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교의강좌6 (성경론6) 조봉근박사(광신대학교 명예교수)
19세기의 헐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자연도태’(진화론)를 따르면서, “성경에 대한 불신이 성경비평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비평에 대한 비판이 성경비평을 낳은 것이라”고 궤변(詭辯)을 토로한다. 왜냐하면 현대적 비평방식은 성경의 초자연성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자연주의적 가설에 그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성경에 대한 부정적 비평이 야기한 불선명함”을 이용하여 난파선 중에서 ‘해난구조작전’(海難救助作戰)을 도모했지만, 결과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실존주의’는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20세기에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이니, 도리어 ‘성경말씀’을 불신하고, 허무맹랑한 ‘불가지론’(Agnosticism)을 도출해냈다.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작란인가? 우리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척도(잣대)는 무엇인가? 또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표준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성’이나 ‘경험’이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앙 안에서 ‘이성’이나 ‘경험’은 도리어 판단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불신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을 모르기에(롬3:10-18), 역시 ‘이성’이나 ‘경험’의 ‘한계와 모순성’을 인정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성’이나 ‘경험’은 무한하고 완전한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피조물로서는 완제품이지만,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 설 때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즉, 피조물로서의 의식은 늘 하나님에게 의존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의 정체성’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무한한 ‘자유’와 ‘이성’을 주셨다면,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탄을 다시 회복할 구원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망을 가졌기 때문이다(창3:5).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기 전에 ‘이성’과 ‘자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리어 사탄에게 유혹을 받아 범죄할 수밖에 없었다. ‘죄의 개념’은 ‘관계론’에서 왔고, 성경은 “관계에서 어그러진 결과”를 ‘죄’(hamartia)라고 규정한다. 즉,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렬(決裂)된 상태가 죄이며, 수평적으로 ‘타인과의 관계’가 와해(瓦解)된 상태가 죄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이 ‘죄’이며, 또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관계하는 것이 ‘죄’이다. 결국, 인간은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었기에, ‘성경말씀’이 필요했고, 다시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이성이나 자유가 성령의 역사로 중생하고 거듭나서 성경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할 때, 결국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결코 비이성적인 것을 맹종하라는 뜻이 아니요, 비경험적인 것을 추종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절대시하지만, 역사적으로 18세기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경험자체’를 의심했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이성자체’를 비판했다. 이를테면, 성경이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고 부정하거나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비진리로 폄하(貶下)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중에는 많은 이적과 기사들이 나타났는데, 그것들은 일상적 사건이 아닌 초자연적 현상들이었다. 이를 신학적으로 ‘단회적 사건’(once for all)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홍해가 갈라진 사건”(출14:21-25)이나 “태양이 머문 사건”(수10:12-14)은 “단회적(單回的) 사건”이지만 결코 ‘신화’(mythology)나 ‘사화’(saga)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신약성경에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요2:1-11)과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요11:17-44)과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건”(마1:18-25) 등은 자주 일어날 수 없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중생한 성도들은 성경대로 믿고 확신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창1:1)부터 초자연적 사건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 1781)에서 ‘이성자체’를 비판했지만,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 나의 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라는 묘비명에도 새겨진 것처럼 그의 철학은 자연인식에서 실천적 인식에 미치고, 주체적으로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어떠한가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은 그러한 칸트철학의 기초가 되는 총론이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전통은 오래 되었지만, 인간의 주체성을 중요시하는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은 분명히 ‘인간의 이성’이며, ‘순수이성비판’은 그것의 한계를 파악한 것이다. 이성은 18세기의 인간의 인식능력이지만, 칸트는 “초현상계(超現象界)의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빠지고, 하나님에 의한 ‘말씀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한다. 이렇듯 철학적으로 설사 ‘유신론증’(有神論證)이 있다 할지라도 ‘성경적 하나님’을 증거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4:6)고 선언한다.
한편, 19세기 후반의 ‘실증주의’(positivism)는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변(思辨)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 등으로 검증이 가능한 것을 인정하는 인식론적 방법이다. 즉, 객관적 사실과 현상의 배후의 초월적인 존재나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오직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제한한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하나님과 부활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와 기록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컨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혹은 ‘불가지론’이나 ‘실존주의’는 모두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며, ‘성경말씀’을 믿는 ‘개혁신앙’과 전혀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