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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주자 수양론의 5단계
1. 미발 함양의 의의
https://www.youtube.com/watch?v=kDaPwDwnGLI&list=PLTiemZQlSYEwRqOCZyszbn6-55ErLTRE3&index=7&t=0s
미발 함양이라는 말로 필자는 미발심(未發心)의 보존과 미발성(未發性)의 함양을 함께 가리킨다. 이 같은 이중적 의미의 미발 함양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발 함양이 사려를 좌우한다는 점에 있다. 사려의 대표적인 예는 지각의 해석인데, 지각의 해석으로서의 사려는 감정의 발출을 좌우하고, 더 나아가 의욕의 발출과 언동의 발출도 좌우한다. 따라서 지각 해석으로서의 사려의 적절성 여하에 따라 감정의 적절성이, 더 나아가 의욕의 적절성은 물론 언행의 적절성도 좌우된다. 그런데 사려 자체의 적절성 여하는 미발 함양과 격물 궁리에 의해 사전에 준비된다. 왜냐하면 사려의 적절성 여부는 인욕을 따르는지, 의리를 따르는지에 의해 결정되는데, 인욕의 개입을 막는 일이 미발 함양이고 의리를 체인하는 것이 격물 궁리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지각 해석의 두 방식으로 인심과 도심을 드는데, 이것들은 각기 인욕을 따름과 의리를 따름이라는 말로 특징지어진다:
“물음: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별은 어떠한가요? 대답: 단지 하나의 심(一箇心)이지만, 지각이 귀와 눈의 욕구(欲)를 따라가면 그것이 인심이고 지각이 의리(義理)를 따라가면 그것이 도심입니다.”
수동적으로 지각된 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사려가 의리를 따라가는 도심이기 위해서는 미발 함양을 통한 사심의 방지와 격물 궁리를 통한 의리의 체인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미발 함양은 인욕을 방지하여 천리(天理)에 밝아져 가는 과정이고, 격물 궁리는 마음에 만리(萬理)를 구비해 가는 과정이다. 미발이 ‘일성혼연’이고 ‘도의전구’라는 규정은 마음에 대한 근원적이고 선험적인 규정이지만, 현실에 있어서 마음은 기품(氣稟)에 의해 구속되어 있고 인욕(人慾)에 의해 은폐되어 있어서 일성(一性)과 도의(道義)에 대해 어둡다. 마음을 기품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격물 궁리가 필요하고, 마음을 인욕의 은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미발 함양이 필요하다.
주자는 격물 궁리와 미발 함양의 필요성이 명덕(明德, 밝은 덕성)의 회복에 있다고 본다: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텅 비고 신령하며 어둡지 않은(虛靈不昧) 것으로 모든 리(衆理)를 갖추고 모든 일(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속(拘)되고 인욕(人慾)에 은폐(蔽)되면 때로 어두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본체(本體)의 밝음은 일찍이 꺼진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그 발출된 것[4단]에 의거하여 끝까지 그것을 밝혀서 그 처음[명덕]을 회복(復)하여야 한다.”
명명덕은 미발심에 대해 밝아지는 일과 미발성에 대해 밝아지는 일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천리 함양의 두 단계로 말해질 수 있다.
1) 천리 함양의 두 단계
주자는 근원적으로는 일반인(衆人)과 성인(聖人)이 모두 미발심(未發心, 正心)을 갖고 있고, 이 미발심은 원래 미발성(未發性, 天理)에 대해 밝은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 일반인은 미발심에 대해 밝지도 않고(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일반인의 미발심 자체도 천리에 대해 밝지 않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있어서 미발의 함양이란 우선 스스로 미발심에 대해 밝아지는 일이고, 그 다음으로는 미발심이 미발성(明德)에 대해 밝아지는 일(明明德)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미발심에 대해 어둡다면, 미발심에 대해 밝아지는 방법은 무엇인가? 주자는 그 방법으로 ‘고요함을 위주로 하여 알아차릴 것’(主靜看)을 말한다:
“주자: 희노애락의 미발 상태인 중(中)은 성인(聖人)을 논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반인(衆人)에게도 이것이 있고 성인과 똑같다는 것을 논한 것입니다. 질문: 일반인의 미발은 성인과 다릅니까? 답변: 미발은 단지 미발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큰 근본이 없어지고 도리가 단절됩니다. 질문: 일반인은 미발에서 어둡나요? 대답: 여기서는[근원에서는] 어두움이나 밝음이 없으니 반드시 그들도 미발을 이룹니다. 근원으로 말하면 미발은 모두 같습니다. 다만 성인의 동정(動靜)을 논하면 [일반인의 동정과] 전혀 다릅니다. 움직임에도 안정되고 고요함에도 안정되지요. 감각하지 않을 때는 완전히 미발의 중(中)이요, 감각하여 움직일 때는 완전히 절도에 맞는 화(和)입니다. 일반인도 미발의 때가 있지만 단지 그들이 고요함을 위주로 하여 알아차린 적이 없기 때문에(只是他不曾主靜看) [미발심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주자는 일반인이 미발심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로서 그들이 고요함을 위주로 하여 미발심을 알아차린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일반인이 미발심에 대해 밝아지는 방법은 고요함을 위주로 하여 미발심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미발심에 대해 밝아지는 것이 곧바로 미발성에 대해서도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미발 함양이란 미발심만이 내게 밝아지게 하는 일이 아니라 미발성도 내게 밝아지게 하는 일이다. 미발성이 내게 밝아지게 하는 일은 이른바 가려진 명덕을 다시 밝히는 일이다:
“명덕은 내가 하늘에서 얻은 것이고, 마음 가운데서 밝게 빛나는 것이다. 총괄해 말하면 인의예지이다. 그 발현된 것으로 말하면 측은, 수오 같은 것들이다. 그 실제 작용을 보아 말하면, 부모를 섬김, 형을 따름 같은 것들이다. 이와 같은 덕은 본래 내가 밝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기품에 구속되고 물욕에 은폐되어 줄곧 어두우니, 곧 밝지 못하다. 이제 그 가려짐을 제거하여 [밝음이] 드러나도록 함에 의해 원래 하늘에서 얻은 것을 회복하는데, 이것이 곧 ‘명덕을 밝히는 것’이다.”
주자는 한 때 미발심 상태에서 천리의 체인을 시도하였었다. 그런데 천리의 체인이란 생각의 발출, 곧 이발(已發)이기 때문에 미발심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점을 깨우친 주자는 이후로 미발심에서는 천리(미발성)가 단지 함양될 수 있을 뿐 체인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천리의 함양이라는 수양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천리가 저절로 밝아지게 하는 것’(心靜理明)일 것이다. 리에 밝은 청정한 마음을 이루는 일이 바로 미발 함양의 의미다. 이것은 수행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불교의 지관(止觀), 곧 마음에서 망념이 사라지게 하여 진여가 마음에 밝아지게 하는 것에 상응한다.
2) 미발 함양의 방법인 경건
주자가 내세우는 미발 함양의 방법은 경건(敬)이다. 주자는 사람들이 경건의 의미를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다양한 대체 용어들(제시提撕, 제기提起, 경책警策, 성주재性主宰)로 설명한다. 그는 이끌음(提撕)과 경계함(警策)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이 없을 때가 특히 근본[미발성]의 소재이니 [이 근본에 대해] 어둡고 어지러워서는 안 되므로, 이것을 따르면서 지속적 함양(持養)을 더하려 한다면, 하나의 주재를 세워야 하는데, 그 실제는 단지 하나의 이끌음(提撕)과 경계함(警策)이 동정(動靜)을 관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미발심(일이 없음)에 미발성(근본)이 소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미발심을 따르면서 미발성을 지속적으로 함양하기 위해서는 미발심을 주재하는 방법으로 이끌음 내지 경계함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주자는 이끌음과 경계함으로서의 경건이 미발심 보존의 방법이고, 미발심 보존이 미발성 함양의 방법이라고 본다. 경건으로써 마음을 보존하면 마음이 본성을 주재하여 본성이 함양된다는 것이다.
3) 미발 함양의 필요성: 성인지심과 적자지심의 차이
미발 함양의 필요성은 ‘어린 아이의 마음’(赤子之心)조차도 본성에 대해 밝은 마음이 아니라는 점에 놓여있다. 주자는 성인(聖人)의 마음을 어린 아이의 마음과 동일시하는 여대림(字는 여숙)을 비판하면서, 성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본성에 밝은 마음의 보존(存其心)이라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한다:
“질문: ‘적자지심’(赤子之心)의 부분이 일편(一篇)의 중요한 대목입니다. 정자 선생은 ‘터럭만한 차이라도 있다면 큰 근본을 얻겠는가’라고 하시면서. 여씨의 그 부분에서 단지 터럭만한 차이가 아니라 대단한 차이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터럭만한 차이도 [큰 근본을] 얻지 못합니다. 성인(聖人)의 마음은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은데, 적자지심이 어떻게 큰 근본을 얻습니까? 대답: 성인을 논하지 않은 것이 여여숙의 실수인데, 이것은 오히려 적자의 이발을 미발로 인정한 것입니다. 질문: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미발의 때를 논한다면, 일반인의 마음은 성인과 같을 수 없나요? 대답: 어째서 같지 않나요?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도리어 천리가 별도로 한 곳에만 있게 됩니다. 물음: 이와 같이 말한다면, 『중용』에서 말한 미발의 중은 어떠한가요? 대답: 그것은 오히려 마음의 보존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이 우선적인 일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미발의 때에 마음이 대체로 어지럽지만 또한 어지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마땅히 여기서[어지럽지 않을 때에] 알아차려야(看) 합니다. 대체로 저 [여여숙의] 편지는 답하는 글인데, 역시 되돌아보아야 할 막힌 곳이 있습니다. 당초에 성인지심이 이것과 같고 적자지심이 저것과 같다고 논하지 않았다면, 저절로 분명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해진 ‘미발의 때에 마음은 대체로 어지럽다’는 주장은 어린 아이를 포함한 일반인의 마음이 본성에 대해 어두움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반면에 ‘어지럽지 않을 때도 있다’는 주장은, 일반인의 마음이 때때로 본성에 대해 밝다는 것이다. 때때로 본성에 대해 밝아졌을 때, 이 본성에 밝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보존하면, 일반인은 천리에 밝은 마음, 곧 ‘미발의 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리 보면, 어린 아이의 마음이 ‘미발의 중’이 아닌 이유는 본성에 밝은 마음을 보존하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4) 미발심이 중(中)이 아닌 이유
미발 함양은 본성에 어두운 미발심을 본성에 밝은 미발심으로 바꾸어 가는 일이다. 본성에 밝은 미발심이 중이고, 본성에 어두운 미발심이 부중(不中)인데, 주자는 기질이 탁하고 사욕이 우세한 것이 부중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승가(僧家)에서 괴연(塊然, 흙덩이 같다)이라는 말이 일컫듯이 (미발과 이발을) 잘라서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마음에는 저절로 미발인 시기도 있고 저절로 이발인 시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사려(思慮)가 싹트지 않은 때는 곧 중(中)이고 본체(體)입니다. 사려가 발출해서 이와 같이 일을 행하여 마땅하게 되었을 때는 곧 화(和)이고 작용(用)입니다. 다만 그 둘이 섞여 서로 어우러져 있으므로, 만약 잘라서 한 때가 있어 미발의 때이고 한 때가 있어 이발의 때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요즘 배우는 사람들이 간혹 매일 반나절을 정좌(靜) 공부를 하는데, 여기에 바로 이 병통이 있습니다. 질문: 희로애락이 미발인데도 부중(不中)인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답: 이것은 오히려 기질이 혼탁하고, 사욕이 우세하게 되어 객기(客, 사욕)가 와서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미발일 때 [본성에 대해] 흙덩이 같기가 바위돌과 비슷해서, 쪼개도 열리지 않으니, 발출해 나오는 것이 단지 어그러짐일 뿐입니다. 질문: 이와 같다면, 어두울 때 그들이 [본성을] 살피지않는 것(不察) 인데, 어째서인가요? 대답: 살핀다(察)는 것은 여씨의 ‘중을 구함’(求中)인데, 이것은 오히려 이발입니다. 이천이 말했듯이, 단지 평소 함양이면 됩니다. 질문: 보아하니, 사람에겐 매일 마다 미발의 때가 적고, 이발의 때가 많습니다. 대답: 그렇지요.”
여기서는 본성에 대해 어두운 미발심이 부중(不中)이며, 이것의 원인은 기질(氣質)이 혼탁하고 사욕(私欲)이 우세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말해졌다. 아울러 심중(中)을 되찾는 방법은 구중(求中), 곧 미발에서 본성을 체인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 본성을 평소에 함양하는 일이라고 말해졌다. 구중은 이발이므로 미발과 모순된 것이고, 따라서 미발 공부일 수 없다는 것이다. 미발 공부는 결국 미발 함양이라는 소극적 공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극적 공부법으로서의 미발 함양은 그 내부에 적극적 측면을 갖고 있다.
5) 미발 함양의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
미발 함양은 경건으로써 마음의 보존(存其心)과 본성의 함양(養其性)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때 마음의 보존은 사적 의욕의 방지로서 미발 함양의 소극적 측면에 해당한다:
“이 마음을 항상 탁월할 정도로 공정하게 해서 사적 의욕(私意)이 있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경(敬)이다. 조금이라도 계산적인 비교가 있거나 조금이라도 방만한 의사가 있다면 바로 경하지 못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한다’는 말이 있으니, 조금도 치우침이나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의 보존은 결과적으로 본성이 마음에 밝아지도록 한다. 이는 미발 함양의 소극적 측면인 마음의 보존이 ‘본성이 마음에 밝아지도록 하는’ 적극적 의의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점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지 이 마음을 비우고 마음의 동정을 따라 언제 어디서나 계신공구의 노력을 지극하게 함이 없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의] 주재가 분명하므로 의리가 밝게 드러난다(義理昭著矣).”
본성이 마음에 밝아짐은 본성을 능동적으로 포착함(求中)의 결과가 아니라, 본성이 저절로 밝아지도록 깨어서 기다림의 결과이다. 때문에 주자는 사량좌가 경건을 ‘항상 깨어있음’(常惺惺)’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불교적 색채가 있다고 경계한 적도 있지만 이치의 밝아짐과 관련된 경건의 해석으로서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음: 사량좌의 깨어있음(惺惺)이라는 설명은 어떤가요? 답변: 깨어있음은 곧 마음이 어둡지 않음을 말하니, 이것이 경입니다. 요즘 사람은 경을 말하면서 정제엄숙으로 말하는데, 이것도 원래 경입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이 어두워서 리를 비춤(燭理)이 밝지 못하면, 비록 억지로 [마음을] 붙잡는다고 해도 어찌 경이 될 수 있을까요. 물음: 맹자와 고자의 부동심은 어떤가요? 답변: 맹자에게는 리를 밝힘(明理)에 부합하는 의미가 있지만, 고자에게는 단지 마음을 붙잡음(把捉)의 의미만 있습니다.”
결국 주자의 미발 함양법에 있어서 그 방법은 경건, 그 과정은 존심, 그 결과는 양성이고, 양성의 의미는 성리가 마음에 밝아지게 함(理明)이다. 미발 함양법이란 경건이나 정좌에 의해 사욕의 발생을 막는 소극적 방식에 의해 성리가 마음에 밝아지는 적극적 결과가 생겨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망념의 발생을 막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진여가 마음에 밝아지게 하는 불교의 지관법에 구조적으로 상응한다. 물론 내용적으로 보면, ‘지관’에서의 ‘관’이 공리(空理: 무명無名과 무상無相)가 밝아지게 함을 의미하는 반면에, ‘미발 함양’에서의 ‘함양’은 실리(實理: 성리性理와 물리物理)가 밝아지게 함을 의미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리의 조관과 실리의 함양이 모두 이발(사려와 분별)을 떠난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 둘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