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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聖民 1536 1594 南陽 時可 拙翁 文貞 益城君
졸옹집(拙翁集) 홍성민(洪聖民)생년1536년(중종 31)몰년1594년(선조 27)자시가(時可)호졸옹(拙翁)본관남양(南陽)봉호익성군(益城君)시호문정(文貞)특기사항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의 문인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 孫子 洪命耈가 문집을 간행하다.(洪命耈의 跋)
始於辛未(1631,인조9)夏。未及秋而工告訖。
癸酉(1633,인조11)。又忝按此道。到永嘉。捕板本缺畫處。謹齋沭以書。
崇禎甲戌(1634,인조12)孟夏日。孫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命耈。謹跋。
손자 洪命耈가 安東 府使로 부임하게 되자 부친의 편차본을 校讎하여 1631년 목판으로 10권을 간행하였다. 《초간본》 이 과정에서 당시 嶺南 刻手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이루었음을 跋文에서 특별히 기술하였다. 그리고 1633년 당시 慶尙道 觀察使로 나오게 되자 초간본 板木의 缺劃과 오류를 교정하고, 그동안 받아두었던 張維, 金尙憲, 趙希逸의 序跋에 자신의 跋을 붙여 1634년 補刻後刷하였다.
拙翁集跋 / 跋[洪命耉] *洪命耈 1596 1637 南陽 元老 懶齋 忠烈 南寧君
先祖平生著述甚多。藏于家者積有卷秩。
辛卯士禍作。先祖纍于北荒。繼而遭壬辰兵火。放失殆盡。洎召還行朝。追記舊詩文若干首。未及繕寫而下世。先君子手自編次。以圖不朽。而婁典郡邑。皆坐力綿。中遘否運。
廢居田里。竟莫之遂。不肖命耈每閱遺集。恐先祖文章泯爲無傳。無以紹先志。未嘗不掩涕。庚午。叨守永嘉。將校讐入梓。而尙慮工侵之未易。遠邑刻工聞鼓而至者四五十輩。咸曰。侯之先祖。再按嶺節。仁風惠政。民到今不能忘。今侯之鋟先稾也。我輩其敢後焉。遂不論直。而爭趨事。始於辛未夏。未及秋而工告訖。噫。先祖德澤之入人。徵於嶺管可知。而先祖文章。從此而照映於來後。則先人之志獲伸。而玆侵之完。實惟國恩所及。幽明之感。爲如何哉。癸酉。又忝按此道。到永嘉。捕板本缺畫處。謹齋沭以書。
崇禎甲戌孟夏日。孫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命耈。謹跋。
졸옹집(拙翁集) 홍성민(洪聖民)생년1536년(중종 31)몰년1594년(선조 27)자시가(時可)호졸옹(拙翁)본관남양(南陽)봉호익성군(益城君)시호문정(文貞)특기사항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의 문인
저자는 당대의 손꼽히던 文章으로 평소의 저술이 매우 많았으나
辛卯士禍로 유배되고 이어서 壬辰倭亂이 일어나는 바람에 원고가 대부분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저자 말년에 과거 지었던 詩文 900여 편을 暗記하여 손수 기록해 놓은 遺稿가 家藏되어 있었다고 한다.
선조 23 1590 경인 萬曆 18 55 2월, 대사헌으로 李山甫 등과 함께 鄭汝立을 천거한 盧守愼을 삭탈관직할 것을 청하다. ○ 5월, 대사헌을 사직하다. 경상 감사에 특별 제수되다. ○ 8월, 宗系辨誣의 功으로 光國功臣에 책봉되다.
~ ~ ~ ~ ~ ~ ~ 판중추부사가 되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56 6월, 鄭澈의 일파라는 이유로 탄핵받다. ○ 7월, 富寧으로 유배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57 5월, 사면되다. ○ 9월, 승문원 제조가 되다. ○ 10월, 母親喪(繼母金氏)을 당하다. ○ 起復의 명을 받고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12월, 대제학이 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58 1월, 호조 판서를 겸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59 6월, 서울에서 졸하다. ○ 8월, 驪興에 장사 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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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집(谿谷集) 장유(張維)생년1587년(선조 20)몰년1638년(인조 16)자지국(持國)호계곡(谿谷), 묵소(默所)본관덕수(德水)봉호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윤근수(尹根壽),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谿谷先生集卷之十三 / 碑銘 九首 / 牛溪先生神道碑銘 幷序
萬曆二十六年。牛溪先生卒。後四歲。仁弘之誣行。又二十餘歲。公議始定。贈官易名之典。長第擧焉。君子曰。昭哉徵乎天人之交相勝也。人以勢天以理。勢行於一時。理明於百世。不如是。爲善者何勸焉。旣而公卿大夫士慕先生之風者。相與謀曰。先生之道。於今可謂大信矣。墓道尙闕顯刻。非所以章德詔後。遂相與鳩財治石。而以銘詞屬維。維屢以固陋辭。不得命。謹按先生諱某。字浩原。自號默庵。牛溪者。學者所稱也。成氏本出昌寧。鼻祖仁輔。高麗時官中尹。六代祖石䂩。仕我朝爲禮曹判書。曾祖諱忠達。縣令。贈判書。祖諱世純。知中樞府事。諡思肅。考諱守琛。有高世之操。隱居講道。世稱聽松先生。屢徵不起。卒。贈司憲府執義。配坡平尹氏。以嘉靖乙未。生先生。自童孺敏悟善學。年十七。擧司馬兩試。以病不赴覆試。遂棄擧子業。專心爲己之學。甫弱冠。學就行尊。大爲流輩所推服。聽松嘗病谻。先生再割股和藥以進。及丁憂。廬墓三年。宣廟初。方伯以學行卓異薦于朝。再除參奉。尋超陞六品。皆不就。授積城縣監。謝恩已卽歸。遠近學者日益進。先生誨迪不倦。作書室儀。以示諸生軌則。歷除掌苑司紙主簿判官僉正工曹佐郞,正郞。其爲臺職。以持平召者十餘。掌令者再。至命乘馬轝以來。皆固辭不至。上嘗問栗谷李文成公曰。成渾之賢。予已聞知。顧其才何如。文成對曰。謂之獨任經濟。臣未敢知。其爲人好善。好善優於天下。但多病不堪任劇。置之閑局。使數侍經幄。必能裨益聖德。辛巳。拜宗廟署令。召旨懇切。先生力疾詣京。上遣醫問疾。賜藥餌。尋引見。訪治道之要。對曰。人君必先收斂身心。使志氣常淸。則本立而義理昭著矣。又言治亂無常。只係人主一心。然必得賢輔相。使廣收俊乂。列于庶位。然後治化可成。又曰。方今朝著多容身保位之臣。鮮引君當道之士。此最可憂。上問民生困瘁。對以量入爲出。損上益下。則可以恩結民心。爲祈天永命之本。已而又上封事。申前意而極言之。疏久留中。政院請宣示。上曰。疏中如論學等事。予當省察。但欲盡取國制而更張之。其亦難行矣。先生嘗謂祖宗良法。盡爲燕山所壞。進上貢物之增重者。未盡裁革。不變而通之。無以爲治。上頗以是難之。後因引對。復申其說。時李文成公意與先生合。亦屢以爲言。而終不行。識者恨之。先生在京不受祿。上聞之。別賜米豆。先生辭。上曰。周之則受。古之道也。先生悉分與親戚隣里。遷豐儲倉,典設司守。大臣啓請進秩兼經筵參贊官。上命以閑職入侍。先生累疏乞退。出郊待命。上下敎召還。引見勉留之。先生乞退益懇。上始許姑歸。屢拜司憲府執義,諸寺正。皆不就。癸未春。特拜兵曹參知。召命屢下。先生黽勉入京。俄遷吏曹參議。賜銀帶。先生三疏辭職。許之。因命入侍經筵。文成公當朝爲中外屬望。宣廟眷注方隆。群小惎之甚。捃摭細事論劾之。先生上疏辨其誣罔。群小益怒。遂倂劾先生。先生卽日還坡山。太學生四百七十人。湖南海西儒生數百人。相繼抗章。指陳邪正。上褒答之。又敎曰。苟君子也。不患其有黨。予願入珥,渾之黨。遂盡逐群小。復以吏曹參議召先生。先生屢辭不許。遂赴朝拜命。陞拜參判。五疏辭不許。未幾。文成公卒。先生益無意世事。連章乞骸。上不許曰。新喪賢宰。予寢不貼席。共理國事。非卿而誰。居數月。以焚黃乞暇歸。上命本道遣長吏存問賜食物。纂集廳之設也。以堂上徵。三拜同樞。皆辭。文成公旣沒。時事一變。群小稍稍進用。益修舊郤。恐先生復起用也。以醜語誣𧥮之。先生上疏自劾。己丑冬。復拜吏曹參判。懇辭。
會鄭汝立謀反事發。上曰。國有大變。卿不可退。先生遂赴朝。時逆變出於搢紳。株連寢廣。先生力主平反之議。上章請緩獄恤刑。相臣有與逆魁同宗。因進對失實。論者將當以欺罔。先生極言救解。得免大何。無何。幸相煽蜚語。禍幾已兆。先生解職歸。太學諸生。上疏請留。不報。自後徵命不復下。崔永慶被口語逮獄。先生以書抵鄭相澈。鄭相入對極言永慶無它。上意稍解。
辛卯士禍作。坐竄貶者。皆先生知故。群小蘊蓄禍心。必欲倂及先生。明年。倭寇深入。聞上將西狩。先生欲入赴難。自念本起山野。方身被鉤黨之目。朝暮且得罪。國雖有急。義不敢輕自進。乘輿若西幸。當哭迎道左。如蒙顧問。則當隨駕。否則唯有退死溝壑耳。俄而上遽決去邠計。先生家去官路二十里。比聞車駕已渡臨津。倉黃欲追赴。而江津阻絶。亂兵已梗路矣。遂慟哭舁疾。避兵于峽中。光海以世子駐伊川。下令召之。病甚不得赴。上箚陳十六事。光海便宜拜檢察使。尋再召。先生力疾赴召。旋詣行在。上疏論選將治兵聚糧三策。因言敵國外患。不可歸諸天數。在昔帝王遭變故。或下詔罪已。貶去尊號。或罪誤國臣。以謝四方。今宜奮發大志。痛自警責。絶近習交通宮闈與政之端。用正直士。爲耳目寄。則人心悅服。仇賊可滅矣。疏出。觀者知禍萌在是也。天朝贊畫袁黃。詒書論學。專絀程,朱。諸公難其對。屬先生草答。辭遜而理正。袁不能復難。前後累拜參贊都憲。輒辭就散班。賊發宣,靖二陵。先生承命奉審。處變得宜。復命于海州行宮。大駕還都。先生留扈中殿。湖西賊起。先生遂赴都。初壬辰西狩。上至臨津。問成渾家去此近遠。李弘老壬人也。妄指近岸小村曰。卽此是也。上曰。何不來見予。弘老曰。當是時。渠寧肯來謁。及先生自分朝赴行在。弘老又進讒曰。成渾此來。爲世子圖內禪也。上旣屢入其言。至是因先生待罪。下敎追擧變初事。辭旨峻厲。先生惶恐不敢辨。願伏重誅。上優容之。以參贊兼備局提調。所陳建多不從。倭賊窟據嶺南十餘郡。天兵亦罷老。不能進取。摠督顧養謙。方專管東事。移咨於我。欲姑聽倭和。以爲後圖。令我先上奏。廟堂自度計窮。欲曲聽顧咨。而群議攻和甚力。獨李公廷馣巡察湖南。建言宜姑許和以緩賊。柳相成龍當國。亦以爲然。約與先生同入對。上問顧咨從違。先生對曰。我國旣不能自辦戰守。制權在顧手。不宜強違其說。又言李廷馣有忠義大節。意在憂國。未可深罪。上盛怒。柳相噤嘿而退。於是三司交章斥和。意在先生。先生引咎乞骸歸。戊戌夏。疾篤。先令子文濬曰。吾得罪君父。心事未白死。目不瞑矣。衣以布衣。斂以紙衾。編茅覆棺。牛車歸葬足矣。六月六日。易簀于坡山書室。壽六十四。是歲某月日。葬于坡州向陽里酉向之原。先生沒後。群小仇嫉猶未已。鄭仁弘旣嗾其徒。上疏誣構。用事者因肆齮齕。遂追奪官職。儒林爲之氣塞。至今上踐阼。吳公允謙,李公廷龜啓陳先生被誣本末。上亦雅聞先生大儒。卽命復官。尋贈議政府左議政。諡曰文簡。諸生建書院于坡山。與聽松先生。共享俎豆。維生也後。未及與拔篲之役。幸從諸老先生。竊聞緖論。聽松之學。蓋出於靜庵。而先生早服庭訓。又嘗尊慕退陶而淑艾焉。其爲學。以考亭爲準則。講明踐履。交致其功。而於操存本源。尤慥慥焉。其平居言動及治家儀法。以至喪祭節文。悉遵小學家禮而行之。一本於誠敬。充養旣久。德器凝定。望之可知其有道君子也。少與栗谷定交。得麗澤之益。嘗論四端七情理氣先後之說。往復累千萬言。多有儒先所未發者。栗谷嘗稱曰。若論見解所到。吾差有寸長。操履敦確。吾所不及云。文章本源經術。明暢典雅。有文集若干卷行于世。先生蘊德丘園。本無當世志。及聲實騰聞。大被宣廟殊眷。待以不次之位。然歷計立朝日月。不滿一歲。一爲栗谷伸辨。遂爲群小所忌嫉。竟遭中傷。不得展布志業。道之將廢命也。不其然耶。卽身後褒崇。差可爲斯文增氣。庸何及於世道之交喪乎。夫人高靈申氏。郡守汝樑之女。生二男二女。男文泳早死。次文濬縣監。女長適別坐南宮蓂。次適府尹尹煌。側室子曰某。文濬三男。長櫟。次杙,次㮨。女子三人。南宮蓂有三男。尹煌有五男。外孫男女。甚繁不盡記。系以銘曰。
天胙斯文。竝生哲人。坡山石潭。德則有隣。擬宋朱,張。相輔以仁。道器之妙。性情之微。體用一源。二之則離。審問明辨。會通無疑。旣擴前祕。亦徹來蔽。隱見何心。惟義之比。亹亹先生。含章履貞。遭時孔艱。身困心亨。人莫我知。天不容欺。人勝而阨。天定乃復。亦旣復矣。不顯其光。百世以俟。遺文煒煌。道而終詘。善者曷勖。凡厥來學。鑑此鑱石。
계곡선생집 제13권 / 비명(碑銘) 9수(首) / 우계 선생 신도비명(牛溪先生神道碑銘) 병서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 31)에 우계 선생(牛溪先生)이 작고하였다. 그 뒤 4년이 지나 정인홍(鄭仁弘)이 선생에 대해 무함을 가하였는데, 또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공의(公議)가 비로소 정해지면서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역명(易名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하는 의전(儀典)이 차례로 거행되었다. 이에 군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우세했다가 드디어는 하늘이 이기는 이치가 밝게도 징험되었도다. 사람은 세력으로 하고 하늘은 이치에 따르는 법, 세력이 행해짐은 한때이지만 이치의 밝음은 백세에 뻗치도다. 이처럼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행을 권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선생의 풍도를 사모하는 공경대부와 사인(士人)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선생의 도가 이제 크게 펴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묘도(墓道)에 아직도 드러내 새기는 일을 하지 못했으니, 이는 선생의 덕을 드러내고 후세를 인도하는 방도가 못 된다.”
하고, 마침내 서로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마련한 뒤 그 명사(銘詞)를 나에게 부탁해 왔다. 이에 내가 고루(固陋)하다는 이유로 누차 사양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휘(諱)는 모(某)요 자(字)는 호원(浩原)이요 자호(自號)는 묵암(默庵)으로서, 우계(牛溪)라고 하는 호는 학자들이 선생을 일컫는 호칭이다.
성씨(成氏)는 본래 창녕(昌寧)으로부터 비롯된다. 비조(鼻祖)인 인보(仁輔)는 고려 때 중윤(中尹)의 관직에 이르렀고, 6대조 석연(石䂩)은 아조(我朝)에서 벼슬하여 예조 판서가 되었다. 증조 휘 충달(忠達)은 현령으로 판서를 증직받았고, 조부 휘 세순(世純)은 지중추부사로 시호(諡號)가 사숙(思肅)이다.
부친 휘 수침(守琛)은 유속(流俗)을 높이 초월한 절조(節操)의 소유자로서 은거하여 도를 강론하였는데, 세상에서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고 불렸다.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죽어서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는데,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배필로 삼아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 30)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동유(童儒) 시절부터 자질이 영민하여 공부를 잘하였다. 17세에 사마(司馬) 양시(兩試 진사시와 생원시임)에 응시하였다가 병으로 복시(覆試)에 나아가지 못했는데, 마침내 과거 시험 보는 일을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온 마음을 쏟은 결과,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에 배움과 실천면에서 모두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동배들로부터 크게 추복(推服)을 받았다.
청송(聽松)이 일찍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선생이 2번이나 허벅다리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기도 하였으며, 급기야 상(喪)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廬墓) 생활을 하였다.
선묘(宣廟) 초년에 방백이 탁월한 학행(學行)의 소유자로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여 2번이나 참봉을 제수받았고 잇따라 6품으로 훌쩍 뛰어올랐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또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제수받았을 때는 사은(謝恩)하는 일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시골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원근(遠近) 지역의 학자들이 날로 찾아오자 선생이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서실(書室)의 내규(內規)를 지어 제생(諸生)에게 행동 규범을 제시하였다.
그 뒤로 장원(掌苑), 사지(司紙)와 주부, 판관, 첨정과 공조의 좌랑ㆍ정랑을 차례로 제수받았으며, 대직(臺職)으로 부름을 받은 것으로 말하면 지평이 10여 차례, 장령이 2번이나 되었는데, 심지어는 마여(馬轝)를 내주면서 타고 오게까지 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응하지 않았다.
상이 일찍이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에게 문의하기를,
“성혼(成渾)이 어질다는 것은 내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만, 그의 재주는 어떠한가?”
하니, 문성이 대답하기를,
“그에게 독자적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임무를 맡길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이 감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넉넉하게 해 줄 수 있는 법입니다. 다만 그는 병이 잘 걸리는 허약한 체질이라서 복잡한 임무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니, 한가한 부서에 놔 두고서 자주 경악(經幄)에 입시(入侍)하게 한다면 분명히 성덕(聖德)을 보익(輔益)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사년에 종묘서 영(宗廟署令)에 임명하면서 간절히 부르자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상경하였다. 이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약이(藥餌)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인견(引見)하여 치도(治道)의 요체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니,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인군(人君)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렴(收斂)하여 지기(志氣)가 늘 맑아지도록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확립되면서 의리가 밝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치란(治亂)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서 단지 인주(人主)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긴 하나 반드시 훌륭하게 보좌할 수 있는 정승을 얻어서 널리 인재를 거두어 각종 직위에 배치시키도록 한 뒤에야 정치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현재 조정을 보면 무사 안일주의로 자리만 보존하려는 신하들이 많은 반면, 임금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려는 인사들은 보기 드무니 이것이 가장 걱정됩니다.”
하였다. 또 상이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과 관련하여 그 대책을 물으니,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세입(稅入)을 헤아려 지출을 하되 위의 비용을 덜어서 아래 보태 준다면 그 은혜가 백성의 마음을 결속시켜 천명(天命)을 길이 받드는 기초가 마련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다시 봉사(封事 임금만 보도록 봉해서 올리는 상소문)를 올려 조금 전에 아뢰었던 내용을 부연하여 강력하게 개진하였다. 그런데 그 상소문을 오래도록 안에만 놔 두고 있자 정원이 선시(宣示)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소한 내용 가운데 가령 학문을 논한 대목 등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성찰을 할 것이다마는, 나라의 제도를 모조리 경장(更張)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행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 제도가 연산(燕山)에 의해서 온통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공물(貢物)의 진상(進上)을 중하게 늘렸던 일이 아직껏 다 개혁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변통하지 않는다면 좋은 정치를 이루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상이 이 점을 상당히 난처하게 여긴 것이었다. 그 뒤에 인대(引對)하는 기회에 또다시 그 주장을 펼쳤었는데, 당시 이 문성공의 뜻도 선생과 합치되어 누차 이를 언급하곤 하였으나, 끝내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선생은 서울에 있을 때 녹봉(祿俸)을 받지 않았다. 상이 이 말을 듣고 특별히 미두(米豆)를 하사하였는데, 선생이 사양을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부족한 것을 도와줄 때는 받는 것이 옛날의 도이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곡물을 받은 뒤에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풍처창 수(豐儲倉守)와 전설사 수(典設司守)로 옮겨졌다. 대신이 계청(啓請)하여 직질(職秩)을 높여 주고 경연 참찬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상이 한직(閑職)에 몸담으면서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몇 차례나 상소를 올려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면서 교외에 나가 명을 기다리자, 상이 하교하여 소환한 뒤 인견(引見)하여 극력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더욱 간절하게 퇴직을 청하자 상이 비로소 우선 돌아가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 뒤 누차 사헌부 집의와 제시(諸寺)의 정(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미년 봄에 특별히 병조 참지에 제수하면서 몇 번이나 소명(召命)을 내리자 선생이 마지못해 입경(入京)하였다. 얼마 있다가 이조 참의로 옮겨지고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선생이 3차례나 상소하여 사직한 끝에 허락을 받고 명에 의하여 경연에만 입시하였다.
문성공이 당시 조정에 있으면서 중외(中外)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는데 선묘(宣廟) 역시 바야흐로 융숭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군소배들이 어떻게든 해치려고 들면서 하찮은 일들을 주워 모아 공을 탄핵하자 선생이 상소하여 그 무망(誣罔)을 변박(辨駁)하였는데, 군소배들이 더욱 노여워한 나머지 마침내 선생까지 싸잡아 탄핵하였으므로 선생이 그날로 파산(坡山 파주(坡州))에 돌아왔다.
이에 태학생 4백 70인과 호남 및 해서(海西)의 유생 수백 인이 서로 잇따라 항장(抗章)을 올리면서 사정(邪正)을 가려 진달드리자, 상이 포답(褒答)을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진정 군자이기만 하다면 당(黨)이 있다고 해서 걱정할 것이 없다. 나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당에 끼고 싶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군소배들을 모조리 축출한 뒤 다시 이조 참의로 선생을 불렀는데, 선생이 누차 사직하여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조정에 나와 명에 숙배(肅拜)하였다. 뒤이어 참관으로 승진되자 5차례나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문성공이 죽자 선생이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잇따라 상소하여 물러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이제 막 어진 재상을 잃어 나의 잠자리가 편안치 못한데, 이러한 때에 나랏일을 함께 다스려 나갈 이를 찾는다면 경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서 분황(焚黃 추증된 선조의 무덤 앞에서 관고(官誥)의 부본(副本)을 불사르는 것)하는 일로 휴가를 청해 돌아가게 되었는데, 상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리(長吏)를 보내 안부를 묻고 음식을 하사하게 하였다. 그 뒤 찬집청(纂集廳)을 설치할 때 선생을 당상으로 부르면서 3번이나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문성공이 죽고 나자 상황이 크게 변한 가운데 군소배들이 차츰 조정에 진출하면서 더욱 옛날의 원한을 심화시켜 나갔는데, 선생이 다시 기용(起用)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추악한 말로 무함하며 헐뜯자 선생이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다시 이조 참관에 임명되자 간절히 사양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자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 만큼 경이 물러나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침내 조정에 나아왔다.
당시 역변(逆變)이 진신(搢紳) 사이에서 나온 관계로 연루자(連累者)들이 점점 늘어만 갔는데, 선생이 평반(平反 변통을 해서 죄를 경감해 주는 것)의 의논을 극력 주장하는 한편 상소를 하여 옥사(獄事)를 완화시킬 것과 형(刑)을 신중히 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역괴(逆魁)와 같은 종족이었던 어떤 상신(相臣) 하나가 진대(進對)하다 잘못 말하자 논자들이 기망죄(欺罔罪)를 적용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극력 말하며 변호한 결과 대죄(大罪)를 면하게 해 준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임금의 총애를 받는 정승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화(禍)를 일으킬 조짐이 명백해지자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는데, 태학의 제생(諸生)이 상소하여 만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뒤로는 선생을 부르는 명이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최영경(崔永慶)이 사람들의 입에 올라 옥에 갇히는 몸이 되자 선생이 정상철(鄭相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정상이 입대(入對)하여 영경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극력 아뢰었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조금 풀어졌다. 그 뒤
신묘사화(辛卯士禍)가 일어났을 때는 이에 연루되어 유배당한 사람들이 모두 선생의 지고(知故)들이었는데, 군소배들이 화심(禍心)을 늘 간직하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선생까지도 화망(禍網)에 몰아넣으려 하였다.
이듬해 왜구(倭寇)가 깊이 쳐들어옴에 따라 상이 장차 서쪽으로 피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이 뛰어들어 국난(國難)을 구하려 하다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디 산야(山野)에서 일어난 몸으로 현재 당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지목을 받는 가운데 밤낮으로 죄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니, 나라가 비록 위급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의리상 감히 경솔하게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승여(乘輿)가 만약 서쪽 지방으로 떠나게 될 경우 길옆에서 곡하며 맞는 것이 마땅할 것이니, 그때 자문을 구하시는 은혜를 받게 되면 마땅히 대가(大駕)를 따를 것이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오직 물러가 구렁에 빠져 죽을 따름이다.’ 하고 자제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상이 거연(遽然)히 도성을 떠날 계책을 결정하게 되었다. 선생의 집은 관로(官路)로부터 20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거가(車駕)가 이미 임진(臨津)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는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아가려고 하였으나, 임진강 나루를 건너는 길이 이미 끊어진 데가 난병(亂兵)이 벌써 길들을 막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통곡을 하면서 병든 몸을 이끌고 산속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광해(光海)가 세자의 신분으로 이천(伊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을 내려 선생을 불렀는데, 병이 심해져 나아가지 못한 채 상차(上箚)하여 16개 조목의 일을 개진하였다. 그러자 광해가 편의대로 선생을 검찰사(檢察使)에 임명한 뒤 잇따라 2번이나 불렀으므로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행재(行在)에 달려가서 상소를 하며 선장(選將), 치병(治兵), 취량(聚糧) 등의 3가지 계책을 논하고, 인하여 또 말하기를,
“적국(敵國)에 의한 외환(外患)을 하늘의 운수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제왕이 변고를 당하게 되면, 혹 조서를 내려 자기의 죄로 돌리면서 존호(尊號)를 삭제해 버리기도 하였고, 혹 나라를 그르친 신하를 죄줌으로써 사방에 사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역시 큰 뜻을 분발하여 통렬하게 자신을 경책(警責)하는 동시에 근습(近習)들이 궁중과 교통(交通)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폐단을 근절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한 인사들을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역할을 맡긴다면, 인심(人心)이 열복(悅服)하고 구적(仇賊)도 소멸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상소가 나오자 사람들이 이를 보고는 장차 화의 씨앗이 여기에서 비롯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명(明) 나라의 찬획(贊畫) 원황(袁黃)이 글을 보내 학문을 논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집중 공격해 왔다. 이에 제공(諸公)이 대론(對論)을 벌이는 것을 난처하게 여기면서 선생에게 답변을 작성해 주도록 부탁하였는데, 선생이 말은 겸손하면서도 이치는 바르게 논리를 전개해 나가자 원황이 다시는 논란을 벌이지 못하였다.
전후에 걸쳐 몇 차례나 참찬과 도헌(都憲)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사양하고 산반(散班)에 몸을 담았다. 왜적이 선릉(宣陵 성종(成宗)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을 파헤치자 선생이 명을 받들고 봉심(奉審)하면서 온당하게 변고에 대처한 뒤 해주(海州)의 행궁(行宮)에서 복명(復命)하였다. 그러다가 대가가 환도(還都)할 때에는 선생이 남아서 중전(中殿)을 호위하였는데, 호서(湖西)의 적이 일어나자 선생이 마침내 도성으로 향하였다.
처음에 임진왜란을 당해 서쪽으로 피난을 떠날 때, 상이 임진(臨津)에 이르러서 하문하기를,
“성혼의 집이 여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였는데, 간인(奸人) 이홍로(李弘老)가 가까운 대안(對岸)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대답하기를,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하문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하자, 홍로가 대답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 선생이 분조(分朝)에서 행재(行在)로 달려오자 홍로가 또 참소하여 말하기를,
“성혼이 이곳에 온 목적은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단 그런 이야기를 누차 들어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대죄(待罪)하자, 하교를 하여 변란 초기의 일까지 소급해 거론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준열하고 엄하였다.
이에 선생이 황공한 나머지 감히 해명하지 못한 채 무거운 처벌을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상이 너그럽게 답하긴 하였으나, 그 뒤 참찬 겸 비국 제조로서 선생이 진달하며 건의해도 대부분 들어주지 않았다.
왜적이 영남 지방의 10여 군(郡)에다 참호를 파고는 버티고 있었는데, 중국 군대 역시 피로에 지친 나머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때 총독(摠督) 고양겸(顧養謙)이 동쪽의 일을 전담하면서, 우리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강화(講和)하자는 왜적의 요구를 우선 들어주고 뒷날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먼저 중국 조정에 상주(上奏)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묘당에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왜적을 물리칠 계책이 궁했으므로 고양겸의 자문대로 따르려 하였으나, 군의(群議)는 매우 강력하게 화의(和議)를 공격하고 나섰다.
그런 중에서도 유독 이공 정암(李公廷馣)만은 호남을 순찰하면서 건의하기를 ‘우선 강화를 허락함으로써 적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당시 나랏일을 맡고 있던 유상 성룡(柳相成龍) 역시 이 주장에 동의하여 선생과 약조를 한 뒤 함께 입대(入對)하였다.
이에 상이 고양겸의 자문을 들어줄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하문을 하자,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우리나라가 일단 독자적으로 전수책(戰守策)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절제(節制)하는 권한이 모두 고양겸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그가 하는 말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정암으로 말하면 충의(忠義)의 대절(大節)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한 것이 나라를 걱정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심각하게 죄를 따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엄청나게 노여워하였는데, 이때 유상(柳相)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만 물러나오고 말았다. 이에 삼사(三司)가 번갈아 소장을 올려 화의를 배척하였는데, 그 의도가 선생에게 있었으므로 선생이 인구(引咎)하고 사직을 청한 뒤 시골로 돌아왔다.
무술년 여름에 병이 위독해지자 먼저 아들 문준(文濬)에게 명을 내리기를,
“내가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은 몸으로 심사(心事)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옷은 포의(布衣)로 하고 염(斂)은 지금(紙衾 종이 이불)으로 할 것이며, 띠풀을 엮어 관(棺)을 덮고 소가 끄는 수레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충분하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6월 6일에 이르러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의미함)하였는데, 향년 64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파주(坡州) 향양리(向陽里)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었다.
선생이 죽고 난 뒤에도 군소배들이 미워하는 감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인홍이 일단 자기 패거리를 사주하여 무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자, 권세를 좌우하는 자가 이에 따라 멋대로 헐뜯고 짓밟은 결과 마침내 선생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하여 유림(儒林)의 기운이 크게 저상(沮喪)되었다.
금상(今上)께서 대위(大位)에 오르시자 오공 윤겸(吳公允謙)과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선생이 무함을 당하게 된 시말(始末)을 아뢰어 설명드렸는데, 상 역시 평소 선생이 대유(大儒)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복관(復官)을 명하고, 뒤이어 의정부 좌의정의 증직과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에 제생(諸生)이 파산(坡山)에 서원을 건립한 뒤 청송 선생을 함께 모시고 선생의 향사(享祀)를 받들게 되었다.
나는 세상에 늦게 태어나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받을 기회는 없었으나 다행히 여러 노선생들로부터 그 서론(緖論)에 대해 나름대로 들을 수가 있었다. 청송(聽松)의 학문은 대체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에게서 나왔는데 선생이 이른 나이에 가정에서 이에 대해 훈도를 받았고, 또 일찍이 퇴도(退陶 이황(李滉))를 존경하며 사숙(私淑)하였으니, 그 학문은 고정(考亭 주희(朱熹))을 준칙(準則)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도를 강명(講明)하고 실천하는 데에 모든 공력을 쏟았는데, 특히 마음의 본원(本源)을 밝혀 단속하는 데에 더욱더 독실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평소의 언동(言動)이나 집안을 다스리는 의법(儀法)으로부터 상제(喪祭)의 절문(節文)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에 있는 대로 행해 나갔다. 이렇듯 한결같이 성(誠)과 경(敬)에 근본을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닦아 기른 결과, 덕기(德器)가 확고하게 형성되었으므로 누구든 선생을 바라보기만 해도 도를 소유한 군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젊어서 율곡과 교분을 맺고서 이택(麗澤)의 도움을 주고받았다. 일찍이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선후(理氣先後)의 설을 함께 논하면서 수천 만 언(言)의 서신을 왕복하였는데, 그중에는 선유(先儒)들이 미처 드러내 밝히지 못한 내용도 많이 있었다. 율곡이 언젠가 공을 일컬어 말하기를,
“가령 견해의 심천(深淺)을 굳이 논한다면 내가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확고히 간직하고 실천하는 면에 있어서는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하였다. 선생의 문장을 보아도 경술(經術)에 본원(本源)을 둔 가운데 명쾌하고 통창(通暢)하며 전아(典雅)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본래 은거하면서 덕을 닦으려고 하였을 뿐 세상을 담당할 뜻은 당초부터 없었는데, 급기야 명성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선묘(宣廟)의 특별한 은총을 크게 입어 불차지위(不次之位 순서를 무시하고 특별히 발탁하는 것)의 대우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조정에 몸담고 있었던 시간을 모두 합쳐 보면 1년도 채 차지 않았다. 율곡을 위해서 한 번 해명해 준 것이 마침내 군소배들의 미움을 받게 된 나머지 결국은 그들의 중상모략에 걸려 지업(志業)을 제대로 펴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운명적으로 도가 폐해지려는 때였던 모양이다. 이 말이 맞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선생이 죽은 뒤에 포숭(褒崇)하는 일이 행해져 조금 사문(斯文)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하더라도 세도(世道)가 교상(交喪)하게 된 일에 대해서야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여량(汝樑)의 딸로서 모두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차남 문준(文濬)은 현감이며, 장녀는 별좌(別坐)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부윤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의 아들로 모(某)가 있다. 문준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역(櫟)이고 차남은 익(杙)이고 그 다음은 직(㮨)이며, 딸이 세 사람 있다. 남궁명은 3남을 두었고, 윤황은 5남을 두었다. 외손으로 남녀가 매우 많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사문에 복을 내리사 / 天胙斯文
철인이 한꺼번에 나게 했도다 / 幷生哲人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 坡山石潭
유덕군자(有德君子) 반드시 지기(知己) 있는 법 / 德則有隣
송 나라 때 주회암(朱晦庵)과 장남헌(張南軒)처럼 / 擬宋朱張
서로들 인덕(仁德)으로 도와줬다오 / 相輔以仁
도와 기의 오묘한 관계 / 道器之妙
성과 정의 미묘한 속성 / 性情之微
체와 용의 근원 하나이어니 / 體用一源
둘로 나뉘면 결별이라오 / 二之則離
자세히 따져 묻고 분명히 해명하여 / 審問明辨
의심할 여지없이 회통했나니 / 會通無疑
숨겨졌던 내용들 확충시키고 / 旣擴前秘
제기될 의문점 해소했도다 / 亦徹來蔽
숨고 나온 것은 무슨 마음이었던가 / 隱見何心
오직 의리 입각한 행동이었지 / 惟義之比
근실한 우리 선생 / 釁釁先生
완덕(完德) 속에 갖추고서 정도를 걸었도다 / 含章履貞
몹시도 어려웠던 시대를 만나 / 遭時孔囏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형통했지 / 身困心亨
사람들은 내 마음 안 알아줘도 / 人莫我知
하늘만은 속일 수가 결코 없는 법 / 天不容欺
사람들이 우세하여 액운당하다 / 人勝而阨
하늘의 뜻 정해짐에 회복되었네 / 天定乃復
일단 회복되고 나자 / 亦旣復矣
발산되는 빛 / 不顯其光
백세 뒤에라도 / 百世以俟
남긴 글 휘황하리 / 遺文煒煌
도덕 군자 끝까지 왜곡된다면 / 道而終詘
선인(善人)들 어떻게 북돋우리요 / 善者曷勗
후대의 학자들 부탁하노니 / 凡厥來學
나의 이 비명(碑銘) 잘 살피시기를 / 鑑此鑱石
[주-D001] 사람이 …… 이치 : 난세(亂世)에는 악인이 위세를 떨치다가도 천운(天運)이 순환하여 하늘이 본래의 힘을 발휘하게 되면 악인이 망하면서 정상화된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오자서전(伍子胥傳)에 “사람의 무리가 많으면 하늘을 이길 때도 있지만 하늘이 정해지면 또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이라고 하였다.[주-D002] 이택(麗澤)의 도움 : 이택은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이라는 뜻으로서, 붕우간에 서로 도움을 주며 학문을 토론하고 덕을 닦아 나가는 것을 말한다. 《周易 兌 象辭》[주-D003] 세도(世道)가 …… 일 : 《장자(莊子)》 선성(繕性)에 “세상은 도를 잃고 도는 세상을 잃었으니, 세상과 도가 서로 잃어버린 것이라 하겠다.[世喪道矣 道喪世矣 世與道 交相喪也]”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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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하집(蒼霞集) 원경하(元景夏)생년1698년(숙종 24)몰년1761년(영조 37)자화백(華伯)호창하(蒼霞), 비와(肥窩)본관원주(原州)시호충문(忠文)
蒼霞集卷之九 / 謚狀 / 刑曹判書張公謚狀 *張雲翼 1561 1599 張應龍 德水 萬里 西村 貞敏 德水府院君
公諱雲翼。字萬里。自號西村。系出德水。鼻祖舜龍。自元從公主來。仕高麗。官僉議參理。食采德水縣。遂爲貫焉。曁我朝有翮漢城判尹最顯。四世至玉擢魁科。官承文判校。能文章負重名。生任重掌隷院司議。生逸木川縣監。贈領議政。公之禰也。娶府尹成子沆女。嘉靖辛酉生公。在娠。夢有龍祥。故小字應龍。谿谷文忠公維。公之仲子也。不佞按文忠之狀曰。公生六歲。成夫人卒。哭泣不出門。索筆有所草曰爲母作挽詞。先王父就視之。辭旨悲切。大異之。稍長。嗜書善屬文。年十八。擧漢城試一等。十九。中己卯進士第四名。二十二。以明經上第。庭對冠多士。拜成均館典籍。屢遷司憲府監察。兵曹佐郞。司諫院正言。左降高山察訪。病免歸。復入郞署。出爲宣川郡守。治最一道。事聞。賜表裏以褒。居三載以疾去。擢司憲府持平。陞掌令,知製敎。尋陞成均館司成。公盛氣敢言。忌嫉者衆會。時相欲有所逞。陰結嬖蜚語。
辛卯春。出公襄陽。未幾。
士禍大作。公亦謫穩城。明年。倭寇逼京。上將西廵。悉還流竄。公崎嶇山嶺。屢經危險。達于行在。以善華語。常侍左右。時諸將屯兵江華。久而無功。上命公以御史往撫。還朝屢官司僕寺正。司憲府執義。癸巳。陞工曹參議。歷兵曹參知。拜承政院同副承旨。屢陞都承旨。公警敏嫺辭令。應對出納中肯綮。上多公才而察其勞。有金帶之賜。尋以參鞫逆獄命陞嘉善階。無何。貶海州牧使。州新中兵。繼以飢疫。屬王妃駐駕。事殷而費廣。公恪以奉上。惠以拊下。各當其宜。民有餘力。庫有餘財。裁决簿書。日有餘閒。人以是益服公才。上特命增秩。久之。擢忠淸道觀察使。州民上書乞公還。上移公廵察黃海道。俄爲言者所誣免歸。會天將麻貴。提督征東軍務。公爲接伴使迓境上。丁酉秋。陞刑曹判書。冬。隨提督廵湖南。又隨嶺南。破賊于蔚山。明年夏。提督軍于安東。又從行。公體肥。素苦痰濕。二歲暴露行間。至是遂病中濕。輿還京師。屢拜都摠府都摠管。知義禁府事。漢城府判尹。疾寢劇。以己亥六月十四日卒。年三十九。嗚呼。公之歿。今已百五十有五年。
辛卯士禍。可謂扼腕而流涕者矣。孽臣秉柄。潛結奧援。排異己而芟善類。一代羣賢。鮮逭網打之禍。淸陰金文正公。書公墓碑曰。公磊落雋拔。遇事風生。擧劾無所避。羣不悅者。側目視會。倖相熒惑上意。亡何
禍作。鄭公澈謫江界。尹公斗壽謫洪原。公與洪公聖民,李公海壽。俱謫北邊。自古宵人。惡淸流淸議爲害己。必鋤去而後已。漢之俊厨。宋之洛朔東林楊左諸公。爲黨錮奇貨。陰陽玄黃之血。醞釀亡國之禍機。此忠臣烈士戟手罵詈於簧舌左腹。而三復巷伯憂讒之詩者也。壬辰島夷之變。宗社危亡。凜如一髮引千匀。當是時。召禍者誰也。弭難者又誰也。夫正人君子。國之元氣。斬伐元氣而國不亡者。未之有也。當其危難之際。幸賴聖祖復召羣賢於竄斥流離。而中興偉烈。寔藉於羣賢。國家所以安危興替之有關於賢邪消長。有不可誣。千古公案。其在於斯歟。是故。文正稱公之謀猷事功曰。中興之際。繄其力是藉也。嗚呼。文正斯言。豈不爲石室信筆乎哉。又曰。公資性豁達。好氣槩。有威風。長於政術。當官莅職。坐堂皇顧眄。猾吏脅息。不敢仰視。牒訴盈前。剖斷立盡。其治劇郡。雖窮僻小民。一見悉記其姓名。公豐貌白晳。少鬚髯。神采曄如也。遇人坦蕩。不設畦畛。至於淑慝枉直之辨。未嘗苟焉。坐此罹禍網。竄身絶塞。晩亦屢遭齮齕。乍起乍跲。不能久安於朝。其交遊盡一時英俊。至論通才偉器。未有以先公者。使公而年。其功業。豈止是哉。嗚呼。文正於公。豈阿私所好。後之人可以考信於文正矣。島山之役。天寒雨雪。提督戒公待于數舍之外。辭以受命義不可離。矢石落前遂不避。公之敵愾危忠。文正揚而特書。眞所謂子雲,堯夫朝暮遇者。而况文正之銘曰。墓之石。我爲銘。無愧色。文正而無愧於公。則公爲元祐,東林之俊厨。孰敢異議焉。公配朴氏。漢城判尹崇元之女。生三男二女。男長曰綸。義禁府經歷。次卽文忠公。次曰紳。平安道觀察使。都事尹仁演,黃裳。二女婿也。側室男曰緬。殉節于甲子之難。公以宣武原從勳。贈議政府左贊成。文忠參靖社勳。加贈公領議政德水府院君。公以文忠爲子。惟我仁宣聖母。以公爲祖。且公之遺風餘烈。至今昭焯于世之耳目。無所竢于表闡。而尙闕節惠之典。識者惜焉。今因公玄孫震煜之托。遂取文正,文忠之文。參互序次。俾請易名于太常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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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집(玄洲集) 윤신지(尹新之)생년1582년(선조 15)몰년1657년(효종 8)자중우(仲又)호현주산인(玄洲散人), 연초재(燕超齋)본관해평(海平)봉호해숭위(海嵩尉)시호문목(文穆)
玄洲集卷之八 / 行狀 / 先君領議政行狀 *尹昉 1563 1640 海平 可晦 稚川 文翼 海昌君
謹按吾尹。系出善山府海平縣。在麗朝。有曰諱君正。金紫光祿大夫司空尙書左僕射。曰萬庇。副知密直司事。曰碩。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謚英毅公。皆盖代元勳也。曰之彪。門下評理。忠簡公。曰珍。門下贊成事。藝文館大提學。文平公。入本朝。有曰諱彰。歷司憲府執義。至通政楊州都護府使。曰達成。陽城縣監。贈慶昌府尹。曰延齡。進武副尉。副尉生諱繼丁。掌苑署。掌苑贈吏曹判書。是爲先君高祖考。曾祖考諱希琳。副司勇贈議政府左贊成。祖考諱忭。文科歷典州府。至軍資監正贈議政府領議政。海澄府院君。有學行才德。宜達而嗇。比世不振於身。識者知其後之必大也。議政公生諱斗壽。議政府領議政。海原府院君。謚
文靖公。
其季根壽。海平府院君。謚文貞公。兄弟竝勳位極人臣。贈祖考三代。
文靖公相我宣祖大王。受命於壬辰危亂之際。恢復三京。再造中興之業。夫人昌原黃氏。京畿觀察使琦之孫。參奉大用之女。端一莊敬。閨門肅穆。是爲先君考妣。有四男。
長曰先君嘉靖癸亥六月二十二日辰時生。公諱昉。字可晦。號稚川。魁偉凝重。資品寬弘。寡言笑。簡交游。年十歲。就外傅。學日進。文靖公器而重之曰。吾兒異日必爲公輔器。一時先生長者。無不以是期之。己卯。隨文靖公于延安府治。溫習經書。質疑于季父文貞公。庚辰。中別試初試。壬午。遂捷司馬試。癸未。拜栗谷先生於花石亭。問疑答難。栗谷大奇之。多所奬勉。是年庭試。居第三名。賜直赴會試。戊子。捷大科。分隷承文院。時文靖按關西。宣廟注意已隆。內賜金帶。付公遆送。公下庭跽捧。北面還授使者曰。宣賜不由政院。不敢私受相傳。文靖聞而喜曰。吾兒處之得矣。己丑。薦入翰苑。爲檢閱。兼春秋館記事官。陞待敎。聲名藉甚。時璿系辨誣會典全書來頒。羣臣請上尊號。公倡曰。此事成於二百年後。固當褒揚歸美。而翰苑只是載筆褒貶之地。至於請上尊號則非職也。遂與同僚不參。朝論是之。是年拜牛溪先生於坡山溪上。讀至孟子夜氣章。多所發明。先生大加嘆賞。以儒者氣象稱之。公自少專心於性理之學。連詣坡山問學。庚寅。薦爲注書。未幾。還翰苑。陞奉敎。時黃允吉,金誠一使日本。上令近臣製別詩以進。公詩優等。賜虎皮。公記事明敏。其時承旨。如漢陰,弼雲公。無不稱賞。陞出六品。除禮曹佐郞。兼知製敎。旋拜司諫院正言。時以幸䆠方俊豪弟。擬於宣傳官。公劾罷兵曹判書李陽元媚悅幸䆠之罪。士論偉之。遆爲典籍。薦入兵曹。爲佐郞。
辛卯。孽臣竊柄。構成士林之禍。戕害一時名賢。
文靖公被謫洪原。
公自是稱病不仕。拜兵刑曹正郞忠淸都事。皆不就。壬辰。倭變猝起。
文靖公首膺召命入城。
翌曉大駕西廵。中路大拜。時公以禮曹正郞。陪駕。移授兵曹。旋拜弘文館修撰,正言。是年五月。奔母夫人喪。自上特命起復。拜修撰。公三上䟽固辭。辭旨懇迫。上猶不許。移拜司憲府持平直講,副校理。薦拜吏曹佐郞。陞授濟用監僉正。移副應敎。皆懇辭不拜命。時倭賊遍滿畿甸。公晝登山。夜潛下。號哭不輟。來守墓下。穿過賊陣。幾死者數矣。而終得脫免。人以爲孝感所致。甲午。終制。拜副應敎。辭遆。移直講司藝。又拜應敎。時論將罪己丑人。欲波及士類。公陳䟽乞遆。又拜應敎。移掌令。皆辭不拜。遆授軍器寺僉正。其後
文靖公爲憸邪所擠。遆相位。公亦辭病不出。乙未。以慶尙道廵按御史。辭朝。擊藩閫之犯法。守宰之貪贓者。還拜軍器寺正。出爲平山府使。未幾罷歸。丙申。除軍資監正。李夢鶴等搆逆。及就捕。推其株累者。公爲問事郞。獄畢。有推官陞秩之例。公有應授之資。未及出者。該吏欲出之。盖爲公一資未准故也。公堅不許。及論賞。公遂以資未准。獨未陞秩。士論多之。其時同僚。有追出資格而陞秩者。私語人曰。吾甚慙於尹某。丁酉。季子新之尙主。是年秋。倭冦再逼京城。上命公陪妃嬪王子女。先往遂安以避兵。公拜䟽辭不往。䟽中有曰。父子君臣。同一死生。是臣願也。弼雲李相恒福。語人曰。此䟽今世罕覯。其眞捨生取義者哉。天兵大軍之南下也。公膺廵按御史之命。督察嶺南兵粮。接濟多賴。戊戌。出爲鐵原府使。治績爲一道最。屢爲方伯御史褒啓。皆賜表裏綺帛。時有抄兵運粮之事。公爲陳時弊。封䟽數萬言。上嘉納之。庚子御史。又褒聞。有曰。律己淸嚴。莅民寬慈。仁聲所及。遠近悅慕。陞秩通政。辛丑。拜同副承旨。召入政院。鐵民追思。立石頌德。仍陞右副。是年。丁
文靖公憂。居于靑坡先人之廬。戚不廢易。
甲辰。以冬至使。朝京師。未還。會盟禮成。陞秩嘉善。襲封海昌君。兼副捴管。乙巳。拜兵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移拜都承旨。丙午。朱梁天使來頒詔。故事王人接待事例。皆出政院。而長官主之。禮貌擧動。詳悉中節。無一毫差爽。詔使亟稱之。特超資憲階。拜漢城府判尹。丁未。辭遆。仍原封。兼知義禁府事都捴管。戊申。拜刑曹判書。時宣祖大王升遐。事多積滯。剖决如流。獄訟稱平。己酉。以謝恩使。又赴京師。數年間連遭行役。略無辭色之見於外者。唯以修擧使事爲心。歸裝蕭然。槖中亦無一卷書冊。一行莫不肅然敬之。庚戌。拜京畿觀察使。時當冉登天使之來。誅求之甚。民力竭盡。公極意籌畫。弊不及民。淸白莅任。關節不到。稱爲近來方面之最。辛亥。任滿將遆。時嶺南方伯缺。內批有曰。此時南方多有措處事。尹某老成諳練。宜爲此任。遂兼都廵察使以送。公每於黜陟之際。惟以至公處之。不饒強禦。時諸柳用事。勢焰燻炙。其族趙光璧。爲畿邑倅。有不治聲。公將用殿。諸柳委來懇乞。公不聽。竟啓黜之。乃以正卿之秩。出按嶺南。其實斥之也。公嚴明廉按。貪墨吏望風解印。修擧學校。崇奬儒雅。衛道尊師。靡所不擧。時朝家方理舟師。而軍數弱少。番次不均。戍士咸苦之。公搜括一道軍。大均節之。更定分番。加設戰艦。關防至今賴之。冬以病辭歸。壬子。兼知春秋館事。纂修宣祖實錄。甲寅。參會盟祭。例陞正憲。乙卯。又朝京謝恩。竣事還。特加崇政階。在京師。有周旋之勞。事成。皆讓與別人。不以爲功。公自連姻王室。痛絶私逕。問獻禮闕。宮中誚公以無姻戚之義。僕隷恥公以恩數不及諸姻。及光海時。姻家七臣。並蹈大禍。公超然獨免。十數年來。權倖當國。濁亂朝政。至是而極矣。貪權爭勢。擯斥賢士。承望之徒。唯以好爵爲急。公知國家將亂。嘆曰。危邦不入。亂邦不居。世受國恩。無可往矣。遂不樂仕宦。屛跡郊舍。絶意榮途。雖儕流間。亦不往來。閉戶端坐。以讀書窮理爲事。戊午。奸孽之徒。倡爲廢母論。勒收百官議。公曰。此豈臣子可容議者。遂以掃墳引告出去。及還。庭請方作。公復命後。卽稱疾不參。乘軒直出。路遇倖宰之赴庭請者。曰公何往耶。公旣不與議。又欲不參庭請乎。公曰。然。事非當理。不得不爾。其人默然而去。人爲公危之。公堅不起。終始不參。遂遭遠竄之論。因以廢錮。郊居待命者四年。怡然處之。若將終身。辛酉。有詔使之行。政院皆新進。不知所爲。大臣建請尹某曾爲都承旨。接待朱梁。周旋禮貌。咸得其宜。召致城中。以備不時顧問。公不得已承命。該曹擬公於西樞。內批還下。盖不許收叙而使之帶罪行公也。癸亥。公在郊舍。杜門不出。聞有反正之擧。來詣闕下。則已有召命矣。時庶事未定。茫無頭緖。奸黨散落。未盡就捕。中外人心。洶惧未寧。上在仁政殿廡下。召公進前。命公爲御營大將。公出坐敦化門。曉諭城中士民。以鎭危疑。人皆按堵。仍陪駕迎王大妃於慶運宮。拜議政府右參贊。兼判義禁府事。議讞之際。務主平恕。多所救活。未一月。有爰立之命。進爲議政府右議政。具兼職。從士望也。仍陞左議政。入侍經筵。首陳人君建極之義。口誦箕疇皇極數百言以奏之。上令儒臣。作圖爲屛。常置座右。以資觀省。後又入侍。屢申前說。上皆動容嘉納。又請早建儲貳。以固人心。上允之。仍令兼世子傅。又請召致隱逸金長生張顯光。仍勸上致力學問。以爲出治之本。一日王大妃下敎于賓廳。數光海罪惡。命奏天朝。將置之極典。公請對陳其不可。上白于東朝。乃得解。光海夫人及廢祬喪。公請遣官治喪。用王子禮葬之。
甞因筵席。備陳故相鄭松江澈被誣狀。
因言士類分朋。互相傾軋。至於
辛卯士禍。則大逞窽言。尤爲士夫之所嗤。
仍及李珥,成渾不容於時輩。遂致師道不明。義理晦塞。以至于今。不可不崇奬儒術。以變士習。上皆傾聽。
秋。廷有征虜之議。至勸上親征。公曰。此言則固好。但兵未習。民未蘇。我之毛羽未成。而爲此大言快心於狼望之北。得無悔乎。况國家新定。人心未固。虛內而事外。恐非謀國之長筭。議猶崢嶸。上命公爲京城守禦大使。簡率幕佐褊裨。開府京中。未久果有逆适之變。其議遂止。甲子。逆适以副元帥擧兵叛。精卒數萬。朝廷遣將討之。官軍皆沒。京師震動。百僚喪魂。無復人色。公與僚相坐禁中。裁决機務。神氣自若。擧止安閑。入見公者。出而語人曰。今見大臣容貌。賊雖豕突。國家終必不亡矣。賊進逼都城。大駕南幸。駕次公州。賊敗報至。時賊魁奔逬。猶未授首。公請曰。都城陷于賊。附賊者衆。人懷疑惧。恐爲亂。及時先入以鎭之。上從之。公單騎馳入。賊徒散落。餘孽洶洶。公只誅其首逆者。其餘幷許自新。得從逆文書。吏民姓名數千人。公不省悉燒之。具聞于朝。由是。反側自安。人心大定。官庫之物。民多偸竊。吏欲栲掠推治。公曰。此輩不意我先至。畏罪莫敢出。爲設一庫。許人昏夜還投。以是。多所得。史庫史冊。亦皆亡失。公卽出米斛。置之街上。償願納者。而不之罪。史冊得無缺。民情亦安。遂出迎大駕於漢水之南。上欲錄扈從功。公言人臣職分。不宜錄。屢請乃止。前後數年間。逆變連起。公務爲鎭服。分其首從。誅其尤而餘悉寬之。尤察橫罹者。如權盼睦長欽等。伸其寃。奏釋之者甚多。尹義立以庶姪從逆。法應坐。公以爲叔姪平日不相睦。奏免。時罪人連累者。一日放出數十人。翌朝盈門來謝。公曰。聖主所察。臣子何與。豈可爲私謝。時李公元翼爲首相。以耆年。長在病告。庶務皆取决於公。無不中窽。李公敬重公。公亦推尊。甚相得。長子履之宰黃驪。境有兩歧麥。人多以爲宜奏。公曰。時和歲豊。是爲上瑞。此時上心如水未波。豈可以一草之異。開人主好異之心。乙丑。建請修廢朝日記。上命公捴裁。收聚野史朝報。參以聞見。是非予奪。一出至公。公見史筆夙該。褒公以碩德弘量等語。公卽持筆抹去之。郞僚咸服公雅量。甞入侍世子會講。文義之間。引喩古今。辨析蘊奧。悉陳正人君子䆠官宮妾親踈之分。德性氣質薰陶變化之幾。惓惓不已。且誦弟子職曲禮等篇以諷之。丙寅。有啓運宮喪。上欲行三年。公與僚相。率百僚伏閤。定爲期服。以綾原君奉祀喪禮之過越者。悉加釐整。士論韙之。時椵島有亂萌。公上箚請嚴防守。以爲先事備。人以爲迂。及後毛帥見誅。督帥袁崇煥題本。有文龍自言。朝鮮文弱。可取而有之。毛之蓄謀於我盖久。人始服公之見。右相申公欽。爲讀卷官。掌試事。㙜諫有試官子弟多參之評。遂不安於位。公請對。盛稱欽操守。力辨其不然。退又上箚伸理。公常留意於尊主庇民。正士習。抑僥倖。恢公道。杜私門。朝家政令。蔚有可觀。旣久居相位。自視憮然。以榮爲惧。引病乞退。非止一再。而上虛心倚重。批辭有曰。以卿耆德重望。不宜辭退。又曰。國家非卿。無以至今日。終不之許。丁卯。虜兵猝犯。邊城相繼陷沒。首相病遆。乃陞公拜領議政。具兼職。公入宿禁中。夜半平黃城潰之報繼至。上幸江都。公與僚相請對。分朝于南服。以收人心。徵諸道兵及三南舟師。會于江都。以爲必守之形。駕次通津。夜聞虜使疾馳趕到。軍情大撓。上意欲留重臣數員。以待虜至。勿令渡江。諸宰皆不欲留。公請自留勾當。上曰。首相不可不與予同往。會虜行差遅。遂渡江。朝廷草創。墻壁是倚。公以忠義激昂。正色朝端。人倚以爲重。虜到平山。送使請和。群議皆以爲彼有請而不許。則危亡立至。不得已姑許覊縻。以緩其兵。和固非公之志也。議和之際。凡係中朝義所不可者。則公輒執不許。虜亦聽遂捲歸。公因登對極陳。居相位致此播越。又不能出奇郤賊。不可仍在相職。語出誠悃。上亦引咎慰諭。遂扈駕還都。時公弟暄。爲平安監司。以城潰。死於非命。公慟在于心。因成疾恙。累辭得遆。授領敦寧府事。又辭遆。以原封在家。戊辰。退居南郊舊舍。國有大事。只獻議而已。時有逃還人刷送之擧。公極言其不可。以爲此事實係人心向背云。而議竟不行。己巳。進西路事宜十數條。因言和虜出於一時緩禍。非久長可恃。宜速自強。無貽後悔。公居閑五年。雖不入朝堂。而上有過擧。輒惓惓不忘。如張維之忤旨出牧。五學士之被罪。皆陳箚力救。辛未秋。又拜領議政。三上箚力辭。不獲命。時有白虹貫日之變。公陳箚乞免。因及修省之語。上答曰。天變至此。良由寡昧無德。以予昏庸。得至今日。無非卿左右之力。罔曰不克。更加旣心。時章陵追崇之議已作。士論。則曰爲人後者爲之子。主追崇者。則曰豈有無禰之國。兩不相詘。上卒從追崇之議。公箚論其不可。請立別廟。以倣東漢古事。上猶歉焉。諸臣爭執不已。上以諸臣譬擬不精。專欲沮抑。上下疑阻。轉輾否隔。遂致雷霆不霽。譴黜相繼。公周旋其間。隨事箚爭。扶植士類。竭力救解。朝著賴以鎭定。上已定追崇。命公爲都監都提調。公上箚曰辭。遂遆代以他相。甲戌。以病辭。呈單。至十餘度。不許。遣承旨。敦諭者再。適有詔使行。力疾而出。秋。有元宗大王入廟之命。公據經援禮。上箚請停。論至三四。竟不允。姜碩期,趙廷虎。以言官忤旨削黜。承旨李德洙下獄將竄。公皆箚爭之。德洙命减配中途。副提學金光炫。論兪伯曾希旨立異之罪。上盛怒。命竄北邊。公上箚力爭。而以大禮未完。上不許。是年冬。公病久未差。上遣承旨。世子遣宮官。問病相屬於途。又命御醫。看病不離。公病亟。陳箚言。金尙憲剛方正直。宜爲大用。擧以自代。又請召還姜碩期金光炫等。辭甚直切。盖尙憲亦以不稱旨。退居有年。雖在君臣未契者。苟知其賢。則推引益力。如此。上優答之。未久。並用其言。辭箚至六。辭單至三十上。而竟不允許。乙亥。館學陳䟽。請以栗谷牛溪從祀文廟。有若干儒生爲異論。排擊先正。亦出於黨論也。遂致上心之疑。乃有疵累之敎。公上箚論辨。及入侍。極言年少醜正之禍。血誠伸辨。上乃悟。其扶正學。衛吾道。多類此。丙子春。虜使至言稱帝。群情憤激。斬使章奏。紛然繼入。虜使聞而跳出。時公在改莎陵所。竣事還。上方會諸臣議事。公進曰。人心如此。和事已絶。邊上防備。難可必恃。虜兵剽疾。宜早入江都。以固保障。不然。悔之無及。上不傾聽。年少輩。欲因此傾軋。遂詆公。公猶不變。於是攻公章䟽入矣。公見言旣不見用。不宜虗帶職名。坐誤國事。遂决意奉身而退。卽引疾請解。凡二十三度。乃得釋負。自是公居閑。不預朝政。而猶不免退憂。每念朝廷挑禍召兵。而不早爲陰雨備。𥚁將不測。夜起彷徨。撫枕不寐。是年冬。虜果大入。烽火不通。渡江三日。先鋒已迫都城。是日。上始命公陪廟社。向江都。以公以原任兼廟社提調也。上亦繼出。欲向江都。虜迫于南門。返馬東狩。蹙入南漢山城。虜遂進兵。城已暈矣。金汗卛大兵繼至。用雲梯大砲。攻城甚急。外援不至。城中力竭。會虜呼言講和。乃遣大臣請成。而虜猶制媾。固要出城。時鶴谷洪公瑞鳳。謂北渚金公瑬曰。古人云。李文靖眞聖人。到此。乃知尹相眞宰相也。當時。若用其言。豈至有今日之危辱哉。吾輩不能贊助其言。豈得無責。北渚公亦大以爲然。聞者皆謂之確論。於是國人相與言曰。凡人置器。尙審安處。况君父乎。敺未敎之卒。入不可守之孤城。以當虎狼百倍之衆。必無幸矣。一言見阻。事竟至此。公之進退。豈非關時運係興喪者耶。時公奉廟社。得達江都。而名雖大臣。實無管任。時有山城有旨。抵檢察留守而不及公名。且曰。軍務防守。專委留守。勿令掣肘云。由是。公之號令。莫有奉行者。公每與數三宰臣。聚首東望。拊膺洒涕而已。公謂諸宰曰。君父受圍孤城。吾輩安得晏然。願與諸公。行文諸道。催督勤王兵。咸曰。諾。卽草檄文。遣朴宗阜于兩西監兵使都副帥。激以忠義。使速進兵。分遣兪榥等于三南。又募送權敬己于椵島。請乘虗擣巢。移置光海于喬桐。虜幸上之未及入江都。詗知防守單弱。陸路運船。夜到津頭。大砲橫江。舟師敗遁。平明。甲串津潰。陸地無軍。更無攔阻之處。頃刻之間。兵薄城外。郞僚俱已遁去。獨有二員留在。公將向廟下。仙源金公尙容。握手與別。公曰。事至於此。唯有一死而已。仙源公曰。我以老病來此。無所責任。死亦可矣。公與我異。旣有廟社之命。義不可委棄輕死。遂分手而去。公上後園望見城外。處處高丘。虜已先據。事無可爲者。公自念受任。只在保護廟社。遂與二郞。還伏于廟下。以爲同爲灰燼之計。日晩有訪公來者曰。兩大君要公來會議事。公卽往會。禮曹參判呂爾徵。承旨韓興一。在座。大君泣曰。事勢至此。無計可施。適彼使來請講和。已令韓承旨往見陣中。則彼要見大官云。山城朝暮且陷。屢送大臣請成。而彼不許。固要王世子。上不忍焉。今吾與公出見。則山城或有解圍之望。因此少紓君父之急。所不辭也。公曰。山城大臣。旣有往來之例。彼又以講和爲名。試往見之。如有他變。一死非晩。卽與韓興一。先往。公坐肩輿。直入陣中。陣門軍卒。呵叱而執之。公徐曰。吾老病將死。不畏死矣。直到虜王子在處。下輿。使兩奴扶腋。頹然欹坐。譯者仲男呵責曰。胡不拜。再三迫促。公引頸請劒。辭氣俱厲。甲士環立。無不瞋目按劒。公終不動。胡王熟視公。公神觀弘偉。白鬚下腹。卽問曰。老宰相。年幾何矣。公謬曰。我年八十餘歲。胡王遽止呵者曰。罷罷。觀其辭色。則盖知公之不可屈。見公之老。而恐其死也。仍言大君在此。可相見乎。公歸報大君。大君已鞴馬而待。公又與呂爾徵,韓興一,懷恩君德仁。俱從焉。公乘肩輿。入而不拜。又如前之爲。而陣中已知公。皆不更詰。俄而虜令軍中曰。和事已成。分城左右。我軍在東。鮮人在西。毋相侵殺。自是之後。城中得免魚肉。城外被擄者。亦許還放。過一日。請大君一行。出向山城。公默念廟社旣無奉行之勢。决不可捨置先去。仍稱老病不任登途。大君泣請公曰。肅寧一位。吾當奉行。而奉行無計。願與廟主。終始共之。公從之。是日。蒙兵繼入作亂。廟貌顚倒。公以死相抗。如是者數矣。其夜公掘爲累坎。埋瘞廟主。以防延爇之虞。翌日。蒙兵放火。廟庭灰燼。而廟主得全。於是。公始得爲陪出計。掘坎收合四十餘位。分入布帒。使家奴負載渡江後。得虜馬載行。雜出於被擄男婦中。途聞南漢已有下城之擧。王世子仍作北行。公瞻望痛哭。欲及謁於未發前。使二郞奉廟主。追來。公自金浦。先馳拜謁東宮於炭川邊。因達廟主得脫狀。世子喜甚慰諭。遂分所進羹飯饋公。軫公之饑也。俄而廟主。亦追至炭川。乃命宮官曺文秀。偕奉入京。上亦喜極而悲。卽引公入勞公。因命陞拜二郞職。噫。丙子之亂。載籍所無。公能逆見未來之禍。若合符契。而公旣見擠於年少躁進之輩。不免卷而退藏。遂致危辱南漢。淪陷江都。國之不滅幸耳。天乎人乎。及夫事去之後。公之處變全節。無愧古人。而憸邪險詖之徒。必欲乘時陷公。逞其私忿。吁痛矣。丁丑春。以廟主一位有缺。論罷。公出在江上。有凶人陰嗾鄕産。投䟽攻公。公箚列請罪。上批。有曰。金宗一之言。上下皆知其無倫。卿勿介懷。須速入來。戊寅。上命叙公拜領中樞。公又上箚引咎乞骸。上答曰。上年不用卿言。以至於此。深自悔恨而無及。卿之無罪。予已洞燭。卿須勿爲辭退計。終始共戚。年少無倫之言。亦勿介意。上批懇懃。頗有悔悟眷注之意。凶人遂疑公復起柄用。宣言公當復入相。更起而圖公。乃以江都失守歸之公。一則曰軍敗不死。一則曰不及出避。一則曰拜屈敵陣。欲以搆捏成罪。是豈一毫近似於公者耶。公旣無體察之命。又無城守之責。大臣之道。國亡與亡。國存與存。當其時。國猶不亡。君父尙存。廟社得脫。公無當死之義矣。公豈可不思受任。而徑取溝瀆之行。委棄廟社。莫之恤哉。未潰之前。預爲出避計。則人心先潰。罪必歸公。旣潰之後。則勢已無及。公若不善處變。蒼黃奉出。則未及船所。爲敵追躪必矣。廟社嬪宮。擧有不忍言者。議者必欲如是而後。快於心者。何也。丙丁之亂。不拜於虜者。唯公一人。此則同行諸公所共目覩。終不可誣者。上批。有曰。大臣與庶官不同。設有所論。語宜的當。而措語幾盡過誤。罪目太半不實。以予揆之。似非公言。又曰。尹某淸德過人。立節昏朝。亦非人人所可爲者。親往敵陣。實出於爲國解紛。其時若不如是處變。則嬪宮以下。俱不免不測之禍。寧不慘惻。爾等所論。殊甚不當。勿更煩瀆。前後論公罪目。擧皆失實。一二啓後。旋卽刪去。終無可言之罪。則追做跨人裹物破襪弊褌等說。以動上心。而不覺自陷於褻瀆廟社。欺天欺人。自古搆虛陷人之計。未有若是之巧且慘者。上下問于政院曰。跨人之說。諸承旨亦聞之耶。承旨以俱未聞對。上又招問其時侍衛人員。則對以實明其不然。言者計窮。又以爲宮官皆所目覩。至擧東宮爲證。上曰。他日問於東宮。則不難知也。姑先招問其時宮官曺文秀,徐祥履等。俱言未有覩。上乃覺其搆誣狀。特命罷兪伯曾職。以治誣陷大臣之罪。因敎于政院曰。兪伯曾大張氣焰。少不詳愼。今若容之。後必無忌矣。先是。伯曾張甚多噬人。人皆側目而事之。公之孫墀。僚席論事之際。不能俯仰。伯曾以爲簡己也。因而重忤。被其中傷。而墀終不廢。其人愈怒。至是遂延及父祖。大肆網打。公之孫坵。曾在諫職。論一贓吏。其子嚴鼎耉。叨據㙜閣。亦欲合勢報復。乃敢不議於長官。傳啓之際。暗添數欵緊語。爲僚員所覺。引避。副提學李景奭等。箚遆鼎耉職。凡兩司合啓。則玉堂進箚請允者。古例也。李景奭以爲兪伯曾論劾大臣。不通議於三司。自其家搆草猝發。非共公之議也。經年合啓。而玉堂終不進箚。可見一線公論。猶不泯絶也。初伯曾之投䟽也。適有大臣引對。上曰。伯曾之䟽。自以爲戇直。而亦有私意矣。慶徵,自點。同一罪也。而自點其族也。不言其罪。尹墀與洪柱一之救慶徵。輕重亦殊。而只言尹墀。不擧柱一。此皆私意也。尹相初非體察使。安可斬慶徵乎。以不斬慶徵。屈膝虜庭。爲罪。此皆過矣。諸大臣對曰。聖敎當矣。尹某以原任斬檢察乎。拜屈之言。專是失實處也。上曰。予亦知尹相之不拜狀矣。由是觀之。天日之明。無微不燭矣。先時。權濤曾爲憲官。受富商金。欲以公賤爲私賤。枉法護訟。論劾訟官。上命入該掌文案。悉燭情狀。乃下嚴旨。坐廢四年。不肖新之。時爲賓府有司待罪。啓辭。有曰。淸朝憲官。豈有是事。濤心銜之。後濤又論事。將下獄。公陳箚救解。上批曰。濤罪犯甚重。而當爲卿勿鞫。有一名官坐其父累。見阻於玉堂錄。公之孫時在本館。爲言於公曰。僚議甚峻。力不能解。公曰。騂角不捨。何用阻人。遂於都堂錄。得公之圈。乃入玉堂。人有言一名官戕害同氣狀。公曰。過在其母。此人有文才。何可防人之路。據此數事。亦可見公之無偏無黨。隱惡揚善之德矣。至於一㙜官之爲私賤所産者。則雖發於本主之立訟云。而初非公家子弟所預聞者。謀事者轉輾推諉。要爲同仇之計。其人終不覺也。及是時。此輩並起而攻公。若報其讐者然。遂晨夜經營。陷公父子於一網。勢如燎原之火。人畏其焰。雖知其非。莫敢有崖異於其間者。司諫金汝鈺引避立異。有曰。家國不吊。一敗塗地。今日臣民。其孰無罪。南漢江都。事勢雖殊。畢竟名分俱未得全。則區別彼此。一向攻擊。其於共濟之道。不宜如是。尹某年臨大耋。身在原任。敵兵飛渡。一島魚肉。目見廟社嬪宮吾君二子。一瞬息間禍將罔測。須臾不死。少紓目前之禍。處變形勢。不得不爾。臣之所見。不能無疑。雖欲從他俯仰。獨不愧於心乎。遂被其黨擊去。大司憲徐景雨引避。有曰。尹某合啓罪目。始則甚多。而繼以失實。削之又削。到今餘存無幾。傍觀者。亦笑之。以此論執。安得取信於君父。持平沈大孚。極欲添入罪目。辭甚懇切。實非偶發。臣心甚疑之。及見大孚避辭。則欲使人人。靡然從一種議。而不敢出一言崖異。臣於此。尤不能無疑於大孚也。正言成楚客引避而遆。梁曼容知其謀引去。並被論斥。都憲李顯英。諫長崔惠吉,李景曾。執義李尙馨。正言申翊全,鄭泰齊。俱有立異之語。而亦不能盡其辭。其懦弱者。雖心知不然。恐惧重爵祿。從而首鼠者。亦多矣。至於平日被公奬育推引者。亦有承望時議。甘心反噬。而自以爲得計。公怡然不以介意。盧峻命始登第。頻數來謁。公厚遇之。一日峻命曰。小人爲正郞妻族。而未蒙剪拂。倘荷一言之助。則不敢忘德。時公之孫。方在銓郞故也。諸兒在壁後。竊聽而笑。公曰。鄕人質勝。不隱其情。他日公笑謂其孫曰。汝妻族盧某。豈不合淸選耶。胡不收拾。對曰。已因儕流聞之數矣。顯官豈可求而得者乎。其庸可知也。卒不引進。峻命甚恨之。至是約以立功。始得通顯。拜諫職。明日。竭力詬公。有敵兵非仇。尹某爲讐等語。文不續理。語不成倫。都人傳笑。上命遆其職。因敎曰。如此愚妄之人。何人引進爲㙜諫乎。公屢經罷削。旋卽收叙。其徒忿其計不售。怏怏不已。先是。李昌庭奉職有才。公與之親厚。屢薦引用。昌庭之子禬。黨於險詖之徒。其徒誘之曰。宮官俱對以未覩。上疑我輩矣。君能以目覩立證。則銓郞可賭。且有功。禬心然之。遂攘臂擔當。乃以目覩自證。於是。其徒羣起而益力。上不得不從。命配中途。禬之妻父來見公曰。吾婿迫於人爲此擧。非其志也云。公平生虛心接物。物我無間。以德化人。恥言人過。寧人負我。無我負人。望公之容者。雖怨敵。莫不悅服而敬慕。識與不識。咸稱公爲厚德君子。雖以曩時權奸。擅國戕賢。猶不敢爲害公計。而及至今日。乃爲此輩所齮齕。怨毒之於人。甚矣哉。公常曰。我年迫八十。位極人臣。子孫弟姪。並顯於朝。盛滿極矣。遭値國家虞危。未早引去。人之媢嫉。有不足恠。己卯六月。公輿疾。發向延安。其年秋。旋赦歸田里。冬。鶴谷洪相上箚。言公非罪。盛稱公先見之明。國事之至此者。權輿於不用其言。當時未能贊助之罪。臣等實當之。請褒酬曲突之謨。俾不在燋額之下。上允之。適會東宮回轅。入京數日。上命叙公。復拜領中樞。人皆知上詗得其時搆誣事情而有是命也。公之有功無罪。聖明在上。非不洞悉。而捏造者托於廟社。爲之穽而操上焉。有識無不駭嘆。此豈足爲朝廷論議乎。不過爲行謀狙擊之擧耳。浮雲過太空。不免暫時之蔽。及至雲散氛消。白日重明。公之事迹。昭雪無餘。一時恠鬼之呶呶。何損於公。公素有嘔病。是年夏傷暑。不能食。秋病谻。上遣內醫。賫藥來救。承旨將命問疾。公倩人扶起。草一䟽封進。其略曰。臣今永辭聖明。不勝戀結。願聖明。親賢遠小。辨別無忒。選用循良。懷保民生。累數十言。終之以勿輕挑強國。再取危亡之辱。勿忽遠天朝。以貽後日之虞。上答曰。省卿䟽辭。深感至意。所陳之言。無非至論。予當自勉。卿須善爲調理。以見勿藥之喜。公臨終。精神不錯。意思安靜。聞近臣傳批命。取衣冠。覆于身上。伏以承受。竟無一言及家事。索紙筆。書樂天知命乘化歸盡八字。筆力動盪。無異平日。遂翛然就寢而逝。庚辰八月初八日也。享年七十八。訃聞。上震悼。罷朝市三日。賻有加。官庇喪葬。遣中使承旨吊孤。中殿亦遣中使致吊。九月。上遣禮官賜祭。以其年十一月初七日。葬于長湍梧陰里先壠之內亥山壬坐之原。遷夫人兆。同日合葬焉。公天資宏厚。度量寬大。與物無競。薄責於人。隱人之惡。而揚人之善。平居。但有一團和氣。與物同春。及莅官臨事。乃更毅然堅確。守法不撓。以至死生榮辱之分。尤恬然不動也。雖家人子弟。未嘗見公有喜怒之節。非惟不形於色。亦自不萌于中。盖其天性然也。事親孝。在文靖公側。叱咜之聲。未甞至於犬馬。尤以養志述事爲先。
文靖甞居喪病劇。公藥必先嘗。衣不解帶者幾一年。
所愛諸弟。如手足。時或罷散。則分俸以給。季弟之死。軫念孤寡。四時祭需。輸助無闕。事季父文貞公。如事親。文貞亦甚重公。公不喜宴樂。而以文貞之年垂八袠也。累爲之設宴以壽。畢會其子孫。娛悅其意。遇庶弟妹。撫恤備至。以至內外親屬。莫不以恩信相接。俱得歡心。性不好奢靡。恬靜澹泊。無所係戀。無所嗜好。食不重味。衣不華盛。文房几硯之屬。亦不留意。晩年。書籍分與子弟。不留一卷。惟靜坐收心。得失兩忘。及爲相。家徒四壁。生計蕭然。公沒之日。衣衾棺櫬。悉出於子弟親戚之助。而未有廩庫之餘。公可謂不負國矣。其在廟堂。持大體。不親細務。人或咎公。公笑曰。吾無寸長。但取人爲善。只此一事。稍有所長。古之大臣。視人有技。若己有之。果能不自用而取諸人。則人之萬善。皆我之有。何自苦爲也。其所尉薦於上前者。如張維,沈悅,李植,趙翼,李敬輿,李敏求諸人。各以其才。褒請陞擢者甚多。及他軍國機務之圖。議于上前者。皆不以語人。亦不以語子弟。是以多不著。人或疑公無所建白。公曰。固也。興一利。不如除一害。公爲相前後十年。以風裁自持。淸節自勵。讓功於英衛。歸直於王魏。無事可徵。無迹可尋。而自有喬嶽大川之德澤入人之深也。公之去國。街巷小民。相與咨嗟。有嘆時之語。及公之還朝。又相與有加額之喜。其卒也。又相與涕出曰。賢相亡矣。奔走告語。如悲親戚。孰使之然哉。是豈人力之所能爲者乎。公爲文章。不起草。運意流出。不事雕餙。自無塵俗語。蒼然奇古。作者皆以爲不可及。有詩文十數卷。及癸亥以後。䟽箚三卷。藏于家。而都沒於丙子兵火。將不得傳後。慟矣慟矣。公自中年以後。常有退休之志。得一溪壑於流岩山下。卽公之號。謂稚川者也。愛其泉石。每以匹馬來往。嘯咏其間。及至癸亥。乃有曠世遭逢。仍値國家多故。未能便訣者。十有八年矣。以未遂初心。爲終身之恨焉。夫人淸州韓氏。淸原尉景祿之孫。判官漪之女。有貞正之德。先公三十八年卒。屢贈至貞敬夫人。有二男。長曰履之。文科。兵曹參判。娶參判金尙寯女。季曰新之。海嵩尉。尙宣祖大王第二女。孫男十人。女一人。坦。溫陽郡守。娶大司憲洪霶女。堈。掌隷院司評。娶判書韓汝溭女。埴。司果。娶僉知申萱女。堣。河陽縣監。娵知事元裕男女。坫。司憲府監察。娵監察朴宗男女。再娶縣監金海壽女。塏。水運判官。娵縣令金仁龍女。城。進士。娶縣監沈慣女。㙉。幼學。娶生員具仁榮女。女適宋時吉。文科。承旨。爲長出。墀。文科。司憲府大司憲。娶參判洪命元女。坵。文科。吏曹正郞。娶判府事金藎國女。爲季出。庶孫男三。曰塾。餘幼。亦長出。曾玄孫男女。幷四十餘人。世喬,世休,世老。女適李慶徽。爲坦出。世昌。女趙龜錫。爲堈出。世輔,世鳴,世豪。女金天錫。爲埴出。世美。爲堣出。世長,世揆,世獻。爲坫出。世馨,世胄。爲塏出。世翼。女黃輝。爲城出。墀有一女。適金益兼。有庶出。曰世蕃。宋時吉。四男三女。男曰摶,拯。餘幼。女朴世相,朴世城。李慶徽三男。金天錫三女。金益兼二男。世美一男一女。摶一男。朴世相一女。皆幼。是爲公玄孫也。公之三弟知中樞府事昕。判書暉。監司暄。並顯一世。孤哀等無狀不類。叩叫靡及。纍然衰絰。餘喘未滅。而年踰六十。死亡無日。惧無以白先人事迹。昭示後來。抑哀摭實。略具家狀。毫髮不敢有所增損。而荒迷昏塞。遺落尙多。罪無所逃。抆血再拜。敢托于立言君子。謹請墓道文字。伏惟鑑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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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簡易集) 최립(崔岦)생년1539년(중종 34)몰년1612년(광해군 4)자입지(立之)호동고(東皐), 간이당(簡易堂)본관통천(通川)
簡易文集卷之九 / 稀年錄 / 議政府領議政具兼職海原府院君尹公神道碑銘 幷序 *尹斗壽 1533 1601 海平 子仰 梧陰 文靖 海原府院君
오음유고(梧陰遺稿) 윤두수(尹斗壽)생년1533년(중종 28)몰년1601년(선조 34)자자앙(子仰)호오음(梧陰)본관해평(海平)시호문정(文靖)
我上之二十六年。駕次開城。比至于義州。明年還都。其相曰尹公。後十年。公以故相卒。蓋幽墟之誌。公弟府院公以老匠當之。敍次事甚備。而諸孤謂岦受知於公特深。屬以隧碑之刻。岦讓不敢當。旣三年。且千里書愈至。則剟取大槪而復焉。謹按尹爲姓出善山府之海平縣。在麗朝有曰君正。守司空尙書左僕射。曰萬庇。副知密直司事。曰碩。都僉議右政丞。諡英毅公。皆蓋代元勳也。曰之彪。門下評理忠簡公。曰珍重。門下贊成事藝文大提學文平公。入本朝曰彰。歷司憲府執義。至通政楊州都護府使。曰達成。陽城縣監。贈慶昌府尹。而公之高祖考諱延齡。進武副尉。曾祖考諱繼丁。掌苑。祖考諱希琳。忠武副司勇。比世益不振。曁考諱忭。文科。歷典州府。至軍資監正。則有學有德。宜達而窒。識者以卜其後之必大也。厥有再室。後夫人星州玄氏。副司直允明之女。實生公兄弟。竝勳位極人臣。得贈考領議政府院君。祖考左贊成。曾祖考吏曹判書。夫人皆視貴。公之生以嘉靖癸巳九月初吉。于時有流星入文昌之異云。公諱 斗壽。 字 子仰。 少凝重如成人。寡言笑。及其穎發。英氣可掇。贈議政公愛不廢敎。課學有法。公亦不待勸。業日進。年十七而孤。弱冠則成大儒。優四學輪製。直赴乙卯生員試。中第一名。又魁庭試諸生。直赴戊午會圍。遂中龍榜乙科。時相李公浚慶。於公族叔也。進而奬之曰。他日必爲公輔之器。同榜奇高峯大升亦常以大人氣象許之。分隸承文院。由權知薦補藝文館。由檢閱錄入弘文館。歷正字,著作。陞副修撰,正言。未幾復出入正言,修撰。薦拜吏曹佐郞。時李樑張甚。强以其子干郞薦。公堅不可。是以速癸亥之訌。名流五人。同日獲罪。公亦削職。屛居坡州。俄而樑敗。則敍復修撰。陞吏曹正郞。轉檢詳。陞舍人。拜掌令。遞爲成均館直講。復來去掌令,司成。遷司僕寺正。乙丑文定王后之喪。以副應敎幹殯殿都廳。竣事陞秩通政。用西批兼五衛將。拜同副承旨。進右副左副。丁卯。恭憲王大漸。公以右承旨在院中。手書宋朝文彦博入宿禁中故事。抵李首相浚慶。李卽來宿直廬。是夜受顧命。上方無嗣有嗣。危疑定於頃刻。天朝使許國,魏時亮頒穆宗登極詔至。吉凶禮交。事非豫講。公適分務周旋得宜。旣而拜大司諫。今上初政。首長言地。非例拜也。戊辰詔使成憲王璽之至。以吏曹參議。充都司迎慰使還。由左承旨遞拜大司成。復拜大司諫。遞歷僉樞判決事,兵曹參知,參議。拜守黃海觀察使。政惟寬簡。治絶近軌。未期聞母夫人疾解歸。復由僉樞拜大司成。則作成有效。歷工,刑,戶三曹參議。復拜大諫。遞歷大成。丁丑。以大成謝恩大朝。兼齎祖宗受誣文書。至則辭誠兩盡。頗得辯明。還拜都承旨。戊寅。陞秩嘉善。時有姨弟李銖獄事。言者落公兄弟嫌疑中坐罷。金大諫繼輝特啓。二人學行才器竝著。且士類進退非輕。不得以晻昧事累人。有識是之。然公自後不安在內。固求外便養。除羅州牧使。以親老任三百里外。准法不赴。已而得延安府使。廷辭。上引見慰諭。暫煩治民。公感涕而退。奉母夫人備極甘旨之養。惟知上恩。無幾微在外色。庚辰辛巳之饑。極意賑活。遠近流民就食。日可千計。御史以聞。特賜綺纈表裏嘉之。時設宴以養老。里置學以訓蒙。四境鼓舞。建平遠堂。公餘輒處其中。以湖山詩酒自娛。會公弟居守松京。往來便近。良辰吉日。魚組聯翩。稱觴上壽。一首稱爲盛事。任滿。以同樞還朝。歷漢城左尹,五衛副摠管,刑曹參判。甲申。由兵參哭大夫人。戚易中節。廬於靑坡先人之園三年。未嘗一到家。丁亥。公除復同樞摠管。倭犯全羅道。殺邊吏。人心恟懼。用時議拜公觀察使以鎭之。嚴明爲政。案無留牘。復歷同樞,刑參。拜平安道觀察使。西塞亦有建州酋聲息。公策應綽然。防戍之卒。四番相代。不勝其數。日就流亡。公頗損營屬。且括閑丁。增額若干。而六其番以紓之。沿江民舊不識種木綿。公爲具種敎之藝。至于今稱賴。以病露章乞休。上特遣名醫齎藥診視。且諭有曰。卿有才智。雖老酋來。自可談笑處之。不足動我一髮。凡累數十言。庚寅。錄先後辯誣有功朝臣爲光國勳。公居二等。封海原君。陞秩資憲。拜刑曹判書。移拜大司憲同知經筵。復由知樞拜大憲。時倭酋秀吉使以書契來。言極兇悖。至云必犯上國。事留中甚祕。會朝講。日侍講諸臣將退。上曰。倭書事欲與大臣及備邊宰密議處之。都憲有計慮。雖非當與。可毋退。議臣皆言此不必奏聞。公獨請據事具奏。臣之於君。直當如此。他不暇計。旁引經義確甚。上竟從公請。改拜戶判。十數年來。朝著多貳。是非迭起。其旣甚也。如恐加罪之無辭。雖以公之重望。
不免辛卯之詬。然亦尤見憚故也。初惟論罷。展轉益深。至於遠竄。配會寧。特命改。中道配洪原。居無何。陳奏使還。皇上嘉我奏悉倭情。勑書褒美。上念公首先請奏。卽日賜環。復有言者。量移海州。
時有浙江人擄在倭中。密報中朝。至有倭與朝鮮連謀之語。向非陳奏。則我國之情。何以暴白。人皆服公先見。
壬辰。倭寇大入。上思公特召之。日再三問其至。至則復。原封。翌日上西幸議業定。公惟陪駕到東坡館。召公前敦諭。公兄弟可勿離予。死生勿負。因解佩囊賜之。到開城。衆志崩潰。一夜四五驚。上命公爲御營大將。號令統攝。始克定。俄拜大匡輔國崇祿右議政。具兼職。仍海原開府院。公旣拜。請上御南大門撫父老。近侍遍傳城中。下罪已書于八道。遣使召集義兵。卽舊都甄用人才。此其設施之首事也。公聞夫人自畿邑將從公行。則曰我以此時大臣。何得家累相隨。使止之。到寶山站。問廟社主至。則禮官已於倉皇中瘞于穆淸殿。公愕然啓遣禮官等載而追及。旣而賊入開城。掘發無所不至云。到平壤。進拜左議政。益以世子傅。軍國諸務。規畫措置。悉中機宜。無少底滯。一日。議遣大臣經紀浿南。咸欲以公啓。金判書應南耳語李參判恒福。以爲尹相去此。大事瓦解。遂啓他相。公以夫人服在私舍。則文牒塡委。諸相殊不能辦。遣郞請公。日昊乃詣。裁處便空。李判書誠中歎曰。人之才智。相去如是哉。凡遇一事。諸宰各執所見。爭辯譁然。獨公在座時。則一稟過而已。諸相所急。不越目前。而公必規爲久長曰。若夫成敗。天也。建請今年八道稅入。一依上年踏驗之數。歲亦果大稔。翌年接濟天兵。賴以無闕。若西路調兵撥糧之事。皆由公素籌記在胸中者。輒如取一家物而用之。同事者歎服。又行文州縣。卽賊來迫。毋得妄焚燬倉厫。只得散給百姓。以備收糴。如 黃州 中和官吏。尤奉公令。及天將至。非唯無罪。以能見稱。大小從臣。控疏顧親者相屬。聖孝錫類。有請則許。行朝體貌。日加寒心。公啓引臣子惟所在致死之義。自後的聞父母變故者外。不聽私便。以存大防。賊益西逼。議者咸欲棄平壤。公極言平壤地形物力可必守。離此一步。國事決矣。然旣不可止。而咸言咸興可徃。上亦意嚮之。公又極言以堅城則寧邊優於咸興。可往守。猶且事危則趣義州。赴訴天朝有便。且北方人心獰甚。非可保之地。言咸興者猶盛。公以死爭之。卒之之上不幸咸興者。公力也。其後咸興爲賊所陷。兩王子在會寧。土人縛致之賊。人始大驚信公見。上之出平壤也。留公以守。則治城繕械。頗有條理。夜抄精銳斫賊營。晝鳴金鼓設疑兵。爲必守之計。而江灘失戒。賊勢直衝。城旣不可守。則遣將結陣於城外。踰出人士。以全一城之命。公亦追及行在於宣川。而已有急詣之召矣。到義州則吾東地圖窮處。國脈不絶如綫。公獨以忠義精誠。激昂奮厲。正色朝端。屹如山岳。雖極顚沛之中。人望之有所恃焉。是時渡遼之議已成。公竭力救止。一日至五啓。有曰。宗社臣民。擧將誰托。而輕爲匹夫之行乎。及夫力請天兵。殺退平壤之賊。以啓再造之業。皆公隻手障決。而後得爲之事。而心禱理必。可質神明者。則了了於其前矣。然公之此功此志。非管樂以下人所能揣知也。上以公大臣獨勞。欲官其子壻。而子皆持母服。且無壻。獨長子昉。因金革起復。故命超資陞敍。繼有絮衾之賜。軫公蒙霜露也。癸巳。賊之據京城者。望天兵潰而南。然京城惟丘墟。人心亦不甚保。上下未有前進意。公極陳不可。奉駕東轅。由海州還都。公之相行在也。其心所賢如成公渾。則不以君臣未契。而推引不力。以爲將才如權公慄。則起守宰致元帥。而果收偉績。其他除拜。一惟其人。雖復情義相阻。處之形要。寧人負我而不顧悔。此特擧其大者然耳。無愧古人以人事君。先國家之急。列劾宰侍臺史棄君忘義之罪。而言議之間。務主平恕。不至已甚。面規僚屬崎路從違之謬。而異日救免。見論以逋播峻折。一宰因民詿誤。發所不敢道之言。而旋復揜藏。亦不以語子弟。綱紀以肅。人且得全。李相恒福爲都憲時。言事語侵公。公後與同事首尾十年。無一毫形於辭色。李公退謂人曰。吾爲尹公所包容久矣。倡義使金千鎰頓兵江華。伏義將禹性傳尤無見效。俱以病不赴西徵。上有嚴峻之敎。公啓言千鎰起義最先。使八道人心翕然大回。特兵寡無助。不能有爲。性傳多病。國人所知。責以觀望。大不近情。聞者允公之論。晉州之陷。城中人士數萬。公請褒贈金千鎰崔慶會等及賜吊祭。遍慰義魂。蓋上欲有所待。而固請行之。中外稱快。天兵將史遊擊儒戰歿平壤。軍中橫詆鮮兵有力。公馳見楊總兵紹勳於遼左。則言下痛辯。李提督如松回軍遽爾。公赶見於劍水站。苦辭請柬。淚隨言發。則爲之動色。遂有泣閣老之稱。自京承命往見劉總兵綎於嶺南。亦機關呼吸。還則稱旨。引見從容。因言回鑾之後。連有三省之鞠。京城久陷賊中之人。豈無自疑之心乎。恐非所以鎭靜。上曰。固是。但詞涉陵寢。不得不爾。然獄竟開釋。上以黃海道無節度使人。命議設置。公執言祖宗朝旣設而罷。誠以本道民力不堪貳營。上猶屢下其議。後至必設。然終不由公。至今果稱巨弊。公久被親用。議無不與。未嘗屈意順旨。此類爲多。而亦未嘗不行者。皆不著。歲比饑饉。畿輔尤患缺種。公募收兩湖之粟以聞。運致京江。根本大賴。又以帝勑中擧公名。俾同光海君諱幹事。卽陪世子南下。甲午。仍扈世子加三道都體察使之命。以莅湖南。時賊空言捲歸。久屯瀕海。天兵又歛不肯出。物力剝盡。無復可繼之勢。公大會諸將。以義激勸。合左右舟師。擊巨濟之賊。陳箚于朝。有曰。勝則皇天祚宋。不勝。猶當有辭于祖宗。聞者至比之出師表。乃有傾陷之言。以爲取敗。撼公相位而後已。其實兵未嘗衄也。乙未。以行判樞府。承命扈衛中殿于海州。戊戌。復拜左議政。爲時所忌如故。不能安其位。己亥。拜領議政。具兼職及世子師。論者起而又甚。上竟不允。至曰。老成有才。可首相。他人不如。公遂力辭得遞。輒仍勳爵。與聞大事。自此益無意於世。嘗曰。吾年迫七十。諸子皆官于朝。盛滿極矣。理難更久。不去何爲。南坡小築成。蓋有終焉之計。公素患嘔證。辛丑四月。有詣闕問安。連日觸風。證復作。一兩日病谻。以初七日不起。春秋六十有九。臨終。諸子泣請所欲言。則無一語及家事。諄諄如夢中語。惟是國事。計聞。上震悼。輟朝三曰。賻贈有加。遣禮官弔若祭。官庀襄事。七大夫銜哀相弔。以至街巷亦皆齋咨言曰。賢相亡矣。夫人昌原黃氏。穆淸殿參奉大用之女。京畿觀察使琦之孫。刑曹判書鄭百朋之外孫。累封至貞敬夫人。先公十年卒。而葬掩訖。實公卒之年六月四日。兆在長湍府梧陰里。先議政公塋域之側。公嘗自號梧陰。其謂是乎。公有丈夫子四。昉。左副承旨。娶尙衣院判官韓琦女。晹。副應敎。前後娶室陽原都正譓女。副提學辛應時女。暉。前左副承旨。娶任實縣監李耆命女。暄。吏曹佐郞。娶大司憲沈義謙女。側室子旰。守門將。娶副率李鎭女。女三。長適訓鍊主簿李岫。次適申涵。季幼。諸孫二十人。履之。副率。娶公州牧使金尙儁女。新之。海嵩尉。尙貞惠翁主。爲伯子出。就之。娶司果李元春女。爲仲子出。其餘幼。公之天與宏量。才猷絶人。固已斑斑見於事功之間。以學言則嘗聞大意於聽松成先生守琛。亦頗質疑於李履素齋仲虎。非苟問科慕名之爲。而於書若嗜欲然。不以旣仕而廢。晩又喜朱子綱目。手一卷或至夜分。通卒業者累遍。蓋將以措諸事業。故其作爲隱然皆稽古之力。以家行言則事大夫人篤至。常得其懽悅。與晜弟極友愛。弟亦旣貴。而亂後無居舍。卽以家貲買與之。平朝必櫛頮冠帶。終日儼然。人未見其惰容。諸子有過。不加質責。惟使知其失而改之。其於課業。亦不甚規規切切。而優游開發。雋異相望。畢登大科。一家習見。不知其榮幸。公在延安。著延安志。於平安著平壤志箕子志。又嘗合文文山,鄭圃隱事行爲一書。名曰成仁錄。裒集我朝名賢行狀碑誌爲一帙。以便考閱。若亂後忠臣孝子名姓實狀。以備散逸。又類取中朝及我朝璿系紀年。官制都邑。貢賦節式。通爲一冊。及所著詩文若干卷藏于家。岦。下流也。瞻仰公於廟朝之上蓋少。而獨屢造私第。且嘗從使遠行。竊瞯而得之。閒居一團春和。言笑怡怡。孺子可狎。至大故談論。聲氣疏亮。色莊而不可犯。平生服用隨分。無意奢儉。尤恥示人以布被之行。唯遇賞心淸致處。不過美酒一尊。佐以山野之味。如飣餖稍盛則不樂。其天機多也如此。誠一世之偉人。今旣九原。安可復作也哉。公弟海平府院君名 根。壽 銘曰。
天生碩輔。必利其器。于我尹公。宜考終始。荐登科第。率以拔萃。歷揚華顯。壹維自致。量優容裁。非苟唯唯。確斯爲節。硜硜未爾。學曷達務。早聞大意。蓍龜先識。稽古之以。茂著當時。亦公細事。濟于艱難。乃公盡試。機籌狼藉。衆目盱睢。不動聲色。指麾中宜。渡遼議合。一髮其危。五廟百姓。擧將委誰。回日虞淵。洗光咸池。偉哉此業。公實辦之。俄不安位。忌者故焉。吾君不與。何況乎天。百世在後。一時在前。餘慶足徵。纓組綿綿。載文斯石。槪詳旣次。系詞揄揚。疇曰溢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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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再三問其至。至則復。原封。->日再三問其至。至則復原封。
*庚寅。錄先後辯誣有功朝臣爲光國勳。公居二等。封海原君。陞秩資憲。원래의 봉작을 회복시켰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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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樂全堂集) 신익성(申翊聖)생년1588년(선조 21)몰년1644년(인조 22)자군석(君奭)호낙재(樂齋),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본관평산(平山)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선조(宣祖)의 부마(駙馬) 동양위(東陽尉)
樂全堂集卷之十四 / 行狀
輸忠翼謨修紀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益城府院君。行崇政大夫判中樞府事兼戶曹判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益城君洪公行狀。
己丑歷戶刑二曹判書漢城府判尹兼藝文館提學知義禁府事。擢吏曹判書。以趙重峯憲擬禮曹佐郞譴免。庚寅拜大司憲。先是鄭汝立謀叛事覺。株連薦紳。其黨吉三峯未就捕。而或者謂三峯卽崔永慶別號。同僚欲請鞫永慶。公力止之。相臣鄭彥信以書札下獄。有一儒生上疏言彥信初聞賊變。遽發斬告者之言。宜置之辟。上問其時推官。皆依違對不實。公斥言首相欺罔不直狀。遂忤旨。以特旨出爲慶尙道觀察使。時倭首秀吉纂君。自肆其凶威。方謀假道犯上國之計。遣使脅之。朝廷亦不得倡言絶之。待其使燕餼踰制。公謂宣慰使曰。國有定禮。禮亡則國亡。今之踰制。非所知也。具啓報聞。國家方講和好。置邊備於度外。公獨憂之。勑州郡修城池繕器械。若將對壘者然。且陳水戰便宜。不報。諸路設機。購捕吉三峯甚急。公懼無辜之橫罹。置不問。及公以勳盟赴召。都事得三峯械治甚酷。延逮十餘家。至馳驛以聞。公道遇而却之曰。此雖眞三峯。旣就囚則待方伯覆實未晩。況未必眞者乎。還營審覈囚。皆嶺以南巨室。無實狀。遂白其冤悉釋之。策公光國,平難兩勳。賜號封君。超秩崇政大夫判中樞府事。
辛卯士禍大作。一時名流無得脫者。公夙負重望。被齕最烈。初鐫公秩。再論遐竄。配咸鏡道之富寧府。出城之日。上而士夫。下而胥徒。涕泣奔走。至輟市相送。抱川有負餽贐者曰。我昔者金海囚也。十年抱枉。賴公直之。今日之來。爲報德也。公謝不受。李大諫海壽與公同竄北荒。詢辭受爲之傚法云。壬辰夏。秀吉大擧入寇。大駕西狩。特宥公封君。急起之。公自謫所艱關踰嶺。走江界趨義州。謁上行在。首陳改弦易轍。恢復可圖。又曰。欲定非常之變。必有非常之擧。奏對堅剴。上爲之嘉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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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유고(藥圃遺稿) 이해수(李海壽)생년1536년(중종 31)몰년1599년(선조 32)자대중(大仲)호약포(藥圃), 경재(敬齋)본관전의(全義)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56 2월, 驪州 牧使가 되다. ○ 7월, 세자 책봉 문제로 鄭澈이 유배되자 그에 연루되어 削奪官爵되고 鍾城으로 流配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57 4월,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流配地에서 풀려나 咸興에 이르러 왕이 播遷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義州 行在所로 가다. ○ 대사간이 되다.
저자의 시문은 辛卯年(1591년)의 禍를 당하여 家人들에 의하여 불태워지고 다시 壬辰倭亂을 겪는 와중에서 유실되는 바람에 난리 후에 수습되어 家藏된 것은 극히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니, 亂後悼亡錄, 丙申雜稿, 松都雜詠, 松都後錄, 拾遺錄 등 약간 권뿐이었다.
독석집(獨石集) 황혁(黃赫)생년1551년(명종 6)몰년1612년(광해군 4)자회지(晦之)호독석(獨石)본관장수(長水)봉호장천군(長川君)특기사항기대승(奇大升)의 문인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41 8월, 建儲問題로 鄭澈이 유배될 때 일당으로 몰려 삭직되고 문외출송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42 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이 되다. ○ 7월, 會寧에서 臨海君 李珒, 順和君 李𤣰, 부원군 金貴榮, 부친 黃廷彧과 함께 왜적에게 잡혀 安邊의 토굴에 갇히다. ○ 10월, 안변에서 왕자의 탈출을 꾀한다는 내용의 언문편지를 판관 李弘業 편에 선조에게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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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石集序 / 獨石文集序[宋時烈]
獨石黃公赫。自少以文翰鳴世。其所述作甚富。而遭罹奇禍。散失殆盡。惜哉。公芝川公諱廷彧之冢子。芝川公爲宣廟朝名臣。其文章以大家稱。公克繩其武。前徽不沫。視唐之令狐父子。未知其孰爲高下也。迂齋李相公諱厚源。公姊子也。與公玄孫縣令暉。積年收拾。甚費心力。然査鑛中零金。只廑廑耳。今公外孫柳興海時蕃。曾宰江東。刊爲板本。其一臠之味。將不泯焉矣。而興海。寔公之楊平通也。嗚呼。公以如是人地。黼黻王猷。笙簧世道。以大鳴國家之盛。豈不如順風而呼耶。獨其所自喜者。卓犖善謔。不甚以禮法自繩。其始也。沈淪冗散。不得爲世用。末後所遭。至今使人不忍言。惟其罹禍時。不但士大夫一口冤訟。至其僕隷之酷被淫刑者。無不失聲籲天。至死卞白。豈所謂能於天而不能於人者耶。
公之事蹟略見於附錄中。最其
辛卯士禍與文簡公成先生諸賢。同被誣罔。
逮癸亥反正。復與之同其昭雪。公之屈伸。卽世道之汚隆也。公於此。豈不大有光耶。
其述作之不全其傳。何足爲軒輊哉。然迂齋公。用意之勤。可謂薄俗之勸。而柳興海渭陽之思。亦可尙也。獨其後承。又不蒙庥。縣令君亦早世。不克就其壽梓之志。故今其刊本。尙有闕漏。其孤處信襲在巾笥。倘値幸會。庶能有以卒其事否耶。公所祭尹姓。其至性高行。據其文可知。卽興海外祖母云。
甲寅三月日。恩津宋時烈。序。
附跋[李喬岳]
余於壬戌之秋。侍尤齋老先生於華陽。先生道獨石公事甚悉。且以所著公文集序。示之。余拜而莊誦者久矣。其後丁卯。余又謹拜先生於興農。以公玄孫縣令 暉。子處信之意。從容禀告曰。獨石集序文。雖已刊行。於本家事。疑有闕漏處。追後攙錄。未知何如。謄本謹此袖來矣。先生取而讀之曰。然。遂添入數行。卽與公玄孫以下七字。獨其後承以下五十二字也。正郞諱處信之長胤璿。擢庚寅文科。方爲嶺南觀察使。以先生添補之本。改入鋟梓。詩篇及雜著追刊者。五十六首也。其遵承兩世遺意。闡揚先徽。垂曜後昆。可謂克世其家。而今觀察屬余一言以記其顚末。噫。後之覽斯集者。於前後序文之或異。必將有以辨之云。
丁未孟冬。龍仁李喬岳。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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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집(西河集) 이민서(李敏敍)생년1633년(인조 11)몰년1688년(숙종 14)자이중(彝仲)호서하(西河)본관전주(全州)시호문간(文簡)
西河先生集卷之十六 / 行狀 / 瀟洒園梁公行狀 *梁山甫 1503 1557 濟州 彥鎭 瀟灑翁
瑞石之陰。有古隱君子曰瀟洒園先生梁公。諱山甫。字彥鎭。生於中明之際。有道而不仕。世濟德美。至于今百有餘年之後。遺風餘烈。傳誦於南方人士者不衰。不佞蓋嘗飫聞之矣。今又得見其家傳所集錄言行之詳。益信前所聞者。爲之慨然太息。想見其爲人也。梁氏之先。出自耽羅。高,良,夫三人降于漢挐山。分長一島。世傳當檀君時云。其後良遂爲梁。新羅時有諱詢者。始渡海登科。爲翰林學士。歸封耽羅君。高麗時峻又渡海來仕。其來有星瑞。故稱星主。曰淳曰遵。繼登文科。皆直文翰署。遵後賜名讚。曰碩材殿直司書。曰漢賢有才不仕。曰鵜判書雲觀事。曰思渭始入我朝。有文行爲儒學訓導。有諱潑。乃先生曾祖也。祖諱允信。皆不達。考諱泗源。有隱德。以六行薦授宗簿主簿不就。號蒼巖先生。娶新平宋氏贈兵曹參議福川之女。卽獻納希璟之曾孫。以弘治癸亥生先生。先生聰明端直。姿稟粹美。兒時已知讀書。便曉大羲。稍長有高志遠識。自力爲學問。蒼巖公奇愛之。年十五請於蒼巖公。就靜菴趙先生之門受業焉。靜菴賞其篤志。授以小學。時聽松成先生兄弟同在門下。見先生稱以畏友。間遊太學。多士敬之。後二年己卯。中宗視學取士。先生之文中選。考官以所取已多拔之。上甚惜之。召見先生。慰諭賜紙。其年冬士禍作。靜菴爲禍首。群賢皆就戮。是時先生年甚少。遂絶意仕宦。築室於瑞石山下。有園林水石之勝。杜門閑居。名其居曰瀟洒園。自號爲瀟洒翁。自是數十年間。群奸嗣虐。世益多故而禍益烈。先生斂藏益深而志益堅。朝廷累以遺逸徵而終不起。蓋優游林壑。養性講道。享淸閑之樂。保幽貞之吉者三十有餘年。嗚呼。是豈一介之行矯矯亢亢。往而不返者比哉。先生德性素高。輔以學識。涵養之久。靜守之篤。充然自得。汪洋浩大。玩心高明。積中發外。及其晩年。德成行就。蔚然爲南方之偉人。事親有至性。在父母之側。未嘗不愉容和色。順適親意。常謂人道莫大於孝。而爲人子者不能其所當爲。作孝賦數百言。闡發本原。臚列古訓。讀之有足感動人者。宋相國純。先生內兄也。見之曰非深知孝理而躬行篤好者。不能爲也。河西金先生亦以宋公言爲然。因次其韻。其居家尤謹於禮。起居言動。皆有法則。至於喪祭。一遵古禮。必使無一事可憾於心者。與其弟友愛篤至。敦恤宗族。內外大小無間言。有寡姑居近。先生幼而育焉。及其歿。爲服朞。且心喪終三年以報之。平生喜自韜晦。不欲人知之也。嘗曰吾家世有孝友之名。及乎吾身。凜凜懼墜先訓。至於世俗皎厲取名者。吾不敢效之。又訓諸子曰。吾不欲汝曹爲人所譽。一人譽之則一人必毀之。河西聞之。以爲至言。先生與河西同志相友善。且嫁娶子女。往還講說。至老不廢。每相見欣然讙甚。討論義理。商確古今。或命觴賦詩。窮日夜不厭。河西至瀟洒園。輒數月忘歸。同時名勝如林石川,宋圭菴,柳眉巖,李靑蓮諸人。慕悅相好。而石川最善。存齋奇公嘗曰瀟洒翁外和而內嚴。一見可知其爲樂易君子。高苔軒亦曰吾少時及識瀟洒翁。觀其眉宇。鄙吝自消。鄭臨汀謂人曰每對瀟洒翁。使人襟懷淸爽。其亦得之矣。先生之學。篤信小學。傍及於四書五經。尤用力於易之剛柔變化。消長往來之象。深有契焉。河西所謂精思隨偃仰。妙契入鳶魚者。信矣哉。蓋先生行義脩諸內而信於一鄕。家法謹諸身而傳於後嗣。使一邦之人爲士而欲善其身者。父焉而欲敎其子。子焉而欲孝其親者。皆有所考信而觀感。至其知微知彰。色斯其擧。不激不汚。超然物表。百世之下。可使貪夫廉而懦夫立。則凜然有郭有道,陳仲弓之風。豈大雅所稱卓爾不群者非耶。丁巳三月。考終於瀟洒園之正堂。享年五十五。
先生娶縣監金珝之女。生三男而早歿。時先生年二十五。宗族勸之再娶。先生不肯曰。昔曾子不娶後妻。子元請焉。曾子曰吾上不及中宗。中不及吉甫。終不娶。聖賢亦然。且吾有三男。猶可以上承先祀。終不聽。
男長曰子洪。有文行早卒。曰子徵號鼓巖。以德行薦。官縣監。曰子淳號支巖。亦有文行。官敎導。女一人適士人盧秀蘭。
側室子子湖參奉。女爲虞侯丁鵬妾。
子洪娶縣令崔大潤女。生二男。千里千尋。
子徵始娶河西先生女無子。再娶生員金松命女。生三男三女。
曰千頃曰千會。有才譽立氣節。皆死於
辛卯士禍。曰千運進士。官主簿。女長適吳岌。遇亂避辱赴水死。次適安瑛。瑛從高公敬命並死陳中。次適徐虎甲。
子淳娶某女。生二男千達,千柱。女適生員洪慶復。
子湖娶金允忠女。生二男。曰千至生員。千章進士。世旣遠矣。他子孫甚衆不盡錄。
余往來南方蓋久。喜誦耆舊所傳高人勝士潛德隱行。若先生者尤所謂傑然者。於是撮其行義志節之大者以爲狀。俾後之君子有考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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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담집(性潭集) 송환기(宋煥箕)생년1728년(영조 4)몰년1807년(순조 7)자자동(子東)호성담(性潭), 심재(心齋)본관은진(恩津)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5대손.
性潭先生集卷之二十 / 墓碣 / 睡隱姜公墓碣銘 幷序
粤在萬曆丁酉。當島夷猖獗。睡隱姜公被擄萬里。孤囚四年。竟全節歸國。雖以蠻夷之蠢。而猶知敬服。至比於文文山蘓中郞。噫。百世之下。聞公之風者。孰不興感而立懦哉。公諱沆字太初。系出晉州。麗朝國子博士啓庸佐金方慶幕。征倭凱還。掛冠不仕。入我朝有諱淮伯。都廵問使號通亭。是生知敦寧府事戴愍公碩德。是生左贊成晉山君文良公希孟。寔公五世祖也。高祖諱鶴孫掌隷院司評。曾祖諱享壽尙衣院別提。祖諱五福副護軍。考諱克儉副司果。妣永同金氏。通德郞善孫之女。公以隆慶丁卯五月十七日生。幼有異質。記性絶人。五歲已能屬文。辛白麓應時以脚字命題使賦之。公應聲對曰脚到萬里心敎脚。辛公改容敬歎。十四遭內艱。哀毁踰制。
戊子登司馬。自伯兄瀣罹
辛卯士禍。斂跡自守。
癸巳監國駐全州設庭試。公遂擢丙科。時
牛溪成先生慍于羣小。門下寥落。而公遠往從之。先生稱其端諒。
公以銀臺假郞入侍累十數。而記注如流。嫺辭敷文。無惉懘處。上深加贊賞。例陞博士。轉成均館典籍。連除工刑曹佐郞。丁酉以分戶曹參判李光庭郞廳。督運楊緫兵糧餉于湖南。糧餉旣集而賊鋒已犯南原。公與巡察使從事官金尙寯。檄致義旅僅數百人。而旋卽解散。於是不得已奉司果公入海。船小人夥。父子兄弟分載二船。聞統制使李公舜臣遵海西上。乃謀往從。而篙下有異圖者。乘夜疲寐。因風解纜。遂兩船相失。彷徨海曲。猝遇賊船。公自度不能脫。與家屬俱墮水中。艤水淺。盡爲賊所執。惟司果公以別船得免。回船至務安縣一海港。賊船六七百艘彌漫數里許。踰三日。賊移公兄弟嫂妻牢置船中。餘人十數皆遇害。撥船南至順天。公自被擄至此凡九日。水漿不入口。越數日兄弟謀竊小艇載出。賊覺之。奔告其將佐渡守。載公等於一大船。押送倭國。船發八日而至伊豫州大津城。拘置一館。戊戌歲朝。表年紀號。以寓尊王之意。五月與京城竹肆居人被擄於壬辰者。共爲西奔之謀。與二兄出。夜行八十里。兩足流血。行三日忽逢佐渡部曲。曳至板島市門外。乃其藁街也。適一賊力止之。送還大津城。有倭僧好仁者見公哀之。禮貌有加。而示以其國題判。公乃謄其方輿職官。摹出倭國地圖。合爲一錄。兼叙賊情及方畧。以付蔚山人金石福。俾達于朝。六月佐渡勒公等移赴大坂城。七月又移于伏見城。卽秀吉之新京也。公日夜謀歸。乃傭書得銀錢五十餘。潛買一船。公兄濬與舌人先往船所。水邊之倭告于佐渡。發卒搜捕。復囚大坂。公悲憤積中。辭氣激烈。雖在虎口。不復憚畏。時或手搏賊卒。以挑其怒。賊亦服公節義。不敢加害。公欲詗賊中虛實。常與諸僧遊。倭俗重僧。自關白以下多所尊師。公之前後濟死。皆賴乎僧。如舜首座者。以倭將廣通之師。頗聰明識事理而甚敬愛公。庚子春公與佐渡書曰十口空養。爾無所益。四年孤囚。我不如死。倘不欲殺。願許出門。不許出門。生無所欲。佐渡許之。公旣得出。卽圖西歸。遂與二兄及家屬十人同約者三十餘人。以四月發行。五月抵釜山。其在伏見也。又具手疏。幷有所錄。加詳於付石福者以送。而得徹于朝。宣廟大加嘉歎。啓下備局。遠近瞻聆。莫不驚聳誦慕。皆以爲蘓中郞不死矣。至是又上賊中聞見錄一冊。宣廟卽召至闕下。特令宣醞。壬寅朝廷叙公爲承議郞大邱敎授。公已無當世念。不應諸公之辟。而只爲收錄。係是恩命。黽勉之任。旋復還歸。丙午回答使呂祐吉等入日本。日本人輒問姜郞中今做何官。因盛穪公忠節不愧古人。使還俱載東槎錄以奏之。聞者益信公之所守不變。而媢疾者猶惎之不已。戊申月沙李公廷龜判西銓。沙溪金先生與書曰回答使之行。倭人莫不穪姜節義。至比於蘓武文天祥曰。文山陷賊三年不下樓。沆之執節堅固過之云。犬羊無識。猶且見服。而我國人心偏私。不知節義之褒。極可痛也。或勸之進取。公笑而不應。爲瘤戒以示意。俄復順天敎授不赴。遂以書謝所知曰。郡文學雖曰散官。而於僕得之則華銜也。但俘擄餘生。不敢當臯比之席。况僕之私情。實有難動者。不但此一行而已也。凡人之情。孰欲陷身於不測之虜哉。而一經患難。萬事瓦裂。衆目睢盱。皆厭劉輿之膩。以此益欲秘跡巖藪。以盡餘喘。乙卯丁司果公憂。年已非致毁。而執喪盡禮。服闋踰年戊午。年五十二而以五月六日卒。葬于佛甲山。後移厝於博山負乾原。孝廟戊戌褒贈都承旨。配晉州金氏。備嘗艱險。罔愆禮度。後公三十年而歿。墓在公兆後。一男時萬參奉。四女婿士人羅敬宗,金夔生員,李眳,高斗南。側室男時蕙。孫男翊周忠義衛,䎘周洗馬,彙周早死。曾玄孫不能盡錄。公孝友根於天性。蚤失所恃。痛不及致養。其在鬼窟。遇諱日亦必供具以薦。及歸國數十年阸窮而不憫。事親從兄之外。不以事物經心。氣度甚寬和。而至於論義理辨是非。精微洞快。靡有餘蘊。常昏朝嚴斥凶徒之來啗以利。其介確之操類如此。文章贍敏。雖宏篇巨作。渙若宿搆。以其發於吟咏者。至使蠻人傳誦爭穪。晩年工夫專在實地。四方學者坌門溢座。日與之講劘不輟。若其修辭。隨手達意而已。綱鑒會要,左氏精華,文選纂註若干卷。皆以資擊蒙者也。巾車錄一冊。亂離中所記也。雲堤錄數卷。家庭間所裒也。嗚呼。以公邃學奇才。而遭時板蕩。陷身坑坎。精忠大義。能信於蠻夷之邦。而苦節危衷。未著於澆薄之世。豈不悲哉。雖然沙溪先生之與月沙相公書。其褒闡幽隱。耀於華衮。而八松尹公嘗宰其所居地。嘉其志行。使諸子就學。及其歿後。尹童土狀其事蹟。纖悉無餘。兪市南指其看羊錄而穪以炯炯丹忱。可質神明。至於我先祖尤菴文正公叙其文集。有曰余少讀朱少章行狀。壯其節而悲其志。未嘗不三復而流涕。今見姜公遺錄。何其異世而相同。若朝暮遇者也。噫。斯可以有諗永世而無遺憾也歟。今公後裔將樹石墓徑。六世孫台煥遠來求余文。顧荒陋之辭。何能闡揚。遂就狀文。畧加櫽栝而爲之叙。系以銘。銘曰。
烈烈睡隱。苦節埒古。在古伊誰。文樓蘓窖。最其終始。同朱少章。寇亂之初。倡義堂堂。投海認纆。口不水漿。鬼窟奉諱。操文薦享。爲述殉節。期得褒奬。蠻俗情形。歷歷陳報。㦉欝詠懷。漆齒誦慕。忠節克全。歸庭終孝。虜中諸作。優被聖褒。斁倫之世。立謝姦徒。職之敎授。有忤時議。維我沙翁。爲公慨世。吾祖文正。穪擬以倫。我於斯銘。敢述而申。屹彼博麓。樹玆貞珉。嗟公卓節。垂耀無垠。
수은집(睡隱集) 강항(姜沆)생년1567년(명종 22)몰년1618년(광해군 10)자태초(太初)호수은(睡隱)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성혼(成渾)의 문인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25 백형 姜瀣가 士禍로 화를 당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26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檄文을 내어 軍糧과 軍器를 모아 의병장 高敬命에게 보내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27 광해군이 全州에 주둔하면서 시행한 庭試에서 丙科로 합격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28 成渾의 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東人의 탄핵을 받아 校書館에 분관되다. ○ 겨울, 記注官으로 경연에 입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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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來庵集) 정인홍(鄭仁弘)생년1536년(중종 31)몰년1623년(인조 1)자덕원(德遠)호내암(來庵)본관서산(瑞山)봉호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특기사항조식(曺植)의 문인. 대북(大北)의 영수
來庵先生文集卷之十二 / 行狀 / 守愚堂崔公行狀
公諱永慶。字孝元。和順人。海州牧使永儒之後。有士老爲通訓大夫大司成。於公爲五世祖。高祖諱漢楨。通政大夫禮曹參議。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曾祖諱重洪。通政大夫。全羅道觀察使。曾祖妣玄風郭氏。祖諱纁。彦陽縣監。考諱世俊。兵曹佐郞。公以嘉靖己丑七月十六日生。生有異質。觀察公奇愛之。幼兒時。在人家得珍果異味。輒歛手不食。問之則曰思以進父母大父母。讀史至麥秀歌。嗚咽垂涕不成聲。人知其非常兒。稍長口無俚近語。步趨有法度。儼然有學者氣像。佐郞公期以遠器。蒙養亦端。使遊嬉不得近婦人爲麤鄙事。年未二十。讀書劇嗜灸。比舍人未之知。纔冠屢發解。不利於禮闈。佐郞公歿。執喪一依古禮。母夫人恐毁瘠成疾。幷不食勸麋粥。卒哭始食粟飯。服闋。家貧親老。黽勉科文。所欲不存焉。母夫人墜傷病危。刺臂血和藥以進得甦。後丁憂。哀毁幾不勝。猶身執奠具。及葬。竭家力辦油灰。造石槨。期於自致。不計其餘。三年廬墓。朝夕上食。必有魚肉。大雨道市不通。哭於墓。有虎將猪來置床石上。及來晉陽。先忌已迫。無肉以祭。悲歎終日。有獐來入園中。人謂在昔氷鯉躍出。幕鳥飛入。殆是誠孝所感也。兄弟婚嫁畢。先業當分。田之磽瘠自與。又不要均一。只計饒乏爲多少。無敢出一言爲異同者。其誠意動神人如此。一同服其行義。申于該曹。授慶州參奉不就。升秩除主簿。又不就。後連授守令,都事,佐郞,掌藝等官。皆不起。家計屢空。日間不擧火。或勸曰 或卽安敏學也 同力築浦堰。謀生不妨。強之不許曰。貧富天也。此非吾分內事。身上無完衣。風寒砭肌骨。出入借於親舊以着。不以爲意。不忘溝壑。志不可奪也。吳舍人健 號德溪 爲銓郞。謂金公孝元 號省庵 曰。健在吏部數年。不得人。今有間世人物。金遽曰必吾崔丈也。撼山易。撼渠丈難。公能起之耶。閔幸村純稱曰飢寒入骨猶泰然。胸衿灑落常樂易。非安貧樂道者。不能也。每稱畏友。及公卒。門人有以悖慢語加公者。絶之。缺 原有山水勝。嘗欲卜業不果。晉陽有先人舊田廬。將老焉。投司畜曰。吾家世臣。今又累蒙恩命。畢竟邈焉而去。於義未安。乃拜命將作南行。盧公守愼族且友也。累留之不廻。致書曰執之病大矣。公復曰通之害亦不小矣。至晉陽。與若干同志人。建南冥先生書院于德山洞幽居旁。晉之羣不逞。詆謗不遺餘力。確然終不爲動。久而乃定。公之初拜南冥先生。適國恤。執爲贄。先生一見異之。許爲高世人物。有一子弘濂夭死。傷痛不能食。只以酒自抑。無人世念。公性嚴正寡欲。疾惡不少假借。愛人好賢。亦自天性。縉紳人有貪汚忮行者。雖求見亦避之。若人趨附時勢。視如塗承。在漢城時與成渾有舊。渾自坡山之城中。公將詣焉。路間見友人自渾家返。言今訪成。成與沈同知 卽義謙也 語。戒門者不通賓客。不得見。公遽返不復往。不數日。滿城士子無不知。以此公之名益高。成與其黨。噎娼始深。安敏學兄弟不相容。幾得罪。敏學嘗訪公。言論頗勁直。公欲爲收拾。極言事兄之道。敏學感悟得俱全。後見成渾名勢。遂與交結。又言吾友有鄭季涵 澈也 誠善士也。願見尊丈。公不應。後日復稱譽曰此人盡心國事。可見。公曰吾久在城中。惟聞渠好官。未聞有建明也。歸以告澈。澈銜之甚。敏學亦視公爲讐怨。辛巳除司憲府持平。上辭職疏。疏中有曰當今國是靡定。公論不行。朋比成風。綱紀日墜。此實消長安危之機。明以燭之。威以鎭之。使偏黨之徒。不得肆其胸臆云云。以此忤時輩益深。李珥初登朝。人皆謂古人復出。公獨言其不然。人以公爲狂爲愚。公見士論多岐。名利是爭。不欲近朝市。決南行意。缺
▣▣▣▣▣人始服公先見 缺
其後公再授持平不赴。築一屋竹林中。命曰守愚堂。有菊若干叢。梅若干本。蓮數莖。鶴一隻焉。有請學者。不許曰斅學非吾所能。只能飮酒何用。
及逆變起。渾澈等因以爲機穽。網打中外異己者。與其鷹犬湖南
梁千頃,
金克寬,
洪千璟,
姜瀣等。
揑造吉三峯之說。三峯初不知有無虛實。便稱爲賊。與逆臣鄭汝立通。未久變稱崔三峯。陰嗾趙應箕。謂崔三峯常會逆賊于萬場洞。告于兵使李鎰。密移于慶尙監司金晬。囚晉陽獄。金吾郞到。欲脫板架。向之再拜曰君命也。不可脫。滿庭吏卒皆垂涕。繫在王獄。日必面闕坐。未嘗少變。家奴若干輩亦被逮。當供辭。同繫人曰奴若失辭。禍且不測。請指敎。公曰渠當自爲。我何與焉。終不近。人皆悶之。尤服公不撓。委官澈。欲因奴誣辭以及公。沙火鞠甚酷。奴終無亂辭。委官鞠逆家奴曰有崔三峯者。往來爾賊家耶。奴曰嘗見之矣。其人有二毛。乃以公三易衣置羣囚間。使奴認之。終不得。公色不動。不爲懼。不爲幸。有必欲害公者。言渠首猝黑。意鑷去也。公聞之笑曰。昨夕始聞賊奴辭。雖欲鑷去。奈暮夜何。且誰爲鑷者。人服其量。公嘗自晉陽。葬子在城中。因李潑見逆賊面目。語潑等曰。渠爲人狡猾慢上。無父無兄者。勿相親信。後借友人簡尾相問。至是其書下鞠廳。澈得之色喜。問事郞李恒福。恐公忘了諱之。起旋於外曰崔某死矣。有此借尾。其得不死乎。公方省覺。置辭以實。澈無如何。不得加一杖。李之力也。公自言以吾聾耳。得聞其言。必大聲也。云公獄辭入。自上察其無辜。特命放出。有片簡自外入。公覽之泣曰。有今恩旨。太陽偏照。感戴罔極。第念吾弟先死。獨未蒙此恩。弟有何罪。由我而死。所以長痛。聞者惻然。公出獄寓族人家。成渾令其子文濬。齎來斗米曰。此米可爲還鄕路資。仍言何故見疾於人至此。公答曰。見疾於乃翁爾。翌日憲府請更鞠。逮囚。時尹斗壽爲憲長。渾。澈黨也。委官令獄皁捽曳拗傷。困辱備極。公辭氣不動。置辭揭別始終。官叱曰第陳鞠辭。不惹起旣往事端。枉費辭說。公正色曰第依獄囚所言。費辭說。于公甚事。其人不復言。其正直如此。有晉州人鄭弘祚亦當逮囚。人告曰若弘祚誣辭。事將奈何。公曰某與鄭未有面分。其如命何。及弘祚至。公已卒。弘祚從士人朴士吉。問供辭利害。士吉曰凡獄事。以正而已。天道孔昭。鬼神難欺。弘祚慨然曰崔公戇士也。我一壤蟲耳。常以足不及門爲恥。今吾已老矣。雖罔而生。人將唾罵曰是嘗誣崔某者。獨如子孫何。蓋獄起自金堤倅許昕,晉州判官洪廷瑞。昕謂廷瑞曰聞逆賊往來崔某家。廷瑞曰州座首鄭弘祚嘗有此言。至是廷瑞先在獄。數遣人脅弘祚。弘祚不答。及供辭曰。崔某家距州治五里許。弘祚家在四十里外。逆賊盜名已久。設使白日往來。豈有名士來。五里許判官不知。而四十里外弘祚獨知乎。若謂潛相往來。判官所不知。尤非弘祚所得知。曷嘗以此言向廷瑞說。獄事上。宣旨速訊廷瑞。委官私廷瑞。友請訊弘祚。反覆宣旨。廷瑞,弘祚俱梜一次竝釋。公在獄。飯食衣服。家承命不小違。愼氏妹嚮獄。一日已寒衣來。公不受曰吾得罪祖宗。不足惜。重在阿路 公弟弘路 身上。可遺之。強之。乃書阿路名于帶上還之曰。阿妹不知輕重。公相識人 意是尹革也 亦係獄。公食西果甚美。割一邊分送。人曰公不亦齒間留酸耶。志同梧同故云 公笑曰禍福有限。非此果所能究竟也。嘗論食慾曰。吾嘗嗜蘿葍。方舁致獄時。見市廛無鬚軟滑者。不覺流涎。人欲之可懼如此。人所當戒也。公嘗病。委官臨鞠。數遣醫官詮問。最後帶銀人來。請診甚堅。公徐縮臂曰。這病非委官所能治。終拒不聽。時自上問公病危。命罷。主刑郞有韓匡國者上疏誣鄭彦信叛狀。同間繫。公終始不相對。匡國坐誣。竟斃獄中。後數日。公亦卒。朴士吉移公屍于別處曰。公不欲與那尸相近。公雖久繫。常危坐。未嘗攲倚。一日顔色揚揚如昔。食罷神氣遽惡。就枕士吉滕。旁人皆驚怪。家人欲試之。請寫一字送來。公徐起大書一正字。畫已訛。顧士吉曰。公能識否。有頃而卒。行乎患難。可謂其道無入不自得。公庶幾焉。朝士湖南尹公光啓,生員朴士吉同係。備錄始終。末後稱公可謂得正而斃。仍歎曰。在我何傷者再。蓋深服公也。自上覽公家收取文字曰。此人愛兄弟篤。往來書皆友愛懇到也。獄事方嚴。士大夫戰慓齰舌。不敢發一口。問事卽李恒福。獨於會中稱公曰。渠老置死生度外。不可及也。逆黨有崔三峯容貌者。李執尺度公身材。乃曰聞名久不得見。今日手捫其肌膚。生世不見此老。枉過一生。正似西代兒不見鍾樓而死也。左相金命元亦曰拿入鞠庭。令人凜然起敬。其平生所養可知。李憲國參鞠。見公入庭。不覺下怵云。公精神氣魄固可動人。平生自持。嚴毅正直。表裏交盡。充滿發揚。自然如此。非時月功力所能致也。及兵變起。大駕幸龍灣。義州 金參判 宇顒 見成渾。語及逆變。渾曰以吾愚惑。君輩推許太過。畢竟至此。不獨吾罪也。金曰殺崔處士者誰也。渾無他語。但曰人若殺我。公幸救得一分。此果與公所謂見疾於乃翁語。相符焉。賊退▣▣▣駕還。金爲憲長。論啓竄鄭澈申公冤。自上命贈大司憲。恤其家小。自公歿未十年。是非乃明。如披雲見天日。是亦迎古所未有也。公少時一蹈規矩。自飮食衣服。至動靜行止。無不正正有則。望之可知其爲人。與人言。開心吐懷。靡有餘蘊。於同志同氣。輒忘形焉。然於人小許可。人皆畏憚。愛慕者亦多。看書未嘗文字上過了。必求切己致用。見人耳入口出。不務踐實者。心疾其虛僞。以此大爲俗流所疾。自喪嗣。雖規矩少異。有守而不撓。貧賤不移。威武不屈。富貴亦豈能動一毫也。所養如此。故言行重於世。且生長都下。備知士大夫心跡。好惡敢舍。斷斷不苟。爲淸議所稱道。兇黨必欲甘心。故其禍獨慘焉。晩年頗不信讀書。故人或小之。然非以書爲不可讀。見世代間假學道以取名利。如李芑一以中庸進。李楨,黃俊良以志學稱。王之望尹穡輩。果不足置齒牙間故爾。蓋欲矯時習。言或有病。不可以辭害意也。遠近士子。共配公于德川祠宇焉。余雖相從久。居不近。知亦晩。公小壯時行跡。耳目不及者多。特就心知所得。聞見所詳。粗擧一二焉。
내암집 제12권 / 행장(行狀) / 수우당 최공 행장〔守愚堂 崔公 行狀〕
공의 휘는 영경(永慶), 자는 효원(孝元),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해주 목사(海州牧使) 영유(永儒)의 후손으로, 통훈대부 대사성 사로(士老)가 공의 5대조이다. 고조부 휘 한정(漢禎)은 통정대부 예조 참의를 지냈고 가선대부 예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증조부 휘 중홍(重洪)은 통정대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부인은 현풍 곽씨(玄風郭氏)이다. 조부 휘 훈(壎)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 부친 휘 세준(世俊)은 병조 좌랑을 지냈다.
공은 가정(嘉靖) 기축년(1529, 중종24) 7월 16일 출생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빼어난 자질이 있어 증조부인 관찰공이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어렸을 때에 남의 집에서 진귀한 과실이나 맛있는 음식을 얻었는데 손을 거두고 먹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으니, “부모님과 조부모님께 가져다 올리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를 읽다가 〈맥수가(麥秀歌)〉에 이르자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니, 사람들이 범상치 않은 아이임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속되고 천박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걸음걸이에는 법도가 있어 의젓하게 학자의 기상이 있었다. 부친 좌랑공이 훗날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여 자식 교육을 단정하게 했으며, 나가서 놀 때 부인들을 가까이 하거나 거칠고 비루한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맛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였는데, 이웃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관례를 행한 뒤 누차 초시에 합격하였지만 회시에는 낙방하였다.
부친 좌랑공이 돌아가시자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모친은 공의 몸이 상하고 수척해져서 병을 얻을까 근심하여 함께 굶으면서 미음을 권하였다. 졸곡(卒哭)이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었다.
삼년상을 마치자 집안이 빈궁하고 모친은 연로하여 과거공부에 부지런히 힘썼다. 그러나 추구하는 바가 거기에 있지는 않았다.
모친이 낙상(落傷)하여 병이 위독해지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약에 타 올렸더니 소생하였다. 뒤에 모친상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여 몸을 이기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몸소 제물을 올렸다. 장사를 지낼 적에는 집안의 재산을 다해 유회(油灰)를 준비하고 석곽을 만들었다. 스스로 정성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그 밖의 일은 따지지 않았다.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조석으로 음식을 올릴 때는 반드시 고기와 생선을 마련했다. 큰 비가 내려 시장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묘에서 곡을 하였는데, 호랑이가 멧돼지를 물고 와서 상석 위에 두고 갔다. 진주로 내려온 뒤 부모님의 기일이 다가와도 제수로 쓸 고기가 없자 종일토록 비탄에 잠겨 있었는데, 노루가 뜰 안으로 들어온 일도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옛날 얼어붙은 강에서 잉어가 뛰어 오르고, 여막으로 새가 날아 들어오는 경우라고 말했다. 이는 공의 정성과 효성에 감응한 것이리라.
형제들이 다 혼인한 뒤 유산을 나누었는데 척박한 논은 공이 가졌다. 또한 균등하게 나누어주지 않고 단지 재산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나누어 줄 전답의 다소를 결정하였는데, 그 많고 적음을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공의 성실한 뜻은 귀신과 사람을 감동시켰으니, 온 동네 사람들은 공이 의리를 행하는 것에 탄복하였다.
이조에 천거하여 경주 참봉(慶州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품계를 올려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다. 뒤이어 수령, 도사(都事), 좌랑, 장원(掌苑)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이 빈궁하여 며칠 동안이나 불을 지펴 밥을 짓지 못했다. 혹자 - 안민학(安敏學)이다. - 가 말하기를 “함께 힘을 합해 둑을 쌓아 생계를 도모해도 무방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강권하였지만, 공은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빈부는 천명에 달린 것이니, 이는 내 분수 안의 일이 아닐세.”라고 하였다.
자신에게는 온전한 옷이 없어 바람과 추위에 살을 에고, 외출할 때는 친구에게 옷을 빌려 입으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죽어서 구덩이에 버려지더라도 한하지 않는 지사의 마음을 간직했으니, 공의 의지는 빼앗을 수 없었다.
사인(舍人) 오건(吳健) - 호는 덕계(德溪)이다. - 이 이조의 낭관으로 있을 때 김효원(金孝元) - 호는 성암(省庵)이다. - 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조에 몇 년 동안 있으면서 인재를 얻지 못했는데,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이 지금 있다네.”라고 하자, 김효원이 곧바로 말하기를 “그분은 반드시 우리 최장(崔丈)일 것입니다. 산을 흔드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어른을 불러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공이 그분을 나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행촌(杏村) 민순(閔純)이 공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굶주림과 추위가 뼈에 사무쳐도 태연하고, 흉금이 깨끗하여 항상 화락하고 평온하니, 안빈낙도하는 이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하며, 매번 ‘외우(畏友)’라고 일컬었다. 공이 돌아가시자, 문인 가운데 공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한 자가 있었는데, 민순은 그와 절교하였다.
철원(鐵原)에 산수가 빼어난 곳이 있어 일찍이 그곳에 집을 짓고자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진주에 선대의 오래된 농장이 있어 노년을 그곳에서 보내려 했다. 마침 사축서 사축(司畜署司畜)에 제수되자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희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해왔습니다. 지금 또한 누차 은명을 받았는데, 끝내 벼슬을 멀리하고 떠나려 하니 의리상 미안합니다.”라 하고, 사은숙배하고서 내려가려 하였다.
노수신(盧守愼) 공은 인척이면서 친구였는데, 누차 공을 만류하였지만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노공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공의 고집불통의 병폐가 클 것입니다.”라고 하자, 공은 “융통성 없는 행동의 해로움도 작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진주에 이르러 몇몇의 동지들과 덕산동(德山洞) 산천재(山天齋) 근처에 남명(南冥) 선생의 서원을 건립했다. 진주의 무도한 사람들이 공을 비방하는 데 온 힘을 쏟았지만, 공이 확고한 마음으로 끝내 동요하지 않자 얼마 지난 뒤 여론이 안정되었다.
공이 처음 남명 선생을 배알할 때 마침 국상(國喪) 중이었는데 죽순을 폐백으로 올리니, 선생이 한번 보고서 비범하게 여기고 세속을 초월한 인물로 허여했다.
외아들 홍염(弘濂)이 요절하자 애통해하며 음식을 들지 못했다. 오로지 술로써 자신을 억누르면서 더 이상 세상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공의 본성은 엄정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악을 미워하여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였는데, 이 또한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벼슬아치 중에 탐욕스럽고 흉악한 짓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만나기를 청해도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시세를 따라 아부하는 사람들은 흙 묻은 더러운 돼지처럼 보았다.
한양에 있을 때 성혼(成渾)과 친분이 있었다. 성혼이 파산(坡山)으로부터 한양으로 왔는데, 공이 그를 만나러 가는 도중 성혼의 집에서 돌아오는 어떤 벗을 만났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지금 성혼을 찾아갔는데, 성혼은 동지중추부사 심의겸(沈義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네. 문지기가 손님의 출입을 막기에, 만나볼 수가 없었네.”라고 하자, 공이 문득 발길을 돌리고서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 며칠 뒤 온 장안의 사인(士人)들이 그 사실을 다 알게 되어, 그 때문에 공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성혼과 그 무리의 시기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안민학 형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거의 죄를 얻을 지경에 이르렀다. 안민학이 전에 공을 방문했을 때, 형에 대한 비판이 자못 강경하고 직설적이었다. 공은 형제간의 불화를 수습하고자 형을 섬기는 도리에 대해 극진히 말을 하였다. 그러자 안민학은 감동하여 뉘우치고 형제간의 우의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훗날 안민학은 성혼의 명성과 위세를 보고서 이윽고 그와 교분을 맺었다. 그는 또 공에게 말하기를 “나의 친구 중에 정계함(鄭季涵) - 정철(鄭澈)이다. - 이라는 자가 있는데 참으로 선사(善士)입니다. 이 친구가 존장을 뵙고 싶어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공이 응하지 않았다. 후일에 그가 다시 칭찬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만나 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라고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나는 오랫동안 도성 안에서 살았는데, 그가 관직을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밝은 정치를 일으킨다는 말은 듣지 못했네.”라고 했다. 그가 돌아가서 정철에게 그 말을 고하자 정철이 깊이 원한을 품었고, 안민학 또한 공을 원수로 여겼다.
신사년(1581, 선조14)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자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가운데 “지금은 국시가 아직 정해지지 않고 공론이 아직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붕당이 풍속을 이루어 나라의 기강이 날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성쇠와 안위의 갈림길이니 밝게 살피시고 위엄으로 진압하시어, 편당을 짓는 무리들로 하여금 속셈을 멋대로 부리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에게 더욱 미움을 샀다.
이이(李珥)가 처음 조정에 등용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고인(古人)이 다시 출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공을 지나치거나 어리석다고 여겼다. 공은 사론(士論)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상황을 보고 도성 가까이 있으려 하지 않고, 남쪽으로 가려는 마음을 굳혔다. 오래지 않아 이이가 과연 인망에 차지 못하자, 안목을 갖춘 사람들은 그와 벗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그러나 이이의 당여인 안민학 무리들의 분노와 질시가 날로 심해졌다.
그 후 공은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죽림 속에 집 한 채를 짓고서 수우당(守愚堂)이라 이름 하였다. 그곳에 몇 떨기의 국화와 몇 그루의 매화나무와 몇 줄기의 연꽃을 심고 학 한 마리를 길렀다.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학문을 가르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다만 술을 마시는 데 능할 뿐이니 어떻게 가르치겠소?”라고 하였다.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성혼과 정철 등은 이 일로 인하여 함정을 만들어 안팎으로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를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앞잡이인 호남의 양천경(梁千頃), 김극관(金克寬), 홍천경(洪千璟), 강해(姜瀣) 등의 무리와 함께 길삼봉(吉三峯) 이야기를 날조하였다. 길삼봉은 애초 그 존재의 유무와 허실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는데, 갑자기 역적이 되어 역신 정여립과 내통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길삼봉’이라는 명칭이 바뀌어 ‘최삼봉(崔三峯)’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은밀히 조응기(趙應箕)를 사주하여 최삼봉이 전주의 만장동(萬場洞)에서 늘 역적 정여립을 만났다고 말을 하게 하고서,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에게 보고하고, 경상 감사 김수(金睟)에게 비밀리에 이첩하여, 공을 진주의 감옥에 가두었다.
의금부 도사가 도착해서 형틀을 벗기고자 하니, 공이 그를 향해 재배하고 말하기를 “임금의 명인지라 벗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관아의 뜰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아전과 포졸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의금부의 옥에 갇혀 있을 적에 매일 대궐을 향해 앉아 조금도 안색을 변치 않았다. 가노 몇 명도 잡혀와 공초를 받았다. 함께 옥에 갇혀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노복이 만약 실언이라도 한다면 화가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자에게 답변할 말을 일러 주시지요.”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그들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어찌 그 일에 간여하겠소.”라고 하고서, 끝내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근심하면서도 공이 끝내 동요되지 않는 모습에 더욱 탄복하였다.
위관(委官) 정철은 노복이 무고하는 말로 공에게 화를 미치게 하고자 하여 압사형(壓沙刑)과 단근질로 매우 가혹하게 국문하였지만 가노는 끝까지 허튼 말을 하지 않았다. 위관이 역적 정여립의 가노를 국문하기를 “최삼봉이라는 자가 너희 집에 왕래하였느냐?”라고 하자, 그 가노가 말하기를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에게 옷을 세 차례나 바꿔 입혀 죄수들 사이에 두고서 그 가노로 하여금 확인하게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공은 안색이 동요되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다행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기어이 공에게 해를 입히고자 하는 어떤 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검어졌으니, 몰래 뽑아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공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어제 저녁 처음 역적 집안 가노가 한 말을 들었으니, 흰 머리카락을 뽑아 없애고자 한들 어두운 밤에 어찌 그리할 수 있겠으며, 또 누가 뽑아 주겠는가.”라고 하자, 사람들이 그 국량에 탄복했다.
전에 공의 아들이 죽어 진주에서 장사 지내고 한양의 성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이발(李潑)을 통해 역적 정여립의 얼굴을 보았다. 공이 이발 등에게 말하기를 “그의 사람됨이 교활하여 윗사람을 기만하며 아비도 무시하고 형도 무시하는 자이니, 가까이 지내며 믿지 말라.”라고 하였다. 후에 공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끝에 역적 정여립의 일을 물었는데, 이때 그 편지가 국청(鞫廳)에 나타나자, 정철이 그 편지를 보고서 안색이 밝아졌다. 문사랑(問事郞) 이항복(李恒福)은 공이 그 사실을 잊고서 기피할까 염려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거닐면서 말하기를 “최 아무개는 죽겠구나. 친구에게 보낸 편지 끝에 안부를 물은 말이 있으니 그가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곧 알아차리고서 공초할 때 사실대로 말하니, 정철도 어찌 할 수 없었다. 곤장 한 대도 칠 수 없었던 것은 이항복 덕분이었다. 공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 어두운 귀로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으니, 반드시 큰 소리로 외쳤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공초가 대전으로 들어가자 임금은 허물이 없다고 판단하여 석방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누가 쪽지를 들여보냈는데 공이 읽고서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은명을 내려 굽어 살펴주시니 감격스러운 마음 망극하구나. 다만 생각건대 먼저 죽은 나의 아우만 이런 은명을 입지 못했으니, 아우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나 때문에 아우가 죽었으니 길이 애통해하는 바이다.”라고 하자, 듣는 사람들이 측은히 여겼다.
공이 감옥에서 나와 친족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성혼이 아들 성문준(成文濬)을 시켜 쌀 한 말을 가져와서 말하기를 “이 쌀이면 귀향하는 노자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고서, 또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남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라고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자네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아서 일세.”라고 하였다.
다음 날 사헌부에서 다시 국문을 청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윤두수(尹斗壽)가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성혼과 정철의 당여였다. 위관이 옥졸에게 명하여 험하게 끌어내고 사지를 비틀어 곤욕이 극심했지만, 공의 말투는 흔들리지 않아서 공초할 적에 사건의 시종을 조목조목 구별해 말했다. 그러자 옥관(獄官)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단지 국문하는 말에 따라 진술하면 되지 지난 일을 끄집어내어 불필요한 말로 허비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단지 죄수가 말할 바에 따라 말할 뿐이니, 공에게 무슨 해로운 일이겠는가?”라고 하니, 그 사람은 다시 말하지 않았다. 공의 꼿꼿함이 이와 같았다.
진주에 사는 정홍조(鄭弘祚)도 옥에 갇히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이 공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만약 정홍조가 무고한다면 일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정홍조와 면식도 없는데 그가 천명을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정홍조가 한양으로 압송되었을 때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정홍조가 사인(士人) 박사길(朴士吉)에게 공초의 이해관계를 물으니, 박사길이 답하기를 “무릇 옥사는 정직하게 답변할 뿐입니다. 천도는 매우 밝고 귀신은 속이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홍조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최 공은 꼿꼿한 선비이고, 나는 땅 속에 사는 한 마리 벌레 같은 존재이다. 항상 공의 문하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왔다. 지금 나는 이미 늙었는데 거짓말을 하여 살아난다 해도 사람들이 나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면서 ‘이 자가 최 아무개를 무고한 자이다.’라고 할 것이니, 내 자손들은 어찌 살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개 이 옥사는 김제(金堤) 수령 허흔(許昕)과 진주 판관 홍정서(洪廷瑞)로부터 일어났다. 허흔이 홍정서에게 말하기를 “역적 정여립이 최 아무개의 집에 왕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하니, 홍정서가 말하기를 “진주의 좌수(座首) 정홍조가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홍정서가 먼저 옥에 갇혀 있었는데, 자주 사람을 보내 정홍조를 협박하였으나 정홍조는 대꾸하지 않았다. 정홍조가 공초를 받을 때 말하기를 “최 아무개의 집은 진주 관아에서 5리 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저의 집은 관아에서 40리 밖에 있습니다. 역적 정여립이 오래 전 세상에 이름이 났으니, 대낮에 왕래하였다면 어찌 명사가 오는데 5리 거리의 판관은 모르고 40리 밖의 저 혼자 알았겠습니까. 만약 몰래 서로 왕래했다고 말하면 판관도 모르는데 더욱 제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그런 말을 홍정서에게 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초를 임금께 올리자 “홍정서를 속히 심문하라.”라고 교지를 내렸다. 위관이 홍정서와 사적인 친분이 있어 도리어 정홍조를 심문하자고 청하였다. 임금의 뜻이 다시 바뀌어 홍정서와 정홍조가 모두 한 차례씩 곤장을 맞고 함께 석방되었다.
공이 옥에 있을 때 온 집안 식구들이 음식과 의복을 공의 명대로 받들어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였다. 신씨(愼氏)에게 시집간 누이가 옥살이를 뒷바라지 했는데, 하루는 자기의 겨울옷을 가져왔다. 공이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조종에 죄를 지은 사람이니 애석해 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아우 홍로(弘路)의 신상에 있으니, 그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는데, 억지로 권하자 띠 위에 아우 홍로의 이름을 써서 돌려주며 말하기를 “누이가 경중을 모르는구나.”라고 하였다.
공과 서로 아는 사람 - 윤혁(尹革)인 듯하다 - 도 옥에 갇혔었는데, 공이 수박을 먹다가 맛이 매우 좋아 한 조각을 잘라 보내주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공도 치아 사이에 신맛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 의지가 같고 화를 당한 것도 같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라고 하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화복은 끝이 있으니 이 과일 맛을 끝까지 따질 바는 아닐세.”라고 하였다.
일찍이 식욕에 대해 논하면서 “나는 전부터 무를 좋아했는데, 옥으로 잡혀갈 적에도 시장에 잔뿌리가 없는 매끈한 무를 보고서 나도 모르게 군침을 흘렸다. 인욕을 두려워할 만한 정도가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전부터 병이 있었는데, 위관이 국문할 적에 여러 번 의관을 보내 병세를 진찰하게 했다. 최후에는 은대(銀帶)를 찬 관리가 와서 진찰을 하자고 굳이 청하였으나, 공은 천천히 팔을 오므리면서 말하기를 “이 병은 위관이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끝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임금이 공의 질병이 위독해진 것을 문책하고, 명을 내려 형을 주관하던 낭관을 파직시켰다.
한광국(韓匡國)이라는 자가 소를 올려 정언신(鄭彦信)의 모반 정황을 무고하여 공과 같은 칸에 갇히게 되었는데, 공은 시종일관 상대하지 않았다. 한광국은 무고죄에 연좌되어 끝내 옥에서 죽었다. 그리고 며칠 뒤 공도 세상을 떠났다. 박사길이 공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말하기를 “공은 저 시체와 가까이 있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었지만 항상 꼿꼿하게 앉아서 기대어 앉은 적이 없었다. 하루는 예전처럼 안색이 밝아졌는데, 식사를 한 뒤 갑자기 정신이 나빠져 박사길의 무릎을 베고 눕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집안 식구들이 공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하여 한 자를 써서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공이 서서히 일어나서 ‘정(正)’ 자를 크게 썼는데 획이 이미 삐뚤어 졌다. 공이 박사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공은 이 글자를 알아보겠는가?”라고 하고서 얼마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 환난 속에서도 행하였으니 그 도는 어느 경우인들 자득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할만하다. 아마도 공이 그에 가까울 것이다.
조정의 벼슬아치로 있던 호남의 윤광계(尹光啓) 공과 생원 박사길이 함께 옥에 갇혀 있었는데 옥사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뒤, 그 끝에 ‘공은 바름〔正〕을 얻고서 세상을 떠났다’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어 탄식하기를 “우리에게 있어 무슨 해를 끼쳤겠는가?”라고 두 번이나 말했으니, 이것은 대개 공에게 깊이 감복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공의 집에서 압수해 온 문서를 보시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형제들 사이에 우애가 독실하였구나.”라고 하였으니, 왕래한 편지 모두 우애가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옥사가 엄하여 사대부들이 두려워 떨며 입을 다물고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했다. 문사랑 이항복이 홀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 노인은 생사를 도외시하였으니, 우리들이 미칠 수 없는 경지이다.”라고 하였다. 역적의 무리 중에 최삼봉의 용모를 말하는 자가 있어서, 이항복이 자를 들고 공의 키를 재며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지만 만나 뵐 수 없었는데, 오늘에야 내 손으로 공의 피부를 만져보네. 세상에 태어나 이 노인을 보지 못하고 헛되게 일생을 지내는 것은, 마치 서울 아이가 종루(鍾樓)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좌의정 김명원(金命元)도 “국정(鞫庭)으로 잡혀 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숙연히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니, 그가 평생에 수양한 바를 알겠다.”라고 하였다.
이헌국(李憲國)도 국문에 참석했다가 공이 국정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고 하니, 공의 정신과 기백은 진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했던 것이다. 평생 자신을 지켜 엄하고 굳세고 정직하였으니, 안팎을 번갈아 극진히 하며 충만한 도덕이 발양되어 자연히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는 짧은 시일의 공력으로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가가 용만(龍灣) - 의주(義州) - 으로 파천할 적에 김 참판 - 우옹(宇顒) - 이 성혼을 만나 말을 하다 기축옥사에 미쳤다. 성혼이 “내가 우매하고 미혹된 데다가, 그대들이 너무 지나치게 그 사람을 추앙하여 필경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나 혼자만의 죄는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김우옹이 “그러면 최 처사를 죽인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하자, 성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단지 “남들이 나를 죽인다면 공이 아마 조금은 구원해주겠지요.”라고 하였다. 이는 과연 공이 이른바 ‘자네의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아서 일세’라고 말한 것과 들어맞는다.
적이 물러난 뒤 어가가 환궁하였다. 김우옹이 대사헌이 되어 정철을 내치고, 공을 신원하는 일을 논핵하였다. 이에 임금이 공을 대사헌에 추증하고 쇄락한 집안을 구휼해 주라고 명하였다. 공이 세상을 뜬 지 10년도 되지 않아 시비가 밝혀져서 마치 구름이 걷혀 태양을 보는 것과 같았으니 이 또한 근래에 없었던 일이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한결같이 법도를 따랐는데, 음식과 의복으로부터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반듯하여 원칙이 있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바라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남들과 말할 적에는 마음을 열고 심회를 토로하여 남김이 없었다. 동지나 동기간에게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격의 없이 대하였지만, 남들에 대해서 허여하는 사람이 적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경외하여 꺼렸지만, 흠모하는 자들도 많았다.
글을 읽을 적에는 그 내용만 보아 넘기지 않고 반드시 자기에게 절실하고 실용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을 구했다. 사람들이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며 실천에 힘쓰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그들의 허위를 미워하였다. 이 때문에 세속의 무리들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아들을 잃은 뒤로 비록 법도가 조금 달라졌지만, 지키는 바가 있어 흔들리지 않았으며 가난하고 미천했지만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며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니, 부귀 역시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공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으랴. 수양한 바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공의 언행이 사람들에게 추중되었다.
또 한양에서 태어나고 자라 사대부들의 마음과 행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데에 구차하지 않고 단호하였다. 이에 깨끗한 논의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았지만 흉악한 무리들은 반드시 복수하고자 하였으므로, 그 화가 유독 참혹하였던 것이다.
만년에는 독서만 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 그 점을 흠으로 여겼다. 그러나 공은 책이 읽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도를 배운다고 핑계를 대며 명리(名利)를 취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컨대 이기(李芑)는 단지 《중용》에 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고, 이정(李楨)ㆍ황준량(黃俊良)은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이름이 났으며, 왕지망(王之望)ㆍ윤색(尹穡)과 같은 무리들은 과연 입에 담기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대개 공은 당시의 폐습을 바로 잡고자 했기 때문에 말에 혹 병통이 있을 수는 있지만, 말 때문에 본의를 해쳐서는 안 될 것이다. 원근의 사자(士子)들이 함께 덕천서원에 공을 배향하였다.
나는 공과 종유한 지 오래되었으나, 거처도 가깝지 않고 알게 된 것도 나이가 들어서이다. 그래서 공의 젊은 시절 행적에 대해서는 나의 이목이 미치지 못한 바가 많다. 단지 내 마음으로 느낀 점과 보고 들은 것 중에서 대략 한두 가지를 거론하였다.
[주-D001] 맥수가(麥秀歌) : 기자(箕子)가 주나라로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 도성을 지나다, 폐허가 된 궁궐 터에 보리가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 슬퍼하여 부른 노래이다.[주-D002] 졸곡(卒哭) : 삼우제를 지낸 뒤 3개월 안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주-D003] 유회(油灰) : 오동나무 기름에 석회를 개어서 만든 것으로, 서로 잇댄 부분의 틈을 메우거나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데 사용한다.[주-D004] 사람들이 …… 말했다 : 《소학집주증해(小學集註增解)》 〈선행(善行)〉 제11장에 나오는 왕상(王祥)의 효성에 관한 내용이다.[주-D005] 동네 : 대본에는 ‘同’으로 되어 있는데, 《기축록(己丑錄)》 권상, 〈수우당선생 최공행장(守遇堂先生崔公行狀)〉에는 ‘洞’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기축록》을 따라 번역하였다.[주-D006] 장원(掌苑) : 장원서(掌苑署)에 소속된 정6품직이다. 대본에는 ‘掌藝’로 되어 있는데 장예라는 관직이 없어, 《기축록》에 ‘掌苑’으로 된 것을 따라 번역하였다.[주-D007] 안민학(安敏學) : 1542~1601. 자는 습지(習之), 호는 풍애(楓崖),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부친은 찰방 안담(安曇)이며, 박순(朴淳)의 문인이다. 벼슬로 희릉 참봉,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로 2권 1책의 《풍애집》이 있다.[주-D008] 오건(吳健) : 1521~1574.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본관은 함양이다. 부친은 오세기(吳世紀)이며, 조식ㆍ이황의 문인이다.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의정부 사인,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로 10권 5책의 《덕계집》이 있다.[주-D009] 김효원(金孝元) : 1532~1590.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부친은 영유현령(永柔縣令) 김홍우(金弘遇)이며, 조식ㆍ이황의 문인이다. 1572년 오건이 이조 전랑에 추천했으나, 사림으로 척신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 참의 심의겸이 반대하여 거부당했다. 이 후로 심의겸과 반목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저술로 2권 1책의 《성암집》이 있다.[주-D010] 민순(閔純) : 1519~1591.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ㆍ습정(習靜)이다. 부친은 장사랑 민학수(閔鶴壽)이며, 서경덕의 문인이다. 벼슬로 사헌부 지평ㆍ장령 등을 지냈다. 저술로 《행촌집》이 있다. 대본의 ‘幸村’은 ‘杏村’의 오기이다.[주-D011] 철원(鐵原) : 대본에는 ‘철(鐵)’이 결자(缺字)로 되어 있는데, 《기축록(己丑錄)》에 의거해서,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12] 노수신(盧守愼) : 1515~1590.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다. 1543년(중종38)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대사헌, 이조 판서, 대제학 등을 거쳐 영의정까지 역임했으나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저술로 13권 8책의 《소재집》이 있다.[주-D013] 죽순 : 대본에는 없다. 《기축록(己丑錄)》과 《무민당집(無悶堂集)》에 의거하여 ‘筍’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14] 성혼(成渾) : 1535~1598.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ㆍ우계(牛溪),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부친은 현감 성수침(成守琛)이다.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저술로는 6권 6책의 《우계집》, 1권 1책의 《주문지결 (朱門旨訣)》 등이 있다.[주-D015] 파산(坡山) : 현 경기도 파주(坡州)이다.[주-D016] 심의겸(沈義謙) : 1535~158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ㆍ간암(艮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벼슬로 예조 참판, 병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주-D017] 정철(鄭澈) : 1536~1593.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ㆍ송순(宋純)ㆍ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동서붕당 이후 서인계의 주요 인물로 최영경의 옥사 등을 다스리면서 동인들을 배척하였다. 저술로 시문집인 《송강집》 등이 있다.[주-D018] 오래지 …… 그제야 : 이 부분은 대본에 없는 내용이지만, 이 부분을 빼면 앞뒤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기축록》에 의거하여 ‘未久珥果不厭人望 具眼者恥爲友’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19] 그러나 …… 심해졌다 : 이 부분은 대본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이 부분을 빼면 앞뒤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기축록》에 의거하여 ‘珥黨敏學輩 忿嫉日甚’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20] 정여립 모반 사건 : 정여립(1546~1589)은 본관이 동래(東來), 자는 인백(仁伯)이며 전주(全州) 출생이다. 1570년(선조3) 문과에 급제하여 이이ㆍ성혼의 문인이 되었다. 본래 서인(庶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에 붙어서,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ㆍ성혼 등을 비판하였는데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기 위하여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에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여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거사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고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으나 이때 안악 군수 이축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났으며, 이때부터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조작이라는 설도 있다.[주-D021] 이일(李鎰) : 1538~1601. 자는 중경(重卿),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1558년 무과에 급제해 경성 판관 등을 거쳐 전라좌수사ㆍ경원 부사 등을 지냈다.[주-D022] 김수(金睟) : 1547~1615. 본관은 안동, 자는 자앙(子昂), 호는 몽촌(夢村)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벼슬로 우참찬, 호조 판서, 중추부 영사 등을 지냈다. 저술로 《몽촌집》이 있다.[주-D023] 위관(委官) : 죄인을 추국할 때, 대신들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관이다.[주-D024] 이발(李潑) : 1544~158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ㆍ북산(北山)이다. 부친은 제학 이중호(李仲虎)이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화가 미칠 것을 예상하고 대사간을 사퇴하고 대죄하던 중 체포되어 장살(杖殺)되었다.[주-D025] 이항복(李恒福) : 1556~1618.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ㆍ백사(白沙)이다. 부친은 참찬 이몽량(李夢亮)이다. 1590년 호조 참의가 되었고,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 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그 후 병조 판서, 이조 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저술로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 《주소계의(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 등이 있다.[주-D026] 윤두수(尹斗壽) : 1533~1601.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이다. 부친은 군자감 정 윤변(尹忭)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155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대사간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59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주-D027] 정홍조(鄭弘祚) : 자는 사응(士膺)이며, 정인평(鄭仁平)의 양자이다. 진주 사람으로 《진양지(晉陽誌)》 권3에 그 이름이 보인다.[주-D028] 허흔(許昕) : 1543~1622.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경회(景晦)이며, 부친은 결성 현감 허운(許雲)이다.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형조 좌랑, 평안도 도사 등을 지냈다.[주-D029] 좌수(座首) : 조선 시대 지방 군현의 수령(守令)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향소(鄕所)의 벼슬이다.[주-D030] 은대(銀帶)를 찬 관리 : 은대는 정3품부터 종6품의 관원이 사용하던 띠이다.[주-D031] 한광국(韓匡國) : 《기축록》에는 한광립(韓匡立)으로 되어 있다.[주-D032] 정언신(鄭彦信) : 1527~159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이다. 부친은 예조 좌랑 정진(鄭振)이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철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했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주-D033] 윤광계(尹光啓) : 1559~?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ㆍ효정(孝貞)이다. 부친은 윤화중(尹和中)이며, 조헌(趙憲)의 문인이다. 벼슬로 호조 정랑, 평안도 도사, 공조 좌랑 등을 역임했다. 저술로 시문집인 3권 3책의 《귤옥집》이 있다.[주-D034] 말하는 : 대본에는 없는데, 《기축록》의 내용을 근거로 ‘言’ 1자를 보충해 번역하였다.[주-D035] 서울 아이 : 본문의 서대아(西代兒)는 서벌아(西伐兒)의 잘못으로, 서벌아는 우리말 서울을 한자로 음차해 쓴 것이다.[주-D036] 종루(鐘樓) : 조선 시대 한성부의 중심이 되는 곳에 종을 달아 둔 누각이다. 오늘날 종로 네거리에 있는 종각이다.[주-D037] 김명원(金命元) : 1534~1602. 본관은 경주,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이다. 부친은 대사헌 김만균(金萬鈞)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벼슬로 병조 판서, 이조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주-D038] 이헌국(李憲國) : 1525~160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흠재(欽哉), 호는 유곡(柳谷)이다. 부친은 이칭(李秤)이다. 벼슬로 형조 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했다.[주-D039] 근래 : 본문에는 영고(迎古)라고 되어 있는데, 《기축록》에는 근고(近古)라고 되어 있다. 문세(文勢)로 보아 근(近) 자가 맞을 듯하다.[주-D040] 이정(李楨) : 1512~1571.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이다. 부친은 이담(李湛)이며, 이황과 교유하였다. 벼슬로 병조 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주-D041] 황준량(黃俊良) :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황치(黃觶)의 아들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벼슬로 호조 좌랑, 병조 좌랑, 성주 목사 등을 역임했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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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촌집(安村集) 박광후(朴光後)생년1637년(인조 15)몰년1678년(숙종 4)자사술(士述)호안촌(安村)본관순천(順天)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1 3월 3일, 光州 鵝山里에서 태어나다.
*광주 安淸里에 있는 저자의 집 畏省堂에 대한 시문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32 겨울, 成渾과 李珥를 모욕하였다는 이유로 閔黯의 謁聖을 저지하다. ○ 12월, 朴祥, 奇大升, 朴淳의 合享을 宋浚吉, 宋時烈에게 상의하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34 月峯書院에 박상, 기대승, 박순을 합향하다.
安村集卷之一 / 䟽 / 辨松江鄭先生被誣䟽 戊午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42 楊夢擧 등이 鄭澈을 무함하자 상소하여 변론하다. ○ 9월, 金壽恒이 鐵原으로 移配 도중 방문하다. ○ 11월 15일, 安淸里 자택에서 졸하다.
嗚呼。至平者衡。故物之輕重。莫敢遁其情。至明者鑑。故色之姸媸。不得亂其形。聖人之心。其平若衡。其明如鑑。故人之邪正是非。亦不得以混其迹也。今有人而擧重而謂之輕。指姸而謂之媸。其機變之巧。靡所不至。而及遇大聖人。以平衡而稱之。以明鑑而照之。則輕重姸媸。自別爲輕重姸媸。而向之擧重爲輕。指姸爲媸者。不過爲妄人而止焉耳。乃者全羅道生員楊夢擧等。欲追削故贒相鄭澈之爵。援引久遠之事。恣發構捏之說。是誰欺。欺天乎。其所倒置輕重。變幻姸媸者。至巧且密。而終不得售之於至平至明之衡鑑。臣之欽仰殿下無幽不燭之聖德也。有君如此。實吾東億萬年無彊之休也。賢路將自此而復開矣。邦運將自此而益昌矣。雖大舜用中之德。尙何以加此哉。夢擧等誣罔之䟽。殿下旣峻斥之矣。臣復用何說哉。臣彈冠相慶之餘。仍復思之。夢擧等之所以誣鄭澈者。乃所以誣殿下也。乃所以誣仁廟也。聖君贒相。受誣孔多。則臣等雖欲無一言。其可得乎。臣等請以鄭澈忠淸耿介之操及前後受誣之事。爲殿下一一陳之。伏願殿下勿以煩瀆爲罪。而終始垂察焉。臣等竊惟。鄭澈乃宣祖朝賢相也。初受學於先正臣文憲公奇大升。已聞義理之源。又質業於先正臣文靖公金麟厚。益勵孝悌之行。及出而爲世用也。與先正臣文成公李珥,文簡公成渾。結爲道義之交。相與彙征於朝。引君當道。知無不言。君臣相得。千載一時。直節峻彩。爲世所宗。惟其天賦之性。過於抗直。見人之惡而不能小容。故當時朝著間。愛澈者有若而正士。而雖稱以自好之人。亦不無嫌猜之心。木秀於林。風必摧之。則澈安得不與世齟齬也。尙賴宣廟眷愛之隆。有殿虎鵰鶚之褒。今仍其行事之迹。而欲論其爲人。則盖是剛方孤特之人。而激濁揚淸之徒也。不幸中年。士論携貳。東西之目。於是乎分矣。澈尤爲一邊人所忌嫉。卷而懷之。退藏於野者。亦有年矣。及己丑。逆賊之禍作於經幄。實我朝二百年所未有之變也。澈以貳輔舊臣。蒼黃赴闕。聖敎丁寧。許以忠節。俄陞相府。兼受委官之命。是皆宣廟知澈之公直。而寄澈以大事也。澈旣承命治獄。見逆家文書中多擧澈之名。而至有擧事之日。先殺澈之名。出於宣廟親鞠之時。則澈盖以形迹嫌疑。屢乞辭避。而終未蒙允許。受任之後。倍加審愼。前後訊鞠。動皆裁禀。越例獻讞。伸理者多。何甞有擅其獄。如言者所云云乎。况澈之委官。不久而遞。則其以末終就死之人。亦謂之死於澈者。不亦異哉。然則澈爲委官時就死者。亦不可歸之於澈。况遞委官之後。專欲以枉殺之律歸怨於澈。而使當時代爲委官者。無所任其責。此何理哉。試就夢擧等所謂枉死者。據實以陳之。崔永慶。孝友之名播於當時。澈之友成渾亦甞訪見。而有稱譽之辭。則澈雖不見永慶。宿聞其居家之行矣。及逆獄之初。賊徒有李光秀者內招曰。鄭八龍,吉三峯爲大將云。又有朴延齡等招曰。非吉三峯。乃崔三峰也。三峯居智異山下。與逆賊開山徑往來。三峯常坐汝立之上云。於是飛語喧騰。莫諦所指。旣而全羅監司洪汝淳。仍濟源察訪趙應琪所傳飛語。據所聞馳啓。以崔永慶爲三峯。則拿命遂下矣。澈卽回啓曰。永慶以三峯號與否。請令兩南監司覈實以啓。然後隨爲盤問。永慶旣就獄之後。澈於榻前。盛陳永慶孝友之行。而謂必無與逆謀之理。則宣廟亦溫顔酬酢曰。予見其兄弟間書札。孝友則果似有之。及其置對。永慶自謂與逆賊不通一書。而逆魁與永慶一書。出於永慶文書中。自上疑其欺罔。而遂下天網恢恢之敎。且於永慶文書中。有牛溪一夜風生虎。仙李根搖有髮僧之詩。自上以詩語爲凶慘。欲先推問。永慶不知所對。但稱臣素不能爲詩而已。澈回啓曰。此詩乃甲申年間傳於都下。而臣亦聞之。决非永慶所作也。永慶仍此得蒙恩釋。如使澈果如人言。有陰中之計。則何故筵中救解如彼。而乃幷擧永慶所不能對者。而反復分釋。懇懇至此乎。其後再鞠之論出於㙜啓。而澈遞委官已久矣。實不知其議之所從出。至貽書責其時諫官。又製救解之箚。盛諸囊中。以待刑推命下。將欲啓達。永慶適病死獄中。故止之。今其箚本。猶載澈文集中。歷歷往事。班班可考。而今之言者。以陰嗾臺諫。作一白地上說。爲攻陷賢相之計。是欲誣人。而不免爲自誣也。其嗾諸儒生上䟽者。此言奚宜發哉。不過梁千頃,姜峴等誣服之說。爲證於今日。而死生之際。人所難處。舍命不渝。豈可責於人人者哉。况姜峴臨死。草䟽繫諸衣帶。稱以誣服臣姜峴云爾。而爲死後自明之計。南中人士。至今憐之。若以一時誣服。爲千古斷案。則當時賊招中所誣引者。奚止十數人也耶。必欲誣鄭澈。而不察事之是非。可勝痛哉。鄭介淸出自微賤。師事故賢相朴淳。及淳爲一邊人所攻。而介淸又阿附於攻淳者。做得六品之官。南中多士。孰不唾鄙哉。仁廟之所命毁祠宇者。盖以此也。介淸所著文。有節義亡人國之語。又於逆家文書中。有遺逆魁書。曰。見道高明。惟尊兄一人而已云。宣廟下敎曰。所謂道。何道。此人作排節義論。必好與節義相背之事。並鞠問。又將介淸所著說。使査官逐段攻卞。布諸八道鄕校。以正士習。仍命嚴刑而定配于北道。其後又出於逆僧性煕之招。而介淸已死於謫所矣。介淸之所以自取者如此。反以此歸咎於澈。是所謂欲加之罪。何患無辭者也。至如鄭彦信,彦智。兄弟俱被親鞫。前後供辭。多有欺罔。天威方震。賜死之命已下。其時李山海爲首相。柳成龍爲右相。鄭澈爲左相。俱在鞠廳。相顧噤嘿。澈乃敢獨冐雷霆。救解懇惻。終使彦信减死偏配。當時彦信家。以澈有再生之恩。及
辛卯。澈罹讒而謫于江界。彦信使其子協。勞問於數千里之外。苟非生死骨肉之感。其何能如是哉。世之尙論之士。或以澈之力救彦信爲過。而如夢擧等一種論。不詳諗當時事。惟以承訛之說。欲眩人耳目。吁亦恠矣。若夫柳夢井,曺大中,李黃鍾之死。或出於臺論。或由於書札。均在故相臣沈守慶爲委官之日。則其枉殺之責。宜有所歸。而反歸於不當歸之人。今去己丑。未滿百年。而是非顚錯。乃復如此。人心之不公。何其甚哉。彼李潑,李洁及白惟讓等。或與賊情同兄弟。或與賊結爲婚姻。屢出於賊招。固其然也。初出於鄭緝之招。而賴澈之救解。止命遠竄。則潑以季涵不負吾之說。付諸安敏學。而致欵於季涵。季涵卽澈之字也。以潑,洁,惟讓等附賊之親。攻澈之甚者。而欲令圖生必死之中。則他何尙說哉。其後潑等複出於賊徒宣弘福之招。而終未免斃於嚴訊。澈何敢容其力乎。况惟讓書中。有犯上不道之言。人之聞者。怒髮尙竪。而澈猶幷救於當日者。或不無千古是非。今反受鍛鍊之責。人之爲言。奚至此極哉。至李潑老母稚子押膝而死。誠萬世所未有之寃也。至今言己丑獄事者。孰不以此爲殘酷也。然以此歸怨於澈。則澈之寃亦有甚於潑母之寃矣。澈之遞委官。在辛卯二月。而潑之母與子。死於辛卯五月。則不救之責。其可歸於澈乎。主其獄視其死者。尙不入是非之窩。而欲使已遞之澈當之。人雖可欺。而天亦可欺乎。執此一欵。可知他誣衊皆此類也。甚矣。人之誣澈者。不求其端。不訊其末。惟醜詆是務。以至今日夢擧等而極其譸張矣。此後誣澈者。將加其何說哉。噫。澈之忠直而尙不免身後之謗。孰謂公論定於百世乎。况仁廟反正之初。下詢於碩輔。以伸三十年久欝之寃。可謂公論已定。無復疑者。而今夢擧等所以爲說者。專襲於仁弘,爾瞻之論。隱然以仁祖大王大公至正之擧。欲歸之於徇私之地。彼將指天而亦謂之有私矣。烏足與之多卞哉。嗚呼。萬古忠賢。遭讒者何限。而澈受誣者。尤見其無謂。辛卯西塞之竄。都是讒者之伎倆。而多般搆捏之辭。猶不敢以獄事及之者。辛卯之去己丑。才過一年。前後推案。昭載國乘。雖欲誣之。誰肯信之哉。壬辰倭亂。澈在江界謫所。大駕去邠之行。住在松京。始下敎召澈。知公素有忠孝大節。可急赴平壤。以護王子亂離。蒼黃中受知於君父猶如此。則宣廟前後罪澈者。豈其本心哉。及兵燹之後。國書無復存者。至甲午年。澈已去世矣。圖澈者。始以己丑獄事欲歸罪於澈。而然猶舊人尙在。公論難泯。故擧其一二近似之端。只削奪澈之爵。而不敢肆爲之說矣。逮至辛丑年間。鄭賊仁弘得志。欲嫁禍於士林而不得其說。乃以崔永慶之死。謂鄭澈構捏。成渾指嗾。並與成渾之爵而追奪之。自是之後。齮齕鄭澈者。日甚而月異。遂至光海亂朝而極矣。在朝則鄭仁弘,李爾瞻倡之於上。在野則金佑成文景虎和之於下。言發於口。衆莫敢可否。以澈爲陷人之穽而無復顧忌。人皆諱澈之名而不敢道者。幾三十年矣。當時禍機之慘。思之尙凜凜骨寒。而今又有楊夢擧之徒。一踵仁弘,佑成之轍。以探試聖上。誰意聖明之世。有此媢賢者。肆爲欺誣之說哉。我聖上予甚駭然之批。足以破奸膽。夫豈有他疑哉。夢擧等䟽中。引宣祖批辭。爲誣澈之證者。是尤不近於理。君之於臣。猶父之於子也。父之愛子出於天鍾。而有時發怒於子。則或至擧大杖而莫之恤。君之怒臣。奚異於此哉。及其霽怒而悔▣。則加愛而已。宣廟之所以臨亂離。褒澈之忠孝者。豈非天然自出之情哉。若如夢擧等之言。則唐太宗復立魏徵之碑。亦無足取者歟。而况苟使復澈之爵而不合於理。則以仁廟之聖。其肯許之哉。仁廟雖欲許之。而當時賢宰相。布列左右。豈不言其不可哉。臣竊伏聞。仁祖大王自在潛邸。熟諳成渾,鄭澈之寃。登極之初。卽令伸其寃復其爵。而左右夙夜之賢。亦陳其可伸之義。則今夢擧等必欲削之者。抑何意也。其以仁弘,爾瞻之所爲。謂贒於仁廟朝賢宰相之論。必欲踵其轍耶。遵聖賢之言。行聖賢之道者。是亦聖賢也。蹈凶惡之迹而襲凶惡之事者。是亦凶惡也。爾瞻,仁弘之凶惡。不忍發諸口。而夢擧等乃以凶惡之餘論。敢發於淸明之世。欲使仁廟盛德正擧。不彰於後世。其亦不仁之甚者矣。臣等竊復料之。夢擧等所以擧五十年已定之論。而必欲奪鄭澈之爵者。豈但嫉旣骨之澈而已哉。是將以此而探聖上好惡之幾也。何者。宋時烈,宋浚吉。卽先朝禮遇之臣也。時烈與浚吉。在先朝都兪吁咈之盛。眞不讓於三代。不幸浚吉先死而時烈獨在。及殿下嗣服之初。眷遇之隆。少無異於先廟。而時烈以形迹之嫌。不能造朝承命。於是乎三至之說。遂成市虎。以殿下明睿之聖。亦不能無疑於時烈。略以譴謫之罰。加之於時烈。卽父之怒於子也。何甞少損天鍾之愛乎。旣以罪名加於時烈。則一體之浚吉。寧可已死而獨免乎哉。追削之命。遂及於浚吉。乃令先朝禮遇之臣。或死而飮泣於地下。或生而抱寃於荒陬。是豈殿下之本心哉。昔周成王之於周公。避居于東者亦久矣。雖無大風之災。而豈終不寤也。及其返。迎周公而至焉。則成王之盛德益章。周公之輔翼尤著矣。至今千百歲。誰敢有議於成王哉。今我殿下。冲年嗣位。卽周成王也。薄遣儒臣。亦周成王也。臣等雖未知時烈,浚吉之道德爲如何。而亦學周公者也。周公居東三年。乃還於朝。時烈之在竄謫亦三年也。豈聖上悔寤一節。終有異於成王哉。况天災時變。不下大風偃禾。則亦成王修省之日。而殿下有契寤於心者矣。殿下以成王之德。行成王之事則亦成王而已。何甞讓成王一頭地哉。臣等側聞殿下有因灾求言之敎。亦甞有以是說聞於殿下者乎。方今以宋時烈,宋浚吉。爲時諱而不敢發者亦久矣。殿下雖欲聞是說。而孰從而求之哉。臣等竊痛焉。殿下若以成王待周公者。反復深思。使渙汗之音及於浚吉。則九地幽魂。必有感於冥冥之中。是殿下保全舊臣之道也。况浚吉於先大王。不有甘盤舊義耶。至於宋時烈。年今七十一也。白首栫棘。死亡無日。若能自盡於瘴癘之地。則殿下雖欲悔之。似靡及矣。殿下雖不憐二臣。而獨不念先大王禮遇之盛乎。儻蒙殿下乾剛獨斷。快釋二臣之罪。則如楊夢擧誣賢之輩。自當戢其迹而莫敢發矣。此豈但一時之幸而已哉。實國家萬世之幸也。臣等久在草野。久沐菁莪之化。隨事論列。雖異在朝之臣。而其所願忠之志。則亦不居肉食者下矣。臣等目見夢擧等誣賢之䟽見斥於殿下。竊不勝其爲國家喜幸之心。首以鄭澈受誣曲折。終始殫論。末及宋時烈宋浚吉二臣之事。以冀殿下之裁察焉。伏乞殿下勿以人廢言。而使二臣者得蒙恩釋。則國家幸甚。斯文幸甚。臣等無任瞻天望聖祈懇戰越之地。謹昧死以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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畸庵集續錄卷之十二 / 漫述 / [辛卯禍作尹月汀最後止於削黜]
辛卯禍作。尹月汀最後止於削黜。嘗自言平日口不道李家過惡。故當初送人。因子弟爲言。此時一番通問。則保無他虞。余答云。古人有言。死生榮辱。義不可苟。一時儕輩。皆已行遣。而吾獨晏然。豈不愧於心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