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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엔 너무도 가슴 아픈 사랑이 되어 / 정순복
적막한 어둠을 뚫고 바람이 나의 방문을 노크한다.
나는 커튼을 들어 창밖을 보았다. 세차게 바람이 부는가보다.
젊은 연인이 세찬 바람도 아랑곳없이 포옹을 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두 여인들….
내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지금에도 나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떠나가지 않는 윤지의 얼굴이 나를 보며 살며시 웃음 짓는다.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탓에 윤지 또한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윤지와 내가 인연이 아니었던 것을….
윤지를 만나게 된 것은 강산이 두 번 바뀐 20년 전의 일이다.
윤지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나의 부모님과 윤지의 부모님께서 서로 형제간처럼 지내자고 의형제를 맺은 것이 윤지와 내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윤지의 나이는 나보다 6살이나 아래 인 동생이 되었다.
윤지의 키는 나보다 훨씬 컸으며 마음은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청순하고도 아름다운 귀여운 소녀였다. 어린아이를 보면 금방이라도 어린아이가 되어 함께 뛰노는 그런 천진난만한 그런 소녀였다.
윤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도 아니 내가 윤지를 좋아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론 윤지를 안아 보고픈 마음도
생겼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윤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들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이면 윤지의 집과 의형제를 맺으셨을까? 오로지 윤지가 내 곁에 있어 주길 간절히 바랄 뿐 아무것도 할 수없는 내 자신이 싫을 뿐이다. 윤지가 내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윤지를 위해서라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윤지의 얼굴이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하늘의 먹구름이 나를 질투하고 있었다.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온 것이다. 윤지를 두고 떠나야 하는 나에게는 너무도 큰 고통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윤지를 두고 떠나야 할지 전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점점 군에 입대할 날이 다가 올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어떻게 윤지를 떠나 있어야 할까. 윤지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윤지에게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차디찬 바람이 되어 윤지의 집 앞을 서성거려야만 했다.
밤하늘에 달을 보며 철없는 윤지를 간절히 부탁도 해보고 별을 보며 나를 도와 달라고 애원도 해보았다.
입대하는 전날 윤지를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로 나오라고 했다.
때마침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첫눈이 많이 내렸다.
윤지는 환하게 웃는 밝은 얼굴로 함박 눈꽃을 피우며 반짝이는 눈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윤지 왔구나.”
“첫눈이야! 첫눈!”
“그래 첫눈이구나. 윤지야! 기쁘지?”
“그럼. 오빠도 기쁘지?”
“그래. 오늘 오빠와 손잡고 이 운동장을 걸어볼까?”
“좋아. 오빠와 내가 이 운동장에 처음으로 발자국 남겨보자. 그리고 발자국으로 꽃도 만들어 보자”
나는 윤지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다 발자국으로 많은 꽃들을 만들어 놓았다. 윤지가 기뻐하는 모습으로 눈을 던질 때 나도 같이 눈을 던졌다. 하지만, 눈을 던지기는 해도 윤지가 어린아이처럼 소중해서 윤지에게 맞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윤지가 눈을 맞지 않게 조심스럽게 눈을 던지고 윤지가 던지는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다.
세상에서 나만이 제일 행복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윤지 곁을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차가운 한기를 느끼게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윤지야! 오빠 군에 가는데 어떻게 하니? 윤지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니?’ 수도 없이 윤지에게 묻고 또 묻고 있었다.
윤지가 눈을 뭉쳐서 또 나에게 던진다.
나는 참아 윤지에게 눈을 던질 수 없어 다른 곳으로 눈을 던지면서 말을 했다.
“윤지야! 정말 오빠에게 자꾸 던질 거야?”
윤지는 재미있는 듯 자꾸자꾸 눈을 뭉쳐 던진다.
내 얼굴에 맞아 녹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눈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오빠. 울고 있어?”
“아니야 눈이 녹아서….”
나는 윤지와 한참을 눈을 통해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오빠! 손이 시려 그만 하자.”
“그래 손 이리 줘봐. 오빠가 녹여 줄게.”
나는 윤지의 손을 꼭 잡았다. 이대로 내가 돌이 되어 굳어 버린다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윤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운동장 잣나무 밑에 서서 두 손을 꼭 잡고 바라보았다.
나는 내일이면 윤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윤지를 안으려 하자 잣나무에서 눈뭉치가 둘 사이를 갈라놓듯 떨어져 내렸다. 나는 윤지 옷에 묻은 눈을 털어주며 말을 했다.
“윤지야!”
“응. 오빠 말해 봐.”
“아니야. 윤지 그냥 불러보고 싶어서….”
나는 윤지에게 일방적인 나의 부탁을 하고 싶었다. 군에 가기 전에 윤지가 다른 생각하지 않고 나만 기다려 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내려서 녹듯이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윤지를 집 앞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왔다.
저녁때가 되어 나는 윤지의 집으로 찾아갔다.
윤지의 부모님께 군에 입대를 한다고 인사를 드리고 윤지를 잠시 만났다.
고무네 오빠인 줄만 알고 따르는 천진난만한 17세 소녀.
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넨다.
“윤지야! 오빠 군에 가서 편지 쓰면 답장해 줄 거지?”
“그럼. 오빠 그걸 말이라고 해?”
“정말 꼭 답장 써 주어야해?”
윤지에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편지 쓰면 답장 해줄 거냐고 묻고 돌아와야만 했던 나의 마음은 너무도 아팠다.
그날 밤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마음속에 윤지를 안고 울었다. 한없이 한참을 울다가 담배 한 개 피를 피워 물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모르게 윤지의 집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가 윤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느꼈다.
윤지의 방엔 불이 꺼져 있었다. 한참을 윤지의 방을 바라보다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발자국 소리가 어둠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떠난다. 한참 동안 어둠 속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아 윤지에게 편지를 써내려 가는데 윤지의 얼굴이 나를 보며 살며시 웃고 있지 않는가. 난 너무도 기뻤다. 윤지가 내 곁에 있어 주리라 믿기로 했다. 마음이 편안했다.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행복했다.
다음날 군에 입대하면서 윤지의 집에 잠깐 들렸다.
윤지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만 이렇게 윤지를 가슴에 안고 가야만 했다.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곳. 윤지에게 편지를 건네주고 아픈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윤지에게 하고픈 말은 나의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가 윤지가 결혼할 나이가 되거든 다시 꺼내어 윤지에게 고백하리라 다짐하면서….
다음 날 윤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차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윤지가 정류장까지 마중 나와 주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윤지는 마중 나와 주지 않았다. 서운한 생각도 들었지만 윤지는 나의 마음을 모르고 있기에 가슴이 더 아팠다.
버스에 올랐다.
창밖을 바라보며 혹시나 윤지가 나오지나 않을지 찾아보았지만, 윤지는 보이지 않고, 하얗게 눈 쌓인 고향마을만 멀어져갔다. 창밖을 보며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부모님께 불효한 일들. 동네 어른들께서 너는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고 하신 말씀. 난 그랬다. 모든 일들을 나의 성격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제일 힘들게 살아오셨다.
자기 자식을 버린 사람도 있는데 어머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참사랑으로 가르쳐 주시고 길러주셨다. 내가 왜 진작 어머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나를 괴롭혔다.
군대에 가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부모님이 그동안 나 때문에 가슴 아프셨던 일들을 치료해 드리리라 다짐 또 다짐을 해본다.
어느새 논산에 도착했다.
다른 사람들은 군에 입대한다고 부모님과 형제들이 이곳까지 배웅 나와 헤어짐을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이 부럽지가 않았다.
어머님께서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먼 거리를 오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에 오셔서 보고 싶으셔도 못 오시는 어머님의 마음은 더더욱 가슴이 아프셨을 것이다.
“오빠 내가 편지할게”
윤지의 목소리가 하얀 눈 위를 썰매를 타고 달려오듯 들려온다.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윤지야! 오빠만 기다려 줘.”
하며 살며시 윤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훈련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윤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윤지는 항상 웃고 있었다. 윤지가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논산의 고된 훈련이 끝나고 부대 배치를 받았다.
첫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해 지쳐 있는데도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부모님과 윤지의 얼굴 때문이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떠나와야 했던 것이기에 더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이 나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나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잠을 청해본다. 얼른 꿈속에서 윤지를 만나보고 싶었다. 윤지와 첫눈 내리던 날을 상상하며 윤지를 내 품에 꼭 껴안고 잠이 들고 싶었다. 군의 첫날밤은 어떻게 잠을 이루었는지 난 알 수가 없었지만, 아침햇살은 또 나를 반긴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세월 속에 윤지와 나의 편지가 오고 간지 2년이 넘어서야 나는 윤지에게 사랑의 편지를 썼다.
이제는 윤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처음으로 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글씨도 제대로 써지지가 않았다. 마음은 왠지 모르게 떨려오고 손마저 마비되는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나는 윤지에게 사랑한다고 편지를 썼지만, 이것을 붙여야 할지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나 윤지에게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생기기 전에 편지를 붙여야 하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난 편지를 부쳤다.
답장이 올 때가 되었는데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는 하루하루를 편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윤지에게 편지가 왔다.
편지를 받아든 나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손만 떠는 것이 아니고 마음도 떨렸다. 편지를 들고 떨고 있는 나의 모습을 중대장님께서 보시고는 왜 그러느냐고 물으시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편지만 오면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뻐하던 강 병장이 오늘은 이상하다고 하시면서 고개를 갸웃 등 하시며 지나가셨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편지를 들고 아무도 없는 부대 뒤 커다란 소나무에 몸을 의지하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윤지는 오빠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편지였다.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예상은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너무 보고 싶다. 면회 한 번 오지 않는 윤지가 오늘은 미웠다.
나는 다시 윤지에게 편지를 썼다. ‘오빠를 사랑하게 만들 거라고… 나만 기다려 달라고….’
그러나 윤지는 다시 나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나는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답장은 오지 않았다. 감동되어서라도 편지 한 통은 보내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윤지는 냉정했다.
말년 휴가가 다가오기에 나는 윤지에게 일방적으로 꼭 한 번만 만나달라고 시간과 약속 장소를 적어 편지를 보냈다. 나는 꼭 나와 주리라고 믿으면서 휴가를 떠났다.
남의 자식을 지금까지 갈러 주신 어머님을 찾아뵈러 가야하는데 부모님께 불효를 하면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창밖에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이 나를 슬프게 했다. 마음속으로 오로지 윤지가 약속 장소에 나와 주길 간절히 바랐다. 아니 윤지에게 최선을 다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약속 장소에 꼭 나와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청량리역이 가까워져 오자 나는 사슴처럼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보며 어느새 나가는 곳을 찾고 있었다. 기차가 청량리에 정차하자마자 온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약속 장소인 공중전화 박스 앞에 가서 윤지를 찾아보았다. 윤지는 없었다.
나는 2시간을 기다렸지만 끝내 윤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며 길을 걸었다. ‘윤지가 편지를 받지 못했다면 약속장소에 올 수 없지 않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그래 편지를 받지 못했을 거야.’ 나는 스스로 내 자신을 위로 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배고픔을 느꼈다.
역전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을 단숨에 들이키듯 먹고 나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원주 역에 내려서 고향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나의 마음은 오늘 힘들게 했던 하루의 피로를 씻기엔 충분했다. 코스모스 꽃이 나를 반긴다. 바람에 코스모스가 흔들릴 땐 윤지가 손을 흔드는 것 같아 나는 행복했다.
버스에서 내려 나는 마을을 향해 걸었다. 어둠이 깔려 있었다. 윤지가 가로등을 켜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얼른 와. 내가 오빠 고향 지키고 있었어. 나한테 고맙지?’ 나는 뛰기 시작했다. 윤지가 꼭 와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윤지의 집을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것도 잊고 윤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윤지의 어머니인 외숙모가 나를 반겨 주었다.
“휴가 나왔구나?”
“네”
“얼른 들어 와”
“아니에요. 집에 가야죠. 어머니께서 저녁도 안 드시고 기다리실 거예요. 숙모님! 건강은 괜찮으시죠?”
“그럼 나야 건강하지.”
“윤지는 어디 있어요?”
“윤지는 인천에 있지. 얼마 전에 집에 다녀갔는걸.”
난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윤지의 주소였다. 숙모님한테 여쭈어 볼 수 없어서 윤지의 동생인 윤숙이 에게 주소를 물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윤지는 그곳에서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긴 것이다.
나는 주소를 새로 적어서 집으로 올라 왔다.
어머니께서는 반가워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어머니의 이마에 잔주름이 예전보다 더 많아 보였다. 아들이 휴가 나온다고 예쁜 옷을 갈아입으시고 내가 좋아하는 치킨도 멀리 있는 시장에 가셔서 사다 놓으신 것이다.
어머니께서 햅쌀로 지어주신 따뜻한 밥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부모님께 죄스러웠다. 한 여자 때문에 방황하는 내 자신도 싫었다.
휴가 동안에는 부모님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는 겨울에 땔나무를 산에 가서 해 가지고 왔다.
어머니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내가 그 동안 부모님을 위해서 한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더 나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제대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하고 마음에 다짐을 해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휴가가 끝나고 복귀할 때가 다가왔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고향을 떠나와야 했다. 휴가 나올 때는 빨리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는데 다시 고향을 떠나려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잠을 청했다. 마음이 괴로운 건지 외로운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한참을 잠을 청해보려고 눈은 감았지만 끝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머니 손이 자꾸만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 나는 어머니 손을 잡아보지 못한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이렇게 잘 길러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부대 근처까지 와 있었다.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인절미를 가지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군가 등 뒤에서 나를 부르고 있지 않는가.
윤지였다. 17세였던 그 소녀가 나의 등 뒤에 와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윤지라는 것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바람에 찰랑거리며 어느새 날씬한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나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윤지가 내 앞에 와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윤지가 그림자가 되어 나타난 것처럼 나의 곁에 서있지 않는가.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윤지를 끌어안았다.
윤지는 나에게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나는 윤지를 놓아 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돌이 되어 굳어버린다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조금만 이대로 있어 줘”
윤지를 더 세차게 안았다. 나는 떨고 있었다.
부대 복귀 시간은 앞으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윤지를 데리고 부대 앞 강가로 갔다. 강가에 예쁜 돌을 골라 앉게 했다.
“어떻게 오빠를 찾아오게 되었어?”
“응. 꿈속에서 오빠가 울고 있었어. 한없이….”
나는 윤지가 한없이 고마웠다. 윤지는 어린 윤지가 아닌 어엿한 숙녀로 변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윤지를 다시 한 번 안았다. 살며시 눈을 감고 윤지의 입술을 훔쳤다. 강물에 비치는 윤지의 모습은 마치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물고기가 강물에 있는 천사와 친구 되어 마음껏 꼬리를 흔든다.
또다시 윤지가 나의 곁을 떠날까 두려워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을 뿐….
한참 후 윤지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오빠! 그 동안 오빠 마음 고생시킨 것 미안해. 난 그냥 오빠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오빠로 있어 주었으면 해. 미안해 오빠.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나는 윤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럼 편지 보내 줄 수 있지?”
윤지는 고개만 끄덕인다.
강물을 바라보았다. 윤지의 마음이 보이는 듯 평온하게 느껴졌다. 다정히 손을 잡고 마치 친한 친구처럼 걸었다. 어느새 부대 앞에 도착했다.
윤지는 내가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들어가겠다고 하기에 내가 먼저 부대로 들어와야 했다.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때면서…. 순간 나는 탈영이라도 해서 윤지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윤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후회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뒤돌아 달려가 윤지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윤지는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기에 편지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돌렸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윤지를 만나서인지 군 생활도 힘들지가 않았다.
윤지의 편지는 계속 오고 갔다.
제대를 보름 앞두고 윤지에게 언제 찾아갈 거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제대하는 날까지 답장이 오지 않았다.
제대 후 나는 윤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윤지는 벌써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고 없었다. 윤지는 내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그곳을 떠난 것이다. 윤지의 집에서도 윤지의 소식을 모른다고 하고 윤지를 만날 길은 없었다.
나는 고향에다 자리를 잡고 부모님과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는 윤지가 돌아오리라고 믿으면서….
윤지가 말했었다. 이다음에 결혼해서 시골에서 살 거라고…. 그래서 나는 고향을 지키며 윤지를 기다리고 했다. 밤이면 밤하늘에 별을 헤아리며 지낸 날들. 별들만이 친구 되어 나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곤 했다. 윤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보고 싶다. 못 견디게….
어릴 때 윤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살며시 꺼내놓고 말을 건넨다.
‘너만을 사랑한다. 영원히….’
제대하고 반년이 지난 어느 무더운 여름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윤지가 고향집에 왔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머리를 감고 초라했던 나의 모습을 감추려고 면도도 하였다. 약간의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냉수를 들이켰다.
윤지에게 달려가야 하는데….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숨소리만 거칠어질 뿐….
나는 윤지의 집을 내려가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윤지가 우리 집으로 올라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방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조용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나 떨리는 마음은 여전했다. 마음이 진정이 안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침대에 누워 살며시 눈물을 찍어낸다.
기쁨에 눈물 보고픔에 눈물. 말할 수 없는 아픔. 사랑이란 고통을 짊어지고 지금 이곳까지 오지 않았는가.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시간이 다가 온다.
창밖을 보니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윤지가 동생과 함께 우리 집으로 올라온 것이다.
솜방망이가 나의 가슴을 두들긴다. 거친 숨소리도 한없이 떨고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달려 나가 윤지를 만났다.
윤지가 깜짝 놀라는 것이다.
“윤지 왔구나.
“….”
“오빠. 안녕하세요.
“얼른 들어와.”
“덮지? 선풍기 앞으로 와서 앉아.”
나는 윤지에게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는 윤지에게 하고픈 말이 있노라고 하면서 윤지의 동생인 윤숙이를 잠깐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니까 윤지는 하고픈 말이 있으면 여기서 하라고 하고는 동생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이다.
윤지는 내가 무슨 말을 할 거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나보다. 하는 수 없이 윤지에게 하고픈 말을 못하고 윤지에게 방을 도배하려고 하는데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윤지의 동생은 벽지에 풀칠을 하고 윤지와 나는 벽에 벽지를 붙이기로 했다.
나는 벽지를 붙이다 말고 윤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오빠 신혼 방이야 괜찮지?”
“오빠 결혼 할 거야? 잘 됐다! 오빠 진심으로 축하해! 새 언니는 누구야?”
“윤지가 오빠의 신부가 되는 거야.”
“왜? 맘에 안 들어?”
“….”
“오빠 장난하지 말아요.”
“윤지가 이다음에 결혼하면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했잖아.”
하고 말하자 윤지의 얼굴색이 변하면서 당황해했다.
방의 도배를 끝내고 나는 윤지 동생을 먼저 집으로 보내려 했지만 윤지는 동생을 못 가게 붙드는 것이다. 윤지는 나의 마음을 먼저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 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기에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윤지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기에 나는 윤지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윤지가 집으로 내려가고 나서 나는 또 윤지가 도망갈 것만 같았다. 이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윤지를 만날 수가 없었다. 윤지를 만나려고 시골의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내가 아니었던가.
윤지가 내일 첫차로 간다는 소식을 윤지의 동생을 통해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하던지 윤지를 만나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꼭 만나서 해야 할 말이 있기에 나는 윤지가 첫차를 타고 가는 그 차를 타고 윤지를 만날 것을 결심했다. 휴가 때라 나를 도와주려 하는지 다행히 차안은 사람들이 만원이었다. 윤지가 나를 볼까 두려워 윤지가 없는 맨 뒤쪽으로 가서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시골길이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하여도 나는 힘이 들지 않았다. 윤지와 같은 차안에 있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원주에 도착했다.
윤지가 차에서 내리기에 나도 사람들을 밀치고 윤지 뒤를 따라 내렸다.
“윤지야!”
윤지는 깜짝 놀라며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지야! 어디 가서 잠깐 얘기나 하자. 오빠는 윤지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윤지는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 가던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나는 화를 내며 윤지의 손목을 잡아끌고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와 서로가 마주 보고 앉았지만 윤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빠하고 결혼하자.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난 윤지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어. 윤지야!”
하고 애원하듯 윤지에게 청혼을 했지만 윤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오빠! 미안해. 나는 오빠를 오빠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 오빠와 나는 동생이잖아. 그리고 나 결혼 할 사람 있어.”
윤지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후끈거렸다. 윤지가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윤지는 거짓말을 못한다.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쓰여 있을 만큼 표시가 난다. 나는 윤지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러면 왜 결혼 할 사람을 안 데리고 왔느냐고…. 그러나 그 사람은 시골에 행사가 있어 내려갔노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윤지한테 결혼할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니 윤지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윤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카페에서 조용한 음악이 흐른다.
하얀 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 짓지만….
나는 더 괴로웠다. 여기에서 윤지를 보내면 영영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윤지에게 물어 보았다.
“오빠가 그렇게 싫으니? 거짓말을 할 만큼. 다시 한 번 생각해 줄 수 없니?”
윤지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오빠! 미안해. 난 오빠가 싫어. 오빠와 결혼하느니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는 것이 더 나아. 나 이대로 보내 줘.”
윤지는 나에게 있는 정까지 때려는 듯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윤지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너 결혼하면 네 남편 죽이고 너도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어차피 너 없으면 살아가야 할 희망이 없는데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어쨌든 너와 같이 있는 것 아냐.”
카페가 떠나가듯 소리를 질렀다. 아니 순진한 윤지가 그렇게 하면 내 말을 들어 줄 것만 같아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윤지는 겁을 먹었는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윤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전 내 뱉은 말들이 마음이 여린 윤지에게 큰 상처나 주지 않았는지 가슴이 메어 오는 그 무언가를 느낄 수가 있었다. 진심으로 윤지를 사랑한다면 윤지가 행복한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이야 진정한 사랑이 아니던가. 나는 나도 모르게 후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울고 있는 윤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윤지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 윤지가 행복 할 수 있는 길이라면 오빠는 아무래도 좋아. 대신 윤지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는 사람은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아마 윤지가 결혼 할 때 오빠가 축하해주러 결혼식장에 못 갈 거야.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나는 윤지를 혼자 남겨놓고 카페를 나왔다. 내 마음은 한없이 울고 있었다.
카페에서 나와 가로수에 몸을 기댄 체 윤지가 나오기를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
한참 후에 윤지가 고개를 숙인 채 나오더니 서울 행 기차를 타고 멀리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윤지의 고향이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윤지와 같이 걸었던 그 길과 윤지가 좋아했던 꽃들도 다 여기에 있는데 가장 소중한 윤지는 나의 곁을 영영 떠나고 이 자리에 없는 것이다. 잊으려고 애를 썼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윤지가 없는 이 시골이 나는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윤지가 있는 서울 하늘아래 같이 있고 싶어 서울에다 직장을 잡아 열심히 일을 했다.
명절 때는 윤지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 하나만 생각했다.
시골에 내려갈 때면 나도 모르게 기차 안을 한 바퀴 순찰하듯 윤지를 찾고 있었다. 혹시나 우연히 마주 쳤으면 하는 바램으로….
당연히 명절 때 내려오리라 생각했던 윤지는 오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는 윤지는 내가 무서워서 오지 않는 것 같았다. 다음 명절에도 그 다음 명절에도….
그러던 어느 가을
어머니께서 윤지의 결혼식에 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윤지가 보고 싶었지만 윤지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윤지가 결혼식 하는 날 나는 몰래 윤지의 결혼식을 훔쳐보아야 했다. 화장을 하지 않던 윤지가 오늘은 화장을 예쁘게 하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윤지는 내게 보여준 마지막 천사의 모습이었다. ‘윤지야! 결혼 축하 해. 내가 윤지를 힘들게 했던 지난날들을 용서해 주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가 되어주길….’ 그녀의 행복을 간절히 빌었다.
윤지가 결혼한 것을 보고서야 나는 윤지를 잊기로 마음먹었다. 언제나 가슴속에 남아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윤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윤지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로….
세월이 흘러 나도 결혼해서 아들과 딸이 있는 부모가 되었다.
윤지의 소식은 항상 들으면서 살고 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여름휴가 때 윤지가 고향으로 휴가를 온 것이다.
나는 휴가를 끝내고 올라가는 길에 외숙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윤지의 집으로 들어가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윤지가 밖에 서있지 않는가. 나는 너무도 놀랐다. 꿈만 같았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 고향에서 윤지를 만나다니….
나는 오랜만이라고 윤지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윤지도 나의 악수를 받아 주었다.
나는 윤지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했다.
윤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 그 동안 잘 있었지요?”
그래. 윤지도 행복하지?”
윤지는 나에게 손을 빼면서 말을 한다.
“혼자 오셨어요?”
“아니야. 애들 엄마도 같이 왔지.”
우리는 윤지의 집 앞으로 나왔다. 윤지가 차안을 보면서 애들 엄마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윤지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에 괴로움을 가지고 살아왔던 날들이 만남으로 인해 이제는 깨끗이 씻기는 듯 마음이 편안했다.
윤지의 마지막 모습인,
“오빠!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하세요. 조심해서 안녕히 가세요.”
아직도 나의 귓가에 윤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