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신부 약전종합. 6
15. 이민식 빈첸시오의 김대건 신부 유해 안장 기록
이민식(1829∼1921).
1846년 병오(丙午)박해 때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 세례명 빈첸시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목격하고 40여일동안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려고 노력한 끝에 10월 26일 밤 포졸들의 감시를 뚫고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어 미리내에 안장했고, 그 뒤 1901년 시복 수속 관계로 김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게 되자 유일한 증인으로 발굴에 참여하였다. 평생을 자신이 거두어 안장한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돌보다가 1921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나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미리내 북쪽 거문정이에 살았던 이민식 빈첸시오와 관련된 기록이다. 김 신부가 은이 마을에서 전교 활동을 할 때 열심한 신자로서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은 김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고 유체를 수습하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40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유체는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안고, 동체는 결방하여 짊어지고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유체를 옮기게 된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검은 돌(黑石洞)을 지나 동작리(鋼雀洞) 뒷산을 타고 남태령을 넘어 청계산 골짜기에 이르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어두워질 때까지 유체를 다래 덩쿨에 숨겼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하우 고개[鶴峴]를 돌아 묘론이 고개, 너덜이(板橋)를 거쳐 태재(泰峴)에 이르니 용인 땅과 가까운 능골 앞산이었다. 끊임없이 묵주 기도를 바치며 밤을 틈타 유체를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되도록 위험한 큰길을 버리고 참바대 고개를 넘어 태화산 기슭의 퉁점(銅店),드렝이 고개를 거쳐 마침내 은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은이 마을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 고개에서 날이 새는 바람에 유체를 콩밭에 숨겨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 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히 넘기기를 빌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유체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 신부의 유체를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외 여러 가지 증언
이 밖에도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다섯 사람의 증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김 프란치스코라는 시람에 의하면 상여에 실어 양성에 있는 미리내에 묻었다고 했고(《기해병오 순교자 증언록》 282쪽), 박 베드로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임시로 문배부리(지금의 용산구청 자리)라는 곳에 묻었다가 양성 미리내로 옮겼다고 했고(위 증언록 285쪽), 서 야고보라는 사람은 새남터에서 조금 떨어진 왜재에 매장했다가 다음 날 왜고개(현 국군 중앙 성당 자리)로 옮겨 매장하고 장례를 치뤘다고 했다.(위 증언록 289쪽).
또 김대건 신부 유해 발굴과 이장 기록 보고서에 의하면 1846년 9월 30일 교우 14명이 미리내로 옮기고 그해 10월 26일에야 미리내에 유체를 안장했다고 한다. 이민식의 증손자 이순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민식을 비롯 세 사람이 옮겼다고 한다.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30여 차례에 걸친 현지 답사와 8,90대 노인들의 증언들을 종합 분석하여 지도상에 그 경로를 재현해 본결과 한강 도강 과정 누락, 유체 단독 이장 등 과장 부분을 제외하면 용인천주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는 이장 경로가 당시 실제 상황과 부합되는 측면이 크다고 여겨진다.
[자료 참고 : 한국순교자현양회]
■ 유해 이장 경로
이민식 빈첸시오의 후손 [고초골의 자랑 5]
1846년 9월 16일 한국의 첫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만25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자 교우촌 어른들의 걱정과 격려를 받은 당시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하신 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시킵니다.
현재 고초골에는 이민식 빈첸시오의 후손(이선행요아킴)이 살고 계십니다.
* 이민식(1829~1921)*빈첸시오 소개
빈첸시오는 1829년 열심한 교우 집안인 함평 이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그의 집안 역시 군란 때의 다른 교우들 가정이 다 그랬듯이 쫓겨 다니는 처지라 가정 형편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였고 공부도 많이 못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백과 용기가 뛰어나서 다른 성숙한 청년을 능가하는 용감한 청년이었던 그는 남달리 신심이 깊었고 김대건 신부님이 은이에서 전교 하실 때 30리나 되는 은이까지 밤으로 찾아가서 성사를 보고 신부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김 신부님이 밤에 미리내에 오셔서 성사를 주고 그날 밤으로 가실 때에는 빈첸시오가 으례 길을 안내해서 영접해 오고 또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이렇게 이민식 빈첸시오는 김 신부님을 각별히 따랐고 김 신부님의 어진 인품과 고결한 덕행에 많은 감화를 받았으며 신부님 또한 그의 강직하고 순박하면서도 열심한 수계 범절을 칭찬 하셨다고 한다.
* 사제가 되고 싶었던 빈첸시오*
김 신부님처럼 자기도 사제가 되어 천주님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그는 나이 40세가 되도록 꿈울 접지 못하고 있다가 40세가 지나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50세가 가까이되자 총명이 떨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전보다 더 열심히 수계하여 부감목 신부 밑에서 여러 해 동안 복사를 했으며 서울 약현 본당 초대 정 신부를 도와드리는 등 교회 사업에 전념하여 당대나 후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평생 동정으로 살면서...*
평생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거룩하게 살아 모든 교우들로부터 반성인 이라 일컬어졌다.1853년 2월 페레올 고 주교님이 서거 하신 후 베르뇌 주교님의 분부로 페레올 주교님의 유해를 김대건 신부님 무덤 옆자리로 안장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앞장서서 주교님의 유해를 모셔다가 김 신부님 묘소 옆에 안장해 드리기도 하였다.
평생 동정으로 살면서 교회에 봉사해 오던 그는 1921년 12월9일 92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묵리에서 미리내 성당으로 모셔졌고 수백 명의 교우들이 참례한 가운데 드브레 주교님의 주레로 장례미사를 드리고 성당 앞 빈첸시오 선산에 안장할 때 주교께서는 연령방면 예절을 행하시며 무덤에 강복하셨다.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교회에서는 1976년 여름 그의 묘를 김 신부님 옆 현재의 무덤 자리로 이장하였다. [자료: 고초골 피정의집]
16. 필리핀, 불라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교구 성지로 승격 [바타칸의 뉴스]
Isabella Piro / 번역 이재협 신부 [바타칸의 뉴스]
필리핀의 불라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교구 성지로 승격됐다. 며칠 전 거행한 예식은 성인의 성화를 손에 든 많은, 사람들의 행렬과 함께 시작했다. 본당 신자들은 예식 안에서 1800년대 불라칸주 롤롬보이에 도착한 성인을 기억했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를 주보 성인으로 모시는 필리핀 불라칸 성당이 교구 성지로 승격됐다. 필리핀 말롤로스 교구장 데니스 비야로호(Dennis Villarojo) 주교는 지난 1월 30일 토요일 승격 예식과 미사를 거행했다. 데니스 주교는 강론을 통해 하느님께 영감 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했던 한국의 첫 사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모범을 배우라고 신자들에게 당부했다.
아울러 미사를 마치며 성지 옆에 순례자들을 위해 새로 건립한 박물관을 축복했다. 새 박물관은 한국 전통 건축 스타일에 15층의 탑 모양으로 건축됐다. 전시관은 지역 교회와 성 안드레아수녀회가 함께 관리한다. 성 안드레아 수녀회는 오래, 전부터 롤롬보이에서 수도회 주보 성인에 대한 신심을 증진하기 위해 활동하는 한국 수녀회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희년
불라칸 성당의 교구 성지 승격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에 맞춰 이뤄졌다. 한국 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지난 2020년 11월 29일부터 오는 2021년 11월 27일까지 이어지는 희년을 선포한 바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1821년 태어나 15세에 세례를 받았으며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800년대 마카오에서 벌어진 민란으로 성인은 필리핀 롤롬보이의 도미니코회 수도회로 이동해 양성 과정을 이어갔다. 성인은 1845년 (상해 연안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가 고국 백성에게 복음선포를 시작했으나, 1846년 조선 왕조의 박해 시기에 체포돼 그해 9월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는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다른 102명의 순교자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기념일은 9월 20일이다.
위대한 인류 문화 유산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 후원을 결정했다. 대전교구장 겸 희년 준비위원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는 유네스코의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네스코의 결정은) 우리 성인이 남긴 위대한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유산이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한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인권의 지침 없는 지지자였고, 높은 사회계급에 속하는 이들이든 그 시대의 계급 시스템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든,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울러 유 주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인들에게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소개한 주인공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했다.
한편 성인이 태어난 마을 솔뫼는 이미 성지로 지정돼 많은 순례객이 방문하고 있으며, 이곳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기간 동안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사목 센터(솔뫼 복합문화센터[성 김대건 기념관])가 건립됐다.
이곳에서 지난 12월 18일 대전교구 부제서품식이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재확산과 제3대 대전교구장 고 경갑룡 주교의 장례미사 등으로) 부제서품식은 12월 19일 대전 가톨릭대학교 대성당에서 거행됐다.
[바티칸의뉴스 04 2월 2021, 18:18 . Isabella Piro / 번역 이재협 신부]
16. 필리핀 롤롬보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지
▲ 블라칸성당 위치
이번에 필리핀 불라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교구 성지로 승격됐다.
이, 성지는 지도에서 보듯이 산타 마리아 강가에 한국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수녀회가 운영하는 롤롬보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
약 5~6백여 미터 거리에 이번에 필리핀 교구 성지로 승격된 필리핀 교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있다. 앞으로 필리핀 성지순례 코스에 추가해야 할 성당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성지순례 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