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격으로 가는 편지
고전산문 004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www.itkc.or.kr
틈나는 대로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면 그 분야의 글을 쉽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쉽게 쓰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개는 독자들의 의식하며 굉장히 고심한다고 합니다. 글을 쓰시는 분들끼리는 그 마음이 잘 통할 겁니다. 본래의 글(한문원문)과 그것을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하고자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신 분들의 진땀을 함게 느끼면서 다같이 읽어봅시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고질병
2008-06-23안대회
벽(癖) 곧 고질병은 병이다. 특정한 어떤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좋아하는 정도가 심하면 즐긴다고 말할 수 있다. 특정한 어떤 물건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서 즐기는 정도가 심하면 고질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중서(董仲舒)와 두예(杜預)는 학문에 고질병이 있는 사람이고, 왕발(王勃)과 이하(李賀)는 시에 고질병이 있는 사람이다. 사령운(謝靈運)은 산수 유람에 고질병이 있는 사람이고, 미불(米芾)은 돌에 고질병이 있는 사람이고, 왕휘지(王徽之)는 대나무에 고질병이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 외에도 갖가지 기능과 기예에 고질병이 생긴 사람이 있고, 집과 진귀한 보물, 각종 물건에 고질병이 생긴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부스럼딱지를 즐겨 먹고, 냄새나는 음식을 좋아하는 인간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고질병이 괴기한 지경으로 빠진 사람이다.
나는 본래 다른 기호는 없고 오로지 그림만을 몹시 즐긴다. 마음에 드는 옛 그림을 보면, 찢어진 화폭이거나 파손된 두루마리라도 반드시 높은 값을 쳐주어 사고, 내 목숨과도 같이 아낀다. 어느 곳에 좋은 작품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바로 정성을 쏟고 힘을 바쳐서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눈으로 감상하여 정신에 파고들면, 아침 내내 싫증이 나는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피곤한 줄을 모르며 먹는 것을 잊고서도 배고픈 줄을 모른다. 심하다! 나의 고질병이여. 앞에서 말한 부스럼딱지를 즐겨 먹고 냄새나는 음식을 좋아하는 인간에 아주 가깝다고 할 수 있구나!
그런데 그림 가운데 오래된 옛것은 부식되고 망가진 것이 많아서 손을 대기만 하면 찢어지는 것들이 왕왕 생긴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아주 없어질까봐 늘 안타깝게 여겼다.
방유능(方幼能)이란 사람이 있는데 본래 예술에 대한 감식안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고질병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또 남보다 특별하였다. 종이가 훼손되거나 비단이 바스라진 옛 그림을 만나면 그는 반드시 손수 풀을 발라 다시 장황(裝潢, 표구)하였으며, 늙어서까지도 부지런히 일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눈대중으로 치수를 재어 손을 놀리는 것을 보면, 잣대가 저절로 움직이는 듯, 한 자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움직이고 쉬며, 일어나고 잠자는 일거수일투족이 풀 그릇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럴 때에는 아무리 많은 녹봉으로 대우하겠다고 유혹을 해도 일을 하는 즐거움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비한 기술로 만든 솜씨는 거의 포정_1)이 소를 잡고, 윤편_2)이 수레바퀴를 깎는 수준과 같아 서로 막상막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내가 소장하고 있는 옛 그림 가운데 부식되고 상한 것이 모두 그의 도움으로 낡은 것이 새것이 되어 그 수명을 연장하게 되었다. 심하다. 방유능의 고질병이여! 내가 견주자고 덤빌 수준이 아니로구나.
그림을 향한 내 고질병이 장황을 향한 방유능의 고질병의 도움을 받아서, 부서진 옛 그림이 모두 온전하게 살아났다. 한가한 날이면 그와 더불어 서탁을 맞대고 앉아 함께 그림을 감상하면서 흠뻑 심취하여, 하늘이 세상을 덮고 대지가 만물을 싣고 운행하는 사실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그림에 세월을 몽땅 보내면서도 아무런 싫증을 내지 않으니 심하다! 나와 그대의 고질병이여! 그래서 고질병을 묘사한 글을 지어 그대에게 준다.
- 홍현주(洪顯周), 〈벽설증방유능(癖說贈方幼能)〉, 《해거수발(海居수勃)》
1) 포정(庖丁) : '포'는 부엌을 뜻하는 글자. 포정은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소를 잡는 장인.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을 때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소를 잡은 데서 나온 말로, 사물의 성질을 철저하게 관찰하고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하여 자유자재로 솜씨를 발휘한 장인을 가리킨다.
2) 윤편(輪扁) :《장자》 〈천도(天道)〉에 나오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저명한 수레 만드는 장인.
<원문>
癖者, 病也. 凡物有好之者, 好之甚則曰樂, 有樂之者, 樂之甚則曰癖. 仲舒杜預 癖於學者也, 王勃李賀癖於詩者也, 靈運癖於遊者也, 米芾癖於石者也, 王徽之癖於竹者也. 外是以往, 有百工技藝之癖焉, 宮室珍寶器用之癖焉. 甚至有嗜痂逐臭之類, 又癖之入于怪者也.
余素無他嗜好, 唯癖於畵, 見一古畵可意者, 雖殘幅敗卷, 必重價而購之, 愛護之如性命. 聞某所有善本, 則輒殫心竭力而必致之. 方其寓諸目而融諸神也, 終朝而不知倦, 達宵而不知疲, 忘食而不知飢. 甚矣! 吾之癖也, 其殆近於向所謂嗜痂逐臭者類歟!
畵之古者多腐壞, 往往隨手而裂, 余每惜其將久而泯焉. 有方君幼能者, 素具煙雲眼. 其於癖又有異於人者, 遇古畵之紙損絹壞者, 則必手治糊而改裝之, 老而矻矻焉不已. 方其度之以目而應之乎手, 繩墨自運, 尺寸無舛, 動靜起居, 無出乎糊器之外. 當是時, 雖饗之以千鍾, 不與易其樂, 而神巧之所造, 殆如丁之解牛·扁之斲輪, 相上下也.
於是乎余所蓄古畵之腐傷者, 皆得以新其舊而延其壽. 甚矣! 方君之癖也, 其又非吾所可比也. 以吾之癖於畵, 得方君之癖於裝, 旣盡完其古畵之壞者. 每閒暇之日, 與之對几共玩, 陶然心醉, 不知天之爲盖, 地之爲輿, 兀兀乎窮歲月於斯而不厭. 甚矣! 吾與君之癖也. 因書爲癖說, 以贈之.
<해설>
홍현주(1793~1865)가 1817년에 쓴 글이다. 제목은 고질병을 밝힌다는 뜻의 〈벽설(癖說)〉로서, 자신과 방유능 두 사람의 서화(書畵)에 빠진 벽(癖)을 자조하기도 하고 자부하기도 한다. 저자는 정조의 부마인 해거도위(海居都尉)로서 시문을 잘하였고, 서화의 수장가로서 감식안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19세기 문화계에서 아주 비중이 높은 인물이다.
그런 홍현주가 이 글을 써서 준 사람은 방효량(方孝良, ?~1823)으로서 유능(幼能) 또는 유능(孺能)은 그의 자(字)이다. 장황(裝潢), 곧 서책과 그림의 장정에 특별한 재능과 전문성을 지닌 장인으로 당시에 매우 유명하였던 인물이다. 홍현주를 비롯하여 신위(申緯) 등의 서화를 표구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정조가 특별히 그에게 벼루를 만들어 올리라는 명을 내린 일이 있을 만큼 다양한 분야에도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홍현주 자신도 서화벽이 있는데, 서화를 잘 보수하는 방효량과 같은 장인이 있어서 서화를 소장하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고 하였다. 같은 분야에 벽(癖)을 가진 사람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글의 주제는 벽(癖)이다. 어떤 물건이나 일을 좋아하여 푹 빠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18세기 이래 이런 고질병을 인간의 한 덕목으로까지 내세우는 분위기가 일부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서화에 대한 벽은 다른 것에 견주어 고상한 것으로서 문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벽을 과장되게 자부하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글로서, 이 글이 쓰인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쓰인, 《나석관고(蘿石館稿)》의 〈서화서(書畵序)〉가 있다. 그 글에서는 다른 벽이 탐욕에 기운 병이거나 음란함에 빠진 병이거나 사치에 빠진 병이지만, 서화에 빠진 벽은 성격이 다르다고 하였다. 서화는 우아한 일, 곧 아사(雅事)이므로 서화벽(書畵癖)이 있다 해도 우아한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병과는 다르다고 구별해서 보았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서 몰두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만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홍현주와 비슷한 사람들처럼, 서화에 빠지는 벽을 다른 벽보다 우위에 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나치게 괴벽한 것이 아니라면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벽 하나쯤은 지니는 것이 어떨까?
죽은 벗에게 책을 보낸다
2008-08-29안대회
해가 바뀐 뒤로 날씨가 줄곧 좋지 않습니다만, 지내시기가 평소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니 적지 않게 위로를 받습니다. 이 정하(靖夏)는 망령기가 있고 속된 사람입니다만, 천마산을 여행한 일은 꿈에서까지 나타나더군요. 세상에 드문 절경을 감히 노형과 함께 즐기다니! 너무도 다행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
헤어지고 난 뒤로 군산(君山)이 벌써 고인이 되었습니다. 지난날에 했던 여행을 슬픈 마음으로 되돌아보자니 비로 쓸어버린 듯 묵은 자취가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노형께서 이 일을 떠올리면 고통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우실 터라, 어떻게 말씀을 올려야 할지요?
군산이 운관(芸館)에서 운서(韻書)를 인출(印出)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절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 한 부를 얻었으면 한다고 제게 부탁했었습니다. 지금에야 비로소 인출하는 일을 마쳐서 한 부를 봉정하여 약속을 실천하고자 합니다만, 이제 드릴래야 드릴 곳이 없습니다.
홀로 그 순간을 떠올려 보았더니 노형께서 마침 그 자리에 계셔서 그와 나눈 대화를 함께 들었더군요. 게다가 노형은 사촌 형제들 가운데 군산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감히 이 책을 노형께 보냅니다. 노형께서 물리치지 않고 받아주신다면, 군산에게 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일이 보잘것없는 정성이오나 식언(食言)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오니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괴롭게도 눈병이 다시 발생하여 글씨를 쓰기가 겁이 납니다. 그래서 남의 손을 빌려서 편지를 쓰느라 다른 일은 미처 아뢰지 못하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신사년(1701) 2월 11일, 아우 정하는 절합니다.
위 편지는 서암(恕庵) 신정하 공께서 우리 돌아가신 큰 아버지 죽취(竹醉) 공께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한 ‘절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 한 부를 얻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는 분은 돌아가신 내 아버지 관복암(觀復庵) 공이고, ‘운관에서 인출했다’는 책은 곧 이 《삼운통고》이다.
이 편지 한 통을 보면, 옛 선배들이 벗과 교제하는 풍류가 진실하고 두터워 죽은 뒤에까지도 변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또 우리 선친과 큰 아버지께서 평소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친구들도 이처럼 신뢰하였기 때문에 결코 사라져 버리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본래 내 책상자 속에 있었던 물건이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사연이 얽혀 있는 것인 줄 몰라서 예전에 아우 숙평(叔平)에게 주었다. 그 뒤에 이 편지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책을 주었고, 또한 책 안의 붉은 글씨와 인장이 모두 우리 큰 아버지의 필적이므로 숙평이 가져서 안 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서암 공께서 우리 큰 아버지 보시기를 마치 우리 선친을 보시듯이 하셨으니 나와 숙평을 또 어떻게 무관한 사람으로 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우리 형제와 자손들은 대대로 서로 전해가면서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숙평은 이 책을 삼가 잘 보관하기 바란다.
- 김원행(金元行), 〈제구장삼운통고 부신서암수첩후(題舊藏三韻通考, 附申恕庵手帖後)〉,《미호집(渼湖集)》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20집 《미호집(渼湖集)》 13권 제발(題跋)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改歲後風日連不佳, 緬惟侍履勝常, 慰遡兼集. 靖夏乃一妄俗人也. 天磨之遊, 發於夢中, 希世絶境, 乃敢與兄共之, 幸甚幸甚. 別來, 某已爲古人, 愴念昔遊, 陳跡如掃. 想兄念此, 痛苦難忍, 如何忍言. 某聞芸閣印出韻書, 曾於刹中相對時, 告求弟一件, 今始輟役, 欲以一件踐約, 而今無及矣. 獨念其時, 兄在座聞此, 且知與某相友最加於諸從, 故今日敢歸之左右. 若兄留之勿却, 則與與某無異也. 雖此細事, 政欲以不食言也, 庶可諒察, 所苦目疾復作, 畏於作字, 借人寫狀, 他不仰及, 伏惟恕照, 上狀. 辛巳二月十一日, 弟靖夏拜.
右恕庵申公與吾先伯父竹醉府君手帖也. 帖中所云刹中相對時告求者, 盖謂吾先考觀復府君, 而芸閣印出者, 卽此卷是已. 只觀此一帖, 而前輩交際風流之篤厚, 至於死生而無變. 與夫吾先考吾伯父平生友愛之摯, 爲朋友所信者乃如此, 而皆不可以有泯者也. 此卷曾爲吾篋中物, 而初不識此事, 嘗以與吾弟叔平矣. 後得是帖而始知之, 然業與之, 且卷中朱筆與印章, 皆吾伯父手澤, 則叔平豈不可有之! 况恕庵公旣視吾伯父, 猶視吾先考, 則吾與叔平又豈可二視乎哉! 然則吾兄弟子孫, 雖世世相傳看可也, 叔平第謹守之! 崇禎百三十一年戊寅元月, 雲叟病兄書于秋水軒中.
[해설]
이 글은 조선 후기에 널리 이용된 《삼운통고(三韻通考)》란 운서(韻書)의 뒤에 붙인 글이다. 부록으로 편지가 첨부되어 있다. 일반적인 발문이 책의 성격이나 가치, 간행의 동기와 과정을 서술하지만, 이 글은 그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책과 자신의 집안이 얽힌 사연을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감동적인 데가 있다.
이 운서는 저명한 유학자인 김원행(金元行)이 소장하고 있다가 4촌 동생-김원행이 김숭겸(金崇謙)의 아들로 양자갔으므로 실제로는 친동생-인 숙평(叔平) 김탄행(金坦行)에게 준 책이다.
그러나 뒤에 김원행은 서암(恕庵) 신정하(申靖夏)가 큰 아버지-실제로는 친부- 죽취(竹醉) 김제겸(金濟謙)에게 보낸 편지를 얻고 나서는 이 평범한 운서가 실은 자신의 양아버지 관복암(觀復庵) 김숭겸의 죽음과 관련된 애틋한 사연이 있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요절한 양아버지가 임종 무렵에 보고 싶어했던 책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친구가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사후에 보낸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그런 소중한 의미를 지닌 책을 자식인 자기가 소장해야 마땅한데 그것을 집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그래서 동생의 소장품이 된 책에 편지의 내용을 쓰고 자신의 소감을 밝힌 다음,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글의 중심에는 신정하가 김제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것이 지닌 의미와 감동은 김원행의 발문에 잘 밝혀져 있으므로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정리하여 이야기하면 이렇다.
신정하는 1700년에 친구인 김숭겸(1682~1700), 김제겸 등과 함께 개성의 천마산을 열흘 동안 여행하였다. 그런데 김숭겸은 이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을 못 넘기고 죽었다. 여행하는 중에 김숭겸은 교서관에서 《삼운통고》를 인출한다는 말을 듣고 인출되면 자기에게도 한 부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친구는 한 달도 못돼 유명을 달리했다. 친구가 죽고 난 다음 해에 책이 간행되었다. 비록 친구는 죽었지만 신정하는 죽은 친구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촌 가운데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자 그 약속의 장소에 함께 있었던 김제겸에게 대신 책을 보냈다. 그리고 사연을 적은 편지를 동봉했다.
양아버지와 그의 친구, 그리고 친아버지 사이에 책을 두고 펼쳐지는 따뜻한 인간애와 우정을 김원행은 너무도 가슴 뭉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편지를 읽고서 그 사연의 의미를 발문에 살려서 이야기하고 있다.
신정하의 편지와 김원행의 제발문을 읽고 나니, 책은 책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주고받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정겨운 사연 때문에 소중한 것이 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김숭겸 대신에 신정하로부터 《삼운통고》를 받은 김제겸은 나중에 성효기(成孝基)와 함께 이 책을 증보하여 《증보삼운통고》를 펴냈다.
생색내지 말라
2008-09-16안대회
삼가 살펴보니, 서찰 가운데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긍하는 대목이 있더군요. 감사하는 마음 한량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바로는,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현의 밝으신 가르침일 뿐, 아녀자를 위해 억지로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중심을 꿋꿋하게 잡고 있어서 욕망이 방해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른다면, 자연스럽게 어떠한 잡된 생각도 사라지리니, 규중 아녀자로부터 보답을 바랄 필요가 있겠는지요?
서너 달 홀로 잠을 잔 것을 가지고 고결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덕을 베풀었다고 생색을 내는 것을 보면, 당신은 욕망이 없는 담박한 사람은 분명코 아닐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결백하여, 밖으로는 화려한 치장을 끊고 안으로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분이라면, 굳이 서찰을 보내 자신이 행한 일을 자랑한 뒤에야 남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주겠습니까? 곁에는 당신을 잘 아는 벗들이 있고, 휘하에는 가족과 종들이 있어서 수많은 눈들이 지켜볼 터이니 공론이 저절로 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억지로 서찰을 보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당신은 아무래도 밖으로 드러나게 인의를 베풀고서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을 급급해하는 병통을 지닌 듯합니다. 소첩이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소첩이야말로 당신에게 잊어서는 안 될 공을 세워놓았으니 이점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마세요. 여러 달 홀로 잤다고 당신은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 끝에 구구절절 자랑하지마는, 예순 살이 곧 닥칠 분에게는 이렇듯이 홀로 지내는 것이 양기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제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신은 귀한 직책에 있어서 도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볼 테니, 여러 달 홀로 지낸 정도만 가지고도 남들은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첩이 옛날 어머님 초상을 치를 때, 사방천지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당신은 만 리 밖 유배지에서 하늘만 찾으며 통곡이나 했지요. 그때 저는 지극 정성으로 예법을 갖춰 장사를 치러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이르기를, 분묘를 만들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친아들이라도 그보다 잘할 수는 없다고 하더이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또 만 리 길에 올라 온갖 고생을 하며 험난한 유배지로 당신을 찾아간 일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제가 당신에게 베푼 이러한 지극한 정성 정도는 되어야 ‘잊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당신이 여러 달 홀로 잔 일과 제가 한 여러 가지 일을 서로 견주어 보세요,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거운지를.
이제부터 당신은 잡념을 영영 끊고 기운을 보전하여 수명을 늘리기를 바래요. 이것이 제가 밤낮으로 바라는 소망이랍니다. 그런 제 뜻을 너그러이 살펴주세요. 송씨는 아룁니다.
- 〈유문절공부인송씨답문절공서(柳文節公夫人宋氏答文節公書)〉,《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권5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34집 《미암집(眉巖集)》 권7 日記 庚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伏見書中, 自矜難報之恩, 仰謝無地. 但聞君子修行治心, 此聖賢之明敎, 豈爲兒女子而勉强耶? 若中心已定, 物欲難蔽, 則自然無渣滓, 何望其閨中兒女之報恩乎? 三四月獨宿, 謂之高潔, 有德色, 則必不澹然無心之人也. 恬靜潔白, 外絶華采, 內無私念, 則何必通簡誇功, 然後知之哉? 傍有知己之友, 下有眷屬奴僕之類, 十目所視, 公論自布, 不必勉强而通書也.
以此觀之, 疑有外施仁義之弊, 急於人知之病也. 荊妻耿耿私察, 疑慮無窮. 妾於君亦有不忘之功, 毋忽! 公則數月獨宿, 每書筆端, 字字誇功. 但六十將近, 若如是獨處, 於君保氣, 大有利也, 此非吾難報之恩也. 雖然, 君居貴職, 都城萬人傾仰之時, 雖數月獨處, 此亦人之所難也. 荊妻昔於慈堂之喪, 四無顧念之人, 君在萬里, 號天慟悼而已. 至誠禮葬, 無愧於人. 傍人或云, 成墳祭禮, 雖親子無以過.
三年喪畢, 又登萬里之路, 間關涉險, 孰不知之? 吾向君如是至誠之事, 此之謂難忘之事也. 公爲數月獨宿之功, 如我數事相肩, 則孰輕孰重? 願公永絶雜念, 保氣延年, 此吾日夜顒望者也. 然意伏惟恕察!宋氏白.
<해설>
이 편지는 16세기의 학자 미암 유희춘(柳希春 : 1513~1577)의 부인 송씨(宋氏)가 남편에게 보낸 것이다. 유희춘의 일기인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 권5의 부록에 실려 있고, 또 《미암집(眉巖集)》에 수록된 미암연보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연보에서는 선조 4년(경오년, 1571년) 7월 12일 기사에 이 내용이 있어 이 무렵에 쓴 편지로 보았다. 대체로 1570년과 1571년 사이에 쓴 편지로 추정된다.
이 편지를 쓰게 된 사연은 이렇다. 미암이 한양에서 옥당(玉堂)의 고관으로 봉직하면서 서너 달 동안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홀로 지냈다. 그때 전라도 담양의 본가에서는 송씨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미암이 본가로 보내는 편지 속에서 자신이 부인 외에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며 상당한 자랑을 하였다. 본가에 있는 부인에게 갚기 힘들 만큼의 은혜를 베푼 셈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 와서 벼슬살이하는 관원들이 소실을 들이는 일이 많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미암의 자랑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편지를 받은 송씨 부인은 장문의 편지를 써서 아들인 광문(光雯)에게 필사를 시켜 보냈다. 그러나 미암의 기대와는 달리 송씨 부인은, 오히려 부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은 고마워하지 않으면서 당연한 것을 가지고 자랑이나 한다고 핀잔하는 취지로 답장을 하였다. 핀잔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나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군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위이다. 당연한 행위를 해놓고 내게 보답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둘째, 이런 일을 해놓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의도 자체가 군자답지 못한 것이다. 셋째, 예순이 가까운 사람이라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으므로 자랑할 일이 못된다.
핀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송씨는 미암에게 그 정도 가지고 자기에게 생색을 내는데 왜 자신이 남편에게 덕을 베푼 지난 일에는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느냐고 채근하였다. 채근한 내용은 미암이 종성으로 유배갔을 때 시어머니 초상을 혼자서 훌륭하게 치른 일과 삼년상을 마친 뒤 그 먼 길을 걸어서 남편을 찾아간 두 가지 일이다. 남들의 주목을 받는 상태에서 미암이 독수공방한 것만 해도 가상할지 모르겠으나, 자신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갸륵한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미암더러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인지 한번 비교해보라고 일깨워주었다.
답장을 보면, 미암이 유구무언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송씨는 남편 미암의 이러한 생색내는 이야기에 대고 잡념을 끊으라고 하였다. 미암연보에는 이 편지를 두고 “송부인의 간찰이 문장과 의미가 모두 좋아서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夫人詞意俱好, 不勝歎伏.)”고 평가했다. 연보를 편찬한 사람의 평가일 텐데 아주 적절한 평가로 보인다.
편지를 쓴 송씨의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성중(成仲), 호는 덕봉(德峰)이다. 성품이 명민했고 시와 문장을 잘 썼다. 여러 편의 문장이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 편지는 조선시대 여성의 당당한 삶의 태도와 자기주장을 보여주는 글로 평가할 만하다. 가식이 없이 여성의 생각, 부부간의 솔직한 심경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한 한 통의 편지에 불과하지만, 부부 사이에 편지를 매개로 못할 말없이 하고 살았던 생활이 보이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라
50042008-10-10안대회
지난해 보던 매화의 남쪽 가지 끝에는 벌써 봄소식이 올라와 있건만, 우리 벗님은 올해 어느 곳에서 맴돌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추운 날 꽃가지 곁에 서서 마음속으로 꽃술을 헤아릴 때마다 ‘이 꽃은 소식이 분명하건만 벗의 소식만은 그렇지 못하구나!’라고 생각했더랍니다.
노형의 발걸음이 근자에는 어디에 머물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마릉(馬陵)의 농가에 계신가요? 아니면 금석(金石)의 옛집에 계신가요? 이번 행로는 몇 곳으로 잡았으며, 몇 곳의 산수를 다 보셨는지요? 큰 가뭄이며 홍수는 어느 곳에서 만났고, 어느 곳에서 비바람을 만났는지요? 혹시 서쪽 길을 잡아서 서울을 거쳐 개성의 천마산과 박연폭포를 들르고, 멀고 먼 대동강에 이르러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사당을 알현하고 정전(井田)의 유적지를 구경한 다음, 연광정을 올랐다가 곧바로 의주의 통군정(統軍亭)까지 도착했는지요? 그게 아니라면 동쪽 길을 택해 원주와 춘천을 거쳐 강릉과 양양을 들르고, 굽이굽이 돌아서 낙산사와 총석정을 향하다가 시원스럽게 비로봉 꼭대기까지 올랐는지요?
하늘과 땅을 집으로 삼고, 강과 산을 식구로 여기며, 안개와 노을, 구름과 달을 양식으로 삼아 한 평생 남으로 갔다 북으로 가고, 동으로 갔다 서로 가기를 조금도 어렵게 생각지 않는군요. 그러나 쓸쓸한 규방의 부인은 노형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가슴을 치면서 장탄식하고, 외로운 청상과부 며느리는 적막 속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죽인 채 한숨을 쉬고 있다오. 노형이 아무리 대장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런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단 말이오? 노형은 백륜(伯倫)처럼 광달하고, 보병(步兵)처럼 미친 노릇하며, 만경(曼卿)처럼 기발하고, 동보(同甫)처럼 호탕하다오. 그렇지만 그것이 병인지 병이 아닌지, 중도를 넘었는지 중도에 미치지 못했는지를, 한 평생 옛사람의 책을 읽은 노형이 왜 모르겠소?
요즈음 노형의 근체시 한 수를 읽어보았더니 그 가운데 “수풀 아래 한가로이 누워서 / 영원히 중용 속 사람이 되는 것이 낫겠네!”라는 구절이 있더군요. 노형은 남에게 중용 속 사람이 되라고 권유하고 정작 자신은 중용 밖 사람에 머물고 있소. 비록 하기 쉬운 것이 말이라고는 하나 실천하기 어렵기가 정말 이런 정도일까요?
우리들의 기질에서 오는 병통이 누군들 없겠소? 이 조술도는 뻣뻣하고 앞뒤 꽉 막혔으며, 어둡고 물정 모르는 꽁생원이니 참으로 우리 노형이 말하는 천유(賤儒)에 속하오. 그러나 뻣뻣하고 앞뒤 꽉 막혔으며, 어둡고 물정 모르는 꽁생원일지라도 그래도 옹졸하게 살아가다보니 대단한 문제를 일으키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소. 앞서 말씀드린 광달하고 기발하고 강개하며 격렬한 삶은, 명목은 모두 아름답지마는 곧잘 뜻이 기운에 빼앗기고 기운이 몸에 이용당한다오. 그 폐단은 자기만을 귀하게 여기고 남은 무시하며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는 상태로 귀결되기 쉽소.
바라건대, 백 번 생각하고 천 번 고민하여 지금까지의 길을 바꾸기를 바라겠소. 그래서 부질없는 한 세상 사람이 되어 후세 사람들이 다시 후세 사람을 비웃도록 하지 마시오.
이 조술도는 노형과는 정이 깊기에 걱정도 깊고, 걱정이 깊기에 말을 숨기지 않고 꺼냈소. 노형이 정말 내 말을 옳다고 생각한다면, 좋은 길로 가도록 간절하게 권하는 뜻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시고, 내 말이 그르다고 생각한다면, 이 조술도는 숨김없이 말한 벌을 달게 받겠소. 용서하기 바라오.
- 조술도(趙述道) 여정유관(與鄭幼觀) 《만곡문집(晩谷文集)》
<원문>
去年梅梢南枝, 已上春意, 而不知故人今年落在何處, 每起旁寒叢, 暗數花蘂, 以爲此花消息分明, 而故人獨未也. 未知兄行近或言稅, 而或住馬陵田舍否, 或在金石舊庄否? 今行路由幾處, 看盡幾山水? 大旱與水遇於何地, 風雨遭於何所? 或西由洛師, 自天摩·朴淵, 遙遙至大同江上, 謁東明祠, 觀井田遺墟, 登練光亭, 直至龍灣之統軍亭否? 或東自原春, 由江襄, 繚繞向洛山·叢石, 快登毗盧絶頂否? 生涯以天地爲家, 江山爲眷屬, 以烟霞雲月爲糧食, 之南之北, 之東之西, 可無難者, 而獨恨其望望寒閨, 拊心長歎, 寂寂孤孀, 背壁潛欷. 雖兄有丈夫之心哉, 豈不攪撓於方寸中邪? 伯倫之達, 步兵之狂, 曼卿之奇, 同甫之宕, 其病與不病, 過中與不及中, 兄平生讀古人書, 顧不知此邪?
間讀兄近體詩一首, 有曰: ‘不如閒臥林泉下, 長作中庸卷裏人.’ 兄勸人以中庸卷裏, 自處以中庸卷外, 雖言之易, 其踐之難, 果若是哉? 吾輩氣質之病, 誰則無之, 述道之苦硬滯澀·郷暗迂僻, 眞吾兄所云賤儒者, 而苦硬滯澀·郷暗迂僻, 猶從拙處生, 不至大段作菑. 向所云曠達也, 奇宕也, 慷慨也, 激烈也, 雖題目儘好. 往往志爲氣揜, 氣爲體用, 其流之弊, 或不免貴已賤物·恣橫睢盱之歸. 幸千思百思, 改弦易轍, 勿使空作一世人, 使後人復笑後人也.
述道於兄, 情之切故慮之切, 慮之切故言之也不隱. 兄果以愚言爲是也, 恕其懇懇責善之意, 以愚言爲非也. 述道甘伏盡言之誅矣, 亮之亮之.
<해설>
이 글은 조술도(趙述道, 1729~1803)란 경상도 문인이 창해일사(滄海逸士) 정란(鄭瀾, 1725~1791)에게 부친 편지이다. 정란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빈 전문적 여행가로 간주할 만한 인물이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산천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려고 애써서 당시에 유명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여행체험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하여 산수 여행의 체험을 담은 시문을 썼고, 많은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을 받았다. 그 그림과 글을 모아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의 「불후첩(不朽帖)」을 만들었고, 그 첩이 현존한다. 그의 특이한 행적은 필자가 『조선의 프로페셔널』에 상세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조술도는 정란의 고향 친구이자 사돈간으로, 정란의 외아들 정기동이 조술도의 조카딸에게 장가들었다. 정란이 산수에 미쳐 조선 땅을 떠도는 사이 집을 지키던 아들이 죽었다. 조술도는 그런 조카사위를 애도하는 애사를 지어서 장래성 있는 젊은이를 애도하는 한편, 홀로 된 조카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담았다.
이 편지는 그런 일이 벌어진 다음에 쓴 것이다. 편지에서 “쓸쓸한 규방의 부인은 노형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가슴을 치면서 장탄식하고, 외로운 청상과부 며느리는 적막 속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죽인 채 한숨을 쉬고 있다오.”라고 한 대목이 그것을 알려주며, 여행을 떠난 가장이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이 집을 지키고 있는 부인과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의 딱한 처지를 묘사하였다.
조술도의 경우도 처음부터 그의 여행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정란과 함께 지리산을 함께 등반한 일도 있다. 그러나 정란처럼 모든 것을 저버리고 여행에만 몰두하는 것은 내버려둘 수 없는 문제였다. 가정과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조술도의 말대로 ‘명목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족과 본인의 희생과 폐단이 따르므로 이른바 ‘중용 속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권유하였다.
조술도가 쓴 이 편지의 수신자는 정란이지만, 당시 정란은 종적이 불분명하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편지를 전달한 경위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심부름꾼을 보내 종적을 수소문하여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편지를 받은 정란은 이에 답장을 보냈고, 그 답장에 대해 조술도가 또 다시 돌아오기를 권유한 답장이 남아있다.
내 한 몸의 역사
2008-10-10 안대회
날마다 기록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일이 없는 날이 없어서, 내 한 몸에 모여드는 일이 그치는 때가 없다. 따라서 일은 날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다.
이 일이라는 것은 가까우면 자세하고, 조금 멀어지면 헛갈리고, 아주 멀어지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매일 그것을 기록한다면 가까운 것은 더욱 상세하고, 조금 먼 일은 헛갈리지 않으며, 아주 먼 일이라 해도 잊지 않는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기록해 놓으면 따라 행하기에 좋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해도 기록 덕분에 조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일기란 것은 이 한 몸의 역사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글을 배운 이후로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나는 3,700날 남짓을 거쳐 왔다. 그러나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간 옛일을 돌이켜보면, 꿈속에서는 또렷하던 일이 깨고 나면 흐리멍텅하여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과 같고, 번개가 번쩍번쩍하여 돌아보면 빛이 사라진 것과도 같다. 이것은 날마다 기록하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다.
수명이란 하늘에 달려있어 늘이고 줄이는 것은 결단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반면에 일이란 내 몸에 달려 있어 자세하게 쓰느냐 간략하게 쓰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내 하기 나름이다. 따라서 올해부터 날마다 하는 일을 기록하기 시작하려 한다. 그 날 그 날의 일을 날짜에 맞춰 쓰고, 하루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 한 달이 모여 한 해가 될 것이다. 요컨대, 하늘이 정해준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거르지 않으려 한다.
삼가 세월의 흐름을 기록하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며, 보고 들은 일을 기술하고, 서사(書史)를 고르게 평할 것이다. 집안일에서부터 조정의 일까지 다루되 삼정승이 임명되고 면직되면 그 사실을 기록하고, 관리의 성적을 매겨서 임용되거나 물러나면 그 사실을 기록하나 그 나머지까지 모두 갖추어 쓰지는 않을 것이니 이 일기는 집안일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하늘이 나타내는 재앙을 살펴서, 번갈아 드는 일식과 월식을 기록하고, 물난리와 가뭄이 들거나 바람 불고 우레가 치면 기록하나 그 나머지까지 모두 기록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 일기는 인간의 일을 자세하게 쓰기 때문이다. 일기의 조목과 범례는 이런 정도에 불과하다.
시헌력(時憲曆)에서 날짜와 간지만 뽑아 새로 큰 책을 하나 만들어 사실을 기록한다. 가까운 일은 자세하게 알고, 오래된 일은 헛갈리지 아니하며, 멀어진 일은 잊지 않기 위해서이니, 뒷날 옛일을 점검하여 열람할 때 대비하고자 한다.
현재와 현격하게 멀리 떨어진 까마득한 상고 시절 가운데 삼황오제(三皇五帝) 시절보다 더 오래된 때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일에 대해 억지로 끌어다 붙이거나 지나치게 파고들어 그 시대와 관련된 발자취를 갖추어 놓고자 애쓰면서도, 제 한 몸에 이르러서는 절실히 구하는 것이 그만 못하거나 도리어 간혹 소홀히 하여, 일이 일어난 날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 미혹된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기의 큰 경개를 서술하여 일기의 앞머리에 둔다. 때는 지금 임금님 51년이다.
- 유만주(兪晩柱) 흠영을미서(欽英乙未敍) 《흠영(欽英)》
<원문>
欽英乙未敍
日之有記, 古今之所同也. 凡人生世, 莫不有事. 事集于身而不常止也, 故日異而月殊. 夫是事也, 近則詳, 稍久則迷, 已遠則忘. 苟日記之, 近者愈詳, 而稍久者不迷, 已遠者不忘. 事之不愆于理者, 可因此而循之, 其失者, 亦因此而警焉. 則日記者, 身之史也, 其可忽耶?
余自學書以後, 至前年, 經三千七百日, 而事皆闕不記. 追思陳往, 如夢了了, ?而昧也, 如電閃閃, 顧而滅也, 是不記日之過也. 夫壽在上天, 增縮之固不能也, 事在吾身, 詳略之惟吾所爲焉耳. 故自今年始, 記余日事, 事繫于日, 日繫于月, 月繫于年, 要以極夫天定之壽而無廢也.
謹天時, 志人事, 述見聞, 平書史. 繇家而推之朝政, 三公拜免而記之, 銓衡進退而記之, 其餘不悉書者, 記主乎家也. 繇日而審乎天災日月適蝕而記之, 水旱風?而記之, 其餘不盡錄者, 記詳乎人也. 其條例不過如斯. 而去時憲日下之註, 別爲一大冊以記之, 使事之近者詳而久者不迷, 遠者不忘, 用備異日之檢閱焉.
夫邃古遼荒, 與今懸遠, 未有上於三皇五帝也. 而人多傅會穿鑿, 以求備其事蹟, 至於身, 親切莫如也, 而顧或忽焉, 不記其事之月日者有之, 甚可惑也. 余於是乎敍其大致, 以冠于記. 時卽今上五十有一年也.
<해설>
유만주(兪晩柱, 1755~1788)의 자(字)는 백취(伯翠), 호는 통원(通園)이고,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벼슬하지 않은 채 독서인으로 한 평생을 보내며 저술에 힘썼다. 그의 저술은 24책이나 되는 방대한 일기 《흠영(欽英)》에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있다. 1775년부터 시작하여 1787년까지 1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체계를 잘 갖추어 쓴 일기는 그의 삶과 학문과 문학 등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일상의 모든 사실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글은 유만주가 스물 한 살 되던 1775년(영조 51년) 정월 초하루부터 《흠영》을 쓰기 시작하면서 쓴 서문이다. 그는 매 해의 일기마다 첫머리에 모두 서문을 붙였다. 서문의 일부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남아 있어서 일기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서문은 일기를 쓰려는 의도를 밝혔다.
그는 “일기는 이 한 몸의 역사”라고 하며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를 간명하게 밝혔다. 내게 일어나는 일을 나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게 일어난 일과 내 삶의 소중함은 저 상고적 역사와도, 세상의 큰 사건과도 견줄 필요가 없다. 나에게 날마다 새로 벌어지는 일이 내게는 가장 소중하다. 일기는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상고 시대의 알지도 못하는 사적은 견강부회하여 만들어 내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일어난 일, 그것도 얼마 멀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일조차도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는 일기를 쓰면서 꼼꼼한 시간 단위를 중시하였다. 몇 년 몇 달이라는 큰 시간 단위를 기억과 기록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지난 십여 년의 과거를 3,700일이라는 날짜로 계산하였다. 그는 시간을 잘게 나누어 보고자 하였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시시콜콜하게 시헌력, 곧 당시의 달력에 마련된 공란에 기록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세밀하게 기록하고자 하였다. 요즘의 달력에 메모하는 형식과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가물가물해지는,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을 붙들어 매는 ‘일기’에 관한 새로운 사유를 이 글은 잘 보여준다.
http://cafe.daum.net/hanmuneducation
한문임용!내년에는 꼭 출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