
6일. 행군(行軍)해서 백양사(白羊寺)에 이르러 머물렀다.
7일. 탐문하니 적병이 습격해 온다고 한다.
이에 미리 양쪽 골짜기 수림 속에 포병(炮兵)을 매복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적병이 곧은길로 쫓아온다. 좌우에 매복했던 복병이 일제히 협공(挾攻)하여 적병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적병은 이에 물러갔다.
바로 입암산성(笠岩山城)으로 진을 옮기고 적의 형세를 탐정했다.
8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서삼면(西三面) 임곡(林谷)에 이르러 진을 멈추었다.
9일.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다내동(多內洞)에 이르러 성재(省齋)와 진을 합쳤다.
함께 5, 6일을 묵으면서 군무(軍務)를 서로 의논하고 적의 정세도 탐문했다.
14일. 행군(行軍)하여 장성 증암(甑岩)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5일. 장성(長城) 삼서면(森西面) 홍정리(紅亭里)에 진을 옮기고 이틀을 묵으면서 사방의 적의 정세를 정탐했다.
17일. 행군(行軍)해서 함평(咸平) 월야면(月也面) 외티(外峙)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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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행군(行軍)해서 함평(咸平) 해보면(海保面) 백토지(白土池)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9일. 행군(行軍)하여 함평(咸平) 선티(蟬峙)에 이르러 점심을 먹을 즈음 영광(靈光)에 있는 지사(志士) 조사행(曺士行)·정익로(鄭益老)·노공삼(魯公三) 제씨가 비밀히 왜정의 정보를 통하여 안에서 응하고 밖에서 공격하는 형세를 취하라고 한다.
이에 바로 영광(靈光) 황량면(黃良面) 황산(黃山)에 이르러 저녁밥을 먹고 성재(省齋)·이철형(李哲衡)·김봉수(金鳳樹)·박사(博士) 김율(金聿)·김군칠(金君七)·김창복(金昌卜) 등과 함께 군사를 합쳐 가지고 바로 영광(靈光) 남문(南門) 밖에 다달았다.
여기에서 적병과 혼전(混戰)하기 3시간이 넘으니 비록 왜병 10여 명을 죽였으나 성첩(城堞)이 견고하고 적병이 심히 많은데다가 더우기 죽기로써 굳게 지키기 때문에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퇴군했다.
이에 바로 황량면(黃良面) 초포티(草浦峙)로 향하여 유진(留陣)했다.
20일. 영광(靈光) 외서면(外西面) 납사동(納寺洞)[지금의 장성군(長城郡) 삼서면(森西面)임]과 산적동(山廸洞)에 이르러 군인들을 총독(總督)해 보니 40~50명에 지나지 않았다.
21일. 행군(行軍)해서 고창(高敞) 대산면(大山面) 갈마촌(渴馬村)에 사는 정윤서(鄭允西)의 집에 이르러 잠시 단란(團欒)하게 이야기하다가 바로 본촌(本村) 딴 사람의 집으로 가서 유숙했다.
22일. 무장(茂長) 와공면(瓦公面) 신기(新基)[지금의 고창군(高敞)군 공음면(孔音面)]에 진을 옮겼다.
23일. 행군하여 무장(茂長) 원송면(元松面) 외원리(外院里)[지금의 고창군 성송면(星松面)]에 진을 머물렀다.
24일. 송산리(松山里)로 진을 옮겼다.
25일. 무장(茂長) 와공면(瓦孔面) 두암리(斗岩里)로 행진(行陣)하여 머물렀다.
26일. 같은 면 양동리(良洞里)로 진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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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행군(行軍)하여 무장(茂長) 대제면(大梯面)[지금의 고창군 대산면(大山面)] 신평리(新坪里)에 이르러 적을 이끌어들일 계획을 했다.
28일. 무장(茂長) 갈마촌(渴馬村)[지금의 고창군 대산면(大山面)으로 진을 옮겼다.
29일. 행군(行軍)하여 무장(茂長) 원송면 내원리(內院里)[지금의 고창군 성송면(星松面)]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30일. 내원(內院)에 머무르면서 그 길이 험한 때문에 적을 이끌어내다가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12월 1일 또 내원리(內院里)에 머물러 있었다.
2일. 좌익(左翼) 김창복(金昌卜)·호군(犒軍) 박용근(朴溶根)·종사(從事) 오태윤(吳泰允)·참모(叅謀) 봉제칠(奉齊七) 등과 함께 적을 만나 접전하기 2시간여에 적병 15~16명을 쏘아 죽이고 군사를 거두어 영광(靈光) 삼북면(森北面)[지금의 장성군 삼계면(森溪面)]염티(廉峙)로 진을 옮겼다.
3일. 행군(行軍)하여 영광(靈光) 불갑사(佛甲寺) 해불암(海佛庵)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4일. 불갑면(佛甲面) 생곡리(生谷里)로 진을 옮기니 뒤따라 오는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5일. 행군(行軍)하여 영광군(靈光郡) 남면(南面) 오동리(梧桐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6일. 행진(行陣)해서 군서면(郡西面) 관산리(關山里)에 머무르니 좇기를 원하는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7일. 행군(行軍)하여 무장(茂長) 와공면(瓦公面) 지음포(知音浦)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적을 불러낼 계책을 썼다.
8일. 같은 면 용산리(龍山里)로 진을 옮겼다.
9일. 행군(行軍)해서 무장(茂長) 심원면(心元面) 궁산리(弓山里)[지금의 고창군]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0일. 행군(行軍)하여 무장(茂長) 선운사(禪雲寺)에 이르러 2일 동안 유진(留陣)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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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자식 기봉(起鳳)이 또 왔기에 나는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타일러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기봉(起鳳)은 울면서 대답하기를,
13일. 새벽녁에 이백경(李伯卿)·박용근(朴溶根)·김창복(金昌卜) 등과 함께 흥덕안티(德興鞍峙)에 유진(留陣)하고 있노라니 날이 밝으면서 적이 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나는 기봉(起鳳)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모름지기 조그만 길로 해서 급히 적의 예봉(銳鋒)을 피하라.”
했다.
그러나 기봉은
“노친(老親)께서 진에 계셔서 이런 적과 대전(對戰)하는 때를 당해서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차마 아버님의 곁을 떠나서 몸을 피해갈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종시 듣지 않는다.
이리하여 기봉은 곧 모든 군사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적과 서로 싸우는데 적이 포를 크게 쏘아 탄환이 비처럼 쏟아진다.
기봉이 용맹을 뽐내어 앞으로 나가 포를 쏘아 적을 죽이다가 마침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아아! 저의 죽은 것은 임금에게나 아비에게나 의리에 진실로 마땅하다 하겠다.
그러나 아비 된 마음으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나는 더욱 힘을 내어 적을 멸해서 위로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사사로운 원수를 갚는 것이 이 나의 직책이로다.
제장과 군졸들도 모두 용기를 내어 앞을 다투어 적병 40명을 쏘아 죽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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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적은 물러갔다.
드디어 우리는 사티(沙峙)로 진을 옮겼다.
성재(省齋)가 이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기를,
“동쪽으로 달리고 서쪽으로 나가다가 외아들이 죽었도다. 그러나 아비는 충성을 위해 나가고 자식은 효도에 죽었으니 아비의 충성됨과 자식의 효성됨이 천고에 짝이 없으리로다.”
했다.
14일. 행군(行軍)하여 무장(茂長) 오리동(五里洞) 죽림리(竹林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지금의 고창군 무장면(茂長面)]
15일. 죽림리(竹林里)에 머무르면서 적을 불러낼 계교를 써서 군사를 매복하고 기다렸다.
적병이 과연 오자 우리는 좌우에서 협공해서 왜적 15~16 명을 쏘아 죽이니 나머지 적은 모두 달아났다.
이날 행군(行軍)해서 장성(長城) 탑정리(塔亭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6일. 증암리(甑岩里)에 진을 옮기고 사람을 보내어 기봉(起鳳)의 시체를 거두어서 선영(先塋) 밑에 장사지냈다.
17일. 행군(行軍)해서 나주(羅州) 적량면(赤良面) 송림촌(松林村)에 이르러 이틀 동안 유진(留陣)하면서 광주(光州)·나주(羅州)·함평(咸平) 등지에 있는 모든 의사(義士)들의 수습한 전말을 빠치지 않고 들어 두었다.
19일. 장성(長城) 남면(南面) 자능곡(子陵谷)에 이르러 이틀 동안을 묵으면서 적의 정세를 탐문했다.
21일. 행군(行軍)하여 바로 광주(光州) 비아면(飛鵝面) 신촌(新村)에 이르러 광주(光州)에 있는 왜적의 행동을 탐문하고 그곳에 유진(留陣)했다.
22일. 광주(光州) 소고룡면(召古龍面) 광곡리(廣谷里)[지금의 임곡면(林谷面)]에 진을 옮겨 부하들의 사정을 안찰(按察)했다.
23일. 광주(光州) 검정리(檢亭里)[지금의 장성군(長城郡) 남면(南面)]에 진을 옮기고 적병의 동작을 살폈다.
24일 행군(行軍)하여 장성(長城) 진원면(珍原面) 율곡리(栗谷里)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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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留陣)했다.
25일. 행군(行軍)하여 담양(潭陽) 대전면(大田面) 평장동(平章洞)에 이르러 성재(省齋)의 진중(陣中)에 전략(戰略)을 전했다.
26일. 행군(行軍)하여 바로 담양(潭陽) 추월산성(秋月山城)에 들어가 유진(留陣)했다.
27일. 날이 밝자 성재(省齋)·김봉수(金鳳樹)·유인수(柳寅壽)·김익겸(金益兼) 등과 함께 군사를 합해서 적병과 종일 싸웠다.
이 싸움에 적병은 계속하여 구원병이 와서 그 수효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백여 명을 쏘아 죽이고 우리 군사도 죽은 자가 또한 30여 명이나 되었다.
날이 저물자 적병이 먼저 물러가자 우리 군사도 역시 성 밑에 있는 견양동(見陽洞)으로 진을 옮겼다.
28일. 행군(行軍)하여 순창(淳昌) 복흥면(福興面) 사창리(社倉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성재(省齋)와 서로 동서로 나뉘었다.
성재(省齋)는 발을 다친 까닭에 걷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종군(從軍)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때문에 나를 청하여 후임(後任)을 부탁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 발을 상해서 종군(從軍)하지 못하겠은즉 군중의 제반 일을 그대가 모두 맡아서 신중히 처리하여 끝을 마치어 국가의 원수를 갚도록 하라.”
하고 인(印)과 칼을 주면서 또 말한다.
“그대의 경륜(經綸)과 지략(智略)은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무엇을 다시 부탁하리오.”
나는 눈물을 뿌리면서 부탁을 받으면서 말하기를,
“오직 바라건대 속히 조리(調理)하시어 다시 군무(軍務)를 잡도록 하시옵소서.”
하고 대신 군병(軍兵)을 거느렸다.
성재(省齋)는 부하 장병들에게 전령하기를,
“내가 낙상으로 다쳐서 지척도 걷지 못하는 것은 제군들이 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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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창졸간에 낫지 못하겠기로 군무(軍務)의 전권(全權)을 도통령(都統領) 김후은옹(金後隱翁)에게 부탁하노니 내게 소관(所管)된 부하 장병들은 김도통(金都統)의 휘하에 돌아가서 혹시라도 뒤떨어지는 행동이 없게 하라. 내 병이 만일 조금만 나으면 다시 올 마음이나 이것을 어떻게 바랄 수 있으리오.”
하였다.
또 전령하기를,
“모반한 장수나 도망한 군사들은 각각 정한 법률이 있는바 사세를 참작해서 혹 의논할 만한 일이 있으면 이미 지나간 일은 추후해서 죄 줄 것이 없으니, 만일 조그만 공이라도 있으면 장차 이를 없애지 않을 것이다. 대체 우리 부하의 여러 장교와 군졸들은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 오히려 석자만한 법을 의논할 권리가 있으니 각각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후회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날 밤 행군(行軍)하여 장성(長城) 조양리(朝陽里)에 이르러 잤다.
정미(丁未) 12월. 그믐.
행군(行軍)하여 장성(長城) 모현리(茅峴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무신(戊申) 정월 1일.
서삼면(西三面) 신평(新坪)으로 진을 옮기고 제장과 조병을 모아 천지에 맹서해 고하고 피를 마시면서 함께 적을 토벌하고 원수 갚을 것을 동맹했다.
2일. 같은 면 부동(釜洞)으로 진을 옮기고 적의 정세를 참정하면서 2일 동안을 묵었다.
4일. 행군(行軍)하여 인근에 있는 여산(礪山)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5일. 죽리(竹里)로 진을 옮기고 종사(從事) 몇 사람을 보내서 적의 정세를 비밀히 탐지했다.
6일. 군사를 거느리고 서삼면(西三面) 조암리(鳥岩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7일. 행군(行軍)하여 증암리(甑岩里)에 이르러 참봉(叅奉) 김준(金準) 진사(進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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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형(李哲衡)과 진을 합해 가지고 3진의 군졸을 연습시켰다.
8일. 행군(行軍)하여 황룡면(黃龍面) 산동리(山東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9일. 행군(行軍)하여 같은 면 금매동(金梅洞)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사방의 적의 정보를 탐문했다.
10일. 행군(行軍)하여 송림(松林)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성재(省齋)의 순의(殉義)했다는 소식을 듣고 설위(設位)하고 통곡했으며, 전군(全軍)이 효건(孝巾)을 둘렸다.
11일. 행군(行軍)하여 영광(靈光) 삼북면(森北面) 복산티(伏山峙)[지금의 장성군 삼계면(森溪面)]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2일. 삼계면(森溪面) 아계리(阿溪里)에 진을 옮겼다.
13일. 행군(行軍)하여 영광(靈光) 내동면(內洞面) 성산리(城山里)[지금의 삼계면(森溪面)]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4일. 행군(行軍)하여 장성(長城) 서이면(西二面) 아곡리(鵝谷里)[지금의 황룡면(黃龍面)]에 이르러 이틀 동안을 묵었다.
16일. 황룡면(黃龍面) 맥동리(麥洞里)로 진을 옮기고 이틀 동안을 묵었다.
18일. 행군(行軍)하여 탑정리(塔亭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진사(進士) 이철형(李哲衡)과 진을 합쳤다.
19일. 이른 새벽에 왜적 수백 명이 우리 군사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와서 습격했다.
나는 이철형(李哲衡)·기성일(奇星一)·김봉수(金鳳樹)·김군칠(金君七), 전부(前部) 임선행(林善行)과 함께 반일 나머지 싸워서 저쪽이나 우리가 모두 사상자(死傷者)가 많았다.
그런 중에 우리 군사는 탄환이 떨어져서 부득이 군사를 물렸고 이 싸움에 김봉수(金鳳樹)·임선행(林善行)이 탄환에 맞아 죽었으니 탄식스럽고 아까운 일이다.
겨우 우리는 다내동(多內洞)으로 들어가 유진(留陣)했다.
20일. 밤에 떠나서 산동산(山東山)에 이르니 따라 오는 자가 14~15인에 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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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
여기서 4일을 묵었다.
25일. 신기리(新基里)에 이르러 이틀을 묵노라니 흩어졌던 군사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27일. 행군(行軍)하여 황룡면(黃龍面) 관동리(冠洞里)에 이르러 이틀 동안을 묵었다.
29일. 행군(行軍)하여 통안산(通安山) 속에 있는 선덕동(仙德洞)에 이르러 10여 일을 묵었다.
흩어진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 전일의 형태를 회복했다.
2월 8일. 전편에 들으니 부장(部將) 이백경(李伯卿)이 영광(靈光) 봉산(蜂山) 등지에서 적병과 싸워 적병 수십 명을 쏘아 죽였으나 필경 탄환에 맞아 죽었다.
생각하건대 그 사람이 적을 무찌르다가 순절(殉節)했으니 죽었어도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이나 같다.
이런 사람은 옛날 사람들 중에서 구한 대도 그 충의(忠義)가 부끄럽지 않은즉 교전하는 곳에서 함께 싸우지 못하고 이런 간세(間世)의 열사(烈土)를 잃은 것이 한스럽도다.
이에 우리는 설위(設位)하고 통곡했다.
군사를 각처에 보내서 장수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고 나는 몸소 적의 정세를 탐지할 계획을 세웠다.
12일. 봉동(蜂洞)에 이르러 3일 동안을 묵었다.
15일. 계동(桂洞)에 이르러 유숙했다.
16일. 선덕동(仙德洞)에 이르러 이틀을 묵었다.
18일. 상통(上通)에 있는 일가 통정(通政) 운중(運重)의 집에 이르러 유숙했다.
19일. 우리 군사 수10인을 지휘해서 고창(高敞敞) 읍내로 들어가 세무주사(稅務主事) 서 상달(徐相達)을 쏘아 죽였다.
20일. 봉동(蜂洞)에 이르러 들으니 이철형(李哲衡)이 왜추(倭酋)에게 항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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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자 남도관찰사(南道觀察使) 김규창(金奎昌), 창성군수(昌城郡守) 김윤창(金允昌)과 왜추(倭酋)의 대장이 선유사(宣諭使) 조이구(趙銕九)와 함께 모두 주식(酒食)으로 잘 대접하니 철형(哲衡)은 크게 기뻐하여 자청하기를,
“병정 몇 명만 나와 함께 보내 주면 의병(義兵)을 모조리 잡아 주겠다.”하므로 왜추(倭酋)와 조이구(趙銕九)는 크게 기뻐하여 곧 병장 수십 명을 안동해서 떠나보냈다 한다.
이날 또 들으니 참봉(叅奉) 김준(金準)이 왜병과 장성(長城) 토정리(土井里) 등지에서 싸워서 적병 50여 명을 쏘아 죽였다 한다.
내 이 소식을 듣고 기뻐서 찬(贊)하기를,
“장하도다! 우리 선봉(先鋒)이여. 가위 의병 진소(陣所)의 아장(牙將)으로서 특수한 인물이로다.”
하였다.
21일. 또 봉동(蜂洞)에 머무르면서 사방의 적의 정세를 탐문하면서 이틀 동안을 묵었다.
23일. 괴정리(槐亭里)에 이르러 유숙했다.
24일. 새벽녘에 군사를 모아 적병과 장성(長城) 송티(松峙)에서 싸워 적추(賦酋) 10여 명을 쏘아 죽였다.
25일. 괴정리(槐亭里)에 돌아와서 3일 동안을 묵었다.
27일. 봉동(蜂洞)에 이르러 4,5일 동안 묵었다.
3월 2일. 군사를 모아 이영화(李永華)의 군사와 합세해서 행군(行軍)하여 영광(靈光) 육창면(六昌面) 오동리(梧桐里)[지금의 군남면(郡南面)]에 이르러 왜병과 싸워서 베이고 사로잡은 것이 심히 많았다.
이에 크게 전공(戰功)을 얻으니 남은 적들은 모두 도망했다.
3일. 이영화(李永華)의 군사와 각각 군오(軍伍)를 정돈하여 소 잡고 술을 사다가 장병들을 먹이고 수일을 지냈다.
6일. 이영화(李永華)의 군사와 서로 헤어져 서로 기각(犄角)의 형세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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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行軍)하여 영광(靈光) 백수면(白岫面) 대전리(大田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8일. 행군(行軍)하여 구수산(九岫山)에 올라가 유진(留陣)하고 복병을 매복하여 적을 기다리면서 3, 4일을 지냈다.
12일. 오후에 적의 보병 40~50명과 마병(馬兵) 30여 명이 소식을 듣고 왔다.
이에 우리 군사는 서로 싸우다가 한참 만에 거짓 패하여 산골짜기로 깊이 들어갔다.
적병이 우리를 쫓아서 골짜기 속으로 들어오자 우리 복병이 좌우에서 협공하여 그들의 돌아갈 길을 끊고 전군(前軍)이 돌아서서 쳐서 마병(馬兵) 20여 명과 보병(步兵) 20여 명을 쏘아 죽였다.
이에 우리 군사가 승승(乘勝)해서 추격하니 적병은 패해 달아나서 읍내로 들어간다.
우리는 산 위에서 두류하면서 적병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종시 소식이 없었다.
15일. 행군(行軍)하여 영마면(令麻面) 조산리(棗山里)[지금의 백수면(白岫面)]에 이르러 군오(軍伍)를 정돈하니 군세(軍勢)가 크게 떨쳤다.
16일. 장병(將兵)을 크게 먹이고 계속하여 조산(棗山)에 4,5일 동안 머무르면서 군사를 쉬게 했다.
17일 군사를 쉬는 동안에 가족들이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조사하니 무장(茂長)의 해룡(海龍) 이성원(李性元)과 이해원(李海元)·정영기(丁永棋)·정성홍(鄭性洪) 여러 사람은 나무와 양식을 대 주어야 기아(飢餓)를 면하겠다 한다.
20일. 행군(行軍)하여 영광(靈光) 홍농면(弘農面) 풍암리(豊岩里)에 이르러 사흘 동안을 머물렀다.
23일. 같은 대덕리(大德里)로 진을 옮기는데 길에서 적병 수십 명을 만나 3시간 동안 교전해서 적 수 명을 쏘아 죽이니 나머지 적병은 도망했다.
이곳에서 이틀을 유진(留陣)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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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행군하여 무장(茂長) 상리면(上里面) 장사산(長砂山) 위 [지금의 고창군 상하면(上下面)]상에 이르러 사흘 동안 유진(留陣)했다.
28일. 같은 면 마래촌(馬來村)으로 진을 옮겼더니 적병이 따라 와서 몇 시간 동안 교전했으나 별달리 사상자는 없었다.
적병은 도망갔으므로 그곳에서 유진(留陣)했다.
그믐날. 행군(行軍)하여 고창(高敞) 오산면(五山面) 죽림리(竹林里) [지금 고창읍(高敞邑)]에 이르러 군오(軍伍)를 정비했다.
4월 1일. 행군(行軍)하여 방장산(方丈山)속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포대(炮大) 박도경(朴道景)과 만나 간담(肝膽)을 토하고 서로 적을 멸할 방책을 의논하면서 5, 6일을 같이 묵다가 서운하게 서로 헤어졌다.
7일. 행군(行軍)하여 고창(高敞) 오산면(五山面) 도산리(道山里)[지금의 고창읍(高敞邑)]에 이르러 사흘 동안을 묵었다.
10일. 행군(行軍)하여 무장(茂長) 굴청리(堀靑里)[지금의 공음면(孔音面)]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1일. 행군(行軍)하여 무장(茂長) 선운사(禪雲寺)에 들어가 유진(留陣)하고 군병들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적을 유인하는 계획을 했다.
이에 적병은 땅을 덮어 오니 우리는 산 위에서 포를 쏘고 사면에서 불을 놓아 수림을 불태우고 수십 명을 쏘아 죽이니 나머지 적은 도망갔다.
여기에서 사흘 동안을 머물렀다.
14일. 흥덕 호석(壺石)[지금의 고창군 아산면(雅山面)]으로 진을 옮기고 군오(軍伍)를 정돈하며 장병을 잘 먹였다.
15일. 행군(行軍)하여 무장(茂長) 송티(松峙)에 이르러 유진(留陣)했다.
16일. 행군(行軍)해서 무장(茂長) 와공면(瓦孔面) 유동(儒洞)[지금의 공음면(孔音面)]에 이르러 유진했다.
17일. 새벽에 적의 기병대(騎兵隊)가 보병(步兵) 수백 명과 함께 사면으로 포위하고 인가에 불을 놓으니 화염이 하늘로 치솟아 가옥을 모두 불사르고 포 소리가 땅을 뒤흔든다.
교전(交戰)한지 3,4시간에 비록 수십 명 적병을 죽였으나 이미 요긴한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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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었고 전부(前部)가 적에게 패하여 군병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나는 칼을 빼 들고 싸움을 독려했으나 형세 어찌할 수가 없고 몸에 두어 곳이나 탄환을 맞았다.
이에 부득이 패잔군 수십 명을 이끌고 고산(高山) 속으로 들어가 급한 대로 상처를 치료했다.
18일. 다시 흩어진 군사를 모으니 백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방장산(方丈山)으로 들어가서 유진(留陣)했다.
19일. 군사를 패한 나머지에 상처가 몹시 아프고 우울한 것으로 병을 이루어 정신이 혼미해서 수습할 수가 없다.
음식을 먹지 못하니 원기가 점점 다하고 약도 효험이 없어 기절했다가 도생한 지 여러 번이었다.
억지로 정신을 차려 포대(炮大) 박도경(朴道景)을 청하여 후임을 부탁하고 병권(兵權)을 내어 주고 눈물을 뿌리면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의리를 잡고 충성을 본받는 자가 세상에 그대만한 자가 없나니 원컨대 그대는 또한 촉한(蜀漢) 때 강유(姜維)의 고사(故事)를 본받으라.”
하고 곧 인검(印釼)을 주었다.
또 여러 장교(將校)와 군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따른 지 수년 동안에 사생(死生)을 함께 고생했으나 공은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병들었도다. 너희들은 박장군(朴將軍)을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원수를 멸하여 국가에 보답한다면 내 죽어서도 눈을 감을 것이다.”
하고 눈물을 뿌리고 군오(軍伍)를 작별하고 깊이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하늘을 우럴어 통곡했다.
산 속 촌집에 아무도 간호하는 사람이 없어 병이 날마다 더욱 중해지니, 목숨이 끊어지기만 기다릴 뿐이다.
다행히 친한 벗들 수 명이 지성으로 간호해 주는 것을 입어 장성(長城) 백암산(白岩山) 속에서 머문지 3,4년에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병이 조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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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가 간곡히 권하기를,
“집은 이미 망했고 때는 이미 갔다. 방금 사세가 백 가지로 따져도 어찌할 수가 없은즉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몸을 보호해서 시기를 보아 뒷 기회를 도모하라. 행자(行資)와 의복은 넉넉히 준비했으니 즉일로 길을 떠나서 깊이 금산(錦山) 산 속으로 들어가 몸을 쉬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는 곧 신해(辛亥) 중춘(仲春)이다.
같은 군 박사(博士) 조희경(曺喜璟)이 수차 와서 보고 극력 원호해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머금은 채 구차히 성명(性命)을 연장하여 다만 기회를 기다릴 뿐이다.
세월은 흐르듯 나아가 육순(六旬)에 가깝다.
늙은 병은 더욱 더하고 뜻하는 일은 이루지 못한 채 한낱 주제넘은 근심만 간절할 뿐이로다.
무오(戊午) 12월 26일 이른 아침에 비로소 전하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라의 바탕이 이제 끝났고, 내가 뜻하던 일도 이것으로 끝났도다. 구차히 삶을 바란 것은 뜻하는 바가 있었던 때문인데, 천만의 외에 갑자기 망극한 아픔을 당하니 바라던 바가 끊어진지라,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리오.
곧 미리 준비했던 신석(信石) 하나를 의지해서 높은 봉우리에 올라 북쪽 대궐을 바라보고 종일 통곡하여 나의 슬픔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