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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2 대림 12월 22일 – 133위 006°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133위 006° ‘하느님의 종’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이름 : 이존창(李存昌) 또는 이단원(李湍源), 루도비코 곤자가
출생 : 1759년, 여사울, 천인(賤人)[0.1] 또는 양인(良人)[0.2]
거주 : 홍산, 금산, 고산, 한산, 천안(여사울), 공주
사망 : 1801년 4월 10일(43세), 참수, 공주
가족 : 맏형, 다른 형, 딸 멜라니아(김대건 신부님 조모), 사촌 누이 멜라니아(최양업 신부님 외조모, 곧 이성례 모친), 완전히 모자라는 손자.[0.3]
‘충청도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일컬어져 온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는 내포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05-3)의 부유한 천인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이고, ‘단원’(端源)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분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1]
본디 재주가 많은데다가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15세 이후 유명한 학자들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다가 17세 때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갔고, 특히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운 뒤 영세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고향 여사울로 내려가 천주 신앙을 인근 지역에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1784년 말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였다.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 덕택에 여사울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역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어 그는 1786년부터 약 1년 동안 시행된 가성직 제도 아래서 신부로 임명되어 전교 활동에서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루도비코 곤자가가 첫 시련을 겪은 것은 1791년 신해박해 때였다. 이 박해로 체포된 그는 공주 감영에 투옥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형식적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며, 곧 신앙을 회복하였다.[2] 그런 다음 부여 홍산(鴻山)으로 이주하여 다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1795년 봄 서울에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다시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같은 해 5월(음력)에 일어난 을묘박해를 피해 지방으로 내려온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는 이 을묘박해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는 굳게 신앙을 지켰음에도 처형되지 않은 채 감영 옥에 갇혀 지내게 되었으며, 비밀리에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연락하여 교회 밀사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다.[3] 1799년에는 한때 마음이 약해져 감영옥에서 풀려나 천안으로 이송된 뒤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변함없이 꿋꿋하게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4]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루도비코 곤자가는 다시 공주로 이송되어 감영 옥에 투옥되었다.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의금부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5] 같은 해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는 해읍정법(該邑正法: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여 그곳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라는 판결)의 명에 따라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았다.
“(이존창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사교(邪敎, 곧 천주교)에 빠져 고향 사람들을 정도(正道, 곧 유교)에서 벗어나게 했고,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천주 교리를 전하였다.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모든 선처가 불가능한 처지에서도 하해와 같은 은혜로 수년 전에 그를 풀어 주었다. 당시 그는 스스로 새로워지기로 약속하였으나 …… 전에 (천주교에) 물들었던 생각을 뉘우치지 않았고 마음을 고쳐먹지 않았다. 이런 잘못을 생각한다면 그를 만 번 죽여도 가볍다.”[6]
이후 루도비코 곤자가는 끝까지 어떠한 나약함도 보이지 않고 칼날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그가 순교한 뒤에 시신을 거두어 선산에 안장했는데, “그의 몸을 거둘 때 머리가 목에 붙어 있었음을 확인했고, 목둘레에 흰 줄만이 칼자국을 나타냈을 뿐이었다.”고 한다.[7][8]
[註]__________
[0.1] 강세정(姜世靖, 1743-1818)의 ‘송담유록(松潭遺錄)’에 “신사원(申史源, 1732-1799, 1785.8.10.-1789.6.20.:예산현감, 1789.6.21.-1791.12.3.:진산군수)이 뒤늦게 벼슬에 나아가 예산 현감이 되었다. 그 땅과 접해있는 천안 여소동(余蘇洞, 여사울)에 이존창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홍낙민(洪樂敏, 1751-1801)이 속량(贖良)해준 노비로, 자못 문필을 알아 홍낙민에게서 수업했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사학(邪學)만 공부하여 근처에서 이름이 있었다. 상민(常民)은 말할 것도 없고 남녀노소가 서로서로 전하여 익혔다. 신사원이 공문을 보내 붙잡아서 천안의 감옥에다 가두었다.”라고 전한다. ‘홍낙민이 본디 노비였던 이존창을 풀어주어 良民이 되게 해주었다’라는 공서파(攻西派) 핵심인물인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부친 강세정(攻西派)의 ‘송담유록’이 천주교에 대해 어디까지 사실에 기초하여 기록하였을까······? 강준흠은 천주교와 관련된 정약용의 석방을 반대하였고(1814년), 정약용이 옹호하던 신서파(信西派) 채제공(蔡濟恭) 직계를 싸잡아 비난한 인물이다.
또한, “이존창은 천안(天安)의 상천(常賤)이다. 일찍이 이름이 군적(軍籍)에 올라 있었다. 그가 학문을 하기 위하여 태수(太守)에게 군역(軍役)에서 면해 주기를 청하자 태수가 그의 재주를 아껴 면역(免役)을 허락하였다.”(이재기, ‘눌암기략(訥菴記略)’, 12b). ‘눌암기략’도 ‘송담유록’의 공서적(攻西的) 필투(筆套)라서 천주교를 비난하고 빈정댄다: “사학하는 무리의 법문(法門)은 재물을 함께 나누고 여색을 함께 하는 까닭에 과부와 홀아비 및 가난하여 스스로 먹고살 수 없는 자들이 모두 기꺼이 내달아 가곤 하였다. 비록 천한 종놈이라도 한번 그들의 무리에 들어가면 마치 형제처럼 보아 등급이 있는 줄을 몰랐으니, 이것이 그들이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미혹시키는 꾀였다.”
[0.2] 이존창은 양인(良人) 신분으로 죽을 때까지 그 신분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사회 질서에 순응하면서 그 자신의 위치에 만족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양인으로서는 여전히 어려웠던 학문적 욕구와 실천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신분을 극복하려 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김수태, ‘사도 이존창과 내포 신앙 공동체의 형성’, p.42; 차기진, ‘이존창의 생애와 신앙’, pp.166-167).
[0.3] 차기진, ‘여사울 성지 자료집’, 2007년, pp.12-13.
[1] 박종악(朴宗岳), 『수기』(隨記), 장서각 소장(귀 k3-625, MF35-33); 이재기(李在璣), 『눌암기략』(訥菴記略),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2월 23일. 다음에 기록한 이존창의 생애에 관해서는 차기진, 「이존창의 생애와 신앙」, 『교회사 연구』 제19집, 2003, 166-178면을 참조할 것.
[2]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51, 65; 『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7월 24일.
[3] 『추안 및 국안』, 신유 2월 16일 이존창; 신유 10월 11일 황심; 『사학징의』, 1권, 신유 4월 26일 김유산; A. Daveluy, Ibid, f. 65.
[4] 『추안 및 국안』, 신유 2월 16일 이존창; A. Daveluy, Ibid., f. 66.
[5] 『추안 및 국안』, 신유 2월 16.17.21일 이존창.
[6]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128b.
[7]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113;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152.
[8] 이존창에 대한 조선실록 기록
1)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3일(양력 1791.11.28)
평택 현감(平澤縣監) 이승훈(李承薰)과 양근(楊根) 사람 권일신(權日身)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진산 군수(珍山郡守) 신사원(申史源)이 전에 예산(禮山)을 맡고 있을 때, 민간의 요서(妖書)를 거두어 모아 관청의 아전에게 맡겼다고 전에 신에게 말하였습니다. 또 이번에 신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말하기를 「예산의 촌백성들이 갖고 있는 언문 번역서나 베낀 책을 곧 형리(刑吏)의 상자 속에 맡겨 두었는데, 그 중에 《성교천선(聖敎淺說)》과 《만물진원(萬物眞源)》 두 책은 모두 증거가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두 책이 간행된 것인지 베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촌백성들에까지 미쳐 그 성행함이 이와 같으니, 몰래 간행한 것도 역시 의외의 일은 아닙니다.”
“또 예산의 백성 이존창(李存昌)이란 자는 이미 본읍에서 형벌을 받고도 한결같이 뉘우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인의 교화를 해치고 인륜(人倫)을 망치는 것으로 보면 책을 간행한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기호 지방에 사설의 피해가 가장 심하게 된 것인데, 그 사실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유사가 한 번 손을 쓰면 될 것입니다. 신은 근심과 개탄스러움이 가슴에 가득하여 또 망언(妄言)을 하고 말았으니, 참람된 죄 스스로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예산 백성의 행위가 진실로 이와 같다면 매우 가증스러운 일이나, 도신에게 맡겨서 처리하면 족할 것이다. 그 죄가 마땅히 죽일 것이면 조정에 보고하게 하고, 그 실정이 가히 유배로 끝낼 수 있는 것이면 곧바로 도신이 결정하도록 할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2)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13일(양력 1791.12.8)
전 정언 이기경(李基慶)을 경원부(慶源府)에 유배하였다. 이기경이 상소하기를,
“또 삼가 듣건대 서학(西學)의 법에 반드시 나보다 먼저 영세(領洗)를 받은 사람에게 영세를 받은 뒤에야 교도로 들어간다 하는데, 영세란 것은 불교의 연비(燃臂)와 같은 것입니다. 진실로 승훈이 천주관(天主館) 안에서 서양 오랑캐의 손에서 영세를 받아오지 않았다면, 그 뒤 일신(日身)이나 존창(存昌) 등 무리와 허다한 괴귀(怪鬼)들에게 과연 누가 영세를 주었겠습니까. 지금 만약 일신과 존창의 무리들을 엄히 심문하여 영세를 받은 곳을 물으면, 한두 번 건너가지 않아서 저절로 승훈에게 이르게 될 것입니다.”
3)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2월 2일(양력 1791.12.26.)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이 장계하기를,
“천안(天安, 여사울)의 이존창(李存昌)을 신의 감영에 잡아다 처음에 엄히 매를 쳤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을 가두어두고 여러 가지로 효유했더니, 그가 정신이 번쩍 들며 크게 깨달아 사학(邪學)을 배척해 부르기를 요술(妖術)이라고까지 하는 등 허물을 뉘우치고 정도(正道)로 돌아올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대로 가두어두고 계속 훈계하며 신칙하여 완전히 의심없게 된 것을 알게 된 뒤에 적절히 헤아려 처리할 생각입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감화시키기 어려운 최필공(崔必恭)같은 자도 이미 정도(正道)로 돌아왔다마는, 기호 지방에서 감화시키기 어려운 자로 말하면 바로 이존창이었다. 그런데 이제 존창이 또 크게 깨달아 죄를 후회하고 사학을 배척하여 요술이라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깨달았음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물든 것은 이미 오래 된 반면 선으로 돌아온 날은 얼마 되지 않으니 이 뒤로 그가 진실로 정도로 돌아왔는지의 여부는 그가 공로를 세워 속죄하려는 성실성 여부를 살펴 결정할 문제이다.
지방관에게 명하며 그 근처 고을 사람들의 의혹이 풀어질 때까지 간간이 말을 해서 힐문하여 사실인지를 따져보고, 그 외에 겉으로 드러난 모습도 참고해서, 터럭만큼의 찌꺼기도 속에 남아 있거나 밖으로 드러난 것이 없게 된 뒤에야 영구히 석방해서 통쾌하게 그로 하여금 평민이 되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힘을 다해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백성들을 효유하고, 이 뒤로 이 일로 감영에 보고해 오거든 경은 즉시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4)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2월 11일(양력 1792.1.4.)
호서의 사학 죄인(邪學罪人) 이존창(李存昌)을 석방하여 평민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존창이 도백(충청감사)에게 글을 올려 스스로 정신이 번쩍 들며 잘못임을 깨달았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전교하기를, “(이존창) 그 말이 이치에 가까우니, (이존창) 그 마음이 정도(正道)로 돌아온 것을 증험해 알겠다. 죄 없는 평민이 되도록 해서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서로 본받아 나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으로 옮겨가는 아름다움이 있게 하라.” 하였다.
5) 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7월 24일(양력 1795.9.7.)
관학(館學) 유생 박영원(朴盈源) 등이 상소하기를
“생각건대 저 이가환이 당초에 깊이 빠져든 것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끝에 가서 이단의 교설을 조금 물리쳤다고 하는 무슨 명백한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범한 죄를 논한다면 조정의 주벌(誅罰)을 어떻게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가령 정약전(丁若銓)의 대책(對策)에 대해서는 이미 성상의 분부를 받든만큼 감히 다시 제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형제가 본래 가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신도로서 사학(邪學)의 우익(羽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만 사람의 입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이승훈(李承薰)이 요서(妖書)를 구입해 와서 그 흉악한 외삼촌을 학습시켰다고 한세상이 모두 전하고 있고 보면 그 패거리로서의 주벌을 어떻게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경기 지방의 권일신(權日身)과 호서(湖西)의 이존창(李存昌) 같은 무리들로 말하면 전의 형옥(刑獄)에서 모두 자복(自服)했었는데 옥문(獄門)을 나오자마자 또 다시 예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먼저 가환의 무리부터 전형(典刑)으로 분명히 바로 잡음으로써 그 패거리들이 단속할 줄을 알게 하소서.”
6)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2월 23일(양력 1797.3.21.)
사학(邪學) 죄인 이존창(李存昌)을 다시 도신(道臣, 충청감사)을 시켜 문초했다. 존창은 신창(新昌) 사람이다. 사학의 교주로 자처하였는데, 병오년에 일이 발각되자 도신에게 명하여 끌어다가 문초하였다. 존창이 마음을 고치고 새로운 길로 나가겠다고 공초하니, 풀어주었다. 그런데 을묘년(1795년)에 또 다시 염찰(廉察)에 걸려들어 감영(공주)의 옥에 가두었는데, 그의 공초가 전과 서로 달랐다. 대간의 상소가 일어나자 형조에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 등이 모두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륙(刑戮)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말단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으로 대하고 그 책만 불사르면 묘족(苗族)처럼 완고한 자들도 감동하는데 미천한 일개 존창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도신(충청감사)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겉만 고친 척하고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경우 연전의 최필공(崔必恭)의 예에 따라 도신이 직접 가르치고 경계하여 개과천선한 효과가 있으면 방면하고 그렇지 않으면 법을 적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고치게 하라.” 하였다.
7) 정조실록 48권, 정조 22년 5월 22일(양력 1798.7.5.)
지평 윤함(尹涵)이 아뢰기를,
“이단(異端)에 대한 폐해를 성인이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에 비유하였는데, 지금 이른바 서양학(西洋學)이라는 것이 바로 그중에서 더욱 심히 패려한 것입니다. 연전에 내린 조정의 금령이 더없이 신엄(申嚴)하였고 보면, 이제 사설(邪說)이 영원히 지식되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듣건대, 호서 지방에는 그 무리들이 실로 번성하여, 곳곳에서 서로 무리를 불러 모으고 곳곳에서 사람을 속여 꾀면서 궁벽한 도서 지방이나 산속 토굴 사이에 자취를 숨기고 있는 자들이 도리어 지난날보다 더 치성하고, 심지어는 도성 안에도 그 무리들이 계속 늘어나서 처단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곧 다름이 아니라, 전하께서 비록 금한다고는 하시나 뿌리를 뽑지 못하여 그들의 소굴이 아직도 남아 있음으로써 이렇게 오래갈수록 더욱 치성해지는 것입니다. 아, 저 천리(天理)와 인기(人紀)를 멸절시키는 사설이 아직도 감히 이 천지 사이에 제멋대로 행해지고 있으니, 또한 어찌 하늘이 노염을 품고 음양이 화기를 잃는 일이 없겠습니까. 청컨대, 전하께서는 먼저 그들의 소굴부터 속히 깨뜨릴 방도를 진념하시어, 그들로부터 유혹당한 저 백성들로 하여금 회오(回悟)할 바를 알도록 하셔서 음양의 화기를 도양(導揚)하는 한 가지 도움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호서 지방의 소굴에 대해서는 대신이 이미 말하였으니, 절로 의당 거조(擧條)를 낼 것이다. 그 밖의 경외 인민들의 미혹을 깨우치고 지식시키는 방도에 대해서는 각각 유사가 있으니, 유사의 직무 수행이 성실하지 못할 경우에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대신은 그들을 논박하여 감죄하고, 너희들은 그들을 규핵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먼저 이존창(李存昌)을 베어 죽인 다음에야 호서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점차로 감염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대저 이존창은 그들 가운데 두목으로서 전혀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소굴을 만들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비록 그런 하찮은 것들까지도 반드시 그 악을 변화시켜 삶으로 인도하려고 하니, 그렇다면 저 돼지나 물고기, 나무나 돌맹이 같은 것들도 의당 감격할 터인데, 저 이존창은 어둡고 강포하여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를 처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혹은 서로 다투어 주육(洒肉)을 준비해서 옥중(獄中)으로 찾아가 그를 위문하기까지 한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사람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는 의리이겠습니까. 도신(道臣, 충청감사)으로 말하더라도 의당 사유를 갖추어 진문(陳聞)해서 처분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직까지 가부간에 아무런 말이 없으니, 청컨대 해당 전후 도신(충청감사)들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속히 사실을 열거하여 치계하도록 해서 율에 따라 처단할 뒷받침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 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 8월 8일(양력 1798.9.17.)
부교리 심규로(沈奎魯)가 상소하기를,
“요즘 듣건대 호서(湖西)의 여러 고을에서 양학(洋學)이 점차 기세를 올리고 있다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은 탓으로 가지와 잎이 점점 불어나는 데 연유합니다. 호서의 감옥에 수감된 이존창(李存昌)은 바로 사당(邪黨)의 소굴인 동시에 난민(亂民)의 두목 역할을 하고 있는 자인데, 지금까지 목숨을 붙여둔 채 정법(正法)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감히 두려움 없이 흉악하게 기세를 부리고 완악하게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서 그만 옥 안에서까지 사당(邪黨)을 영접하고 거칠 것 없이 먹고 마셔댄다 합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엇을 겁내어 점차 물들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이존창을 율(律)대로 정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학(邪學)에 대한 일은, 그 폐해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전에 단속하고 금지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간절하게 부탁했었는데, 가령 한 마을에서 장로(長老)가 미연에 제지하고,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심한 경우 드러나는 대로 금지시켰다면 이런 이야기가 어찌 꼭 매번 장주(章奏)에 오르겠는가. 이존창에 대한 일은 전에 판하(判下)한 사연대로 하라고 도백(道伯, 충청감사)에게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9) 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 8월 26일(양력 1798.10.5.)
헌납 임장원(任長源)이 상소하기를,
“심지어는 이존창(李存昌) 같은 자에게도 정형(正刑)을 시행하지 않자 신약추(申若樞)라는 자가 그 뒤를 바로 이어 일어났는데, 산에 봉선(封禪)을 행하고 하늘에 제사드리라고 청한 것이 과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임금을 한(漢)나라 당(唐)나라 때의 임금처럼 되도록 유도하여 봉선하는 잘못된 예(禮)를 행하게끔 길을 열어 놓으려 한단 말입니까. 이것만으로도 그지없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이미 범했다고 할 것인데, 은덕을 추켜올려 칭송하면서 그 말을 꾸미고 함원 인통(含冤忍痛)의 의리는 하나도 없게 하였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천하를 유도해 오랑캐로 만들려고 하는 심산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미(氣味)와 맥락(脈絡)을 보면 완연히 양류(洋流)에서 나온 것인데, 이렇게 외람되게 한번 시험해 보려고 획책한 것 또한 사주를 받고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존창을 속히 방형(邦刑)으로 바로잡고 신약추를 잡아다가 국문하여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10) 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5월 25일(양력 1799.6.27.)
대사간 신헌조가 아뢰기를,
“비록 성상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여 기르려는 어진 마음으로 반드시 불순한 무리들을 교화시켜 올바른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더라도, 저 인륜을 끊어버린 무리들은 이미 군신 부자의 윤리를 모르니, 어찌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어 모두 새롭게 하는 교화에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간혹 불순한 학문을 공격하는 자라고 하는 자가 있기는 하나 겨우 이존창(李存昌) 한 사람을 대충 거론하여 책임이나 면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이 성실하지 못한데 사람들이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그 소굴 속에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을 말하자면, 조정의 벼슬아치로는 이가환(李家煥)이 있고 경기에는 권철신(權哲身)과 정약종(丁若鍾) 같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이존창 같은 자가 한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김려(金鑢)와 강이천(姜彛天) 같은 무리들은 취향은 다르나 길을 같이하고 얼굴은 다르나 배짱은 맞는 자들로서 빈틈없이 일을 해나가는 것이 지극히 흉악하고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들에 대한 근심 걱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11) 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6월 4일(양력 1799.7.6.)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지당합니다. 대개 그의 처지로 보아 충분히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구차스럽게 모면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의 우뚝한 절개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존창(李存昌)에 대해서 (충청)감사의 장계에서는 용서해 주자고 청하였다. 깨달았다고 하였고 보면 말라 죽게 하는 것은 또한 불순한 책을 불사르고 불순한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의리가 아니다. 심환지(沈煥之) 판부사는 의논 가운데에, 그것이 참으로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하기는 했으나 그 말은 오히려 억측에 가깝다. 성인(聖人)이 《주역(周易)》을 만들면서 혁괘(革卦)에서, 그 태도부터 고치고 마음을 고치는 데에 이르게 하였다. 어찌 먼저 마음부터 고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설령 이존창이 과연 마음을 고친 실지가 없더라도 용서하자는 (충청)감사의 장계가 올라온 이상 조정의 체면으로서야 어찌 의심을 가지고 용서에 인색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충청)감사의 장계가 경솔함을 면치 못한 듯합니다. 그가 이미 여러 해를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이른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형장을 이기지 못하여 그런 것이지 반드시 정말 반성하여 새롭게 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완전히 용서하는 일을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온 세상이 모두 비린내나고 더러운 와중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데도 우리나라만은 유독 깨끗함을 보존해 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불순한 학설이 횡행하여 그 피해가 장차 오랑캐나 금수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지금 이 불순한 학설을 물리치는 방도는, 나는 바른 학문을 밝히는 길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뒤 경연의 하교에서 거듭 당부했을 뿐만이 아니다. 먼저 조정에서부터 인재를 등용하거나 버릴 때에 반드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구하여 등용하고 육예(六藝)의 과목에 들어 있지 않은 자는 물리치고 배척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불순한 학설이 절로 사라질 것이다.
내가 한 세상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위로는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조정에 널려 있는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태반이 경학의 뜻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바른길을 벗어나 알맹이 없는 외형만을 오로지 일삼는 사람들이다. 문체는 난잡하고 글씨는 바르지 못하며 몸은 선왕의 행실을 본받지 않고 입은 성현들의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 위의나 용모에 이르러서도 모두가 이 모양들이다. 혹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운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배우는 것이 이런 것들이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속된 투이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폐단을 구제할 만한 약이 없다. 바른 학문이 좋다는 것을 마치 고기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참으로 알아서 애쓸 것도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 하였다.
12) 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 8월 3일(1799.9.2.)
형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의 이문(移文)에 의하면, 이존창(李存昌)이 석방되어 돌아온 뒤에 특별히 살려준 조정의 고마움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설 계책을 서둘러 세우기를 ‘지금 만약 시골마을에 따로 떨어져 있다면 남에게 신임을 보이기가 쉽지 않으니 고을 밑에 살면서 일상적인 언행이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선한 길로 옮겨간 보람이 세상에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혹시 이단에 빠져들어 스스로 헤쳐나오지 못한 자가 있으면 또한 앞으로 가르치고 일깨워 기어코 성인의 교화 속으로 함께 돌아오게끔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관가의 근처에 와서 살게 했는데, 그의 집안에서의 평소 행동을 특별히 살펴보고 이따금 물어보면 완전히 마음을 바꿔 더이상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염탐하여 살펴보도록 해당 고을에 특별히 당부하고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매월 조정에 낱낱이 이문할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존창이 그의 잘못을 이미 깨우쳤다는 것은 분명하여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다. 게다가 도에서 보낸 문서와 고을에서 올린 보고에 또 이처럼 증거가 있으므로 외양을 바꾼 것 이외에 마음까지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최필공(崔必恭)에 비하면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하고 실제적인 흔적이 없는 것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아울러 남들도 깨우쳐서 다른 사람과 자신이 다 보통사람들이 하고 있는 대로 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이단에 빠진 자를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방도를 가지고 다시 본도의 감사에게 엄중히 신칙하라.” 하였다.
조선 제22대 왕 正祖(17521.10.28.~1800.8.18.)은 1776.4.27.(음 3.10) ~ 1800.8.18.(음 6.28)까지 재위했다.
13) 정조실록 1권, 정조 대왕 행장(行狀, 재위 기간에 한 일을 사후에 적은 글)
······
겨울에 호남의 도신(道臣)이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자기 아비가 죽었는데 제사도 모시지 않고 사판(祠版)을 불태워버렸다고 아뢰었다. 그 당시 일종의 사도(邪徒)들이 서양(西洋)의 야소(耶蘇) 교리에 젖어들어 연경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여 저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익히고 하였는데, 그는 하늘을 속이고 귀신을 홀대하고 임금도 어버이도 다 버리고 윤기(倫紀)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명분(名分)이 뒤범벅된 교리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저들끼리 당여(黨與)를 결성하는 등 경기 지역과 양호(兩湖) 사이에서 나날이 번성 일로에 있었다.
그중의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권일신(權日身) 등이 더욱 두드러진 자들이었으며 최필공(崔必恭)·이존창(李存昌)도 밑바닥 층에서는 가장 깊이 빠져있는 자들이었다.
유사가 그들을 잡아두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형을 가하여 가지런하게 만드는 것은 덕으로 인도함만 못한 것이다. 내 장차 그 서적은 불태워버리고 그들은 다시 사람으로 만들겠다.” 하고는, 서울과 외지를 막론하고 집에 서양 서적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모두 관에 자수하도록 명하여 책은 모아 불태우고 가환·약용·승훈 등은 견책하여 저들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게 했으며 (권)일신과 (최)필공은 형조로 송치하고 (이)존창은 호옥(湖獄)에다 가두는 등 형을 가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여 되도록 감화(感化)를 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왕이 그 도계(道啓)를 보고나서는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렇게까지 패역무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충·상연에게 모두 대벽(大辟)을 적용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양의 강한 기운이 쇠퇴하면 음의 재앙이 고개를 들듯이 사설(邪說)이 퍼지는 원인은 정학(正學)이 밝지 않아서인 것이다.” 하고, 묘당(廟堂)과 각도에 명하여 경(經)에 밝고 행실이 올바른 선비들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였으며, 또 명(明)나라 말 청(淸)나라 초기에 유행했던 패관 소설[稗官小品] 종류를 단속하고, 연경에 가서 서적 구입을 못하도록 금법을 거듭 엄히 했다.
그리고 영남 선비들이 사학에 물들지 않은 것은 바로 선정(先正)들의 유풍(遺風) 때문이라 하여 옥산(玉山)·도산(陶山) 등 서원(書院)에 제를 내리기도 하였다.”
······
14)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2월 5일(양력 3월 18일)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사학이 세도(世道)에 대해 깊고도 오랜 근심이 되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다는 논리이니, 도리를 멸절시키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힌 일은 손꼽아 이루 다 셀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성덕(盛德)으로 반드시 그들을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감화시키고자 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의 함용(含容)하시는 성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무리는 끝내 감화될 줄 모른 채 갈수록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최필공과 호서(湖西)의 이존창(李存昌)에 이르러서는 저들이 선조(先朝)께 영구히 사학을 버리겠다고 공초를 바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또 사학을 하고 있으니, 그들은 사리에 어둡고 완악하여 감화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것을 어찌 어렵게 여겨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 무리는 만약 일률(一律)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징계하여 면려할 방도가 없습니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최필공·이존창은 지난해 갇혔을 때 명백하게 사학을 버리겠다고 공초를 바쳤었는데, 지금 또 사학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는 사학 이외에 또 임금을 속인 죄를 첨가시켜야 할 것이다. 임금을 속이는 것은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률(一律)로 감단하더라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다.”
우승지 최헌중(崔獻重)이 말하기를,
“최필공·이존창과 같이 끝내 나쁜 짓을 행하는 것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한결같이 저뢰(抵賴)하는 자는 감화를 받아 따르려는 뜻이 없는 자들이니, 아울러 역률(逆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밖에 면모만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않는 무리는 비록 사람마다 모두 주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사대부로서 깊이 빠진 자는 율(律)을 갑절 더 적용함이 마땅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비록 묵형(墨刑)이 없다 하나, 지금 만약 경면(鯨面)의 형을 베풀어 그 무리를 구별함으로써 은연중 자취를 숨겨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한다면 이를 본 사람들이 장차 저절로 그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척연히 두려움을 알게 될 것이니, 금법(禁法)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소멸되기에 이를 것입니다. 남몰래 살펴서 적발하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근래에 듣건대 경외(京外)에서 조령(朝令)에 의거하여 차례로 거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연곡(輦轂)은 곧 교화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경조(京兆)075) 에서 오부(五部)에 신칙(申飭)하여 엄중히 과조(科條)를 세우고 절목(節目)을 만든 다음 방곡(坊曲)에 효유함으로써 도깨비 같은 무리로 하여금 그 형세를 도피할 수 없게 한다면, 거의 착하게 되어 악한 것을 멀리하게 하는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육형(肉刑)은 시행할 수 없다. 그 나머지 여러 조목은 묘당에 내려 품처하게 해서 영구히 종식시키는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기하겠다.” 하였다
15)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2월 18일(양력 1801.3.31.)
장령 이인채(李寅采)가 아뢰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기양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先朝)에서 불식(拂拭)하신 은혜를 생각하지 않은 채 사학(邪學)의 무리가 도망하여 모이는 소굴을 달갑게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권일신(權日身)을 집에서 양육하여 교주(敎主)의 명호를 자처하고 이존창(李存昌)이 있는 감옥으로 찾아가 음식물을 보내 준 등의 일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떠들썩하게 전해졌으니, 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권철신(權哲身)의 집안과 혼인을 맺고는 삼흉(三凶)과 의기가 투합하여 요언으로 선동하고 이익으로 속여 유혹하자, 많은 간사한 무리가 그림자처럼 따랐으니, 근년 이래로 사학이 날로 치열해진 것은 이 역적들이 작용(作俑)091)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더욱이 그 아들 이총억이 전에 권일신의 옥초(獄招)에 나왔고, 지금 포청(捕廳)의 기포(譏捕)에서 붙잡혔으니 마음으로나 자취에 있어서나 어떻게 요행히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연명(聯名)으로 상소할 계책을 삼고는 동요시켜 벗어나려는 버릇을 부리고자 하였으니 더욱 기탄함이 없어서 지극히 영악하고도 완패합니다. 청컨대, 전 승지 이기양은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히 추국해서 실정을 알아낸 다음 흔쾌히 전형(典刑)을 바루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16)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2월 21일(양력 1801.4.3.)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러서는 역적 정약종의 아우가 될 뿐만 아니라 윤지충(尹持忠)은 곧 그의 내종 사촌(內從四寸)이니, 윤지충이 복법(伏法)된 후에 저 무리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요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낙민(洪樂敏)은 호서(湖西)에 있을 때부터 이존창(李存昌)과 친숙하다는 말이 멀고 가까운 지역에 두루 전파되었으니, 당여(黨與)의 주벌(誅罰)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오석충(吳錫忠)은 권일신의 가까운 인척인데, 권일신의 아들과 조카가 도성(都城)에 출입할 적마다 그가 받아들여 그의 집에 머물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른바 포도수(逋逃藪, 죄를 짓고 달아난 사람들이 숨어 있는 곳) 입니다. 홍교만(洪敎萬)은 사술(邪術)을 철저하게 믿어 정약종의 무리와 주무하고 체결(締結)하였음을 세상에서 지목받고 있으며, 그의 당내(堂內) 지친(至親)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떠들썩하게 전해지고 있어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습니다. 이러한 흉사(凶邪)한 무리는 단연코 일률(一律)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進達)한 바가 좋으니, 대신에게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17)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2월 25일(양력 1801.4.7.)
시임 대신·원임 대신·금오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국문의 일을 지체시키고 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하였는데,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이존창(李存昌)은 사학에 오염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실로 호서(湖西) 한 도의 거괴(巨魁)가 되는 자입니다.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간데다가 변사(變詐)가 무상(無常)하였으니, 중외(中外)의 멀고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이존창이 사학의 괴수가 됨을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러한데도 이 자가 만약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간다면 팔방(八方)의 청문(聽聞)에 손상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당(邪黨)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존창도 살았으니, 다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다.’ 할 것이니, 이 또한 일률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옥당(玉堂)에서 이미 진소(陳疏)하였으므로 이미 발포(發捕)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이미 적발된 진장이 없었으니, 이기양은 특별히 백방(白放)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이기양은 곧 고 상신(相臣) 이덕형(李德馨)의 후손입니다. 고 상신은 국가에 대해 큰 훈로가 있었으니 신들도 또한 어찌 곡진하게 용서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그와 인척 관계를 맺은 자들이 모두 사학(邪學)의 괴수들이고, 또한 일찍이 이존창을 집안에서 양육하며 문필을 가르쳤으며, 또 전에 최창현과 친숙했었습니다. 비록 적발된 진장은 없다 하더라도 갑자기 백방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뢴 바가 이와 같으니, 이기양을 다시 위엄(威嚴)을 갖추어 엄중하게 추문해서 의계(議啓)할 바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
이병모가 말하기를,
“추국하여 정법(正法)할 경우에는 으레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만, 지난해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무리는 신주(神主)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기하였다 하여 모두 부대시(不待時)의 율(律)을 시행했었습니다. 이번의 여러 죄수들도 부대시의 율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그 가운데 이존창은 본도(本道)에 내려 보내어 백성들을 모아 놓은 후에 정법(正法)하여, 한 도에서 경계가 되어 두려워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18)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2월 26일(양력 1801.4.8.)
“죄인 이존창(李存昌)은 본래 호서(湖西)의 관교(官校)로서 사학에 오염되었는데, 최필공과 동시에 체포되었다. 영옥(營獄, 충청감영獄)에 들어가기에 이르러, ‘뉘우쳐 깨달았다.’고 공초를 바치고 석방되었는데 한결같이 곧바로 포도수(逋逃藪, 죄를 짓고 달아난 사람들이 숨어 있는 곳)를 만들어 전혀 오염된 데 대해 개철(改轍)하지 않은 채 무리를 불러 모아 반결(盤結)하고 호서의 거괴(巨魁)가 되었다. 충청도에 압송(押送)하여 정법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19)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4월 25일(양력 1801.6.6.)
전라 감사 김달순(金達淳)이 계문(啓聞)하기를,
“도내의 사학 죄인(邪學罪人) 유항검(柳恒儉)·유관검(柳觀儉) 형제와 윤지헌(尹持憲)·이우집(李宇集)은 요사하고 황탄하여 스스로 윤리와 기강을 단절하고 많은 무리를 불러 모아 호남(湖南)의 거괴(巨魁)가 되었는데, 최창현(崔昌顯), 황사영(黃嗣永)·윤지충(尹持忠)·이존창(李存昌)의 무리와 난만(爛漫)하게 화응하고 주문모(周文謨)를 아비처럼 섬겨 맞이하여 머물러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서찰을 받아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들여 보내고 사상(邪像) 및 이른바 영세(領洗)할 때 쓰이는 성유(聖油)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모의(謀議)한 바, ‘신부(神父) 한 사람으로는 그 형세가 매우 고단하니, 반드시 하나의 큰 선박을 서양국에서 맞이해 와서 나라 안에 그 교(敎)를 널리 선양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으니, 허다하게 주무한 자취가 지극히 간교하고 흉악하였습니다. 따라서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불러 유혹하여 두서너 고을의 백성들이 절반은 변하여 이적(夷狄)과 금수(禽獸)가 되었는데, 점차 서로 끌어들였으니 그 수가 또한 많아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치(拿致)해서 엄중히 추핵(推覈)하여 해당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20)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9월 11일(양력 1801.10.18.)
시임·원임 대신이 연명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추조(秋曹, 형조)의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이 이미 모두 자백을 하였는데, 정절(情節)이 대단히 흉패(凶悖)하니, 오래도록 옥사(獄事)를 지체되게 할 수 없습니다. 국청에 붙잡아 와서 격식을 갖추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이어서 추국을 설치하여 사학(邪學)의 죄인을 작처(酌處)하였는데, ······ 죄인 김유산(金有山)은 몰래 시골의 천인으로 사학을 몹시 믿어 정약종(丁若鍾)·유항검의 집에 왕래하였고 이가환·이존창(李存昌)의 사이에 통섭(通涉)하였으며, 감영(監營)의 옥에 갇힌 사교(邪敎)의 괴수를 찾아가 옷깃에 요망한 서찰을 숨기고는 감히 역졸(驛卒)의 명색(名色)으로 양인이 거처하는 천주당에 몰래 들어가서 서찰을 전달하고 회답을 구하여 난만하게 교통하였기에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써 결안하였는데, 아울러 전라 감영(全羅監營)으로 압송(押送)하여 정법(正法)하였다.
21)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0월 27일(1801.12.2.)
토사 주문(討邪奏文, 천주교를 토벌하고 임금에게 아뢰는 글)에 이르기를
“정약종이 공초(供招)하기를, ‘맨처음에 이벽(李蘖)이 서양학(西洋學)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이승훈(李承熏)이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의 공사(貢使) 행차에 따라가도록 행장(行裝)을 꾸려 보내어 양인(洋人)이 거처하는 천주당(天主堂)에 들어가 양인과 더불어 친교를 맺고 양서(洋書)를 구입하여 돌아왔는데, 이벽 및 저의 형제인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과 이가환(李家煥) 등으로 더불어 함께 강독하여 사법(師法)을 삼고는 마침내 부모(父母)를 버리고 도당을 체결해서 이 학술로 온 나라의 풍속을 변역시키려고 생각하다가 나라의 금법(禁法)이 거듭 엄중하기에 미쳐 원한을 품고 비방하였으니, 모역(謀逆)한 것이 사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벽은 이보다 앞서 이미 죽었고, 정약전·정약용·이승훈·이가환의 공초도 정약종과 더불어 같았는데, 이가환은 약간 문예(文藝)가 있어서 관직(官職)이 2품을 겪었으므로 가장 사당의 추복(推服)한 바가 되었으며, 이승훈이 구입해 온 사서(邪書)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널리 전파하였으니, 이가환이 실제 주관하였습니다. 홍낙민(洪樂敏)·김건순(金建淳)·김백순(金伯淳)·최창현(崔昌顯)·이희영(李喜英)·홍필주(洪弼周)·최필공(崔必恭)·이존창(李存昌) 등을 차례로 체포 국문하여 핵실하니, 모두 정약종 무리의 혈당(血黨)에 관계하였다고 일일이 자복하였습니다. 이 밖에 사족(士族)의 천얼(賤孼)과 시정(市井)의 편호(編戶)가 뱀과 지렁이같이 서려서 얽힌 것이 거의 수백 인이 넘었으며, 여류로서 거기에 빠진 자는 홍필주의 어미 강완숙(姜完淑)이 그들의 괴수가 되었는데, 최후에 핵실하여 알았던 일이지만 사당에서 신부(神父)라고 일컫는 바 주문모(周文謨)란 자를 강완숙의 집에 숨기고는 성명과 거주지를 묻는 데에 따라 어지럽게 변경하여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게 속이고 간사한 그 형상이 수없이 많으므로 누차 고문(拷問)을 더하였으나, 죽기를 작정하고 버티어 굳세게 숨겼습니다. 그런데 사당의 배포(排布)하고 화응(和應)한 것이 주문모로서 귀결되지 않은 것이 없어 거개가 주문모를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니, 그 기세를 돌아보건대, 호흡(呼吸)하는 동안에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의 걱정이 달려 있어서 악(惡)의 뿌리를 제거하는 데에 일을 늦추어서는 안되겠기에, 주문모·정약종·이승훈·홍낙민·김건순·김백순·최창현·이희영·강완숙·홍필주·최필공·이존창은 정법(正法)하였고, 이가환은 장폐(杖斃)하였으며, 정약전·정약용 및 연루[株連]된 여러 사당은 등급을 나누어 참작하여 처결하였습니다.”
22)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2월 22일(양력 1802.1.25.)
사학(邪學)을 토죄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행하였다. 반교문(頒敎文, 경축할 일이 있을 때 나라에서 널리 알리던 교서)에 이르기를,
······
“인척(姻戚)의 관계를 맺어서 가깝게 문정(門庭)에 두었고 의발(衣鉢, 師父가 제자에게 전하는 道法)을 전수함에는 심지어 얼속(孼屬)에게까지 미쳤으며, 이존창(李存昌)과 같은 모자라는 녀석을 위하여 거짓으로 허풍을 떨 때에는 혀 놀리기를 피리 부는 것같이 하였고, 이가환 무리의 흉도(凶徒)를 은밀히 보호함에는 앞장서서 기치(旗幟)를 세웠었다.
······ 이에 본년 3월에 의금부에서 국청을 개설하여 안핵(按覈)하도록 명하였는데, 윤지충·권상연·최인길·지황·윤유일 등은 전에 이미 복법(伏法)되었고, 이인(李䄄)의 처와 며느리는 사사(賜死)하였으며, 이가환·권철신은 장폐(杖斃)되었고, 주문모는 군문(軍門)을 시켜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에게 알렸으며, 이승훈·정약종·최창현·홍낙민·김건순·김백순·최필공·이존창·강완숙 및 이 밖의 사당(邪黨)인 홍교만(洪敎萬)·김종교(金宗敎)·이희영(李喜英)·홍필주(洪弼周)·김범우(金範禹) 등과 사녀(邪女)인 경복(景福)·복혜(福惠)·운혜(雲惠)·신애(新愛) 등의 대저 체결하여 빠져 든 여러 역적은 앞뒤로 정법(正法)하였다. 지난 8월에 황사영이 붙잡히게 되자 유항검·윤지헌(尹持憲)·황심·옥천희 등과 더불어 아울러 전형(典刑)을 밝게 바루었으며, 여러 도(道)에서 속이고 미혹시킨 자는 본 지방으로 내려보내어 정형(正刑)하였다.”
23)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2월 26일(양력 1802.1.29.)
형조(刑曹)에서 승관(承款)한 사학 죄인을 정법(正法)하고 아뢰기를,
“죄인 황일광(黃日光)은 이존창(李存昌)에게 사서를 학습하고서 정약종의 가까운 이웃으로 거처를 옮겨 자리를 잡고는 세례(洗禮)를 받고 명호(名號)도 받았는데, 심연(深淵)이라고 사호를 지었습니다. ······ 살아 있는 외도(外道)의 사람(황일광 등)은 각각 해당 고을로 압송(押送)하여 형벌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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