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申時)에 상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갔다. 소대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박문수(朴文秀), 시독관 윤휘정(尹彙貞), 가주서 이종연(李宗延), 기사관 박수(朴璲)ㆍ박종유(朴宗儒)가 차례로 입시하고 부사과 윤동원(尹東源)이 함께 입시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날씨가 몹시 차가우니 바깥 합문(閤門)을 닫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옥당의 관원이 눈이 침침하여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니 촛불을 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일단 먼저 대신 읽으라.”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옥당이 아예 펼쳐 읽지 않는 것은 강규(講規)에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당은 촛불을 켠 뒤에 읽으면 괜찮을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동국통감(東國通鑑)》 〈고려기(高麗紀)〉를 읽었는데, ‘충렬왕이십일년춘정월(忠烈王二十一年春正月)’에서 ‘복구관제(復舊官制)’까지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번이 읽으라.”
하니, 윤휘정이 ‘이십오년춘정월(二十五年春正月)’에서 ‘행평주온천(幸平州溫泉)’까지 읽었다. 윤휘정이 아뢰기를,
“제5판의 허유전(許有全)의 일로 보건대 간관(諫官)은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았으나 고종수(高宗秀)의 말로 인해 비로소 처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그 당시 간관들의 수치스러운 부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간관의 허물이 아니라 바로 충렬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부소(扶蘇)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간한 것을 사신(史臣)이 잘못이라고 여겨 혼동하여 논하였으니, 신은 그 논평이 올바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어떠한가?”
하자, 윤동원이 아뢰기를,
“승지의 견해가 맞습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분서갱유가 얼마나 큰일입니까. 망국의 재앙이 이 한 가지 조치에서 판가름 났거늘, 어찌 한갓 시선(視膳)과 문안의 예절만 지키고 간언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학(小學)》에 부르짖어 울면서 따른다는 말이 있다. 만약 부소가 간하지 않았다면 잘못한 것이니, 사신(史臣)이 모두 허물이라고 일컬었을 것이다.”
하였다. 윤휘정이 아뢰기를,
“제7판에서 ‘왕이 명황(明皇 당 현종)의 야연도(夜宴圖)를 보고 좌우에 이르기를 「놀이하는 잔치에 있어서 어찌 명황에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말 한마디로 나라를 망쳤다고 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 한마디로 나라를 망쳤다는 것은 오히려 완곡한 표현이다.”
하였다. 윤휘정이 아뢰기를,
“사신의 말에 ‘명황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라고 하였는데, 명황은 그래도 개원(開元)의 치(治)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은 명황의 개원의 치가 충렬왕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자, 윤휘정이 아뢰기를,
“사신의 거의 없다는 말은 마치 충렬왕이 명황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듯한데, 말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어떠한가?”
하니, 윤동원이 아뢰기를,
“옥당의 말이 그럴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난리로 망하게 되었으니 똑같은 것이다. 어찌 개원의 치를 가지고 천보(天寶)의 난을 대체할 수 있겠는가. 한 무제(漢武帝)의 일로 말하자면 현량(賢良)을 등용하고자 하여서는 동중서(董仲舒)를 찾고 재물을 마구 거두어들이고자 하여서는 상홍양(桑弘羊)을 찾았으니, 현인과 간사한 자의 진퇴는 단지 군주의 일심(一心)이 밝으냐 어두우냐에 달려 있다. 만약 명황이 정치에 힘쓰는 마음을 시종 한결같이 하였다면 비록 이임보(李林甫) 같은 자가 열 명이 있더라도 어느 틈새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제8판에 ‘이와 같은 재주가 있기에 쓰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을 살펴보건대 참으로 지금 시대에 개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전 감사 이의만(李宜晩)의 청렴함은 실로 100여 년 이래로 드문 경우입니다. 신이 연전에 공산읍(公山邑) 주변에 우거(寓居)하였는데, 그 당시 이의만이 충청 감사였습니다. 그때 그의 아들이 부모를 찾아뵙기 위해 왔다가 버선 한 짝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 또 이의만은 솔잎을 잘 먹어 산속의 중들에게 구하였는데, 혹 지나치게 많으면 많은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조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 정도로 청빈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의만이 함경 감사가 된 뒤에 신이 비로소 등과(登科)하였는데, 지난번 정사에서 신은 대사헌에 수망(首望)으로 의망되었고 이의만은 아직도 통청(通淸)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추론하건대 지금 세상은 현명하여도 세력이 없는 자는 쓰이지 못한다는 것을 대충 알 만합니다. 신이 매양 한번 아뢰고 싶었지만 실행하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이종성(李宗城)이 그의 청렴함을 진달한 덕분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그를 올라오게 하여 한번 그 사람을 만나 보신다면, 이는 또한 청렴을 장려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특진관으로 입시하였기에 한 번 그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청렴한 지조에 대해서는 유신의 진달로 인해 처음 알게 되었다. 대개 탐욕을 징계하는 도리는 먼저 청렴을 장려해야 한다. 탐욕한 자를 징계하고자 하면서 청렴한 사람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에 실효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 칠곡 부사(漆谷府使) 허정(許晶)의 청렴함을 본 적이 있는데, 근래에 드문 경우였습니다. 신이 그래서 급히 장계하여 포상할 것을 청하였으니, 성명께서는 혹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떠한 사람인가?”
하자, 박문수가 아뢰기를,
“허정은 무관으로 고집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가 고수하는 것은 비록 조정의 존엄으로도 필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숙묘조 때에 이름난 무관으로 의망되어 곧바로 하비(下批)되었지만 대개 몸가짐을 담백하게 하고 벼슬길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 형세나 처지로 보면 곤수(閫帥)가 되어야 마땅한데도 지금까지 되지 못해 사람들이 많이 원망한다고 합니다. 무신년(1728, 영조4) 적도(賊徒)의 변란 뒤 거창(居昌)에 자리가 비자 조정에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곧 지금의 이조 판서가 참판이었을 때로 허정을 의망하여 차출하였습니다. 신은 그 당시에 허정의 사람됨을 몰랐습니다만 어사가 된 뒤로 칠곡 부사 유동무(柳東茂)의 선치(善治)를 매우 잘 알았기에 서로 바꿀 것을 품달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보건대 허정의 다스림이 필시 유동무보다 못하지 않았을 터인지라 신은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편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이는 지금 몇인가?”
하니, 박문수가 아뢰기를,
“60여 세는 된 듯합니다.”
하였다. 윤휘정이 아뢰기를,
“제14판의 이승휴(李承休)의 일을 말하자면 충선왕(忠宣王)이 부르자 즉시 간 것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충선왕이 만난 때가 불우하였다는 설은 괴이하다.”
하자, 윤동원이 아뢰기를,
“이승휴가 애초 물러나 돌아갔으니, 그때 또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면 담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출처를 살펴보면 도리를 아는 선비가 아닌 듯합니다. 충선왕이 부왕(父王)의 자리를 빼앗고 각자 당여(黨與)를 세웠으니, 이때에는 천지간의 떳떳한 도리가 이미 남김없이 어그러졌습니다. 자신을 아끼는 선비라면 누가 부름에 기꺼이 나아가겠습니까.”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경국대전》과 《전록통고(典錄通考)》 등의 책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승지들이 방(房)을 나눠 살펴보라는 명이 있었기에 신들이 이제 막 고열(考閱)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책에서 행할 만한 것을 지금 만약 가려 뽑아 준행해도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따라 지키시고 신들은 받들어 행하는 것이 진실로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 비록 좋은 정령(政令)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시행하면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많아지게 되는데, 더구나 이 책은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이 매우 광범위한 데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들의 말로써 품달하여 시행한다면 사람들이 책잡을까 염려됩니다. 전날 성상의 하교 가운데 묘시(卯時)에 사진하여 유시(酉時)에 파하는 법은 가장 핵심적이고도 쉽게 행할 수 있으니, 이런 종류를 먼저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들은 젊은 신진(新進)들인지라 남들한테 신뢰와 무게감을 얻지 못해 필시 일 꾸미기를 좋아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일이 도리어 경시되고 방해받을 것이니, 모름지기 대신 및 비국 당상과 육조의 장관에게 원서(元書)를 두루 열람하게 한 다음 오늘날에 적의(適宜)하면서도 행할 만한 일을 가려 즉시 초계(抄啓)해서 신들에게 맡기게 하소서. 신들이 보고서 누락된 조항이 있으면 보태어 넣기를 청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대신, 비국 당상, 육조의 장관에게 행할 만한 일을 뽑아내게 한 다음 사람을 가려 구관(句管)하게 해 속전(續典)으로 삼을 일을 새해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승지는 나의 본의를 모르는 것이다. 내가 경에게 맡기려는 까닭은 경은 잘 통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경들로 하여금 항상 눈여겨보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익혀 행하도록 하려는 것이지 하루 사이에 급급히 전부 다 보고 일마다 바로 행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려 뽑으라는 청은 더욱 내 뜻이 아니다. 집에다 비유하자면 조종(祖宗)의 제작은 처음으로 집을 짓는 것이고, 후세의 수성(守成)은 수리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경국대전》은 만들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아 행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으나, 《전록통고》는 무슨 일은 어느 해에 승전(承傳)하였고 무슨 일은 어느 해에 혁파하거나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고 실어 놓았기에 《전록통고》가 없으면 《경국대전》은 시행되기 어렵다.
그러나 《전록통고》는 만들어진 것이 또한 이미 오래되었고 정리해 밝힌 일이 없기 때문에 또 행하기 어려운 단서가 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경국대전》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무슨 일인지 모르는데, 갑자기 행하면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기 쉽다. 그리고 법은 지위가 낮은 백성들에게는 쉽게 행해지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는 행해지지 않으므로 내가 지위가 낮은 백성들에게는 소략하게 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는 치밀하게 하려고 한다. 지금 초록하여 속전을 만들고자 하면 반드시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또한 당상을 뽑아야 하는데, 근래 조정 신하들은 마치 ‘관가 돼지 배 앓는 격[官猪腹痛]’이라는 속담처럼 매사를 질질 끌기만 일삼으니, 필시 완성해 낼 기약이 없다. 게다가 청(廳)을 설치하게 되면 예전에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한 일이 있었기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취렴(聚斂)하는 단초가 생길까 의심하고, 서리들 역시 자신들에 대한 규정이 산삭(刪削)되는 것을 원망할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필시 장차 내버려 둔 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래서 핵심적이면서 행할 만한 것을 반드시 진신(搢紳)과 경대부(卿大夫)부터 익숙히 한 뒤에야 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속전을 만들고 나면 본전(本典)은 필시 방치될 것이니, 도리어 수찬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또 근본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승정원은 곧 임금의 후설(喉舌)로서 왕명의 출납을 오직 진실되게 해야 하는 자리이다. 내가 육방(六房)에 맡긴 까닭은 실로 항상 눈으로 보아 익숙하게 하려는 것이지 일시에 전부 정리해 밝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해당 방의 일로 들어와 아뢰고 신칙한다면 이는 자신의 직분을 넘어 간섭하는 것이 아니며, 또 제멋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한 전당(殿堂)에서 나랏일을 의논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단지 옛 법전을 정리해 밝히려는 것이지, 고쳐서 새 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경들의 경우 안에서는 참판을 맡고 밖에서는 방백(方伯)을 맡으니, 만약 평소에 잘 알아 둔다면 어찌 처하는 곳마다 시행하게 되는 효과가 없겠는가. 경들뿐만 아니라 경들이 나간 뒤에 비록 다른 승지가 들어오더라도 《경국대전》 1부가 항상 책상 위에 있으면, 참고해 펼쳐 보는 데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다. 승지는 일이 많아 낮에는 살펴보기 어렵더라도 밤에는 공사를 보는 여가에 또한 적막함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이전(吏典)〉 가운데 묘시에 사진하여 유시에 파하는 법은 도승지가 그것이 좋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면 마땅히 각 관사를 신칙해야 할 것이고, 이미 신칙한 뒤라면 본래 여름과 겨울에 외사(外司)를 적간하는 규정이 있으니 내가 아무 때나 무작위로 뽑아 적간할 것이다.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오래되면 저절로 견고해질 것이니, 마땅히 ‘마음속에서 잊지도 말고 조장(助長)도 하지 말라.’라는 생각을 가지고 점차로 정리해 밝혀야 한다. 이제부터 묘시에 사진하여 유시에 파하는 법을 각 관사에 신칙하되, 먼저 비국부터 시작하여 대신(大臣)은 공적인 연유나 질병 말고는 한 사람이 국청의 좌기에 가면 다른 한 사람은 본사(本司)에 나와 업무를 거르지 말게 하라. 그리고 반드시 육조와 각 해당 관사로 하여금 모두 묘시에 사진하여 유시에 파하는 것을 규례로 삼게 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묘당을 신칙하여 거행하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형조에는 낭관을 자벽(自辟)하는 규례가 있지만, 세 당상 중에서 또한 강직하고 명석한 자를 택하여 구임(久任)한 연후에야 송사(訟事)를 거는 자가 간교함을 부리는 폐단이 없고, 이속(吏屬)들이 뇌물을 받을 우환이 없습니다. 만약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비록 옛 법을 거듭 밝힌다 하더라도 또한 무익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승지를 모두 적임자를 골라 여러 해 동안 구임하였기에 나라 다스림의 반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근래에는 그 적임자를 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주 교체하기 때문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고자 한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신만 가지고 말해 보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매양 인재를 찾아내고 좋은 계책을 수집하고자 하였고, 기어이 들어가 고하여 미천한 정성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들으면 곧바로 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승정원에서 거행하는 일이나 당장 해야 할 것도 잊어버리는 일이 많아 바로바로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실로 큽니다. 신과 같은 자는 비록 승정원에 오래 있는다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만약 적임자를 고르지 못한다면 비록 승지들의 책상에 《경국대전》을 놓아둔다 하더라도 어찌 실질적인 효과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임자를 얻어야 한다는 말이 진실로 좋기는 하지만 나는 구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경으로 말하더라도 비록 지혜는 있지만 이력이 짧다. 만약 구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법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이 집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각 도에 찬배(竄配)된 죄인의 방미방 장계(放未放狀啓)가 승정원에 내려왔는지에 대해 물었는데, 신이 모르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튿날 본원의 하리에게 물어보았더니, 사면 문서는 내려온 지 이미 오래지만 장계가 대부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와서 물어본 것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또한 그러함을 깨닫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는 즉시 의금부와 형조의 하리를 불러 다시 관문(關文)을 보내 재촉하게 하였습니다. 대저 여러 도의 방백들이 만약 근실(謹實)하게 일을 처리하였다면 어찌 이처럼 지체되는 폐단이 있겠습니까. 현재 조정에는 실로 착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신하가 없고, 모두 죄가 없으면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묘당에서부터 뭇 신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기를 일삼으니, 나랏일이 참으로 애통합니다.
옛말에 ‘그 아비가 생황을 불자 그 아들이 질장구를 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나라에서 정사에 매우 애쓸 마음을 먹는다면, 여러 신하가 어찌 나랏일에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 문사 낭청을 면려(勉勵)하신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성상의 그런 하교는 성실하지 않은 듯합니다. 국옥에서 죄수를 신문하는 이 일은 위관(委官)이 담당하는 바인데, 어찌하여 직접 위관을 문책하지 않고 빙 돌려 일부러 문사 낭청을 꾸짖어서 이쪽을 가지고 저쪽을 격동하는 계책으로 삼으신단 말입니까. 신은 삼가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국청의 죄수와 실록에 관한 일이 지금까지 지체되는 것은 신하들의 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의 허물이기도 합니다. 면려할 때는 벼락이 치듯이 하고 칭찬할 때는 온화한 햇빛이 비추듯이 은총과 위엄을 갖추어 두려워하고 감동할 줄 알게 하신다면, 기강이 잡히는 것이 어찌 어렵겠으며 사공(事功)이 이루어지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더 이상 임시방편으로 머뭇거리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분발하여 애쓰신다면 나랏일을 거의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모두 옳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금대(金臺)를 쌓아 곽외(郭隗)를 맞이하자 악의(樂毅)가 이르니, 능히 제(齊)나라에 복수하여 끝내 명군(名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연나라 소왕이 어진 이를 구하려 했던 의지는 천고의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비록 옛사람만 못하더라도 성상께서 그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신다면 당대의 인재로서 당대의 과업을 성취시킬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어찌 확신하겠습니까. 신은 또 눈앞에 남모르는 근심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300년 된 세실(世室)의 대가(大家)도 태반이 역당이 되었는데, 이는 모두 당쟁(黨爭) 때문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역도가 그쪽 당에서 나왔으면 비록 거기에 물든 자가 아닐지라도 반드시 같은 역도로 뒤섞어 몰아넣고자 하니, 안면을 바꾸고 동정심을 유발하여 투속해 들어오는 자를 제외하고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만약 끝내 뒤섞어 몰아넣지 못한다면 다시 무단히 버려두고 수용(收用)하지 않지만, 비록 허물이 있는 몸이라도 투속해 들어와 한번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예전대로 임용해 줌으로써 투속해 들어오는 길을 열고 널리 당류(黨類)를 심는 계책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혹 겉으로는 투속해 들어온 듯해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혹 속으로는 실제 투속해 들어왔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대부가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이처럼 고단하게 하니, 세간에서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는 줄을 모르겠습니다. 풍절(風節)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마음이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옛사람이 교목세가(喬木世家)라고 운운했던 것은 그 비유한 뜻이 참으로 얕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에 살 곳을 정하고 집에 나무를 심어 자손에게 전하는데, 나무가 오래되매 그늘을 만들어 그 집을 넉넉히 덮게 되면 그 집을 지나가면서 이를 보는 자치고 그 집의 성대함을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 도끼에 베이거나 비바람에 꺾이면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에는 온전한 줄기가 없어 갈수록 성겨지고 긴 가지와 큰 잎은 이미 전날의 그늘이 없게 됩니다. 부서진 벽과 무너진 담장은 더 이상 예전 집의 모습이 아닐 것이니, 이를 보는 자치고 상심하며 장탄식을 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주인이 이에 만약 조심하는 태도로 경동(警動)하여 부지런히 재배하여 그늘을 키우고, 힘써 정리하여 그 집을 다스려 선조의 구업(舊業)을 보존할 수 있다면, 잘 계승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세도(世道)가 불행하여 교목세가가 대부분 역도들에게 주륙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온 나라 신민들이 분통해하는 바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우리나라 사대부는 실로 300년 된 나라의 원기(元氣)인데, 오늘 역도가 나왔다고 해서 그 기상(氣像)을 깎아 내고 내일 역도가 나왔다고 해서 그 기상을 깎아 내어 깎아 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기상이 어찌 쇠미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쇠미해지면 없어지게 되니, 이것이 어찌 매우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더욱더 근심스러워할 만한 점은 저쪽에서는 역도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모조리 역당으로 몰아갈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이쪽에서는 역도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역도라는 명목에 뒤섞일까 두려워하는 것인데, 행운이라 여기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사특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때에 거실대가(巨室大家)를 아무런 연고 없는 평인(平人)으로 만들어 전부 내버려 둔다면 나라는 그 누구와 함께 종묘사직을 보존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죄범이 있고 없는 것을 환하게 조사하여 죄범이 있으면 주벌하고 죄범이 없으면 등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우러르게 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비록 여염집으로 말하더라도 집안에 노복(奴僕) 4, 5명이 시기와 의심으로 틈이 생겨 변고가 갖가지로 일어나면 그 집이 망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신은 이에 평소 근심스러웠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작년 가을에 하교한 뒤로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다. 나는 뜻을 더욱 굳게 가져 실속 없는 의론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사람을 쓰는 것이 공평한 뒤에야 나랏일을 해볼 수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양전(兩銓)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어진 이를 등용하기를 오랫동안 행한다면 어찌 그 효과가 없겠는가. 양전에서는 비록 공정하게 하더라도 쓰이는 사람이 공정하다고 생각지 않고 있다. 내가 그래서 전적으로 양전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고 영수(領袖)에게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무관의 형국은 전적으로 양전에 달려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지난날의 일에 대해 전하께서는 일체 아주 먼 옛일로 치부한 채 하나라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때마다 모두 편들거나 억누르시지만, 피차간에 쟁론의 단서는 모두 여기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만약 백성에 대한 근심이나 나라를 위한 계책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다면, 조정이나 초야를 막론하고 조목마다 비답을 내려 그 말을 채택하여 쓰시고 그 사람에게 관직을 내려 영화롭게 해 주소서. 저들의 지금 상황에 관해서는 높은 시렁 위에 묶어 두신다면 저들은 필시 멋쩍어서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은 형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할 텐데, 위에 있는 자가 어찌 먼저 형적을 보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말이 좋으니 내가 수용하겠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임금이 간언을 좋아하면 곧은 말이 날마다 들릴 것이고, 상하가 각기 그 도리를 다하는데 나라가 흥기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난번 지평 엄경하(嚴慶遐)의 상소는 근래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고, 전하께서 내리신 우악한 비답 또한 근래 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성상의 덕을 흠탄(欽歎)하였습니다. 대개 대각을 택하였으면 곧은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옥당을 선발하였으면 계옥(啓沃)의 효과를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아랫사람은 지성(至誠)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고 윗사람 또한 지성으로 치세(治世)를 추구하는 뜻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활기가 없어 진작되지 않고 있으니, 근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각 아문, 각 군문, 각 도에 비축된 돈으로 곡식을 사들이도록 우러러 청하자 성상께서 묘당으로 하여금 성상께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셨는데, 이는 단연 행해야 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 분부하였으니 잘 헤아려서 할 것이고, 방기(放棄)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생각건대 그 말이 참으로 똑똑하고 괜찮았다. 내게 물어 처리하게 한 것은 절목(節目)에 관한 일에 불과하다. 내일 차대(次對)를 할지 말지 우선은 모르겠지만, 나가거든 신칙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제향(祭享)을 지낼 때의 제관의 일에 대해 일찍이 우러러 진달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직 연석에서 여쭈어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과 상의하였는데, 송인명의 소견은 신과 모의하지 않아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년 1월부터 시작하여 1년 동안 제관의 수와 각 관사 관원의 수를 서로 비교하여 헤아려 먼저 이조 관원을 제관에 차임한 다음 차례로 각 해당 조와 각 해당 관사의 당상과 낭청을 제관에 차임한다면 피차간에 고생이 더하고 덜한 차이가 없고 제관은 택하기를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택해질 듯합니다. 1년 동안의 제관 수는 전조(銓曹)에서 파악하고 있고 각 관사의 관원 수 또한 전조에서 파악하고 있을 것이니, 그러한 뒤에는 1년간의 제관을 1월부터 미리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현재 재직 중인 관원의 이름을 채워 넣는다면 그 사이에 틀림없이 천전(遷轉)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명을 채워 차임하는 것 또한 장애가 될 것이니, 다만 각 해당 관사의 직명 아래에다 미리 채워 차임하는 것입니다.
그 제사를 지낼 즈음에 그 제관에게 뭇사람이 다 아는 병이 있다면 뒤의 제사의 제관과 바꾸어 차임하고, 그 뒤의 제사 때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앞의 제사의 제관을 제사에 참석시켜 서로 조정하여 옮김으로써 중간에서 면제를 도모하려는 폐단을 금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대개 부유한 관사의 힘 있는 관원은 1년 내내 제관에 차임되는 일이 없는데, 궁색한 관사의 힘 없는 관원은 1달 동안에 혹은 다섯 번 혹은 열 번에 이르기도 하여 제관에 차임된 관원은 참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우환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인(貢人)은 그 관원이 제관에 차임된 것으로 인해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수응(酬應)해야 하는 일이 있고, 거기에 소비되는 것은 모두 전곡(錢穀)이니, 이 때문에 잔폐한 관사의 공인은 견뎌 낼 수가 없습니다. 이조를 신칙하여 오는 1월 1일부터 미리 채워 차임한 뒤에 차제안(差祭案) 1건을 정리해 정원으로 보내도록 하고, 해당 방(房)에서는 살펴 검사하여 신칙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를 신칙하여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무신년(1728, 영조4) 적변(賊變)이 일어났을 때에 문관과 음관(蔭官)을 막론하고 적도가 지나는 핵심 지역의 수령을 무단히 개차하고 무신으로 차출하여 보냈습니다. 비록 일시적인 변통에서 나온 일이라 하더라도 이미 무단히 면직되었으니, 조정에서 즉시 감별하여 녹용(錄用)하는 것이 사리상 당연할 것입니다. 두 전조를 신칙하여 각별히 주(註)를 단 다음 잘 살펴 의망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참으로 옳다. 그 당시에 체차하여 경직(京職)에 붙이게 하였는데, 미처 시행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수용하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각 도(道) 도사(都事)들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말미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서는 여러 달 동안 머무는데, 데려가는 영리(營吏)와 마두(馬頭) 및 역자(驛子)의 마필(馬匹)을 숫자를 줄여 내려보내지 않고 전수(全數)를 그대로 놔두는 탓에 각 도의 각 역에서는 취렴(聚斂)하여 서울에 있는 사람에게 수송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각 역은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이 하늘에까지 이를 정도이니, 참으로 매우 불쌍합니다. 그 가운데 도사로서 더욱 터무니없는 경우는 자신이 소재한 도의 도사로 교묘히 차임되어 자기 집안의 사소한 원한이나 친구의 사소한 원한에 대해 풍교(風敎)와 관계있다고 일컬으며 가는 곳마다 형추(刑推)하여 더욱 심하게 침학하는 것입니다. 악한 백성이 죄를 받는 것은 진실로 가하지만, 선량한 백성이 죄 없이 걸려드는 경우는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도사를 차출할 때에는 그 도에 소재한 문관을 도사로 차출하지 말며, 만약 풍교와 관계되어 징치(懲治)하고자 한다면 감사에게 알린 연후에 징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진산(珍山)의 금위군(禁衛軍) 가운데 김화고리(金禾古里)라는 자가 상인(喪人)으로 상번(上番)하였다가 무신년(1728, 영조4) 적변(賊變)을 당하였을 때, 도순무(都巡撫)에게 발괄(白活)하기를 ‘저의 조부가 금천(衿川) 전투에서 죽었는데 그 손자가 나랏일에 죽지 않는다면 되겠습니까. 종군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군중(軍中)에서는 상인이 진중(陣中)에 들어오는 것을 곤란하게 여겼으나 화고리가 애써 청하자 군중이 그 뜻에 감동하여 데리고 갔습니다. 군중에서 고기를 먹지 않으니,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청주(淸州)에 이르러 매우 심한 병에 걸려 일어나 움직일 길이 없었는데, 영남의 흉적 소식을 듣고 또 군사 행렬이 재를 넘을 것을 알고는 그가 병 때문에 낙오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따라가기를 울면서 청하였기에 군중에서는 그의 병이 근심스러웠지만 감동하여 허락하였습니다.
그 후 신은 그대로 영남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화고리를 조정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조정에서 그의 충의(忠義)를 귀하게 여겨 ‘충의군’이라는 세 자를 묘당이 관문(關文) 안에 써서 향장관(鄕將官)으로 승진시키고 또 복호(復戶)해 주었다고 합니다. 올겨울 화고리가 마침 서울에 와서 신을 만났기에 그의 말을 들어 보았는데, 금위군에서는 아직도 탈급(頉給)해 주지 않았고, 향장관으로도 올려 차하해 주지 않은 채 복호만 해 주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넣었으며, 그의 아들 또한 군역(軍役)에서 탈하(頉下)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데 어떻게 군졸들을 격려할 수 있겠습니까. 본도를 각별히 신칙하여 장관으로 올려 차임하고, 또 그 아들의 역(役)을 면제하게 하여 온 도(道)를 분발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명색이 충의군인데 어찌 아직도 군적(軍籍)에 둘 수 있단 말인가. 대단히 형편없는 일 처리이니 도신은 추고하고 수령은 엄하게 추고하라. 그리고 다시 분부하여 그를 금위군에서 탈하한 다음 향장관으로 올려 차하하고 그 아들 또한 탈급한 뒤에 거행한 상황을 즉시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장단(長湍)과 죽산(竹山)은 한편은 서로(西路)의 요해처(要害處)이고 다른 한편은 남로(南路)의 요해처인데 장단은 방어사(防禦使)가, 죽산은 겸영장(兼營將)이 맡습니다. 무신이 방어사가 되는 것은 그런 뒤라야 병사(兵使)나 수사(水使)가 될 계제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되기를 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장은 고역(苦役)인지라 이른바 이름 있는 무신은 영장은 되려 하지 않고 반드시 겸영장이 되어 이력(履歷)의 밑천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세력 있는 무신들은 교묘하게 이력거리로 만들고는 곧 다시 교묘히 체직되니, 장단과 죽산이 나그네가 거쳐 가는 여관처럼 되어 버려 현재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기보(畿輔)의 중요한 지역인데 조정에서 관심을 다하지 않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또 듣건대 자주 교체되기 때문에 해유(解由)가 나오기 어려우니, 이를 맡은 자가 문서로 인수인계하는 기한이 되면 온갖 수단으로 교묘히 체직되고야 말아서 이와 같은 연유로 고을의 폐단이 더 생긴다고 합니다.
신이 영남에서 죽산을 지나왔는데, 읍내는 적막하고 관사(官舍)는 전부 퇴락하였으며 아전(衙前)은 피폐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물었더니, 답하기를 ‘관원이 자주 체직되어 해마다 서울에 머무느라 집안 재산을 다 소진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관원이 자주 상경해야 하므로 고을 형편이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두 고을의 수령을 자주 체직하지 말고, 본도에서 무릇 두 고을에 관계되는 일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각별히 덜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단 부사는 그 사람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죽산 부사 윤광신(尹光莘)은 제법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다고 들은 듯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구임(久任)하여 쇠잔한 마을을 소생시킨 연후에 비로소 천전(遷轉)을 허락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효(孝)는 모든 행동의 근원으로 제왕이 다스리는 데는 충과 효를 격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충신을 구하려거든 반드시 효자 가문에서 하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절실한 말입니다. 지금 각 도의 효행 장계(孝行狀啓)는 감사가 매양 수령이 보고하는 것에 따라 장계로 보고하면서 다시 조사하지 않기 때문에 상세함과 신중함이 매우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는 직접 수소문하여 묻고, 순력(巡歷)할 때에는 불러서 보고 위문하였습니다. 또 쌀과 생선을 주어 감탄하는 뜻을 보이기도 하였고, 그 가운데 특출한 경우는 구별하여 장계로 보고하기도 하였는데, 아직껏 회계(回啓)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다른 도에서 장계로 보고한 것 또한 대부분 이와 같을 것이니, 속히 예조와 의정부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무신년(1728, 영조4)의 변고를 당하여 무신으로서 경직(京職)을 맡고 있던 자가 각 고을에 수령으로 나간 지가 지금 3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경직에 있었던 자는 혹은 영장(營將)이 되고 혹은 병사(兵使)나 수사(水使)가 되었는데, 수령으로 나간 자는 아직도 5품의 반열에 있습니다. 적도의 변란 시에는 책임을 맡겼다가 적도가 격파된 뒤에는 내버려 두고 의망하지 않으니, 이와 같고서도 격려할 수 있겠습니까.
무신년에 이수현(李壽賢)과 김윤(金潤)은 모두 적도의 변란과 관련하여 문경(聞慶)과 무장(茂長)에 수령으로 나갔다가 아직껏 조용(調用)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수현은 전 평안 병사 이재항(李載恒)의 아들이고, 김윤은 전 충청 병사 김중려(金重呂)의 아들이니, 그렇기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신 또한 들은 적이 있는데, 이는 세(勢)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는 세가 없는 무신이면 혹 이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으니,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각별히 두 전조를 신칙하여 적도의 변란 시에 차출되었던 망단자(望單子)를 살펴보아 빈자리가 나는 대로 조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구임(久任)이기 때문일 것이나, 아뢴 말이 맞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들이 지난번 차대에서 김초서(金楚瑞)의 일로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김초서의 전후 정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으므로 힘껏 쟁론하지 못한 채 물러 나왔습니다. 그래서 관서(關西)의 장계 가운데 일이 김초서와 관계된 것을 가지고 와 자세히 보았더니, 김초서를 죽게 놔두는 것은 참으로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신들이 이미 그 억울함을 알았는데도 만약 힘껏 쟁론하기를 어렵게 여겨 성상께서 죄 없는 자를 죽였다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한다면 신들의 죄가 어떠하겠습니까. 어제 유신(儒臣)이 경연에 나온 자리에서 김초서를 죽여서는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그로 하여금 성상께 우러러 아뢰게 하고, 또 더불어 말하기를 ‘내가 현재 후원(喉院)의 장(長)으로 있는데, 어찌 눈으로 군부의 지나친 처사를 보고도 죽음으로 쟁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유신이 만일 요청을 허락받지 못한다면 내일 내가 청대(請對)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유신이 물러 나가고 나서 신은 삼가 성상께서 묘당으로 하여금 상께 여쭈어 처리하게 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신은 지극히 흠앙해 마지않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변방의 금법이 엄하지 못함을 깊이 염려하시어 김초서를 죽임으로써 일벌백계의 계책으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변경을 다스리고 원방(遠方)을 진압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신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방의 금법이 엄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변방의 신하를 제대로 뽑지 못한 소치입니다. 만약 변방의 신하를 제대로 뽑아 변방의 일을 맡겼더라면 자연히 금지하게 하였을 터인데, 어찌 변방의 백성들이 법을 어길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옛날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단자(檀子)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고 분자(昐子)에게 고당(高唐)을 지키고 검부(黔夫)에게 서주(徐州)를 지키게 하였더니 초(楚), 조(趙), 연(燕) 세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감히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며, 한(漢)나라 시대에 흉노(匈奴)가 변방을 크게 어지럽혔는데 무제(武帝)가 폐기한 위상(魏尙)을 운중(雲中)에 일으켜 세우자 흉노가 두려워하여 변경에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임자를 얻으면 인근의 적들도 모두 두려워하거늘 더구나 영토 내의 백성들이 어찌 감히 법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경우를 말해 보더라도 고 상신 정태화(鄭太和)가 평안 감사이고 구봉서(具鳳瑞)가 의주 부윤이 되었다가 정태화가 호조 판서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가니 구봉서가 그 대신 평안 감사가 되고 허적(許積)이 의주 부윤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변경의 금법을 가지고 근심한다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변방의 금법이 엄하고 안 엄하고는 단지 변방의 신하를 잘 뽑고 못 뽑고에 달려 있지 김초서를 죽이고 안 죽이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김초서는 법을 어긴 자가 아닙니다. 당초에는 빚을 진 상인(商人)이 저들의 수표(手標)를 받아도 그 죄를 면제해 주었고, 그 뒤에도 여전히 수표에 대해 영(令)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김초서가 부윤에게 첩정(牒呈)을 올렸고, 제사(題辭)를 받은 다음 가서 수표를 받아 온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를 죽인다면 나라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백성에게 신뢰를 받겠습니까. 성상께서 변방의 신하를 잘 뽑지 않고서는 비록 변방의 금법을 엄히 하고자 하더라도 힘을 얻을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만약 의주 부윤을 잘 뽑는다면 변방의 금법은 금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10명의 김초서를 죽인다 한들 변방의 금법이 날로 해이해지는 것만 보게 될 것입니다.
신이 어제 유신이 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김초서가 관서의 부유한 상인일 것이라 의심하였다고 하는데, 전하의 이 말씀은 착오인 듯합니다. 옛날에 맹상군(孟嘗君)이 초(楚)나라를 방문하자 초나라 왕이 그에게 상아(象牙)로 된 평상을 보내 주려고 하였습니다. 등도직(登徒直)이라는 자가 이를 맡아서 보내게 되었는데 가고 싶지 않아 보검(寶劍)을 공손수(公孫戍)에게 뇌물로 주었습니다. 공손수가 들어가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작은 나라들이 모두 재상의 인장(印章)을 바친 것은 군(君)의 의리를 좋아하고, 군의 청렴함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초나라에 이르러 상아로 된 평상을 받으신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무엇으로 군을 대접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맹상군이 그 말을 따라 상아로 된 평상을 받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공손수가 검을 받았음을 알아차리고는 문의 현판에 쓰기를 ‘나 맹상군의 명성을 높여 주고 나의 허물을 막으면서도 개인적으로 외부에서 보배를 얻을 수 있는 자는 빨리 들어와서 간(諫)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공손수가 비록 속이려는 마음을 품었지만 그 말이 조리가 있었기에 맹상군이 그의 속임을 미워하지 않고 그의 말을 가납한 것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은 송(宋)나라의 이름난 현신(賢臣)이었는데, 또한 ‘간언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말해 보자면 임금이 말을 채용하는 도리는 다만 사리에 마땅한지만 탐구하여 처리하면 되는 것이지 행위하는 즈음에 어찌 의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하들의 말이 옳다면 비록 만금(萬金)을 뇌물로 받았더라도 이것 때문에 그 말을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고, 신하들의 말이 옳지 않다면 비록 털끝만큼도 오염되지 않았더라도 또한 이것 때문에 그 말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도리를 준수할 뿐이니, 다른 것은 추구하지 않은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근년에 종군(從軍)하였을 때 처음으로 군문에서 한 적도(賊徒)를 참수하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벌렁거리고 기운이 저상(沮喪)되었었습니다. 그 뒤로 적도를 죽이는 광경을 연이어 보고는 마음속에서 실로 불편하게 여기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죽산(竹山)에 도착해서는 신이 달아나는 적도 한 명을 직접 죽였고, 상에 걸터앉아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서 자리에 임하여 적도를 참수하며 불인지심(不忍之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적도를 죽이는 것을 많이 보아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신년(1728, 영조4)의 역적은 천지간에 용납하기 어려우니, 그 무리를 죄다 죽이는 것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여러 차례 변란을 겪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매우 많았던 탓에 혹시라도 인명을 중시하고 아끼는 생각이 없어지셨을까 염려가 되는데, 이번 김초서의 일도 다시 이와 같으신 것입니까. 인명은 지극히 중하며 죽으면 다시는 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늘을 본받아 인(仁)을 행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금법을 중시한다는 뜻을 가지고 반드시 그를 죽이고자 하나 그 죄가 이미 사죄에 해당하지 않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능히 통일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더 유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초서의 수표가 다른 경우와 다르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우리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저들이 있음만을 아니, 내가 통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버릇이 되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미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의논하게 하였으니 어찌 헤아려 잘 생각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영남은 곧 사대부의 고장으로, 이름난 어진 이와 보필을 훌륭히 한 이가 일대 규모를 이루었습니다. 급제하였는데 조정에서 미처 수용(收用)하기 전에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으면 이를 부끄럽게 여기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풍속이 남아 있습니다. 영남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전관(銓官)이 듣고 보고서 수용하는데, 오지 않는 사람의 경우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만약 인재가 있는데도 초야에서 사라진다면, 실로 성조(聖朝)에서 인재를 아끼는 성대한 뜻이 아닙니다. 각별히 전조를 신칙하여 관안(官案)을 자세히 살펴 가장 오래도록 수용되지 않은 채 아직도 조령을 넘어오지 않는 자를 별도로 의망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별히 신칙하여 아뢴 내용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전록통고(典錄通考)》를 여러 승지가 항상 눈여겨볼 수 있도록 하교하였다. 비록 서계(誓戒)를 받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또한 이 속에 있을 것이다. 향사(享祀)할 때를 맞이하여 일시적으로 훈채(葷菜)를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무에 어렵겠는가. 집사들이 형편없어 서계를 준수하지 않아서 향사가 깨끗하지 않은데, 신명(神明)을 이르게 할 수 있겠는가. 전중어사(殿中御史)는 곧 규찰하고 단속하는 자이다. 훈채를 먹거나 술을 마시는 등의 일은 적발하기 어렵지 않을 터이니,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각별히 규찰하게 하라. 그리고 나라에서 이목(耳目)의 역할을 둔 것이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해서이겠는가. 또한 의당 듣는 대로 논죄(論罪)해야 한다. 대관(大官)과 소관(小官)을 막론하고 각별히 경계하고 신칙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고려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허공(許珙)이 항상 종 한 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죽은 사람의 뼈를 덮어 주고 시신을 묻어 주기를 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왕자(王者)의 도리를 말하자면 문왕(文王)의 다스림은 은혜가 해골에까지 미쳤다. 전조(前朝)의 능침이 있는 곳에서 땔나무를 베거나 장사(葬事)를 지내는 폐단이 없지 않은지 나는 진실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화의군(和義君)의 무덤으로 말하자면 이미 친왕자(親王子)의 분묘(墳墓)이고 또 자손이 있는데도 지키지를 못하여 평민들이 몰래 매장하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전조의 능침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 역대 시조(始祖)의 능과 고려 왕조 네 능의 경계 내에서 땔나무를 베거나 장사를 지내는 등의 일을 앞으로는 수령을 엄하게 신칙하여 각별히 금단하게 하고, 도신 및 도사가 순력(巡歷)하며 자세히 살필 때에 적간하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제때에 혼인하는 것은 곧 왕정(王政) 가운데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처녀로서 혹은 나이가 20여 세에 이르고 혹은 30여 세에 이르렀는데도 아직 시집 못 간 자가 매우 많아 그 원망이 화기(和氣)를 손상하기에 충분합니다. 《경국대전》과 《전록통고》에 실려 있는 것만 가지고 보더라도 나라에서 이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이 보통을 넘습니다. 그러니 각별히 서울과 지방을 신칙하여 나이가 많은 처자를 자세히 알아낸 연후에 관아에서 그 혼수(婚需)를 도와주며, 또 처자들을 권면하여 제때에 혼인하도록 각별히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왕(文王)의 정사에는 반드시 환과고독(鰥寡孤獨)을 먼저 하였는데, 이와 같은 것은 그래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진달한 말이 참으로 옳다. 안에서는 경조(京兆)의 부관(部官)이, 외방에서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는 임무를 맡은 자처럼, 시기가 지났는데도 혼인하지 못한 자를 수소문하여 호조와 선혜청에 보고하여 각별히 돌보아 도와주도록 하라. 밖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또한 혼수를 준비해 주어 시기를 넘기는 우환이 없게 하라. 그런데 만약 초기나 장계로 보고한다면 너무 번거로울 듯하니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 및 각 도에서 교체하여 온 도신이 연석에서 진달하여 내가 알도록 하라고 각별히 신칙하라. 그리고 비록 친척이 있다 하더라도 가난하여 염습해 장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또한 많이 있다.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순(堯舜)도 병통으로 여기셨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바, 이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왕은 5개월이 되어서야 장사 지내는 것이 바로 정해진 제도이지만 이 무리들은 빈궁한 까닭에 제도를 벗어나 혹 7, 8개월이 되도록 장사를 못 지내니 참으로 불쌍하다. 또한 관아에서 돌보아 도와주어 제때에 매장하게 하라. 옛적에 범순인(范純仁)은 남이 장사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보리 실은 배를 주었다. 보통 사람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왕자(王者)가 한 나라의 재부(財富)를 가지고 보리 실은 배의 은혜를 본받지 못하겠는가. 밖으로는 감사와 수령, 안으로는 경조의 해당 부(部) 및 해당 조(曹)와 해당 청(廳) 등에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이 《경국대전》을 보니 ‘절수(折受)’ 두 글자가 있었습니다. 이때는 태어나는 아이가 많지 않고 토지도 개척되지 않았기에 각처의 절수한 곳에 혹은 논을 만들고 혹은 밭을 만들어 세(稅)를 거두어도 백성들에게 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인구는 이미 많고 토지는 전부 개간되어 한 뼘의 토지에도 각각 주인이 있습니다. 비록 근래에 각 궁(宮)과 옹주방(翁主房)의 절수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처의 절수한 곳에서 낭패를 당하였다는 소식이 날마다 이르니,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는 실로 빈 땅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대개 듣건대 절수할 때에 도장(導掌) 무리들이 엄중한 관문(關文)을 가지고 각 도(道)로 내려가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강점하거나 혹은 송사 중인 전지를 사들여 부당하게 차지할 계획을 꾸미는바, 백성들이 직접 문기(文記)를 가지고 관아에서 쟁송(爭訟)을 하지만 도장에게 패소하는 경우가 열에 여덟아홉이라고 합니다. 백성의 원망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해지고 일의 체모가 이 때문에 더욱 이지러지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숙묘조(肅廟朝) 시절에 절수의 폐단이 있자 고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각 군문과 각 아문에 소속된 둔전을 절수로 나누어 주되 백성의 전답은 침탈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니, 남구만의 말은 참으로 식견이 있었습니다. 각처의 어장(漁場)과 어살(漁箭)을 호조에 분부하여 희망하는 대로 납입하게 한다면, 도장의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킬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 대개 공주와 옹주는 저택이 크고 사치스러우며 노비가 두루 퍼져 있어 번화하면서도 부귀하니 마치 여러 세대에 걸쳐 보유할 것 같지만, 매번 당대 이후의 상황을 보면 곧 유사(儒士)의 집이 되어 버립니다. 지어진 건물이 시기를 받는 탓에 오랫동안 향유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집값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호조에서 떼어 주는 것이 은자(銀子) 1000냥인데, 어찌 굳이 이 가격을 다 들여 집을 산단 말입니까. 절반으로는 집을 사고 나머지로 전토(田土)를 사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공주나 옹주를 키울 적에도 어찌 굳이 비단옷을 입히고 주옥(珠玉)으로 치장을 한단 말입니까. 나이가 어린데도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복을 기르는 도리가 아닙니다. 비록 명주로 옷을 해 입더라도 검소한 덕이 진실로 손상되는 것이 아니며, 비단과 주옥의 값으로 전토를 사 모아 두는 것은 또한 재물을 절약하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힘들게 성취한 것은 반드시 오래도록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만약 그리하지 않고서 무단히 백성들의 전지를 널리 취하여 자신의 물건으로 삼는다면, 틀림없이 원망이 모여들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상서롭고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비록 성주(星州)의 쌍계사(雙溪寺)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옹주방의 절수 지역에 포함되어 원당(願堂)이 되었습니다. 성주에서 진상하는 부채와 유둔(油芚)은 모두 여기서 나오기에 신이 장계로 보고하여 방색(防塞)하고자 하였습니다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장계로 보고하였다가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는 성덕에 누만 끼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절 하나를 옹주방에 소속시켜 주고자 하는데 도신 된 자가 곧바로 방색하는 것은 또한 잗다랗게 하는 데 가깝기에, 고령(高靈) 수령에게 적간하도록 한 다음 이어 측량하여 올려보내게 할 즈음에 고령 수령에게 물어보니 쌍계사 외에는 모두 자갈밭이어서 경작할 만한 땅이 한 조각도 없다고 하고, 또 도장에게 물어보니 그의 말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를 가지고 추론해 보자면, 이것은 궁가(宮家)에서 외방 무뢰배들의 말을 잘못 믿고서 이리한 것입니다. 옹주방의 원당에 대한 설은 외조(外朝)에서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만, 만약 단지 원당을 위해 절수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어찌 굳이 천 리 밖의 사찰로 하겠습니까. 신이 지금 아뢰는 것은 실로 전하 자손의 복을 기르는 것을 위해 하는 말이지 방색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무릇 절수와 관계되는 일을 어찌 굳이 도장의 무리들로 하여금 외방에 가서 폐단을 일으키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각 아문과 각 도신으로 하여금 구획하여 주게 한다면, 누군들 받들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쓰이지 않는 빈 토지가 없는 상태인 줄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옛날에는 대군, 왕자, 공주, 옹주의 토지가 매우 많았다. 내가 사저(私邸)에 있을 적에 금평위궁(錦平尉宮)이 궁핍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내 사저의 한 해 수입보다 나았다. 옛적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나의 아들이 어찌 선제(先帝)의 아들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찌 생각이 없었겠는가마는 참으로 경의 말과 같이 소득은 하나도 없으면서 한갓 백성들의 원망만 초래하였다. 지난번에 이종성(李宗城)이 절수를 허락하지 말 것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르고 한 소리였다. 효묘조(孝廟朝)에서 독대하였을 때의 일을 항상 흠앙하였기에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 및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에게 이미 나의 뜻을 유시하였다.”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모든 일은 속히 완료하는 것이 중요한지라 이처럼 우러러 아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거조를 계하한 뒤에 그날 입시한 승지와 사관이 비로소 숙직을 마치고 나올 수 있도록 신칙하였는데, 근래 그다지 준수되지 않고 있다. 거조를 계하하고서 3일의 한도를 넘지 말아야 《승정원일기》가 소루해지는 폐단이 없을 수 있다. 오늘 경부터 시작하여 각별히 신칙하고 면려해서 거조를 계하한 뒤에 비로소 숙직을 마치고 나올 수 있도록 다시 거듭 분명히 말해 주라.”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지금 이미 밤이 되어 거조를 써 들일 수가 없고, 게다가 이미 생기(省記)에 채워 넣었으니, 내일부터 입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을 인순고식(因循姑息)하게 하면 반드시 폐단이 있게 된다. 별생기(別省記)로 입직하라.”
하였다. - 탑전 하교(榻前下敎)를 내었다. -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