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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帆文苑續集上卷四
叢文四十二
答朴致邦 相大
昨晡轉遞承本月六日書溯計則是日也道抵渭陽幾於交臂相失初十日行
溏院遺墟豎碑酌獻之禮
:: 0125 ::
數日後還棲耳來書情誼周至而格例過恭區區不勝忻悚交切諦觀上半截失學之嘆溢於紙面固屬 撝謙而惟此追悔之端便是進益之機道雖長乎一日安能相爲謀也第聞之先德此事須遜志耐煩使 有入頭下手處然後勿忘勿助漸漸進步則自當有恢恢路逕矣猥以不逮之言聊表相愛之情賢者其 諒之而加勉焉則他山之石不害爲攻玉之具耳
鍾潭之役垂訖
可謂斯文盛事賢座與貴從亦可謂獨 勞矣然院制旣成將以待四方之士有志於學而不屑於課試之業者其儀節可不重歟須以
花川祠已例
參酌制定期至完好可也道於秋間旣已晉賀告由之日敢不隨諸章甫之後以效尊慕之誠哉宣武錄券旣有膽本宜付印補入於附錄之末至若本券雖不在宗宅彼亦後孫則姑置之後日宛轉圖之待 彼之感悟然後乃可不審以爲如何惟祈僑履增勝用副遠外相愛之望
위천면지 제2장 원사
5. 화천서원(花川書院)
위천면 황산 어나리(漁川)에 있었다. 서기 1818년에 세워 야천 신복진(夜川愼復振)과 지족당 박명부(知足堂朴明榑)를 병향하였다. 1868년에 훼철되고 지금은 없다.
居昌郡誌 / 壇廟 院祠
花川書院 在渭川黃山魚川하니純祖戊寅(1818,순조18)建하야幷享夜川愼復振知足堂朴明榑
靖忠祠 在渭川面茅田하니正宗癸卯(1783,정조7)에建하야幷享靖節公雪壑齋鄭矩忠毅公白村金又起追享守吾齊趙謔聽松愼復行杏村鄭惟文
居昌郡誌 / 儒賢
愼復振 居昌人樂水蔭子字伸之號夜川博學篤行親歿啜粥廬墓享于花川書院文正公陶菴李縡撰墓碣銘文翼公知守齋兪拓基篆
知足堂先生文集卷之六 附錄 年譜
辛卯 孝宗大王二年 正月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世子左賓客 以宣武原勳特贈
己卯 純祖大王二十年(1820,순조20) 奉安位版于花州書院 在安陰搜勝臺下流條愁巖上
正宗大王丁未(1787,정조11)享于靖忠祠
至是移奉因用李小山光靖(1714~1789)所撰常享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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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先生文集卷之八 附錄 花川書院常享祝文
德濟柔剛 道合屈伸
四壁淸風 式我襟紳
李光靖
李光靖 1714 1789 韓山 休文, 景實 小山
花川書院常享祝文(李光靖) (1)
1787년에 正祖가 精忠祠에 제향을 올릴 때, 小山 李光靖이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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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1714년(숙종 40)~1789년(정조 13)
李光靖 1714 1789 韓山 休文, 景實 小山
小山先生文集卷之十 / 祝文 / 靖忠祠知足堂朴公 明搏 常享祝文
德濟柔剛。道合屈伸。
四壁淸風。式我衿紳。
知足堂四壁序曰藜牀弊薦四壁蕭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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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1719년(숙종 45)~1791년(정조 15)
李獻慶 1719 1791 李星慶 全州 夢瑞 艮翁, 白雲亭, 玄圃
艮翁先生文集卷之十 / 上樑文 / 靖忠祠上樑文
高麗左諫議大夫雪壑齋鄭公矩。不仕我朝。太宗以舊誼累徵不至。至賜劒責之。後以賓禮謁見。書健元陵碑額。授寶文閣提學不拜。賜第不處。賜葬山遺命不葬。卒謚靖節。
故吏曹判書白村金公文起光廟受禪後。與成三問等六臣同日立殣。英廟朝伸寃復官。贈謚忠毅。
嶺南安義縣章甫慕義立祠。並享二公。
窃以周書不以洪範之陳而有譏於箕子者。高其罔僕之義。春秋不以溝瀆之諒而或貶於召忽者。嘉其殉主之忠。是以或時義利艱。不失貞正之操。或危亂著節。能成强矯之名。壁仞巖巖。障奔頹而孤柱。石聲辨辨。激羣懦而淸徽。天經由是維持。人心莫不欽尙。凡登忠義之傳。率多尊祀之儀。遼東舊墟。猶傳孤竹之廟。江南遺俗。尙護正學之祠。逮及我東。尤重名節。當危朝殺身無悔。有若圃隱先生。革命際遯跡深藏。不獨新羅王子。千年理亂。幾箇忠亮之賢。百世風聲。盖多俎豆之所。余以所聞。雪壑齋鄭先生。白村金先生。其義皆可祭於社者也。若稽鄭先生。戴麗朝之豸角。値聖人之龍飛。雲開日朗。屬品物之咸新。天動星廻。獨辰樞之不改。靑門之外。有死不能。東岡之陂。其道可隱。海棠沙路。詠風花而自怡。秋蓮杜郵。割春菁而奚懾。題名於杜門之洞。放跡於晉陽之樓。白鷺振振。保斯容於我客。金薤燦燦。答殊遇於賓師。紫閣繁華。滕公之上第虗鎖。玉蓮奇秀。陳摶之舊券空留。呼我以逋播不嫌。名我以遺逸亦可。謚曰靖節。用晉之陶徵士例也。若乃金先生。鷄林大國之後。駟閭名臣之家。玄成遺經。世傳詩禮之學。高柴至性。身殉孝悌之䂓。沔水澄瀾。照神鑑於衡物。槐庭茂陰。襲淸芬於調元。于時揖遜之禮休哉。經權之義判矣。雨凌風震。擬撑持而不傾。玉白金堅。歷磨涅而如始。六臣同誓。譬壑松之後凋。一死如歸。與庭蘭而俱萎。家室盡破。忍言合浦之流離。子孫猶存。僅免若敖之飢餒。名蹟則魯陵記實之誌。哀寃則鶴寺招魂之詞。嗚呼二十八人。沈欝數百餘歲。冥路惠好。幽吟和而蜀魄啼。天道循環。靈讖應而銀杏復。孱裔上籲。高穹卑聽。乃命復官。申錫美謚。太常議曰謚法宜以忠毅。敎曰可爾。乃縣號安義。村名浣溪。某水某丘。乃白村生長之里。或歌或咢。亦雪壑逍遙之鄕。想其歷智異入頭陀往來駝翔之時。愛此仇池洞壑。苟非左珈瑘右德裕淸淑扶輿之氣。曷生斗南英豪。孝子之美號猶存。忠臣之芳躅不泯。哲人其萎。餘草木之昭光。王孫不歸。悵猿鶴之愁思。父老興慕。鄕里齎咨。迺因舊祠。更葺新社。義聲所聳。衿帶之士謖足而爭趍。彛性所同。畚鍤之民齊聲而咸勸。疊石累土。劣數仞於華砌九仞之層。複壁重檐。多二間於茅屋一間之制。䂓模不欲張大。高明奚取於棟隆。豐儉各適時宜。禴祭無嫌於簋貳。禮罔愆於並享。薦芬苾一體之供。德不孤於齊名。仰芝蘭同臭之義。直栢凌寒而倚檻。勁草吟風而抽庭。皎魄縈簾。近照烏山之月。正氣貫屋。遙通鷺梁之雲。高山景行。孰無詩人之感。歲時伏臘。庶效村翁之誠。南州絃誦之鄕。自此風敎之彌懿。二老杖屨之地。怳若聲光之復親。義烈斯彰。瞻聆咸聳。爰述短引。助擧脩樑。拋樑東。桃都巽羽啼天中。漫漫長夜忽生白。皦日新霞一色紅。拋樑西。不老山光翠不低。朱鳥南墟捧天力。天傾逗雨秋凄凄。拋樑南。金猿躑躅啼煙嵐。哀怨千年訴何及。駐足行人悲不堪。拋樑北。浣溪流水明如玉。千回萬折瀉東溟。過涉之灾不威惕。拋樑上。香煙細裊魂悽愴。恒星亂落天將晨。殘月長庚獨無恙。拋樑下。枌楡遠色迷秋社。江潭歲晏孰華余。采采藻蘋于彼野。伏願上樑之後。巖巒拱扶。林壑歡喜。精魂永妥於墨障。臨歿四句詩篇。德音猶寄於峩洋。平生七絃琴曲。誠通地水。况故宇之可懷。音送靑玄。慰我民兮必笑。廈屋數百間宏制。有待擧幡而上申。嶠南七十州聞風。孰不下馬而前過。永祀無缺。吾道有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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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齋先生文集 金榥 (1896~1978) 而晦(이회) 重齋(중재) 義城(의성)
重齋先生文集卷之十八 後集 告祝
靖忠祠奉安告由文 安義錦川奉安鄭雪壑矩金白村文起趙守吾謔愼聽松復行鄭杏村惟文○甲辰(1964)四月復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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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義邑誌 / 人物
*趙謔 漢陽人性溫謹剛明留意學問殫誠事親親病禱天願代親沒廬墓贈吏曹正郞號守吾齋龍洲趙絅立傳享靖忠祠
*鄭惟文 九柳齋輳子自幼天資粹美讀書早服九柳公庭訓文詞精篤孝友兼至無意仕進又氣宇宏偉志節卓犖當壬辰之亂與嶧陽鄭惟明倡義旅赴義將金沔陣協贊兵謨又往火旺山城與忘憂 堂郭再祐同禦寇丁酉再警與弟惟榮惟武同入黃石山城與存齋郭䞭大笑軒趙宗道共力守 城及城陷與二公幷殉節享靖忠祠號杏村
*愼復行 居昌人樂水權子以孝友學問名性本勁直過不憚改爲鄭桐溪所推翊號聽松堂享靖忠祠
*朴明榑 守愚堂德馨孫生而擧止異凡聰明絶人八歲解作文甫成童有文章軌範遊寒岡之門究庸學之旨得聞退陶南冥相傳之全訣弱冠擢增廣丙第月沙李延龜詩曰庚寅吾榜稱爲盛四十人中最少年制行修飭篤於孝友處事接物誠實無僞壬辰與鄕長老倡起義旅往來鶴峯及忘憂堂義陣勞勩弘多飢荒賑恤惜畫有術民無餓莩知竹山府重建夫子廟勸講興學拜公淸道觀察使奬學興廢廉白自持敎論書略曰妙齡擢第英聲夙著於靑雲中年處閑苦節不改於白首蓮生游而不染玉蘊山而含輝淸白眞如一條之氷嚴明不違三尺之律扈駕南漢喘息急而猶不少離左右上悶其勞欲少徐不可得還都陳當勉之急立朝盡謇諤之節涖民而竭撫綏之策廢斥於兇威方煽之日而不以禍福少撓其所學之正所守之篤終始大節可以槪矣官禮曹參判贈吏曹判書享花川祠號知足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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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義邑誌 / 碑板 聽松愼先生紀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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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韓文公作董生行先稱淮水桐栢山則其山水之有關於賢人君子者亦明矣今此安陰之猿鶴洞搜勝臺實 江右之一大名勝也愼氏之先自靈岩移居于臺下因而世居焉識者所謂愼氏之四賢鍾得此山水淸肅之氣 岩臺磅礴之精而出焉者信不誣也先生姓愼氏諱復行字盛之籍居昌以高麗左僕射恭獻公諱修爲鼻祖累 世冠冕昭載國乘六世祖諱以衷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娥林府院君諡襄烈公祖諱友孟承訓郞始入安陰 考諱權卽樂水先生也築亭于臺之西以爲藏修之區妣德恩林氏進士得蕃之女嘉靖癸巳生先生于黃山 里第天賦淸粹器量恢豁服習庭訓學業夙茂以小學爲持身之律考奉二親志體之養無不用極溫凊之節罔 或有闕及其丁憂咳毁骨立啜粥三年後遭內艱年齡益衰哀毁之節一如前喪尤謹於追遠之禮至老不衰友 于昆季湛樂怡怡博通經史用力於性理之書深究微奧結茅於臺下日與其弟夜川公商確經義夜川公嘗語 人曰仲氏實踐之學非吾輩所可窺測云爾則先生之學之深行之高豈後學之所可言說哉常飭子侄曰浮誇 浪譽損人之志汝曹愼之也文章德望爲一世之宗鄕黨莫不矜式焉玉溪蘆文孝公爲方伯時盧于朝除參 奉不就平生無意子張之干祿甘處顔淵之陋巷超然有淵明撫松之趣焉中年築小齋於渭水之北蘿山之下 庭植五株松扁曰聽松堂因而爲號自製四韻二首當時碩德無不和之而桐溪鄭文簡公別以一詩題之曰性 愛寒姿老更深爲開精舍貯淸陰一生貞直頗相似半世婆娑自在吟殘夜酒醒星動月虛窓睡罷爽盈衿不緣 癯鶴堂中坐何處松林無此音觀於此詩可以知先生之貞直與松相似出塵淸標與癯鶴相契矣如先生而可 謂間氣人也哉以其才則可以陶鑄乎生靈以其志則可以激濁而揚淸矣然而高蹈山樊優遊而卒歲其曠懷 逸韻豈當情之所可及哉萬曆甲子以壽典陞通政階享九十二歲而卒正祖癸卯一鄕章甫俎豆于安義之靖忠祠而尊仰之奉安文所謂胡門父子程家弟兄八字足以爲百世不朽之語也曷不偉哉河東鄭道鉉撰 海州鄭源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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嶠南誌卷之六十 安義郡 校院
花川祠 在搜勝臺下純祖戊寅建享夜川愼復振參判朴明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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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천면지 제2장 원사 7. 정충사(靖忠祠)
서기 1783년에 위천면 모전마을에 세워 정절공 설학재 정구(靖節公雪壑齋鄭矩) 충의공 백촌 김문기(忠毅公白村金文起)를 병향하다가 수오재 조학(守吾齋趙謔) 청송당 신복행(聽松堂愼復行) 행촌 정유문(杏村鄭惟文)을 추향하였다.
서기 1868년에 국령에 의해 훼철된 후 안의면 금천(錦川)으로 옮겼다.
원래의 소재지였던 위천면 모동리934번지는 원상복구를 위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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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천면지 제1장 비판(碑版) 20. 청송 신선생 기적비 신복행(慎復行, 1533~1624)
황산리 768번지 수승대 국민관광지 경내 청송당 담장 안에 있다. 1966년 구연서원 경내에 세웠던 것을 1987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청송당 신복행의 행적을 기리는 비다. 청송당 신복행은 효행이 지극하였고, 우애가 남달랐으며 학문이 장하였다. 역문 청송 신선생 기적비 옛날에 한문공이 동생원의 행장을 지을 때 먼저 회수와 동백산을 칭한 것은 그 산수가 현인군자와의 관련이 있음이니라. 아음의 원학동 수승대는 낙동강 상류의 큰 명승지이다. 신씨 선조가 영암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사현을 배출하였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리라. 산수 암대의 기운과 정기를 받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선생의 성은 신씨이요 휘는 복행이며 자가 성지이고 관향이 거창이다. 고려 좌복야 공헌공 휘수가 그의 시조이며 대대로 벼슬을 하였음은 국사에 소상하다. 육세조 휘가 이충으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아림부원군 양열공이고 조부의 휘가 우맹이며 승훈랑으로 이곳 안의에 처음 들어오셨다. 아버지의 휘가 권이니 곧 요수선생이라 대의 서편에 정자를 지어 요수정이라 하고 장수지소로 삼았다. 어머니는 덕은임씨이니 진사 득번의 따님이다. 1533년에 선생이 황산에서 출생하여 성품이 청수하고 기량이 넓었으며 일찍이 학업에 힘써 몸가짐의 법도를 소학으로 삼았다. 어버이 섬기는 효성이 극에 달했으니 부친상에 이르러 흐느끼며 죽 먹기 3년을 하였고 어머니상을 맞아서도 전과 다름없었다. 항상 동기간에 화합하였고 학문에 힘써 경사를 달통하고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대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그의 아우 야천공이 늘 중씨의 학문을 추앙하였다. 하니 선생의 학덕을 후학으로서 어찌 말로 평하랴. 항상 아들과 조카들에게 당부하기를 부질없는 자랑과 헛된 재조는 사람들의 뜻을 그르치기 쉬우니 너희들은 삼가라 하였다. 문장과 덕망이 당대의 근본으로 향리에서 자랑하니 옥계 노 문호공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조정에 천거하여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평생토록 자장의 녹에는 뜻이 없고 안연의 누항에 처함을 달게 여겨 도연명의 소나무를 사랑하는 취미를 초월하였다. 중년에 위수의 북녘(현용수막) 덤불산 밑에 작은 재실을 짓고 뜰에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가로되 청송당이라 하였으며 자신의 호로 하였다. 자신이 사운이수를 지었으니 그 뜻이 가상하여 동계 정 문간공이 시한수를 써 가로되 빈한한 모습도 즐거워하는 늙은이에 나이가 더해가니 깨끗한 집에서 맑은 나날이 더해가네. 일평생 정직만이 생각에 감겼고 반평생 할미처럼 앉아 읊조렸다. 새는 밤에 취중에서 잠깨어보니 별과달이 자리를 옮겼고 섬세한 창가에서 잠깨어 보니 차가움이 옷깃에 스며드네. 학과 곳집 인연이 아니로되 선생 집 가운데 앉았으니 솔숲이라 하여도 어느 곳에 이 읊조림 있으랴. 이 시를 보면 선생의 정직한 성품과 티 하나 없는 욱욱청청 군자절의 솔 그리고 곳집속의 학으로 비유하였으니 흔히 나는 인물이 아니리라. 그 재주 특출하였고 그 뜻은 항상 탁함을 물리치고 맑음을 택하였다. 명산을 밟으며 넉넉히 노닐면서 읊조렸지만은 뜻하던바 어찌 다했으랴. 만력 갑자에 수직으로 통정 벼슬을 받고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정조계묘년이다 향중 선비들이 정충사에 모셨으니 봉안문에 호문부자 정가제형의 여덟 글자는 백세토록 새길 어구이다. 후손 종의가 경양산방까지 나를 찾아와 선생의 행장을 내어 놓으면서 선조의 행의는 진실 그대로 후대에 전수토록 해야 하는데 세월이 갈수록 누락이 걱정되니 비로소 실상을 기록하기로 의논이 되었다 하며 나에게 글을 요청하므로 내 비록 능하지 못하나 거절 할 수 없어 그 행장문을 안찰하여 기술하였다. 단기4299년 병오3월 일 하동 정도현이 찬하고 해주 정원진이 삼가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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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峯先生遺書 河謙鎭 (1870~1946) 叔亨(숙형) 晦峰(회봉) 晋陽(진양)
晦峯先生遺書卷之三十五 記 鍾潭書院記
故禮曹參判贈大冢宰知足堂先生朴公舊享靖忠祠純祖二十年(1820,순조20)移奉于花川書院高宗帝在宥之初執政建言於朝悉廢國中祠院花川亦因是而毁焉頃十數年前娥林天嶺諸士友以爲書 院雖廢私自尸祝有古竹林精舍儀節猶可爲也廼營起鍾潭書堂 春秋設紙榜行釋菜儀鍾潭公請告歸鄕時藏修地也又後以爲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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菜以退陶李先生非有自任以斯道者則不可之說觀之則亦不可 行不如改書堂之名陞爲書院變紙榜之儀立祠以享庶幾猶合於 禮蓋花川不可復而鍾潭亦公之有遺躅也朝命不可望而士林 之意亦公議也於是別建祠宇於書堂之北三間衆皆合力敦事無 有後者而鄭君鍾述愼君玘晟實先後之將以今年秋冬之交而奉 安祀版朴君相大鳳浩先事走數百里過余請爲文以記之余不敢 辭則謹奉祠名曰尙德講堂之東夾曰含輝室取公觀察公忠淸道 時敎書玉蘊山含輝之語也西夾曰弄歸軒公所築弄月亭在鍾 潭之西昔程伯淳先生有言吟風弄月以歸有吾與點之意義實相 合也門曰春陽陽南方也門必南向神道碑銘中有曰澤物爲心燠 乎春陽之被是其著題也總而名之曰鍾潭書院夫書院之廢興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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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儒敎之隆衰儒敎之隆衰關於時運之否泰自公沒至今三數百 年儒敎衰而斯文爲異端時運否而人類爲彝裔獨幸先生學問淵 源立朝風節其遺韻餘烈藹然被於一方之間後之人追慕興想 卽其杖屨精采之所留而重新其院享此可見天理之不終於亡而 人心之爲異日陽復之兆無疑非可誣也謹備書之如此以塞其請 且以諗于來世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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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明榑 1571 1639 密陽 汝昇 知足堂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년(헌종 12)~1919년
俛宇先生文集卷之百四十七 / 碑
嘉義大夫,行禮曹參判,同知禁義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舘事,世子左賓客,知足堂先生朴公神道碑。甲寅(1914)
粤崇禎戊寅我憲文王十六年冬。知足堂先生朴公。由秋官亞卿。出都護江陵府。以翼年八月十一日終于官。上命有司致賵賻。旣又伻官酹侑。其辭之畧曰念卿平生。制行修飭。內篤孝友。外去矯飾。處事接物。誠實無僞。國之藎臣。鄕稱善士。七紆郡章。四壁徒倚。妻子呼飢。恬不爲意。處人所難。世或不知。予用卿晩。未究厥施。興言及此。尤切悼惜。嗚呼。是可以想公之受知於聖明者深矣。以是歲之十一月。葬于所居安陰縣之板屹洞枕亥之岡。從先兆也。龍洲趙文簡公爲之誌其玄堂。偉蹟鴻詞。足不朽無窮矣。逮寧陵辛卯。追論宣武從勳。贈大冢宰兼知經筵義禁府春秋畧事世子左賓客。隱卒之典備矣。獨其顯刻於神道具螭龜之儀者。尙數百載未有講焉。豈次第有待於太常氏之節惠以易名歟。今其世胄膺煥甫。方克家述緖。不懈于永慕。歎曰儀之不修久矣。今日者尙可以有待乎。遂屬余以叙而銘之。辭屢而不能得。則謹按之。公諱明榑字汝昇。高麗侍中密城君彥孚之後也。本朝有忠毅公天卿以勳封銀山。其子文貞公敷又襲封。是生允利縣令贈左贊成。是生機副司直贈左參贊。公四世祖也。曾祖承淑勵節校尉擧賢良。己卯之禍。坐謫不究于用。贈左通禮。王考曰德馨訓導贈左承旨。考瀠濟用監正贈戶曹參判。妣貞夫人文化柳氏。判官希畢女。隆慶辛未公生。擧止異凡。聰明過人。六歲上學。八歲解作文。駸駸有步趣。甫成童。從崔簡易岦於晉州。求章家軌範。崔公器異之。爲之傾倒不倦。年二十登增廣丙第。由校書正字陞承文院著作。明年壬辰。倭寇大至。與鄕長老鄭嶧陽惟明,成石谷彭年。通文列邑。勸倡義旅。謁招諭使鶴峰金文忠公於矗石樓。從郭忠翼公再祐于宜寧義陣。往來招募。勞勩弘多。已而巡邊使辟公爲從事。公方巡募列邑。期有成績。及巡邊敗還而公無所屬矣。明年秋。趨覲于江西之行朝。仍扈駕還京師。拜成均博士。差接伴使從事。迎慰天兵於星州。召以說書不赴。軆察使李文忠公元翼以湖南饑荒。薦公爲賑恤差員往救之。措劃分俵有術。民無餓莩。頌聲載路。丁酉寇再動。所至屠掠。列邑崩潰。時安陰守郭忠烈公䞭與咸陽守趙忠毅公宗道。以朝命據守黃石城。傍近民上咸歸之。公奉父母諸眷亦往依焉。賊將迫。軆察及元帥傳令出老弱。盖爲孤城勢危也。公遂奉親移避于茂朱之赤裳山。八月黃石陷。郭趙二公殉于事。公大傷痛。爲詩以吊之。旣又立傳以紀其烈蹟。己亥春。以說書赴召。時光海在東宮。對宮僚有倨傲色。公直言規之。東宮不悅。明日遞公職。秋斥補海州牧判官。時經大亂。州務叢委。公從容剸理。事辦而民安。猾吏相戒。不敢干以一言。與刺臬不相能。投紱而歸。民爭攀轅號呼。至不得行者久。壬寅有正言之除。以親病辭不就。明年丁大人公憂。廬墓守制。毁瘠幾不勝。乙巳錄宣武勳。丙午由持平出爲居山丞兼北靑敎授提督屬校。勸講興學。北方士子競宗師之。戊申光海主立。遷公延曙丞。明年知陜川郡。郡有權貴。勢傾朝野。公守正不少撓。竟中以法見罷。冬叙授工曹郞。辛亥拜古阜郡。旋又見罷。遭大夫人憂。廬墓致毁如前喪。甲寅有永昌之獄。桐溪鄭文簡公抗章切諫。主怒將置之死。嶺人士治䟽伸救。公貽書敦勉曰是不特爲鄭地。誠以一脉公論。扶綱常明是非。亘天終古。有不可泯滅者。三司構劾。削公仕版。已而左貶爲木川訓導。更移順天。促令謝恩。公夷然以就。無幾微色。兇魁遣人私曰一變所執。舊職可復。公不答而行。戊午母后廢處西宮。公被構就理。幾陷不測。倖而放歸。自是杜門懾處。若不聞于世者。及仁祖改玉。收錄廢斥。首召公以副修撰知製敎。辭不赴。遂除大丘府使兼元帥府管餉使。啓請罷士子防戍之弊。奪還諸宮家勒占私庄。募民屯耕。以充軍須。甲子知竹山府。重建夫子廟。聚邑秀嚴課程以敎之。一境興行。丁卯遷濟州牧。時西警日棘。公修城壕繕器械。政簡而民不擾。內賜表裏以褒之。越三年以病乞遞。旋拜刑曹參議。庚午出知蔚山府。䟽陳邑弊五條。皆切於目前軍民之急。辛未乞遞。付僉樞事。甲戌以同副承旨召。遷右副左副。時上旣追崇元宗。且欲隮祔于成廟。公啓請別立廟宇。寢隮祔之議。上大怒將拿鞠。賴大臣請對力救乃止。陞左承旨。仍拜公淸道觀察使。到界專以承流宣化爲圖報。奬學興廢。廉白自持。秋毫無所與。丙子召參判禮曹。廷有短之者。上曰此人朴實好古。不事邊幅。予嘉其爲人。公引嫌力辭不允。秋呈遞付副護軍。冬翟師東搶。公扈駕入南漢。和議方張。公謂崔遲川鳴吉曰明公平日讀書。乃講究此等義乎。及下城。公陪駕還都。上疏陳當務之急。除判决事兼副摠管。俄遷戶曹。啓請削罷監司守令之不法者。三呈告還鄕。付虎賁衛司直。明年正月。以禮曹參判召。屢辭不允。黽勉造朝。上䟽請蠲各司貢物之不緊者。以紓民力。三呈辭始遞。旋除漢城左尹。遷同知義禁府事。復由左承旨陞都承旨。兼宗簿寺提調。轉刑曹參判。有臺官劾金淸陰尙憲偃息便地。不肯來覲。亟請加罪。並及桐溪。公上箚爭之曰當南漢之日。誓死不變。尙憲與蘊二人而已。竟不成守死之論。又不遂决死之義。則二人之心。不過以罪自處。沒齒畎畝而已。願亟奬攘夷尊王之臣。痛斥猜忠嫉直之輩。冬備局以江陵大府也。自經亂離。撫治失宜。薦公以重望出鎭之。上可之。公引疾力辭不允。遂之任。䟽陳邑弊。將次第釐革。而公已寢疾不可爲矣。嗚呼。公之始終大節。此其槩也。而若其所本則有之。盖自童年。拜葛川林先生于講座。而早已有所觀感而思興矣。旣又從學于嶧陽鄭公則得與其胤子桐溪先生。刮劘潛滋。趨向益正。及夫妙歲釋褐。英譽方騰。而猶不以儻來爲汲汲。恐在我者之未足以自信也。於是就請事於寒岡鄭先生之門。究中庸大學之旨。獲聞退陶,南冥二老先生相傳之詮訣。體認服行。久而不厭。旣又從西厓柳文忠,愚伏鄭文莊,旅軒張文康諸先生而周旋講貫。所詣日高而所履益裕。其遊宦過從推服輸許則有若梧里若淸陰若龍洲及漢陰李文翼,月沙李文忠,五峯李文僖。皆一時之元老碩德正人淸流也。公於是無往而不薰蒸浸漬而厚積于躬矣。是以其出處行藏。綽然無所苟。立朝而盡謇諤之節。而亦不嶢嶢以沽直。莅民而竭綏撫之策。而亦不喣喣以邀譽。廢斥拘阨於兇威方煽之日。而不以禍福少撓。受知顯庸於睿衷交孚之際。而不以進取爲急。歷典郡臬而淸素若韋布。家人常不免於飢寒。夫非所學之正而所守之篤。果能爾乎。所謂魯無君子。斯焉取斯。其是之謂歟。公娶貞夫人商山金氏。贈參判㔦之女。只有四女。取弟明桂之男爾點爲嗣。女適士人盧腀,金忠立,進士鄭光淵,士人李俊英。側室一男必照。爾點二男厚基,世基。盧男五亨履,亨朴,亨賁,亨百,亨萬。金男二益兼,命兼。鄭男二世模,世楨。李男一起楨。繼世甚繁。可徵于家譜也。公甞以知足名其堂。天使朱太史之蕃爲之書其額。又甞置弄月亭于川上。爲歸老之計。而感激遭遇。竟不得遂其志。然其灑然無所係累。不以一毫外至嬰情者。則玆可以觀矣。銘曰。
翹翹乎鸑鷟之翔也。可以儀可以章而不嬉于搶楡也。桓桓乎騏驥之驟也。可以歷險可以致遠而不疲于範驅也。塵暗于野。旁旁乎疾赴之車也。日暮于林。惻惻乎反哺之禽也。烈莫不焚。惟玉質之不可燬也。涅孰不汚。惟鷺性之不可黔也。文而不夸。其缶之盈於有孚也。直而不矯。其矢之發於正己也。洗手而治。凜然氷條之淸也。澤物爲心。燠乎春陽之被也。是盖鼓鑄乎大治之韛。薰襲乎衆香之室。得之深養之厚執之確而動之罔不吉也。聖有鑑賞。嘉乃醇朴。于內于外。載勤拔擢。臣心知足。臣有茅棟。明月滿川。歸歟可弄。王曰勿亟。予遭家多難。予夙夜孔憂。爾曷堪遽安。得君之重。往撫臨瀛。予將召君。爾公爾卿。黽勉盡瘁。東民墮淚。聖有恩酹。一袞一字。金櫃有券。王國有史。芬徽郁郁。君子千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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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先生文集卷之八 附錄 行狀 二
公諱明榑字汝昇自號知足堂新羅公子密城大 君之裔高麗侍中諱彦孚其中祖也簪纓相承六 傳至諱永均銀山府院君諡文憲公生諱天卿入 我朝策勳又封府院君諡忠毅公生諱敷護軍 諡文貞公世襲君生諱允利縣令佔▼(亻+畢)齋門人 贈左贊成生諱機副司直贈左參贊公高祖也 曾祖諱承淑勵節校尉己卯乙巳竝被竄馨贈左 通禮祖諱德馨咸安訓導贈左承旨考諱瀠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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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著濟用監正贈戶曹參判公故推恩三世妣 贈貞夫人文化柳氏判官希畢女以隆慶五年 辛未十一月十一日生公髫齔岐嶷有異質穎悟 絶倫就傳不煩提撕讀書便能解義八九歲出語 驚人頃刻成章數百語駸駸闊步聲譽大譟巡察 使金公睟至縣聞公名謂其將大有爲之器非局 於科臼者也載與俱屬晉州牧伯崔簡易岦簡易 俾之讀昌黎集及見著述則又大奇悉言其軌範 甫弱冠擢萬曆庚寅增廣丙科及第李相廷黽贈 之詩曰庚寅吾榜稱爲盛四十人中最少年李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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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也補校書副正字明年除著依秋謁寒岡丈席 假館受庸學聞爲學大方時日亂猖獗往來金鶴 峯招諭幕及郭義將再祐陣協贊居多旣已差巡 邊使從事以公爲能幹一委軍務措注撫摩軍心 附焉癸巳扈駕龍灣歸授博士丁酉再猘奉二 親入赤裳山百口以全公曾爲侍講說書遂遷典 籍己亥復以說書拜戶曹佐郞秋除海州判官公 年少而臨民剸煩除劇老吏惟公指劃是聽不敢 出一言朝廷將接伴唐將以公善於辭命兼禮賓 寺僉正辛丑與長官不相得解官海民守衙遮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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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留之者月餘得歸壬寅拜正言不赴癸卯丁參 判公憂廬墓質疑禮於師門居喪儀節遵而不愆 丙午以司憲府持平除居山道察訪丁未歸覲不 復赴戊申居延曙督郵數月又遞己酉拜陝川郡 守郡有仁弘手握朝權勢焰方張公素知其索性 人也一不染跡以公正處官略不撓屈故爲其黨 所陰中罷職冬拜工曹正郞辛亥又拜古阜郡守 旋被人指囑而罷未及家大夫人添喪出在途公 之恨以是益隕絶無生意甚雨露立達曙喪側衰 端沾滴不自覺鄭方伯經世惻視喪如家人歸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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雖遠賴之無跲服闋朝著大變權奸李爾瞻等縱 臾光海戕殺天倫包藏母后禍公於是時發忠憤 欲以敢言爲鄭司直蘊所先姦黨虓視鄭囚之欲 無赦公與吳正言長爲嶺儒倡叫閽申理懷疏者 中恐㤼而還公奮然抵書貴之曰頃疏不特爲鄭 地也誠以一脈公論扶綱常明是非亘天終古不 可泯滅者而趑趄江干觀望利害而返諸君之失 不旣大乎又曰萬里風波舟楫顚危毒霧炎瘴孤 忠可惜若使已發之公論一噎而不再則萬古士 氣錯於一朝有閔靜者承爾瞻旨告公急三司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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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幾陷不測竟羅職削仕版又厄公逐貶途困之 無不至公遂舉家往九羅不復出十年天啓癸亥 三月今上反正天日復明起廢斥者以進放鄭 蘊還又召公以副修撰辭以猥不赴夏除大邱府 使大臣奏薦公幹局宜俾饋運兼授元帥府管餉 使加資壐書以褒諭甲子春免歸冬拜竹山府使 竹畿輔之衝被兵燹最酷無孔子廟公下車拮据 凋弊鳩材創建廟貌始儼率諸生行釋奠選其尤 者居之捐廩責課於是士知趨向竹民磨崖以頌 之丙寅冬吏曹啓濟州海島重藩須得其人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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綏擧公爲牧使公至則修理城壕繕完器械以備 不虞民多反復梗化導之禮俗以彝倫文學是務 未周年習俗一變受表裏賜己巳以病疏辭未 渡晦除刑曹參議詣闕謝恩呈辭而還十二月 拜蔚山府使鄕校頹圮公廨湫溢公規劃方便以 改葺以重創得一新之又上疏陳民弊曰軍伍曰 戰船曰田結曰牧場曰官屬也得減逃軍布三之 二申省得遞民吏之攀鐙隨者逆路失聲於是或 付軍銜或除專城一不赴甲戌起拜同副承旨遷 右副左副入侍啓柳▼(示+㐱)之不當罪又已身死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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寢推考時元宗祔廟判下臺諫館學爭不可 上命削竄政院不擧行上催促擧行公啓曰 聖明之世有此無前之擧措臣寧被違命之罪 不欲致聖明之瑕累也又曰旣追徽號又下 皇明誥勅則尊親之誠此外無加欲以躋祔於 成廟自非聖人本意繼言別立廟室不失禮經 云云上大怒其終始拒逆欲拿鞠因大臣請對亟 救止乙亥四月除授公淸道觀察使宣醞諭敎 丙子秋以禮曹參判召還有短之者上責之曰 此人朴實好古不事邊幅予嘉其爲人公再疏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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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牌招催入乃謝恩秋三度呈告焚黃于家 冬西警急卽還朝十二月虜果大擧來侵以軍職 隨駕入南漢百官多步從公喘息急猶不少離 左右上悶其老欲少徐不可得山城旣被圍勢 若不保朝夕當事者曰東宮不可不往稱皇帝 稱臣不可不爲公讓之又白上勿聽洪瑞鳳見 公曰終是如某某而斥和將置宗社於何地公笑 曰相公果知和爲宗社獨安瑞鳳咄咄視公江都 敗報至公益陳備禦之策當事者斥公乃定出城 議公痛哭而出三月隨駕還都陳疏極言自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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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務之急拜掌禮院判決事夏陞嘉義復以判決 遷戶參三告不待命出宿門外明日渡江下城 之日公意已決矣歸築菟裘亭名弄月者於月淵 公之志於是益可見戊寅春拜禮曹參判召不至 再召乃謝恩朝廷欲蠲貢計元貢減三分之一 此言徒經費不足而無實惠於民也公上疏以爲 祭享正供元不可減也自餘緊用者亦不可減 也條擧不緊而爲民害者請減去如是則經費無 不足而爲民惠不啻其減一實優過於減二也三 月除漢城左尹兼同義禁五月移左承旨八月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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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承旨不悅者屢短之上答曰此人淳朴無俗 態除授長官未爲不可呈辭不允屢侍經筵啓 沃弘多十月再除刑參每除必呈告者三而遞時 臺憲劾金尙憲不爲來覲自潔其身幷及鄭蘊公 箚卞曰南漢之日誓死不變尙憲與蘊二人忠憤 固無先後若以剚刃與否罪與不罪議甚無據竟 不成死守之論又不遂決死之議則二人之心不 過以罪自處沒齒畎畝而已謂之潔身而忘殿 下則情外也又曰此何時也國之亡無日矣君臣 上下固當同心合力期雪會稽之恥歸命父母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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邦者念不爲此傾軋一世是何憲府之所見冬除 江陵府使府承比歲之凶荒公私赤立公見餓莩 相望惻然食不下咽曰焉有受人之牛羊立視其 死而獨安飽者乎減官廚不設酌又陳疏請救弊 瘼其一大同也其二田結也其三族隣也其四炮 保也其五迎送也民之聚散邑之完敗係此尋公 歿該曺不報己卯八月十一日卒于官九月返櫬 于家十一月二十五日葬于板屹洞先兆之左亥 坐訃聞上爲之震悼遣官賜侑貞夫人尙州 金氏贈刑曹參判㔦之女生四女不育男取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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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桂子爾點爲嗣女長適士人盧腀五男三女男 亨履亨朴亨相餘幼次適金忠立二男一女次適 進士鄭光淵二男三女男世柱餘幼次適士人李 俊英一男一女幼側室子必照八歲公天姿英達 溫如良玉粹如精金肫肫乎其仁恕也挺挺乎其 貞介也本之德性而濟以學問故立心制行藹然 循理但見一團沖和呈露於言動而亦無所事於 拘檢也聰明絶人幼時所讀經史至老誦之一字 無錯於星曆算數律令亦皆旁通爲文章不甚用 意而辭達理順知布帛菽粟之爲可貴立朝也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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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格非之藎臣臨民也決覈如流之循吏其治生 也疎四壁徒立休官之日常有夕炊之憂而其饋 餉也則運辨恒有餘偫軍中倚以無餒由是以登 庸簡在聖心也由是以藩命每出遴薦也常以 古法古禮不復於今爲恥當官以事君不欺精白 寬簡爲本領爲政以蘇民祛瘼興學作人爲急務 雖關節旁午謗彈諱騰而見得旣定則終莫之移 奪也每去官不以一物自隨素食啖菜視布衣時 無加夫人田業在丹城頗腴而尺貨寸貲亦無所 理長平生不以廚傳之薄撻一吏曰吾起自淸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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踰分叨祿免薪水之勞則足矣敢營立口腹乎其 廉潔如此公立朝五十年位躋台躔而持心巽約 難進而易退故除必辭遞必歸未嘗留心於宦業 然猶以受國厚恩而致仕之年迫事君之日短爲 惶恐也再入銀臺人不堪其勩未嘗一日告病歷 典郡紱黽勉奉公驅策東西燥濕不敢勞殆古人 致命之義而公實庶幾焉於乎公早被大賢時雨 之化薰陶傳習成就其所受故於義利行藏諦得 明甚謇諤朝端只知有國不知有身動遭顚躓雖 九死而靡悔也此其所以終能樹立卓然可觀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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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榮辱不能動公之一髮平生學力蓋不可誣耳 惜乎晩始際遇淸明恩寵之日隆崇秩之方 躋而公之心已知足矣使其從容乎廊廟之上協 贊洪謨敷敎正俗以賁飾王猷何渠不做唐虞之 君民而天旣降之才學而不與之年壽與時又無 以展盡蘊抱柰吾道之將廢何哉悲夫余以同年 久要步武翶翔於臺閣之趨齊亦以劘礱於文苑 之椎敲白首相善殆有莫逆於心者而一朝相失 遽遽然絃絶矣嗣孤以述善屬余余固無能爲役 於亡友地然義有所不忍拒捃摭平日深相得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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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感於心者以爲狀如右
崇祿大夫行議政府左參贊兼判義禁府事知 經筵事弘文館提學韓平君李慶全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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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先生文集卷之八 附錄 行狀 二
公諱明榑字汝昇密陽人朴彦孚之裔八世祖諱 永均仕高麗朝銀山府院君諡文獻七世祖諱天 卿入我朝爲中正大夫典客令封密城君諡忠 毅六世祖諱敷虎勇衛大護軍襲封密城君諡文 貞五世祖諱允利行通政大夫沃溝鎭兵馬節制 使贈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號養心亭 高祖諱機行忠武衛副司直贈議政府左參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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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祖諱承淑忠順衛勵節校尉娶牧使鄭從雅之 子別提玉堅之女自晉州因家安陰地贈通訓 大夫通禮院左通禮祖諱德馨奉正大夫行咸安 訓導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 贊官考諱瀠稟質眞淳居家孝友行濟用監奉事 贈嘉善大夫戶曹參判妣文化柳氏贈判官 諱希畢之女高麗大丞車達之後領議政亮判尹 京生乃六世五世祖也爲婦爲母克遵女憲贈 貞夫人三世推恩皆以公貴也公以隆慶五年 辛未十一月十一日己巳生幼有異質聰明穎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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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性絶人不煩提撕八九歲已有驚人語自是詞 藻大進下筆成章華聞藉甚觀察使入縣招見之 亟加嘆賞時晉州牧使崔公岦以文章鳴一世屬 之令學公以人子悅親莫如科擧遂專意擧子業 擢萬曆庚寅增廣南以恭榜丙科及第月沙李相 國廷龜同年也贈公詩有庚寅吾榜稱爲盛四十 人中最少年之句補校書館副正字歷著作博士 丁酉例遷成均館典籍己亥夏拜戶曹佐郞秋拜 海州牧判官庚子春朝廷以唐將接伴時善於 辭命陞敍兼禮賓寺僉正辛丑春與長官不相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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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棄歸海民守衙遮道浹月還鄕癸卯丁外艱廬 墓啜粥乙巳服闋丙午冬拜居山道察訪丁未以 省大夫人歸遂不復赴戊申春拜延曙道察訪夏 遞己酉拜陝川郡守當時陝郡兇焰方熾而公略 不撓屈關節無所施一以公正遂爲其黨所陰中 罷職冬拜工曹正郞辛亥春拜古阜郡守赴任數 月以事罷未及返家大夫人病歿于完山旅次公 以在道逢釁殆不自容哭擗隕絶雖甚雨達曙沾 濕不離喪側沿路觀者莫不流涕賴方伯鄭公經 世扶護得以返故癸丑服闋家居時光海政亂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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殺天倫幽廢母后公欲越樽敢言而未發會鄭 桐溪蘊抗疏觸怒安置海島嶺儒倡議叫閽而懷 疏者畏禍中止公奮然作文布告列邑聲罪止疏 之儒有曰頃日之疏非爲鄭司直地也扶綱常明 是非亘天終古而不可泯滅者也鬼域之輩用此 羅織幾陷不測竟至削去仕版遂杜門故山時與 田翁溪老相追逐優遊以卒歲者殆十年天啓 癸亥今上反正以弘文館校理知製敎召之辭 以猥不赴夏起拜大丘府使大臣奏薦公幹局 宜畀餽運之任遂命陞堂上階授元帥府管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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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以本官兼甲子春以事免歸冬拜竹山府使竹 在幾輔要衝酷罹兵燹物力凋弊校宇迄未復立 邑儒無所依歸公下車衋傷旣募鳩貨財營建廟 貌躬行釋菜導諸生以俎豆之儀且選其尤者常 聚于校齋嚴課而奬率之於是禮儀旣備人材稍 振丙寅冬吏曹啓以海島重藩須得其人撫綏 遂遷拜濟州牧使竹民追思立石以頌興學敎養 之美丁卯赴濟任以器仗繕完褒賜表裏一襲 崇禎己巳春以病乞遞未脫海有除刑曹參議 之命赴闕謝恩居無何遞歸冬拜蔚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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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府廨湫弊公卽爲規劃方便重創衛舍改葺客 館民爭趨事集功數月斷手辛未冬以事罷歸府 民亦樹碑以寓不忘甲戌秋起拜同副承旨歷左 右副乙亥夏銓曺啓請出拜忠淸道觀察使丙 子夏瓜滿未入朝特拜禮曺參判陞嘉善階廷 議有以純朴無華且無履歷短之者上答曰此 人朴實好古不事邊飾予嘉其爲人有此寵擢爾 等勿以爲怪公拜疏力辭不允秋乞遞得命焚 黃于松楸冬歸朝遭鉅亂以散班扈駕南漢 丁丑春隨駕出城陳疏極言自上當務之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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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掌隷院判決事夏陞嘉義階遷戶曹參判兼都 摠府副摠管戊寅春復拜禮曺參判遷漢城府左 尹兼同知義禁府事夏拜左承旨秋遷都承旨廷 中又有短之者上批曰此人醇謹少無俗態除 授長官未爲不可公又懇辭不允遷刑曺參判 冬拜江陵府使己卯秋寢疾八月十一日考終于 官享年六十九九月二十五日孤爾點奉喪返殯 于家訃聞上爲之震悼十月十五日遣禮官弔 祭十一月二十五日葬于縣北板屹山亥坐原從 先兆也公早事寒岡鄭先生得傳理學旨訣故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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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蒼黃顚沛之中不違規矩樹立卓異也公符采 寬和溫溫如春煦處心慈詳仁恕居家左右婢僕 未嘗遭罵詈箠楚事親自知不足養生死葬備盡 情文追遠之禮尤致謹潔待人接物不以表襮畛 域只是一團悃愊性不喜麯糱書策筆札之外無 所玩好深於史學長於吏能星曆律令算數之類 靡不貫穿常以古法古禮不復於今爲恥當官以 事君不欺廉白寬簡爲本領爲政以蘇殘去瘼興 學作人爲急務聽訟折獄以平反公正爲準的雖 關節旁午彈謗喧騰見得旣定則終莫之移奪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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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生羞以廚傳之薄罰一吏卒常思布衣啖菜之 時而曰吾幸起自孤寒受國厚恩叨此祿位涯 分已踰得免薪水之勞足矣何敢營口腹乎立 朝五十年七典郡邑秋毫無所近夫人田業在丹 城頗腴而寸貲尺貨無所理長居第蕭然不庇風 雨休官之日四壁懸罄百口恒不免飢寒感晩節 寵遇之隆懷古人致命之義周旋羈靮黽勉夙 夜常曰吾年致仕事君之曰短時丁罔極謀國才 疏當竭力盡瘁驅策東西燥濕不敢告勞庶可報 聖恩萬一在銀臺未嘗一日病告人不堪其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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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公裕如也及守江陵承比歲凶荒之餘公私掃 地赤立境內餓莩相望公見聞輒咿嘎良久猶已 飢之曰焉有受人牛羊立視其死而獨享安飽者 乎自是長夏官廚令減晝煙或置茶粥而已人不 堪其儉而公晏如也公自號知足亦號嶺癡朱 詔使之蕃之來公爲迎接郞廳朱與之語器重之 書知足堂三字以贈之云夫人尙州金氏贈刑 曹參判㔦之之女兵曹正郞守敦韓山郡守濂乃 其曾祖祖也生二男皆不育取弟明桂之男爲後 爾點是也娶忠義衛李埱之女生二男三女長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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厚基次曰世基女適權大毅權再亨季幼女子子 四人長適士人盧腀生五男三女男曰亨履亨朴 亨賁享百亨萬女適裴世緯河彬次幼次適士人 金忠立生二男一女男曰益兼命兼女適盧亨大 次適進士鄭光淵卽敢述公之行狀者也生二男 三女男曰世模世棹女適梁用濟梁鎭南房世望 季適士人李俊英生一男一女男曰起楨女適許 繕側室子必照生三男二女皆幼
女壻進士河東鄭光淵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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酉澗先生文集 朴熙典 (1803~1888) 文則(문칙) 酉澗(유간) 密城(밀성) 거주지 : 居昌(거창)
酉澗先生文集卷之四 雜著 知足堂先生朴公行狀
公性朴氏諱明榑字汝昪初號嶺癡又號曰知足堂 唐朱詔使之蕃之筆也中祖諱彦孚高麗尙書左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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射太師自是繼世舃赫八代祖諱永均爲門下侍中 銀山府院君諡文憲七代祖諱天卿卽忠肅公松隱 先生仲弟也入本朝爲中靖大夫典客令封密城 君五代祖諱允利兵馬節制使高祖諱機以門蔭補 散職忠武衛副司直曾祖諱承淑勵節校尉贈通 禮院左通禮祖諱德馨咸安訓導贈承政院左承 旨兼經筵參贊官考諱瀠不仕贈戶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妣文化柳氏贈軍資監判官希畢 之女文城府院君忠亮之六世孫也贈貞夫人公 以隆慶五年辛未十一月己巳生於花林府光風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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岐嶷有異質聰明强記出就外傅不煩提撕讀書便 能解義未毁齔善屬文有驚人語自是詞藻大進下 筆成章華聞日富觀察使金公晬素簡貴少許可至 縣要見公試以詞賦頃刻立就金公吐舌稱賞曰將 大有爲之器非局於科套者也乃屬于崔東皐豈資 之令學崔在晉牧時也東皐開示作文繩尺甚悉時 年十四公不以詞章之學爲意乃師事寒罔鄭先生 心學辨論克受肘訣著力於誠正格致之工至如功 令文字視如弁髦爲榮親地中萬曆庚寅增廣丙科 月沙李公廷龜同榜也有贈公詩曰庚寅吾榜稱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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盛四十人中最少年其見許如此由著作博士遷成 均典籍壬辰之亂擧公爲巡邊使從事官以公爲能 幹以軍事委之丁酉亦以從事赴亂倭醜猖獗安陰 黃石山城旣陷大笑軒趙公宗道存齋郭公䞭幷立 慬而其餘亦多殉節聖朝以公爲本邑人有敎作 實記己亥夏拜戶曹正郞秋除海州牧判庚子春爲 唐將接伴使以公爲善於辭命陞敍禮賓寺僉正兼 本治辛丑春解歸海民遮道攀輿使不得歸者月餘 癸卯丁外艱居喪祭儀一遵禮制乙巳服闋丙午拜 工曹正郞已酉拜晉州牧判辭遞不赴旋拜陜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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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郡有遙執朝權者曰仁弘公知其爲索性人常以 公正處之略不撓屈彼張甚陰中以危法無何有赦 令敍拜工曹正郞辛亥春拜古阜郡守赴任數朔爲 奸黨斥罷夏丁內艱廬墓三年喪葬祭禮常稟於寒 岡先生癸丑闋制家居無意榮塗是時卽光海廢朝 也權奸當路素亂朝綱斁絶彝倫公移卜咸陽之九 羅村結草舍藜牀布薦爲永遯之計適被包彈卽還 故莊甲寅夏同邑居司直鄭公蘊陳義抗疏奸黨鵲 起致于理竄之遠外卽耽羅海島中也嶺下若而人 始議封囊伸救而竟爲彼類所沮公聞卽奮筆通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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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內曰不徒爲鄭司直地繫是扶綱常明是非亙天 終古而不可泯滅者也乃自擬封疏聞者莫不豎髮 諂邪之輩察伺動靜告于其魁凶焰相煽削仕籍罹 禁錮完平李公元翼亦同時被逐公自是無人世意 杜門凷蟄殆十年天啓癸亥仁廟改玉放逐奸兇 登崇儁良以公除大邱府使大臣於榻前奏薦謂 有幹局運饋司非此人不可遂命陞堂上爲元帥 府管餉敎若曰肆嶺南之置管使若關中之有蕭 何安得斯人用底可續惟爾十載昏衢一不染跡服 騏驥以鹽車郵吏行役棲鸞鳳於枳棘反刺翶翔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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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合於亂邦果擯斥於當世幾年荒野之逬迹今日 雄府之勿憂云云甲子春遞職冬拜竹山府使竹當 畿輔要衝酷罹兵燹物力凋弊校樣未復公下車募 財先建聖殿又立堂廡一時俱新躬謁釋菜引諸 生敎以揖讓之節禮俗旣成人材稍振竹民立石有 去後之思丙寅冬吏曹以耽羅雄藩須得其人乃可 治奏拜濟州牧丁卯春赴任越明年戊辰夏以器仗 繕完賜表裏一襲己巳春以病瘴陳疏乞遞不允 夏有秋曹參議之命卽赴京謝恩乞遞歸冬拜蔚 山府使重創衙舍不費民力府民伐石頌德辛未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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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鄕卜居城北構小堂於溪上名曰樂波軒家食者 迄四年甲戌起拜同副承旨又歷右副左副乙亥夏 拜公忠道觀察使兼巡察敎若曰歷試州郡淸白 眞如一條之氷及除秋官嚴明不違三尺之律肆擢 置於左右得老成於腹心幾多承綸惟允出納經年 待漏彌篤忠貞乃知宣化於湖西非卿不可是以協 望於僉擧惟汝之諧丙子夏滿爪入京授軍職俄拜 禮曹參判陞嘉善階人有短公者批白此人朴實 好古不事邊飾予甚嘉其爲人有此寵擢爾等勿以 爲言公拜疏力辭不允秋乞遞得命焚黃于楸下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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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歸朝遭時艱虞以散班扈駕南漢丁丑春金兵 退隨駕出城以禮曹參判兼掌肄院判決事陳當務 疏陞嘉義階夏遷戶曹參判兼都摠府副總管戊 寅春又拜禮曹參判遷漢城府左尹兼同知義禁府 事拜左承旨秋遷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 撰官遷刑曹參判兼宗簿寺提調冬拜江陵大都護 府使己卯秋八月十一日以病卒于官享年六十九 嗣子爾點奉喪返于家訃聞上爲之震悼令有司 賵賻有加又命儀曹郞金善英齎香祝致祭贈資 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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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左賓客配貞夫人商山金氏贈參判㔦之之 女兵曹正郞守敦韓山郡守濂乃其曾祖與祖也是 年冬十一月二十五日葬于金猿山板屹洞先塋靑 龍邊亥原享本府華巖書院公天姿溫粹英達襮 員而裏方其居家也淸儉其立朝也忠直誠以奉先 孝以事親友以待弟至於僕隷未嘗加詈罵箠楚生 養死葬備盡情文追遠之禮尤致謹潔每遇親忌垂 泣竟夕哀號不止又能信於朋友恂於鄕黨待人接 物不爲表襮畛域蓋性然也不喜麴孼饌不兼味雖 居宰樞被服飮食亦無少加龍洲趙公撰墓銘曰七
:: 0085 ::
城脂膏曾不得染一指者非以是耶才諝天出兒時 所讀至老不錯一字先輩賦詠之什朋友贈行之作 雖屬數三十年叩之則應口誦無得星曆算數無不 貫穿其見忤於群少也不些芥意悠然自適構數間 草屋於所居上五里許鍾潭上因以顔之曰鍾潭精 舍其傍又以手畢刻弄月亭三字於磐石常言吾所 以爲此者待鄭司直賜環之日相與歌詠於斯講論 於斯棲息於斯擬爲終老之地矣精舍中爲潦水所 漂泐但依舊宛然者石刻三字而已嗣孫東陞闔族 鳩財起亭於其上精緻制作甚稱形勝亭名依舊刻
:: 0086 ::
揭洛坡柳相公爲之記公事行早卒備載於文集而 文集之鋟梓者間亦有校尠改正處姑未印布故略 此收錄庶補其記實之資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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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先生文集卷之八 附錄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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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嘉義大夫行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 都摠府副摠管朴公諱明榑字汝昇密陽人也崇 禎戊寅冬由爽鳩氏拜江陵大都護府使越明年 八月以疾卒于官訃聞上命有司賵賻有加及 殯于家又命儀曺郞致香祝祭之鄕黨父老親 戚聚觀咨嗟涕洟咸以爲曠世哀榮將葬其孤爾 點纍然服斬來不佞門哭授公行治歷官狀請幽 室之銘不佞謝非其人不獲則退而按狀公故參 判公娶判官文化柳希畢之女隆慶辛未生公于 安陰光風里未毁齔頭角異凡兒入學纔數年驟
:: 0153 ::
長不類曺耦瞠乎后焉名聲聞一道觀察使金公 睟素簡貴少許可至縣要見公試以調賦公操筆 立就金公吐舌稱賞曰逸才逸才宜磨礱於當世 鴻匠希其光卽載而俱屬晉州牧使崔東皐岦 岦亦異之開示作文尺木甚悉萬曆庚寅公年 二十擧而決增廣大科嶺之人士艶之以博士遷 典籍己亥拜吏曺佐郞俄出爲海州判官三年有 不可於意投紱而歸壬寅拜司諫院正言癸卯丁 外艱制除除居山察訪戊申又拜延曙察訪秋以 弘文館校理召己酉拜陝川郡守時鄭仁弘張
:: 0154 ::
甚其黨惡其異於己竟中公以危法無何有赦令 敍拜吏曹正郞辛亥又出爲古阜郡守數月罷歸 夏丁內艱癸丑制除自是家居者十年坐拄群枉 也天啓癸亥今上反正起拜大丘府使有言其 幹以原官兼元帥府管餉使陞通政甲子春罷還 冬又拜竹山府使丙寅用薦選濟州牧使己巳病 遞道拜兵曹參議冬遷蔚山府使辛未以事罷甲 戌拜同副承旨歷右副左副乙亥夏出爲忠淸道 觀察使丙子秋特拜禮曹參判階嘉善其冬翟 人侵我以軍職扈駕南漢還拜掌禮院判決事
:: 0155 ::
丁丑秋賞羈靮勞階嘉義遷戶曹參判兼都摠府 副摠管戊寅春拜禮曺參判遷漢城府左尹兼同 知義禁府事夏遷左承旨秋陞都承旨俄遷戶曺 參判冬除江陵府使始公以寒士一朝成名孤身 旅長安裁物者未之奇也及爲海州公年甚少地 甚劇且時大難甫已治法政謨蝟毛老吏惟公所 指劃而不敢出一言以助事終辨治民以寧謐於 是人知公有政事才也當癸丑姦凶如李爾瞻輩 縱臾光海賊永昌七歲大君媒櫱廢母后論鄭 桐溪蘊公以司直抗疏指擿切劾姦黨鵲起致桐
:: 0156 ::
溪理俄竄耽羅海島嶺儒若而人始議封章救之 竟爲凶燄震薄氣奪縮朒公奮然作文遍告曰日 議封疏非爲鄭司直地將以扶綱常明是非聞者 壯之於是人又知公之勇於義也早年從師於寒 岡鄭公之門居家祭儀遵而不愆問禮節目在寒 岡集中於是人亦知公最於禮也公容貌溫溫常 執遜讓與朋友處順若婦女至其峙處不可奪如 此殆古所謂襮順而裏方者乎癸亥以後公之所 詘者卽伸而上亦甚知公之爲人言者論公禮 參驟陞則上批以此人朴實好古予嘉其爲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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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此寵擢言者又論公知申欠望則又批以醇謹 無俗態公之受知於聖明可謂至矣嘗曰吾年 已至七十事君日短當奉職死於官下不爲前 却計也竹之爲府在圻最殘自刳壬辰兵無孔子 廟公下車爲之節財用相諸生營建如法行釋菜 禮民立石頌之濟在絶島中民羯羠不均土亦墝 埆爲州者大率武弁牛羊視民惟良馬珍寶是急 無意繕完器械久矣得公一臨而丕變用是受表 裏賜江陵則公終政邑也去歲歲飢公治荒政 有條且曰民有菜色而吾忍獨飽乎減剋官廚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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設樽勺其慈詳惻隱類此也噫士生斯世遇不遇 時與命也公釋褐幾五十年髮種種矣而始遇 聖明入處通顯出居藩維皆以才諝聞豈公愚於 前而智於後耶公記性絶人兒時所讀至老背文 不錯一字先輩賦詠篇什朋友贈行之作雖隔數 十年過眼者叩之則應口無疑星曆算數尤其所 長云不佞少公幾十有餘歲公一不以後進致異 相驩甚昔公之罷郡家居不佞造公於咸陽里第 藜床弊薦四壁蕭然杯盤亦無兼味其後二十餘 年亦嘗過公公居宰樞日也視其被服亦無少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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焉其視世之一得意蹈綺縠刺齒肥者何如哉公 自號知足華使朱翰林之蕃書其扁曾祖曰承淑 忠武衛勵節校尉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 是去晉陽居安陰祖曰德馨奉正大夫咸安訓導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考曰瀠贈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 事以公貴推恩三代夫人尙州金氏父贈參 判㔦之祖行韓山郡守濂生子男二人女子子四 人男皆夭女長士人盧腀男五女三曰亨履亨朴 亨相餘幼次士人金忠立男二女一幼次進士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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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淵三男三女男世柱餘幼次士人李俊英一男 一女幼側室子必照八歲取弟明桂子爲後子爾 點也銘曰
貴不與富期而富自至富不與梁肉期而梁內自 至古人之有言兮不可改已胡公之旣有其貴分 乃無其富與梁肉故公之遠於禍殃兮卒齒而亨 其祿七城脂膏曾不得染公一指兮月淵巖下知 足堂四壁我銘不誣兮於千萬祀兮考此玄石
正憲大夫知中樞府事漢山趙絅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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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先生文集卷之八 附錄 神道碑銘
:: 0161 ::
粵崇禎戊寅我憲文王十六年冬知足堂朴 先生由秋官亞卿出都護江陵府以翼年八月十 一日終于官上命有司致賵賻旣又伻官酻侑 其辭之略曰念卿平生制行修飭內篤孝友外祛 矯飾處事接物誠實無僞國之藎臣鄕稱善士七 紆郡章四壁徒倚妻子呼飢恬不爲意處人所難 世或不知予用卿晩未究厥施興言及此尤切悼 惜嗚乎是可以想公之受知於聖明者深矣以 是歲之十一月葬于所居安陰縣之板屹洞枕亥 之岡從先兆也龍洲趙文簡公爲之誌其玄堂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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蹟鴻詞足不朽無窮矣逮寧陵辛卯追論宣武 從勳贈大家宰兼知經延義禁府春秋館事 世子左賓客隱卒之典備矣獨其顯刻於神道 具螭龜之儀者尙數百載未有講焉豈次第有待 於太常氏之節惠以易名歟今其世胄膺煥甫方 克家述緖不懈于永慕嘆曰儀之不修久矣今日 者尙可以有待乎遂屬余以敍而銘之辭屢而不 能得則謹按之公諱明榑字汝昇高麗侍中密城 君彦孚之後也本朝有忠毅公天卿以勳封銀 山其子文貞公敷又襲封是生允利縣令贈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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贊成是生機副司直贈左參贊公四世祖也曾 祖承淑勵節校尉擧賢良己卯之禍坐謫不究于 用贈左通禮王考曰德馨訓導贈左承旨考 瀠濟用監正贈戶曺參判妣貞夫人文化柳氏 判官希畢女隆慶辛未公生擧止異凡聰明過 人六歲上學八歲解作文駸駸有步驟甫成童從 崔簡易岦於晉州求章家軌範崔公器異之爲之 傾倒不倦年二十登增廣丙第由校書正字陞承 文院著作明年壬辰倭寇大至與鄕長老鄭嶧陽 惟明成石谷彭年通文列邑勸倡義旅謁招諭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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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峯金文忠公於矗石樓從郭忠翼公再就于宜 寧義陣往來招募勞勩弘多已而巡邊使辟公爲 從事公方巡募列邑期有成續及巡邊敗還而公 無所屬矣明年秋遂趨覲于江西之行朝仍扈 駕還京師拜成均博士差接伴使從事迎慰天 兵於星州召以說書不赴體察使李文忠公元 翼以湖南饑荒薦公爲賑恤差員往救之措劃分 俵有術民無餓莩頌聲載路丁酉寇再動所至屠 掠列邑崩潰時安陰守郭忠烈公䞭與咸陽守趙 忠毅公宗道以朝命據守黃石城傍近民士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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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之公奉父母諸眷亦往依焉賊將迫體察及元 帥傳令出老弱蓋爲孤城勢危也公遂奉親移避 于茂朱之赤裳山八月黃石陷郭趙二公殉于事 公大傷痛爲詩以弔之旣又立傳以紀其烈蹟己 亥春以說書赴召時光海在東宮對宮僚有倨 傲色公直言規之東宮不悅明日遞公職秋斥補 海州牧判官時經大難州務叢委公從容剸理事 辨而民安猾吏相戒不敢干以一言與刺臬不相 能投紱而歸民爭攀轅號呼至不得行者久壬寅 有正言之除以親病辭不就明年丁大人公憂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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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守制毁瘠幾不勝乙巳錄宣武勳丙午由持平 出爲居山丞兼北靑敎授提督屬校勸講興學北 方士子競宗師之戊申光海主立遷公延曙丞明 年知陝川郡郡有權貴勢傾朝野公守正不少撓 竟中以法見罷冬敍授工曹郞辛亥拜古阜郡旋 又見罷遭大夫人憂廬墓致毁如前喪甲寅有永 昌之獄桐溪鄭文簡公抗章切諫主怒將置之死 嶺人士治疏伸救公貽書敦勉曰是不特爲鄭地 誠以一脈公論扶網常明是非亘天終古有不可 泯滅者三司構劾削公仕版已而左貶爲木川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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導更移順天促令謝恩公夷然以就無幾微色兇 魁遣人私曰一變所執舊職可復公不答而行戊 午母后癈處西宮公被構就理幾陷不測倖而 放歸自是杜門懾處若不聞于世者及仁祖改 玉收錄廢斥首召公以副修撰知製敎辭不赴 遂除大丘府使兼元帥府管餉使啓請罷士子 防戌之弊奪還諸宮家勒占私庄募民屯耕以充 軍須甲子知竹山府重建夫子廟聚邑秀嚴課程 以敎之一境興行丁卯遷濟州牧時西警日棘公 修城壕繕器械政簡而民不擾內賜表裏以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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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越三年以病乞遞旋拜刑曹參議庚午出知蔚 山府疏陳邑弊五條皆切於目前軍民之急辛未 乞遞付僉樞事甲戌以同副承旨召遷右副左 副時上旣追崇元宗且欲隮祔于成廟公 啓請別立廟宇寢隮祔之議上大怒將拿鞫 賴大臣請對力救乃止陞左承旨仍拜公淸道觀 察使到界專以承流宣化爲圖報奬學興廢廉白 自持秋毫無所與丙子召參判禮曹廷有短之 者上曰此人朴實好古不事邊幅予嘉其爲人 有此寵擢公引嫌力辭不允秋呈遞付副護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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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翟師東搶公扈駕入南漢和議方張公謂崔 遲川鳴吉曰明公平日讀書乃講究此等議乎及 下城公陪駕還都上疏陳當務之急除判決事 兼副摠管俄遷戶曹啓請削罷監司守令之不 法者三呈告還鄕付虎賁衛司直明年正月以禮 曺參判召屢辭不允黽勉造朝上疏請蠲 各司貢物之不緊者以紓民力三呈辭始遞旋除 漢城左尹遷同知義禁府事復由左承旨陞都承 旨兼宗簿寺提調轉刑曺參判有臺官劾金淸陰 尙憲偃息便地不肯來覲亟請加罪竝及於桐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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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上箚爭之曰當南漢之日誓死不變尙憲與蘊 二人而已竟不成守死之論又不遂決死之義則 二人之心不過以罪自處沒齒畎畝而已願亟奬 攘夷尊王之臣痛斥猜忠嫉直之輩冬備局以江 陵大府也自經亂離撫治失宜薦公以重望出鎭 之上可之公引疾力辭不允遂之任疏陳邑 弊將次第釐革而公已寢疾不可爲矣嗚呼公之 始終大節此其槪也而若其所本則有之蓋自童 年拜葛川林先生于講座而早已有所觀感而思 興矣旣又從學于嶧陽鄭公則得與其胤子桐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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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刮劘潛滋趨向益正及夫妙歲釋褐英譽方 騰而猶不以儻來爲汲汲恐在我者之未足以自 信也於是就請事於寒岡鄭先生之門究中庸大 學之旨獲聞退陶南冥二老先生相傳之詮訣體 認服行久而不厭旣又從西厓柳文忠愚伏鄭文 莊旅軒張文康諸君子而周旋講貫所詣日高而 所履益裕其遊宦過從推服輸許則有若梧里若 淸陰若龍洲及漢陰李文翼月沙李文忠五峯李 文僖皆一時之元老碩德正人淸流也公於是無 往而不熏蒸浸漬而厚積于躬矣是以其出處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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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綽然無所苟立朝而盡謇諤之節而亦不嶢嶢 以沽直涖民而竭綏撫之策而亦不喣喣以邀譽 廢斥拘阨於兇威方煽之日而不以禍福少撓受 知顯庸於睿衷交孚之際而不以進取爲急歷 典郡臬而淸素若韋布家人常不免於飢寒夫非 所學之正而所守之篤果能爾乎所謂魯無君子 斯焉取斯其是之謂歟公娶貞夫人商山金氏 贈參判㔦之女只有四女取弟明桂之男爾點爲 嗣女適士人盧腀金忠立進士鄭光淵士人李俊 英側室一男必照爾點二男厚基世基盧男五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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履亨朴亨賁亨百亨萬金男二益兼命兼鄭男二 世模世楨李男一起楨繼世甚繁可徵于家譜也 公嘗以知足名其堂天使朱太史之蕃爲之書其 額又嘗置弄月亭于川上爲歸老之計而感激遭 遇竟不得遂其志然其灑然無所係累不以一毫 外至嬰情者則玆可以觀矣銘曰
翹翹乎鸑鷟之翔也可以儀可以章而不嬉于搶 楡也桓桓乎騏驥之驟也可以歷險可以致遠而 不疲于範驅也塵暗于野旁旁乎疾赴之車也日 暮于林惻惻乎反哺之禽也烈莫不焚惟玉質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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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可毁也涅孰不汚惟鷺性之不可黔也文而不 夸其缶之盈於有孚也直而不矯其矢之發於正 己也洗手而治澟然冰條之淸也澤物爲心燠乎 春陽之被也是蓋鼓鑄乎大冶之韛薰襲乎衆香 之室得之深養之厚執之確而勤之罔不吉也 聖有鑑賞嘉乃醇朴于內于外載勤拔擢臣心知 足臣有茅棟明月滿川歸歟可弄王曰勿亟予 遭家多難予夙夜孔憂爾曷堪遽安得君之重往 撫臨瀛予將召君爾公爾卿黽勉盡瘁東民墮淚 聖有恩酹一袞一字金櫃有券王國有史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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徽郁郁君子千禩
通政大夫行弘文館經筵參贊官書筵 官苞山郭鍾錫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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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先生文集卷之八 附錄 弄月亭重建記
唐人詩曰魯連特高妙繼而曰明月出海底蓋以 魯連之大義特高處惟明月可以當之爲此詩者 其知魯連乎安陰縣故判書知足堂朴先生寒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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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先生高弟也已自少日經學文章爲斯文所推 重及出而需用於世偉蹟嵬烈赫赫在史乘至今 塗人耳目吾何必贅疊爲也方公之扈駕在南 漢也和議已成事不可爲矣棄官而南爲亭於縣 西月淵巖上與弟樂汝軒爲終老之計以弄月亭 三字特銘於巖者是何意也公與桐溪鄭先生所 秉義理又是今日魯連也未知公之登斯而望月 也無乃以淵上明月把作魯連看耶魯連一明月 也明月一魯連也嬴秦以後一幅神州種種陸沈 腥塵彌然滿眼更不見出海面目今公東海上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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也乃能以尊周大義又復明月之於東海于魯連 有光焉何其壯也余嘗出宰長水路過安陰縣得 見所謂三洞者儘嶠南泉石之絶勝也彷徨乎猿 鶴花林之間因上弄月巖拚餘光而仰末照以寓 羹墻之慕矣亭廢不修距今百有餘年其嗣孫東 陞與諸宗同誠鳩財克重新之以增舊制翼然棟 宇宛然如昨日遂令溪山重輝遺芬未沫興廢雖 謂之有數亦不可謂之不肯構也以倫以晦以煥 北走屢百里過余江上顧余謂先契之重屬余記 重修余非其人塵腔俚辭或恐累及於明月分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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旌思之若以是而自附於往昔名碩之後亦某之 幸也敢爲明月之說以歸之多見其僭妄也已
癸酉之黃華節上浣大匡輔國崇祿大夫行 判中樞府事致仕奉朝賀豊山柳厚祚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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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先生文集卷之八 附錄 弄月亭重建樑頌 再重建時
翼然名亭蓋嘗爲百年作瞻依之所火于凶盜固 不可一日歸荒廢之墟無改舊觀亟圖新復恭惟 知足堂朴先生三朝舊老一代名儒早樞衣於先 師講質有的晩受知於聖主奬諭特加扈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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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戎炳炳尊攘義理斥邪扶正堂堂伸救疏章斯 皆足百代仰瞻奚獨止一時寓慕罷郡數月是爲 諸黨所射影含沙居家十年亦由群枉所推手下 石浴沂風舞以詠想聖門希舍瑟聲玩山步水以 歸慕考亭遵佩韋訓就家五里地點居數間亭滿 架圖書境幽磨礱鑽硏於靜裏盈庭風月寄遠逍 遙玩樂於閒中遺址尙存幾多行旅之指點故亭 已廢每興子孫之咨嗟所以向來積費心力上謀 猷忽然今日蕩爲㤼過裏物事是固難以情理斷 其殆一任時運然若復自此曠年久荒其肯余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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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後肆乃如彼一朝奮起庶期他忝無先階砌留 遺芬溪山改觀草木帶餘彩雲物增加四壁淸風 吹先生氣像宛爾長在三更明月弄後學意思灑 然愈新落成月辰淸和時節巾屨四面相賀濟濟 于于觥尊一席孔嘉抑抑反反乃歌六偉之頌助 擧衆工之呼兒郞偉抛梁東高臺屹立四望同 魯連明月滄溟出長夜乾坤氣像通抛梁西巖 巖屹屹與天齊人生皆有安平路先覺丁寧詔牖 迷抛梁南武夷山色繞晴嵐英才自古非無此 畢竟其誰是好男抛梁北黃石何年圯上屐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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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荒唐付有無吾家自有扶三極抛梁上四顧 茫茫天宇曠夢死醉生眞可哀回頭是岸出人上 抛梁下月淵日夜玉流瀉盈科而進放于海自 是源頭有本者伏願上梁之後民物豊盛家國泰 平亭臺不傾千萬年如一日學業無惰二三子惜 分陰
崇禎紀元后五乙未淸和節前司諫商山金麟燮謹撰
知足堂先生文集卷之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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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先生文集卷之六 附錄 年譜 지족당연보
皇明穆宗皇帝隆慶五年 宣祖大王四年 辛未十一月十一 日己巳 酉時 先生生于安義縣之光風里第 先生之先屢世晉州 之竹洞至會祖考通禮公諱承淑爲鄭別提玉堅壻始爲縣人居于光風里
六年壬申 先生二歲
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 先生三歲
二年甲戌 先生四歲
三年乙亥 先生五歲○幼岐嶷有異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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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丙子 先生六歲 始受學 聰明穎悟記性絶人及就傳不煩提督而自能力學
五年丁丑 先生七歲○孝友出天擧止異常有君子儀度鄕黨咸期以遠大
六年戊寅 先生八歲○自是讀書能知解漸進作文已體裁自成往往有驚人語祖考承旨公 甚奇愛焉
七年己卯 先生九歲○日往來村塾成石谷彭年因事過墊見先生叩其工夫趣尙曰此兒不 但爲功名之人當爲一世師表
八年庚辰 先生十歲○地主朴侯文龍聞先生才譽來見之大加稱奬歸贈筆硯米肉
九年辛巳 先生十一歲 正月遭祖考承旨公喪 參判公居喪如禮先 生不離左右侍奠哭泣一如成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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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壬午 先生十二歲
十一年癸未 先生十三歲 拜葛川先生林公 薰 於龍門書 院 葛川以文章德行爲一時師表倡率諸生會講於書院先生參講席進退有度其應講一字不錯一 座驚賞
十二年甲申 先生十四歲
十三年乙酉 先生十五歲○時詞藻大進下筆成章名聲聞一道觀察使金公睟入縣要見 試以詞賦先生操筆立就金公亟加歎賞曰逸才逸才宜磨礱於當世鴻匠希其光卽載而俱屬晉州牧 使崔簡易岦受古文昌黎等集易亦異之開示作文尺木甚悉曰其才學當不久成就○未能考其日月 姑附之一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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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丙戌 先生十六歲 往嶧洞拜嶧陽鄭公 惟明○鄭公隱居行 義奬率後進先生就學焉時公之子桐溪蘊及權湕吳佺諸公在門下同業于古縣倉舍
十五年丁亥 先生十七歲 中夏課覆試 先生以親命業擧子句格淸新儕流 不能及先生從祖祖父三五亭德聰博學謹勅士也見先生課紙曰是吾所不能難也
十六年戊子 先生十八歲 與吳思湖 長 朴進士 文楧 讀書 智谷寺 寺在山陰縣智異山中距吳朴二公之居不甚遠要與同做故往從之蓋取其資益也
十七年己丑 先生十九歲 赴增廣捷文科及第初試
十八年庚寅 先生二十歲 中會試及第出身 南以恭榜丙科第二十九 人月沙李相國廷龜同年也有贈先生詩曰庚寅吾榜稱爲盛四十人中最少年是也 選補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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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校書館副正字○聘夫人尙州金氏 先生之婦翁贈刑曹參 判㔦之翰林濂子也
十九年辛卯 先生二十一歲 除承文院著作○秋謁寒岡鄭 先生執弟子禮 嘗以家貧親老菽水難繼故從事於擧業冀見一日之養然其心不樂也 及釋褐師事鄭先生得聞古人爲己之學因假館受庸學數月而歸其文章敏識當時及門諸子皆自以 爲不及
二十年壬辰 先生二十二歲 四月日本大擧兵來侵 時賊兵長驅西 上安陰爲湖路咽喉在我爲必守之地先生從參判公倡義募軍需以遮遏往來賊多有禦侮之功 拜 招諭使鶴峯先生金公 誠一 於矗石樓 先生從鄕長老鄭嶧陽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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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谷鄭公惟文尹公劼金公信玉通文列邑以倡起義旅聞招諭使銜命過天嶺卽往晉州拜謁與幕 下諸公共議備禦之策 上書招諭使伸卞義將郭忘憂堂 再祐郭公 遮截鼎津以却向西之賊先生亦往來義陣同心招募會監司沮斥義兵幾陷不測先生與成芙蓉堂安 義李畏齋厚慶盧立齋欽及族兄明胤訟冤于招諭使事竟得白 冬巡邊使辟爲從 事官 以先生爲能幹委以軍事巡到各邑募兵募粟悉有注措撫摩疲癃軍心附焉
二十一年癸巳 先生二十三歲 正月奉參判公入茂朱之赤 裳山城 山城爲湖左天塹之地時賊充斥一國棲泊無地白參判公往避之先生素裁鑑深遠出 人意表奉老流離於矢石之中而終能保全百口○長水路中見一童子儀表秀雅得知爲簪纓之世則 妻之以妹卽韓參奉景龍也雖竄逐於山谷而猶能略備禮數以送迎景龍篤行孝友爲士友推重 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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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聞鶴峯先生訃 時金松庵沔沒且未幾復聞鶴峯殞于軍中先生驚痛失色曰長城 頹矣更將誰恃而扶持吾宗社也 秋趨覲于江西行朝差巡邊從 事官往義州而歸復扈駕還京師 時○車駕播遷關西先生趨覲 行朝仍差從事往義州而歸時沈惟敬與行長約和賊衆度漢江李如松入京休兵迎乘輿還都是行 始拜東岡先生金公宇顒於海州 拜成均館博士 用扈從勞也
二十二年甲午 先生二十四歲 五月差接伴使從事官迎慰 天兵於星州 天兵追賊南下故承命迎慰
二十三年乙未 先生二十五歲 八月遭祖妣淑夫人朴氏喪 ○十月授承訓郞陞侍講院說書有召命不赴 按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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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品階知爲不一而職牒逸而不傳不能盡記
二十四年丙申 先生二十六歲 春往慶州拜體察使李相公 元翼○李公曰朝廷方有和議何如先生曰守國禦賊之道在戰守而已不可輕許和議
十月拜博士赴召 夏以一不上京被彈章故黽勉就職 十二月被駁 而還 先生是行馬上詩曰三爲博士再被彈自註曰十月以博士上京十二月被駁而還夏亦以一 不上京被彈云蓋先生立朝以直道不容故也且三爲博士云者春必有是命而不赴故夏有是彈然 職帖旣逸不可以攷
二十五年丁酉 先生二十七歲 正月體察使薦賑恤差員往 湖南 湖南歲歉流民多顚壑體察使啓請賑救又薦先生爲差員承命赴湖中所經列邑顑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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蔽野先生盡心分俵頌聲載道二月十二日太貞夫人晬辰也有思親古詩二十五句 五月竣 事還○六月奉參判公上黃石山城 以去年天使李宗誠之往日本 和事不成賊將再犯體察使啓請黃石之宜守地生郭存齋䞭爲守城將白士霖爲出戰將命守之 趙大笑軒宗道亦約與共守管居安咸三邑軍民同入城中故先生亦以百口往 七月奉參 判公往赤裳山城 時舟師敗績賊長驅而來體使及元帥博令黃石先出老弱先生於 是拜辭郭趙兩公奉參判公踰嶺往赤裳以曾所居寓慣識形勢也十二日參判公晬辰力不能一觴稱 壽有次叔父韻曰異地秋風耀壽星盈觴無計況傳觥憶昨門闌朋酒樂新愁舊恨自來竝 八月 聞黃石陷郭存齋趙大笑軒兩公殉國 賊迫城下白士霖棄城而 遁城遂陷二公死之先生不勝驚痛爲位而哭之挽以寓哀後與鄭松灘弘緖望山城有感昔一絶曰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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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當年不弔蒼冤魂山外幾彷徨無情嵐翠渾依昔感舊人心無限傷 冬例遷成均館 典籍○在赤裳 兵火顚沛中百口濟接恒有憂色遍尋湖中朋友苟其得一味一粒躬負 百里資供滫瀡人見先生純誠發於容色不靳其施與
二十六年戊戌 先生二十八歲 春在赤裳 時鄕庄經亂蕭索難以住接姑留止 於此先生對故園人有詩曰流落湖濱歲已周故園歸思政悠悠憑渠欲問鄕消息語語還挑客裏愁 夏奉參判公還鄕 亂離猶未廓淸歸借板屹洞僧舍棲息久而後尋故居自是閉門讀 書溫古知新慥慥不已自號嶺癡 撰郭存齋傳及黃石山陷城實蹟 先生痛郭趙二公之死而家人男女死義者有足以撑宇宙耀日月而不宜泯後故至是先爲郭公立傳 猶有所未及詳也更述陷城實蹟先生初從郭公於山城竟以急於奉親不得死生與同故以是爲深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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已略及於挽誄又敍之篇末曰郭公遺化遍洽一方而余獨最蒙恩厚及在城中期以共之上有父母一 身難許南門當日未承死耳之敎高山景仰益復愧忸敢採錄其終始爲太史氏張大之一助云
二十七年己亥 先生二十九歲 春拜侍講院說書赴召 一日 入侍書筵見有對宮僚倨傲狀先生直言規諫東官有不悅色明日見遞 夏除戶曹佐 郞○八月授朝奉大夫○除海州牧判官赴任 前年西厓 先生柳公去國儕流之在朝右一幷見斥當路欲承順東官乘此黜先生補外時先生年甚少地甚劇且 時大難甫已政法治謨蝟毛老吏惟先生所指畵而不敢出一言以助事終辨治民以寧謐於是人知先 生之有政事才也 十二月受由歸覲卽還任
二十八年庚子 先生三十歲 春陞敍禮賓寺僉正兼本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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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唐將接伴時善於辭命有特選 四月上疏乞歸省病母不允 疏略 曰臣有老病父母而間關兵亂携負逃生朝糠暮粥苟免道傍餓莩者徒靠之臣身而已臣一日不在家 貽父母一日之飢故每思呈告而不敢者軍門之行期在近苦俟其去而軍門未發又差彭游擊接伴官 尤不敢旋差旋告黽勉伺候煎悶度日得老父書曰汝母飢餒之餘宿疾轉劇氣息奄奄惟願生前一見 云人子罔極之情爲如何哉今者遊擊西下要與臣俱還朝當在五月之後是忍置父母於死地往而不 顧者人倫天理寧有是哉丁此多事之日賜暇特恩雖不敢望而換差全羅接伴歸路得省病母且復 往來傭丐資活如縷之命則遐方一氓將濡沐於孝理之餘澤云云彭游擊以先生之敏給解事不欲 相捨竟不允○按是年必有西路往返而今不可攷 秋受由歸覲
二十九年辛丑 先生三十一歲 春解官歸鄕 與長官不相得將棄歸海民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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失父母守衙遮路攀轅不得去者月餘有去思碑○先生以親年漸高季氏尙未省事念切菽供無意旅 宦不復作西行杜門奉省之外日料理經史有樂而忘飢者
三十年壬寅 先生三十二歲 拜翰林金公 濂 墓 先生之妻祖也有祭文今 逸 冬拜司諫院正言以親病辭不赴
三十一年癸卯 先生三十三歲 七月丁參判公憂 先生以亂離來不得 一日安養爲深恨侍疾禱辰請代雖貧藥餌常有餘丁憂毁瘠逾禮哀動左右弔者大悅 九月葬 參判公于金猿山南板屹洞廬于墓下 葬用先生之友權弼善潗 所撰誌銘時季氏雖未成人猶可以堪守殯次白太貞夫人畢憂還墓下居廬朝夕哭墓風雨不小懈朔 望則歸哭几筵且省太貞夫人而還盧廬側有小刹而廢償直爲齋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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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年甲辰 先生三十四歲 九月稟疑禮於寒岡先生 先生 居喪猶恐一拜一哭之不中禮而經亂後禮經未具難以考据故條陳居廬儀節及上食朔望祔祭喪中 祭先練葛當否練后哭未禫服纖白諸疑稟質於師門而遵行焉
三十三年乙巳 先生三十五歲 四月朝廷錄宣武原從功臣 二等賜錄券○九月服闋○往謁寒岡先生于夙 夜齋 久闕候儀於函筵故旣闋制及門講質禮疑數日退歸訪姜寒沙大遂於江陽又往山陰見吳 思湖以謝其臨弔 冬付軍職入京 按行狀云服闋授軍職云今職牒見佚雖未知其授 以何職然丙午日記曰前年至月進都下必因是命而有之也
三十四年丙午 先生三十六歲 春拜司憲府持平○七月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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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厓先生柳公 成龍○將還鄕迂路謁西厓留門下攷閱退溪先生文集有稟質疑難 八月還鄕○九月除居山道察訪兼北靑敎授提督 屬校官 先生還鄕未數月有是命居山在北塞鄕井二千餘里有以離親難之太貞夫人命之 往故十月登程向北關方東出國門歷謁李梧里李漢陰德韾二相公皆爲先生惜遠去朝紳多以詩送 之金淸陰尙憲曰身緣許國驅馳急心切思親去就輕李五峯好閔曰知君忠孝難忘處叱馭關防首幾 搔李月沙曰當日才名推國手卽今卽署已華顚其餘尹玄洲新之南雪簑以恭皆以詩贐崔簡易亦贈 之以序 十二月赴任 官雖昇奉公惟謹有關北日記還往一朞所記數萬言無一日一刻 不是思親語 出巡北路 巡到列邑受講諸生各驛點閱人馬二十七日竣事還本驛
三十五年丁未 先生三十七歲 正月差領僧軍 時北虜常耀兵於江濱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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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廷戒嚴武備也 出巡南路 又爲提督屬校及點閱各驛人馬押領各邑僧軍也次北靑謁 聖考講諸生府儒許謙玄演等受學列邑皆如初至淮陽交付僧軍還踰鐵嶺 五月遊七寶 山 山在明川巖壑奇絶爲關北第一形勝遊賞三日而返有紀行 六月登萬甲亭 日記 曰尹北靑德耀煌要與同往咸興日暮到營時李巡相時發已登萬甲亭沈高山重卿詻金洪原廷叟壽 賢與焉催呼余二人至巡相出示唱酬余以所和要重卿書之時江月初升霽天空闊景象萬千相與步 下長梯坐萬歲橋畔鼓琴誦詩鷄鳴乃罷明日巡相又會諸壯士登制北樓置酒張樂德耀先已歸惟重 卿廷叟及余往從巡相有詩曰饗士高筵制北樓只今江漢最風流書生應悔爲儒腐鼎坐閒窓說客愁 蓋嘲余三人也廷叟以爲吾輩亦當反嘲余次之曰靑年曾上廣寒樓自許巖廊第一流三載筠邊何事 業倚欄猶抱未歸愁二人以爲太露且語涉慢傲不可出重卿次之日籌邊從古有高樓此日聲名水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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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祗是邊烽頻報急朗吟還抱未歸愁廷叟次之曰共揮談塵傍高樓人說詩豪第一流何似元戎養士 會滿堂歌管入邊愁俄而巡相往萬甲亭招三人索詩見重卿廷叟作皆罰之以太白聞余作則以爲首 魁連罰三白遂極懽夜深罷儘聖代風流也 聞西厓先生訃 日記曰見邸報知西厓卒 逝國失蓍龜痛惜如何聞遺箚備盡愛君憂國之誠抵死惓惓眞社稷之臣也 八月呈由歸 覲 申省屢辭而不許遞故欲因此而歸田也人都但歷拜五峯卽出闉 鄭桐溪 蘊 來訪 桐溪聞先生還相見忻敍
上板屹洞省先墓○與鄭愚伏 經世 書 時尙州士林合享圃隱寒 暄一蠧晦齋退溪五先生於道南書院先生書以賀之
三十六年戊申 先生三十八歲 二月宣祖大王昇遐光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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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嗣位○三月拜延曙道察訪○夏解歸○八月拜 晉州牧判官不赴
三十七年己酉光海君二年 先生三十九歲 正月拜陝川郡 守旋罷 郡有鄭仁弘手握朝權勢熖方張人爭趨附猶恐不及先生素知其爲人故不一染迹常 以公正處官略不撓屈關節無所施其黨惡異於已竟中以危法罷職無何有敍令 秋謁寒岡 先生于檜淵 時寒岡先生喪夫人故先生進慰 冬敍授通訓大夫工 曹正郞
三十八年庚戌 先生四十歲 正月與李參判 時發 書論號 牌 時號牌之令旣下而旋停故先生有書略曰當今急務莫切於簽丁鍊卒而以今日人心紀綱除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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牌一事則不能括其脫漏而防其逃避也玆法之行悅之者衆不悅者獨避役奸細之叛民豈可徒曰二 百年無前之法決不可行助叛民而爲之聲勢也其間果或有貧殘流徒之民以遽定軍役爲閔不無愁 歎之一二而顧善齊民方在水火之中如傷若保之攻獨及於避徙之叛民乎今若此法一停則所得者 旋失已還者復散紀綱頹弛他日緩急朝廷號令必不能行矣伏念大臣回啓若不停止則京外之籍 所當急急完了而本廳之造牌刻納査準烙印之役日夜督促似難究竟於三月之內急差卽廳闕員別 樣檢督如何本廳如是怠忽則外方可知亦另擇勤幹精詳之人數日內發送或差都事或稱從事委任 專管則雖無御史之別爲安撫而自裕於便宜處置云云 三月受暇歸覲 見朝著淆亂無 意於名塗決欲求退 旅軒先生張公 顯光 來訪 先生答李白川天封書曰張德 晦丈來訪晤語共賞東西兩湖奇絶之勝每語及君恨不得與之同者非一再矣白川字叔發星州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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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年月未可考故姑附於此亦意書中有遇遯深遯之歎先生於是時已知鑿枘不相客故似發此語耳 九月與新溪院儒上書方伯 新溪在咸陽郡爲慮玉溪姜介菴二先生尸祝 之地而兵燹後廟貌不成故先生恢張公議創建齋庖上書方伯請基地購賞之道及典僕役軍米鹽區 劃之方方伯稱美題給克完大役斯文得以有賴焉
三十九年辛亥 先生四十一歲 春拜古阜郡守旋罷 先生爲親老奉 檄而赴未數月被人指嗾而斥罷 五月奉太貞夫人柳氏到全州遭 憂旅次 初先生奉太貞夫人上官回轅至全州疾劇初九日下世時愚伏鄭公爲方白盡心弔賻 視終事如家人發關沿路護送喪行先生以在途遭釁殆不自容哭擗隕絶雖甚雨達曙露立遍身沾濕 少不離喪側見者爲之流涕 八月葬太貞夫人于飛道谷仍廬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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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後遷祔于參判公墓左○先生守制甚嚴如前喪鄭桐溪蘊李石潭潤雨姜白川應璜林林谷眞怤 朴凌虛敏權默翁潗兄弟朴無閔絪皆來弔山廬
四十年壬子 先生四十二歲
四十一年癸丑 先生四十三歲 九月服闋○十月奉安外 舅贈參判金公廟主於家 金公無子有繼配奉祀繼配歿先生移奉於家 有吉由文○金氏田業在丹城頗腴而尺貨寸貲無所幹理
四十二年甲寅 先生四十四歲 五月爲申救鄭桐溪設疏會 于宜寧 先是爾瞻輩慫▼(叟+心)光海賦永昌七歲大君先生欲上書敢言未及發會桐溪抗疏指擿切 劾姦黨致桐溪就理嶺儒議伸桐溪會宜寧治疏八京實先生終始左右也 七月文諭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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廳敦議更擧坐削仕版 疏儒至江上有邢孝甲承爾瞻旨以恐劫之桐溪之子昌 詩又乞止故徑歸桐溪已安置大靜先生文以責之曰頃日之疏不特爲鄭地也誠以一胍公論扶綱常 明是非亘天終古有不可泯滅者螢埃之微萬一有補於日月山海之大則庶母負二百年休養之聖 澤鄭之禍福有不暇顧計而奉疏諸君趑趄江干觀望利害竟不入國門而返噫受人書信猶不沈滯一 道多士之血誠封章却被一二人所沮抑而任擅進退耶昌詩之私情雖果切迫而非惟不當止亦不必 止乃諸君恐搖怵怯托於昌詩以自免也諸君之失不旣大乎豈獨諸君之失亦由吾儕誠意淺短未遂 劉陶代穆之願徒爲百代譏笑之資吾儕之悔已不可論諸君之過終可削籍於儒林以示鳴鼓之警諸 君以爲何如嗚呼萬里風波舟楫顚危毒霧炎瘴孤忠可惜若使已發之公論一噎而不再則萬古士氣 銷於一朝云云爾瞻使閔靜上疏告之三司俱發左右羅織幾陷不測 冬寓居於九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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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 以光風故里近城市擧家往天嶺之蘫水上九羅村買小屋居之杜門耕讀以爲長往遐遯之計
四十三年乙卯 先生四十五歲 春左遷將仕郞木川訓導 宰臣 登對有爭先生廢錮之不可光海怒貶之命至先生卽夷然孰道不滯頃刻曰王命也無幾微怨恨於容 色之間
四十四年丙辰 先生四十六歲 二月復遷順天訓導 有旨企謝恩欲 其益困之也先生入京謝恩又催出國門十月授以承仕卽爾瞻遣其客詭之曰一變所▼(幸+人+亡)可以復舊職 先生不答先生經歷困厄心危慮深而處之裕如也
四十五年丁巳 先生四十七歲 正月宥還九羅寓屋 與鄭松灘後先 結鄰盧省齋脊亦居止逼側皆是懲創危階斂迹而不出者也日夕過從嘯詠於山岨水曲若一切忘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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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然聞日下來信不好輒攢眉憂形不覺其發喟也 四月聞忘憂堂郭公訃 先生 從郭公於倡義陣中會有托義故爲位哭甚慟 七月哭吳思湖 思湖與先生連坐甲寅 駭機以其製儒疏且通文有扶綱常之語也竟死於免山謫中先生爲之痛惜如喪骨肉出路次迎哭旅 櫬又與諸友經理其後事
四十六年戊午 先生四十八歲 四月被誣就理一月得釋 按先 生贈李嵯峨溟序有戊午四月旡妄之災己巳公州路中詩有憶昔戊午遭旡妄夜逐金吾過此途朴進 士以燾祭先生文有曰黃馬縲絏三旬大理云時大妃已廢鞫獄曰大張倘其辭連而有此雖未及考 其構陷何緣得釋誰賴然時輩之餉禍先生至此憯深豈不可畏乎 趙龍洲 絅 來訪 龍洲 亦不容於當時踰嶺先訪先生止宿屢夕語及時事相對歔欷○按龍洲書先坐誌曰不佞少於公幾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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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歲公一不以後進致異相驩甚
四十七年己未 先生四十九歲 二月李蘆坡 屹 權東溪 濤 來 訪同入板屹洞○移建龍門書院 縣之龍門舊祀一蠧鄭先生配以葛 川瞻慕火于亂草創陋陷無以揭虔且舊址地右聖廟有所難便先生倡率鄕儒卜地於霽月東陵廟貌 重煥齊廚一新一鄕始有依歸之地告由奉安諸文字皆先生手製 四月上寒岡先生 書 書略曰世間禍福雖不足動夫一髮然牢蟄年來久違面命爲罪悚
四十八年庚申 先生五十歲 正月承寒岡先生訃 爲位痛哭心喪 三年 四月會葬寒岡先生于蒼坪 先生加麻臨壙將治任歸與門下諸賢收 拾遺文經紀校訂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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熹宗皇帝天啓元年辛酉 先生五 十一歲 正月入板屹洞省先 墓○月夕遊沈線巖 鄭松灘適至與韓地主汝沃乘月出沈線巖坐盤石上夜深而 歸松灘有詩曰靑山如障石如盤鼎坐傳觴興未闌笛聲寥亮歌聲咽月不沈光客不還
二年壬戌 先生五十二歲 春在板屹洞 省先墓因留禪房閱近思錄一遍愼景稷 林眞忍禹汝懋相訪有酬唱之樂 十二月輟還城北新庄 城北在沈線巖川上 有地理之勝先生以故宅不合頤養就此築新庄居之初四日移安家廟於參奉公家以新庄未及建祠 也有告由文
三年 仁祖大王元年 癸亥 先生五十三歲 三月光海君廢仁祖 大王卽位○四月特拜弘文館副修撰知製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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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註官不赴召 反正後起廢斥 者以進先生一例調用 迎見鄭桐溪於鄕路 時桐溪承司諫之命於籬中及出 海呈由先取路於鄕邑故先生迎見於中路懽深至於出涕 五月除大丘都護府 使○除授元帥府管餉使以原官兼 毛都督文龍據椵島我國輸糧 幣大臣奏薦先生幹局宜卑饋運之任故有是命 七月下敎書特加通 政疏辭不允 大臣白上朴明榑起廢寄以管餉重任宜有下書勸奬且未陞堂上 事體不重上可之命該曹加資諭書略曰肆嶺南之置管使若關中之有蕭何安得斯人用底可績 惟爾十載昏衢一不染迹服騏驥以鹽車郵吏行役棲鸞鳳於枳棘半刺翶翔不苟合於亂邦果擯斥於 當世幾年荒野之屛迹今日雄府之分憂斯采廟堂之僉謀兼管餉府之劇務三軍之命胍繫此固宜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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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藎臣剌史之爵秩猶輕恐難號令列邑予何愛於一級爾勿憚於獨賢云云先生上疏辭曰不自意管 餉之任加資之命遽出於千萬夢寐之外承命驚惶措身無地今日軍前轉漕萬分緊急必得其人 計慮足以經務幹辨足以理財風力足以彈壓默後可能濟事而臣素之斯三者其何以擔當重任乎伏 乞特念遞差云云批曰爾其勿辭察職 閏十月啓請納粟士子編防 革罷 時納粟除役其弊滔滔朝廷痛其見欺令一體編防邊戌先生狀啓曰納粟人非必盡是避 役者有有識士子壬辰亂初倡義納粟以補軍需其中生進初試入格仍除實職者有之而右兵使因朝 廷事目以納粟人不問士子與否分編海戌若其免役免賤等應定軍役而冒受者則固所甘心而校生 之受職或免講者則其稱冤在所不已請令該曺詳加商量定奪指揮云云上命該曾分揀下送全省 士民賴之 十一月啓請設屯田 啓曰臣受任管餉收拾見在穀布外當思生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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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道而一有擧措害必及民理財之策百無所出所謂屯田收穀者廣募流民於沿海空閒之地復其戶 役分給種子耕治無主陳田秋成則計種收穀也統兵軍糧之多辦專由於此而年來諸宮家宰相等亦 效此多占農所爲一巨弊今年段統兵營外諸宮家宰相農所盡爲革罷流民之深散無歸者及此時募 集廣設屯田於沿海則秋可收數千之皮穀云云上令該曹商量定奪命下矣 革罷管餉 使因疏辭加資 軍餉見輟故遂革罷先生仍上疏辭加資曰只以管餉之未陞堂上事體 不重故特下恩命而初無可授之賞今無可紀之勞則旣遞其任而仍冒其資冞增愧懼特許鐫資 云云上不允 差固城縣會武科試官
四年甲子 先生五十四歲 三月遞還○十一月拜竹山都護 府使 府爲畿輔要衝酷罹兵燹物力凋弊校宇迄未復立邑儒無所依歸先生下車卽募鳩財貲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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構聖廟次建堂齋躬行釋奠導諸生以俎豆之儀且選其尤者聚于校齋嚴課講製以奬率之於是禮儀 旣備人材稍振蔚有丕變之美及遷去士民立石頌德 哭朴龍湖 文楧○有祭文
五年乙丑 先生五十五歲 在竹山
六年丙寅 先生五十六歲 十二月遷拜濟州牧使 吏曹啓以濟爲絶島 重藩經亂後民俗反覆梗化非才德兼備有難威鎭乃以先生薦
七年丁卯 先生五十七歲 正月詣闕謝恩 時胡大擧兵侵關西義州失守 列郡瓦解兵使南以興死之報警日急先生以受任重藩不可久帶卽辭闕渡江歷見愚伏鄭公鄭公 握手送之勉以居官盡職 二月抵家旋向湖路 日記曰靈巖路次得京信於主官南 汝昻斗瞻賊兵退屯請和欲使吾拒信天朝共兵犯上云是何說也其在君臣大義死不可從凶報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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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痛哭奈何 阻雨康津尹孤山 善道 來訪 孤山以海南召募官來過聞先 生至訪見於客館 二十九日赴任 前後爲州者大率武弁牛羊視民惟良馬珍寶是急 不能導率於禮俗先生至則以齊魯待其民條列彝倫文學之宜所先務置籍勸懲未周歲習俗一變 三月謁金沖菴 淨 祠 坐明倫堂受諸生揖讓 修理城壕鹿角 頹圮 未完且廣狹未均更爲磨鍊 聞賊退○八月輸納軍器褒賜表 裏一襲 西警不息聚斂各道軍器於京其精利濟州爲最褒諭曰各樣軍器滿船載送點檢無 欠缺鳥銃甲胄弓箭等俱極精利一如新造雖以許多物力閱歲措備難望如是辨得極爲可嘉賜表裏 一襲爾其領受 十月狀啓論戰用雌馬 點馬事目中戰用馬捉出五百匹而 雄馬不足則雌馬充數故以姑留雌馬爲後孼息之地事馳啓司僕寺回啓自上判付內特命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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捉雌馬以副民願蓋雌馬充數特有民害先生欲啓請軍民下吏等恐被猥濫之誅齊告請停先生不 聽及回下民皆歡悅
毅宗皇帝崇禎元年戊辰 先生五十八歲 三月池亭成 先生至州前使 經始池亭於城東門內鑿小池規其岸欲作亭而土木已具矣先生不役民役替番軍卒明年乃成先生 有記 四月遊水淵瀑布 有小記 祈風海神 海路艱險非風力難以利涉州 人患之先生爲文祈風 登漢挐山 與金大靜哲命吳旌義世章同登有錄多刓缺全文今不 傳
二年己巳 先生五十九歲 正月以病陳疏乞遞○閏四月例 付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五月拜刑曹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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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發船出海 候風三十餘日始泛 八月入都謝恩 日記曰與全參 議湜館寓相接日還往從遊以遣久羈之懷 金仙源 尙容 淸陰 尙憲 兩相 國來訪○九月哭芝峯李公 睟光 ○十月呈告還鄕 日記曰十三日承寶院路上遇朴遜志敏修張經叔應一李泰始道長郭子彬弘章四友以別擧方赴京 也話少頃乃別十六日至淸州遇趙日章絅同見監司南敵萬以雄達宵敍話二十二日至家 鄭桐 溪來訪 日記曰昨歷見輝遠鄕中諸友有校齋遊約而待吾還所以今日携其弟功遠絔及諸友 訪我而來也同往鄕校會話三日而罷 省先墓 率諸族上高莊山行秋祭明日又上板屹洞省 祭如初 十二月拜蔚山都護府使 用愚伏薦也
三年庚午 先生六十歲 正月發西行 過古縣桐溪携酒候溪邊以爲遼將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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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謝恩○三月赴任○六月遊立巖 府有立巖澄潭峭壁頗絶 奇先生携金上舍敬文往遊焉明年又與鄭慶州文翼復遊有詩曰石老千年怪溪涵一片淸蓋寫境也 七月祈雨龍堂浴椒井○八月重修鄕校行釋奠 府校 頹圮已久先生上官謁聖經紀增葺而値農務時至是始訖功還安仍行釋奠諸生俗貿昧禮先生敎以 習儀始趨蹌肖度又選士旬朔講製大有作成之功 九月修理公廨 公廨湫弊又規劃方 便重創衙舍改葺客館民爭趨事集功不數月斷手 十一月行穆陵改葬望 哭禮 日記曰是夜夢得近日光敫奏從容覺來天語琅然在耳邊天涯望美微誠轉切
四年辛未 先生六十一歲 正月申省乞遞不許 府民知先生有去意亦願 留於方伯方伯貽書於先生曰知兄有辭避意士民齊來以訢奈何 四月上疏陳邑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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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條 壬辰之變府被兵最酷零星疲弊而但以幅員廣土地饒故賦徭煩夥民不能堪支先生上疏 陳弊其略一曰軍伍請減逃軍八十九名於分防之案逃亡餘丁三十二名亦減稅布毋如前日之廢格 不行而徒爲文具則海外蒼生可保也二曰戰船請察左右道形勢本府戰船特爲革罷使軍兵器械專 使陸操則緩急有益也三曰田結請査各年文案詳照民稅虛倍本府稅案以行用七百八十餘結自今 年修正案且減下中七百六十八結以之出稅則征賦得其中也四曰牧場請考前後條例惻念牧卒冤 憫上年遺故失馬價布從輕定數則七名牧子庶得支保也五曰官屬請參酌國家定制以本府寺奴婢 各數十名移屬本府官奴婢且令本道減分定樂工之奉足除新設之京主人則零丁官屬稍得支梧也 其他大小弊瘼蔀屋愁歎不一其端而列邑之所同惟此五弊列邑所無而府民偏苦若未蒙朝家軫 念改絃之惠則慰撫疲苶鎭定流逋決非駑劣小臣所可堪任亟命處置以爲殘邑蘇復之地該曹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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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關飭道臣有可以減去者減去事命下別定差員明査本府得減逃軍布三之二 九月差 慶州都會試官○申省再乞遞○十月付僉知中樞 府事○遞還 先生莅府二年聽訟決獄以平正公直爲準的故民吏皆安之及登途儒生品 官攀鐙野外含淚不能去民吏有跟至四五十里又或百里餘者失聲於前路不可數計各聚米布鹽鐵 立碑頌德以其嬴餘來致歲需於家其德惠之八人深如此歷路遣子弟致意於孫慕堂處訥李東湖▼(竹/舒) 至鵝林尹富寧仁男及其從姪思勛出路左邀敍 十一月省祭先墓 旁親及外祖墓 亦一例備需與其諸孫共之 往弔鄭桐溪 時桐溪居內艱 拜晉州牧使 以墳 墓故鄕不赴 十二月付龍驤衛副護軍○樂汝軒成 構小亭於 城北溪上曰樂汝軒俾季氏參奉公居之日夕聯床對榻友于之情翕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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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壬申 先生六十二歲 二月行視月淵 在花林洞淵曰月淵巖曰月巖有峯 斗立天鑿壁面狀如圓月又磐石鋪作玉雪滿壑淸光淵洄出石罅作笙簧聲紺澄照人先生欲置屋其 中與柳汝潤鄭子安禹君勉從祖弟晦之晦肅策羸挈榼行視其上下流以屋址不便三四還往往輒竟 日忘歸或窮源至龍遊潭或扶田洞而止 七月聞仁穆王后昇遐 入縣行望 哭禮 九月赴國葬 大葬在十月初四日也 十月丙寅詣闕謝 恩 以軍職久未謝恩故臨時肅拜於三殿又詣殯殿門外望哭四拜而出 付山 陵忠義司果○戊辰出東郊祇送大轝○南還 歷哭 徐藥峯渻而還
六年癸酉 先生六十三歲 二月入龍門書院開講座 先生以山長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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院設皐比於正堂率諸生謁廟行揖禮諸生會者甚衆各以所讀受講質難其疑義時鄕議欲尊奉嶧陽 鄭公於鄕社先生守護器具之艱欲就墻外別祠如川谷書院之儀而竟不節一 聞梧里李 相公訃 乙亥湖西路往哭於襟川本第 六月哭權默翁旅櫬 默翁出宰寧海 歿于官先生操文往哭於家十二月又壙訣於山陰先生於默翁家世有分與其弟霜巖及從弟東溪平 生莫逆於心款段相尋無虛歲書訊往覆相筍束旅宦在京則有公暇輒促膝相歡講疑難濟急亂如同 氣也至是哭之甚慟 八月聞愚伏鄭公訃○十月往晉州集賢 山省五代祖贊成公高祖參贊公墓 兵使柳舜懋判官李汝翊來致 祭需歸路訪尹秋潭銑秋潭見先生至降階迎之止宿一日欣敍良話秋潭宰相也其敬禮如此歷沙斤 驛見李督郵道長而歸 十一月遊長水寺 與鄭桐溪同入山房一鄕士友來從者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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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人信宿懽娛有發難講討之事來往休息於採花巖風流巖之間先生有詩以志喜
七年甲戌 先生六十四歲 二月赴嶧川疏會 龍門請額久而未遑故恢公一 鄕敦定疏議要松灘同往嶧川與桐溪對勘疏草封遣儒生疏用先生所製適盧師傅亨弼往拜旅軒而 來過共參是座○疏草今逸而不傳 三月韓柳市 興一 來訪於城北 柳市往宣漢陰李相公諡於祀孫如圭尙州任所歷訪先生 四月再視月淵 事力未逮 雖不及置屋暇日輒携朋往賞地主沈侯長世聞先生有是遊尋源隨至獵魚謀酒遂成眞率會 六 月哭弟參奉公○八月拜承政院同副承旨兼經 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承召○閏八月赴召 肅謝○二十四日隨駕接見江遊擊賜孔雀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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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六日晝講侍經筵 知經筵崔鳴吉玉堂李省身同入侍講國風 周南召南上讀下詩傳序一過玉音琅然無一字錯誤每讀一遍輒講訓義講訖乃罷 遷右 副承旨 時本院被選皆蓍艾座中都令齒最步猶過艾而髮亦白矣時稱承政院乃耆老所也作 銀臺契屛都令李汾沙聖求字子輿左令徐晩沙景雨字施伯右令睦梅溪敍欽字舜卿左副韓 字遠卿同副崔星灣荇字□□先生序之又諸公酬唱詩什有之 九月侍經筵 內賜四傳春秋一部 講畢言及祔廟及世室事先生有奏議 ○十月遷 左副承旨○十一月又遷同副承旨 一日入侍因奏言咸鏡道癘癥 大熾孑遺赤子死亡將盡願擇醫官中術業精明之人下送本道多備方藥廣布救療之法遣官別設癘 祭于本道令該曺各別擧行上可之 哭李石潭 有挽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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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年乙亥 先生六十五歲 正月遷右副承旨○聞柳修巖 ▼(示+㐱) 訃 有挽詩 二十日入侍 前持平柳▼(示+㐱)以因姜鶴年疏避嫌推考先生啓曰其辭率爾 放言惟思盡言凡放言盡言者眞有是事人不敢言而獨言不避之謂也至於沽名市直猶恐非其本情 云者以臣愚見思之則似非自下救解削奪官職之命也以此罪之恐非天地包容之道又況旣已身 死推考傳旨不爲捧入之意敢啓 二十六日啓論元宗大王 祔廟事 司諫尹鳴殷金光炫姜碩期館學尹宣擧等廷爭不可上命削職遠竄政院久不 擧行傳曰削黜傳旨至今不爲書入此何道理意欲終始防命其曲折速爲書上事命下先生啓曰 臣以不得書入之意已爲陳啓更無所達而聖明之世有此無前之擧措臣寧被違命之罪不欲致聖 德之瑕累也以殿下孝思不匱之心旣追徽號又下皇朝之誥勅則尊親之誠此外無加又欲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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祔於成廟者自非聖人之本意而其可曰率祖至于禰之稱耶伏願殿下請寢躋祔之議別立廟室 上以盡尊親之事下以示顯親之禮則國家不失禮經朝著亦爲肅淸事上大怒下備忘記曰自前 有未安之事則承旨陳達其所懷而未聞終始拒逆不爲擧行者也承旨擔當任意從否則一承旨足以 治國何必設官分職作爲大臣臺官也今此不捧傳旨實是萬古所無之變也色承旨拿鞫正罪事李德 洙待命於禁府先生待罪於闕門外大臣請對極救乃止 二月呈告不允牌招 ○二十五日入侍經筵內賜左傳一部○陞左 承旨○晦參祔廟習儀○三月參祔廟再度習 儀 宗廟各室祝文皆御押以下獨元宗大王前祝不押還下傳于政院曰何不以嗣王書之而以 國王書之也先生回啓曰取考香室儀軌則崇恩殿祝辭如是故因以書之矣終日無下批又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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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期已迫令禮官速爲定奪事答曰議大臣 因災異啓請羅萬甲罷 職還收 啓曰古者天降淫雨以害粢盛則列國相弔今此風雨大作一夜之間兩陵崩頹幾至三 十餘尺非常之變豈有大於此乎自上有退行祔廟之禮而參奉所報別無雷震之語兩司論罪不可 無失也至於宮禁之言言雖不中於鄭百昌則實是藥石之言也自上反下未安之批是使百昌益驕恣 也萬甲言雖狂妄以言獲罪實非美事請還收罷職之命 四月除授公淸道觀察 使推恩三世○五月肅拜宣醞諭敎 宣醞差備門 內拜跪受啐承傳極勸至醉又賜胡椒五升臘藥五種出政院受諭敎行禮而退略曰惟卿鸞鳳 之姿東南之美妙齡擢第英聲夙著於靑雲中年處閑苦節不改於白首蓮生淤而不染玉韞山而含輝 故余嗣服以來惟以起廢爲務歷試州郡淸白眞如一條之冰及除秋官嚴明不違三尺之律肆擢置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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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右得老成於腹心幾多承綸惟允出納經年待漏彌篤忠貞乃知宣化於湖西非卿不可是以協望於 僉擧惟汝之諧云云 六月到界 到界宜化以事君不欺爲本領廉白淸簡興廢右文秋毫無所 近亦不以廚傳之薄撻一吏常思布衣咬菜曰起貧叨祿涯分已踰得免薪水之勞足矣安敢爲此口腹 乎 十二月仁烈王后昇遐 十三日在靑陽承初九日昇遐訃音擧哀還 到公州十八日成服
九年丙子 先生六十六歲 正月啓請驛田還給 戶曹關下各驛未立 馬位量田開錄上送故先生狀啓言本道介在畿甸兩南之間別星公幹之往還必經由本道兼應三 道之役也陳起馬位田稍有餘地故收其稅布以充雇立馬稅至今友撑遞傳之不至斷絶獨賴於此今 若一一汰減雇立馬稅無路備給雖緊急公幹何辭責馬乎云云該曹回啓定奪獨湖西不收田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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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次稷山點送赴西征戌軍兵 本道御營軍射砲及牙兵私砲手等抄擇 逢點事宣傳官齎來有旨故行次稷山與兵使點閱砲手射手山尺牙兵共一千一百八十七名一 一試藝各給木一疋發送封啓上送 四月選薦將領 因備邊司關選可合將者武弁 朴東命金憲辛吉三人薦啓 七月特拜禮曹參判赴召再辭 避嫌承牌出肅 廷議有以純朴無華短之上批曰此人朴實好古不事邊幅予嘉 其爲人有此寵擇爾等勿爲怪先生再上疏力辭其略曰國家之法職至亞卿則稱以宰列而尤重其選 苟非履歷淸顯才德表著者必有奇功異績可錄可賞曾未有如臣之無狀過蒙寵擢而駭人見聞者 也臣竊科先朝近二十年其時群賢滿朝公論方張而臣不登於薦書足未躡於賢路則臣之在流輩 中無所取用可知及乎昏朝一發危妄之語卽坐廢錮之律亦非臣之汚穢朝廷故爲高蹈者幸於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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化之初復齒仕籍歷典州府又無片功寸勞而至於今日厚誣重明驟陞宰列以臣之履歷作爲果有一 分近似者乎臣雖欲竭勞彈歲報效天恩之萬一何可得殿下旣知臣朴陋無飾矣臣之此言實出 腑肺無一毫虛辭外假伏願亟命改正臣本識云云批曰卿其才德可合物議何妨須體予意安心 察職因牌招催入先生乃謝恩 八月差昌陵改莎草奉審官往 陵所復命○提調長生殿加漆新梓宮 禮參例兼 九月 戎服雲劒隨駕南別宮接伴監軍 行茶禮後隨駕還入闕下 差餞慰使赴開城 承命餞慰監軍於開城十五日詣闕下直十七日至開城與別 問安承旨李德洙俟監軍到館以再拜禮見之監軍亦冠帶答揖仍呈問安御帖行茶禮後受回帖拜 辭退十九日復命 再度呈辭加給由○三度呈辭遞差龍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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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副護軍○十月焚黃于家○扁知足堂 先生常難進易退及 至陞擢尤慄慄懷懼以知足自命嘗接伴時天使朱之蕃書贈知足堂三字至是揭於居室 付義 興衛司果○十一月還朝 西警日急國家蒼皇不敢在家故卽赴京 付龍 驤衛副護軍○十二月淸兵大擧來侵 十二日前鋒到九連城翌 日到安州十四日到鳳山朝野匈匈以金慶徵爲檢察使障守江都李敏求爲副使原任大臣金尙容尹 昉趙翼奉廟社鳳林麟坪兩大君及淑儀元孫先入江都十四日上率春宮出昌德宮未及靑橋賊 鋒已逼上度不得達于江都上崇禮門與諸大臣論應變之策命體相金瑬率訓鍊炮手及御營軍 出陣門外爲遮截之計沈器遠爲留都大將訓鍊大將申景槇收兵入城 十五日扈駕 入南漢山城 上回蹕由銅峴出南小門入山城時百官徒步從之多有不及先生時以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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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衛從不少離左右上每顧視之悶其喘息急而欲少徐之不可得也 自十七日山城 被圍 炮聲振天地若不保朝夕崔鳴吉等自虜陣還曰東宮不可不往稱皇帝稱臣不可不爲先生 讓之曰台監平日讀書乃講究此等義理乎遂白上勿從鳴吉言
十年丁丑 先生六十七歲 正月朔朝行望闕禮 受圍日久主和諸人 往來虜營或捧至其凶書或請送吾斥和之臣獨金尙憲鄭蘊數臣爭不可洪瑞鳳見先生曰若如某某 而終是斥和則置宗社於何地先生笑曰相公果知和之爲宗社獨安乎瑞鳳咄咄視先生 江 都敗報至 二十二日賊陷江都金尙容李時稷尹烇等或自縊死或投水死內官金仁徐厚行 承嬪宮諺敎抱元孫開門而出渡江八島最後嬪宮及兩大君與淑儀渡江直來南漢先生與李象謙卞 三近在直邸聞金藎國李景稷自虜陣來歎曰此必講和也因共入侍行殿各陳備禦之策洪瑞鳳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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鳴吉斥之日一如公等當誤事乃已遂定議出城上意乃傾先生痛哭而出 大駕出城○ 三月隨駕還都上疏陳當務之急○除掌隷院判 決事○閏四月陞嘉義大夫因本職 賞羈靮勞也 兼五衛 都摠府副總管○六月拜戶曹參判辭不允出肅
因事陳啓言監司守令之蔑法者請削罷且言吏曹 判書崔鳴吉之請獨對密啓有乖事體以啓後弊遂 請命推考 再呈告還出給○三告出都門 先生自下城已決意於尋 鄕終老而大亂甫已朝著草創有不敢遽歸及見爵祿日縻亦不欲因循遲疑故三告而不待命出宿 門外明日渡江 七月復除戶曹參判兼副總管不赴召 因前 職復召示以必來也 入月付虎賁衛司直○九月弄月亭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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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淵藏修爲先生之積有經紀而始粧點數間屋子於鍾潭西岸編茅以覆之顔之曰弄月亭蓋淵名本 非偶爾而先生特有感於古人明月出海底之句也獨其題詠之無所槪見於是者其心苦其迹隱先生 之高風逸韻蓋可知矣 聞旅軒先生張公訃
十一年戊寅 先生六十八歲 正月拜禮曹參判有召命再 辭疏不允○趙龍洲來訪 時龍洲避地嶺中更欲僦隱玉山深處歷見先 生先生爲之起敬曰如君眞個是不負所學又送之溪上深以淸名直節許之○按龍洲題先生誌曰昔公 罷官家居不佞造公於咸陽里第藜床弊薦匹壁蕭然盃盤亦無兼味其後二十餘年亦嘗過公公居宰 樞也視其被服亦無少加焉 二月再度辭免不允又呈鄕道請 解職不報乃啓西程 先生以一向苦辭道理惶懍遂決一肅之計二十二日往板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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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飛道谷省先墓明日發行過永豊院桐溪以書替餞桐溪一自入某里罕與人相問而特有所戀別故 也 三月詣闕謝恩○上疏請蠲不緊貢物 疏略曰臣 得見革弊蠲貢事目恐不無經費不足之患而實惠之或未及民也蓋忠淸以西被兵之邑俱得全免則 通計元貢案已減其半矣以其所餘之半而人減三分之一則通計元貢案應納似不過三分之一矣 祭享之重惟正之供百官之祿衛士之料事大皮幣客使支待以其所收三分之一果能辦許多之費乎 省減之論或及於祭享正供臣實痛焉若省減爲恤民之務則孔子何以夏禹之享祀豊潔爲吾無間 然遠邇服食之獻何以著於周書乎先正臣李滉答門人忌日合祭之問曰古無此禮而吾家自前合祭 今不敢輕議禮有公私情無異同舊禮之廢其可輕議乎其他如紙地黃蜜準捧元數猶不足而貿易於 各道況今三分納一可能足需乎此等貢物雖三分之一亦不可減也各司人情之濫已成痼弊雖嚴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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條不無犯禁況於事目中擧論人情而有減半之令則彼必藉口曰人情朝家之所知云多般侵喝矣各 邑供物勿以價布皆以本色備來勿經私主人直納于官員則私主人不敢干其間矣若謂各司下人資 生無路自官優定其數則私主人有資生而民受實惠不啻本色之三分減一矣此外貢物亦多荒政之 所先則瓦署吐木繕工監鐵物未可推減也耶冊紙非所急務則校書館所納未可推減也耶工曹旣有 餘布則司宰監燒木可以貿用其元貢燒木未可推減也耶奉常寺草芚或以江倉所捧者移給而元貢 草芚未可推減也耶司贍寺休紙無緊用則末可推減也耶掌苑署有元貢果實則果園無實者未可推 減也耶司導寺瓢省爲物細瑣而旣曰貢物弊必隨之未可推減也耶觀象監日課紙數多而用小外方 貢紙未可推減也耶臣愚以爲此等物似不但減三分之一也緊用者沒數收捧不緊者量宜全減則經 費無不足之患而實爲三分之減二也 三度呈辭遞差 先生自入都連有呈辭初再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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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給由三度而始遞就靜處攝理鮮有過從者惟許眉叟穆李果庵袤以父兄故舊往來診候殆無虛日 除漢城府左尹兼都摠府副摠管○差庭試參試官 四月除同知義禁府事 初十日與判府事李德泂同知事金蓍國辛啓英啓曰仁 弘餘黨鄭滃鄭淇朴乾甲鄭大容吳益煥等被竄放還之後不思感恩革心反懷怨毒南漢之日至於酌 酒相賀請命圍籬安置之地傳曰依啓允 五月移拜左承旨○七月入 侍晝講 講畢論災傷啓曰民田九等之稅十分皆實則謂之上上而每結收米二十斗九分實 而▩分災則謂之上中而收十八斗由是降殺每以二斗至於八分災而只實二分則謂之下下而收四 斗十分皆災而無一分可食則謂之全災免稅此年分踏驗之所以作而敬差官之所由設也平時之規 臣未詳知而會聞逐年皆以下下每結四斗之稅間有下上下中之田而數亦不多水旱蟲霜之損別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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給災之規惟川反浦落時或免稅蓋由原稅下下則更無給災可謂上有給災之名而下不究澤也 上箚論祭享中脯 宗廟祭享條脯之用年前已有廟堂該曺覆啓定奪而今 欲還用中脯故先生上箚言片脯之不潔 八月擢拜承政院都承旨避 嫌呈辭不允 有不悅者屢短之上答曰此人淳朴無俗態除授長官未爲不可先生 避嫌呈疏辭職批曰頃日臺論實過當宜勿控辭從速察任 十六日謝恩 以瀋陽消 息不好君上憂惶不得一向退辭也 二十六日侍晝講內賜綱目 一部 先生奏啓曰古者大夫以上加資必踏實故郞廳皆親書今則一品官敎亦使下吏書之極 爲未安雖不可盡爲親書二品以上則似當親書矣上曰今後依舊卽廳書之又啓曰雖非都目之時 常時亦須頻頻親政惶恐仰達上曰祖宗朝亦有無時親政之時耶曰小臣雖未詳知傳聞則如是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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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實錄考出時亦令考出何如上曰依爲之 九月上疏乞姪子爾點立嗣 禮曺回啓初六日判付情理切迫依願施行 兼宗簿寺提調○呈病辭 給由允下○進箚請行錄囚舊典 箚曰按典內罪人罪名始囚日 月栲訊及決罪數各其司每十日錄啓其外則節季啓聞云云今者外方節季啓聞之規則有之而京中 十日錄啓之規則無之未知此法緣何停廢此規若擧行則私事繫囚必不濫觴而有罪被囚者亦卽決 放似無滯獄之弊矣箚上召對上曰此法何時廢棄耶對曰小臣新入未知朝家典故只考法典如 此故敢達矣外方守令囚徒有錄置於案上每每披覽至於啓下囚罪人則刑推案每每入啓故必經 御覽亦欽恤之意也上曰如是好矣對曰直守衙門各自錄啓乎刑曺都錄入啓乎上曰獄事刑 曺無不知之理刑曹似當錄啓對曰以此分付刑曹乎待後日更稟擧行乎上曰分付該曺事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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度呈告遞差 多年銀臺人不堪其勩而先生奉公益勤嘗曰晩荷知遇感激隆寵致仕年 迫事君日短竭力殫誠報效萬一云 付龍驤衛大護軍○二十二日除 刑曹參判○三度呈辭遞差○付龍驤衛上護軍○ 十月復除刑曹參判兼分副摠管○上箚申金尙憲 鄭蘊被劾 時臺憲劾金尙憲旣不能如鄭蘊之剚刃而偃息便地不爲來覲自爲潔身有若彰 國之惡者亟請加罪幷及鄭蘊施罰先生上箚卞之曰金尙憲之淸介孤直聖明所洞燭當南漢之日 誓死不變尙憲與蘊二人忠憤固無先後求死不得情迹同然若以剚刃與否罪與不罪則議甚無據臣 竊怪之十年恩遇蘊亦一也竟闕來覲蘊亦一也二臣肝膽寧有他哉竟不成死守之論又不遂決死 之義則二人之心不過以罪自處不敢擧顔入城終至沒齒畝畝而已若謂之潔身而忘殿下則實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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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橫加之言也至於鼓煽異論云者臣不知其意之所在也只以其平日行事觀之必不爲自潔其身彰 國之惡而至于今日發此疑似之說臣恐主此論者固以窺殿下之淺深也自古人君所深惡者黨論 故▩機擠陷之人必以此等說話熒惑人主之聽以濟其私樹黨誤國人臣之死罪極矣論尙憲者因 殿下之所深惡而自爲其地伏覩聖敎以論罪太晩爲批臣不能無憾於日月之明也嗚乎此何時也 國之亡無日矣君臣上下固當同心合力期雪會稽之恥歸命父母之邦念不爲此或感於鄭蘊又感 於尙憲加之以忘君不道之說提起鬧端傾軋一世是何憲府之所見伏願殿下亟奬攘夷尊王之臣 痛斥猜忠嫉直之輩云云 十一月除江陵大都護府使 本府自經亂離 庶務孔棘自上難其人備局薦先生曰非此人不可先生引疾力辭而不允 會餞金忘 窩 榮祖○日記曰孝仲以正朝使戒遠行與金敎官是樞其弟佐郞是權鄭佐郞之益琴僉正是調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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掌令敦復權直長寏崔直長東彦各佩酒訪其所館餞之與孝仲之弟孝吉慶祖孝徵應祖盡日極歡而 罷○孝仲忘窩字也 參同年會 日記曰余同年四十人在世者惟李韓平仲集慶全南吏判子 安以恭朴三宰子粹東善及余四人而已會南子安第設榜會兼爲餞余也南汝昻斗瞻以其子弟參話 汝昻之子伯圖翧亦自直中歸從頌相驩而罷云云○韓平詩曰四十望中惟有四魁元甲上況餘魁魁 指南吏判爲榜首也 十二月赴任
十二年己卯 先生六十九歲 在江陵 比歲凶荒之餘公私掃地赤立餓莩相望先生 見聞惻然猶已飢之曰焉有受人之牛羊立視其死而獨安飽乎雖春夏長日令減廚供或置茶粥而已 七月疏陳邑弊五條 疏略其一大同之弊曰本邑戊寅條應減貢物價米二百三十 九石皆減以上納十斗之米而六斗米餘數則勿爲上納亦勿移給小邑給付本官使應別役永爲恒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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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民蒙一分之惠其二田結之弊曰限今年嚴加踏驗上年起田之今陳者雖不給陳而久遠陳田之今 年仍陳者許令減稅且以本邑六十五結之虛無自覺自今年永減於收租數竝與戊寅條十六斗而蠲 免則不但殘民之蒙惠庶不違隨起收稅之舊規其三族鄰之弊曰就本府軍士雜頉三百名中更加明 査雖稱逃亡而或有富實一族切近親戚者仍舊徵布無一族逃亡及物故被擄者除之未本定者單丁 獨戶則或完聚時在而作戶或逐名徵布而上納且緩奴婢藥生逃亡價布之徵則小紓族鄰之弊其四 炮保之弊曰令都監參商終始事情本府丙子條末納價布一百五十六疋特令依他蕩滌則海隅蒼生 均霑朝廷之特恩其五迎送之弊曰自今年依當初事目人吏官屬計結給復以爲新舊迎送之資或 定其人馬之數臨時以六斗米計給則貪官汚吏不得濫數調發而貧殘官屬庶乎其滋息此五條一府 重弊民之聚散邑之完敗典繫於此故臣敢覼縷以冀變通焉摠數萬言疏上未幾先生歿該曹不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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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日寢疾 按日記患泄痢二十日以後更不能日記 八月十一日易簀 于官○九月二十五日返櫬○十月上遺官賜賄 別致賻 禮曹正卽金善英奉命來行 十一月二十五日己卯葬于 板屹洞亥坐原 參判公墓左也士林會者數百人
十三年庚辰行狀墓誌銘成 李石樓慶全撰行狀趙龍洲絅撰銘
辛卯 孝宗大王二年 正月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春秋館事世子左賓客 以宣武原勳特贈 己卯 純祖大王二十年 奉安位版于花州書院 在安陰搜勝臺下流條愁 巖上正宗大王丁未享于靖忠祠至是移奉因用李小山光靖所撰常享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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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堂集 해제
저자 소개 : 朴明榑(1571-1639)
박명부의 자는 汝昇, 호는 知足堂, 본관은 密陽이다. 咸安 訓導를 지낸 朴德馨의 손자로, 咸陽郡 安義縣 光風里에서 태어났다
16세(1586년)에 桐溪 鄭蘊의 부친인 鄭惟明에게 학문을 배웠고, 20세(159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權知校書館 副正字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듬해 承文院 著作을 제수 받았으며, 가을에 寒岡 鄭逑를 뵙고 제자의 예를 올렸다. 정구는 南冥 曺植의 문인이다.
22세(1592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安義에서 의병을 모으고 晉州로 가서 招諭使 金誠一을 만나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논의했으며, 郭再祐 장군의 진영에 들어가 전투에 참여하면서 의병 모집하는 일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그 공으로 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곽재우는 南冥 曺植의 문인이자 外孫婿이다.
임란이 끝난 후 司憲府 持平을 거쳐 晉州 判官, 陜川 郡守 등의 벼슬을 역임하기도 했다.
광해군 때 조정의 어지러운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고자 여러 번 상소를 올렸으며, 어릴 때 같이 수학한 鄭蘊이 永昌大君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갈 때는 이를 변호하기도 하는 등 나라의 평안에 노력하였으나 조정이 더욱 어지러워져 향리로 내려왔다. 정온은 來菴 鄭仁弘을 사사하였으며, 정인홍은 南冥 曺植의 제자이다.
인조가 등극하자 다시 弘文館 副修撰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때 지족당은 조정에 있으면서 긴급하지 않은 공물을 없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상소를 올리는 것을 비롯해 둔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54세(1624년) 때 竹山 都護府使, 56세(1626년) 때 濟州 牧使, 59세(1629년) 때 刑曹參議 등의 내외직을 두루 거쳐, 61세(1631년) 때는 晉州 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이라서 부임하지 않았다.
64세(1634년)에 承政院 同副承旨에 임명되어 여러 시정책을 건의하는 등 소임을 다했으며, 右副承旨와 左副承旨를 거쳐 66세(1636년) 때 禮曹參判으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명나라 사신 朱之蕃으로부터 예전에 받아두었던 지족당이란 글씨를 거실에 걸어 두고,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67세(1637년) 되던 해 9월에 弄月亭을 지었다. 이보다 앞서 7월에 호조참판으로 불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벗 삼아 평생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68세(1638년) 때 江陵都護府使에 임명되었을 때는 사직의 허락을 얻지 못하고 부임하여 폐단을 바로잡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인 1639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으며 1651년 조정에선 그의 학덕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증을 하였고 위패는 花川書院에 봉안되었다.
내용 개요
『지족당집』은 8권 3책으로, 1권부터 5권까지는 지족당의 저술이고, 6권부터 8권까지는 부록문자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趙鍾弼의 서문을 手蹟體로 판각한 것과 목록이 실려 있다. 이어서 1책의 1권에는 賦와 詩, 2권에는 敎書·疏·箚子가 실려 있다. 2책의 3권에는 啓辭·狀啓·箋文·書, 4권에는 雜著, 5권에는 序·記·跋·銘·贊·祝文·祭文·傳·碑碣이 실려 있다. 3책의 6권에는 年譜·敎諭·賜祭文, 7권에는 贈詩·贈序·挽詞·祭文, 8권에는 行狀·墓誌銘·神道碑銘·花川書院常享祝文·弄月亭重建記·弄月亭重建樑頌이 실려 있으며, 맨 마지막에 跋이 실려 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 1】
賦(2首) (4)
次登樓賦, 作橋渡螘賦.
詩(133題 140首) (54)
立春門帖, 長夜, 龍灣客館與李德輝敍懷, 泊舟杏洲有感, 淸明日和同僚, 自洛還馬上吟, 鎭安途中遇吳翼承長喜甚走次見贈, 二月十日有感作, 益山見羅文學子升級因以淸風換毛扇戱題其面, 子升扇尾更題, 益山郡齋醉席又贈子升, 萬頃縣站舍壁上, 金堤再逢羅子升, 礪山縣庭有老梅龍鍾枝條見伐過寒食猶未開花有感賦之, 酬趙汝凝, 記夢, 咸平始見梅花有感, 綾城連珠樓醉呈座右, 夜深獨坐柳南平敬善有約不來, 淳昌村舍見老嫗日暮獨舂, 長興道中冒雨小憩, 與韓仲益兄弟會飮趙士凝所士凝呼兒出紙索詩太勤先題拙句, 謝養叔求寫前製, 白蓮社贈老禪, 靈巖東村避雨小坐閔舍人舊宅有感, 兵營夜飮, 劉閫帥厭碁有詩戱和其韻, 五月見耕者尙多, 康津途上見綠樹高堂閒坐數人, 家君晬辰次叔父韻在赤裳時, 挽地主郭存齋, 自茂朱將向錦山孫丈士和朴上舍公幹强邀於所寓西村貿村醪一壺餞於松邱令陪童援筆醉呼, 獨坐錦山旅次, 題尹司僕龍祥壁上, 高山太守載酒來饋寫古句以呈, 高山醉次任上舍尹重韻, 扶安縣呈金調度使汝秀, 扶安鄕丈持酒高會次崔奉事時立韻, 金溝縣見趙大笑宗道善政碑有感, 贈李馨伯, 故鄕人來, 長城落花, 登換鵝亭憶金太守大賢, 訪河子車山廬不遇, 胡越一家, 重陽旅寓鷄林次唐人詩遣懷, 山廬守歲, 淸明日書懷, 寒食日次趙僚丈希輔韻, 戱次趙善繼存世年兄韻, 南宮次館伴韻, 挽鄭吉翁宗憲, 臨溟驛月夜次李太白關山月韻在居山時, 冬至日行到金化縣生倉驛, 明川古站驛月夜吟古人古驛逢明月句, 谷口驛法堂巖見日出二首, 李亞使光胤餞席索言甚懇使全丈絳操筆口呼, 鐵嶺馬上懷鄕口占, 端川別曺慶良二首, 次李巡相時發大夫人壽宴韻, 戲呈尹利城弘鳴李端川受訓, 留醉利城戲吟, 七寶山歸路次評事李善餘士慶贈別, 李巡相與金洪原廷叟壽賢沈高山重卿詻遊萬甲亭余及尹北靑德輝煌後至次巡相韻, 是夕乘月下萬歲橋又次巡相韻, 旣望巡相會諸壯士於制北樓余與廷叟重卿從之次巡相韻, 雨後過洪原見禾黍甚茂賀主倅金廷叟二首, 自起開籠放白鷴, 文義驛站閱休紙戲和沈重卿文川雜調, 挽尹丈劼, 七月十五日夜有懷, 奉姜殿中渭瑞應璜赴朝, 祝渭瑞以會稽縣檄念非爲朋友至計更呈一絶, 掛劒, 墮樓, 除夜, 挽權長鬐世仁, 夜坐懷人在古阜時, 與扶安倅彈琴聽歌, 別權達甫潗, 次姜渭瑞翠寒亭韻, 丙辰立春二首, 贈李姪克敬, 挽李上舍極甫, 讀書引示諸生, 丁巳立春, 挽李忠義衛希雍, 次孫丈景初韻, 題張良取屨圖, 己未立春, 與鄭克承弘緖出遊灆溪望黃石山城各有感賦一絶, 挽寒岡鄭先生二首, 客舍席上醉書, 訪朴上舍君秀文楧不遇, 壬戌春帖, 奉送許若虛赴鏡城, 鄭德翁宗懋壽席醉呈主人, 挽愼樂水權, 見鄭晦谷故墟叢竹有感, 瀛洲望京樓和贈金吾郞柳君東輝, 登快心亭倚欄無聊次板上韻全州, 到礪山郡館步月無聊次壁上韻, 湖西路訪吳恩津達天朴魯城大楗俱入京不在用壁上韻, 金溪驛踰車峴, 挽金上舍心源澈, 贈普澈僧, 挽姜校理克脩繗二首, 送李蒼石埈外補三陟府, 登鳥嶺, 寒食日思先墓, 與鄭慶州衛道文翼遊立巖在蔚山時, 長夜, 挽上舍三從兄明胤, 遞任後窮居解嘲, 龍仁村舍雨中作, 挽姜同樞二首, 呈鄭城主雲翰, 步前韻又呈城主, 過朴君秀龍巖江亭感舊二首, 約鄭少宰輝遠蘊往長水寺朋友從者盡一鄕用愼而與韻以志盛事, 命兒爾點書碁局, 挽李茂伯潤雨, 板屹寺立春會同禹君勉惇鄭子安以怗林承慶十五人, 挽三從弟君擇明善, 政院酬唱同諸僚, 附和韻, 挽柳季華袗, 述懷, 餞京師使行, 公州雙樹亭, 別主倅鄭侯雲翰, 題弄月亭, 與主倅沈長世欲遊新亭爲風雨所阻以一絶相報.
【권 2】
敎書
敎藍浦縣監權綵捕賊加資書 (1)
이 글은 지족당이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교서이다. 남포현감 권채가 세 차례나 도적을 포획하고, 절도사에게 공문을 보내 여러 읍에서 각기 도적을 잡게 한 것이 10여 차례나 되어, 그 공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敎理山郡守柳琳捕虎加資書 (2)
이 글도 지족당이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교서이다. 북쪽 지방에 호환이 많고, 특히 理山 한 군에서만 몇 년 사이에 170여 명이나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는데, 관찰사 金藎國의 장계에 의하면 柳琳이 이산군수로 부임하여 궁노와 덫, 함정을 많이 설치하여 호랑이를 열 한 마리나 잡았다고 하여, 그 공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敎恩津縣監鄭孝誠加資書 (1)
이 글도 지족당이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교서이다. 은진현감 정효성이 부임한 이후 백성들을 잘 다독이고, 양곡도 많이 비축하여, 흉년이나 전쟁에 대비할 수 있게 한 공을 인정하여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疏
乞歸省病母疏 (3)
고향을 떠나 서울 등에서 벼슬살이 한지 9년이 되도록 병든 부모를 찾아뵙지 못하였고, 부모도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형편인데, 얼마 전에 부친이 편지를 보내 지족당이 떠난 이후로 살아갈 길이 막연하고, 모친도 굶주림 끝에 묵은 병이 도져 고생하고 있다고 하니, 이런 편지를 받고 자식 된 도리로 가 보지 않을 수 없노라고 하면서, 특별 휴가를 얻지 못하면 전라도 쪽으로 발령을 받아 병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돌보아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지족당의 나이 30세(1600년) 때의 일이며, 이 상소는 임금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辭管餉使疏 (2)
1623년 5월에 지족당은 大邱都護府使와 겸하여 元帥府의 管餉使로 발령이 나고, 아울러 통정대부의 加資가 내려졌다. 그러자 지족당은 이 상소를 올려, 능력이 부족하여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관향사의 직책과 통정대부의 자품을 사양하고 있다.
再辭加資疏 (1)
1623년 5월에 지족당이 관향사의 직임과 함께 통정대부의 가자를 받은 후, 11월에 관향사가 혁파되었다. 그러자 지족당은 소를 올려 통정대부의 가자를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蔚山民弊疏 (18)
지족당은 1629년(59세) 12월에 울산도호부사에 제수되었는데, 그 이듬해 4월에 울산의 민폐 다섯 가지를 지적한 상소를 올렸다. 첫째는 軍伍의 폐단이다. 도망간 군사 89명을 명단에서 빼 주고, 餘丁 32명은 세금을 감면해 달라는 내용이다. 둘째는 戰船의 폐단이다. 좌우도의 형세를 잘 살펴서 울산도호부의 전선은 혁파하여 군병과 기계를 육군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셋째는 田結의 폐단이다. 매년의 문서를 조사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자세히 살펴, 울산도호부의 세금을 감면해 달라는 내용이다. 넷째는 牧場의 폐단이다. 전후의 조례를 살피고 牧卒들의 원망을 생각하여 말을 잃어버린 값을 가볍게 해 주면 일곱 명의 목졸이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다섯째는 官屬의 폐단이다. 국가의 정해진 제도를 참작하여 울산도호부의 寺奴婢 각 수십 명을 본부의 官奴婢로 移屬시키고, 또 本道에 명하여 樂工을 분정하는 것을 감해주고, 신설되는 京主人을 제해 주면 곤경에 처한 관속들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밖의 크고 작은 폐단은 다른 고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다섯 가지는 다른 고을에는 없는 폐단이니, 조정의 배려를 입는다면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로하고 달아나는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辭禮曹參判再疏(初疏逸) (3)
1636년(66세) 7월에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지족당은 두 차례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첫 번째 소는 없어졌고, 이 글은 두 번째 올린 사직소이다. 참판의 지위는 매우 중한 자리여서 신중하게 인재를 선발해야 하는데, 자신은 청현직을 역임하지도 못하였고, 재주와 덕망도 없으며, 더구나 危妄한 발언을 하여 廢錮의 처벌을 받은 적이 있어서 적임자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請蠲不緊貢物疏 (7)
1638년(68세) 정월에 예조참판에 다시 제수되고 나서 3월에 올린 소이다. 공물을 감해주는 것은 그것이 긴요한 물건인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이 되어야지, 일률적으로 반이나 3분의 1을 감해주는 것은 적절치 못하므로, 긴요하지 않은 공물은 완전히 감면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다.
江陵民弊疏 (19)
1638년(68세) 11월에 강릉대도호부에 제수되고 이듬해 7월에 강릉의 민폐에 대해 올린 소이다. 첫째는 大同法의 폐단, 둘째는 田結의 폐단, 셋째는 族隣의 폐단, 넷째는 炮保의 폐단, 다섯째는 迎送의 폐단 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箚子
論祭享中脯箚子 (1)
제향에 쓰는 육포와 편육의 제조 과정이 불결하고, 또 병든 소를 쓰는 경우가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차자의 뒷부분이 없어져서 결론은 자세하지 않다. 연보에 의하면 지족당의 나인 68세(1638년) 때 올린 글이다.
請置政院使令箚子 (2)
승정원의 사령이 전에 비해 태반이 줄어서 일이 너무 많으니, 병조에 명하여 승정원의 사령에게 예전과 같이 월급을 지급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임금은 그대로 하라고 전교를 내렸다.
請行錄囚舊典箚子 (3)
규정에 의하면, 죄수에 대해 신문하고 판결한 내용을, 중앙에서는 매월 10일에, 지방에서는 절기마다 한 번씩 기록하여 계를 올리게 되어 있었는데, 중앙에서는 그 규정이 폐지되어, 전옥서에서 매월 10일에 죄수에 관한 기록을 승정원에만 올리고, 승정원에서는 승지가 한 번 보고 내버리고 있는 실정을 보고하고, 바로잡아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임금이 지족당을 불러 자세히 묻고, 형조에 그대로 분부하였다. 연보에 의하면 지족당의 나이 68세(1638년) 때 올린 글이다.
論金尙憲鄭蘊被劾箚子 (3)
김상헌과 정온이 임금을 잊고 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고 시비를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을 깨끗이 하느라고 나라의 악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존왕양이를 하는 신하에게 상을 주고, 충직한 신하를 질시하는 무리들을 배척하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연보에 의하면 지족당의 나이 68세(1638년) 때 올린 글이다.
【권 3】
啓辭
請寢柳袗推考啓辭 乙亥(1625년) (1)
전 지평 柳袗이 피혐지사를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 그를 포용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元宗大王祔廟時請別立廟室且還收臺諫削竄之命啓辭 (1)
원종대왕을 성종의 묘당에 합사하지 말고, 태조의 묘당과 가까운 곳에 따로 묘당을 세워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하라는 내용이다.
請收羅萬甲罷職之命合啓 (1)
폭우로 두 왕릉이 무너지자 참봉 羅萬甲을 파직하였는데, 그 명을 거두어 달라는 내용이다. 연보에 의하면 지족당의 나이 65세(1635년) 때 올린 글이다.
丁丑六月啓辭 (1)
감사나 수령 중에 법을 무시하는 자를 파직시키라 하고, 이조판서 崔鳴吉이 독대를 청한 것은 비록 환난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예법에 어긋나니 추고하라는 내용이다. 67세(1637년) 때 올린 계사이다.
請俵災事目正誤啓辭 (1)
俵災事目의 착오를 바로잡아달라는 내용이다.
狀啓
請罷納粟士子編防狀啓 (3)
관향사가 되었을 때 올린 것으로, 1623년(53세) 윤 11월에 쓴 것이다. 당시에 納粟에 따른 賦役 면제에 폐단이 많으니, 해당 관서에 명하여 자세히 살피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이에 임금이 그대로 하였다.
請設屯田收粟狀啓 (3)
1623년(53세) 11월에 올린 것으로, 바닷가 공한지에 유민을 모아 둔전을 설치하여 종자를 나눠주어 농사를 짓게 하면, 곡식을 많이 거둬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請驛田還給狀啓 (4)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1636년 (66세) 1월에 쓴 것이다. 충청도는 경기와 호남·영남 사이에 있어 別星과 公幹의 왕래가 잦아 馬位田을 개간하여 세금을 걷어 쓰고 있는데, 馬稅를 모두 삭감해 주면 말을 준비하기 어려우니, 참작해 달라는 내용이다.
將領選薦狀啓 (2)
1636년(66세) 4월에 올린 것으로, 비변사의 요구에 따라 將領 세 사람을 추천한다는 내용이다.
箋文
冬至箋文 (1)
특별한 현안은 없이, 동짓날을 맞아 임금에게 올린 인사이다.
書
上寒岡先生禮疑問目 竝答目 (10)
옛날에는 묘 아래 几筵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삼년 이내에는 집에 올 필요가 없었는데, 요즘에는 더러 返魂을 하고 廬墓하는 것은 次子아고 상주는 집에 있으면서 궤연을 받드는 경우가 있다. 만일 상주가 삼년 간 여묘살이를 하면 朝夕 上食은 차자가 하는 것이 예에 어긋나지 않는지 묻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寒岡은 옛날에는 성현이 여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문제에 대해 옛날 현인에게 물어보아도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1603년(33세)에 쓴 것이다.
이 외에도 朝夕 上食, 三獻禮, 練服, 祔祭, 禫服 등에 대해 한강과 문답한 내용이 실려 있다.
答廟堂問弊書 壬寅(1602년) ○代鄕人 (8)
조정에서 민간의 폐단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내용으로, 鄕人을 대신해서 써 준 것이다.
上方伯 庚戌(1610년) (3)
1609년에 공조정랑을 제수 받고, 이듬해 9월에 합천의 新溪 院儒들과 함께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린 글이다. 신계에 玉溪 盧禛과 介菴 姜翼 두 선생의 사당이 있는데, 병화로 훼손되었으니 다시 세울 방도를 세워 달라는 내용이다.
答黃大憲暹 (1)
대사헌 黃暹이 죄인을 관대하게 처리해 달라고 청탁한 데 대하여,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私情을 둘 수 없다고 거절하는 내용이다.
答琴堤川 應壎 (1)
琴應壎이 부탁한 院事에 대해 차질없이 시행하겠다고 답한 내용이다.
與李參判 時發 (9)
호패법을 실시한다는 명이 내려졌다가 뒤이어 시행이 정지되자, 그 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시행이 중단됨으로 인해서 생기는 폐단을 얘기한 내용이다.
與南敵萬 以雄 (2)
지족당이 남쪽으로 부임하러 가면서 南以雄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答醴泉道會所 1621년 (1)
예천도회소의 여러 군자가 목욕을 하기 위해 도움을 청한데 대해서, 격려해 주는 내용이다.
答吳翼承 長 (1)
임금이 未寧하여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나, 임금이 쾌차하는 날이 자신이 물러나 돌아가는 날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答朴叔彬 而章 1607년 (1)
朴而章의 안부편지를 받고 산림간에서 지내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는 내용이다.
答朴叔彬 1609년 (1)
1609년 정월에 합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鄭仁弘에게 잘 보이지 못해 바로 파직 당하였는데, 그 때의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한 내용이다.
與權靜甫 濤 1639년 (1)
강릉대도호부사에 부임하여 생멧돼지나 멧돼지포 등 여러 가지 부탁 받은 물품을 보내주지 못하는 사정을 얘기하고, 덧붙여 중전 책봉일이 어찌하여 동궁 책봉일보다 먼저 잡혔는지 묻고 있다. 아마도 부탁받은 물품은 중전 책봉일에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答朴君秀 文楧 (1)
강동에 온 후 朴文楧과 서로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與校中(代鄭思悔作) (1)
향교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원 移建 시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答李叔發 天封 (1)
將德晦가 찾아와 얘기하고, 東西 兩湖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면서, 그대와 함께하지 못함을 무척 아쉬워했다는 내용과 함께, 근래 임금에게 올릴 小箚를 썼는데, 미리 보여주지 못하여 아쉽다는 내용이다.
答李都事 馨遠 (1)
안부 외에 핵심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고, 다만 남들의 입줄에 오르내리는 게 염려가 되니 자기 집에 발길을 끊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고 있다.
答許維嶽 喬 (1)
서원의 일은 그대가 힘써 주고 있으니 곧 이루어질 것이라 다행이며, 죽은 사위 부부의 장례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염려가 된다는 내용이다.
答任卓爾 屹 (1)
무슨 일로 원망과 비방이 가득하여 부끄럽고, 어찌하여 늙은 몸이 일찍 죽지 못해 이런 지경을 당하는지 생각하면 한탄만 나온다고 하면서, 위의 이형원에게 보낸 편지와 같이 자기 집에 발길을 끊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與李士凝 壆 ○癸卯(1603년) (1)
자기는 평생에 禮書 한 권도 읽지 않고,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난리통에 자라다 보니 治喪의 예절을 본 적도 없는데, 큰 일을 당하고 보니 喪葬의 절차를 몰라 『家禮』 한 책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이어서, 당신이 晴菴 어른을 가까이서 모시고 있으니, 내가 묻더라고 하지 말고 당신 생각처럼 해서 다음 여러 가지 의문을 낱낱이 여쭈어서 회답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혹시라도 자기를 아는 사람이 자기가 이런 질문을 한 줄을 알면 배를 잡고 웃을 것이라 걱정하면서도, 예에 어긋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答金行遠 軸 (1)
추석 후에 방문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기다리고 있으며, 孝叔 부자도 함께 오면 더욱 좋겠는데, 효숙도 전에 한 번 오겠다고 한 적이 있으니, 이번에 얘기해서 같이 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答金行遠 (1)
소를 올린 지가 보름이나 되었는데 아직 임금의 비답이 없어 황송하게 기다리고 있으며, 무릎이 아파 기거가 매우 불편하다는 내용이다.
【권 4】
雜著
通疏廳文 甲寅(1614년) (3)
桐溪 鄭蘊이 상소를 올린 일로 죄를 얻어 옥에 갇히자, 영남의 선비들이 의령에 모여 소를 올리기로 하고, 소를 받들고 서울로 들어갔는데, 邢孝甲이 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정온의 아들 鄭昌詩를 협박하여 결국 소를 올리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래서 다시 편지를 보내 소를 올리자는 의론을 펼친 것이다. 즉 지난번 소를 올린 것은 꼭 정온 개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초야의 공론으로 강상을 붙들고 시비를 밝히자는 것이었는데, 정창시의 개인적인 상황은 비록 절박하지만 그것 때문에 반드시 그만두어야 할 것도 아님에도 그것을 핑계 삼아 상소를 포기하는 것은 잘못이 크다는 것이다.
習用干戈論 (月課)(6)
하늘이 봄과 여름에 만물을 생장시키고, 가을과 겨울에는 거두고 죽이듯이, 임금도 문덕과 무덕을 아울러 닦아야 하며, 무기 사용을 훈련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라는 내용이다.
殿試策問 (1)
殿試에 내는 임금의 策問을 대신 지은 것이다. 아무리 나라를 잘 다스리려 하여도 재이가 자주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인재를 잃어버리고, 백성들의 원망이 그치질 않으니, 도를 세우고 백성들을 권면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묻는 내용이다.
擬殷高宗賜傅說用汝作霖雨誥 (1)
중국 殷나라 高宗이 傅說에게 忠言을 당부하는 내용의 『書經』 「說命 」편을 본떠서, 誥라는 문체의 글을 지어 본 것이다.
羸牛說 (7)
이 글은 힘없는 소를 비유로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농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먹이는 적게 주고 일은 많이 시켜 소가 쓰러지고 말았다. 주인은 그 소를 산 속에 풀어놓았는데, 소는 지치고 다리가 아픈 데다 설사까지 나서 돌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러자 까마귀가 몰려들어 소의 머리를 쪼아댔는데, 소는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 까마귀가 소에게 일을 하지 못하니까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자 소는 항변하였다. 자기는 원래 역사적으로 보듯이 많은 공을 세운 존재인데, 주인과 종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부려서 이렇게 된 것이지만, 언젠가 주인이 뉘우치고 자신에게 돌아와서 잘 길러 주면 힘차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곁에서 듣게 된 주인이 그 말과 뜻을 장하게 여겨 돌아가 적어 두었다.
愛禮存羊說 (2)
『논어』에 나오는 “子貢이 告朔을 할 때 양을 희생으로 바치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그 양을 아끼는구나, 나는 그 예를 아까워한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에 대해, 공자가 예를 아까워했던 것은 형식적으로나마 예를 집행하고 있으면 후세에 다시 예의 정신까지 복원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얘기하는 내용이다.
地癖說 (2)
‘癖’이란 일종의 병으로, 어떤 것에 치우친다는 것인데, 마음이 치우치는 것이 곧 욕심이고, 욕심이 생기면 병이 된다. 하물며 ‘地癖’은 부와 이익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니 당연히 마음의 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舌織說 (1)
자리나 짚신을 짜서 먹고 사는 것처럼, 혀로 뭔가를 짜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을 파는 것이니, 군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七寶山紀行 (4)
35세(1615년) 되던 해 정월에 領僧軍으로 뽑혔는데, 그 해 5월에 評事 李善餘와 함께 칠보산을 오른 일을 기록해 둔 것이다.
黃石山城實蹟 (7)
1597년 정유재란 때 도체찰사 李元翼이 왕명을 받아 적을 소탕할 계획을 세워 각 고을에 분부하였는데, 安陰縣監 郭䞭과 咸陽郡守 趙宗道가 黃石山城에 와서 성을 수리하고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때 곽준의 두 아들은 부친의 시신을 붙들고 울다가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사위도 적에게 잡혀가자 딸은 미리 준비한 끈으로 자결하였다. 또 성이 함락되었을 때 지족당의 외종형 忠義衛 柳橿이란 자가 老父를 모시고 북문으로 나가다가 적을 만나자 몸으로 부친을 막아서다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장면을 모두 목격한 鄭思悔가 진술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권 5】
序
銀臺契屛序 (2)
銀臺는 承政院의 별칭이다. 승정원 관리들의 모임인 은대계에서 사용하는 병풍에 대해 그 의의를 서술한 글이다.
臥遊錄序 (3)
鄭子賓이란 사람이 지족당을 따라 鉢嶽에 갔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책을 보여 주었는데, 金宗直·金馹孫·曺植의 지리산 유람록과 南孝溫·鄭汝昌·盧禛·曺偉·兪好仁·徐居正·魚得江 등 고금의 문사들이 지리산을 여행하면서 남긴 시들을 모아둔 것이었다. 제목은 「臥遊錄 」이라 하였는데, 그 책을 읽어보니 지리산의 경치가 환히 보이는 것 같고, 마치 자신이 지리산 정상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것을 정리하여 서문으로 삼은 것이다. 50세(1620년) 때 쓴 것이다.
送峨嵯李子淵溟出宰舒川序 (3)
1608년(38세)에 지족당이 仁達里에 있을 때 처음 만나 가까이 지냈던 李溟이 舒川으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쓴 送序이다.
盧氏三世碑文帖序 (2)
1635년(65세)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사위 盧氏의 증조 이상 三代의 墓碣과 墓碑의 紙本을 보고 쓴 서문이다.
送辛君士達赴關西佐幕序 (2)
辛慶衍이 평안도 병마평사로 가게 되자, 병마평사직의 중요성과 인재 선발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그를 전송하는 내용이다.
記
濟州牧池亭記 (3)
1626년(56세) 섣달에 제주목사에 제수되어 이듬해 봄에 부임하였다. 통판 李恪의 권유로 성의 동문 안에 있는 구릉의 시냇가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 이듬해 3월에 완공하고 이 글을 지었다.
遊水淵小記 (3)
제주목사로 있을 때 都近川 상류의 水淵瀑布에 놀러 갔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때는 1628년(58세) 4월 22일이었다.
跋
書成石谷傳後(3)
지족당 조부의 생질인 成石谷에 대하여 지족당의 戚叔인 鄭 參判이 쓴 傳을 읽고, 그의 孝友와 好學에 감명 받아 쓴 것이다.
題關北日錄後(1)
36세(1606년) 때 居山道察訪 兼北靑敎授提督屬校官에 제수되어 섣달에 부임하였다. 이 때는 벼슬을 시작한 후 오랫동안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여묘를 마친 시점이어서, 병든 모친을 두고 떠난 것이었다. 이천 리 길을 가면서 숙식한 내력을 적어 『關北日錄』이라 하고 그 뒤에 쓴 것이다.
題友人冊面 (1)
都監에 있을 때 함께 있던 沈子順이 가져왔던 책을 책상에 두고 보았는데, 후에 도감이 해체되었을 때 관리가 자기 책인 줄 잘 못 알고 보내주었다. 그것을 다시 權叔節 편에 심자순에게 보내면서 그간의 내력을 책의 뒷면에 쓴 것이다. 1606년에 썼다.
銘
玉燭銘 (1)
궁궐의 촛불에 대해 쓴 銘이다. 촛불을 임금의 덕이 사방에 퍼지는 것에 비유하였다.
篋銘 (1)
상자의 쓰임새가 좋은 것을 능력이 많은 신하에 비유한 글이다.
贊
制北樓落成宴圖屛贊竝序 (2)
1606년 8월에 李相公이 中軍 朴蘭英에게 명하여 咸興에 토성을 쌓게 하였는데, 그 성을 萬甲城이라 하고, 그 남문을 制北樓라 하였다. 이듬해 5월에 성을 쌓는 데 공이 있는 文武 관료와 父老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는, 그 사적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였다. 그 그림에 대해 찬을 짓고 아울러 서문을 쓴 것이다.
背涅四字贊 月課 (1)
宋나라의 충신 岳飛가 등에 ‘精忠報國’이라고 새긴 데 대하여 찬을 쓴 것이다.
祝文 祭文
移建龍門書院一蠹先生改板告由文 (1)
一蠹 鄭汝昌선생을 모신 龍門書院을 霽月 東陵에 옮겨 세우고 올린 告由文이다. 1619년(49세)에 쓴 것이다.
奉安文 (1)
위패를 모시고 올린 奉安文인데, 누구의 위패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霽月 東陵에 터를 잡았다는 말로 보아 용문서원을 옮기고 一蠹 鄭汝昌 선생의 위패를 모실 때 쓴 것으로 보인다.
祠堂移安告由文 (1)
一蠹 鄭汝昌 선생의 사당을 옮기고 올린 고유문이다. 위 봉안문과 같은 때 쓴 것이다.
告外舅贈參判金公文 (1)
지족당의 장인 참판 金㔦之의 사당을 집으로 옮기고 올린 고유문이다. 김양지는 자식이 없고, 후처를 들였는데, 후처가 죽자 그 사당을 자기 집으로 옮긴 것이다. 1613년(43세)에 쓴 것이다.
祈雨文 (1)
비가 오게 해 달라고 비는 글이다. 1630년(60세)에 쓴 것으로 보인다.
海神祈風文 (1)
1628년(58세)에 제주목사로 있을 때 그 곳 백성들을 위해 바닷바람을 빌어준 글이다.
板屹洞開塋告由文 (1)
金猿山 板屹洞에 있는 선영을 옮길 때 올린 고유문이다.
賜祭知中樞府事許晉文 (1)
知中樞府事 許晉에게 임금의 이름으로 내린 제문을 지은 것이다.
祭寒岡先生文 (2)
1620년(50세)에 스승인 寒岡 鄭逑의 상을 당하고 지은 제문이다.
祭朴上舍君秀文 (2)
上舍 朴君秀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祭鄭僉正宗懋文 (2)
僉正 鄭宗懋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祭地主韓侯汝沃文 (2)
守令인 韓汝沃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祭愼夜川復振文(代龍門院生) (1)
愼復振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용문서원의 원생들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祭權長鬐世仁文 (2)
權 世仁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祭李忠義慶立文 (2)
李慶立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祭權掌令達甫文 (3)
權潗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代徐繼哲告其父母文 (2)
徐繼哲을 대신하여 그 부모에게 고하는 글을 써 준 것이다. 서계철의 부친 徐禮元은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란 때 성이 함락되자 순절하였다.
傳
郭存齋傳 (3)
存齋 郭䞭(1551-1597)의 전기이다. 곽준은 정유재란 때 安陰縣監으로 있으면서 의병을 일으켜 黃石山城에 들어가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곽준과 咸陽郡守 趙宗道가 먼저 해를 당하고, 조종도의 아들은 졸개 몇 명과 함께 목숨을 건졌지만, 곽준의 두 아들은 부친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다가 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 큰며느리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죽고, 장녀도 그 남편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미리 준비해 둔 끈으로 목을 매 죽었다. 이 이야기는 「黃石山城實蹟 」에도 거의 비슷하게 들어 있다.
碑碣
晉陽兵馬中軍姜公惠思碑 (1)
1583년에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임진란 때 많은 활약을 하고 折衝將軍에 봉해진 姜德龍(1560-1627)의 은혜를 기리는 비문이다.
進士敬菴盧公墓碣銘 (5)
盧禧(1494-1550)의 묘갈명을 그의 증손 盧亨運의 부탁을 받아 지은 것이다. 1636년(66세)에 썼다.
【권 6】
〈附錄〉
年譜
年譜 (60)
지족당의 출생에서부터 69세로 별세할 때까지 연월에 따라 기사를 작성하였다. 주요한 내용은 저자소개에서 개괄하였다.
敎諭
敎公淸道觀察使書 (3)
1635년(65세)에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할 때 내린 교서이다.
敎管餉使加資書 (2)
1623년(53세) 때 管餉使에 임명하면서 通政大夫의 加資를 내리는 교서이다.
賜祭文
賜祭文 (1)
1639년 8월 11일에 지족당이 별세하자 10월 15일에 仁祖가 내린 제문이다.
【권 7】
〈附錄〉
贈詩 (12)
雨中奉朴斯文汝昇南歸(李元翼), 奉寄居山朴察訪(李好閔), 奉贐居山督郵赴北(金尙憲), 朴年兄汝昇赴居山督郵時臨別奉慰(李廷龜), 奉別汝昇年兄赴居山(南以恭), 奉送朴察訪(尹新之), 送朴兄汝昇之關北(權濬), 送朴察訪(大陰), 敬送朴汝昇赴胡縣(南以雄), 醉送知足堂還鄕(南以雄), 別朴汝昇(南以雄), 同年朴少宰汝昇出宰江陵與朴四宰子粹東善會餞於南吏判子安以恭第(李慶全), 贈別朴汝昇(李士固), 奉贈令公按節湖西(趙希逸), 奉贈朴知足堂汝昇(趙希逸), 朴汝昇還鄕後寄贈(鄭弘緖), 送朴令公歸京(鄭弘緖), 自洛還朴汝昇出贈輝遠韻因次贈之(權濤), 次知足堂韻(睦敍欽), 敬次(崔荇), 寄朴汝昇兄(兪尙魯), 呈詩求藥(兪勉魯)
贈序
送朴汝昇關北序(崔岦) (3)
1606년(36세)에 지족당이 居山道察訪 겸 北靑敎授 提督屬校官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簡易 崔岦이 써 준 것이다.
送朴汝昇歸安陰序(鄭弘緖) (3)
1614년(44세)에 지족당은 함양의 九羅村에 작은 집을 사서 거처하다가, 1622년(52세)에 다시 안음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 鄭弘緖가 써 준 것이다.
挽詞 (8)
작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鄭蘊, 鄭弘緖, 權濤, 卞三近, 睦敍欽, 徐景雨, 盧亨弼, 趙啓遠, 成震奎, 禹汝楙, 李道長, 李壽檍.
祭文 (27)
작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鄕校儒生, 龍門書院儒生, 鄭弘緖, 盧脊, 權濤, 盧亨運, 金潑, 鄭以怗, 朴以爀, 朴以燾, 禹汝楙, 鄭光淵.
【권 8】
〈附錄〉
行狀(鄭光淵) (28)
행장의 작자 鄭光淵은 지족당의 셋째 사위이다. 내용은 저자소개에서 개괄하였으므로 생략한다.
墓誌銘(趙絅) (9)
묘지명의 작자 龍洲 趙絅(1586-1669)은 지족당이 양자로 들인 아들 朴爾點의 부탁을 받고 쓴 것이다.
神道碑銘(郭鍾錫) (14)
1651년(효종 2년)에 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 世子左賓客을 추증받아 신도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으나,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후손 朴膺煥이 俛宇 郭鍾錫(1846-1919)에게 부탁하여 쓰게 된 것이다.
花川書院常享祝文(李光靖) (1)
1787년에 正祖가 精忠祠에 제향을 올릴 때, 小山 李光靖이 지은 것이다.
弄月亭重建記(柳厚祚) (2)
지족당은 인조가 남한산성에 몽진을 할 때 호종하였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1637년(67세) 9월, 安義 화림동 계곡에 농월정을 완공하였다. 그 후 건물이 노후해졌는데, 1773년 경에 후손 朴東陞이 집안사람들에게서 돈을 모아 중건하였다. 柳厚祚(1798-1875)가 그 뒤 1873년에 기문을 썼다.
弄月亭重建樑頌(金麟燮) (4)
1895년에 端溪 金麟燮(1827-1903)이 쓴 上樑文이다.
跋(鄭在敎) (2)
鄭在敎는 지족당의 스승인 寒岡 鄭逑의 후손으로, 1915년에 지족당의 후손 朴景煥의 부탁을 받아 발문을 썼다.
[황의열]
첫댓글 秋帆文苑(추범문원)權道溶(1877 ~ 1963)秋帆文苑續集上卷五儷文一復鍾潭書堂僉中
復鍾潭書堂僉中
首夏向熱僉體集禧伏奉聯函認出鄭重之命繼審薦圈敢憚周旋之勞竊念名實相須方是堂任之職 大小雖異蓋亦院司之流旣前修之留芬宜後學之觀禮愚生蚤參邑子薄遊文林尊賢之誠自信不後 於公衆幹事之手柰無從前之所諳不關標榜之有亡尙期左右而念釋論以私分方在養疴之時求諸 內容寧俟濫吹之物惟試可以習儀不忒仍噬底於作事有終特賜敎言免貽群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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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帆文苑續集卷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