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82〉
20년전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의학 교육 과정이 있었다. 전문강사로 참여한 나는 그 지역이 간다라 불교 미술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같이 온 동료 선생과 함께 차를 빌려 북쪽으로 한 시간을 가서 불교 유적지 사찰과 집터를 관광하였다. 그 중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이 탁실라 박물관에 있는 사암(沙巖)으로 만든 불두(부처 머리)의 얼굴이었다.
간다라 지역은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적으로 볼 때 페샤와르 북쪽의 스와트 지방과 일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에 나서 인도 북부인 이 지역까지 정복하였다. 그 후 그리스인이 연이어 통치하여 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된 곳이다.
한편 2600년전 인도 중북부에서 시작한 불교는 아소카왕이 재위 시(기원전 268년 ∼ 232년)에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전 인도에 전파되었다. 80세 나이에 타계한 부처님은 우상숭배를 배척하고 죽은 후에도 그의 가르침에만 의존하라고 유언하였다.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즉, 저마다 자기자신을 등불로 삼아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은 만들지 않고 유골과 법문을 탑(스투파)에 보관하여 숭배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대중을 제도하는 대승불교가 생기고 종교적 색채가 뚜렷해지면서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불상은 크게 제 불상과 제 보살상으로 나눈다. 제 불 즉, 부처상으로 아촉불, 아미타불, 미륵불, 약사여래상이 있고, 자비정신을 실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보살의 형상으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상이 있다. 그 당시 인도에는 불상을 제작할 기술이 없었으나 간다라 지방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리스 조각기법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즉 동양의 정신 세계를 서양 미술로 표현한, 인류 역사적으로 유래가 드문 독특한 장르의 조각이 시작된 것이다.
초창기의 불상은 그리스 조각과 유사하였다. 당당한 남성적 체격에 곱슬머리, 높은 코, 짙은 쌍커풀의 전형적인 서양인 모습이었다. 양 어깨를 덮는 통견에 사실적인 옷 주름, 윗옷 상단의 깃이 아폴로의 조각을 연상시켜 자연스럽지 않고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점차 두 문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미적 감성과 사상이 융합되고 조화되면서 독창적인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육체 구조를 강조하여 어색하였던 인물상이 점차 다듬어지고 마음의 청정과 내적 성찰을 표현하면서 상승 작용을 일으켜 높은 예술성을 갖추게 되었다. 대표적 작품이 바로 내가 탁실라 박물관에서 본 4∼5세기 굽타 왕조시대의 불상이다(그림). 인성(人性) 속에서 신성(神性)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보기 드문 걸작품이다.
이 불상은 계란형으로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두상을 가지고 있다. 단정한 머리, 깨끗한 이마는 심성 바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마와 연결된 오독한 콧등, 알맞은 눈두덩은 의지와 예지의 반증이고 도톰한 아랫입술, 갸름한 두 뺨은 진지한 청춘을 뽐낸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를 표현한 것으로 아마도 열반에 들기 직전 막 진리 파악의 정리를 끝내는 순간의 모습 일께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일주일 동안 깊은 명상에 잠긴 마지막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두 눈을 반쯤 감고 아래를 응시하면서 그 동안의 미망과 사유 끝에 얻은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속세를 벗어난 조용한 모습이 근엄하고 범상치 않은 얼굴은 막 미소를 띄기 직전이다. 미소가 나타나는 그 다음 순간의 모습을 나는 우리나라 국보인 반가사유태자상에서 찾을 수가 있다. 왜 부처님 상이 아닌 태자 상일까? 이미 열반에 든 모습이 아니고 아직도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전능한 신의 길, 믿음의 길인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자신이 스스로 갖추어야 하는 인간의 길, 지혜의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상에서 충만한 자신감을 느낀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 진리와 실천의 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나의 몫이며, 나만의 업이다. 이런 주체적인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간다라 불상의 얼굴은 석굴암의 부처와 자주 비교 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불상이 딱딱하고 다소 심각한 표정을 띠고 있고, 백제의 불상은 보통 사람 얼굴을 하여 친근하고 미소가 어린 눈매와 입을 가지고 있다. 이들과 비교해 석굴암 부처는 표정뿐 아니라 체형도 간다라의 정형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통일신라에서 사람을 인도에 보내 직수입 하였나?
결론적으로 이 불두는 모든 제 불상과 제 보살상을 뛰어넘어, 나아가 동서양 모든 인물 조각을 뛰어넘어,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표정이다. 동서양 조각 기법과 감성을 합친 인류의 염원과 노력으로 진리와 지혜를 찾고 있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탄생한 것이다.
다음은 실존철학의 창시자인 야스퍼스 교수가 일본 국보 1호인 목조 반가사유상을 보고 고백한 글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신상(神像)을 보아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상, 로마시대의 뛰어난 조각상과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한 성자상도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감정과 인간의 자취가 남아있고 진실로 인간 실존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 절대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각에는 인간 실존의 깊은 이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불상은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원만하며 가장 영원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간다라에서 시작한 불교 예술이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파되어 만든 불상으로, 일종의 아류(亞流)인 반가사유상에 부친 찬사이다. 그 본류(本流)인 이 탁실라 부처 얼굴에는 무슨 말이 헌사로 충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